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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이성적 논리는 비이성적 비논리를 낳는다.

by 아프로뒷태 2011. 4. 27.

 

부조리극의 대가 이오네스코의 '수업'

[프레시안TV] 소통의 부재 - 죽음에 이르는 병

부조리 연극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외젠 이오네스코 원작의 '수업'이 앵콜 공연된다. '수업'은 1951년 프랑스 '포쉬 극장'에서 초연된 이래 부조리극의 표본으로 평가 받아왔다.

연극은 지식을 갈망하는 한 여학생이 교수를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종합박사가 되고자 한다는 그녀는 교수로부터 수학, 언어학으로 이어지는 수업을 받게 된다. 수업을 강요하는 교수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학생의 대화는 온통 왜곡과 소통불능 투성이다. 결국 흥분한 교수는 학생을 살해하는데...


이오네스코의 통찰은 현재에도 역시 유효하다. 연출을 맡은 OTR극단의 박홍진씨는 이 작품을 통해 소통의 부재로 인한 고통과 그 폭력성 뿐 아니라 우리 사회, 특히 성폭력과 교육 현실에서의 소통불능으로 인한 문제를 강조하여 연출했다고 말한다.

" '수업'은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반드시 존재하는 부조리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현대에도 계속해서 유효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겠죠."

이오네스코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언어의 부조리함이다. 우리 의식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지배하고 있는 이 언어를 통해서 가해지는 폭력은 성폭력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오네스코는 또한 이를 통해 국가, 성폭력 등 부조리한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도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최준호 교수는 이 작품에 대해 "순환되는 일상의 끔찍한 일들에 대해 의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대단히 독특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한다. 혹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웃음 뒤에 찾아오는 소름 돋친 일상의 발견"이다.

요즘 점점 자취를 감춰가는 정통 부조리극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작가 : 외젠 이오네스코(Eugene Ionesco 1909-1994)

현대 부조리극의 선구자인 외젠 이오네스코는 1909년 루마니아의 슬라티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생의 죽음, 부모의 불화, 어려워진 가정 형편으로 불안한 유년기를 보냈다. 1938년 프랑스로 건너간 후 전쟁의 불안 속에서 첫 번째 희곡 <대머리 여가수>를 완성, 무대에 올렸다. 뒤이어 <수업>과 <의자>가 초연되었고 같은 해 희곡집을 출간하였다. <의자>의 재공연을 계기로 주목받는 극작가로 떠올랐으며 1960년 <코뿔소>의 대성공으로 현대 연극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작가로 인정받아 세계 각국을 돌며 강연
을 하는 한편, 30여 편이 넘는 희곡과 시나리오, 무용 대본을 발표하였다.

 

 

 

 

극단노을이 제23회 정기공연으로 선택한 작가는 외젠느 이오네스코이다.

외젠트 이오네스코는 부조리극의 작가로 유명하다.

부조리는 보이지 않는 논리이다.

 

부조리극이란? 195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극 및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연극(→ 전위예술)이다. 1940년대의 사르트르나 카뮈도 세계의 부조리와 그에 맞서는 자유로운 행위자로서의 인간을 묘사했으나 1950년대의 부조리극 극작가들은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초현실주의 등의 수법을 빌어 부조리를 재현하고 그 구체적 이미지를 부여하고자 했다.

 

