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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향기

박완서 작가 타계, 한국여성문학의 별이 지다.

by 아프로뒷태 2011. 1. 22.

 

 

              2010년 1월 22일 토요일, 한국 여성 문학의 별이 졌다.

 

              알람이 울렸다. 머리맡에 둔 알람을 껐다.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잠이 들었다. 일어나야 한다고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한 시간이나 흐른 뒤였다. 그제서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눈을 떴다. 잠깐이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몇 분이 한 시간이나 지나갔다. 책을 읽었다면, 몇 십장을 읽었을 시간이다. 이렇듯 시간은 주어졌을 때,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가치는 달라진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깨우침인데도, 하루하루 그 시간을 소중히 다루는 일에는 쉽지 않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먼지를 털었다. 방안의 따스한 기온과 나의 향기를 창밖으로 흘러보냈다. 바깥세상의 차가운 공기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고자 했다. 창가에 둔 봉지 꾸러미를 보았다. 사과였다. 이틀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집앞에서 1.5톤 트럭을 세워두고 사과를 파는 남자에게 산 사과였다. 사과가 먹고 싶어 산 것은 아니었다. 사과를 파는 남자가 누군가의 아버지이거나, 남편이거나 자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과를 샀던 것이었다. 

 

              사과는 매일 아침마다 하나씩 깎아 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침은 분주했다. 사과 하나 깎아 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였다. 창밖에 둔 사과를 하나 꺼내 톡톡 두드려보았다. 사과가 얼어 있었다. 사과를 한 꾸러미 사놓고 먹지 못했던 사 년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엄마에게 미안했다.

 

            오늘은 누구에게 미안해야 할까?

 

             아침에 박완서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최근 한 교수가 박완서 선생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그만큼 박완서 선생의 문학적 재능과 노력과 가치에 대해 교수는 무엇인가 발견했고 학생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려 했던 것 같았다.

 

             그래,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삼 년전, 박완서 선생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를 펼치고 한자 한자 나무에 새기듯 읽었다. 그땐 혼자였고, 책이 유일한 낙이었다. 아니 글을 쓰는 일이 유일한 기쁨이었다. 그 무엇도 책과 글을 대신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시간이었다.

 

             집에서 글을 쓰는 일을 잠시 접고, 영화사로 외출을 떠났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영화사에서 집으로 돌아왔던 시기라 더욱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때의 시간이 더 뚜렷하게 기억났다.  

 

 

 

              박완서 별세

 

              별들은 전혀 뜻하지 않게 졌다. 故박경리 선생의 별세를 맞을 때도 그랬다. 뜻하지 않는 죽음은 단순히 이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언의 강력한 힘을 잃은 듯 마음에 강렬한 파동을 맞는다. 빈자리가 없음으로해서 허기가 느껴진다. 존재는 꼭 행동을 보여주고 드러내야만이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존재의 힘은 발휘되기 마련이다.

 

              그, 별이 2011년 1월 22일 토요일 새벽에

              졌다.

 

 

              박완서 선생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를 펼쳐든다. 그땐 지금처럼 아프지 않았다. 그땐 지금처럼 어둡지 않았다. 그땐....그땐 지하에 있어도 밝고 좋았다. 지하의 빛이 따뜻했다. 지하에 있어도 겨울이 따뜻했다.

             

 

 

 

 시어머니의 노리개

1896년에 태어난 작가의 시어머니의 노리개이다. 그 분이 돌을 맞았을 때에 염랑에 채워 준 거라고 한다.

표주박 모양의 노리개는 장편소설『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에 등장한다. 이 노리개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역할을 하는 모티브가 되었다.

아이들이 안방이라 부르던 그 방을 돌아나오려는데 뭔가가 발끝에 걸리면서 문지방쪽으로 데구르르 굴러갔다. 주워 올려보니 새까맣게 변색한 은(銀)노리개였다. 은행알만한 크기의 표주박모양을 한 그 은노리개는 비록 본바탕은 변색했지만 칠보로 된 청홍의 줄무늬는 아직도 영롱했다.

