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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향기

프로메테우스 ost

by 아프로뒷태 2012. 6. 24.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는 어떤 이야기인가?

엘리자베스 쇼박사와 피터 웨이랜드 박사는 2085년 스코틀랜드 스카이 섬에서 선사시대의 벽화를 발견한다. 그 벽화의 그림들 중에 여섯 개의 별 그림은 지구 곳곳에서 발견된 벽화의 문양과 일치한다. 쇼와 피터는 그것이 우주의 어딘가에서 외계인이 지구인에게 보낸 초대장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불멸을 찾아 영생을 바라는 웨이랜드사의 회장과 협력하고 1조원의 투자로 우주비행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그들은 우주에서 지구와 흡사한 행성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엔지니어'라 불리는 인간의 창조주를 만난다. 참고로 그들이 창조주라는 것은 쇼박사의 DNA실험결과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쇼박사는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 엔지니어, 즉 인간의 창조주가 인간을 말살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엔지니어들은 이 행성에서 생체병기를 생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고로 모두 죽게 되었고 유일하게 한 명의 엔지니어만 살아남아 오랜 시간동안 잠들어 있었다. 엔지니어들이 생산한 생체병기는 <에어리언>이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탐사대는 엔지니어와 <에어리언>과의 싸움으로 하나둘 희생당하고 쇼박사와 인간로봇 데이빗만 살아남는다. 쇼박사와 데이빗은 지구로 돌아가지 않고, 인류 탄생의 비밀을 풀고자 엔지니어의 고향으로 떠난다.

 

 

 

 

영화에서 생각해볼 문제들. 인공로봇 데이빗은 인간보다 못한가? 우월한가?

 

영화에서 탐사대원들이 엔지니어가 머물렀던 행성으로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는 데이빗이다. 데이빗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 로봇이다. 그러나 데이빗의 행위는 때론 인간보다 우월할 때가 있다.

그렇다면 인공로봇, 데이빗을 인간으로 볼 수 있을까? 그동안 인공로봇, 복제인간의 정체성 논의는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이미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접해왔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A.I>, <아일랜드>,<블러이드 러너> 영화속에서 드러났는데, 인공로봇과 복제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프로메테우스의 데이빗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한다. 데이빗이 인간이 되려는 욕망은 탐사대가 엔지니어를 찾아 떠나는 욕망과 대조되어 질문에 답을 드러낸다. 데이빗은 피터박사에게 왜 창조주를 찾으려고 하는가? 창조주를 찾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반대로  피터박사는 데이빗에게 왜 인간이 되고 싶냐고 질문한다. 그 질문에 데이빗은 인간이 호기심에서 창조주를 찾아 떠나는 우주여행을 떠나려는 것 아니냐. 그것은 로봇이 인간이 되려는 마음과 인간이 창조주를 찾으려는 마음과 무엇이 다르겠냐고. 말한다.

 

