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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향기

벨라타르, 내 생각에 인간의 존엄성은 영원한 것들 중 하나이고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주제다

by 아프로뒷태 2012. 6. 12.

 

 

인간의 존엄성은 내게 가장 중요한 주제다. 벨라타르 감독

벨라타르 감독,

 

토리노의 말 (The Turin Horse, 2011)

런던에서 온 사나이 (The Man from London, 2007)

프롤로그 (Prologue, 2004)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Werckmeister Harmonies, 2000)

평원에서의 여행 (Journey on the Plain, 1995)

사탄탱고 (Satan's Tango, 1994)

파멸 (Damnation, 1987)

가을 (Almanac of Fall, 1984)

맥베스 (Macbeth, 1982)

불안한 관계 (The Prefab People, 1982)

아웃사이더 (The Outsider, 1980)

호텔 마녜지트 (Hotel Magnezit, 1978)

패밀리 네스트 (Family Nest, 1977)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의 오프닝은 벨라 타르 특유의 롱테이크로 이뤄져 있다. 카메라가 물 흐르듯 움직이며 이어지는 롱테이크가 벨라 타르의 유명한 스타일이지만 이 영화의 오프닝은 스스로 자기 영화의 방법론을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드문드문 의자가 있는 넓은 술집,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다. 카메라가 움직이면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는데 그중에 젊은 남자주인공이 있다. 술 취한 중년 남자의 권유로 그는 술집에 있는 사람들을 한명씩 불러세워 태양과 지구와 달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중앙에 있는 남자가 태양이며 그 주위를 지구인 남자가 빙글빙글 돈다. 그러는 동안 또 한 남자가 달이 되어 지구 주위를 돈다. 그들은 춤을 추듯 움직이며 자전과 공전의 이치를 보여준다. 문자 그대로 벨라 타르의 우주가 만들어지는 중이다. 중심에 어떤 인물이 있고 카메라가 위로 움직이면 상대편이 누구인지가 눈에 들어오고 다시 카메라가 옆으로 움직이면 그곳이 어디인지 드러나며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 전체 상황이 보인다. 그의 영화는 그렇게 조금씩 세상의 형상을 보여준다. 벨라 타르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어떻게 영화의 총체성 또는 복합성을 만드느냐의 문제다. 이번호에 실린 홍성남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영화가 카메라에 담기는 것들 사이에서 “관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태양이 있으면 주위에 지구가 있고 지구가 있으면 주위에 달이 있듯 인물을 둘러싼 상황과 공기와 질서가 카메라가 움직이면서 하나둘 포착된다. 우주의 이치와 같은 원리로 이뤄진 영화. 스토리나 인물이 아니라 관계와 흔적과 떨림을 담는 영화. 자신의 영화는 영원성을 포착하려는 것이라는 그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벨라 타르는 아직도 새로운 영화가 나올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적지 않은 관객이 벨라 타르를 통해 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봤다는 뿌듯함을 공유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헝가리의 거장 벨라 타르 인터뷰

헝가리의 거장 감독 벨라 타르를 평론가 홍성남이 만났다.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벨라 타르의 <사탄 탱고>가 상영된 뒤 국내에도 벨라 타르 지지자들은 암암리에 늘어났는데, 그가 한국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벨라 타르가 영원할 것만 같은 염세적인 그의 세상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당신은 철학자를 꿈꿨다던데.


=어린 시절 1968년의 ‘68혁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68년을 기점으로 많은 개방이 이루어졌고, 헝가리에서도 이전보다 더 많은 중요한 사람들이 등장하게 됐다. 고등학교 시절 혹은 그보다 더 어릴 때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것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고, 그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영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 당시에는 장 뤽 고다르, 미클로시 얀초 등 훌륭하고 신선하고 혁명적인 영화들을 주로 봤다. 나는 사회에 대해서 특별히 민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선박회사에서 일했다. 16살에 8mm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영화의 내용이 정치계와 관료주의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대학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했다. 그런 경험 끝에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됐고, 영화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내가 전문적인 영화감독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스>를 끝내고 <런던에서 온 사나이>를 만들기까지 7년이 걸렸다.