그 은노리개는 본디 목이의 것이었다. 여기서 그것을 만날 줄이야. 목이는 가슴을 울렁이며 그 표주박 모양의 노리개를 손아귀에 꼭 쥐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게 온몸에 퍼지는 것 같았다. 가족, 돌잔치, 때때옷, 엄마의 젖가슴, 아빠의 수염, 아이들의 웃음소리, 어른들의 꾸중, 형제간의 우애……, 그것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떠오르던 이런 행복감의 추체험(追體驗)이 칠보빛깔처럼 영롱하게 되살아났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여덟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의 소재가 된 남편의 모자

여덟 개나 되는 모자는 다 그가 죽음을 앞둔 마지막 일년 동안에 사모은 것이다. 모자가 유행하는 시대도 아닌데, 일년 동안에 모자를 여덟 개씩이나 사다니, 누가 들으면 그가 몸치장 따위에 취미가 각별한 멋쟁이 신사였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전혀 아니다.

(중략)

크게 성공하거나 성취한건 없어도 생전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이 사랑받았다는 증거 같아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의 유품을 공평하게 노느매기를 했다. 그러나 모자는 다 내가 가졌다. 그건 누가 달라지도 않았지만 달라고 해도 안 주었을 것이다.

『여덟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미망』작가 메모

 

 

 

 

 

 

 

개성사람 박완서 - 삶을 증언하는 이야기꾼의 기억

 

원로 문인 박완서 선생의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으며 작가가 뛰놀았던 그 시골을 동경하고 ‘싱아’에 대해서 찾아보았던 기억이 있다. 또 작가가 낯선 서울에서 생활했던 현저동 산동네 골목길을 떠올리며 그 골목길에 개성 사람 특유의 남에게 쉽게 굴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꼿꼿이 그 곳의 주인이 되었을 작가를 떠올려보기도 했었다.

원로 문인 박완서 선생  

현대문학 중 소설을 전공한 연구자에게 원로 문인 박완서 선생 구술채록 사업은 설렘과 동시에 부담감을 배로 느껴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중압감의 이유는 여러 가지 있었지만 그 중 가장 큰 어려움은 선생의 일생 중 상당 부분이 이미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개성에서 조부모님과 보냈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시작한 서울에서의 생활, 전쟁 중에 겪어야 했던 오빠의 죽음 등등 선생의 일생 중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일들은 이미 작품으로 쓰여 져 베스트셀러 목록에 여럿 들어 있는 상황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는 시작 전부터 연구자를 힘들게 했다. 선생과 예비면담을 하면서 이러한 고민은 연구자만의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박완서 선생도 작가가 작품으로 이야기 하면 되지 굳이 구술채록이 필요할까 걱정스럽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구술채록 사업 본래 취지가 구술자의 업적이나 인생의 굵직한 성과를 재확인하는 과정이 아닌, 사소해 보일지 모르는 일조차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그러한 구체적인 자료발굴에 있음을 상기했을 때 박완서 선생 구술 채록은 거대 담론에 소멸된 개인의 구체적 삶을 복원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박완서 선생은 연구자의 우려와 달리 연구자의 질문에 최대한 구체적이고 솔직하게 답변해 주셨으며, 잘못 알려진 사실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바로 잡아주셨다.  

 

예비 면담 때 처음 뵌 선생은 80세 가까운 연세가 실감나지 않는 수줍은 소녀의 모습이셨다. 말씀도 재미있고 실감나게 묘사해 주셔서 마치 현장에 서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구리시 아치울 마을에 자리 잡고 있는 선생의 자택은 아차산 자락에 숲이 우거지고 작은 개울이 바라다 보이는 아늑한 곳이었다. 고 박경리 선생이 주신 돈으로 사서 심으셨다는 나무와 꽃들이 아기자기하게 피어있고, 정원은 잘 다듬어져 있었다. 선생은 마음이 어지러울 땐 일부러 몸을 힘들게 한다는 말씀을 하시며 마당의 풀을 뽑고 돌본다고 하셨다.

