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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향기

크리스트퍼 놀란, 다크나이트 라이즈, 조커

by 아프로뒷태 2012. 6. 30.

2005년 <배트맨 비긴즈>로 시작한 크리스토퍼 놀런의 배트맨 3부작이 2008년 <다크 나이트>를 거쳐 2012년 <다크 나이트 라이즈>로 끝을 맺는다. 한국에서도 7월 19일 개봉 예정이다.

팀 버튼의 <배트맨>(1989년)과 <배트맨 리턴즈>(1992년) 이후 점점 그저 그런 액션 오락 영화로 전락했던 배트맨을 되살린 크리스토퍼 놀런 배트맨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기에 그 기대감은 세계적인 규모로 조성 중이다. 가깝게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멀게는 인터넷으로 그 기대감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 (왼쪽부터) <배트맨 비긴즈>(2005),. <다크 나이트>(2008),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 포스터.

한국에서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7월 20일에 개봉하는 미국보다 하루 빨리 개봉하는 셈이라 개봉 당일 극장에는 아마 외국인 관객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벤저스> 개봉 당시에도 좌석 한 열을 외국인들이 채웠는데, 자막을 보고 반응하는 한국 관객과는 다른 부분에서 웃는 등 반응을 시간차로 보이는 것이 꽤 흥미로웠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경우 전작들을 돌이켜볼 때 웃을 만한 구석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므로 시간차 웃음소리를 들을 일은 많지 않겠지만.

어찌 보면
세계적인 이벤트가 된 <다크 나이트 라이즈> 개봉을 앞두고 '프레시안 books'로부터 배트맨에 집중하는 글을 실어보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제안
을 받았다. 망설일 수밖에 없는 제안인 것이, 포털 사이트 검색창이나 서브컬처를 다루는 위키 등에 '배트맨'이라는 세 글자만 쳐보아도 배트맨에 대한 흥미진진한 글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염치없게도 이렇게 배트맨에 대해서 뭔가를 쓰고 있는데, 그 글들에 담긴
정보를 '나'라는 기계에 한데 모아 넣고 재분류하고 다듬고 가공하여 내놓는 글도 어떤 가치를 갖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나 미취학 아동 시절 아마도 불법으로 복제한 (1960년대 TV 시리즈 <배트맨>의)
자동차 '배트모빌'을 가지고 놀면서 배트맨을 처음 접했던 입장에서, 흑백텔레비전으로 슈퍼맨과 함께 배트맨이 나오는 애니메이션 <슈퍼 특공대>(Superfriends)와 AFKN에서 방영하던 1960년대 TV 시리즈 <배트맨>를 봤던 입장에서 배트맨이라는 캐릭터
를 직접 정리해보고 싶다는 욕심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래서 배트맨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철저하게 배제하지는 못할 것 같다. 배트맨이 어린 남자아이들에게 남겨준 강렬한
인상은 나 같은 보통 독자뿐 아니라 배트맨의 스토리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창작자들도 작품
후기에서 빠짐없이 토로하는 바이니 이 점 미리 양해를 부탁드리고 싶다.

▲ 1960년대 TV 시리즈.
▲ 1960년대 TV시리즈에 등장하는 '배트모빌'

걱정이 된 부분이 하나 더 있다. 3월 초 진행된 '마니아 서재' 코너의 '슈퍼 히어로 코믹스 ① 슈퍼맨 대 배트맨'(☞바로 가기)이라는 제목으로 이미 배트맨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리한 바 있다. 당시의 글은 슈퍼맨과 배트맨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부각한 글로 슈퍼맨과 배트맨이 함께 등장하는 작품들도 많이 언급했다.

이번에는 보다 더 배트맨에 집중하여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의 기원과 역사로 시작해 국내
번역 출간된 그래픽 노블영화
애니메이션을 통해 배트맨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뤄볼 예정이다. 이미 배트맨에 정통한 이들이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아직 배트맨이 낯선 이들에게 나침반과 같은 정보들을 제공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덧붙이자면 '슈퍼 히어로 코믹스 ① 슈퍼맨 대 배트맨'의 또 다른 제목인 "슈퍼맨이 배트맨을 절대 이기지 못하는 이유"는 본문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슈퍼맨이 배트맨을 항상 절대 이기지 못한다기보다는 몇몇 작품에 국한된 결과이다. 작가가 어떤 캐릭터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두 히어로 간의 관계나 승패는 수시로 바뀐다.

다만 초능력을 가진 슈퍼맨이 초능력 없는 보통 인간인 배트맨에게 종종 패배하는 경우가 있어 그 점을 부각하다 보니 약간은 도발적인 제목이 붙게 되었다. 슈퍼맨에게는 슈퍼맨의 강점과 약점이, 배트맨에게는 배트맨의 강점과 약점이 있다. 이 둘은 영원한 라이벌이며
기획
과 작가와 작품에 따라 심지어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이나 한 작품 안에서도 둘의 경쟁과 싸움은 장군 멍군을 거듭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두 영웅은 악당들에게 맞서 협동한다. 저스티스 리그라는
이름
아래.

배트맨의 기원 : 만화 밖에서

브루스 웨인은 어떻게 해서 배트맨이 되었는가. 일단 영화 <배트맨>(1989년), <배트맨 비긴즈>(2005년)를 보면 그 내막을 알 수 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브루스 웨인은 어려서 (악당들에게)
부모님
을 잃고요.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술을 익혔더래요." 다시 고담 시로 돌아와 배트맨이 되는 과정은 <배트맨 비긴즈>가 이견의 여지없이 확실히 재정리를 해두었다.

그렇다면, 배트맨이라는 캐릭터 자체는 어떻게 탄생 즉 창작되었을까? '슈퍼 히어로 코믹스① 슈퍼맨 대 배트맨'에서 라이벌로 다룬 슈퍼맨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38년 6월, <액션 코믹스> 1호에서 첫 선을 보인 슈퍼맨은 창간호만 20만 부를
인쇄하고 <액션 코믹스> 7호부터 매달 50만부로, 곧 90만 부로 판매
부수가 늘어난 뒤 1939년에는 <슈퍼맨>이라는 독립된 이름으로 출간되어 130부씩 꾸준히 팔려나갔다.

<액션 코믹스>를 출간한
출판사 디텍티브 코믹스(Detective Comics, 'DC 코믹스'의 전신)의 편집장 빈 설리번은 슈퍼맨의 엄청난 성공에 자극 받아 더 많은 히어로들을 기획하려 했다. 이 기획에 부응한 이가 바로 당시 스물세 살이었던 만화
가 밥 케인(1915~1998년)이다.

밥 케인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행기(ornithopter, 오니솝터라고
날개를 펄럭이며 나는 비행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와 당시 유명한 배우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주연했던 영화 <마스크
오브 조로(The Mark of Zorro)>(1920년)의 가면 쓴 영웅 조로를 결합한 배트맨을 고안해 내었다.

1926년에 나온 무성 영화 <박쥐(The Bat)> 역시 배트맨의 아이디어에 큰 기여를 했다. 이 영화에는 박쥐 가면을 쓴 살인자가 등장하여 배트맨처럼 갈고리와 밧줄을 사용해
건물 위로 올라가고 배트 시그널(경찰이 배트맨을 부를 때 사용하는 박쥐 모양의 불빛) 역시 등장한다. 이 신호를 살해할 대상들에게 공포
를 심어주기 위해 사용한다는 점이 배트맨과 다르다.

▲ 롤랜드 웨스트의 <박쥐>
이 영화는 저작권이 소멸된 퍼블릭 도메인 작품으로 인터넷 아카이브(☞바로 가기)에서 시청 및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다. (☞바로 가기) <박쥐>의 제작자이자 감독인 롤랜드 웨스트는 <박쥐>를 1933년에 유성 영화 <박쥐의 속삭임(The Bat Whispers)>으로 다시 만들었다. 배트맨을 디자인한 밥 케인은 이 <박쥐의 속삭임>의 여러 요소가 배트맨 창조에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밥 케인의 요청에 따라 배트맨의 스토리 작가로 합류한 빌
핑거(1914~1974년)는 밥 케인의 아이디어를 더 정교하게 가다듬어 현재 우리가 접하는 배트맨의 이미지
를 만들어내었다. 검은색과 회색 계통의 어두운 복장에 박쥐의 귀처럼 양쪽이 뾰족 솟은 가면과 박쥐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펄럭이는 망토는 빌 핑거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부분이다.

밥 케인과 빌 핑거에 의해 탄생한 배트맨은 1939년 5월 <디텍티브 코믹스(Detective Comics)> 27호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2010년의 경매에서
100만 달러 이상으로 팔린 <디텍티브 코믹스> 27호에 배트맨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여섯 쪽 분량의 "화학
기업 사건(The Case of the Chemical Syndicate)"으로 그 내용은 분량에 걸맞게 간소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에서 게리 올드먼이
연기하고 있는 제임스 고든 서장의 집에 친구 브루스 웨인이 방문한다. 요즘 뭐 재미있는 일 없냐는 브루스 웨인의 질문에 고든은 "배트맨이라고 불리는 자가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 때 전화벨이 울리고 고든은 화학 회사의 경영자
가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칼에는 경영자의 아들 지문이 묻어있지만 아들은 범행을 강력히
부인
한다. 그 때 경영자의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경영자 대신 전화를 받은 고든에게 그는 며칠 전 화학 회사 경영자가 살해 협박을 받았는데 최근에 자신 역시 똑같은 협박을 받았다며 자신이 다음 차례가 될까 두렵다고 토로한다. 고든의 제안에 따라 함께 사건 현장에 있던 브루스 웨인은 전화통화를 듣고는 고든에게 할 일이 있다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보겠다고 말한다. 그 와중에 경영자의 집에 전화를 걸었던 이는 결국 자택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살해된다.

지붕에서 대기하던 배트맨은 괴한들을 때려눕히고 단서를 얻어 배후의 진범을 추적한다. 그리고 화학 공장에서 진범으로부터 다음 희생자를 구해낸다. 진범은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들고 쏘다가 배트맨의 주먹을 맞고 산성 용액이 가득 찬 통 속에 빠지게 된다. 배트맨은 그 광경을 바라
보며 담담히 말한다.

"저런 부류에게 딱 맞는 최후로군(A
FITTING
ENDING FOR HIS KIND)."

산성 용액 탱크에 악당이 빠지는 상황은 후에 영화 <배트맨>(1989년)에서 반복된다.

▲ <디텍티브 코믹스> 27호에 등장하는 배트맨.

