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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by 아프로뒷태 2012. 7. 6.



차창룡 시인(선생님)이 올린 글이다.

글을 올리며 이런 글 귀가 있다.

 

학교에서 레포트로 냈던 것 올립니다.

이 글을 쓰면서 예전에 읽다 만 고전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역시 고전은 되새길 필요가 있더군요.

참고가 되실 분이 있을 것도 같아 게시판에 올립니다.

 

 

 

 




서평

연기적이고 중도적인 역사관이어야

-E. H. 카, <역사란 무엇인가>



 


오랜만에 한국사 강좌를 듣다보니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짚어보게 되었다. 이 기회에 어린 시절 읽다가 만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다시 읽게 된 것이다. 다시 읽게 된 <역사란 무엇인가>는 생각보다 상식적인 내용이었다. 그만큼 카의 역사에 대한 시각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카의 시각 중에서 필자에게 여전히 큰 공감대를 형성하는 내용은 책의 2장과 3장에 해당하는 부분, 즉 역사적 사실이 ‘사회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역사 연구에는 과학적 방법을 원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주지하다시피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이는 결국 ‘과거의 사실들과 현재의 역사가들의 상호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주장은 역사가를 단순한 기록자로 만든 랑케의 실증사학을 극복하고 역사가를 역사적 사실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은 셈이다. 따라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첫째는 과연 역사가는 무엇을 기준으로 수많은 사실들 가운데 역사적 사실을 추려내는가 하는 것이며, 둘째는 역사가의 주관이 역사를 좌지우지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이다.

첫번째 의구심에 대한 응답으로 카는 역사적 사실이 ‘사회적’으로 해석되어야 함을 주장하였고, 두 번째 염려에 대한 응답으로는 ‘과학적’ 방법의 원용을 주장했다. 그는 역사적 사실이란 그 시대와 사회의 제약으로부터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영웅, 위인, 악인들은 어쩌면 한 명의 개인이지만,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개인이 살았던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듯,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서 그것이 마침내 역사적 사실로 승화될 수 있는 맥락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이 있는 과거 사실이라야 ‘역사적 사실’로 다루어질 수 있다.

과학적 방법을 활용한다는 것은 객관화와 일반화를 의미하며, 이를 통해 인과관계를 설득력 있게 규명하는 것이다. 카는 과도한 역사가의 주관 개입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아니라 역사가에 의한 사실의 ‘왜곡’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역사가의 해석을 중시하되 그 방법은 특수성 속에서 일반화를 발견하는 과학적인 방법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카의 주장들이 필자에게는 일종의 ‘상식’으로 비쳐졌는데, 그만큼 카의 논리가 우리의 인식에 깊이 박혔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카의 논리를 흥미롭게 들여다보면서 예전에는 십분 동의했을 만한 내용이 지금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깊이 숙고해야 할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이 글은 카의 시각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하기보다는 필자가 숙고했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하도록 하겠다.1)



역사가가 없으면 역사도 없는가?


인문학에서 개념을 정의하는 것은 늘 어렵지만, 특히 역사나 종교나 철학 같은 포괄적인 개념을 ‘적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개념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어쩌면 오류의 역사이고, 좋게 보아도 ‘오류를 바로잡아가는 역사’에 불과하다. 그렇게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역사란 무엇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등의 주제는 한 권의 책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인문학의 여러 주제 중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만큼 어려운 것도 없을 것이다. 오늘날 역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태도를 제시한 카의 책 <역사란 무엇인가>가 역사의 정의를 정확하게 내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카의 책은 사실상 역사의 정의에 대한 답이라기보다는 ‘역사학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다시 말하면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오히려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카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므로, 이 상호작용은 또한 현재와 과거의 상호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한 것이다. 사실을 소유하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도 없고 열매도 맺지 않는다.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생명도 없고 의미도 없다.”(45) 과연 그러한가? 역사가가 해석하지 않은 사실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없는 것일까?

카가 역사가를 강조하는 연원에는 사실주의에 대한 비판이 자리한다. 사실주의는 역사를 사실의 객관적 편집이라 생각하고 사실의 무조건적 우월성을 주장한다. 그렇게 보면 역사의 중심은 오직 과거에 있게 된다. 그 반대에 있는 주장은 해석주의적 입장이다. 그것은 역사가 역사가의 주관적 산물이라고 하는 견해로 역사의 중심이 오직 현재에 있다는 주장이 된다. 이에 비해 카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 바로 역사라고 주장함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중시한다.(44)

필자가 문제 삼는 것은, ‘그렇다면 역사가가 존재하지 않으면 역사도 없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카의 근대적 이성중심사관을 발견한다. 역사가가 얘기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은 사실상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인식 주체’를 중시하는 근대 서양의 경험주의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서구의 역사가가 발견하기 이전의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는 역사가 아니며,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아마존 유역의 원시인들의 역사도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카의 이 책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다루었다기보다는 ‘역사학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탐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카의 명저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고전이 될 만한 탁월한 저서를 기다리고 있는 주제라 하겠다.