 

첫 번째 면담 때는 출생부터 유년기를 보냈던 개성에서의 생활과 학창시절 추억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출생연월일이 1931년 10월 20일로 되어있는데 사실은 1931년 9월 15일로 호적이 잘못 되어 있노라고 이번 기회에 정정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박완서 선생과 면담 때

중간에 호적을 바로 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모든 서류를 다 정리해야한다는 번거로움 때문에 그냥 지내왔노라고 하셨다. 유년기를 보낸 개성에 대한 기억은 일찍 아버지를 여읜 손녀에 대한 할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시절로 기억되고 있었다. 또한 문학적 원체험으로써 그리움의 공간이기도 했다.

 

어이없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에게 짐 지워진 가장으로서 역할로 이어지고 있었다. 일찍 아버지를 잃은 자식들을 위한 어머니의 고군분투는 선생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교육열 덕분에 시작 된 서울에서의 생활과 여학교 시절 담임선생이었던 박노갑 선생, 소설가 한말숙 선생을 비롯한 친구들에 대한 추억은 모범생이었을 것 같은 기대와 달리 능동적이고 문학소녀로서의 즐거운 추억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해방정국의 혼란상과 사회주의 활동을 했던 오빠에 대한 기억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피해자로서의 어려움을 엿볼 수 있었다.

 

박완서 선생은 전쟁으로 인한 혼란상은 물론 해방 후 사회주의 활동을 하던 오빠가 강제로 북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후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 했던 일과 전쟁 중 오빠가 어이없이 입은 총상 때문에 어머니와 겪었던 고통도 들려주셨다. 말씀을 하시는 동안 표정과 음성은 그 당시의 고통과 안타까움을 전해지는 듯했다. 오빠의 영향으로 선생 자신도 사회주의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나 오빠의 황폐화 된 인생과 개인의 삶이 훼손되는 그들의 이념에 실망했었다는 말씀도 해 주셨다. 이 때 선생은 자신의 행동을 미화 하려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고 아주 구체적으로 기억해 내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주셨다. 또한 전쟁기에 서울에 남아서 겪었던 경험담은 전쟁에 관한 또 다른 일면을 알 수 있었던 기회였다. 전장이 아닌 후방에서 일어났던 전쟁의 잔인함은 개인 일상을 파괴하고 무력화 시켰다.

 

소설 「나목」, 동화집「달걀은 달걀로 갚으렴」  

이후 미군 PX에 취직이 되어 근무했던 이야기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고, 또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그림을 그리던 박수근 화백을 계기로 그곳에서의 생활과 박수근 화백에 대해 증언하고 싶은 욕망은 글쓰기로 이어졌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박수근 화백에 대한 기억은 당시 「여성동아」현상공모 당선 소설 「나목」으로 탄생되었으며, 당시로는 꽤 큰 상금 50만원을 받았을 때 기쁨은 자신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해 준 일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논픽션 현상 공모에 투고하고 싶었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하자 박수근 화백에 대해서 알고 있던 사실이 너무 적어서 논픽션으로 쓰기 어려워 픽션으로 썼다고 하셨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내다가 40세에 문단에 데뷔한 후 1년 동안 심사위원 이었던 박영준 선생께 글을 보여드리고 원고 청탁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통해서 선생의 소박하지만 적극적인 성품도 엿볼 수 있었다.

