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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향기

지금 우리시대에 필요한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by 아프로뒷태 2011. 1. 9.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추락』을 기억하는가? 여학생 성희롱이라는 죄명으로 한순간 대학교수라는 지위를 박탈당한 주인공, 그에게 찾아온 불행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딸은 강간을 당하고 임신을 한다. 하지만 딸은 아이를 지우지 않고 당당하게 키우겠다고 한다. 남아프리카의 식민역사를 이해한다면 딸이 그들 원주민의 아이를 지우지 않고 낳겠다는 것에 어느 정도 이해가 갈 것이다. 이 거대한 장편서사가 단숨에 읽힌 책이 『추락』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존 쿳시를 찾는다. 윤리적인 글쓰기가 필요한 시점에서 그의 글은 나를 호소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분명 그의 글은 어지러운 이 사회와 세상에 호소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한다.

 

 

 

 

 

      이 소설이 자기 고백적 내러티브로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치안판사인 내가 서술하는 내용이 야만인들을 일종의 해결적으로 제시하여 제국의 모순과 역설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제국의 일원으로서 봉사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존쿳시의 소설은 제국주의자와 원주민, 가해자와 피해자,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 흑과 백 의 이분법에 의존하지 않고 체제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인물을 내세워 체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안으로부터 폭로하고 거기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부각시킨다. 존쿳시는 섣불리 피식민주의자를 대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끼어들 수 있는 허위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존 쿳시가 왜 이런 소설쓰기를 했는가하면 그 답은 소설의 주인공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면서 자멸에 가까운 고백을 하거나 자신의 고뇌를 투영한다. 쿳시는 인간은 정의나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글쓰기가 윤리적일 수 밖에 없음을 설명해준다.

 

 

 

 

 

존 쿳시는 참 멋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주 매력적인 작가이다.

 

 

 

 

이 소설의 첫문장을 놓치지 말자.

소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그런 걸 본 적이 없다"

 

 

 

 

 

도대체 무엇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인가. 인간이 인간에게 행해선 안 될 일들을 보았다는 것인가.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소설은 치밀하게 인간의 만행을 보여준다.

 

야만인을 심문하는 죨 대령에게 치안판사인 나는 묻는다.

"당신은 사람이 진실을 얘기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압니까?"

"특정한 말투가 있습니다. 사람이 진실을 얘기할 때는 특정한 말투를 사용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훈련과 경험을 통해서 그런 말투를 알고 있습니다."

"진실을 얘기하는 말투라고요! 당신은 일상적인 대화에서 그런 말투를 가려낼 수 있나요? 당신은 내가 진실을 얘기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나요?"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 중 가장 사적인 순간이다. 그는 손을 약간 저으며 이를 물리친다."

 

"아닙니다. 당신은 나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특별한 상황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진실을 찾기 위해서 물리적인 힘을 행사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처음에는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물리적인 힘이 가해지면 더 거짓말을 합니다. 거기에서 압력이 더 가해지면 변화가 생깁니다. 그러다가 물리적인 힘이 더 가해지면 그때서야 진실을 얘기합니다. 그것이 진실을 알아내는 방법입니다."

 

고통은 진실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의심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죨 대령과의 대화에서 얻은 것이다.

야만인들은 고문을 당한다. 그들이 고문당한 모습은 비참하다. 소녀가 아버지 앞에서 고문을 당하고, 아버지가 소녀 앞에서 고문을 당한다. 바로 야만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하지만 야만인은 그곳의 원주민이 아니라, 문명인이라 자부하는 죨 대령이나 그들 군대이다.

흰 수염에는 피가 엉켜 있다. 입술은 짓이겨진 상태에서 말려져 있고 이는 부러져 있다. 한 쪽 눈은 뒤집혀 있고, 다른 쪽 눈은 피로 범벅이 되어 아예 구멍이 돼 있다.

 

과연 진실이란 무엇인가. 죨 대령에게 고문을 당하는 야만인들이 말해야 하는 진실이란 정말 무엇인가? 책을 읽는 내내 진실이란 무엇인가? 헛웃음이 절로 났다.

"내 말 잘 들어라. 너는 그분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 그분이 너한테서 원하는 건 그것뿐이다. 네가 진실을 얘기하고 있다는 걸 그분이 확신하게 되면, 너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그분에게 얘기해야 한다. 너는 그분의 질문에 진실하게 대답해야 한다. 고통스럽겠지만 낙담하지는 말아라."

 

지방의 치안판사인 나는 말년에 진실의 문제에 휘말린다.

