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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슬픔을 넘어 분노를 넘어…그는 희망의 푯대가 되었다

by 아프로뒷태 2012. 1. 16.

근이 오빠.잘 지내오?

근이 오빠에게 소식을 전하지 못해 미안하오.

하지만 이렇게 인터넷 지면으로 근이 오빠의 글을 읽을 수 있어 좋소.

나도 얼마전, 김근태 고문의 부음소식을 듣고 그런 생각을 했다오.

명동성당으로 발길을 옮기려고 몇 번을 망설였다오.

하지만 나는 아직 세상밖으로 나갈 용기가 없었나 보오.

나는 아직도 그들의 눈빛을 미워하고 있다오.

 

근이오빠의 시가 그리워지는 저녁이오.

 

 

 

 

슬픔을 넘어 분노를 넘어…그는 희망의 푯대가 되었다
[한겨레] 최원형 기자

등록 : 20120103 20:41 | 수정 : 20120103 22:45

 

김근 시인이 본 ‘민주주의자 김근태’ 영결식

 

 

» 3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유가족과 조문객들이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영정을 앞세우고 장지로 들어서고 있다. 김 고문은 민주화운동을 함께 한 문익환 목사, 이소선씨, 조영래 변호사 등과 이곳에서 영면하게 됐다. 남양주/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조금 늦게 도착한 나는 서울 명동성당 본당 뒤 입구 쪽에 서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영결미사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제 추모식도 그랬지만 오늘(3일) 아침 영결 미사에도 추모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영하 7도의 추운 아침이었다. 거리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명동성당으로 가는 길이 더디고 더뎠다. 그러나 거기 모인 1000여명은 날씨 따위 그런 무거운 공기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슬픔과 동시에 슬픔을 넘어선 좀더 단단한 무언가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함세웅 신부는 미사 강론에서 “그가 고문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잊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생전에 김 고문에게 ‘더 싸우라’고 요구했다”는 것을 반성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시대 폭압적인 정권 밑에서 처절한 고문을 당했던 분들을 위한 치유센터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것이 국가의 의무이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함세웅 신부는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은 우리 모두의 “연대적 삶”을 강조했다.

함세웅 신부는 그가 앓고 있다는 걸 잊고 더 싸우라고 요구했다며 반성한다 했다. 영결식에서는 슬픔과 울분·분노도 넘어선 희망이 가슴에서 자라나는 느낌이었다. 운구차는 멀어져갔지만 희망 하나씩 나눠가진 사람들은 2012년을 점령하고 99%의 희망을 열어젖힐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미사의 마침 노래로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함께 불렀다. 김근태 고문이 생전에 즐겨 부르던 노래란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두 구절쯤 따라 부르다 나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제 추모제에서 누군가 김근태 고문의 삶은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라고 그는 노래했을 것이다. 대중가요 하나가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올 때 그가 지닌 삶의 무게와 깊이 때문에 고결한 노래로 탈바꿈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고결한 노래를 함께 불렀다. 부르다 목이 메었다.

나는 그를 모른다. 그의 시대도 잘 알지 못한다. 선배들로부터 그 시대가 얼마나 엄혹한 시대였는지를 다만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가 어떻게 몸부림치며 아파하며 자신의 시대와 맞서 싸웠는지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의 품성이 어떠했을지 민주주의를 향한 그의 의지가 얼마나 결연했는지 들었을 뿐이다. 그를 처음 실제로 본 것은 한참 뒤, 모 문학지 송년회 자리에서였다. 문인들 앞에서 수줍어하며 축사를 하는 그의 얼굴은 정치인답지 않게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그의 얼굴에서 또 그의 말에서 어떤 권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그의 삶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그때 짐작했을 뿐이다.

내 짐작은 맞았다. 나중에 선배로부터 들으니, 그는 그 어떤 권위적인 것도 쉽게 무시하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측근을 챙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또 그 고통스러웠던 고문의 기억을 훈장처럼 드러내 이용하지도 않았다. 그가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불법자금 수수를 시인하는 양심선언을 하고 ‘아름다운 꼴찌’를 했을 때, 문인들이 십시일반 돈을 걷어 그에게 술을 사줬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의 양심을 믿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결식은 거룩했다. 함께 참석한 김형수 시인이 ‘거룩’이라는 말을 꺼내자, 그 말은 이 영결식에 무척이나 적확한 말처럼 느껴졌다. 거룩한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의 장엄함이 가슴으로 밀려들어왔다. 이상하게도 그의 영결식에서는 울분이나 분노가 느껴지지 않았다. 슬픔과 울분과 분노도 넘어선 어떤 희망 하나가 가슴에서 자라나는 느낌이었다. 어제 추모식도 그랬다. 슬픔과 함께 그것은 한바탕 희망의 잔치 같았다. 그의 죽음이 만든 희망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불 켜지는 느낌이었다. 영결식에 와 있던 사람들 표정 속의 단단한 그 무엇이 희망이었음을 나는 확신한다.

영결식 추도사에서 지선 스님은 김근태를 초월성의 존재로 규정하면서, “초월은 세상으로부터의 회피가 아니라 민족의 모순, 민중의 모순을 정면으로 마주 서고 극복해버린 자리”라고 말했다. 이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희망 역시 그런 것은 아닌가, 그 삶도 죽음도 초월한 자가 우리에게 무수히 보내고 있는 메시지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문에 그의 마지막은 거룩하고 거룩했다.

 





노제는 청계천 전태일 동상 앞에서 진행되었다. 그의 영정이 전태일 동상 앞에 세워지자, 전태일 열사의 삶과 김근태 선생의 삶이 내 삶으로 나의 시대로 고스란히 전이되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나의 시대, 나의 삶이 그의 시대가 공급해준 자양분으로 커나가고 있음을 새삼 알겠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희생 덕분에 나는 조금이나마 민주주의를 경험했다는 사실이었다. 너무도 당연해서 경험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 그 경험은 그러나 쉽게 되돌려질 수 없는 강력한 경험이었다. 후배 세대들의 민주주의의 경험은 누가 뭐래도 어느 권력자가 무수한 폭력으로 무너뜨리려고 해도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경험으로 커나갈 것이다.

김근태 선생은 생전에 마지막으로 블로그에 유언 같은 글을 남겼다. “최선을 다해 참여하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다.” 글의 제목은 “2012년을 점령하라”였다. 김근태 선생은 죽어 스스로 희망의 푯대가 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장례식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의 촛불 하나씩을 켜놓을 수 있었을까. 운구차는 멀어져갔지만, 오늘 가슴에 켜진 이 희망 하나를 안고 나는 2012년으로 발걸음을 뗀다.

오늘 여기 모였던 가슴과 가슴은 다시 모이고 모일 것이다. 여기 오지 않았지만 김근태라는 희망 하나씩을 나눠 가진 많은 사람들은 또 모이고 모일 것이다. 2012년을 점령하고 모순으로 얼룩진 한국을 점령하고 아직도 타파하지 못한 분단의 모순을 점령하고 마침내는 99%의 거대한 희망을 열어젖힐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믿음을 안고 나는 비로소 2012년으로 간다. 지금 그 거룩한 죽음을 넘어 자꾸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성큼성큼 나는 간다.

한국작가회의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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