카뮈는 자신의 글 〈시지프의 신화 The Myth of Sisyphus〉(1942)에서 인간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부조리하며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용어는 부조리 작품들을 쓴 극작가들과 그들 작품의 공연을 가리키는 말로 다소 느슨하게 쓰이기도 한다. 특정한 형태의 부조리극 운동은 없었지만, 새뮤얼 베케트, 외젠 이오네스코, 장 주네, 아르튀르 아다모프, 해럴드 핀터 등 다양한 극작가들을 비롯하여 그밖에 몇몇 작가들은 하나의 공통된 입장을 공유하고 있었다. 즉, 인간이 어떤 목적을 발견하고 자신의 운명을 제어하려는 몸부림이 헛될 뿐이라는 비관적인 입장을 함께하고 있었다. 이 견해에서 볼 때 인간은 절망과 혼동, 불안을 느끼고 있는 버려진 존재이다.
이 극들의 성격을 결정지었던 사상들이 극의 구조를 결정하고 있다. 따라서 부조리극 작가들은 전통극의 논리적 구성의 거의 대부분을 폐기하여, 부조리극에서는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오던 류의 극적 행위를 찾아보기 힘들다. 즉 부조리극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아무리 혼신을 다해 연기를 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분주한 연기를 통해 강조되는 점은 그들의 실존을 변화시키는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뿐이다.

 

1953년 처음 무대에 올려진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En Attendant Godot〉에는 줄거리가 배제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뜨내기로 분장하고 나오는 2명의 정처 없는 남자가 날마다 누군가를 기다리면서도 그들이 누구인가 또는 무언가를 기다리는데, 기다리는 것이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 아울러 기다리는 것이 과연 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신도 없는 상태로 기다림을 계속한다. 이를 통해서 이 극은 처음도 끝도 없는 순환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부조리극의 언어는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으며, 진부한 상투어와 말장난, 반복어, 문맥과는 무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1950년에 초연된 이오네스코의 극 〈대머리 여가수 La Cantatrice Chauve〉의 등장인물들은 자리에 앉아 누구나 아는 뻔한 얘기를 반복해서 말하는데, 나중에는 그 소리가 무의미하게 들린다. 이를 통해서 이 작품은 언어로 하는 의사소통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한 행동과 말의 조합 때문에 이 극들이 표면적으로는 정신 못 차릴 정도로 희극적일 때가 있지만, 작품의 기저에는 형이상학적인 비탄이 깔려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코메디아 델라르테, 희가극(보드빌), 뮤직 홀 등에서 나온 희극적 전통의 영향과 무언극 및 곡예와 같은 무대 연기술이 결합되어 반영되어 있음을 본다. 동시에 부조리극에는 초현실주의자들과 실존주의자, 표현주의 유파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나타난 사상의 영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조리극은 애초에 연극의 관례를 무시해서 충격을 주고 20세기 중반의 관심사를 적절하게 표현하여 인기가 있었지만,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다소 쇠퇴하게 된다. 즉 부조리극이 한 걸음 더 나아간 실험을 시도하도록 새로운 전위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데 기여했지만 그들의 형식적인 시도 중 일부는 연극의 본류로 흡수되었다. 대표적인 부조리극 작가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예술에서 새로운 방향을 탐색해오고 있으며, 그밖의 작가들은 동일한 성향의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대학로, 공연은 시작되었다. 티켓팅을 하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캄캄한 극장 입구에서 8시의 공연을 보기 위해 8시 5분에 도착한 나는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속에 사람은 없고 소리만 들려왔다. 소극장으로 연결되는 길목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단단하게 잠긴 문에서 배우들이 고래고래 소리치는 대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나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었다.

 

연극 <수업>은 부조리극으로 극중에서 인물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으며, 진부한 상투어와 말장난, 반복어, 문맥과는 무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수업>은 비폭력적인 듯하면서도 폭력적이다. 교수와 학생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은 수업뿐이다. 그러나 수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부조리극의 상황들이 낱낱이 공개된다.

 

교수와 학생간에 이루어지는 수업은 지극히 이성적이다. 교수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

하지만 교수는 자신이 가진 이성과 논리를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에게 점점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더불어 비이성적인 성적 욕망을 분출하기 시작한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교수가 어떻게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교수로 변신하는지, 어떻게 폭력과 야만, 그리고 광기를 노출하는지 연극은 점층을 더해간다.

 

결국 학생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교수집에서는 살인사건이 마흔번째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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