 

나는 이런 일에 얽혀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는 한가로운 변방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책임 있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이다. 나는 교구세와 세금을 거둬들이고 공동경작지를 관리하며, 주둔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주고 여기에 있는 하급 관리들을 감독하며. 교역을 감시하고 1주일에 두 번씩 법정업무를 주재한다.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며, 먹고 자고 만족해한다. 내가 죽으면, 신문에 석 줄 정도의 기사는 실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사는 것 이상의 것을 바란 적이 없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야만인들 사이에 불안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들이 수도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안전한 길을 여행하던 장사꾼들이 야만인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약탈을 당했다고 했다. 가축의 도난이 빈번해졌고, 그 수법도 더 대담해졌다고 했다. 통계청 관리들이 행방불명되었다가 얕은 무덤에 매장된 상태로 발견되었다고도 했다. 순시를 하는 지방 치안판사에게 총격이 가해졌다고도 했다. 국경 순찰대와의 충돌도 있었다고 했다. 야만인 부족들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틀림없이 일어날 전쟁에 대비해서, 제국이 사전에 예방책을 강구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런데 나 자신은 이처럼 불안한 징후에 대해서 아무것도 본 게 없었다. 나는 경험을 통해, 한 세대에 한 번씩은 꼭, 야만인들에 대한 히스테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변방에 사는 여자치고, 침대밑에서 야만인의 시커먼 손이 불쑥 나와서 발목을 잡는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이 없다. 또한 남자치고, 야만인들이 자기 집에 쳐들어와 술에 취해 흥청거리며 법석을 떨고, 접시를 깨뜨리고 커튼에 불을 지르며 자기 딸들을 강간하는 상상을 해보고 두려움에 떨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러한 꿈들은 너무 편해서 생기는 것들이다. 내게 야만인들의 군대를 보여준다면야, 나는 믿을 것이다.

 

나는 죨 대령에게 고문당한 한 소년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고문당한 소년은 배에 상처가 깊었다. 그 상처는 칼로 배를 꾸욱 쑤셔 열쇠를 돌리듯 좌우로 돌려 만들어낸 상처였다. 그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나는 얼마 동안, 연장을 보관하는 곡물창고 옆 오두막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나는 밤중에 불을 들고 들어가서 직접 보았다.

 

나는 소년의 고문을 한 죨 대령을 찾아간다.

 

나는 다시 죨에게 다가가., 그의 계획이 어떤 건지 물어본다.

"물론 사전에 작전계획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얘기하면, 우리는 유목민들의 야영지를 찾아낸 다음, 상황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얘기를 계속한다.

"그런 질문을 한 것은, 만약 당신이 길을 잃어버렸을 경우, 당신을 찾아 문명 세계로 데려오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기 때문이오."

우리는 잠시 얘기를 멈춘다. 그리고 문명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아이러니를 서로 다른 입장에서 음미한다.

나는 잠을 자다가. 또 다른 춤곡이 광장에서 들려오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가, 다시 잠이 들고 꿈을 꾼다. 시체가 눕혀져 있다. 시체의 배를 가로지르다가 음부 위를 지나고. 다시 화살처럼 사타구니 속으로 내려가는 흔들거리는 듯한, 흑빛과 금빛으로 번들거리는 수북한 음모가 보인다. 내가 손을 뻗어 털을 털어내려 하자, 그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털이 아니라 서로를 타고 다닥다닥 붙어 잇는 벌들이다. 꿀에 젖어 끈적끈적한 벌들이 사타구니에서 나와 날개를 파닥거린다.

우리 주변의 공간은 수도에 있는 사무실, 사원, , 오두막 위에 존재하는 공간보다 더 나쁘지도 않고 더 거창하지도 않은, 그저 공간일 뿐이다. 공간은 공간이고, 인생은 인생이다. 그건 어디를 가나 똑같다. 다른 사람들의 고생으로 편하게 먹고사는 나에게 여가시간을 때우기 위한 문명화된 악습도 없다. 그래서 나는 우울함에 맘껏 젖어 텅 빈 사막에서 특별한 역사적 비애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헛되고 맥없고 잘못된 짓이다! 나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나는 죨 대령과 그의 군대가 야만인이라 추정되는 이들을 잡아 고문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지나온 인생을 돌이켜 보게 된다.

 

나의 삶에서 즐거움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목록과 숫자를 갖고 빈둥거리고, 하찮은 일들을 하며 하루를 때운다. 나는 저녁에는 여관에서 식사를 한다. 그러고 나서도 집으로 가는 게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계단을 올라, 마부들이 잠을 자고 여자들이 남자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는 칸막이 침실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그의 일상은 그렇게 단조롭다. 나는 죨 대령의 만행을 더 이상 보며 참지 못한다.

 

나는 평생 교양 있는 행동을 신봉해온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렇게 했다는 게 오히려 역겹게 느껴진다는 걸 부정하기는 어렵다.

 

나는 야만인 여자가 시내에서 동냥하는 것을 본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녀는 이미 고문을 당해 다리를 절뚝거렸고 앞을 보지 못했다. 나는 그 여자에게 이유모를 이끌림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온다. 나는 그녀에게서 욕망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여느 여자와의 관계하는 욕망과는 다르다.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욕망이다.