=<런던에서 온 사나이>의 준비가 다 됐을 때 갑자기 투자자이자 제작자인 나의 프랑스 친구가 자살했다. 은행 자금의 공급이 중단됐다. 세트는 분해해서 창고에 넣었고 촬영이 중단됐다. 법적, 재정적 문제가 계속됐고 은행장, 투자자들을 만나러 매주 파리에 가야했다. 그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는데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소요됐고 2007년 2월에 다시 촬영에 들어가 3월15일에 촬영을 마쳤다. 그것이 두 영화 사이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존재하는 이유다.

 

-당신은 당신의 영화들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영화라고 설명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영원성이다. 내 생각에 인간의 존엄성은 영원한 것들 중 하나이고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주제다. 못생긴 사람이건, 범죄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인간의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도 개성과 삶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내가 보여주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 영화에는 패션잡지 표지 모델이 될 법한 사람은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구스 반 산트가 당신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당신 영향을 받은 그의 영화는 훌륭하다. 반 산트의 영화를 본 적이 있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와 나는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고, <아이다호> <드럭스토어 카우보이> 등의 영화를 봤다. 뉴욕에서 나의 회고전이 있었을 때, 그가 초대해서 <제리>의 워크 프린트를 본 적이 있다. 아녜스와 함께 만났었는데 아내가 조언을 했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말할 수 있는 정도다.

 

-영화는 구체적인 것을 찍을 수밖에 없는데, 당신 영화를 보면 겉모습 너머의 것을 보여주려고 하고 그 영역은 무생물을 넘어선다. 벽의 표정, 벽에 새겨진 역사 등을 포착하려고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그것이 내가 이야기해온 것들이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현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과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의 관계를 표현함으로써 앞서 말한 나의 세계, 나의 비전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말할 용기는 없다. 다만, “이것이 내가 바라본 현실”이라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영화 언어로 전환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차기작 계획을 말해줄 수 있나?


=있다고 해도 아직은 말할 수 없다. 영화는 보는 것이지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영화를 만든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다행인 셈이다.

 

 

회고전 열리는 헝가리 거장, 벨라 타르의 영화세계


 

옴니버스 영화 <비전스 오브 유럽>(2004)에 수록된 단편 <프롤로그>에서 벨라 타르는 빵을 얻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이동하는 카메라로 담아냈다. 단 하나의 숏을 가진 이 5분짜리 영화가 일견 단순하거나 평범해 보이면서도 기실 그렇지 않은 것은 여기에 타르 세계의 정수라고 할 만한 것이 꽤 잘 요약되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보듯 타르의 카메라가 잡아내려 하는 것은 우선적으로는 여러 사람들이겠지만 더 나아가 그들과 어울림을 갖는 공기의 표정과 세상의 얼굴이기도 할 것이다. 아울러 흘러가는 시간 역시 주요한 포착의 대상임을 간과할 순 없을 것이다. 그 결과 타르가 빚어내는 숏 안에서 통상적으로 특별한 ‘사건’을 갖지 못한다고 간주되던 순간은 놀랍게도 굉장한 밀도를 가진 스펙터클의 순간으로 바뀌어버린다. <프롤로그>에서 우리는 타르가 행하는 이처럼 비범한 영화적 연금술을 재확인하게 된다.

