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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여기의 세계에서 거기의 세계로 가게 해주오.

by 아프로뒷태 2011. 12. 26.

 

"땀이 많이 나는 것 같아."

 

그는 나에게 보란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손을 잡아보라고 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했다.

 

 "정말 땀이 많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인정한다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살며시 손을 빼려고 손을 움직여보았다. 그런데 손이 빠지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잡고 볼까?"

 

그는 스크린을 보며 말했다.  

 

 '이건 뭘까?'

 

나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손에서 나의 손을 빼려는데 쉽게 빠지지 않았다. 땀이 흥건한 그의 손에서 나의 작은 손이 버둥거렸다. 좀처럼 쉽게 빠져지지 않았다. 감정의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의 손에서 정중하게 빠져나올 수 있을지 고민했다. 제법 그럴듯하게 우정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다. 그 사이, 그는 나의 손을 꽉 잡았다.

 

 "장난이죠?"

 

나는 그의 눈을 보았다. 그는 웃었다.

 

 "그래, 장난 치지마. 느끼하게 왜그래?"

 

그는 손에서 힘을 살며시 뺐다. 나는 그가 손에서 힘을 빼자마자, 손을 내뺐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톰 크루즈가 두바이의 고층 빌딩에서 스카이 다이빙을 할 때나  BMW 자동차를 타고 돌진할 때, 와! 세상에! 이런! 헉! 과잉된 감정으로 똘똘 뭉친 감탄사를 내뱉으며 상영시간을 흘러 보냈다. 그때까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손을 잡는 일쯤이야, 뭐, 아무 것도 아니니깐.

 

 "왜? 추워?"  

 "아니요. 아파서."

 "왜그래?"

 "아니, 수술한 곳이 아파서. 괜찮아. 피가 통하지 않아 그런 거야. 이러다 멎어요."

 

다행이었다. 이럴 때 아파주어서. 제법 어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프다는 핑개로 더 이상 그가 짖궂게 굴지 않게 주의를 줄 수 있었다. 어둠속에서 내가 본 것이 영화였는지, 그의 마음이었는지 헷갈렸다. 솔직히 말해, 영화만 보았고 그의 마음은 못 보았다고 단정짓고 싶었다. 우정으로 지켜온 관계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이런 일은 마치 수줍은 대학생들, 선후배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순간적인 감정이니깐.그렇다고 쳐도, 그는 너무 이성과의 관계에 농숙했고 나는 그런 관계에 지쳐있었다.

 

 

상영관에서 나오면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밥 먹을까요?"

 

 "나에게 그 이야기를 소설로 쓰라고 했잖아요. 다시 소설을 쓸까 생각중이에요. 고민해봤는데, 이 이야기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강할지 잘 모르겠어요. 아마, 관심도 주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거에요. 요즘 사람들은 관계를 거래처럼 하니깐. 그것도 물건이 왔다가는 거래. 있잖아요.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진심으로 배려하는 관계가 얼마나 될 것 같아요? 사랑도 거래가 되어버린 시대라 순진하게 사랑 하나만 믿고 무방비로 있다가는 큰 코 다치는 세상이에요. 양심도 없죠. 어떻게 그럴수 있냐구요? 맞아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만난 여자들 중, 상처를 가진 여자들이 꽤 많았어요. 예쁘고 다부진 여자일수록 상처가 단단하더군요. 그 여자들의 마지막 모습이 아른거려요. 그건 남이야기가 아니었어요. 난 말이에요. 요즘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요. 한동안 대중이 무서워서 글를 쓸 수 없었어요. 그들은 영악해! 그런데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청춘을 골방과 어둑진 곳에서 보냈어요. 글을 쓰고 합평을 하고 술을 마시고, 다시 글을 쓰고 합평을 하고 술을 마시고, 그렇게 세계가 넓어진다고 믿는 사람들끼리 청춘을 보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과 떨어져 사는 지금이 가장 마음이 편안해요.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마음은 변했지만 내 마음에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어요. 그럼에도 글은 써야한다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가슴 아파요. 시간이 흘러도 가슴 아픈 지금,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써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 이야기를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아서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어요. 아주 잘 쓰지는 못할 것 같지만 이제는 어설프게 소화해서 똥이라도 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나처럼 그렇고 그런 여자들이 많을 지도 모를테니깐. 언젠가 제대로 된 이야기가 된다면, 티저 영상을 찍어줘요."

 

그는 오늘 밤 나와 함께 있고 싶다고 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아직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글을 써야하는데 가야할 길이 멀었다. 

 

 "나는 아직 그 일을 잊지 못했어요. 여자로서의 나는, 아직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지독한 배신에 곪아 문드러진 상태에요. 나 스스로 정화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이해하죠? 우리들은 이런 일에 익숙해요. 곧 아무렇지 않게 될거에요. 우리의 관계가 우정에서 이성으로 그리고 이별로 가지 않기를 원해요."

 

그에게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깊은 사정까지는 아니지만, 아직 나는 아니라고.

 

 '아직 할 일이 남았어요. 끝나지 않았다구요. 쓸 이야기가 남았어요.'

 

'블로그 속에서 누구는 글을 쓰고 누구는 댓글을 달고 누구는 실재의 공간으로 나와 만남을 갖는다. 타자와의 관계를 위해 실재계와 상상계가 혼재하는 블로그에서 나는 사실만을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사실을 고집했던 이유는 내가 현실에서 본 인간과 블로그에서 본 인간의 이중성이 아주 역겹고 숭악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실을 아는 사람만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천사의 탈을 쓰고 신분과 명분을 내세워 거짓을 진실처럼 말하는 이의 말을 진실로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를 천사라고 칭송했다. 과거의 추악함을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버리듯 버릴 수 있을까. 잘려나간 꼬리를 붙잡고 있은지 삼년이 흘렀다. 그 사이, 그는 블로그라는 곳에서 새롭게 자신을 알리고 명분을 쌓고 덕망을 쌓는 사람의 얼굴로 살고 있었다. 그 얼굴이 천사라니. 나는 아직 용서도 하지 않았는데, 그 얼굴이 활개를 치고 다니다니... . 나는 혼란스러웠다. 여기의 세계가 진실일까? 저기의 세계가 진실일까? 언제부터인가 현실이 잔인했고 환상이 편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잦아졌다. 잔인한 밤들이 연속이 되었다. 루이스 캐럴은 토끼구멍으로 들어가 저기의 세계를 진실처럼 말했는데..... 거기의 세계와 여기의 세계, 어디가 진실일까? 나는 이 이야기를 잘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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