그렇다면 데이빗과 인간은 같은 존재인가? 프로메테우스는 인간과 인공로봇의 차이점으로 강조하는 것이 감정이다. 쇼 박사는 데이빗에게 인공로봇과 인간의 다른 점은 “감정” 느낄 수 있는 거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정말 감정을 느끼는 존재는 인간뿐일까? 그것은 인간중심주의 사고에서 나온 발상이 아닐까? 인간이 해석하지 못할 뿐, 감정을 느끼는 존재는 무수히 많을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을 제외한 다른 생명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섣부른 판단이다. 그것은 인간중심주의 발상에서 나온 추론이다. 그것은 인간이 이해하고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한 일, 미스터리한 것에 대한 경계에서 결론지은 발상이다. 어딘가에 감정을 가진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지구상에서 인간을 제외한 생명체나 지구밖에 생명체는 감정이 없다고 결론 내리기에는 인간중심주의 사고가 짙게 깔려 있으며 다소 성급한 오류가 있다. 그렇다면 섣부른 판단으로 결론짓지 말고, 인간은 이처럼 미스터리한 일들에 여지를 남겨야 한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찾아나서야 한다. 쇼박사가 지구로 돌아가지 않고 인간의 창조주를 찾아 엔지니어의 고향으로 돌아갔듯. 감정을 느끼는 다른 생명체가 있는지 없는지는 인류가 풀어나가야 할 숙명적인 과제이다. 어쩌면 풀리지 않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창조주, 탐사의 시작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집트, 수메르, 하와이, 메소포타미야, 스코틀랜드 등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 공통 때문에 우주탐사는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은 맞지만 그보다 탐사대나 데이빗이 탐사를 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한 것은 바로 '믿음'이다. 즉 희망이다. 믿음과 희망이 없다면 진보나 별견은 없을 거라는 것이 프로메테우스가 말해주는 소주제이기도 하다. 영화안에 또다른 영화가 보여지는데, 그 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군인이 성냥불을 맨손으로 끄자, 다른 군인이 뜨겁지 않냐고 묻는다. 그의 질문에 그 군인이 말한다. '뜨겁지 않다고 믿는 거야.' 그렇다. 탐사대나 데이빗이나 모두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희망이 있다고 믿는 거다. 지구밖 어딘가에 생명이 사는 거라고 믿는 거다. 신이 아닌 인간의 조상이 살고 있는 거라고 믿는 거다. 그래야 우주탐사든 뭐든지 시작할 수 있다.

 

 

 

 

인간은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믿어야 한다. 그래야 움직일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우주 어딘가에 외계에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왔고 그들을 찾아왔다. 또한 인류의 탄생근원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지구상의 모든 것은 가정과 추측으로 난무할 뿐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창조주가 엔지니어라고 제시한다. 다소 큰 와 체격을 지녔지만 인간의 형상을 한 엔지니어를 말이다. 그러나 다소 충격적인 것은 인간을 창조한 엔지니어들이 인간종족을 다시 말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조물주가 자신의 창작품을 완성한 뒤, 후회하는 꼴이라니. 그건 마치 하늘에 계신 신이 인간을 창조한 뒤, 후회하며 아담과 이브를 벌하려고 하는 것과 흡사하다. 왜 그런 말이 나오는 걸까? 그만큼 인간이 봐도 인간이라는 종족은 징글징글하다는 것이 아닐까? 협오스럽고, 폭력적이며, 위선적인....

 

 

 

 

지구야! 인류구원은 우리가 할게! 프로메테우스에 여전히 미국의 영웅주의가 드러나 있다.

 

지구로 떠나는 엔지니어의 우주선과 그것을 막는 프로메테우스호를 떠올려 보자. 프로메테우스가 엔지니어의 우주선과 충돌하는 장면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국 영웅 신화 만들기와 유사하다.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제5원소>재난영화에서 미지의 행성이 지구를 향해 달려와 충돌하는 위협이 있는 가운데, 이를 막기위해 나서는 자는 미국의 평범한 가장이다. 지구로 날아오는 행성으로 돌진하는 우주선의 모습은 지구의 평화와 안녕, 인간을 지키는 국가가 미국임을 세계에 암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미국 영웅주의 신화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눈이 닳도록 보아왔다. 그런 모습이 프로메테우스호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제발, 리틀리 스콧 감독, 그건 자제해주길..... 그와 반대로 미국이 지구를 아끼고 염려하고 있음을 리들리 스콧이 말해주려는 의도가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그만큼 지구가 아름답고 가치있는 행성이기 때문이다.

 

 

 

그래, 그만큼 지구는 아름답다.

 

리틀리 스콧 감독은 지구가 아름다운 행성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프롤로그에서 광활한 자연의 광경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끝을 알 수 없는 높고 낮은 산맥과 강, 들과 평원, 그리고 폭포를 비춘다. 1분여정도 지속되는 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절경을 보고 있노라면, 지구에 사는 나는 지구인이라는 것이 새삼 행복하게 느껴지며 마치 신의 경지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든다.