 

박완서 선생에 대한 문학적 평가에 대한 반응도 예상한 것보다 열려 있었으며,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보다 휴머니스트로 불리기를 기대하셨다. 선생과의 면담을 통해 연구자도 여성을 우위에 두고 있다기보다 인간에 대한 따듯한 시선과 태도에 더 가깝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의 서문을 고 박경리 선생이 써 주시면서 시작된 인연은 박완서 선생이 아들을 잃었을 때도 각별히 챙겨주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무엇이든지 나눠 주시려 했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젊은 작가들의 기발함과 문장력에 대해서도 아낌없이 칭찬하셨는데 문인들과의 교류도 특정 장르에 국한 되지 않고 폭 넓게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연령에 구애받지도 않았다.

 

박완서 선생은 소설가로서의 활동 외에 다양한 대외 활동을 하셨는데, 그 중 유니세프 친선대사로서 세계 각국을 다니며 펼치고 있는 봉사활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단체가 아닌 공공의 이익을 도모하는 단체에 기꺼이 동참하고 힘을 더하려고 애쓰시는 선생의 소박한 진심이야말로 고귀한 사랑의 실천이 아닐까 한다. 박완서 선생은 그들과 고통을 나누고 함께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인간으로서 의무라고 생각하셨다. 선생은 담담하게 본인의 생각과 활동의 의미를 말씀하는 가운데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셨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과의 구술 채록 과정은 한편의 대하소설을 집필하는 것처럼 흥미진진한 여정이었다. 인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를 콤플렉스로 받아들이면 장애가 되지만 그것을 극복했을 때 콤플렉스는 삶의 원동력이 된다는 말씀이 잊혀 지지 않는다. 오래도록 귀한 삶의 체험들을 증언해 주시길 기대한다.문장끝  

 

 

 

 

                   그녀는 이제 어디로 갔을까?


 

 

                아른거린다. 기사를 보며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지난 추억들이 아른거린다.

 

소설가 박완서(80)씨가 22일 오전 6시17분 담낭암 투병 중 별세했다. 고인은 지난해 가을 담낭암 진단을 받고 수술 후 치료를 해왔으나 최근 병세가 악화돼 세상을 떠났다.

1931년 개성의 외곽 지역인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0년 6· 25가 발발하면서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중퇴했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현상공모에 ’나목(裸木)’이 당선되면서 문인으로서는 다소 늦은 나이인 40세에 소설가로 등단했다. 전쟁과 분단 등 한국현대사의 아픔을 겪으며 청춘을 보낸 고인은 작가의 길로 들어선 이후 자신의 깊은 상처를 되새기며 독자들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글을 써왔다. "전쟁의 상처로 작가가 됐다"고 고백한 그는 평생 시대의 아픔과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그렸다. 사람과 자연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드러내며, 때로는 자본주의가 만든 황폐한 인간성을 비판하기도 했다.

 

'영원한 현역 작가'로 불리며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 '살아있는 날의 시작',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친절한 복희씨' 등 장편을 남겼다. 소설집으로는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배반의 여름', '엄마의 말뚝',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그 남자네 집', '잃어버린 여행가방', '세가지 소원' 등이 있다.  산문집으로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님이여 그 숲을 떠나지 마오', '호미' 등이 있으며 지난해 7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펴내기도 했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보관문화훈장, 만해문학상, 인촌상, 황순원문학상, 호암예술상 등을 받았다.  1993년부터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했으며, 2004년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됐다.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던 그는 2006년 문화예술계 인물로는 처음으로 서울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선생과 차 한잔 나누면, 삶이 참 행복하게 와닿을 것만 같았는데......

           선생과 밥 한끼 같이 하면, 문학을 하는 일이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 같았는데......

           환하게 웃는 선생의 사진과 마주하며 마음의 차를 마신다.

           선생이 저 먼길, 춥고 쓸쓸하게 떠나시지 않게, 따뜻한 차 한잔을 대접하고 싶다.

 

 

 

 

 

 

           모진 고통과 수난에도 소녀처럼 웃을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선생에겐 문학이 있었다.

