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 선배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책이 출간되고 3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대학시절 소설 수업을 들으면서
전설에 남을 행동을 하는 선배들의 에피소드를 듣게 됩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오가는 선배들의 이야기는 비이성적인 이야기처럼 또는 괴담처럼
또는 광인처럼 이상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그런 것?
후배들은 선배들의 에피소드를 들으며 무심한 척 합니다.
하지만 한편에선
"그런 선배가 있었대!"
"정말?"
소문으로 듣던 박민규 선배는
아웃사이더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영화사를 그만두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그를 만났습니다.
박민규,
그는 소문과 달리,
아주 달콤하고 부드럽고 수줍음이 많은 남자였습니다.
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아내가 부러울 정도였습니다.
습작을 하던 당시
그는 후배인 저에게 좋은 글을 남겨주었습니다.
저는 그의 격려에 힘을 얻고
영상을 다루는 곳에서 일을 하면서도
문자를 다루는 일을 놓지 않았습니다.
박민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영상에 뒤쳐진 문자의 시대에
희망을 심어줍니다.
2008년 그에게 소포로 받은 책 한권을 잊지 못합니다.
당시 <카스테라>에 나오는 배경처럼,
무더운 여름, 텅빈 방안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냉장고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집밖에서 누군가 인터폰을 눌렀습니다.
"택배 왔습니다!"
그 날 제 손에 있었던 것은 박민규 선배가 보내준 신간이었습니다.
그때 그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편지를 쓰고도 부치지 못했습니다.
선배님!
신간 역시 선배님 다우십니다.
기대됩니다!
이 냉장고의 전생은 홀리건이엇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1985년 5월 벨기에의 브뤼셀이다. 리버풀과 유벤투스의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흥분한 영국 응원단이 이탈리아 응원석을 향해 돌진한다. 담장이 무너진다. 서른 아홉 명이 깔려 죽는다. 이 남자는 그 속에 있었다.
제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하늘나라였다. 어이가 없군. 당연히 걷잡을 수 없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열을 식힐 줄 아는 지혜를 배워야 해. 난 그게 필요해, 그런 그에게 신이 다음과 같이 조언을 했다. 그럼 냉장고 같은 건 어떨까 과연 그는 무릎을 쳤다 그거 보람찬 삶이겠는걸 그런 이유로 한때 리버풀을 사랑했던 이 남자는 냉장고로 태어났다 그리고 굴러굴러 나의 소유가 되었다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도 가끔 나는 이 남자와의 첫날밤을 기억하고는 한다.
지극히 고통스러운 밤이었다. 처음엔 시끄럽다고만 여겼는데 저러다 폭발하는 게 아닐까 급기야 두려워져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우웅우웅 한 채의 공장이 내뿜을 만한 소음을 한 대의 냉장고가 내뿜고 있는 광경은 가관이라면 가관이고 장관이라면 장관이었다. 조심조심 귀를 대보니 마그마와도 같은 것이 그 속을 맹렬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당장 코드를 뽑아버렸다 여섯 개의 맥주캔과 거대한 김치통 저녁에 먹다 넣어둔 호두아이스크림이 그 속에 들어 있었다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밤이었다
어떻게 이따위 걸 팔 생각을 했지? 무너진 담장에 깔려 죽은 이탈리아인처럼 나는 분하고 억울했다. 당장 그 망할 놈의 중고가전 상을 찾아가 셔터를 박살내버리고 싶었지만 당장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녹기 전에 호두아이스크림을 먹어치우는 일이었다. 잠을 설친 탓에 또 호두 냄새가 심한 설사까지 겹쳐 다음날 오후나 되어서야 그 중고가전 상을 찾아갈 수 있었다 굳게 닫힌 셔터 위에는 <내부수리 중>이란 종이가 붙어 있었다. 방으로 돌아오니 이미 은은한 김치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져 있었다. 될 대로 되라지 그 시큼한 냄새에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그만 코드를 쫒아버렸다 우웅, 훌리건들이 들이닥치는 듯한 맹렬한 소음이 다시금 건물의 담장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하필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라고 생각하는 순간-몹시도 불운했던 나의 전생이 눈앞을 스치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나는 유벤투스를 응원하다 졸지에 변을 당한 불쌍한 이탈리아인이었을지도 모른다.
