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향기

<안티크리이스트> 천재감독, 라스폰트리에 감독의 새로운 영화.

by 아프로뒷태 2011. 3. 12.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

아이를 잃은 모성의 극한 슬픔,

마치 <밀양>을 보는 듯하다.

그의 전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적 씬.

물론 그의 영화기법은 독특하고, 그 누구도 감히 근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형식보다 내용면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어둠 속의 댄서> <도그빌>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충격적 걸작   

안티크라이스트

4 14일 개봉

 

 

 

 

영화사에서 가장 불편하고 충격적인 영화의 탄생! 62회 칸국제영화제를 발칵 뒤집은 거장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화제작 <안티크라이스트>

 

 

 

천재감독 라스 폰 트리에 최고의 괴작!

2011 4, 에덴의 비밀이 밝혀진다!

 

6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과 만난 후 강도 높은 성행위 묘사와 폭력성으로 전 세계를 충격에 휩싸이게 한 문제작 <안티크라이스트>가 수많은 논란을 뒤로 한 채, 드디어 국내 개봉을 확정했다. <안티크라이스트>는 지난 2009년 칸국제영화제 상영 당시 최저점과 최고점을 동시에 갱신하며 이례적인 평단의 반응을 이끌어내 화제가 되었으며, 그 해 주연을 맡은 배우 샤를로트 갱스부르에게 여우주연상의 영애를 안겼다.

 

 

 

<어둠 속의 댄서> <브레이킹 더 웨이브> 등의 작품을 통해 세계적 거장으로 떠오른 덴마크 영화계의 귀재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새로운 작품 <안티크라이스트>는 어린 아들을 잃은 부부의 슬픔과 고뇌를 아름답고 잔혹하게 그려낸 사이코 스릴러로 올 봄 국내 관객들에게 여지껏 본 적 없는 충격적인 경험을 선사 할 예정이다.

 

 

 

야유와 탄성, 그리고 비명

<안티크라이스트> 강렬한 이미지의 포스터 대공개!

 

당신의 심장을 마비시킬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충격적 걸작 <안티크라이스트>가 긴박감 넘치는 강렬한 분위기의 포스터를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포스터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며 무섭게 극에 몰입했던 주연배우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어 있다. 영화 전체의 분위기가 모든 것을 잠식시켜버릴 것만 같은 공포감으로 가득한 그녀의 얼굴에 드러나 있어 한 층 더 강렬한 느낌을 준다. .

 

또한, 붉은 색의 강렬한 타이틀과 함께 야유와 탄성, 그리고 비명이라는 메인 카피는 기괴함을 불러 일으키며 영화의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그들의 에덴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 일까? 현대판 아담과 이브의 소용돌이치는 애증을 그린 영화 <안티크라이스트>4 14일 극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INFORMATION

 

제목 : 안티크라이스트

원제 : ANTICHRIST

감독 : 라스 폰 트리에

주연 : 샤를로트 갱스부르, 윌렘 대포

장르 : 사이코 스릴러 드라마

수입 : 씨네라인 코리아㈜

배급 : ㈜마운틴픽쳐스

상영시간 : 107

개봉: 2011414

상영등급 : 청소년관람불가 예정

 

 

 

 

 

SYNOPSIS

 

영화사에서 가장 불편하고 충격적인 영화의 탄생!

공포의 피라미드가 무너질 때, 이브의 악마성이 깨어난다!

눈발이 아름답게 흩뿌려지고 있는 깊은 밤, 그와 그녀는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다. 그들의 어린 아들은 잠에서 깨어나 열린 창가로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다 창 밖으로 추락하고 만다. 아들을 잃은 그녀는 깊은 슬픔과 자책감으로 점점 병들어 가고 그는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에덴'으로 함께 떠난다. 그러나 그녀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현대판 아담과 이브의 애증이 소용돌이 치는 가운데 경악스러운 결말이 그들 앞에 펼쳐지는데...

 

 

 

 

 

 

 

 

스스로 파멸시키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야기 <안티크라이스트>

 

 

글: 김도훈

 

아내(샬롯 갱스부르)와 남편(윌렘 데포)이 섹스하고 있다. 어린 아들은 창가에서 쏟아지는 눈을 구경하다 추락해 죽는다. 남편은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에덴’이라 불리는 숲속 낡은 별장으로 함께 요양을 떠난다. 아내는 점점 더 미쳐가다가 결국 남편의 다리에 구멍을 뚫고, 성기를 짓이기고, 자신의 클리토리스를 잘라낸다. 만약 이 이야기를 연출한 사람이 일라이 로스였다면 영화는 고문 포르노 장르로 훌륭하게 귀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티크라이스트>는 라스 폰 트리에 영화다. 그렇다면 이건 고문 포르노가 아닌가? 아니, 맞다. 다만‘예술적’ 고문 포르노라고 해두자.

 

라스 폰 트리에가 <안티크라이스트>에서 들려주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어둠속의 댄서> <도그빌> 같은 전작과 다를 바 없다. 이 무시무시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파멸시키거나 주변을 파멸시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폰 트리에는 여성혐오의 역사를 여성혐오적인 필치로 묘사하는 데 재주가 있다. 사디즘의 세계에 사디즘으로 맞서는 전략이다. 미학적으로 <안티크라이스트>는 전작들보다 조금 더 나아간다. 폰 트리에는 거의 고문 포르노적인 신체훼손의 미학을 통해 관객의 이성과 오감을 흔들어댄다. 거기서 도덕적인 경계선을 찾아 더듬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안티크라이스트>는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광증(狂症)의 물리적 체험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처럼 느껴진다. 미국 상영본과 비교하자면 한국 상영본은 조금 거세됐다. 샬롯 갱스부르의 클리 토리스 절단 장면이 삭제됐고, 윌렘 데포의 성기 훼손 장면은 뿌옇게 처리됐다.