 

나는 대야를 밀치고 발을 닦는다. 나는 여자가 일어나려고 애를 쓴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이제는 알아서 처신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의 눈이 감긴다. 눈을 감고 더없이 행복한 현기증을 음미하자 짜릿한 즐거움이 느껴진다. 나는 카펫 위에 눕는다. 그리고 금세 잠이 든다. 나는 춥고 몸이 굳어져 한밤중에 잠에서 깬다. 불이 꺼져 있고, 여자는 가고 없다.

그녀에게는 내가 흐릿한 형상이고 목소리이며 냄새이고 하루는 그녀의 발을 씻겨주다가 잠이 들고 그 다음날은 그녀에게 콩 스튜를 주고 그 다음 날은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그녀로서는 종잡을 수 없는 에너지의 중심이다.

나는 그녀의 발을 다 씻기고 나서 다리를 씻기기 시작한다. 이것 때문에 그녀는 대야에 서서 내 어깨에 몸을 기대야 한다. 나의 손이 발목에서 무릎까지 그녀의 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쥐고 쓰다듬고 매만진다. 그녀의 다리는 짧고 단단하며, 종아리는 팽팽하다. 때때로 나의 손가락이 그녀의 무릎 뒤로 가서 힘줄을 찾아내고 그것들 사이에 있는 우묵한 곳을 누른다. 깃털처럼 가벼운 나의 손가락이 그녀의 허벅지 뒤쪽을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러나 그녀를 어루만지는 행위를 하다가 도끼로 찍힌 것처럼 잠에 압도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그녀의 몸 위에 엎어진 채 망각 속으로 빠져들다가 한두 시간에 후에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목이 말라서 잠에서 깬다. 꿈조차 꾸지 않는 이 상태가 나에게는 죽음, 혹은 시간밖에 존재하는, 텅 빈, 황홀경 같다.

 

나는 소녀에게 어떻게 고문을 당했는지 물어본다. 그러나 소녀는 말이 없다. 오히려 소녀에게 고문당한 과정을 캐묻는 나의 모습이 묵묵한 소녀에 비하면 유치하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나쁜 것은 없는 법이다."

나는 그녀의 몸에 들어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의 욕망은 그걸 향한 게 아니었다. 그게 목적이 아니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그곳에나 같은 늙은이의 페니스를 집어넣는 행위는 우유 속의 산, 꿀 속의 재, 빵 속의 분필을 생각나게 한다. 그녀의 벌거벗은 몸과 나의 벌거벗은 몸을 보면, 내가 옛날에 한 때, 인간의 몸을 허리의 핵에서 발산돼 나오는 꽃이라고 상상한 적이 있다는 걸 믿기 힘들다. 그녀의 몸과 나의 몸은 흩어지고 공허하고 중심이 없다. 한순간에는 소용돌이의 주변에서 뱅뱅 돌다가. 또 다른 순간에는 엉키거나 짙어지기도 하고, 종종 밋밋하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하늘에 있는 구름 하나가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내가 관복을 입고 있든, 발가벗은 채로 그녀 앞에 있든, 내 가슴을 열어 그녀에게 보여주든, 나는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치안판사인 나는 꿈을 자주 꾼다. 이 꿈은 나중에 이 작품의 결말에 복선을 이룬다.

 

나는 밤에 똑같은 꿈을 또 꾼다. 나는 눈으로 된 성 주변에서 놀고 있는 한 무리의 아이들을 향하여, 끝없는 눈 덮인 평원을 가로질러 터벅터벅 걷는다. 내가 다가가자, 아이들은 옆걸음질을 치거나 공기 속으로 녹아 없어진다. 한 애만이 남아 있다. 두건을 쓰고 나에게 등을 보이고 앉아 있다. 나는 성의 측면에 계속 눈을 바르고 있는 그 아이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결국 두건 밑을 들여다본다. 텅 비고 형체가 없는 얼굴이다. 그건 태아 혹은 작은 새끼고래의 얼굴이다. 아니, 그건 얼굴이 아니라, 피부 밑에서 부풀어 오른 몸의 다른 부분이다. 그건 하얗다. 그건 눈 자체이다. 나는 멍한 손가락으로 동전 하나를 내민다.

문명이라는 게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면, 나는 문명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치안판사인 내가 바라보는 그녀는 항상 신비롭다. 그리고 어른스럽다. 나보다 더.

 

그녀는 아주 단호하게 얘기한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분명히 하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의도로 말을 했을 것이다. 그걸 하고자 했다면 했을 거예요. 우리가 대화수단으로 이용하는 임시변통의 언어 속에는 뉘앙스라는 게 없다. 그녀는 사실, 즉 실질적인 표현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녀는 억측이나 질문이나 가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맞지 않는 커플이다. 어쩌면 야만인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는지도 모른다. 기계적으로, 그리고 전해져 내려오는 선조들의 지혜에 따라서 사는 것 말이다.