‘반(反)영화’적 영화를 만든 초창기의 벨라 타르

앞에서 ‘재확인’이란 단어를 쓴 것은, 우리들 대부분은 타르의 그 이전 영화들을 통해 이미 그가 거둔 미학적 성취를 머릿속에 그려놓았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탄탱고>(1994)와 그 다음 작품인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2001)로부터 많은 관심 있는 관객들은 타르의 세계가 구축된 방식에 대한 단서를 제공받았을 것이다. 물론 이 영화들이 타르의 세계의 많은 부분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그가 도달할 수 있는 고점을 보여주기도 하는 대표작들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세계의 전모에 해당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제 타르의 초기로 돌아가 보면 <사탄탱고>나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만으로 타르의 세계를 헤아렸던 이들은 적잖이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다. <사탄탱고>의 타르가 긴 호흡의 숏으로 ‘경이(wonder)의 영화’를 만드는 형식주의자이자 물리적 세계를 관찰하며 동시에 그 너머를 보고자 하는 형이상학자라면 초기의 타르는 이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타르는 스물 둘이란 아주 이른 나이에 장편 데뷔작 <패밀리 네스트>(1977)를 만들었는데(그는 이 영화를 만들고 난 다음에 영화학교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주택난을 제대로 해결해주지 못하는 시스템 아래에서 부모와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젊은 부부에 대한 영화다. 굳이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이라도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사회적 리얼리스트로 분류될 수 있는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 점이다. 이 영화를 만들 당시 타르는 (꼭 정치적이진 않더라도) 사회적인 감수성을 가지고서 가난한 사람들, 추한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바랐다고 말한 바 있다. 타르의 이런 태도는 <아웃사이더>(1980), <불안한 관계>(1982) 같은 차기작들에도 이어졌다. 이것들은 모두 타르가 마치 황폐한 현실 그 자체를 마주하고 있다는 듯한 거친 태도로 사회의 주변부에 위치한 사람들의 신산한 삶에 카메라를 가져간 영화들이었다. 타르는 이것들이 거짓말을 하는 평범한 ‘영화’와는 다른 진실한 영화이길 원했고 그런 점에서 차라리 ‘반(反)영화’로 불려야 한다고 보았다.

변화, 리얼리즘과 양식화 사이의 변증법

이 초기영화들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타르’의 영화로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은 타르가 라스 폰 트리에와는 정반대의 경로를 걸어왔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폰 트리에가 예컨대 <유로파>(1991)처럼 스타일의 과잉을 보여주는 영화에서 <백치들>(1991) 같은 ‘헐벗은’ 영화로 이동했던 것에 반해 타르는 영화적 치장을 하지 않고서 현실을 맨 얼굴을 보려 하는 영화로부터 그런 현실과 거리를 두면서 형식주의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영화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타르에 대해 비평적 관심을 가지는 평자들은 어쨌든 그의 필모그래피를 세 편의 초기 영화들과 <파멸>(1987)로부터 시작되는 이후 영화들로 양분하는 데에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한다(그리고 그 가운데에 놓인 <가을>(1984)은 형식적 실험에 대한 타르의 관심이 커졌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이행기적’ 작품으로 간주된다). 문제는, 그렇다면 타르의 세계에서 이 두 범주의 영화들이 정확히 나뉘고 대립하기만 하냐면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는 것 같다. <파멸> 이후의 영화들이 비록 초창기의 리얼리즘 영화들과 상이한 외양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것들에서도 리얼리즘의 방식이 완전히 버려진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타르는 사람들과 공간들을, 심지어 기후를 포함한 세계의 공기까지도 지극히 세밀한 터치로 그려낸다. 그러면서도 그는 리얼리즘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그 너머로 나아가려고 한다. 타르 자신의 말을 빌리면 그의 영화들에서 하늘부터 땅까지 모든 것은 그의 창조적 의지에 따라 꼼꼼하게 창조된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타르의 세계를 구축하는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찾아낼 수 있다. 그것은 세계를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태도와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의지 사이의 긴장, 다른 말로 하자면 리얼리즘과 양식화 사이의 변증법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타르는 디테일의 진실함을 기반으로 해서 현실과는 다를 수 있지만 여하튼 통일성을 갖는 세계를 영화 속에 만들어낸다고 하는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의 생각을 현대적으로 재개념화하고 있는 시네아스트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악의 존재가 원을 그리며 앞서가는 타르의 세계

