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아프리카 수단 남쪽의 작은 마을 톤즈. 남 수단의 자랑인 톤즈 브라스 밴드가 마을을 행진했다. 선두에선 소년들은 한 남자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한 남자… 마을 사람들은 톤즈의 아버지였던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딩카족이다. 남과 북으로 나뉜 수단의 오랜 내전 속에서 그들의 삶은 분노와 증오 그리고 가난과 질병으로 얼룩졌다. 목숨을 걸고 가족과 소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딩카족. 강인함과 용맹함의 상징인 종족 딩카족에게 눈물은 가장 큰 수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들이 울고 말았다. 모든 것이 메마른 땅 톤즈에서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 마지막 길을 떠난 사람, 마흔 여덟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故이태석 신부다. 톤즈의 아버지이자, 의사였고, 선생님, 지휘자, 건축가였던 쫄리 신부님, 이태석…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온몸 다해 그들을 사랑했던 헌신적인 그의 삶이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그의 인생이 이제 온 세상을 울린다!
About Movie
남부 수단의 절망의 황무지, 톤즈를 아시나요?
아프리카 오지 톤즈의 희망 故이태석 신부를 만나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인 수단은 1956년 독립 직후부터 집권층인 소수의 아랍계와 피지배층인 다수의 원주민 사이의 끝없는 내전으로 모든 것이 황폐해져 있는 상태다. 80년대 남부에서 석유가 발견된 이후 이를 차지하기 위해 내전은 더 격화되었다. 특히 반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부 수단은 절망의 황무지라 불리 울 만큼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다. 어린 소년들은 소년병이란 명목하에 군대에서 착취당하고 있으며, 느닷없이 시작되는 전쟁의 불안감과 더욱 심해지는 폭력성으로 인해 국민들은 두려움으로 가득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또한 악성 말라리아와 콜레라등의 전염병으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다. 강한 햇빛과 습기 많은 우기를 가진 자연환경과 질 낮은 위생 상태, 기본적인 먹거리의 부족 등으로 인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빠르게 퍼진 전염병은 전쟁 만큼이나 톤즈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오지 여행가이자 국제 구호전문가인 한비야씨도 근래에 가본 곳 중 남부 수단의 상태가 가장 최악이었다고 고백했을 만큼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톤즈. 그 지옥 같은 곳에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 되어준 한 사람이 있었다. 2001년 로마 교황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남부 수단을 자원해 부임한 이태석 신부. 그는 인제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 생활까지 마친 의사였으나, 세상의 가장 가난한 곳에서 의술을 펼치고 싶다는 어린시절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뒤늦게 신학대에 진학했고, 신부가 되자마자 톤즈로 향했다. 톤즈 사람들은 그를 쫄리 신부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그는 희망이라 기억되었다.
이태석 신부는 지난 1월14일 대장암으로 선종했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톤즈는 지금 슬픔에 잠겨 있다. 그들이 기억하는 이태석 신부와 그가 남긴 사랑과 나눔의 의미를 찾아 우리는 다시 톤즈를 찾았다.
About
잠들지 않는 톤즈의 병원, 그 곳의 유일한 의사 이태석 신부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린 그의 투혼이 살려낸 소중한 생명들!
의사로서의 평탄한 삶을 포기하고 사제의 길을 택한 이태석 신부의 몸과 마음은 아프리카의 가장 척박한 땅, 톤즈로 향했다. ‘내가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라고 그는 이야기 했지만 실로 그가 톤즈에서 일궈낸 성과는 대단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운 이태석 신부는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가장 가난한 땅 톤즈로 향하게 된 것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독립된 혼자만의 삶이 아닌 톤즈 사람들의 삶이기도 하다는 것을 주님의 거대한 사랑 안에서 실감하며, 내전과 전염병으로 병든 톤즈에 병원과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병원이 생겼다는 소문을 들은 톤즈 사람들은 며칠 밤을 새며 걸어와 치료를 받았고, 그런 환자들을 돌려 보낼 수 없었던 신부님은 잠을 줄여가면서 환자를 맞았다.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치료를 하는 신부님의 투혼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병원은 나날이 많은 환자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태석 신부는 병원까지 오지 못하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높은 온도에 약한 백신을 아이스박스에 넣어가 직접 환자를 찾아가 접종을 해주었다. 백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냉장고를 사용하기 위해 전기가 없는 톤즈의 건물 지붕에 태양열 집열기를 설치하여 전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그는 환자들의 아픔을 좀 더 잘 듣기 위해 그들의 말인 딩카어도 열심히 배웠다. 모든 것을 혼자서 꾸려가야 했던 이태석 신부의 진료는 그렇게 밤을 새워가며 계속되었다. 병과 싸울 힘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그의 사랑과 노력으로 인해 소중한 생명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About Movie
사랑을 가르치는 거룩한 돈보스코 초. 중 고등학교,
내 집처럼 느껴지는 정이 넘치는 학교를 꿈꾸다!
병원이 자리를 잡아가자 이태석 신부는 톤즈에서 이루고 싶은 또 하나의 꿈을 펼쳐놓기 시작한다. 소년병으로 끌려가는 아이들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 속에서 할 일이 없는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학교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학교가 없어 배우지 못하고 그로 인해 가난이 대물림 되고 있는 톤즈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꿔보기 위해 그는 예수님의 사랑이 깃든 학교를 만들기로 한다. 병원과 마찬가지로 톤즈 사람들과 함께 만든 학교는 고등학교 과정까지 한 교정에 있는 톤즈의 유일한 학교로 완성되었다. 이태석 신부는 직접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고, 케냐에서 교사 자격증이 있는 교사들을 선발해 데려와 학생들을 가르쳤다. 톤즈 돈보스코 초. 중 고등학교(12년 과정)는 남부 수단에서 가장 실력 있는 학교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보통 다른 학교들은 오전에 간단한 수업을 하고 선생님이 없을 경우 수업을 하지 못하기도 하면서 오후 12시면 모든 과정이 끝나는데 돈보스코 초. 중 고등학교는 항상 선생님들이 수업을 하고 있고, 고등학교의 수업은3시까지 알찬 수업으로 짜여져 있어 많은 아이들이 오고 싶어하는 학교가 되었다. 수업의 열기 또한 대단하여 고등학교 3학년 수업의 경우 한 교실에서 120명의 학생이 비좁게 모여 앉아 수업을 들었다. 학교 근처에는 기숙사도 만들어서 집이 먼 아이들이 숙식을 해결하며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오랜 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부서진 톤즈의 아이들은 이태석 신부의 꿈이 담긴 학교에서 드디어 자신들의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고 사랑을 배우게 되었다.
1986년 KBS에 입사하여, 이라크,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체첸, 동티모르, 코소보 등 세계 분쟁지역을 8년 동안 취재하며, 전쟁의 실상과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렸다. 2004 ~ 2008년까지 <추적 60분> 책임프로듀서 겸 MC로 프로그램을 진두지휘하면서 우리사회의 불법 비리들을 고발했다.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를 담은 <울지마 톤즈>를 만든 후, 많은 사람들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신부님의 말씀과 실천하는 삶이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 가치의 중요성이 널리 알려졌다고 생각하니 정말 기뻤다. <울지마 톤즈>라는 작품이 이태석 신부의 영원한 분신으로 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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