 

나는 죨 대령이 야만인을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 좀더 타당한 근거를 듣고 싶다. 그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따진다.

 

"내가 지난 20년 동안 치안판사로서 싸워야 했던 문제는 가장 저질적인 마부들이나 농사꾼들이 야만인들을 모욕하고 경멸한다는 사실이었소, 특히, 그 경멸이라는 것이 식사예절이 다르고 눈꺼풀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 말고는 구체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라면, 당신은 그것의 뿌리를 어떻게 뽑을 수 있겠소? 내가 때때로 원하는 게 뭔지 아시오? 나는 이 야만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에게 교훈을 가르쳐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해줬으면 좋겠소. 우리는 이곳이 우리 것이며, 우리 제국의 일부이며 우리의 전진기지이자 정착지이고 시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이 사람들은, 즉 이 야만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오. 우리는 1백 년도 넘게 이곳에 있었소, 우리는 사막으로부터 농토를 보호하고 관계시설을 만들고 들에 곡물을 심었으며, 탄탄한 집을 짓고 도시 주변에 벽을 쌓았소.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우리를 이곳에 일시적으로 체류하는 방문객으로 생각하고 있소. 아직 살아 있는 노인네들 중에는 그들의 부모가 이 오아시스가 전에 어떠한 형태의 것이었는지 그들에게 얘기해줬던 걸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오. 어쩌면 지금도 이곳을 그런 식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오. 마치 이곳의 땅이 한 삽도 파헤쳐지지 않고 벽돌 하나도 다른 벽돌 위에 쌍이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것처럼 말이오. 그들은 우리가 조만간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우리가 왔던 것으로 가버리고, 우리가 세운 건물들이 쥐나 도마뱀의 서식처가 되고, 그들이 기르는 짐승들이 우리가 가꿔놓은 비옥한 들에서 풀을 뜯어먹게 될 것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고 있소, 내 말이 우습게 들리오? 이유는 간단하오. 구태여 그걸 얘기하진 않으리다. 야만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소, 바로 이 순간,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요. 조금만 참자. 조만간 그들의 곡식이 염분 때문에 말라죽기 시작할 것이다. 먹을 것이 없으면 떠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소. 자신들이 우리보다 더 오래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이요."

"하지만 우리는 철수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그녀에게 근접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느낀다. 그러다 그녀를 나의 품으로 안음으로서 다시 그녀에게 실증을 느낀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 그녀에게 매력을 느꼈던 것일까?

 

내가 그녀에게 끌린 것은 그녀의 몸에 난 상처 때문이었는데, 그 상처가 충분히 깊지 않다는 걸 알고 나는 실망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몸에 베어 있는 역사의 자취일까? 나는 천막의 지붕이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는 걸 알면서도, 칠흑 같은 어둠을 오랫동안 응시하면서 누워 있다. 욕망의 근원에 관한 어떤 생각도 어떤 표현도, 그것이 아무리 반의적인 표현이라 해도, 나를 당황하게 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피곤한 게 틀림없어.

 

나는 그녀를 데리고 남자하인들과 함께 사막으로 간다. 바로 야만인을 찾아 그녀를 자신의 부족이나 가족에게 데려다주기 위해서이다.

 

"내 말 이해하지?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왜요?"

이 말이 그녀의 입술에서 너무나 부드럽게 밖으로 나온다. 그녀는 그 말이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는 것을, 처음부터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걸 알고 있다. 총을 든 남자가 우리한테 거의 닿을 때까지 서서히 다가온다.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싫어요. 저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비탈길을 기다시피 내려온다.

"불을 피우고 차를 끓이게. 여기에서 묵을 것이니."

나는 남자들에게 얘기한다.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람 소리에 끊어지며 위에서 들려온다. 그녀는 두 개의 지팡이에 기대고 있다. 남자들이 말에서 내려 그녀 주위에 몰려 있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게 무슨 낭비란 말인가. 저 애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긴긴 저녁시간에 자기네 말이나 나한테 가르쳐주며 한가롭게 지낼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젠 너무 늦었구나!