이렇게 악당의 목숨을 빼앗고도 아무 거리낌이 없는 배트맨의 모습은 박쥐 귀가 바로 귀 옆에 붙어 있는 가면 만큼이나 낯설다. 최근의 배트맨의 경우 아무리 악당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는 불살의 영웅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초창기의 배트맨은 이처럼 악당의 목숨을 빼앗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여섯 쪽 정도의 분량이다 보니 액션도 주먹으로 때려눕히는 것 외에는 없다. 하지만 이 첫 등장부터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는 특징이라면 배트맨이 단서를 수집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Detective)이라는 점이다.

배트맨이 첫 등장한 <디텍티브 코믹스> 27호는 온라인 문서 공유 사이트 '스트리브드(www.scribd.com)'에서 볼 수 있다. (☞
바로 가기
)

배트맨의 기원 : 만화 안에서

▲ <디텍티브 코믹스> 33호.
<디텍티브 코믹스>에서 계속 탐정 활동을 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악당을 살해하는 배트맨. 그 탄생의 계기는 1939년 11월에 출간된 <디텍티브 코믹스> 33호에서 단 두 쪽에 걸쳐 설명된다. 아내 그리고 아들 브루스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토머스 웨인을 총을 든 괴한이 막아선다. 아내의 목걸이를 빼앗아가려는 괴한을 저지하던 토머스 웨인과 아내는 괴한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홀로 남게 된 소년 브루스 웨인은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 모든 범죄자들과 싸우겠다고 다짐한다.

수년에 걸쳐 뛰어난
과학적 지식과 체력을 연마
한 브루스 웨인은 어느 날 벽난로 앞 안락의자에 앉아 어떻게 하면 범죄자들을 겁먹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 때 열려있던 창문으로 해답이 날아 들어온다. 바로 거대한 박쥐.

"박쥐! 저거야! 이건 계시(omen)다…. 나는 박쥐가 되어야 해!"

이렇게 해서 배트맨이 탄생하게 된다.

▲ <배트맨 이어 원>(프랭크 밀러·데이비드 마추켈리 지음, 리치먼드 루이스 그림, 곽경신 옮김,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btn
이 과정은 수많은 배트맨 창작물에서 조금씩 변주되어 반복된다. 가령 <배트맨 : 이어 원>(프랭크 밀러, 데이비드 마추켈리 지음, 리치먼드 루이스 그림, 곽경신 옮김, 세미콜론 펴냄)에서 브루스 웨인 가족은 영화 쾌걸 조로를 보고 돌아오다가 괴한을 만나게 된다. 박쥐 역시 열린 창문으로 날아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닫힌 창문의 유리창을 깨고 날아 들어온다.

괴한의 이름도 <디텍티브 코믹스> 33호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1948년에 출간된 <배트맨> 47호에서 조 칠(본명 조셉 칠튼)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하지만 팀 버튼의 영화 <배트맨>에서 브루스 웨인의 부모를 살해하는 괴한은 후에 조커가 되는 잭 네이피어(잭 니콜슨)이다. <배트맨 비긴즈>(2005년)에서도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되는 과정은 <디텍티브 코믹스> 33호를 기초로 변주된다.

결국 배트맨의 탄생과 활약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복수심이다. 그 복수심은 범죄자 개인에 대한 증오로 흐르지 않고 범죄 자체를 막는 것에 집중하는 높은 경지로 승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커를 비롯해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잔인무도한 악당들이 심지어 자신과 가까운 사이의 사람들을 살해하거나 크게 다치게 하더라도 배트맨은 그 악당을 죽이지 않고 기어이 생포하여 아캄 정신병원에 집어넣는다. 아무리 초인적인 능력이 없는 배트맨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초인적인 인내심만 보자면 배트맨을 슈퍼 히어로라고 부를 만 하다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한다.

배트맨은 왜 죽이지 않는가?

하지만 부모님을 잃은 사건으로 촉발된 분노와 증오는 여전히 배트맨의 가슴 깊숙이 남아있다. 마치 언제든 폭발할 것만 같은 시한폭탄처럼. 그 복수심을 수시로 억누르는 배트맨의 모습을 우리는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수시로 감지할 수 있다. 때로는 결국 억제하는 데 실패하여 광기로 치닫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이렇게 언제든 터질 수 있는 복수심과 범죄자들에 대한 증오를 억누르는 배트맨의 아슬아슬한 내적 갈등은 이제는 배트맨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매력으로 거론된다. 영미 쪽 독자들도 왜 배트맨은 악당을 죽이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이 수시로 제기되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답변은 대개 이렇다. 아무리 악당이라도 일단 생명을 빼앗으면 자신 역시 그 악당과 다를 바 없어진다는 투철한 윤리 의식과 명예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배트맨의 이 어둡고 복잡한 매력이 처음부터 설정되지 않았음을 <디텍티브 코믹스> 27호를 비롯한 초창기 배트맨에서 잘 알 수 있다. 초창기 배트맨은 악당을 살해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심지어 사람의 목숨을 아주 빠르고 간편하게 빼앗을 수 있는 총도 사용한다. 생명을 빼앗는 무기라는 공적 이유와 부모님의 목숨을 빼앗아간 물건이라는 사적 이유로 배트맨이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총기를 말이다.

그렇다면, 배트맨은 언제부터 불살생을 철칙으로 삼게 되었을까? 혹시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걸쳐 가혹하게 진행되었던 미국 내 만화 규제 때문이었을까? 인터넷에서 왜 배트맨은 악당을 절대 죽이지 않는지 검색하면 1948년과 1954년의 가혹했던 만화 규제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언급된다.

▲ "우리는 어떤 무기로도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배트맨의 불살(不殺)은 공식적인 규제와는 별개로 일찍부터 정립되었다. 배트맨의 가치에 주목하여 배트맨을 디텍티브 코믹스로부터 독립시킨 DC 코믹스의 편집장 휘트니 엘스워스의 지시에 따라 배트맨은 총기를 비롯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기 시작했다. 웹진 코믹스 얼라이언스(☞바로 가기)의 수석 필자 크리스 심스는 "크리스에게 (배트맨에 대해서) 물어보세요. #54 왜 배트맨은 살생을 하지 않나요?(Ask Chris (About Batman) #54: Why Doesn't Batman Kill?)"라는 글에서 정확히 <배트맨> 4호에서 배트맨이 로빈에게 "우리는 어떤 무기로든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라고 딱 잘라 말했음을 알려준다. 총을 지니고 악당을 살해했던 배트맨의 모습은 겨우 2년도 지속되지 않았기에 무시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크리스 심스를 비롯한 골수 팬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시에는 일본군을 향해 기관총을 쏘는 배트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후로도 아주 가끔 총기 사용 금지 정책이 무시되는 작품을 볼 수 있다.)

만화 규제와 배트맨

그렇다면, 일찍부터 총기 사용과 살생을 금해온 배트맨은 이후 진행된 규제로부터 자유로웠을까? 결코 그렇지 못했다.

우선 미국 만화계가 어떤 규제를 겪었는지를 간략히 살펴보자. 제2차 세계 대전 직후부터 미국에서도 만화의 유해론이 제기되었다. 1947년
경찰공제조합을 비롯해 사회에서 만화가 범죄를 멋진 것으로 묘사한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이듬해 만화를 출간하는 출판사들은 '만화 잡지 출판 협회
(Association of Comics Magazine Publishers)'를 결성하고 만화에 대한 자율 규제에 들어갔다. 범죄를 긍정하거나 동정하는 묘사뿐 아니라 폭력과 선정적인 장면을 자체 규제했다. 하지만 만화는 시장성과 창작자들의 열정에 따라 더욱 급진적인 매체가 되어갔다. 당연히 보수주의자들의 만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역시 커져갔다.

▲ CCA 승인 마크.
1954년에 정신의학자 프레드릭 웨덤(1895~1981년)은 자신의 저서 <순수의 유혹(Seduction of the Innocent)>을 통해 만화가 아이들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는 지에 대해 열렬히 설파했다. 마침 만화와 청소년 비행의 상관관계에 주목하던 미국 의회는 웨덤의 주장을 적극 받아들여 만화 관련 청문회를 열었고 '만화 잡지 출판 협회'는 기존의 자율 규제보다 한층 강화된 규율 단체인 CCA(Comics Code Authority)를 마련했다. 모든 만화책은 CCA의 승인을 받았다는 마크가 찍혀야 출간될 수 있었다. CCA가 발효되자 1954년에 650개였던 만화 종수가 1956년에 300여 개가 될 정도로 만화 산업은 위축되었다.

배트맨 역시 이런 규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데 일단 악당들이 사용하는 폭력의 수준이
문제가 되었다. 미친 살인마 조커조차 살인을 하지 않고 범죄 역시 우스꽝스러운 광대 짓만 일삼는 캐릭터가 되었다. 가령 수돗물에 태연히 독을 풀어 고담시를 위협하던 조커가 수돗물을 젤리로 만든다거나 좋은
성적을 받은 아이의 성적표를 훔쳐 아이를 울린다거나…. 하지만 배트맨이 이 혹독한 시절을 이 정도로만 겪은 것은 아니다. 프레드릭 웨덤이 책 <순수의 유혹>에서 배트맨을 콕 집어 공격했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웨덤이 배트맨에 가한 공세가 이후 배트맨 시리즈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자세히 말하고자 한다.

▲ "조커가 성적표를 훔쳐갔어요!"

 

 

프랭크 밀러의 손에 되살아난 배트맨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

▲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프랭크 밀러 외 지음, 김지선 옮김,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btn
1986년,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김지선 옮김, 세미콜론 펴냄)가 출간되었다. 1939년 5월 <디텍티브 코믹스(Detective Comics)> 27호에 첫 등장하여 47년 후 작화가이자 스토리 작가인 프랭크 밀러의 손에 재탄생한 배트맨은 이전의 그 어떤 배트맨보다 더 '다크'한 배트맨으로 거듭났다. 이 작품은 단지 분위기 차원에서만 전작들의 관성을 깨뜨린 것은 아니다.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작품의 기본 설정 면에서 여러 파격을 선보인 작품으로, 모던 배트맨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배트맨 시리즈는 대체로 '현재 혹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삼아왔는데,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배트맨, 브루스 웨인의 나이를 명확히 제시하여 작품의 배경이 근미래임을 못 박았다. 이전 작품에서는 브루스 웨인의 나이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작품에 따라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로 추정되지만 나이에 얽매이지 않는 최상의 신체적 능력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브루스 웨인은 2대 로빈 제이슨 토드의 죽음 이후 배트맨 활동을 그만두고 은퇴한 지 10년이 된 쉰다섯 살의 장년 남성이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노릇을 그만두었음을 선언이나 하듯 콧수염까지 기르고 다니고, 10대 청소년들은 배트맨을 전설 속의 인물 정도로 생각한다.

