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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나는 고도를 기다린다.

by 아프로뒷태 2011. 10. 24.

 

 

 

그곳에서 나는 너의 손을 잡고 있었다. 너의 손은 따뜻했다. 너의 손가락은 나의 손등을 톡톡 쳤다. 너의 기분이 좋다는 뜻이다. 나도 그랬다. 너의 손안에서 나의 손은 차갑지 않고 보드라웠다. 늘 차가웠던 손이 웃는 순간이었다. 암전이 되는 순간, 너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와닿았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너는 나를 핥았다. 때론 꽉 조였고 비틀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대로였다. 그것이 기다림의 이유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명이 밝아졌다. 무대위로 배우가 걸어나왔다. 너는 피씩 웃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무대를 바라봤다. 너의 손을 어루만지며. 장난이 가득한 아이를 달래는 눈빛으로.

 

자, 이제 연극을 보자.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은 조명때문이었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고도를 기다리며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그들은 조명을 향하고 서 있었다. 그들은 고도가 올거라고 했다. 고도는 틀림없이 온다고. 언제부터 그들이 고도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현재 그들이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에스트라공, 고도는 오지 않아. 블라디미르, 고도는 오지 않을 거야. 그러니 기다리지마.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말을 삼켰다. 

 

기다림.

 

기다림을 즐길 줄 몰라서였을까? 기다림만 바라보는 일은 힘겹다. 기다리면서 놀줄도 알아야 한다. 기다리면서 딴 짓도 할 줄 알아야 한다. 한 눈도 팔고 해야 하는데. 나는 너무 정직하게 기다렸다. 오직 그 순간을. 그 시간을. 그 날을.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려도 오지 않을 기다림을 향해. 나는 밤마다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밤공기를 타고 푸른 곰팡이가 핀 기다림에게 가닿기를 바랐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게 다가와, 오래 기다렸지? 라고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고도는 오지 않았다. 고도는 올 것처럼 기다리라고 하더니. 고도는 오지 않았다.

 

 

 

2011년 10월 18일 산울림 소극장에서. 

 

 

 

 

 

 

 

 

 

 

 

 

 

 

 

 

 

 

 

에스트라공 (질겁을 한 동작으로 횡설수설 중얼거리다가 마침내)

넌 왜 잠도 못 자게 하는 거야?

블라디미르 외로워서.

에스트라공 행복하게 된 꿈을 꾸고 있었는데

블라디미로 그럼 시간이 잘 지나갔겠구나

에스트라공 꿈에 말이다

블라디미르 듣기 싫다! (사이) 그자가 진짜로 장님이 되었을까?

에스트라공 누가?

블라디미르 진짜 장님이면 시간 관념이 없다는 말을 할까?

에스트라공 누구 얘기야?

블라디미르 포조.

에스트라공 포조가 눈이 멀었대?

블라디미르 제 입으로 그렇다고 했잖아?

에스트라공 그런데?

블라디미르 내 보기엔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았어.

에스트라공 너 꿈을 꾼 모양이구나. (사이) 그만 가자. 이젠 안 되겠다. 안 되고말고.

(사이) 그 작자가 아닌게 확실하냐?

블라디므로 누구?

에스트라공 고도 말야

블라디미르 누가 고도라는 거야?

에스트라공 포조 말이다

블라디미르 아냐. 그건 아니다 (사이) 아니고말고

 

 

 

 

 

 

 

 

 

에스트라공 어쨌든 이젠 일어나야지. (힘겹게 일어선다)아야!

블라디미르 이젠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에스트라공 내 발이! (다시 앉아서 구두를 벗으려 한다) 좀 거들어줘!

블라디미르 남들이 괴로워하는 동안에 나는 자고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자고 있는 걸까?

내일 잠에서 깨어나면 오늘 일을 어떻게 말하게 될지? 내 친구 에스트라공과 함 께 이 자리에서 밤이 올 때까지 고도를 기다렸다고 말하게 될까? 포조가 그의 짐꾼을 데리고 지나가다가 우리에게 얘기를 했다고 말하게 될까?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게 어느 정도나 사실일까? (에스트라공은 구두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벗겨지지 않는다. 그는 다시 잠들어버린다. 블라디미르가 그를 바라본다.) 저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겠지. 다시 얻어맞은 얘기나 할 테고 내게서 당근이나 얻어먹겠지.

