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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위를 쳐다보지도 말고 아래를 돌아보지도 마라. 오직 앞만 봐라.

by 아프로뒷태 2011. 4. 18.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했더니...'

'좋은 영화의 시네마 톡에서 관객과 소통하고 있으셨네.'

 

 

 

그녀는 산을 오르고 있었다. 관악산의 진입로를 걸으며 그녀는 마지막으로 산을 올랐던 날이 언제였던가를 떠올렸다.

 

 

작년 가을에 이어 지난 달까지, 그녀는 북한산을 오르면서 처음으로 산행의 공포를 느꼈다. 그녀는 일행과 정상에 올라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서울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었다. 서울은 작은 점처럼 보였고, 그 점은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바둑돌 같았다.

 

그녀는 서울을 내려다보는 일이 시시해졌다. 그녀는 정상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거대한 무언가와 마주했다. 북한산의 정상에 올랐다고 생각했지만, 정상은 아니었다. 정상에는 또다른 정상이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바위산이었다. 그녀는 바위산에 오르려고 시도했다. 그녀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는 다리가 후덜거려서 땅바닥에 덜컥 주저 앉았다. 그녀는 누구나 가슴에 하나쯤은 들고 다니는 용기주머니가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줄어드는 기분을 느꼈다.

 

'아, 이 기분 뭘까?'

 

그녀는 손을 가슴으로 가져가 보았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추락을 알리는 신호인가?'

 

그녀는 덜컥 겁이 났다.

'나는 이대로 무너지고 있는 것인가.'

 

그녀는 문득 겁없이 모든 것에 달려들었던 지난 날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그 후, 그녀는 더 이상 산을 오르는 일에 자신이 없었다.

 

-

 

관악산의 등산로를 걷는 그녀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등산로의 곳곳에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었다. 진달래는 잎보다 꽃을 먼저 피워, 인내보다 단오함으로 꽃을 피우는 꽃이었다. 그녀는 진달래가 참 맛나게 피었다, 라고 생각했다. 하얀 밀가루 반죽에 꽃잎 따 올려놓고 손바닥만한 전을 부쳐먹고 싶었다. 그녀는 피씩 웃었다. 그녀는 꽃을 보고 먹는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나도 이젠 늙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길의 중반쯤에서 안내표지판과 마주했다. 왼쪽으로는 깔딱고개, 오른쪽으로는 평탄한 길을 알리는 표시였다. 등산을 하다보면, 매번 가던 길이 아닌 낯선 길을 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녀는 평단한 길과 깔딱고개사이에서 망설임없이 갈딱고개로 향했다.

 

어느 유명 소설가가 그녀에게 말했다.

"무슨 길이 앞에 놓여있다면 그 길을 가겠습니까? 저라면 그 길을 의심할 거에요."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난후, 내내 떠올리고 있었다. 단지 유명 소설가가 한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무엇인가 자극적인 것이 필요했던 찰라였다. 그녀는 그 무엇의 강렬한 힘에 이끌려 길이 아닌 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그녀는 길이 아닌 곳에서 깎아지른 듯 높이 솟아오른 벽과 마주했다. 돌과 돌 사이의 홈에 발을 딛어야만 오를 수 있는 곳이었다. 미끄러지다간 그대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봤다. 경사가 꽤 높았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한다고 생각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모든 것은 무너진다고. 지금까지 수련했던 자신감도, 앞으로 나아갈 용기도, 거센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처럼 쓸려가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가자. 위를 쳐다보지도 말고, 아래를 돌아보지도 말자. 오직 앞만 보고 가자.

 

그녀는 한 발씩 딛을 때마다 가슴이 떨려왔다. 이대로 가도 괜찮은지 몇 번이고 자신에게 되물었다. 그 사이 그녀는 이미 정상에 올라와 있었다. 정상에 올랐다는 생각이 와닿지 않았다. 그녀는 바위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처음엔 다리가 미세하게 떨렸고 몸이 휘청했다. 하지만 다리를 빳빳하게 지탱하면서 후덜거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었다. 정상에서 가장 먼저 얼굴이 떠오른 사람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핸드폰에는 누군가의 연락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핸드폰에는 누군가의 부재중 전화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그녀는 재발신을 눌렀다.

 

"감독님, 오랫만입니다."

 

그녀는 그 때를 생각했다. 영화를 만들면서 창작자로서 작품에 대해 서로 논했던 그 때, 그 시절에 만남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렇게 그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감독이 안부를 물어왔을 때, 그녀는 잘 지낸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굳이 감독의 근황에 대해 묻지 않았다. 준비된 자의 시작이 훌륭하면 흐트러짐없이 잘 나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독은 준비된 자였고, 그리하여 시작과 함께 뜨거운 조명을 받았다. 지금역시 흐트러짐없이 잘 나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녀는 감독의 세세한 근황을 묻지 않았다.

 

그저 언제 만나 커피 한 잔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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