 

나는 마을로 돌아와 죨 대령에게 체포된다. 체포사유는 제국을 배신하고 야만인과 접속했다는 이유이다. 하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두 호위병에게 끌려가면서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는 기분이 좋은 이유를 안다. 제국 수호자들과 연합은 이제 끝났다. 나는 반대편에 서게 됐다. 유대감이 깨졌다. 나는 자유인이다. 누군들 웃지 않으랴? 하지만 얼마나 위험한 기쁨인가! 구원을 받는 게 그렇게 쉬워서는 안 되는 법이다. 내가 반대하는 데 무슨 원칙이라도 있는가? 내 책상을 강탈하고 내 서류들을 거칠게 만지는 새로운 유형의 야만인들 중의 하나를 보고 감정이 격해서 그렇게 했던 건 아닐까? 내가 지금 버리려고 하는 자유는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가? 나는 지난해, 전보다 더,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았다. 그렇다면 나는 무제한적인 자유를 정말로 즐겼던 것인가? 예를 들자면, 나에게는 그 여자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내 변덕에 맞춰 그녀를 마누라, , , 노예. 혹은 그 모든 것을 통튼 존재, 혹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 수 있었다. 가끔씩 느껴지는 감정을 제외하면 그녀에 대한 의무가 내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유로부터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감금을 당함으로써 생기는 자유를 환영하지 않을 것인가? 나의 저항에는 영웅적인 건 아무것도 없다. 한순간도 그걸 잊지 않아야겠다.

 

하지만 나는 점점 신변이 위태로워진다. 나역시 야만인들처럼 죨 대령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고문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불길한 징조를 느끼기 시작한다.

 

"아, 알겠네. 문명의 검은 꽃이 필 때가 된 거로군."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창문이 없다. 높은 곳에 한 개의 구멍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루이틀이 지나자. 눈이 침침한 어둠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아침과 저녁으로 문이 열리고 음식이 들어올 때, 나는 빛에 눈이 부셔 눈을 가려야 한다. 가장 좋은 시각은 이른 아침이다. 나는 잠에서 깨어 밖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어둠이 비둘기의 회색 같은 첫 빛에 자리를 내주는 네모진 환기통을 바라보며 누워 있다.

한때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자가 형편없이 몰락한 모습을 정문의 문살에 몸을 밀착시킨 상태로 바라보며 놀라서 입을 벌리는 사람들이 늘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본다. 그러나 아무도 나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

밤이 되어 모든 게 고요해지면, 바퀴벌레가 나와 기어다닌다. 나는 그들이 날갯짓 하는 소리와 마루 위를 기어다니고 달음질치는 소리를 듣는다. 아니, 어쩌면 상상한다. 구석에 있는 양동이에서 나는 냄새, 바닥에 잇는 음식 부스러기가 그들을 유혹한다. 틀림없이, 삶과 부패의 다양한 냄새를 풍기는 흐느적거리는 살 냄새도 그들을 유혹하긴 마찬가지일 게다. 어느 날 밤, 뭔가 가벼운 것이 목을 기어다니는 바람에 잠에서 깬다. 그 다음부터는 자주 잠에서 깬다. 그들의 더듬이가 나의 입술과 눈에 닿는 것 같아. 몸을 털고 움직인다. 그때부터 강박관념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건 위험이 다가온다는 경고다.

언제나, 어디선가에서, 아이가 두들겨 맞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나이와 상관없이 아직도 아이에 불과했던 그 여자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는 이곳에 불려와 아버지의 눈앞에서 고문을 당해 상처를 입었고, 자신의 눈앞에서 아버지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그녀는 아버지도 딸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어쩌면 그때쯤, 앞을 볼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다른 수단을 통해서 그걸 알게 되었는지 모른다. 가령 그녀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만두라고 애원할 때의 어조를 통해서 말이다.

그들은 그녀의 아버지를 발가벗겨 그녀에게 보여줬고 그가 고통으로 덜덜 몸을 떨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녀를 다치게 했고 그는 그들을 제지할 수 없었다.

그녀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사람을 보호해주는 알바트로스의 듬직한 날개일까? 아니면 먹잇감에 숨이 붙어 있는 한, 무서워서 공격을 하지 못하는 겁쟁이 까마귀의 검은 모습일까?

 

나를 취조하기 시작한 자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그는 인간 피라미드를 밝고 올라가야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게다. 그는 언젠가. 내 목을 발로 밟고 누르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 게다.

 

나는 감금되고 고문을 당하면서 비참함을 느낀다. 그 강도는 점점 심해져간다.

 

아무도 나를 구타하지 않고, 아무도 나를 굶기지 않으며, 암도 나에게 침을 뱉지 않는다. 내가 당하는 고통들이 그렇게 사소한 것들인데, 내가 어떻게 박해받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소한 것들이기 때문에 훨씬 더 수치스럽다. 나는 처음에 수용되어 감방 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채워질 때. 웃었다. 일상적인 삶의 고독에서 감방의 고독으로 옮겨가는 것은 큰 고통은 아닌 것 같았다. 생각과 기억들을 갖고 들어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게 얼마나 원시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무슨 자유가 나한테 남았는가? 먹거나 배고플 자유, 침묵을 지키거나 혼자 지껄일 자유, 혹은 문을 두드리고 비명을 지를 자유이리라. 그들이 나를 여기에 감금했을 때만 해도, 그들이 나를 부당하게 처벌했으니만큼, 경미하나마 부당하게 그랬으니만큼 내 나름의 명분도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불행한 피와 뼈와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나에게 그녀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치안판사라는 명예와 직위를 버리고 그녀를 왜 선택했는가? 단순한 욕정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내 무의식에 잠재했고 찾고자 했던 것, 진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에게 그녀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녀는 이 미로에서 내가 가진 유일한 열쇠이다.