이에 응답하듯 김현식 교수는 역사란 일종의 ‘부활’이라고 말한다. “남아 있는 흔적을 긁어모아 사라진 것들의 소멸된 삶을 다시 일구어내는 작업”, 그것이 바로 역사라는 것이다. 김현식 교수는 그러한 부활제의 집행자로서의 역사가는 “조각을 모으고 이를 연결하여 형상을 만들며, 여기에 생기를 불어넣어 어제를 오늘에 존재케 하는 자”라고 주장한다.2) 포스트모던 시대에 걸맞는 비판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또한 역사가를 전제로 한 ‘역사’를 주장하는 셈이다.

오늘의 삶에 연결되지 않는 과거의 사실은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역사가가 해석하지 못한 의미 있는 과거의 사실을 과연 역사라 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러나 필자는 역사가가 전혀 얘기하지 않아도 역사는 흐르고 있고, 그 역사는 인간의 강물을 따라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라는 말을 쓰지 않고 이성적으로 해석하지 않아도 종교인 종교가 있듯이, 해석을 가하지 않아도 역사인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역사 연구의 목적은 자기의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력과 지배력을 늘리는 것인가?


세계 역사를 시대 구분할 때 근대는 비로소 인간 이성이 모든 판단과 사유의 중심이 된 시대를 말한다. 헤겔은 이 시기의 시작을 게르만 세계의 제3기에 해당한다고 진단하고, “게르만 세계의 제3기는 종교개혁에서 시작하여, 우리들의 시대에까지 미치고 있다. 여기에서는 자유의 원리, 정신의 원리가 세계의 기치가 되며, 이 원리에 의거해서 이성의 보편적인 원칙들이 전개된다”라고 판단했다.3) 스위스의 문화사가 J. 부르크하르트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문화>(1860)에서 르네상스를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 그리고 합리적인 사유(思惟)와 생활태도의 길을 열어 준 ‘인문주의(人文主義)’로 해석했다.

다시 말하면 근대에야 비로소 인간중심주의가 실현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민주정체가 실현되기는 했지만, 엄연히 노예제도가 있었음을 상기할 때 진정한 인간중심주의는 근대 이후에 실현되었다. 카의 역사의식은 기본적으로 이런 근대적인 사고방식의 정점에 있다. 카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자, 사회과학자 및 역사가는 모두가 같은 연구의 서로 다른 부문에 속하고 있다. 즉 어느 것이든 인간과 그 환경, 환경에 대한 인간의 작용, 인간에 대한 환경의 작용에 대한 연구인 것이다. 연구의 목적은 동일하다. 곧 자기의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력과 지배력을 늘리는 것이다.(131)


카가 예로 든 인문학의 대상은 ‘인간과 그 환경’, ‘환경에 대한 인간의 작용’, 그리고 ‘인간에 대한 환경의 작용’이다. 어느 것이든 인간과 결부되지 않는 것은 없다. 오늘날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인간을 넘어선 모든 생명체, 나아가 우주의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인간 위주의 사고방식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에서 카의 인식은 다분히 정당하다. 그러나 이들 인문학의 목적이 과연 “자기의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력과 지배력을 늘리는 것”이어야 할까? 인간의 이해력과 지배력을 늘리지 않는 역사는 의미가 없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이해력과 지배력을 늘리지 않는 역사일지라도 진실을 위해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4)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 것인가?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 것인가? 근대의 줄기찬 혁명의 시기를 직접 경험한 카의 경우에는 역사가 분명히 진보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실로 그러한 면이 분명히 있다. 근대 이후 비로소 모든 인류가 존엄하다는 인권 개념이 확립되었고, 토머스 페인 같은 혁명가에 의해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모든 인간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이 상식(common Sense)으로 천명되었으니 말이다.

카는 말한다. “진보에 대한 믿음은 결코 자동적이거나 불가피한 과정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인 발전을 믿는다는 뜻이다.”(185) 인간에 의해 계속적으로 혁명이 일어나고, 그리하여 인권 개념이 발달하고 새로운 정치체제가 성공을 거두어가던 시점에 카는 분명히 그렇게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인류가 진보한다고 볼 수는 없을지 모른다. 인권개념은 이미 2600년 전 부처님께서 확립하셨다. 모든 인류는 평등하고 누구든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음을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선포하셨다. 그럼에도 그 원칙을 다시 확인하기까지는 근 2천년이 걸려야 했으니, 역사가 무조건 진보한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사실상 인권선언을 하신 이후에도 인도 땅에서는 오히려 계급주의가 공고해졌던 것도 이를 증명한다.