 

 

“내 경험으로 문학은 우리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위안이 되고 힘이 돼 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아주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도 활자만 보면 위안을 얻곤 했죠. 내 문학도 남에게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계간 문예지 ’문학의문학’ 봄호가 올해로 문단 데뷔 40주년을 맞은 ’영원한 현역’ 박완서(79)씨와 문학평론가 박혜경씨의 특집 대담을 실었다.


1970년 ’나목’으로 등단한 박씨는 당시 심사위원이 “후속작이 나올까”라고 걱정할 때 하나도 걱정이 안됐다고 돌아봤다. 6.25 때 “빨갱이로 몰렸다가 반동으로 몰렸다가 그러면서 부대낄 때 얼마나 이상할 일을 다 겪었겠느냐”며 힘든 시기를 겪고 남다른 경험을 하면서 “이걸 잊지 말고 기억해야겠다, 언젠가는 이걸 쓰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박씨는 “난 악인을 그리는 데 능숙하질 못하다”며 “혈육에 대한 사랑, 그때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결국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됐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런 이유로 박씨는 “6.25가 없었어도 내가 글을 썼을까”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며 대학에 가고 6.25가 안 났으면 선생님이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나이 사십이 다 돼 등단한다는 게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한 일이어서 늦게 문단에 나온 게 창피하기도 했다며 “그때는 활자가 왜 그렇게 무서웠던지, 내 글이 활자가 된다고 생각하니 겁이 났다”고 회고했다. 개성이 고향인 박씨는 “난 지금도 내 근본이 농경민 같다”며 “개성 사람의 독특한 근면, 정결 그런 것이 참 좋았다”고 강조했다.

“고향에서 혼자 귀염을 받다 서울로” 온 박씨는 떨어져 나왔다는 결핍감이 자신의 문학을 가능케 한 힘이 됐느냐는 문학 평론가 박씨의 말에 “그게 상상력을 키워 준 게 아닌가 싶다”고 답했다. 박씨는 또 “날더러 페미니즘 작가라는 사람도 있던데 페미니즘 이론은 읽어 봐도 잘 모른다”며 “그냥 살면서 얻은 느낌으로 쓴다”고 말했다. 여성성과 남성성은 동등한 것이고 서로를 보완하고 조화를 이룸으로써 행복을 추구한다는 설명이다.

주로 새벽에 글을 많이 쓴다는 박씨는 자신의 집필 스타일에 대해 “머릿속에서 궁굴리는 시간은 무척 오래 걸리지만, 그렇게 다 해놓고 나면 쉽게 써 진다”고 소개했다.

박씨는 문단의 후배들과 “단절되는 건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도 40대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너무 젊은 작가들은 뜻을 잘 몰라서,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더라구요. 젊은 작가들도 알아듣게 쓰면 고맙죠.”

          

 

 

           선생은 고통을 문학으로 늘 승화했다.

           철저하게 외롭고, 철저하게 고통스러운 인생을 문학이라는 거울로 비추었다.

           더욱이 제 배에서 낳은 하나뿐인 아들이 생을 마감했을 때, 흔들리지 않고 그 슬픔을 글로 승화시켜......

           문학성 인정을 받았다.          

 

    

박완서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전부터 대가는 되고 싶지 않아도 그냥 현역작가로 살다가 죽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고 말했다. 데뷔 40년을 맞아 구상 중인 작품을 묻는 질문에 “구상은 하고 있어도 아직 쓰거나, 시작한 건 없다”고 말문을 연 박 작가는 “힘이 많이 달리는 것을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그녀는 “생전에 단편은 꾸준히 쓰고 싶다”며 “은퇴한 작가가 아니라 현역 작가로 남고 싶은데 그러자면 단편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박완서 작가는 분단문학인 ‘엄마의 말뚝’ 연작이 대표작으로 꼽은 이유를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아 잔잔하게 엄마의 일대기, 남편을 잃고 자식을 위해 희생적으로 산 엄마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작품을 쓰려던 무렵 어머니가 눈에서 미끄러지면서 크게 다쳤는데 대수술을 마취에서 깨어나 병실 사람을 다 인민군이라 생각하고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다. 그녀는 “씩씩하게 살아가시던 엄마였는데, 그렇게 깊은 상처가 있었다는 건 처음 알았다”며 “연작을 다 쓰기 전에 엄마가 돌아가셔서 3편은 엄마가 돌아가시는 걸로 마무리했고, 최초의 구상과도 달라졌다”고 했다.