"왜?"

나는 베개에 대고 신음한다.

"왜 하필 나야?"

나만큼 세상 물정을 모르고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영락없이 어린애다! 만약 그들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나를 가둬 썩어들게 만들고 이따금 내 몸을 악독하게 다루다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나를 끌어내. 그들이 계엄령 하에서 갖고 있는 힘을 이용해 비공개 재판에 회부할 것이다. 작은 몸집의 대령은 굳은 표정으로 법정을 주재하고 그의 심복이 협의 내용을 낭독하고, 두 명의 젊은 하급장교들이 법적 절차를 준수하고 있다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입회인으로 참석할 것이다. 그들이 없다면 법정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이 패배했거나 야만인들한테 당했다면, 그들은 나에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울 것이다. 내가 그걸 의심할 필요가 있나? 그들은 나를 법적에서 사형장으로 데려갈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날처럼 혼란에 빠져, 발로 차고 울고불고하면서, 죄가 없는 사람에게는 해로운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믿음에 끝까지 매달릴 것이다.

"너는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나는 큰 소리로 이 말을 하고, 그 말을 바라보며, 그것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넌 일어나야 해!"

나는 의도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죄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마음속에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손을 사타구니에 붙이고 램프불 밑에서 벌거벗은 채 누워 있는 그 사내아이, 먼지 속에 쪼그려 앉아 눈을 가리고 다음날 일어날 일을 기다리는 야만인 포로들이 떠오른다. 그들을 짓밟았던 그 짐승이 나도 짓밟으리라는 걸 왜 믿을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정말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내가 피하고 싶은 것은 현재의 나처럼, 어리석고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모욕적인 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나는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 다른 사람의 몸을 만지고, 다른 사람한테 내 몸이 만져지고 싶은 욕망이 너무 커져서 때로는 신음소리를 내야 할 정도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그 아이가 감방에 드나드는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었던가! 제대로 된 침대에서 여자의 팔에 안겨 누워 있고, 좋은 음식을 먹고 햇빛을 쬐며 산책을 하는 것이, 경찰의 조언을 받지 않고 누가 내 친구이며 누가 내 적이어야 하는지 결정할 수 있는 권리보다 훨씬 더 중요해 보이지 않는가! 내가 야만인 여자를 그렇게 다룬 걸 잘했다고 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옳다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약 이곳에 있는 젊은 사람들이 내가 두둔하는 야만인들한테 죽음을 당한다면, 나를 비난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내 자신이 옳다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없다면, 내가 푸른 제복을 입은 그들의 손에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가 나를 심문하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얘기하고, 내가 야만인들을 찾아갔을 때 했던 말을 단어 하나까지 자세하게 얘기한다 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믿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들은 끔찍한 일을 계속 수행할 것이다.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해야만 최종적인 진실을 말하게 된다는 게 그들의 신조다. 나는 고통과 죽음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 나에게는 어떻게 도피해야 하는지 계획도 없다. 갈대밭에 숨어살게 되면, 나는 1주일도 안 돼 굶어죽거나 연기에 쫓겨 나오게 될 것이다. 진실을 얘기하자면, 나는 편안한 걸 찾고 있을 뿐이다. 부드러운 침대와 따스한 팔이 있는 곳으로 달아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죨 대령과 제국이 야만인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목격한다. 포로가 된 야만인들을 보고 차마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야만인들이다!"

이 말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불길처럼 번지기 시작한다.

나아갈 길을 만들기 위해 무거운 막대기를 휘두르는 남자가 깃발을 든 사람의 말을 끌고 있다. 그 뒤로 다른 기병이 밧줄을 끌고 간다. 밧줄의 끝에는 목과 목이 서로 줄줄이 묶인 야만인들이 있다. 완전히 발가벗은 그 야만인들은 모두, 이상한 모습으로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있다. 마치 치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 같다. 나는 잠시, 그들이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으며, 왜 그렇게 엉거주춤한 자세로 앞사람을 따라가는지 의아해한다. 그러나 나는 쇠가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즉시 상황을 알아차린다. 철사줄이 모든 사람의 손바닥과 뺨에 꿰어져 있다.