▲ 수염을 기른 브루스 웨인.

70세가 된 제임스 고든 국장과 배트맨이 존재했던 고담시를 회상하던 브루스 웨인. 그는 다시 범죄가 만연하게 된 고담시의 풍경에서 어린 시절 범죄자에게 부모를 잃은 과거를 떠올리고, 배트맨 복장을 새롭게 갖춰 입는다. 범죄자들을 응징하는 배트맨의 재등장을 두고, 공권력 너머에서 범죄자를 응징하는 히어로에 대한 찬반의 목소리가 고담시의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혹은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까지 흘러넘친다.

작품에서 프랭크 밀러는 텔레비전 보도와 토론 장면의 대사와 연출에 특히 공들였는데, 이는 독자들에게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를 더 깊이 있게 생각하게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찬성의 목소리만 모아
보면 배트맨의 행동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반대의 목소리에는 누구도 법 바깥에서 정의를 실현하려 해서는 안 되며 법의 통제에서 벗어난 자의적인 정의 실현은 법 위에 세워진 공동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가 담겨있다.

배트맨의 재등장이 여론만 술렁이게 한 것은 아니다. 배트맨이 '돌연변이 갱(The Mutant)'이라 불리는 새 세대의 범죄자들을 응징하는 동안 투 페이스나 조커와 같은 배트맨의 전통적인 숙적들이 다시 준동한다. 프랭크 밀러의 묘사에 따르면, 이 숙적들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배트맨에게서 찾는다,
정신병원에 갇혀있던 조커가 뉴스를 통해 배트맨의 재등장 소식을 접하고 잃어버렸던 '살인 미소'를 되찾는 연출이 이를 대표한다. 돌아온 조커는 여론이 배트맨을 비난하는 또 다른 빌미가 된다. 결국 제임스 고든에 뒤이어 신임 경찰
이 된 국장 엘렌 인들은 배트맨을 체포하고자 한다.

배트맨에 대한 압박은 고담시 바깥으로부터도 엄습한다.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가 미국에서 출간된 시기는 냉전이 한창이던 1986년이다. 소련이 미국을 향해 핵미사일을 발사하고 슈퍼맨은 이를 가까스로 사람이 살지 않는 사막에 떨어뜨린다. 그러나 폭발로 인해 미국 전역이 정전과 핵겨울로 인한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된다. 고담시의 경우 배트맨과 전 돌연변이 갱 출신의 배트맨 추종 집단 '배트맨의 아들들(Sons of the Batman)'이 위기를 수습하자, 미국 정부는 제멋대로 공권력을 대체한 배트맨을 견제하기 위해 슈퍼맨을 파견
한다. 결국 슈퍼맨과 배트맨의 최후의 결전이 벌어진다.

▲ 정전이 된 고담시를 말 타고 누비는 배트맨(<다크 나이트 리턴즈> 중)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뉴스 보도와 텔레비전 토론 등을 통해 배트맨의 존재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고찰을 독자에게 요구한다. 시(市)를 넘어 국가 규모의 공권력을 거부하면서까지 자신만의 사적인 정의를 추구하는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의 배트맨은, 어둡고 고독하긴 해도 어디까지나 정의의 사도에 머물렀던 과거 여러 작품의 배트맨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하다. 이 작품에서 그는 현실적인 이해관계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 때문에 거침없고 호쾌한 배트맨의 액션 활극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쉽게 즐길 만한 작품이 아닐 수도 있다.

어렸을 적 배트맨의 활약에 환호했다가 이제 성인이 된 독자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범죄자뿐 아니라 경찰과 국가에까지 맞서는 배트맨의 고독한 싸움을 지켜보게 되었다. 가면 쓴 영웅에게도 세상은 녹록치 않다는 사실을 절절히 보여준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세상의 복잡함을
경험
한 성인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배트맨 시리즈는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를 통해 비로소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그저 판형으로서의 그래픽노블이 아니라 내용의 깊이 면에서까지 진정한 그래픽노블 시리즈로 거듭나게 되었다. 2005년 <
타임>은 1923년부터 2005년까지 출간된 영어 소설베스트 100을 선정하면서 아울러 그래픽노블 베스트 10도 선정하였다. 이 그래픽노블 베스트 10에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도 포함되어 있다. (☞바로 가기) <타임>은 이 작품 덕에 배트맨 영화
들이 가능해졌다고 평가했다.

비디오 게임과 영화, 음악 등 미국의 대중문화를 주로 다루는 사이트 아이지엔(IGN, www.ign.com)은 2005년에 배트맨 그래픽노블 베스트 25를 선정한 바 있다.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2위를 차지했다. (☞바로 가기
) 참고로 국내 출간된 배트맨 그래픽노블의 순위는 다음과 같다.

<웃는 남자> 24위, <배트맨 : 허쉬> 17위, <배트맨 :
패밀리의 죽음> 15위, <배트맨 : 다크 빅토리
> 10위, <배트맨 : 롱 할로윈> 5위, <배트맨 : 아캄 어사일럼> 4위, <배트맨 : 킬링 조크> 3위,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 2위, <배트맨 : 이어 원> 1위

영미권에서 과학 소설과
판타지, 공포 등을 주로 취급하는 서점 프랜차이즈 '금지된 행성(Forbidden Planet)'의 웹사이트에서는 최고의 그래픽노블 베스트 50을 선정했는데,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를 1위로 선정했다. (☞바로 가기) 이 베스트 50 목록에는 배트맨 그래픽노블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국내 출간된 작품들을 꼽아본다면 <배트맨 : 아캄 어사일럼> 8위, <배트맨 : 이어 원> 14위, <배트맨 : 킬링 조크> 29위, <배트맨 : 롱 할로윈> 44위 등이다..

▲ <배트맨 : 이어 원>(프랭크 밀러·데이비드 마추켈리 지음, 리치먼드 루이스 그림, 곽경신 옮김,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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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배트맨을 성인 취향의 히어로로 완전히 탈바꿈해놓았다. 아니, 배트맨뿐 아니라 DC의 모든 히어로들을 성인 취향으로 재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타임>의 평가대로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의 대중적 성공과 평단의 평가는 곧장 배트맨 영화 제작에 크게 기여했다. 배트맨 영화 시리즈의 도화선이 된 또 다른 계기를 꼽는다면, 1987년 출간된 <배트맨 : 이어 원>(프랭크 밀러·데이비드 마추켈리 지음, 리치먼드 루이스 그림, 곽경신 옮김, 세미콜론 펴냄)이다.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가 큰 성공을 거두자 DC 코믹스는 프랭크 밀러에게 배트맨 시리즈를 아예 새롭게 시작하는 작품을 요청한다. <배트맨 : 이어 원>은 '이어 원'이라는 제목답게 배트맨의 탄생을 다룬 작품이다. 해외에서 무술과 범인 추적, 과학 등을 수련하고 12년 만에 고담시로 돌아온 스물다섯 살의 브루스 웨인과 시카고에서 막 고담시로 재배치된 부서장 제임스 고든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젊은 브루스 웨인이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배트맨으로 거듭나는 과정과 고담시의 경찰 국장이 되기 전의 제임스 고든의 이야기가 겹친다. 특유의 강직함 때문에 고담시의 부패한 경찰들에게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 왕따를 당하던 고든은, 배트맨과 함께 고담시의 지도층 및 경찰 내부의 부패와 마피아가 주도하는 범죄를 일소하면서 그와 우정을 나누게 된다.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의 스토리 작가 프랭크 밀러가 스토리를 맡았기에 두 작품의 연속성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가령 <배트맨 : 이어 원>에서 아직은 서툰 스물다섯 살의 배트맨과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히어로 활동을 그만두었다가 10년 만에 재개한 쉰다섯 살의 배트맨을 비교해보는 것은 어떨까. 프랭크 밀러가 작화까지 도맡았던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는 달리 <배트맨: 이어 원>에서는 데이비드 마주켈 리가 작화를 담당했다. 프랭크 밀러의 개성 강하고 꽤 거친 작화가 호불호가 갈리는 데 비해, <배트맨 : 이어 원>은 잘 정돈되고 깔끔한 전형적인 미국 만화의 작화를 선보이고 있다. 작화 스타일은 많이 다르지만, 프랭크 밀러가 스토리를 쓴 만큼 특유의 액션 연출이나 대사 톤, 무엇보다 뉴스로 직간접적인 정보를 독자에게 제공하는 연출이 그대로 이어진다.

▲ <배트맨 : 이어 원> 중.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 이어 <배트맨 : 이어 원>도 성공을 거두면서 모던 배트맨의 시대가 활짝 열린다. 이후 배트맨은 여러 스토리 작가와 작화가의 손에 더욱 어둡고 복잡한 다크 히어로로 거듭난다. 이 모두가 프랭크 밀러의 덕분이었다.

1989년에 개봉한 팀
버튼 감독의 영화 <배트맨> 역시 프랭크 밀러의 두 작품으로부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 비록 팀 버튼이 배트맨 만화의 팬은 아니었지만, 함께 작업한 배트맨 골수 팬 출신의 각본가 샘 햄과 함께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킬링 조크>를 참고하여 각본을 준비
했다.

<배트맨 : 이어 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영화는 18년 뒤 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한 영화 <배트맨 비긴즈>(2005)다. 프랭크 밀러가 만화 속 배트맨을 <배트맨 : 이어 원>으로 리부트시켰듯, 크리스트퍼 놀란은 조엘 슈마허(<배트맨
포에버>, <배트맨과 로빈>)에 의해 밝고 유쾌한 분위기로
빠져버린 영화 배트맨 시리즈를 다시 어둡고 고독한 본연의 배트맨으로 재출발시켰다.

<이어 원>과 <배트맨 비긴즈>, <롱 할로윈>과 <다크 나이트>

영화 <배트맨 비긴즈>와 달리 <배트맨 : 이어 원>에는
해외에서의 12년간의 수련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하지만 브루스 웨인이 고담시로 돌아와 배트맨의 복장을 결정하고 서툰 히어로 활동을 하는 내용이나 고담시의 부패한 경찰청장 질리언 로브와 결탁하여 고담시를 좌지우지하는 마피아 두목 카마인 '로마인' 팔코네가 등장한다는 점은, <배트맨 : 이어 원>이 <배트맨 비긴즈>에 기여한 요소
들이다.

