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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소극장 산울림 개관 26주년 기념 공연-< 내가 까마귀였을 때>

by 아프로뒷태 2011. 4. 3.

 

 

 

   아주 오랫만에 소극장으로 들어갔다.

암전이 되는 상황을 맞고 보니, 유년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공연에서 암전이 자주 이루어지면 그 공연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해!"

강의실에서 누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희곡집을 들고 리딩 플레이를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였고 충만했던 시절이었다.

극장에서 공연을 보는 일은 더 없이 기쁜 일이었다.

배고플 때, 빵 한조각을 씹되, 입안에 고인 침과 두루 섞어가며 삼키는 기분이랄까?

 

   나에게 있어 연극은 서사를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었으며, 영화의 길로 가는 과정에서 만난 교과서였다. 물론 가장 기본적인 교과서는 소설이었다.

 

   중앙대 연극학과를 복수전공하면서 어느 한 분야에 머무르지 않았다. 문학에서 연극 그리고 영화까지 두루 영역을 넓혀가며 공부했던 시절이었다. 그 날들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외톨이었지만 공부하고 싶은 수업을 듣고 창작을 했던 순간은 잊지 못할 것이며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 덕에 희곡도 썼고, 시나리오도 썼다. 희곡은 창작집과 리딩 플레이로 그쳤고, 시나리오는 텍스트적 결과물로써 대학원에 제출하는 것에 그쳤다. 온전히 내 것이 되어 대중과 만나는 일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쓰고자 한다면 지금 이 순간, 아무 것도 아니라 해도 문제 될 것이 없을 것이다.

 

   이 작업의 과정에서 만났던 중앙대 연극학과 선후배들, 영화 감독들과 배우들, 스텝들과의 인연은 소중하게 생각한다. 지금 이 시간에 어디에선가 그들은 공연을 하거나 영화를 찍고 있을 것이다.

 

   연극 한 편 보고 나서, 오만 가지 생각을 하였다. 그만큼 어느 순간동안 자신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고 있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며 쓰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울림 소극장에서 함께 연극을 보았던 인연들이 떠오른다.

지금의 그들은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봄날에 찾아간 산울림 소극장, 장소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 장소에서  함께 했던 인물들은 어디론가 떠나가고 없었다. 나는 어두운 공연장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비록 혼자였지만 쓸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모두 떠나기 위해 만났던 사람들이었으니깐. 아쉬워하지 않는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나간 세월 속에서 나와 함께 연극을 보았던 이들을 떠올렸다. '저 자리에선 누구와 앉았지'. '이 자리에선 누구와 무엇을 했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기다림이었다.

 

 

 

 

 

 

《내가 까마귀였을 때》

 

등장인물

 

아버지: 고인배

“...누구보다도 잘 키우고 싶었다. 나한테는 그거 하나뿐이었어.”

 

어머니: 손봉숙

“...우린 널 기다렸어...니가 우릴 다시 살게 했다.”

 

개인적으로 손봉숙 씨의 공연을 자주 보게 된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막상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에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이번에도 역시 그녀와 마주 하고 보니, 별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나: 서은경

“...우리가 정말 그 애를 기다렸을까... 우린 아직 그 애를 만나지 못했어요.

 

남자: 안성형

“...이놈의 세상은 갈수록 비겁하다니까 싸움은 지들이 먼저 걸고. 열심히 싸우는 사람만 병신 만들어.”

 

여자: 이혜원

“... 한 번이라도 애 입장에서 생각해봐요. 얼마나 창피하고 외롭겠어?”

 

아이: 윤정욱

“아무것도 필요없어. 그냥 가게 해줘. 날 좀 보내줘요.”

 

형: 윤영성

“...지금까지 널 기다리고 있었어. 너무 멀리가면, 네가 형이라고 생각 안 할까봐.”

 

작가: 고연옥

연출: 임영웅

기획: 오증자

미술: 박동우

 

 

사람들은 나를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배가 고프면 인정사정 없이 아무거나 먹는다고 해서 까마귀라 부르지.

 

 

    『내가 까마귀 어렸을 때』는 가족 이야기이다. 연극을 보면서 떠오른 도서가 있다. 『가족은 야만인이다』이거나 『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와 같은 가족 공동체의 제도가 개인을 억압하는 것에 대항하는 도서들이다.

 

    흔히, 가족은 사회를 이루는 가장 작은 집단이라고 한다. 또한 가족은 사회의 작은 집단 이전에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단과의 관계를 맺는 곳이다. 가족은 개인과 개인의 연대를 맺어주는 역할을 한다. 개인은 가족을 통해 사회성을 익히게 된다. 그러다보니, 가족의 성향이나 환경에 따라 개인의 인성이 영향을 받기도 한다. 

 

    가족은 작은 권력 집단이다. 전통적 가부장제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식은 주종관계로써 권력의 수직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전통적 가족관계에서는 수평적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더욱 한국의 가족관에서는 수평적 관계를 찾아보기 힘들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책임지고, 어머니는 가장과 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희생한다. 자식은 부모에게 양육과 보호를 받은 대가로 노년이 된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된다.

   가족 안에서 개인은 개별성을 지니는 동시에 가족 공동체라는 집단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서로가 서로를 책임져야 하는 가족 관계는 정신적 치유의 장소이자,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

 

   가족은 개별성을 지닌 동시에 집단성을 지닌 곳이다. 한국의 가족은 전통적 가부장제와 모성이데올로기로 인해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 그리고 자식의 역할이 분명하게 주어져 있다. 그것은 엄격한 법률이 아닌 암묵적으로 개인에게 주어진다. 비록 가족의 역할은 개인에게 암묵적으로 주어지지만, 그 어떤 엄격한 법보다도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가족 안에서 각자의 맡은 역할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거나 거부하면 도덕적 비난을 받게 된다. 그래서 가족 안에서 개인은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자유로운 듯 하면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가족은 개인에게 암묵적 구속을 가한다. 개인은 그것을 알면서도 사회적 비난이나 인륜에 어긋난다는 비난 때문에 거부하지 못하고 맡은 역할을 잘 이행해야 한다. 그리하여 가족 안에서 개인은 완벽한 가족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으로 인해 인성이 물질화된 이 시대에 가족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내가 까마귀 어렸을 때』연극에서 관객이 느껴야 하는 것은 가족의 소중함이 아니다. 가족이 개인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사회로부터 위안을 얻게 해준다는 점은 누구나 아는 바이다. 그 점을 깨닫고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기자는 것이 본 연극의 목적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본 연극을 보고 있으면, 여기저기에서 눈물을 닦거나 콧물을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족이라는 소재로 대중에게 공감가는 스토리와 방식으로 다가가기 위해 상투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했다는 점은 본 극의 한계이다. 하지만 그러한 접근법을 통해 본 연극은 마지막까지 주제성을 놓치지 않는다. 가족주의 옹호라는 신파를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흔들어보자는 의도가 숨어 있다.

 

   『내가 까마귀 어렸을 때』가 관객에게 최종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가족의 소중함보다 가족이라는 집단 안에서 가족 구성원이 주어진 역할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암묵적 구속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왼쪽 자리에는 육십 넘은 남성이 앉아 있었고, 오른쪽 자리에는 육십 넘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조명이 밝아졌을 무렵, 오른쪽 자리에 앉은 여성이 안경을 벗고 눈물을 손으로 훔치는 모습과 마주했다. 그 여성에게 나는 가방의 티슈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삼십대에서 육십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가족제도 안에서 어디까지 희생하고 어디까지 자유를 찾아야 하는지 고민하며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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