2
전생이야 어땠건 간에-결국 나는 이 냉장고와 함께 이 년 이상을 살아왔다. 말도 안 된다 라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우선은 그 망할 놈의 중고가전 상이 정말 망해버린 게 이유였고 함께 지내다보니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는 게 또 하나의 이유였다 게다가 말도 안되게 튼튼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냐구?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독신인 나로서는 그 굉장한 소음이 있어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는 인간. 결국엔 길들여지게 마련이었다. 냉장고와 내가 만난 것은 대학생활을 갓 시작한 일학년 때의 여름이었다. 사상 유례없이 불쾌지수가 높았던 여름으로 기억한다. 집에 불만이 많았던 나는 학교 근처에서 무작정 자취를 시작했고 그래서 그 좁은 방 안에 냉장고와 TV 미니오디오와 나 이렇게 넷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와 냉장고만이 살고 있었단 느낌이다. 냉장고의 소음이 워낙 틀출했기 때문이다.
정문에서 300미터 정도 가파른 언덕길에 위치한 이 원룸에는 그래서 정말이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마침 방학이었고 다시 말하지만 사상 유례없이 불쾌지수가 높았던 여름이었다 언덕이라곤 해도 이렇게 아스팔트가 잘 높여진 길인데 왜 인간들이 안 오는 거지? 늘 들르던 <언덕 위 호프> 의 주인은 종종 나와 같은 생각을 푸념 삼아 늘어놓고는 했다. 글쎄 왜 그럴까요? 굵어진 종아리를 어루만지며 나는 땅콩을 집어먹고는 했다. 불쾌지수가 높은 날도 불쾌지수가 낮은 날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여름이었다.
나는 늘 불쾌할 정도로 외로웠다.
즉 그런 연유로 냉장고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런 느낌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굉장한 소음이 있어 나는 외롭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그 <언덕 위 원룸>에서 , 단 둘이서 말이다. 세상의 여느 친구들처럼-냉장고도 알고 보니 좋은 놈이었다. 알고 보면 세상에 나쁜 인간은 없다.
드물게도, 이는 1926년 제너럴일렉트릭이 세계 최초의 현대식 냉장고를 생산해낸 이후 인간과 냉장고가 친구가 된 최초의 사례였다 내가 최초라니! 도대체 우리는 냉장고에 대해 얼마나 소홀했었단 말인가 과연 이 세상에는 냉장고의 존재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인간이 있기나 할 것일까 드넓은 세상에서 우리는 늘 인간만이 살고 있다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신경을 기울이면 바로 자신의 곁에 <냉장고> 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냉장고는 인격이다.
자, 이제 저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느껴보아라. 압축기와 응축기, 증발기와 열 교환기를 순환하는 저 냉장의 흐름, 기적의 사이클링을, 내가 냉장고에게 매료되기 시작한 것은 저 순환의 소리에 서서히 눈을 떠가면서부터였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단 얘기는 절대 아니다. 나역시 <냉장의 세계라니> 알게 뭐야> 에 속해 있던, 흔하고 흔한 인간의 한 명에 불과했으니까, 즉 출발은 뭐니뭐니해도 저 엄청난 소음을 줄여보겠다는 소박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옹졸한 처사였지만 나는 제조회사에 전화를 걸어 신속하고 정확한 A/S를 부탁했다. 변명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신속하고 정확할 줄 알았던 A/S는 그러나 길고 지루하게 한참을 이어졌다. 제상 히터의 점검에서 각종 부품의 교체, 결국은 모세관의 청소까지, 방은 어수선했고, 중복에서 말복 사이의 언제나 찜통 같은 오후였다. 기사는 결국 네 번씩이나 내 방을 방문했고, 매번 수리가 끝날 때마다 늘 다른 얘기를 늘어놓았다 첫 방문 때는 <이제 괜찮을 겁니다> 두 번째는< 거참 이상하네> 세 번째는 <차라리 하나 사시죠> 네 번째는 들릴락 말락 죽어가는 목소리로< 이 짓도 이제 관둬야겠어>
소음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럭저럭 2학기가 시작되었으나 절대로 맘이 개운 할 리 없었다. 결국 라디오를 분해해놓고 조립을 못해 애태우는 소년처럼 나는 냉장의 원리, 냉장고의 구조, 냉장고의 수리, 나아가 냉장의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냉장의 세계가 의외로 나를 빨아들였다. 말 그대로의 흥미진진, 나는 점점 학교를 빼먹는 일이 잦아졌고 간혹 빨랫감을 들고 찾아가던 본가에도 어느 순간 발길을 끊은 지 오래였다 뭐랄까 <냉장의 세계라니? 알게 뭐야> 가 지배하는 눈부신 일상의 거리를 활보하다 갑자기 맨홀 속으로 덜어진 기분이었다.
