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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타인을 이해하는 힘, 타인을 이해하는 정치, 타인을 이해하는 소설

by 아프로뒷태 2012. 12. 1.

 

 

"이번 선거에서 누굴 뽑으실 거에요?"

 

글쎄, 나는 이번 선거가 그닥 신나지 않아.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기다렸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뽑고 싶은 사람이 없어. 하지만 문재인과 박근혜 중에서 뽑아야 한다면 누군가를 뽑아야겠지. 그런데 그게 슬퍼.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얼마전 오바마 대통령 선거 당선 소감을 영상으로 본 적이 있었다. 오바마가 당선의 기쁨을 국민들에게 이야기할 때, 미국의 국민은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절로 나오는 탄성과 기쁨의 메아리를 들으면서, 미국의 국민이 부러웠다. 누군가를 뽑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 정녕 그런 기쁨을 나또한 누릴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기대로 '민주당 단일화'를 기다렸다.

오바마 당선 연설 http://blog.daum.net/idealisthee/908

 

 

 

그리고 단일화는 안철수의 양보로 매듭지워졌다. 단일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매서운 추위가 왔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이번 선거에서 누굴 뽑으실 거에요?"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랬다. 그래, 그랬다.

 

 

 

소설가 김연수의 글에서

 

 

문재인이냐, 박근혜냐 묻는다면 문재인을 찍을 수밖에 없겠지만, 이 ‘찍을 수밖에 없는’ 투표는 2007년을 끝으로 그만하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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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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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어느덧 내 이름으로 글을 발표한 지 20년째가 된다. 당연하게도 처음엔 이렇게 마흔 살이 지나서까지 글을 쓰게 될 줄 몰랐다. 데뷔작을 발표하고 나서도 뭔가 써야겠다는 마음이 끝내 사라지지 않아 다음 작품들을 계속 썼을 뿐이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소설을 쓰다보니 소설을 잘 쓰고 싶은 욕구가 조금씩 샘솟았다. 그러자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소설을 잘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지난 10년 동안 이 질문을 늘 머릿속에 떠올리며 나름대로 답을 찾았는데, 최근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학 강연록인 ‘소설과 소설가’를 읽다가 꼭 내 마음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여기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소설 예술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소설 주인공들의 개성이나 캐릭터가 아니라, 소설 속 세계가 그들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면, 우선 세계가 그 사람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식뿐만 아니라 상상력도 필요합니다. 소설가로서 나의 주된 임무는 모든 등장인물과 되도록 일일이 동일화되고, 그들 눈에 보이는 것이 내 소설의 세계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소설 예술을 정치적으로 만드는 순간은 소설가가 정치적 관점이나 소속 정당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 문화, 계층, 성별 등에서 우리와 전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입니다. (‘소설과 소설가’, 70쪽)

이 글에서 특히 반가웠던 건 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소설을 정치적으로 만든다는 문장이었다. 나는 이 문장의 핵심이 ‘노력’이라는 단어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소설가로서 나는 이 ‘노력’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맥락에서 파묵이 ‘노력’이라는 말을 썼는지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새로운 소설을 시작할 때마다 내가 대면하는 어떤 절망과 관련이 있다.

 

그 절망이란 이런 것이다. 예컨대 최근에 출판한 장편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25살의 여자인 카밀라 포트만을 시점화자로 시작한다. 처음 소설을 쓰겠다고 책상에 앉았을 때, 나는 단 한 줄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연한 일이었다. 43살의 한국남자인 내가 무슨 수로 25살의 미국 여성의 시점으로 문장을 쓸 수 있겠는가? 단 한 줄도 쓸 수 없는 상태, 혹은 오직 자신에 대한 이야기만 쓸 수 있는 상태, 소설가에게 절망이란 그런 것이다.

 

이 절망을 넘어서는 방법은 오직 하나 캐릭터를 이해하는 일뿐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타자를 이해하는 일. 하지만 소설가에게 이건 실패가 예정된 일이기도 하다. 한 줄의 문장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쉽다. “그 사람? 욕심이 많아서 다른 사람들하고 잘 못 어울려.” 우리는 그런 말을 곧잘 하지 않는가? 원고지 10매 정도로 이해하는 것도 힘들지 않다. 신문 사회면에는 그런 식으로 이해된 사람들로 가득하다. 반면 책 한 권 분량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건 꽤 힘들다. 25살의 젊은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계의 모습을 책 한 권 분량으로 서술하는 건 내게 거의 불가능한 과제다.

그러나 소설에 깊이가 생기는 순간은 바로 이 때다. 오랫동안 나는 타자를 타자 그대로 두는 소설이야말로 윤리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거꾸로 막힘없이 완벽한 소통을 말하는 소설이야말로 폭력적이라고. 윤리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고 심각하게 느껴진다면 그저 겸손한 소설이라고만 말해도 될 것 같다. 오르한 파묵은 내가 겸손한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소설을 정치적인 소설이라고 말한다. 이 지점이 나는 무척 흥미롭다. 그는 올바른 정치란 타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보는 셈이니까. 그런 소설을 캐릭터화하면 아마도 겸손하게 보일 것이다. 노력이 그 소설을 겸손하게, 또 정치적으로 만든다.

 

안철수의 대선출마 선언문을 듣는데, 소설가로서 기대가 생겼다. 윌리엄 깁슨을 인용할 수 있는 정치인이라니.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그가 “제가 희망을 드린 것이 아니라 제가 오히려 그분들께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라고 말할 때였다. 이 겸손은 지금까지 그 어떤 대통령 후보도 가지지 못한 자질이다. 타자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쉽사리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 줄의 문장도 쉽게 쓰지 못하는 소설가의 처지와 비슷하다. 결국 그는 타자를 위해서 노력할 텐데, 이 노력이 그를 (좋은 의미에서) 가장 정치적인 인간으로 만들 것이다. 정치를 정치의 자리로 되돌려놓는 것, 그게 바로 안철수 현상으로 대변되는 시대정신이 아닐까.

 

 

나는 소설 주인공이 나와 닮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온 힘을 다해 동일시하려고 노력합니다. 소설 속 세계를 그들의 눈으로 보기 위해 그들을 상상하면서 서서히 실체를 완성해 나갑니다. 소설 예술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소설 주인공들의 개성이나 캐릭터가 아니라, 소설 속 세계가 그들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면, 우선 세계가 그 사람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식뿐만 아니라 상상력도 필요합니다. 소설가로서 나의 주된 임무는 모든 등장인물과 되도록 일일이 동일화되고, 그들 눈에 보이는 것이 내 소설의 세계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소설 예술을 정치적으로 만드는 순간은 소설가가 정치적 관점이나 소속 정당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 문화, 계층, 성별 등에서 우리와 전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입니다. 도덕적, 문화적,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공감을 통해 동일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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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소설가’, 오르한 파묵, 70-71쪽

 

 

들장미의 꽃말은 고민 끝에 이루는 결정이라고 한다. 나도 뭔가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왔다. 그리고 김연수가 올해 새로 낸 소설을 사서 읽어야겠다. 김연수의 최근 작품을 읽지 않았는데,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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