<배트맨 : 이어 원>이 배트맨과 제임스 고든이 협력하여 경찰청장 로브와 마피아 두목 팔코네를 일소하는 내용을 다루는데 비해, <배트맨 비긴즈>는 마피아 두목 팔코네와 허수아비 악당 스케어크로우, 라즈 알 굴이 결탁하여 고담시를 위기로 몰아넣는 위기에 집중한다는 차이는 있다.

하지만 두 작품을 함께 보면 <배트맨 비긴즈>가 <배트맨 : 이어 원>으로부터 많은 설정을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팔코네는 <배트맨 : 이어 원>에서 프랭크 밀러가 처음 선보인 악당이기에 더욱 그렇다. 게다가 두 작품 모두 이야기가 끝나고 조커라는 악당의 첫 등장을 암시한다.

▲ <배트맨 : 롱 할로윈>(제프 로브 지음, 팀 세일 그림, 박중서 옮김,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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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배트맨 비긴즈>의 후속작 <다크 나이트>의 제목은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를 통해 널리 알려진 배트맨의 별명 '어둠의 기사(dark knight)'를 차용했다고 알려졌다. 이 영화 역시 <배트맨 : 이어 원>과 후속작 <배트맨 : 롱 할로윈>(제프 로브 지음, 팀 세일 그림, 박중서 옮김, 세미콜론 펴냄)의 여러 설정을 가져왔다.

10월의 할로윈 이후 팔코네가 이끄는 마피아 패밀리 및 관련자들이 살해되는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11월 추수감사절, 12월 크리스마스, 1월 새해 전야, 2월 밸런타인데이 등 명절만 골라 살인을 저지르기 때문에 범인은 일명 '홀리데이'라 불린다. <배트맨 : 롱 할로윈>은 '홀리데이'를 추적하는 가운데, 배트맨과 힘을 합쳐 고담시의 범죄에 맞서던 검사 하비 덴트가 악당 투 페이스로 거듭나는 내용을 다룬다. 무엇보다 <배트맨 : 롱 할로윈>은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이 직접 <다크 나이트> 스토리에 반영했다고 인정한 작품이다. 2권 권두에는 감독 자신이 <배트맨 : 롱 할로윈>에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를 고백하는 짧은 인터뷰가 실려 있기도 하다.

▲ 영화 <다크 나이트> 중 카마인 '로마인' 팔코네.

▲ <배트맨 : 노 맨스 랜드> ⓒDC
비록 스토리 작가가 프랭크 밀러가 아니라 제프 로브이기는 하지만, 제프 로브 역시 <배트맨 : 이어 원>에서 프랭크 밀러가 마련한 여러 설정을 그대로 이어받아 <배트맨 : 롱 할로윈>을 구성했다. 가령 프랭크 밀러가 <배트맨 : 이어 원>에서 처음으로 등장시킨 카마인 '로마인' 팔코네는 캣우먼이 얼굴에 남겼던 상처의 흉터가 그대로 남은 채 <배트맨 : 롱 할로윈>에 등장하여 배트맨(탐정), 제임스 고든(경찰서장), 하비 덴트(검사장)라는 삼각 동맹의 반대편에 서게 된다. 그리고 하비 덴트가 내부자의 배신으로 인해 투 페이스로 거듭난다는 설정은, 지엽적인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거의 동일하게 그려진다.

삼부작 중 마지막 작품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경우, 이야기의 큰 틀을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아직
번역 소개되지 않은 두 작품 <배트맨 : 나이트폴>(Batman : Knightfall, 1994), <배트맨 : 노 맨스 랜드>(Batman : No Man's Land, 1999)에서 가져왔다고 알려져 있다. 개봉을 앞둔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대해서는 악당 베인
에 대한 언급과 함께 차후에 더 자세히 다뤄보기로 한다.

배트맨의 숙적 1. "범죄의 광대 왕자" 조커

아캄 어사일럼(Arkham Asylum)이라 불리는 정신병원에 수시로 수감되는 배트맨의 숙적들은, DC 코믹스에 등장하는 악당들과는 또 다른 차별성을 갖는다. 우선 배트맨처럼 이들 역시 초능력을 갖춘 초인이 아닌 보통의 인간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떤 초능력보다 더 위험한 정신 상태를 지니고 있다. 가장 인지도가 높은 대표적인 악당들은 대부분
지금
까지 개봉한 배트맨 영화들에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배트맨 최대의 숙적 조커는 모던 배트맨 시대가 열리고 처음 등장한 영화 <배트맨>(1989)에도 모습을 드러냈으며, 지난 글(☞바로 가기 :
배트맨, 원래는 냉혹한 살인자였다!
)에서도 언급했듯 1940년 출간된 <배트맨> 1호에 첫 등장하기도 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 영화 <웃는 남자>(1928)
배트맨이 무성영화 <박쥐>(The Bat, 1926)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조커 역시 무성영화 <웃는 남자>(The Man Who Laughs, 1928)에서 모티프를 얻어 탄생했다. 영화 <웃는 남자>는 <레 미제라블>로 유명한 소설가 빅토르 위고동명 소설 <웃는 남자>(이형식 옮김, 열린책들 펴냄)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17세기 영국, 제임스 2세는 반란을 일으킨 귀족을 처형시키고 그 아들에게는 '어리석은 짓을 한 아버지를 영원히 비웃도록' 입을 찢어 지울 수 없는 미소를 안겨준다. 섬뜩한 미소를 안고 평생을 살아가는 비운의 남자 그윈플레인의 모습은 배트맨의 악당 조커로 거듭나게 된다.

조커의 모티프가 된 그윈플레인은 아버지의 반란 때문에 입이 찢겨 웃는 남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조커는 어떻게 그 살인 미소를 얻게 되었을까? 1940년에 훌쩍 나타난 조커가 녹색의 머리카락과 미소를 얻게 된 사연은 1951년 <디텍티브 코믹스> 168호에 드러난다. 빨간 복면을 둘러쓴 범죄자 레드
후드는 화학 공장에서 물건을 훔치던 중 배트맨에게 발각되고, 배트맨을 피해 도망치다가 화학 약품 속에 빠져 얼굴 근육
이 웃는 모습으로 굳어버린 다음 오늘날 조커의 모습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레드 후드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밝히지 않는다.

영화 <배트맨>(1989)에서 잭 니콜슨이 연기한 조커 역시 화학 약품 속에 빠지면서 생명력을 얻는다. 대신 영화에서는 조커가 되기 전의 조커에 대해 분명히 밝힌다. 브루스 웨인의 부모를 살해했던 잭 네이피어가 이후 배트맨과 화학 공장에서 대치하다가 화학 약품에 빠져 조커로 거듭난다는 것. 이 설정은 오직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에만 해당되는 설정으로, 원조 만화 배트맨의 일부 팬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 <배트맨 : 킬링 조크>(앨런 무어 지음, 브라이언 볼런드 그림, 박중서 옮김,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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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후드 아래 진짜 조커의 모습을 제시한 작품은 1988년 작 <배트맨 : 킬링 조크>(앨런 무어 지음, 브라이언 볼런드 그림, 박중서 옮김, 세미콜론 펴냄)다. 걸작 그래픽노블 <왓치맨>과 <브이 포 벤데타>의 스토리 작가로 잘 알려진 앨런 무어가 스토리를 담당한 <배트맨 : 킬링 조크>에서, 조커는 제임스 고든의 딸이자 배트걸로 활약하던 바버라 고든을 총으로 쏘아 하반신 마비 상태로 만든다. 그는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겠다는 꿈을 안고 근무하던 화학 공장까지 그만두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는 무명 코미디언(작중 이름도 언급되지 않는다)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돈을 주겠다는 절도단의 공갈 협박에 넘어가 레드 후드 복면을 쓰고 자신이 근무하던 공장 문을 열어주게 된다. 여기서 레드 후드의 정체가 절도단의 입을 통해 밝혀진다. 애초에 레드 후드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절도단원들이 익명성을 보장받기 위해 돌아가면서 썼던 가면이었다.

▲ 조커의 탄생. (<배트맨 : 킬링 조크> 중).

그러나 (후에 조커가 되는) 무명 코미디언은 불운했다. 마침 그가 붉은 가면을 뒤집어썼을 때 배트맨이 등장한 것이다. 배트맨에게 잡히지 않으려 도망치던 코미디언은 결국 화학 폐기물이 흐르는 강물로 뛰어든다. 가면을 벗고 난 뒤 그는 머리카락이 초록색으로 바뀌고 피부는 새하얗게 탈색되었으며 길게 찢어진 입으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커다란 웃음을 터트린다. 앨런 무어에 의해 탄생 배경이 자세하게 제시된 조커는 그가 가장 잘 하는 일, 배트맨과 배트맨 주변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가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영화 <배트맨>(1989)에서 조커는 배트맨에게 살해당하지만, 대부분의 다른 작품들에서 조커의 최후는 배트맨에게 제압되어 아캄 수용소에 수감되는 것으로 끝난다. 물론 조커가 저지른 범죄들이 너무나 극악하여 살인을 꺼리는 배트맨조차 조커를 죽이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리기도 한다. 조커는
자기처럼 끔찍한 미소를 지은 채 사망에 이르게 되는 독을 예사로 사용하는 살인자이자, 바버라 고든을 총으로 쏴서 하반신 불수로 만들고(<배트맨 : 킬링 조크), 2대 로빈인 제이슨
토드를 살해하기도 했으니(<배트맨 : 패밀리의 죽음>) 배트맨이 살의를 느낀다 한들 이상하지 않다.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배트맨은 결국 조커를 살해한다. <배트맨 : 허쉬>에서는 조커를 거의 죽일 뻔 했으나 제임스 고든의 간곡한 만류로 인해 손을 거둔다.

배트맨과 단 둘이 주먹다짐을 하다가 결국 제압되는 것이 조커의 운명이지만, 스토리 작가의
기획과 개성에 따라 조커는 대등하게 싸우기도 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도 한다. 배트맨 역시 작가에 따라 분노에 이성을 잃고 조커를 공격하거나 조커에게 농락당하기도 하며, 반대로 조커를 농락하기도 한다. 조커가 범죄를 저지르고 배트맨을 곤경에 빠트리지만 결국 배트맨이 승리하는 내용은 여러 그래픽노블뿐 아니라 영화 <배트맨>과 <다크 나이트>에서도 반복되지만, 각 작품에 따라 둘의 대결 구도는 미묘하게 달라져 결코 식상하지 않다.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에서 이죽거리는 조커를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배트맨과, 앨런 무어의 <킬링 조크>에서 두들겨 맞고 자포자기한 조커에게 갱생을 권유하는 배트맨은 다른 듯하면서도 하나로
겹쳐진다. 물론 조커는 그 와중에도 배트맨에게 '죽이는 농담(killing joke)' 하나를 건네고, 좀처럼 웃지 않는 배트맨도 조커의 농담에 파안대소를 터트린다. 앨런 무어가 제시하는 <킬링 조크>의 엔딩은, 배트맨과 조커의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악연을 가장 잘 압축한 명장면이다.