박완서 작가 스스로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건은 자식과 관련된 순간이었다. 박 작가는 “1988년 당시 26세였던 아들을 잃은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이라며 “너무나 큰 상처로 남아 1년 정도 붓을 꺾었었다”고 했다. 박완서는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문학”이라며 “글을 집필하면서 조금씩 위안을 삼았다”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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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저하게 인간은 외로운 존재이다. 외롭지 않기 위해 사람을 만난다. 사람을 통해 외로움과 고통을 극복한다. 하지만 선생에겐 그 외로움을 풀어가는 친구가 문학이었고 작가로서의 글쓰기였다.

 

             철저하게 외로운 자는 알 것이다. 결코 행복한 일만은 아니다. 인생은 무수히 많은 고뇌의 반복된 날들로 연속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글을 쓴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터득한 것이다.

 

             고뇌를 웃음고 해학으로 풀어내는 방법을 말이다.

 

 

             『친절한 복희씨』는 고뇌와 슬픔을 극복한 인간의 웃음과 해학이다. 노년을 맞이하는 여성으로서의 권태와 새치로움 그리고 수다스러운 노년 여성의 감칠맛 나는 감정표현이 넘치는 작품이다. 단편집의 깊이가 뛰어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년의 무력함이란 전혀 없다. 그 무력함을 극복해보려는 새치로움이랄까?

 

 

 

 

 

 

 

 

               한국문학은 선생의 문학적 글쓰기에 대해 얼마나 꼼꼼한 기록과 연구를 해두었을까? 한국에서 소중한 작가가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영웅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인간의 진정성이 사라져 가는 이 시대에, 값진 보석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고 제대로 기록이나 해 두었을까? 물론 작가는 군더더기 말보다 책으로써 할 말을 남기기 마련이다. 남기는 것은 책이지만, 역사는 작가의 작품뿐이 아니라, 작가의 삶, 작가론 등 전문적 자산을 확보해야 한다.

 

               무수히 쏟아지는 출판물속에서,

               무수히 거론되는 정보속에서,

          

               여기,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려고 노력한 어느 별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소녀처럼 웃는다는 말을 늘 들었던 박완서 선생,

               선생의 인생을 돌이켜본다면 왜 그녀가 그렇게 웃을 수밖에 없는가를.

               그 웃음의 진정한 의미를 알 것이다.

             

 

 

 

 

                故박경리 선생이 타계하셨을 때, 박완서 선생은 두 손 걷어 앞장을 나서셨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언론에 비춰진 선생의 어두운 모습을 보았다. 선생은 웃음을 잃었다. 아니 그 후로 웃음의 힘을 점점 잃어갔다.

 

 

 

               

               한국문학의 별이 연이어 졌다.

               故박경리 선생이 그곳에서 박완서 선생을 활짝 웃으며 마주  나와 계실까?

               두 선생은 밥상을 두고 따끈한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겠지.

               따뜻한 밥에 풀반찬을 먹으며 "그래도 삶은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며 웃으시겠지.

 

 

 

                

 

                  이제 선생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니......

                  이제 선생의 과거를 통해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야한다니......

 

                  꿈인 것 같다.

 

                  사람들에게 문학은 무엇인가.

                  새삼, 그 의미를 되짚어보게 된다.

                  이제야 비로소, 별이 지고 보니,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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