여기서 다시 한 번 초기의 타르로 돌아가 본다면 그는 출발 지점에서부터 세상의 무자비한 힘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다뤘다. <패밀리 네스트>에서 슬쩍 드러나듯 그들은 시스템의 무능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한 주변인들을 다룬 나중 영화들까지로 시야를 넓혀보면 타르 영화 속 인물들의 비참함은 사회적 조건과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이쯤에서 헝가리의 영화학자 안드라스 발린트 코바치(언젠가 보드웰은 타르에 대한 가장 뛰어난 글은 이 사람이 썼던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의 언급을 듣는 것은 유용한 일일 것이다. 그는 타르의 영화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일궈놓은 전통이라는 맥락 안에서 논의하면서 아무도 안토니오니의 영화가 부유한 자들의 문제를 다룬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처럼 타르의 영화 역시 가난한 자들의 경제적 비참함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순 없다고 했다. 타르가 굳이 자신의 인물들을 저 낮은 곳에서 찾아낸 것은, 세상에 만연한 절망을 더 이상 가라앉을 수 없는 지점에서 보여주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을>의 서두에서 인용된 푸슈킨의 문장에 인용하자면 타르의 세계는 ‘악(惡)의 존재가 원을 그리며 앞서 가는 미지의 땅’으로 묘사할 수 있다. 타르의 인물들이 절망과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그런 무자비한 세상에 던져진 존재들이고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그런 이유로 비극적인 존재들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파멸>의 카러, <사탄탱고>의 의사,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의 야노스가 결국에는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게 된다는 것은 주목을 요한다. 파멸의 시간이 도래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세상에서 어쩌면 그런 행위야말로 추악한 세계를 그들로부터 소멸시킬 유일한 방도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눈으로만 보는 영화가 아닌 ‘감촉의 영화’

긴 호흡의 숏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타르를 논의하면서 자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테오 앙겔로풀로스, 그리고 미클로스 얀초)를 함께 언급하곤 한다. 하지만 타르 자신은 그런 비교가 그리 적절하지 못한 것이라고 본다. 타르코프스키는 신을 믿었고 그래서 항상 희망을 가졌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타르를 가리켜 ‘신성함을 벗어버린 타르코프스키’라고 묘사하기도 했는데, 무자비한 염세주의자로서 타르의 그런 면모는 <사탄탱고>의 여섯 번째 장(章)에 나오는 술집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요컨대 여기서 시간의 육중한 무게를 견뎌낸다는 것은 ‘지옥의 시간’을 통과하는 것과 동의어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 타르는 ‘모든 것이 왜 이처럼 고통거리를 밝히는 슬픈 탐사자(探査者)’(<사탄탱고>에서 이리미아스가 자신에게 하는 이 말을 고스란히 타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의 면모를 세상에 표정을 각인함으로써도 발휘한다. 그침이 없이 계속해서 내리는 비, 진흙 투성이의 황량한 땅, 그 위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서 있는 집과 대체로 어두워 보이는 그 내부, 허름한 술집 같은 요소들로 이뤄진 타르의 세계는 파멸과 타락의 기운을 나지막이 내보이는 곳인 것이다. 사실 타르가 이뤄낸 가장 큰 미학적 성취는 단지 사람의 얼굴만이 아니라 다른 물체, 공간, 빛, 그리고 시간에게도 표정과 물성(物性)을 부여해 ‘감촉의 영화’를 만들어낸 데 있을 것이다. 타르의 영화가 사고를 요하는 영화이기 이전에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는 영화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타르는 눈과 귀를 활용할 우리를 파트너로 초대한다. 이제 우리에겐 이 황홀한 초대에 정성스레 응대할 일이 남았다.