▲ <배트맨 : 킬링 조크> 마지막 장면.

노파심에 덧붙이지만 <킬링 조크>에 묘사된 조커의 탄생담은 <킬링 조크>에 국한된 이야기이니, 이를 조커의 '공식 탄생담'으로 못 박으면 곤란하다. 또 다른 작품에서 또 다른 조커의 탄생담이 제시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 조커를 다룰 그 어떤 작가나 감독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사실은, 조커가 배트맨의 가장 큰 숙적이라는 점이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을 향해 조커가 날린 대사들은 1940년부터 2008년까지 두 인물이 싸우며 쌓아온 관계를 압축한 듯하다. 조커는 왜 자신을 죽이려 드느냐고 묻는 배트맨의 질문을 강하게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니, 난 너를 죽이기 싫어! 내가 너 없이 뭘 하겠어? 돌아가서 마약상이나 칼로 찌를까? 아냐. 너… 네가 나를 완성시켜(You… you… complete me)."

▲ <조커>(브라이언 아자렐로·리 베르메호 지음, 김동욱 옮김,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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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조커는 추락하던 도중 배트맨에 의해 목숨을 건지고는 "너는 그 부적절한 너만의 정의감 때문에 나를 죽이지 않겠지. 나도 널 안 죽일 거야. 왜냐면 넌 죽이기에 너무 재미있거든. 내 생각에 우리 둘은 영원히 이 짓을 할 운명인 것 같은데(I think you and I are destined to do this forever)"라고 말한다. 배트맨을 향한 사랑 고백으로 들리는 대사다.

영화 <다크 나이트>는 기존의 조커 상(像)에 충실하면서도 새로운 조커 상을 정립했다. 우선 외모 면에서 기존의 조커들이 화학 약품에 빠져 피부색과 머리카락 색깔이 변했다는 설정을 버리고 '분장'으로 대체했다. 살인 미소 역시 화학 약품이 아니라 무성 영화 <웃는 남자>를 연상시키는 외과적 손상으로 인한 것이다. 기존 조커가 손에 감전 장치나 독침 장치를 설치하고 악수를 건네는 광대 같은 쇼맨십에 집착하는 화려한 악당이었다면, 고(故)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는 연필을 사라지게 하는 마술을 선보이는 '갱스터' 같은 현실적인 악당이다. 2008년 출간된 <조커>(브라이언 아자렐로·리 베르메호 지음, 김동욱 옮김, 세미콜론 펴냄)는 <다크 나이트>에서 크리스토퍼 놀란과 히스 레저가 창조한 그 조커를 주인공으로 삼은 그래픽노블이다. 이 작품에서 배트맨은 겨우 대여섯 페이지 밖에 등장하지 않으며, 독자는 새로운 조커가 선보이는 오랜 광기를 만끽할 수 있다. 조커뿐 아니라 투 페이스, 펭귄, 리들러 등 다른 배트맨 캐릭터들도 현실에 있음직한 갱스터들로 조정된 것이 흥미롭다.

조커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를 마지막으로 하나 덧붙이자면, TV 애니메이션과 게임에서 조커의 목소리를 단골로 맡은 성우는 영화 <스타워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를 연기했던 배우 마크 해밀이다. 1992년부터 2000년까지 TV 애니메이션의 조커는 모두 마크 해밀이 맡아왔다. 마크 해밀이 연기한 조커의 웃음소리는 유튜브에서 어렵지 않게 들어볼 수 있다. (☞
바로 가기
)

마크 해밀은 2010년 게임 <아캄 시티>(Batman:_Arkham_City)를 마지막으로 조커 목소리 연기에서 은퇴할 뜻을 내비쳤으나, <배트맨 : 킬링 조크>의 애니메이션 제작 소식이 들려오자 다시 조커의 목소리를 맡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참고로 한국에서 방영한 배트맨 애니메이션에서 조커의 목소리는 영화 <도가니>에서 장애 학생들을 성추행한 쌍둥이 교장 형제를 연기한 성우 겸 배우 장광이 맡았다. (☞바로 가기 :
장광이 연기한 조커
)

▲ 조커 목소리를 연기한 마크 해밀.

조커 외의 다른 악당들과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글로 넘기고, 해외 팬덤에서 회자중인 루머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번 글을 마치고자 한다.

▲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 조셉 고든 레빗 포스터.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 조커가 등장하느냐가 전 세계의 배트맨 팬들 사이에서 큰 화제 거리다. 전편 <다크 나이트>에서 추락사할 뻔 했던 조커는, 배트맨에 의해 고층 건물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채 경찰에게 발견된다. 이후의 행적은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아마 배트맨 시리즈의 관성대로 조커는 아캄 어사일럼에 갇혔을 것이다. <다크 나이트>로부터 8년 뒤를 다루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이니, 혹시 조커가 탈출하여 출연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정보로는 딱히 조커가 등장한다는 낌새가 없다.

다만 히스
레저를 꽤 닮은 조셉 고든 레빗
이 존 블레이크라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을 두고 일부 팬들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조커 등장과 관련한 농담 같은 루머를 퍼트리고 있다. 지금까지 공개된 정보에 따르면 존 블레이크는 고담시 경찰국장 고든의 명령에 따라 특수임무를 맡은 경찰 요원이라고 한다.

헌데 존(John)은 조니(Johnny)라는 애칭으로도 부를 수 있지 않은가. 조니 블레이크…. 연재 첫 번째 글 '배트맨, 원래는 냉혹한 살인자였다!'(☞
바로 가기) 마지막을 보라. 조커에게 성적표를 빼앗겼던 소년의 이름
이 조니 블레이크였다.


조니 블레이크(Johnny Blake)라는 이름에서 앞의 두 글자 'Jo'과 뒤의 두 글자 'ke'를 합치면 'Joke'가 된다. (JohnnyBlake) 이를 두고 해외의 배트맨 팬들 사이에서는 조셉 고든 레빗이 연기하는 조니 블레이크가 차기 조커가 된다는 추측이 떠돌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다크 나이트 라이즈> 관련 정보를 볼 때, 이 추측은 조커에 대한 그리움이 반영된 루머 혹은 그 그리움을 미끼로 사람들을 낚으려는 낚시로 보인다. 비록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삼부작에서는 더 이상 조커를 볼 수 없겠지만, 혹시 또 모를 일이다. 다른 감독이 이어받을 배트맨 시리즈에서 조셉 고든 레빗이 연기하는 조커를 볼 수 있게 될지도.

▲ 조셉 고든 레빗이 연기한 존 블레이크(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 중).
▲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영화 <다크 나이트> 중).

 

 

 

 

 

슈퍼히어로 코믹스 시리즈, 배트맨과 슈퍼맨으로 시작한다. 미국의 히어로 코믹스 역사를 대변하는 캐릭터인 동시에 그 뚜렷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함께 등장하여 협동하거나 갈등을 겪는 모습이 뚜렷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두 히어로 모두 반세기를 훌쩍 넘은, 한국으로 치자면 환갑은 물론 고희도 넘긴 오랜 역사를 지닌 히어로들이다. 슈퍼맨이 1938년에 액션 코믹스(Action Comics)로, 배트맨이 1939년에 디텍티브 코믹스(Detective Comics)로 모습을 드러내었으니 말이다.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두 히어로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각각 제리 시겔과 조 슈스터(슈퍼맨), 밥 케인(배트맨)이라는 원작자의 손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미국 코믹스의 특성상 이 둘은 DC 코믹스라는 회사에 속한 캐릭터로 이후 여러 스토리 작가와 작화가에 의해 새로운 설정과 성격으로 변주되었다. 그 변주의 최종 결과가 현재의 영화와 코믹스 애니메이션 속의 슈퍼맨과 배트맨이다.

배트맨과 슈퍼맨이 함께 등장하여 협동하거나 갈등하는 모습이 생소한 이들도 있겠다. 가장 대표적인 슈퍼맨 영화인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 시리즈와 비교적 최근 개봉했던 2006년작 <슈퍼맨>에도 배트맨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배트맨 영화에서도 마찬가지.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1989년)을 시작으로 곧 개봉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년)까지 슈퍼맨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코믹스와 애니메이션에서 이 둘은 '저스티스 리그 오브 아메리카(justice league of america)'라는 초인 집단에 소속되어 협력하여 악당과 맞서며, 때로는 각자의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대립하거나 대결까지 한다. 우선 두 영웅이 소속된 '저스티스 리그 오브 아메리카'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저스티스 리그 오브 아메리카

▲ <저스티스>(전 3권, 짐 크루거 지음, 알렉스 로스·더그 브레이스웨이트 그림, 정지욱 옮김, 시공사 펴냄).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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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출간된 슈퍼맨과 배트맨 소재의 코믹스를 접한 독자들에게는 이 '저스티스 리그 오브 아메리카'('저스티스 리그')'가 그리 낯설지만은 않을 것이다. 문화방송(MBC)에서 1979년, 1982년, 1986년에 방영된 바 있는 애니메이션 <슈퍼특공대>를 기억하는 이들도 슈퍼맨과 배트맨이 함께 등장하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슈퍼특공대>는 '저스티스 리그'를 아동용으로 재편성한 <슈퍼 프렌즈(Super Friends)>의 한국어 제목이다. 당시 새마음 합창단이 불렀던 주제가는 "슈퍼맨, 용감한 힘의 왕자. 배트맨 로빈, 정의의 용사…"로 시작했다. 작가 박민규의 제8회 문학동네 신인 작가상 수상작 <지구 영웅 전설>(문학동네 펴냄)에도 이 '슈퍼특공대'의 주제가 흘러나온다. 이 작품에서 '슈퍼특공대'는 미국의 패권에 대한 표상으로 풍자 된다.

'저스티스 리그'는 슈퍼맨과 배트맨을 비롯해 원더우먼, 아쿠아맨, 플래시, 그린 랜턴, 마션 맨헌터 등으로 구성된 초인 집단으로 1960년 10월에 <Justice League of America>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된 것이 효시다. 원래는 슈퍼맨과 배트맨이 포함되지 않은 DC 코믹스 소속 히어로들(그린 랜턴, 플래시, 아톰, 샌드맨, 호크맨)등으로 구성된 '저스티스 소사이어티 오브 아메리카'가 1940년부터 있었지만 DC 코믹스의 간판 히어로인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이 참여한 '저스티스 리그'의 인지도보다는 조금 떨어진다.