 

<프로메테우스>는 왜 <에어리언>의 프리퀄, 즉 에어리언의 전편이야기를 다루려는 영화처럼 보였을까?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주공간에서 인간을 위협하는 또다른 존재는 없을까? 에어리언일까? 아니면 인간의 창조주일까? 리들리 스콧은 그 답을 끊임없이 찾으려 한다. 현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조상이나 뿌리를 찾아 떠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인간이 존재의의를 찾으려는 본능과 같다. 인간은 탐사과정에서 현재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으므로. 오래전부터 여행이나 탐사가 갖는 의미는 기원을 찾는 일이었다.

 

오든은 (W. H. Auden)은『The quest Hero』에서 탐색에 대한 정의를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한 그 어떤 것을 찾음을 뜻한다고 하였다. 즉 탐색이란 서사 문학의 서사 그 자체이며, 잃어버린 것 혹은 더 나은 것을 향해 가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또는 잠재적이거나 드러나지 않은 것과 불가사의하거나 불가지(不可知)한 어떠한 것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때 특히 탐색의 영웅들은 무속 서사시의 주인공들이 주류를 이루는데, 신보다 인간의 편에 서서 신의 세계를 열고 인간 그 궁극적인 욕구인 신의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영웅에 관한 신화는 영웅의 사명에 초점을 두며, 영웅은 그 사명의 완수를 위한 탐색에 나선다. 따라서 서사 문학의 전통은 탐색 신화로부터 비롯되고 있으며, 탐색신화에 의해 인간이 바라는 새로운 세계와 설립되어야 할 세계가 창조된다. ‘찾음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무속 서사시의 모형을 담고 있는 탐색담은 ‘없음’의 상황에서부터 시작하여 탐색의 과정을 거쳐 ‘획득’된 상황에서 끝맺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결여의 상태로 시작된다면 탐색자(파견자)가 필요한 상황이 된다. 실제로 프롭(Vladimir Propp)은 민담의 최초의 상황을 ‘가족의 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 부재중이다.’로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탐색담은 존재의 처음과 끝,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으며, 출발과 위기를 거쳐 최종의 결과에 이르는 변화를 걸음으로써 주인공의 정신적 각성의 어떤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 즉, 탐색담은 살아가면서 이뤄내야 할 정신적 성취란 어떤 것인가라는 것을 계속해서 묻는 것이다. 따라서 탐색구조는 신화적 특성이 드러나기 마련이며 ‘탐색’이라는 용어 자체가 탐색신화를 근거로 한다.

 

인간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하다. 비록 자신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지만, 탐색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과감히 모험의 길을 떠난다. 인간은 탐색물을 구하는 모험의 과정에서 시련도 겪고 자아를 뒤돌아보게 되어 자신의 내면적 성숙을 고양시키게 된다. 탐색담들은 전 세계에 걸쳐 넓게 분포되어 있다. 탐색 모티프를 삽입시킨 작품이 왜 많은 대중에게 읽혀지고 창작되어지는 이유는 대부분의 인간이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나 모험심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성향 때문에 탐색담은 고대에서부터 현재까지 작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창작되어져 많은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탐색담은 신화, 전설, 민담, 무가, 판소리를 비롯한 구비문학에서부터 출발하여 고전소설에 그 절정을 이루다가 현대소설에까지 그 범위가 확산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우주 여행을 통해 미래가 아닌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뭘 어쩌려는 걸까? 그것은 현재 존재하는 것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영생을 얻는 것은 인간이 운명을 거스르는 악덕이다. 인간 존재는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비단 인간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상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탄생과 동시에 죽음이라는 운명을 안고 있다.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은 없다. 그래서 인간은 삶의 가치를 죽기 전에 어떻게 잘 살아가느냐에 두기도 한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일이다.

<블레이드 러너>, <에어리언> <프로메테우스> 철학 영화이다. 인류의 근원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인간이 나아가야 할 미래에 대해 미리 보여준다. 그리고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은 드물다. 리틀리 스콧 감독이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물주를 알아내어서 영생을 꿈꾸는 것일까? 우리는 현재를 현미경 관찰하듯 관찰해야 한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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