 

 

    롱테이크 씬은 찍기 어렵다. 롱테이크는 하나의 쇼트를 길게 촬영하는 방법이다. 벨라타르 감독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한국의 영화에서는 명작, <살인의 추억>에서 롱테이크 씬이 나오는데, 상황연출력이 대단히 뛰어나다.

 

 

 

 

 

 

다음지식에서 롱테이크에 대한 상세한 예와 설명이 있다. 출처-다음 오픈 지식

 

뤼미에르 형제로 부터 지금까지 영화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빠른 성장을 거듭해오고 있습니다.
매년 늘어나는 제작비와 발전하는 컴퓨터 그래픽 등등의 외적 성장은 점점더 풍성한 볼거리들을 관객에게 제공하고 있지요.그러나 영화사적으로 명작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이루워낸 내적은 성장에 비하자면 그것은 껍대기에 불과 하다고 까지 말할수 있습니다.

 

 

 

오손웰즈의 비운의 걸작 시민케인 ,오즈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 타란티노의 펄프픽션,프랑소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등등 해아릴수없는
명작들에는 그 마다의 작가의식과 더불어 독특한 카메라워크의 실험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메라는 감독의 눈이자 곳 관객의 눈입니다.그러기에 카메라의 위치와 워킹 하나 하나가 각각의
의미를 내포하고 제기능을 하고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시민케인에서 사용된 오손웰즈의 딥포커스는 화면의 전체 사물과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워 관객에게 선택의여지를 남기는 영화사적으로 대단한 실험이라고 볼수있습니다.오손웰즈 본인은 "관객들은 한 쇼트 내에서 보고싶어하는 것을 선택해서 볼 수 있다. 나는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였죠 제 개인적으로는 연극의 선택적 취사 장점을 영화에 옮겨 사용했다고도 보여집니다.

 

 

 

오즈 야스지로의 도쿄이야기에서 쓰여진 롱테이크장면은 일명 다다미 쇼트라고도 불리워집니다.
완벽하게 짜여진 동선으로 연기하는 연기자를 절제된 카메라가 쫓아가며 가족의 붕괴라는 일본의
현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롱테이크는 위에서 말한데로 절제의 미학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게되었을떄 사랑이란 단어를 남발한다면 처음 그 단어를 들었을떄의 떨림이
점차 희석되어 갑니다.그렇듯 현란한 컷들의 이어붙임으로 대중적으로 충분하게 다가갈수도 있겠지만
절제함으로써 나타낼수있는 내적인 울림의 깊이를 선택한 감독의 의지가 높이 평가되어짐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롱테이크에 대한 또다른 해석으로는 사실감의 보존을 들수있습니다.
홍상수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 강원도의 힘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의 나른한 일상을 지켜보는 듯한
방관자적인 롱테이크로 얻어지는 효과가 여기에 속한다 할수있겠습니다.

영화속 인물이 더운 여름 생수통 하나를 들고 횡단보도에 서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흔히 보는 드라마나 영화라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아스팔트,이슬이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생수통,주인공의 땀방울,
횡단보도에 함께 서있는 타인들의 짜증섞인 표정까지 카메라의 클로즈 업으로 담으려 하것입니다.
그것은 익숙하며 쉬운 설명방법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롱테이크로 담아낸다면 관객은 여러가지 상황들을
취사선택하며 미루워 짐작하는 권리를 가지게 됩니다.보는이 마다 다른 느낌을 받을수도있어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킬수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롱테이크는 시각적 불만족에서 오는 지루함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그럼에도 롱테이크의 순기능에 매력을 느끼는 연출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맞는 타이밍과 길이로 그 절제된 사실감의 보존을 영상으로 만들어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습니다.선택은 개인은 몫이라 생각합니다.
조금더 진보된 영상의 내적 의미를 찾고 싶다면 롱테이크같은 작가적 기법에 관심을 보내며 남겨진 의미를 곱씹어보는 관람 자세가 필요한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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