이 '저스티스 리그'를 통해 DC 코믹스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한다는 설정은 더욱 공고해졌다. 즉, 슈퍼맨 영화에서 슈퍼맨이 메트로폴리스를 배경으로 렉스 루터 등의 악당과 맞서고 있는 동안 고담 시티에서는 배트맨이 조커와 펭귄맨 같은 범죄자들과 맞서는 셈이다. '저스티스 리그'는 미국 혹은 전 지구를 위협하는 악당이나 외계인, 자연 재해 등이 발생했을 때 힘을 합쳐 이를 해결한다. 달에 있는 비밀 기지인 '저스티스 리그' 와치 타워에 모여 회의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행동한다.

마블 코믹스에도 '저스티스 리그'와 유사한 히어로 집단이 있다. 개봉을 앞두고 트레일러들을 하나 둘 씩 선보이고 있는 <어벤저스>다. 마블 코믹스 역시 DC 코믹스처럼 같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 영화 <아이언 맨>에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와 토르의 망치가 등장하는 등 마블 코믹스 히어로 영화들은 이미 그 밑밥을 잘 깔아두었다. 2012년 4월에 개봉 예정인 <어벤저스>는 그 결과물인 셈이다. 아이언 맨, 헐크, 캡틴 아메리카, 토르가 함께 등장하는 트레일러는 전작에 속하는 영화들을 재미있게 본 한국 관객들에게도 큰 기대를 갖게 하고 있다.

하지만 슈퍼맨과 배트맨이 속한 '저스티스 리그' 영화화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글쓴이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강하리라 추측을 해본다. 현재 크리스토퍼 놀란에 의해 진행 중인 '다크 나이트 시리즈'가 추구하는 장르적 색채와 톤은 액션 스릴러 쪽이 강하여 초능력을 지닌 슈퍼맨이나 원더우먼 같은 초인의 등장을 상상하기 힘들다.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 영화들도 각각 다른 감독에 따른 각자의 개성을 갖고 있긴 하지만 <어벤저스>처럼 한 영화에 함께 등장할 수 있는 호환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어벤저스> 예고편에서 아이언 맨과 토르, 캡틴 아메리카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결코 어색하지 않다. 반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시리즈 속 배트맨이 <슈퍼맨 리턴즈>(2006년)나 <그린 랜턴>(2010년)에 등장하는 것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특별한 초능력이 없는 영웅 배트맨이 초인들과 함께 어떤 활약을 펼치는 지는 결국 코믹스와 애니메이션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

슈퍼맨 VS 배트맨 : 선의로 충만한 초인, 책략에 능란한 탐정

'저스티스 리그'의 히어로들 대부분이 하늘을 나는 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배트맨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어 망토를 글라이더처럼 사용하여 활강하거나 배트 플레인이라는 비행기를 사용한다. <슈퍼특공대>에서는 혼자서는 날 수 없는 배트맨이 슈퍼맨의 양팔에 옆구리를 감싸게 하고 함께 날아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배트맨은 '저스티스 리그' 구성원 중 이질적인 멤버다. 슈퍼맨과 배트맨을 비교하는 것도 격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하기 쉽다.

슈퍼맨은 스스로 통제하지 않으면 지구도 박살낼 수 있는 힘과 시간 여행까지 할 수 있는(각 작품의 설정에 따라 다르지만) 속도를 지닌 초인이다. 배트맨은 엄청난 재력과 뛰어난 지성 및 체력을 갖추고 있긴 해도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트맨은 '저스티스 리그'를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슈퍼맨과 함께 '저스티스 리그'를 대표하는 멤버로 때로는 슈퍼맨의 행동에 제동을 걸거나 대립하는 라이벌로 등장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 <배트맨 : 허쉬>(전 2권, 밥 케인 지음, 스콧 윌리암· 짐 리 그림, 박중서 옮김,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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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배트맨은 슈퍼맨의 약점을 파악할 만큼 똑똑하다. <배트맨 : 허쉬>(전2권, 밥 케인 원작, 제프 로브 지음, 스콧 윌리암스·짐 리 그림, 박중서 옮김, 세미콜론 펴냄)에서는 배트맨이 맨주먹으로 슈퍼맨을 두들겨 패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배트맨 시리즈의 악당 포이즌 아이비의 최면에 홀린 슈퍼맨이 공격해오자 배트맨은 각종 첨단 장비가 즐비한 유틸리티 벨트에서 그린K가 달린 반지를 꺼내어 주먹에 낀다. K는 슈퍼맨의 고향별 크립톤 행성의 광물이자 슈퍼맨의 힘을 약화시키고 1시간 이상 노출되면 사망에 이르게 하는 크립토나이트의 약자다. 슈퍼맨의 연고지인 메트로폴리스에 오려면 "그(슈퍼맨)에 대한 준비를 안 할 수가 없지"라는 배트맨의 대사는 이런 일이 더 이상 새롭지도 않다는 식이다.

슈퍼맨의 약점을 이용해 배트맨이 슈퍼맨을 제압하는 내용은 <배트맨 : 허쉬>가 처음이 아니다. 월드 파인스트 코믹스(World's Finest Comics)의 <더 캡처 오브 슈퍼맨(The Capture of Superman)>(1961년), <배트맨 앤 로빈, 미디벌 밴디츠(Batman and Robin, Medieval Bandits)>(1963년) , <더 사가 오브 슈퍼맨 vs. 배트맨(The Saga of Superman vs. Batman)>(1965년)과 같은 이슈들에서 이미 크립토나이트 밧줄이나 투석기, 배트랑(배트맨이 사용하는 부메랑)으로 배트맨이 슈퍼맨을 제압하는 장면들이 연출된 바 있다.

<신 시티>, <300>의 원작자로 유명한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 다크나이트 리턴즈>(전2권, 김지선 옮김, 세미콜론 펴냄)의 배트맨도 아이언 맨처럼 강철 슈트를 입고 크립토나이트 화살로 슈퍼맨을 곤경에 몰아넣는다. '저스티스 리그'를 위시한 DC 코믹스의 모든 영웅과 악당들이 맞붙는 거대한 스케일의 작품인 <저스티스>(짐 크루거 지음, 알렉스 로스·더그 브레이스웨이트 그림, 정지욱 옮김, 시공사 펴냄)에서도 적에게 세뇌 당한 배트맨이 슈퍼맨으로부터 받은 크립토나이트 반지로 슈퍼맨을 궁지에 몰아넣는 장면이 등장한다. 슈퍼맨이 배트맨에게 크립토나이트 반지를 맡긴 이유는 오직 배트맨만이 세뇌와 같은 만약의 사태에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생각에서다.

배트맨은 슈퍼맨뿐 아니라 '저스티스 리그'를 비롯한 모든 히어로들(DC코믹스 소속)의 특징과 약점을 자신의 은신처인 배트 케이브의 컴퓨터에 데이터베이스화 시켜놓았다. (이 데이터베이스가 해킹당해 '저스티스 리그' 히어로들이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이런 배트맨의 치밀함 때문에 그랜트 모리슨이 스토리를 쓰는 <JLA(Justice League of America, 1997~2006)> 시리즈에서 슈퍼맨은 그를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The most dangerous man on Earth)"라고 경계한다.

비록 초능력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세계 최고의 탐정(world's greatest detectives)"으로 코믹스 내에서 평가받던 배트맨은 슈퍼맨의 입을 통해 슈퍼히어로를 압도하는 히어로의 입지를 확보한다. 이 때문에 슈퍼히어로 코믹스 팬들 사이에서 배트맨은 배트 갓(Bat God, 한국 팬들 사이에서는 뱃신(Bat神))이라고 불린다. 여러 작가들의 손을 거쳐 거의 무적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버린 배트맨을 비꼬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 뱃신답게, 배트맨은 슈퍼맨을 위시한 초인 영웅들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든 영웅들의 약점을 손에 쥐고 있는 자답게 '저스티스 리그'에서도 흑막과 같은 존재로 다른 구성원과의 거리감을 드러낸다. 이런 배트맨의 태도를 거만하다고 지적하는 히어로들도 있다. 함께 악과 맞서는 입장에서 슈퍼맨과 배트맨은 단 둘이 있을 때는 서로를 클라크와 브루스라는 본명으로 부르는 등 친밀한 태도를 보이는 친구이지만, 악을 처리하는 방법론에서는 다른 가치관과 입장을 뚜렷이 한다. 그리고 가치관 차이는 때로는 극명한 갈등으로 치닫기도 한다.

배트맨은 슈퍼맨을 근본적으로 심성이 착한 사람이며 그것이 슈퍼맨의 약점이라고 평가한다. <배트맨 : 허쉬>에서 포이즌 아이비의 최면에 빠진 슈퍼맨을 때려눕힐 때 배트맨의 독백을 보자.

"마음만 먹었더라면, 클라크는 자신의 슈퍼 스피드를 이용해서 나를 시멘트 속에 처박아 버렸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알았다. '크립토나이트' 말고도, 그에겐 한 가지 큰 약점이 있었다. 속을 들여다보면 클라크는 근본적으로 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난 '결코' 그렇지 않다."

슈퍼맨과 싸우기 전, 크립토나이트 반지를 낄 때 배트맨의 대사도 "그는 '자기' 분야에서만큼은 최고"지만 "'내' 분야에선 아니지"라고 분야를 확실히 한다. 슈퍼맨의 분야란 거대한 재앙과도 같은 자연 재해나 자연 재해와도 같은 힘을 가진 악당을 초인적인 힘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배트맨의 분야란 그런 압도적인 존재들의 약점을 파악하고 공략하는 쪽이다.