물론 카는 ‘진보’라는 것을 무조건 ‘발전’이라고 보지는 않은 듯하다. 그가 말하는 진보는 “목표점(우리가 그것을 향하여 전진해야만 비로소 규정될 수 있는 목표점)을 향한 무한한 진보(전진이라고 표현해도 좋겠다 - 필자),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필요로 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한계가 없는 진보의 가능성으로 만족하려”(186) 하는 그런 ‘진보’이다. 그런 점에서 카의 진보를 긍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각은 분명 ‘효용론’적인 울타리에 갇혀 있다. 모든 학문의 목적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 목적을 향해 전진하는 것 자체가 ‘효용’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효용론’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때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기적이고 중도적인 역사관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 H. 카의 역사에 대한 논의는 통합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관점을 줄곧 견지하고 있다. 그는 역사적 진리의 영역은 ‘가치를 떠난 사실이라는 북극과 사실이 되려고 분투하는 가치판단이라는 남극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역사가는 사실과 해석, 사실과 가치의 양자 사이에 서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204) 필자는 이 지점에서 근대 서구적 이성중심주의 사관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카의 역사관이 끊임없이 참고해야 할 역사관이 되는 이유를 발견했다. 그는 서구중심적 진보주의 사관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통합적이면서도 상호의존적인 관점으로 이를 보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호의존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의 역사관을 필자는 연기론적 역사관이라고 이름붙여 본다. 연기론적 역사관은 어떠한 역사적 사실도 독립되어 존재하거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이루는 내적이고 외적인 요인이 모두 인연으로 얽혀 있다는 관점이다. 다만 인간은 미래(불교의 경우 깨달음 혹은 열반)에 대한 희망을 끊임없이 추구해나간다는 점에서 ‘진화론적 역사관’이라고 해도 될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시 카의 말로 돌아올 수도 있다. “미래를 향한 진보 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상실해버린 사회는 곧 과거에 스스로 이룩한 진보에 대해서도 무관심해질 것이다.”(205)

1961년 카가 이 책의 내용이 되는 강연을 마친 후 역사는 급변했다. 1982년 타계하기 전에 써놓은 2판의 서문에서 그는 급변하고 있는 역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세계적인 희망의 시대에 대해 언급한 후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이러한 조건들은 내가 1961년에 강연을 끝마쳤을 때 표명했던 낙관주의와 미래에 대한 신념에 피상적이나마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후 계속된 20년은 이러한 희망들과 만족감을 좌절시켰다. (……) 제3세계는 국제사회의 수동적인 요소에서 능동적이고 시끌벅적한 요소로 변했다.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낙관주의를 표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처럼 보이게끔 되어버렸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는 낙관한다. 아니, 낙관하고자 노력한다. “나는 분명히 신념과 낙관주의로 가득 찬 빅토리아 시대 중에서도 대낮이 아닌 저녁놀 속에서 성장하여 아직도 글을 쓰고 있는 극소수의 지식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며,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끊임없이 또한 돌이킬 수 없이 쇠퇴하고 있는 세계를 생각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어려운 일이다.”6)

실로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진보주의 역사가의 아름다운 유언이 아닌가. 세상의 존재방식을 부처님께서 연기론으로 정리했듯이 역사 또한 연기적이다. 연기적이라는 것은 곧 중도적인 것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연기론이 존재론에 가깝다면 중도론은실천론에 가깝다. 중도(中道)는 구체적으로 팔정도(八正道)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상황에 따른 ‘파도타기’에 비유할 수 있다. 파도타기는 변화무쌍한 파도의 흐름을 유연하게 따라가는 것이다. 유연하게 따라가지 못하면 바닷물 속에 가라앉고 만다. 그 파도타기가 가는 종점은 열반(nirvana)이다. 그것은 변증법보다 더 발전적인 진보의 법칙이다. 역사는 연기적으로 존재하지만 중도의 역사적인 실천에 의해 발전(불교식으로 얘기하면 ‘불국토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진보주의자 E. H. 카의 역사관은 연기론과 중도론으로 풀어봄직하다.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역사를 중도라는 실천원리를 통해 발전시켜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역사적 사명이다. 필자는 카의 역사관을 몇 가지 관점에서 비판했지만, 중도적 관점에서 다시 대긍정할 수밖에 없다.



1) 이 글을 위해 읽은 책은 이화승 옮김, <역사란 무엇인가>(베이직북스, 2011)와 김택현 옮김, <역사란 무엇인가>(까치, 1997)인데, 이 글에서는 주로 ‘이화승 옮김’을 인용하도록 하겠다. 괄호 안에 숫자는 이 책의 쪽수를 말한다.

2) 김현식, <(포스트모던 시대의) 역사란 무엇인가>, 휴머니스트, 2006, 73쪽.

3)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김종호 옮김, <역사철학강의>, 삼성출판사, 1988, 363쪽.

4) 이에 대해서도 김현식 교수는 필자와 비슷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김현식, 앞의 책, 71쪽.

5) E. H. 카, 김택현 옮김,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 1997, 10쪽.

6) 위의 책,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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