어둡고 은밀하고 서늘한 냉장의 세계가, 그 속에 펼쳐져 있었다. 나는 한 줌의 프레온 가스처럼 지하세계의 모세관 속을 온종일 헤매다녔고, 밤이 되면 눈부신 한 줌의 성에가 되어 지하의 벽 어딘가에 들러붙어 얕은 잠을 청하고는 했다. 출구를 발견한 것은 올라가서 알게 된 일이지만 가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눈이 부셨다. 그리고 세상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3
그러니까, 일주일 정도를 꼬박 매달렸다는 기억이다. 꼼꼼한 진단을 마친 후, 가능한 경우의 수를 모두 생각해 수리에 열을 올렸지만 그래도 소음은 줄어들지 않았다. A/S 기사와 마찬가지로 도무지 원인을 짐작할 수 없었다. 절로 <차라리 하나 사버려?> 라든지 <이 짓 이제 관둘래> 가 튀어나올 법한 일이었지만, 이미 냉장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한 나는 A/S 기사와는 전혀 다른 각도로 그 문제를 해석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 냉장고는 강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
라는 것이었다. 그랬다. 훌리건의 전생을 지닌 이 냉장고는 남달리 강한 발언권을 가진 채 태어난 것이다. 어쩌면 이 남자는 유달리 목청이 크고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리버풀과 유벤투스의 결승전에서 <받아버려!> 를 외치며 난동을 선도한 인물도 분명 이 친구였겠지.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멋지다!
<받아버려!> 라니
냉장의 역사는 부패와의 투쟁이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음식을 차갑게 보관하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기원전 천년 무렵부터 이미 지하실과 얼음을 이용한 원시적 냉장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인류 최초의 냉장고는 땅 속-즉 지구였던 셈이다.
14세기의 중국인, 17세기의 이탈리아인들은 소금물이 저장된 용기가 상온보다 차가운 상태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소금물이 증발할 때 주변의 열을 빼앗아가기 때문이었다.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기화열을 이용한 현대의 냉장원리가 인류 역사에 최초로 그 면모를 드러낸 순간이다.
1834년, 영국의 제이콥 퍼킨스가 얼음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압축기를 발명, 특허를 얻는데 성공한다. 퍼킨스는 압축시킨 에테르가 냉각효과를 내면서 증발했다가 다시 응축되는 원리를 이용했는데, 그의 압축기는 훗날 냉장고의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1926년,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이 세계 최초의 밀폐형 냉장고를 생산해낸다. 이후 끊임없는 개선을 통한 현대식 냉장고의 역사가 시작된다. 1939년에는 냉장실과 냉동실이 구분된 오늘날의 가정용 냉장고가 탄생했고, 이 획기적인 형태의 냉장고는 크라랜스 버즈아이가 처리과정을 개발해 만든 수많은 냉동식품들과 더불어, 환상적인 냉장시대를 열어간다.
냉장고의 보급은 인류의 삶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가장 획기적인 성과 중 한 가지는 식중독, 암 등 질병의 발생률을 대폭 낮춘 것이다. 신선한 야채를 항상 먹을 수 있는 점과 소금에 절이지 낳은 생선의 섭취, 그리고 변지로디지 않은 식품을 먹음으로써 현대의 인류가 건강한 생활을 누리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것이다, 냉장고를 통해, 비로서 인류는 부패와의 투쟁에서 승리한다. 환상적인 승리였다. 따라서 20세기를 냉전의 시대로 보는 시각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20세기의 인류가 거둔 가장 큰 성과는 다른 무엇보다 이 환상적인 냉장술이었다. 그렇다. 20세기는 환상적인 냉장의 시대였다.
저명한 냉동학자 테오도르 앵글은 자신의 저서 <환상적인 냉장시대>에서 위와 같이 저술하고 있다. 그랬다. 알고 보니 나는 <환상적인> 냉장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과연!
때문에 나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이 남자의 <강한> 발언권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물론 진심이었다. 저 정도라면 확실히 나보다는 큰 소릴 칠 만한 입장이었던 것이다.
분명, 지금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거야
냉장고를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의 충분한 공감이었다.
냉장의 세계에서 본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부패한 것인가.
다음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책, 책, 책을 사랑해주세요~
종이로 읽는 글의 느낌을 더 사랑해주세요~
'소설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독한 추위속에서 열병나는 사랑을 만나다 <사랑하기전에 사랑한후에> (0) | 2011.01.16 |
---|---|
지금 우리시대에 필요한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0) | 2011.01.09 |
현대시의 구조 <폴 발레리>,<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0) | 2010.11.23 |
죄, 신과 인간, 부조리와 아이러니!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키 (0) | 2010.11.09 |
아들을 잃은 슬픔을 안고 쓴 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0) | 2010.11.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