<배트맨 : 허쉬>에서 배트맨에 의해 최면에서 풀려난 슈퍼맨이 배트맨이 세웠던 책략에 대해 듣고 "늘 그렇듯 '탐정'이시군"이라고 말하자 배트맨은 "여전하신 '보이스카우트'이군"이라고 답한다. 한결같이 정의를 추구하는 올곧은 슈퍼맨의 마음을 소년의 그것으로 표현한 셈인데, 듣기에 따라서는 칭찬일 수도 있지만 폄하일 수도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자신은 슈퍼맨과 달리 철저하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얼굴을 드러낸 채 붉은색과 푸른색 투성이의 복장을 입고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초인과 얼굴을 가린 채 검은색 복장으로 깊은 밤의 어둠 속을 골라 다니는 탐정과의 차이는, 당연히 이 두 영웅의 기원에 근거하고 있다. 비록 생물학적인 부모는 멸망해가는 행성 크립톤에서 숨을 거두었지만 후에 슈퍼맨이 되는 칼 엘은 미국 캔자스의 작은 시골 마을 스몰 빌에서 조나단과 마사 켄트라는 양부모의 손에서 수줍고 겸손하며 소박한 시골 소년으로 자라난다. 슈퍼맨으로서의 능력은 2차 성징이 지나고 십대 후반부터 하나둘 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신이 지구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십대인 클라크 켄트를 고뇌에 빠뜨린다. 이런 고뇌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류를 위해 사용하는 슈퍼맨으로의 성장은 미국 드라마 <스몰 빌>(2001~2011년)이나 국내 출간된 <슈퍼맨 : 포 올시즌>(제프 롭·팀 세일·부얀 한센 지음, 최원서 옮김, 시공사 펴냄), <슈퍼맨 시크릿 아이덴티티>(커트 뷰식 지음, 스튜어트 이모넨 그림, 최원서 옮김, 시공사 펴냄), <올스타 슈퍼맨>(전2권, 그랜트 모리슨 지음, 프랭크 콰이틀리 그림, 임태현 옮김, 시공사 펴냄) 등에 잘 나타나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압도적인 힘을 사람들을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용하는 슈퍼히어로. 하지만 여전히 어머니 마사 켄트가 만들어주신 복장을 입고 하늘을 나는 슈퍼맨의 본질은 겸손하고 올곧은 캔자스 출신의 클라크 켄트다.

반면 배트맨은 잘 알려진 것과 같이 부모님이 갱에 의해 살해된 장면을 직접 목격한 소년 브루스 웨인의 트라우마로부터 기원한다. 부모님이 살해된 도시의 어둠에 대한 두려움을 스스로 도시의 어둠 속에서 출몰하는 공포인 '배트맨'이 되어 극복한 셈이다. 백만장자 바람둥이 브루스 웨인인 척 하고 있지만 그의 본질은 배트맨이다.

슈퍼맨이 자연 재난이나 악당의 형상을 한 재난, 혹은 악당이 일으킨 재난 등을 상대한다면 배트맨은 뒤틀린 심성의 범죄자들과 지난한 심리전을 벌인다. 조커나 펭귄맨, 리들러 등 이름난 범죄자들은 배트맨을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승부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범죄자들을 끝까지 추적하되 결코 죽이지 않고 정신 병원인 '어사일럼'에 가두는 것을 철칙으로 삼은 배트맨은 인간의 어둠 깊숙한 곳을 더 자주 들여다보고 그것에 대응해왔다. 그래서 배트맨은 슈퍼맨을 '보이스카우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배트맨 : 허쉬>의 작화가 짐 리가 묘사한 슈퍼맨과 배트맨. ⓒgroups.msn.com/artofjimlee

슈퍼맨 "오만한 외계인" VS 배트맨 "미친 복수광"

그러나 두 영웅
캐릭터의 깊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두 영웅이 내적 결함이 없거나 혹은 그 결함들이 모두 극복된 상태에서 외부의 재난과 악을 방지하고 교정하는데 머무는 영웅이었다면 7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수많은 스토리 작가와 작화가를 거쳐 다양하게 변주되지 못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70년의 세월 동안 이 두 영웅은 수많은 작가와 작화가를 통해 다양하게 변주되어 더욱 입체적인 캐릭터로 거듭났다. 이 둘을 이렇게 입체적으로 거듭나게 한 핵심은 바로 내적 결함들이다.

슈퍼맨

박민규의 <지구 영웅 전설>에서 슈퍼맨은 훗날
바나나 맨으로 '슈퍼특공대'에 합류하는 주인공에게 "꿈도 꾸지 마" "넌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야"라며 영웅이 될 수 없다고 일축한다. 주인공이 "그럼 미국인이 될 테야"라고 소리치자 슈퍼맨은 "소용없어" "그런다 해도 넌 백인이 아니니까"라고 단언한다. 이런 '슈퍼맨=오만한 미국'의 정체성은 주로 배트맨이 주인공인 작품에서 배트맨의 대적자로 등장할 때 부각되는 슈퍼맨의 부정적인 측면이다. 슈퍼맨이 주인공인 작품에서 특히 부각되는 내적 결함은 신에 근접한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외계인' 칼 엘로서의 자아다.

비록 클라크 켄트는
시골에서 다정한 양부모의 손에 자라났지만 슈퍼맨으로서 활약할수록 인류의 한계에 실망하고 거리감을 느끼면서 외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북극이나 남극 혹은 아마존 깊숙이 위치한 '고독의 요새(Fortress of Solitude)'는 그런 슈퍼맨의 고립감을 대변하는 장소다. 여기서 슈퍼맨은 생물학적 부모인 조르 엘과 라라로부터 어떻게 크립톤 행성이 멸망했는지에 대한 기억을 전수받고 크립톤 행성인으로서의 칼 엘이라는 정체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칼 엘의 정체성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

칼 엘로서 각성한 슈퍼맨의 의식 속에는 지구도 언젠가 크립톤 행성처럼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강박이 자라난다. 자신의 '보이
스카우트'적인 방식으로는 인류 모두를 구원할 수도 없고 인류의 어리석음도 깨우칠 수 없다는 자괴감도 깊어진다. 인류를 위해 동분서주해도 인류는 결국 자신을 외계인 취급하고 있다는 소외감도 더해진다.

미국 출신으로 미국의 국익을 위해 움직이다가 거기서 오는 괴리감과 인류로부터의 소외감을 겪는다는 점에서 <왓치맨>(전2권, 앨런 무어 지음, 정지욱 옮김, 시공사 펴냄)의
닥터 맨해튼은 슈퍼맨과 매우 유사한 행보를 걷는 캐릭터다. 이런 '슈퍼맨 콤플렉스(Superman Complex)' 속에서 여러 작품 속 슈퍼맨은 다양한 결정을 내린다. <왓치맨>의 닥터 맨해튼처럼 도피하거나 아니면 더 강력한 힘으로 인류를 구원하려 들거나.

슈퍼맨은 종종 초능력과 크립톤 행성 최고의 과학자인
아버지 조르 엘로 부터 물려받은 초 지성으로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선물한다. 의도야 좋지만 과정이 문제다. 자신이 옳다는 독선에 사로잡혀 다른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반대 세력을 초능력과 초 지성으로 압도하니 말이다. 이런 시도그리스 비극 속의 영웅이 갖고 있는 내적 결함인 휴브리스(hubris) 즉 오만함으로 결국 역효과를 초래한다. 인류를 위한 선의가 오히려 비극의 씨앗이 되는 셈이다.

▲ <슈퍼맨 : 레드 선>(마크 밀러 지음, 최원서 옮김, 시공사 펴냄).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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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슈퍼맨의 선의에 기인한 오만함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는 <슈퍼맨 레드선>(마크 밀러 지음, 최원서 옮김, 시공사 펴냄)이 있다. '아기 칼 엘을 태운 우주선이 미국 캔자스가 아니라 구소련의 우크라이나에 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대담한 가정을 통해 스탈린의 후계자가 되어 초능력으로 전 인류를 통제하려는 독재자 슈퍼맨의 모습을 그려낸다. 재미있는 것은 슈퍼맨의 이런 통제에 대항하는 인물로 구소련 내부에서 테러리스트 배트맨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배트맨은 슈퍼맨의 약점인 크립톤 행성의 태양인 붉은 태양(Red sun)을 인위적으로 창조하여 슈퍼맨의 힘을 약화시킨 뒤 맨주먹으로 두들겨 팬다. 하지만 <슈퍼맨 레드선>의 주인공은 슈퍼맨. 배트맨이 주인공인 작품에서 슈퍼맨의 능력이 의도적으로 폄하되듯 <슈퍼맨 레드선>의 배트맨도, 비록 슈퍼맨을 치명적인 위기까지 몰아넣기는 하지만, 원더우먼의 도움을 받은 슈퍼맨에게 결국 패배한다. 배트맨을 제압하고 소련을 평정한 후 슈퍼맨은 세계를 손에 넣는다.

"내 예순여섯 번째 생일에 브레이니악은 전 세계에 약 60억의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계산 추정하였다. (…) 범죄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 60억의 인구가 있는데 거의 한 명도 불평하지 않았다. 혼잣말로도."

굳이 반공의 프레임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소련을 이끄는 슈퍼맨은 <1984>의 빅 브라더와 다름없는, 아니 더 무시무시한 초인 독재자다.

전 세계를 장악한 슈퍼맨과 소련에 오직 대통령 렉스 루터가 이끄는 미국만이 대항한다. 엄청난 부와 뛰어난 지능으로 대통령 당선 전 과학자 시절부터 슈퍼맨의 복제 인간을 개발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슈퍼맨을 공격했던 렉스 루터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온 국력을 동원하여 슈퍼맨에게 맞선다. 하지만 초인 독재자 슈퍼맨에 맞선다 해서 렉스 루터와 미국이 정의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렉스 루터가 슈퍼맨에게 적개심을 불태우게 된 이유는 다른 슈퍼맨 시리즈처럼 슈퍼맨이란 초인에 대한 사적인 질투심 때문이다.

렉스 루터는 상상력을 현실로 만드는 능력을 지닌 그린 랜턴 부대를 비롯하여 여러 수단으로 슈퍼맨에게 최후의 공격을 가하지만 그 모든 공격을 무력화시킨 슈퍼맨은 결국 백악관까지 쇄도한다. 정작 슈퍼맨을 굴복시킨 것은 렉스 루터가 그의 오만함을 지적하면서 쓴 단 한 줄의 문장이었다.

자신의 선의에 따른 행동이 결국 더 큰 비극을 불러오는 오만함임을 깨닫고 좌절하거나 그 좌절을 통해 각성하고 한층 더 성장하는 슈퍼맨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슈퍼맨 포 투모로우>(전2권, 브라이언 아자렐로 지음, 짐 리 그림, 문은실 옮김, 시공사 펴냄)에서는 세상을 구하려는 슈퍼맨의 의지가 개인적인 욕망과 어우러져 기괴한 사건을 불러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내전이 벌어진 중동 지역에서 총을 모두 파괴하자 서로 돌을 던져 죽이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절망하는 슈퍼맨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배트맨

초월자로서의 자신감과 오만함이라는 내적 결함을 통해 좌절을 겪으며 성장하는 새로운 슈퍼맨 이야기 속에서 배트맨은 슈퍼맨의 대적자(<슈퍼맨 레드선>)로 혹은 슈퍼맨의 고독과 좌절을 이해하는 친구(<슈퍼맨 포 투모로우>)로 종종 등장한다. 배트맨의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슈퍼맨은 배트맨의 대적자이자 친구로 등장한다.