그렇게 하면 야만인들은 양처럼 순해진답니다. 그들은 아주 조용히 있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어떤 병사가 전에 해줬던 말이 생각난다. 역겨워진다. 이제 나는 감방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죄수들을 구할 수가 없다. 따라서 내 자신이라도 구하는 길을 택하자. 언젠가 누군가가 이것에 대해서 얘기하게 된다면, 그리고 먼 훗날 누군가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면,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얘기를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죨 대령은 치안판사인 나에게 말한다. 제국을 위해 그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치안판사,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법정에 세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소, 당신이 이곳 시민들에게 너무 인기가 있다는 걸 우리가 두려워해서 말이야. 당신은 스스로의 의무를 이행하는 걸 소홀히 하고 친구들을 멀리하고 천한 무리들과 어울림으로써 당신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소. 내가 지금까지 얘기해본 사람 중, 당신의 행동으로 인해 모욕감을 느끼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하지만 당신에겐 새로운 야망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당신은 원칙을 위하여 개인적인 자유를 희생할 용의가 있는, 마지막 남은 의로운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고 싶어하는 것 같소."

 

죨 대령의 협박은 곧 고문으로 이어진다. 나는 죨 대령의 고문으로 치안판사라는 명예, 고고함, 인격을 한 순간 빼앗기게 된다.

 

그들이 나를 뜰로 불러낸다. 나는 아픈 손을 문지르고, 발가벗은 몸을 가리고 그들 앞에 선다. 나는 괴롭힘을 너무 당해 기진맥진해져 순하게 된 한 마리의 늙은 곰 같다.

"뛰어."

만델이 말한다. 나는 데일 듯한 태양 밑에서, 구내를 빙빙 돈다. 내가 속도를 늦추자, 그는 회초리로 내 엉덩이를 갈긴다. 나는 더 빨리 달린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군인들이 그늘에서 이 광경을 바라본다.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부엌문 위로 쳐다보고, 아이들이 문살을 통해서 이 광경을 응시한다.

"더 이상 못하겠어!"

나는 숨을 헐떡거린다.

"내 가슴!"

나는 뜀박질을 멈추고 고개를 늘어뜨리고 가슴을 움켜쥔다. 내가 회복하는 동안, 사람들은 모두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그런 다음, 회초리가 내 몸에 가해진다. 나는 비뜰거리며 나아간다. 그러나 걷는 것보다 더 빠르지 않은 속도로 뛴다.

처음에는, 소굴에서 나와 이 인간들 앞에 알몸으로 서 있거나 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몸을 비트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단계를 지나 있다. 지금은, 무릎이 꺾여 무너져 내리거나 뭔가가 내 심장을 게처럼 움켜쥐는 것 같은 위협적인 상황에 신경이 더 쓰인다. 그렇게 되면 꼼작도 못하고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매번 나는, 잠시 쉬고 나면, 약간의 고통만 내 몸에 가해져도, 내 몸이 다시 움직이고 점프하고 뛰고 기고 조금 더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내가 벌렁 드러눕고 차라리 날 죽여라, 이런 걸 계속하는 것보다는 죽는 게 낫겠다. 라고 말할 때가 있을 것인가? 때때로 나는 그때가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언제나 나의 착각이다.

 

나는 야만인들처럼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 나는 죨 대령과 만델 그리고 제국이야 말로 야만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야만인이 제국에게 가한 폭력은 사실인가. 사실이라면 나에게 나타나 보여주길, 언제나 제국은 야만인의 잔인성을 사람들에게 과장되게 설명했다. 소문이란 무서운 것을 제국은 알고 있다.

 

3주전, 한 소녀가 강간을 당했다. 용수로에서 놀던 친구들은 그녀가 피를 흘리며 아무 말도 못하는 상태로 돌아올 때까지 그녀가 옆에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녀는 며칠 동안, 천장만 쳐다보며 부모의 집에 누워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라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램프불을 끄면 그녀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친구들은 야만인이 그런 짓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사람이 갈대밭 속으로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그 사람이 못생겼기 때문에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아이들은 집 밖에서 놀 수 없게 되었으며, 농부들은 들에 나갈 때면 곤봉이나 창을 갖고 나간다.

 

나는 죨 대령에게 심문을 당하면서 오히려 죨 대령을 심문한다. 아니 어쩌면 내가 죨 대령에게 진심으로 궁금한 것을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질문이 염치없는 것이라고 생각되면, 날 용서하게. 당신은 사람들을 그렇게 다룬 다음,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가 있는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나는 이 질문을 하고 싶네 그려. 이건 사형집행인들과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내가 늘 물어보고 싶었던 걸세. 자네에게 이런 질문을 하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네, 나는 자네가 무서워 죽겠네그려. 내가 자네에게 새삼스럽게 그 얘기를 할 필요도 없겠지. 자네도 그걸 알고 있을 테니까. 여하튼, 일이 끝나고 나서 음식을 먹는 게 쉬운 일인가? 내 생각에는 그런 사람들은 손부터 씻고 싶어 할 것 같거든. 하지만 손을 씻는 것도 보통의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아. 성직자가 끼어들어야 할 정도의 일이거든. 일종의 정화의식이 필요하다는 말일세.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영혼을 정화시키는 의식 말일세. 여하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겠나? 가령 식탁에 앉아 가족이나 동료들과 함께 빵을 잘라 먹는 일 같은 일상적인 삶 말일세."