 

(사이)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무서운 산고를 겪고 구덩이 밑에서는 일꾼이 꿈속에서처럼 곡괭이질을 하고. 사람들은 서서히 늙어가고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 (구를 기울인다) 하지만 습관은 우리의 귀를 틀어막지. (에스트라공을 바라본다) 나역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겠지. 그리고 말하겠지. 저 친구는 잠들어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 자게 내버려두자고. (사이) 이 이상은 버틸 수가 없구나. (사이) 내가 무슨 말을 지껄였지?

 

그는 부산스럽게 왔다갔다하더니 마침내 왼쪽 무대 출입구 가까이 가서는 먼 곳을 바라본다. 오른쪽에서 어제 왔던 소년이 들어온다. 걸음을 멈춘다. 침묵

 

 

 

 

 

소년 아저씨....(블라디미르가 돌아선다) 알베르 아저씨는....

블라디미로 다시 시작이로구나 (사이, 소년에게) 너 나 모르겠니?

소년 모르겠어요

블라디미르 너 어제도 왔지?

소년 아니요

블라디미르 그럼 처음 오는 거냐?

소년 네

침묵.

블라디미르 고도 씨가 보낸 거지?

소년 네

블라디미르 오늘 밤에는 못 오겠다는 얘기겠지?

소년 네

블라디미르 하지만 내일은 온다는 거고?

소년 네

블라디미르 내일은 틀림없겠지?

소년 네

침묵.

블라디미르 오다가 누굴 만나지 않았니?

소년 아뇨.

블라디미르 두....(망설이다가) 사람 말이다.

소년 아무도 못 봤어요.

침묵.

블라디미르 그래, 고도 씨는 뭘 하고 있냐? (사이) 내 말 듣고 있는 거냐?

소년 네

블라디미르 그럼?

소년 아무것도 안해요

침묵

블라디미르 너의 형은 잘 있냐?

소년 아파요

블라디미르 그럼 어제 온 건 형이었나 보구나

소년 모르겠어요

블라디미르 수염이 있냐? 고도 씨는?

소년 네.

블라디미르 노란 수염이냐. 아니면....(망설이다가) 까만 수염이냐?

소년 (망설인다) 흰 수염 같아요

침묵.

블라디미르 하느님 맙소사!

침묵.

소년 고도 씨에게 가서 뭐라고 할까요?

블라디미르 가서 이렇게 말해라. (말을 중단)....나를 만났다고 말해라. (생각한다) 그냥 나를 만났다고만 해. (사이, 블라디미르가 앞으로 나오자 소년은 물러선다. 블라디미르가 멈추니 소년도 멈춰선다) 틀림없이 넌 나를 만난 거다. 내일이 되면 또 나를 만난 일이 없다는 소리는 안하겠지?

 

 

침묵,

 

블라디미르가 별안간 앞으로 달려들려 하자 소년은 쏜살같이 달아난다.

 

침묵,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른다. 블라디미르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에스트라공이 잠에서 깨어나 구두를 벗고 일어선다. 손에 든 구두를 무대 전면에 갖다놓고 블라디미르쪽으로 가며 그를 바라본다.

 

 

 

 

 

에스트라공 무슨 일이 있었니?

블라디미르 아무 일도 아니다

에스트라공 난 가겠다

블라디미르 나도 가야지

 

침묵.

 

에스트라공 내가 오래 잤니?

블라디미르 모르겠다

 

침묵.

 

에스트라공 어디로 갈까?

블라디미르 멀리 갈 순 없지

에스트라공 아냐, 아냐 여기서 멀리 가버리자

블라디미르 그럴 순 없다

에스트라공 왜?

블라디미르 내일 다시 와야 할 테니까

에스트라공 뭣하러 또 와?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리러.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사이) 안 왔냐?

블라디미르 안 왔다

에스트라공 지금은 너무 늦었다

블라디미르 그래 밤이 됐구나

에스트라공 바람을 맞혀버릴까? (사이) 이쪽에서 바람을 맞혀 버리는 게 어떻겠냐고?