친구로 등장하는 작품은 앞서 언급한 <배트맨 허쉬>가 있다. 그리고 대적자로 등장한 작품 중 대표적인 작품은 역시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후속작인 <다크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프랭크 밀러 지음, 이규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이 있다. 프랭크 밀러의 작품 속 배트맨은 우리가 알고 있는 냉정한 배트맨이 아닌 분노에 가득 찬 과격한 배트맨이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고담 시티는 배트맨 은퇴 후 끔찍한 범죄가 만연한 생지옥이 된다. 영화 속 배트맨인 크리스천 베일이 인터뷰에서 "배트맨이 필요한 사회는 이미 실패한 사회"라는 말을 남겼듯, 쉰 살이 훌쩍 넘은 브루스 웨인은 다시 배트맨으로 돌아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전쟁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배트맨은 어둠 속에서 범죄자들을 조용히 무력화시키는 고전적인 방식이 아니라 지극히 폭력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방식으로 범죄자들과의 전투에 임한다. 범죄 조직의 근거지에 탱크와 같은 배트모빌을 몰고 쳐들어가는 장면이나 고무 탄알이기는 하지만 기관총을 사용하는 장면 등은 기존 배트맨 이미지를 거스르는 장면으로 배트맨의 오랜 팬들 중에는 거부감을 드러낸 이들도 있다.

프랭크 밀러의 마초적이고 하드보일드한 대사 역시 익히 알고 있는 배트맨의 이미지를 박살낸다. 부모가 범죄자에게 살해된 충격과 공포에서 촉발된 범죄에 대한 분노는 모든 배트맨들이 공유하는 바이지만 그 사적인 분노를 최대한 억제해왔다면 <다크 나이트 리턴즈>의 배트맨은 억눌려왔던 그 사적인 분노를 한꺼번에 폭발시킨 배트맨이다. 이런 배트맨의 거친 행보에 배트맨의 팬 뿐 아니라 작품 속 고담 시티 시민들의 반응도 환호와 거부로 상반된다.

고담 시티에서 배트맨의 활약에 경도된 폭력 조직 중 일부는 배트맨을 추종하며 '배트맨의 아들(Sons of the Batman)'이라는 자경단 조직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항상 홀로 행동하던 배트맨과 달리 이들을 이끌고 범죄와의 전쟁을 지휘하는 모습 역시 다른 배트맨 작품과는 상이한 모습이다. 이런 배트맨의 과격하고 돌출적인 행보에 고담 시티 경찰들은 배트맨 체포에 더욱 집중하고, 심지어 백악관에서도 배트맨을 저지하기 위해 슈퍼맨을 소환한다. 슈퍼맨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성조기의 줄무늬가 슈퍼맨의 가슴에 적힌 에스(S)로 전환되는 연출이 인상적이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의 슈퍼맨은 미국 정부의 지시대로 충실히 움직이는 장기 말(pawn)에 불과하다.

슈퍼맨은 "누군가 나에게 자네를 잡아들이라고 하는 건 시간문제야. 권력층의 누군가가. 그렇게 되면…"이라고 배트맨에게 직접 경고를 하기에 이른다. 배트맨은 "그렇게 되면, 클라크, 나은 쪽이 이기게 되겠지"라고 응수한다. 이런 배트맨과 슈퍼맨의 대립은 자기 지역의 치안을 스스로 지킨다는 미국의 자경단(vigilante) 혹은 민병대(militia)의 전통과 이를 제어하려는 연방 정부 사이의 갈등을 의미한다.

결국 미국 정부는 구소련과의 힘겨루기를 끝낸(<다크 나이트 리턴즈>는 1986년 작이다!) 슈퍼맨에게 고담 시티의 배트맨을 진압하라 명령하고, 배트맨은 슈퍼맨과의 일전을 준비한다. 크립토나이트 화살로 슈퍼맨을 무력화시킨 배트맨은 슈퍼맨을 두들겨 패면서 외친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도 있었어. 그런데…우리를 봐…나는…정치적인 골칫거리가 됐지…그리고 자네는…자넨 농담거리야…" 배트맨과 슈퍼맨의 맨주먹 대결은 결정적 반전이 담긴 결말로 이어진다.

▲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슈퍼맨을 두들겨 패는 배트맨. ⓒ세미콜론

<다크 나이트 리턴즈>의 후속작인 <다크 나이트 스트라이크 어게인>에서도 배트맨과 슈퍼맨은 독백을 통해 서로를 가혹하게 비난한다. 배트맨은 여전히 슈퍼맨을 순진한 보이스카우트이자 정부의 꼭두각시 취급한다. 하지만 슈퍼맨도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 배트맨을 우위에 놓기 위해 의도적으로 평가 절하된 슈퍼맨과는 다르다. 대통령을 조종하는 흑막인 렉스 루터에 의해 경찰 국가가 된 미국을 뒤흔들기 위해 테러도 불사하는 배트맨에게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다.

"브루스, 이 사이코패스! 자넨 편집증 환자야.
과대망상증 환자야. 우리의 세계는 깨지기 쉬운 유리 동물원…겨우 균형을 잡고 있는 카드로 만든 집이야. 흔들릴 수밖에 없어…하지만 자넨 그걸 무너뜨려버렸어. 그 처참한 결과를 자네는 모르고 있어.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지. (…) 자네는…잘난 잔기술을 빼면 아무런 능력도 없는 주제에 독선으로만 똘똘 뭉쳐 있어. (…) 난 두 행성 다 사랑하네. 하나는 죽었지만, 하나는 살아 있어. 난 두 종족 다 사랑해. 둘 다 살아 있긴 하지만…면도날 위를 걷는 신세지. 자네 때문에 둘 모두 위험에 처하게 됐으니. 이번엔 자넬 죽여야 할지도 몰라. 맹세컨대 난 그럴 수 있네."

하지만 슈퍼맨을 비롯한 '저스티스 리그'의 슈퍼히어로들은 렉스 루터에게 약점을 잡혀 복종하거나 감금당한 상태다. 배트맨만이 홀로 렉스 루터에게 맞서 싸운다. 렉스 루터에게 감금된
플래시아톰 등의 슈퍼히어로를 구출해내어 자신의 편으로 삼고 크립토나이트로 만들어진 장갑으로 슈퍼맨을 두들겨 패면서 렉스 루터를 골탕 먹이기는 하지만 렉스 루터와의 전쟁에만 몰두하는 배트맨은 민간인들의 희생도 외면하는 지경에 이른다.

정체불명의 로봇들 손에 민간인들의 학살되자 플래시는 "빌어먹을! 브루스! 사람들이 죽고 있잖나! 내 기억엔 저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야!"라고 주장한다. 배트맨은 "클라크(슈퍼맨)나 자네나 미련하긴 한가지군! 저 로봇은 우리를 끌어내서 죽이려고 하는 놈들의 속임수란 말일세! 이건 내 쇼야! 내 전쟁! 그러니 내 전략에 따르라고!"라고 일축한다. 렉스 루터와의 대결을 사적인 승부 차원으로 생각하는 배트맨 역시 자신만이 옳다는 오만함과 독선에 사로잡혀 있다.

프랭크
밀러의 <다크 나이트> 시리즈뿐 아니라 다른 배트맨 작품에서도 배트맨은 종종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굳이 구분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슈퍼맨 포 투모로우>에서 슈퍼맨은 아내인 로이스 레인이 실종되자 아내를 되찾겠다는 사적인 목적을 위해 '저스티스 리그'를 떠나 단독 행동을 하겠다는 통보를 한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다른 '저스티스 리그'의 히어로들과는 달리 배트맨만이 "꼭 그렇게 해야 한다면… 이 싸움을 사적으로 가져갈 수도 있어. 난 기뻐. 자네가 이걸 사적으로 받아들이는 게"라고 슈퍼맨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슈퍼맨과 배트맨의 내적 결함은 두 히어로의 탄생에 기원하는 태생적 결함이자 정체성이다. 이 결함들은 종종
개별 작품의 결말에서 치유되거나 극복되곤 하지만 또 다른 작품에서 또 다른 사건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될 것이다. 이 결함 없는 슈퍼맨과 배트맨은 슈퍼맨과 배트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작품 속에서 또 다시 두 영웅은 상반된 능력만큼이나 다른 내적 결함에 따른 사고방식과 행동으로 협동 속에서 갈등하고 대립 속에서 화해할 것이다. 물론 그 화해는 내적 결함의 극복처럼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다. 한 작품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화해하지만 둘은 또 다른 작품에서 다시 서로의 차이 때문에 갈등하고 대립할 것이다.

미국의 자식들 : 슈퍼맨과 배트맨

<다크 나이트> 시리즈에서 브루스 웨인의 집사인 앨프리드를
연기영국 배우 마이클 케인은 <에인트잇쿨뉴스>(☞바로 가기)에서 "슈퍼맨은 미국이 바라보는 미국의 모습이며, 배트맨은 다른 나라가 바라보는 미국의 모습이다(About Superman and Batman: the former is how America views itself, the latter, darker character is how the rest of the world views America)"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미국인이 아닌 영국인의 시각에서 나온 발언이라 더 의미심장하다.

상당수의 미국인들이 주한미군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 미군을 주둔시키고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하는 미국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주둔지나 분쟁
지역에서 미군들이 언제나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오만하고 독단적인 작전 수행과 그로 인한 민간인 피해나 미군 범죄 등으로 미군과 미국의 대한 반감도 상당하다.

세계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헌신하고 있음에도 비난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의 자괴감과 허무함은 슈퍼맨의 그것과 겹쳐진다. 그로 인해 헤게모니 획득에 더욱 집착하는 모습도 그렇다. 세계의 경찰을 한답시고 해당 지역에서 비난받을 행동을 서슴지 않는 모습은 고담 시티의 범죄를 척결한다지만 한 꺼풀 들춰보면 결국 사적인 복수심에 폭주하는 배트맨의 모습과 겹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슈퍼맨과 배트맨
소재코믹스영화는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도 캐릭터의 입체성으로 확보하여 서사를 두텁게 한다.

그래서 이 두 히어로의 이야기는 통쾌하고 술술 읽히는 페이지 터너에 머물지 않는다. 미국 독자들에게는 자국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안겨줄 것이며, 슈퍼맨으로서의 미국에게 보호받는 입장이면서 배트맨으로서의 미국에게 이리저리 치이는 입장인 한국인들에게도 작품을 접할수록 씁쓸한 뒷맛과 함께 생각할 거리를 잔뜩 안겨주지 않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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