 

나는 치안판사로서 항상 판결만 내렸다. 하지만 이젠 입장이 바뀌었다. 나는 그동안에 판결을 내렸던 사건들을 돌이켜본다. 그 중 어머니가 보고 싶어 탈영한 호위병에게 한 말이 떠오른다.

 

"네가 아들로서 어머니한테 느끼는 감정 때문에 처벌을 받는다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건 나도 이해한다. 나는 네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이해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때만 해도 남자, 여자. 아이들 포함한 우리 모두는, 아니 어쩌면 물레바퀴를 돌리는 가엾은 늙은 말조차도, 매순간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고 있다는 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피조물이 정의에 대한 원초적 기억을 갖고 세상에 태어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법의 세계에 살고 있다."

나는 불쌍한 죄수에게 말했다.

"그건 차선의 세계다. 그것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타락한 존재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법을 지키는 것뿐이다. 정의에 대한 기억이 퇴색해지지 않도록 말이다."

나는 이렇게 훈계를 한 후, 그에게 벌을 내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처벌을 받아들였고, 호위병이 그를 데리고 나갔다. 나는 그때, 마음이 편치 않고 수치스러웠던 것 같다. 나는 법엉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저녁 내내 어둠 속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어떤 사람들이 부당하게 고통을 받으면 그 고통을 목격한 사람들은 수치심 때문에 괴로워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나 자신을 위로해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는 치안판사직을 내놓고, 공직생활을 은퇴하고, 작은 과수원이라 하나 사서 가꾸며 살아볼까 하고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직위에 임명되어 수치스러운 공무를 감당하게 될 것이고, 결국 아무것도 변할 게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사건에 휘말리게 될 때까지 나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죨 대령과 군대는 철수한다. 야만인들에게 진 것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그들은 철수할 때에도 위세당당하게 군다. 하지만 그들은 깨달아야한다.

 

"우리 안에 범죄적인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우리 자신한테 가해야 하는 법이다."

 

군대가 떠나고 마을에 사람들도 떠났다. 야만인에게 죽음을 당하더라도 마지막까지 고향에서 죽겠다는 이들은 마을에 남았다. 그리고 나는 예전처럼 마을의 치안판사의 일을 도맡아 했다.

 

"나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나는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행방불명된 백성들에게조차 강요하는 역사의 바깥에 살고 싶었다. 나는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것이 수치스러워할 이유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야만이들이 빵 맛을 보게 되면, 오디 잼이나 구즈베리 잼을 바른 빵 맛을 보게 되면, 우리들이 사는 방식에 마음이 끌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곡물을 재배하는 방식을 아는 남자들의 숙련된 기술과, 먹을 수 있는 과일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여자들의 기술 없이는, 살아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바람이 멈췄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첫눈이다. 지붕이 하얗다. 나는 아침 내내, 창가에 서서 눈이 내리는 모습을 바라본다. 내가 막사 들을 건너려고 하자, 벌써 몇 인치나 쌓여 있다. 발꿈치에서 뽀드득뽀드득, 야릇한 소리가 경쾌하게 난다.

광장의 한가운데에서,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고 있다. 나는 아이들이 놀라지 않도록 조심하며, 형언할 수 없이 기쁜 마음으로 아이들을 향해 나아간다.

그다지 볼품없는 눈사람은 아니다.

이것은 내가 꿈에서 보았던 광경이 아니다. 요즘 들어서 다른 많은 경우에 그러한 것처럼, 오래 전에 길을 잃었지만 아무 곳에도 이르지 못할 길을 따라 계속 걸음을 옮기는 사람처럼, 나는 바보 같은 느낌을 받으며 그곳을 떠난다.

이야기에서 억압의 대상인 야만인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존 쿳시의 소설 제목은 시인 콘스탄틴 카바피의 시 "야만인을 기다리며"(Waiting for the barbarian)에서 제목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어째서 모든 거리와 광장이 그렇게도 빨리 텅 비어지는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도 깊은 생각에 잠겨 다시 집으로 향하는가?

저녁이 되었어도 야만인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이 변경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더 이상 야만인들이 없다고 말했다.

야만인들이 없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사람들은 일종의 해결책이었다.

 

사람들은 야만인이 나타나지 않자 실망하여 집으로 흩어진다. 그것은 억압의 대상인 야만인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제국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제국은 타자가 있어야 정의되는 존재이다. 제국은 타자의 존재 여부에 상관없이 그것의 존속을 위해서 타자를 만들어내야 한다. 조작된 정보를 사람들에게 유포시키든, 죄없는 어부들과 유목민들을 잡아 고문하고 그들이 야만인임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주입시킨다. 제국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자신을 연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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