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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동경에 사는 그녀를 찾아가다

by 아프로뒷태 2012. 4. 29.

 

다시 새롭게 일어나야 한다. 화가 섞인 침과 구둣발에 짓밟힌 상처의 흔적을 가졌다 해도 툭툭 털고 일어서야 한다.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나의 이성은 지난날의 회의와 현재에 대한 의문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의지와 야심으로 다시 작동되어야 한다. 터질 듯한 행복감이 사라졌다고 하여도 내가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간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과 양심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선택했다면 이런 상실감으로 인해 더는 아파하지 말아야 한다. 그토록 바랐던 나로 다시 되돌아올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 일을 상실감이라고 불러선 안 된다. 그것은 상실이 아니었다.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된 일이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그가 나를 상실한 것이고 그의 자유의지로 선택된 일이었다. 그러므로 상실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좀더 정신적인 삶에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결국 상실은 고통스런 일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삶의 과정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의 상실이 환멸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새로운 사랑을 위한 자유와 기쁨, 열린 가능성을 품게 해주는 일이라는 것을. 고로 그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여행의 시작이 그곳이 될 줄은 몰랐다. 딱히 그곳을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곳을 동경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곳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가 있다는 이유뿐이었다.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문자를 잃어버린 나는 더 이상 쓰지 못했다. 그럴듯한 글을 쓰고 싶었지만 맘대로 되지 않았다. 대신 말로 풀어서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상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홀로 살아가는 서울에서 진심이 담긴 대화를 하지 못했다. 당장 눈앞에 주어진 우리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는 것은 나를 구속하는 일이었다. 나는 눈을 감기전이나 눈을 뜰 무렵, 늘 옛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모군이 있었어. 그때 밥씨가 있었어. 그때 돌양이 있었지. 내 기억 속에서 마주한 그들은 실재에서는 모두 내 곁을 떠나고 없었다. 그러나 오직 그녀만이 그대로 있었다. 3년 전 모습이 떠올랐다. 내게 그녀는 3년 전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나는 단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동경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캐리어 속은 가벼웠다. 짐이라고 해봐야 고작 운동화 두 짝뿐이었다. 10CM의 구두를 신고 절름발이처럼 또각또각 공항으로 걸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았다. 인천공항의 밤공기는 염분을 품은 바람처럼 습습했다. 서울은 아직 춥다고 했다. 하지만 인천공항은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릴 만큼 후덥지근했다. 어쩌면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는 일에 더 예민해져서 그런지도 몰랐다. 로밍을 준비하면서 부디 동경에서 핸드폰을 다시 켰을 때 그녀와 연락이 닿길 바랐다.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밤의 활주로는 운치가 있었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빛나는 노란 불빛은 반가웠다. 담요를 덮고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시속 250km이상 속도로 3000m가 넘는 활주로를 달렸다. 이륙속도에 이르면 비행기는 멈출 수 없는 길을 떠난다. 승무원은 고객이 안전벨트를 매었는지, 짐칸의 문은 잘 잠겼는지 확인한 뒤,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었다. 안정적으로 날 수 있는 순항고도는 1만m 정도라고 했다. 그곳에 닿기 위해 비행기는 있는 힘껏 질주했다.

 

상공에서 내려다본 인천의 불빛은 반딧불 떼 같았다. 초여름 물안개가 자욱한 호수위에 반딧불 떼가 날고 있는 가운데로 온몸을 내던지는 기분이었다. 안전벨트 착용을 알리는 등이 꺼지고 기내 서비스기 시작되었다. 프런트를 맨 승무원들이 바쁘게 식사를 준비했다. 기내의 뒤편에서 음식냄새가 서서히 밀려왔다. 커피를 내리는지 아메리카노 향도 났다. 커피향을 맡고 나서야 기내가 낯설지 않았다. 방안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불온하여 잠들지 못한 밤에는 방에서 핸드드립 한 커피를 마셨다. 승무원이 식사를 내밀었다.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뭐라도 먹어워야 할 것 같아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오렌지 머핀과 야채를 곁들인 햄 샐러드, 생선튀김과 장어튀김으로 만든 가츠동을 목구멍 속으로 꾸역꾸역 채웠다. 허전함을 채우는 일은 동경행 비행기 안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안전벨트를 착용을 알리는 등이 켜졌다. 하네다 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비행기는 서서히 고도를 낮추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불빛에 출렁이는 바다 위였다. 바다위에는 고기잡이를 나선 어선 대여섯 대가 둥둥 떠 있었다. 어둑한 밤바다에서 빛나는 백열전구는 왠지 힘이 실려 있었다. 남들보다 새벽을 더 빨리 시작하는 이들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그제야 비로소 동경에 도착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이었다. 일본에 가는 것은. 생애 처음 찾아온 일본이었다. 공항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그녀가 어디에 사는지 몰랐다. 다만 공항에 도착하고 그녀에게 연락했을 때, 그녀가 나에게 찾아와 주길 바랐다. 더는 그녀와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그녀는 메시지를 받았을까?

 

메시지를 보냈다. 발신자는 나, 수신자는 그녀.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그녀의 답장을 기다렸다. 사람들 사이에서 나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올 그녀를. 나는 그 사이 입국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아야 했다. 하네다 공항의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내가 내민 여권을 펼쳐들고 사진속의 나와 실제의 나를 대조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말이 필요없다. 눈빛으로 마음은 충분히 전해진다.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의 나라에 그녀를 찾으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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