블라디미르 우릴 벌할걸 (침묵, 나무를 바라본다) 나무만이 살아 있구나

에스트라공 (나무를 바라보며) 저게 뭐냐

블라디미르 나무다

에스트라공 아니, 무슨 나무냔 말이야

블라디미르 모르겠다. 버드나무인 것 같다

에스트라공 가까이 가보자.(블라디미르를 끌고 나무 가까이로 간다. 나무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침묵)목이나 맬까?

블라디미르 무얼로?

에스트라공 너 끈오라기라도 없냐?

블라디미르 없다

에스트라공 그럼 할 수 없군.

블라디미르 가자

에스트라공 잠깐만. 내 허리띠가 있다

블라디미르 그건 너무 짧다

에스트라공 네가 내 다리를 잡아당겨 주면 되잖아.

블라디미르 그럼 내 다리는 누가 잡아당겨 주게?

에스트라공 참 그렇구나

블라디미르 어쨌든 어떻게 되는지 보기나 하자( 에스크라공이 바지에 매어 있던 끈을 푼다. 바지통이 너무 커서 발목까지 흘러내린다. 둘은 끈을 살펴본다) 이걸로도 안 될 건 없겠다. 하지만 튼튼할까?

에스트라공 어디 보자. 잡아.

두 사람은 각기 한쪽 끝을 잡아당긴다. 끈이 끊어지는 바람에 그들은 넘어질 뻔한다.

블라디미르 아무짝에도 못쓰겠구나

 

침묵.

 

에스트라공 정말 내일 또 와야 하나?

블라디미르 그래.

에스트라공 그럼 내일은 튼튼한 끈을 가지고 오자

블라디미르 그래

에스트라공 디디

블라디미르 왜?

에스트라공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블라디미르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그럼 살게 되는 거지

블라디미르가 모자를 벗는다. 럭키의 모자다. 그는 모자 안을 들여다보고 손을 넣어보고 흔들어본 다음 다시 쓴다.

에스트라공 그럼 갈까?

블라디미르 바지가 추켜올려

에스트라공 뭐라고?

블라디미르 바지나 추켜올리라고

에스트라공 바지를 벗으라고?

블라디미르 추-켜- 올리라니까.

에스트라공 참 그렇구나

그는 바지를 추켜올린다. 침묵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스물 두살, 아무런 영예도 없던 시절, 사뮈엘 베케트는 더블린에서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최초의 직업을 갖는다. 고등사범학교 영어 강사직이었다. 파리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그는 평생스승이자 친구인 제임스 조이스를 만나게 된다. 조이스에게 헌정하는 글을 쓸 정도로 조이스를 사랑했던 베케트는 조이스와 같은 위대한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힌다.

▲ 노벨문학상을 받을 무렵의 베케트. 40대에 가볍게 쓴 작품이 60대가 되어서 그에게 노벨상을 안겼다. 그는 83세까지 살았다.

그러나 베케트는 소설뿐 아니라 시, 드라마, 평론, 희곡 등 다양한 영역의 글쓰기에 관심이 있었다. 프루스트에 대한 비평서를 출판하는가 하면, 1930년에는 첫 시집 ‘호로스코프’를 출판한다. 1930년대 초반 당대를 휩쓸었던 트리스탄 차라와 같은 초현실주의자와의 교유를 통해 다양한 예술적 세계를 경험하기도 한다.

늘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는 법. 파리에서 강사를 그만두고 영국으로 간 그는 단편집을 출판하지만 실패하는 좌절을 겪는다. 이후 독일 등 유럽을 여행하고 아일랜드로 돌아온 베케트에게 이번에는 더욱 더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가 전해진다. 프랑스가 독일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실제로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하기도 한 그는, 어수선한 유럽의 사정 속에서 가장 왕성한 창작 시기를 맞이한다.

1946년에서 1949년 사이, 베케트는 중요 저작 세 권을 쏟아낸다. 3부작이라 불리는 ‘몰로이’, ‘말론 죽다’, ‘이름 붙일 수 없는’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기간에 극심한 무력감이 그를 괴롭힌다. 소설쓰기의 괴로움 때문이었다.

그는 잠깐동안 소설쓰기를 중단하고, 머리를 식힐 겸 희곡 한 편을 쓰는데, 그것이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노벨상을 받기 전까지, 자기 스스로도 졸작이라고 말하곤 했던 작품이 훗날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겨준 것이다. 고통 속에서 작업했던 소설 대신, 휴식의 의미로 써냈던 작품이 노벨문학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주었다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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