 

 

[샬롯 갱스부르]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롤러코스터의 삶이 좋아

글:김도훈 2011.04.14

<안티크라이스트>의 샬롯 갱스부르


 

 

당신이 여배우라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 몇 가지가 있다. 물론 ‘여배우 십계명’ 같은 것이 서류로 만들어진 적은 없다만, 그래도 몇 가지 금기를 늘어놔보자. 첫째, 오스카 수상작이 될 법한 진지한 영화와 싸구려 액션, 코미디를 동시에 촬영하지 말라. <몬스터 볼>로 오스카를 받은 해 본드걸이 된 할리 베리, 오스카와 골든라즈베리를 같은 해 수상한 샌드라 불럭을 생각해보시라. 둘째, 남편이 연출한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다. <컷스로트 아일랜드>로 함께 지옥에 떨어진 뒤 결국 이혼과 경력의 부침을 겪었던 지나 데이비스를 한번 떠올려보시라. 사랑에 빠지면 원래 금인지 똥인지 구분하기 힘든 법이다. 셋째, 그리고 궁극적으로, 라스 폰 트리에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정치적으로 깐깐하게, 공정한 여성주의자의 입장에서 정리해보자. <어둠 속의 댄서>는 눈이 점점 멀어가는데다 저지르지 않은 죄 때문에 교수형 당하는 여자 이야기다. <도그빌>은 거대한 수레바퀴에 묶인 채 집단 강간당하는 여자 이야기다. 이쯤 되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대충 눈치챘을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서는 스크린 앞에서 육체와 정신을 모멸당할 준비를 단단히 해야만 한다. 많은 여배우들은 출연에 승낙하고도 이를 좀처럼 견디지 못한다. 비욕은 <어둠 속의 댄서>가 “감정적인 포르노”이며 라스 폰 트리에가 “영혼의 도둑놈”이라고 분노했다. 니콜 키드먼은 <도그빌> 현장에서 큰소리로 감독과 논쟁을 벌이다가 이렇게 외쳤다. “왜 당신은 여자들에게 이토록 악마처럼 굴어요?” <안티크라이스트>에 처음 캐스팅된 에바 그린은 대본을 읽고는 아예 도망쳐버렸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들어온 사람이 샬롯 갱스부르다. 무슨 배포로?

세르주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의 딸로 살다가…

사실 배포와 논쟁에 관해서라면 샬롯 갱스부르는 이미 오래전에 면역 백신을 맞은 적이 있다. 갱스부르의 아버지는 전설적인 샹송 가수 세르주 갱스부르, 어머니는 영국 출신의 도발적인 여배우 제인 버킨이다(몇몇 독자에게는 에르메스의 ‘버킨백’ 주인공으로 더 유명하리라). 1991년 세르주 갱스부르가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이런 추모사를 읽었다. “우리 시대의 보들레르, 우리 시대의 아폴리네르.” 글쎄, 세르주 갱스부르를 미워하던 수많은 또 다른 세력은 아마 ‘샹송계의 사드 백작, 마침내 죽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갱스부르는 성적으로 문란하고 예술적으로 치명적이며 체제적으로는 반항적인, 전형적인 프랑스 한량이었다. 그에게 예술과 논쟁은 동의어였다.

 

 

샬롯 갱스부르는 논쟁을 즐기는 아버지에게 이용당하며 연예계에 데뷔했다. 시작은 13살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부른 샹송 <레몬 인세스트>였다. 이 노래는 근친상간과 소아성애에 대한 은근한 찬사로 읽힐 수 있는 가사를 가지고 있었다. 전세계가 난리가 났다. 영미권에서는 금지곡이 됐다. ‘샬롯 갱스부르는 이 경험으로 무시무시한 성적 트라우마를 얻었고, 그 때문에 <안티크라이스트>처럼 도발적인 영화에 출연한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갱스부르는 껄껄껄 웃을 것이다. “나 역시 그 노래를 부를 때 그닥 순진하진 않았다. 무엇에 대한 가사인지 잘 알고 있었고, 재미있었다. 물론 당시에도 예술적 도발에서 쾌락을 찾는 아빠에게 이용당한다는 상상은 해봤으나, 뭐, 그게 아빠가 제일 잘하는 일이었잖나.” 이후 그녀는 <귀여운 반항아>(1986)를 통해 15살의 나이로 세자르 신인배우상을 수상하며 전 프랑스가 좋아하는 소녀 중 하나가 됐다. 80년대 당대의 소피 마르소가 사랑스러운 프랑스의 첫째딸이었다면 샬롯 갱스부르는 어딘가 약간 위험한 프랑스의 둘째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샬롯 갱스부르의 여배우 경력은 이상할 정도로 거기서 멈춘 듯하다. 1996년 그녀는 프랑코 제피렐리의 <제인 에어>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연기하며 아역의 기운을 완전히 벗어던졌고, 2001년작 <아내는 여배우>의 감독 이반 아탈과 결혼했다(지금 그들은 12살과 7살 난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지난 2003년 그녀는 첫 할리우드영화 <21그램>에서 숀 펜과 연기했고, 2005년과 2007년에는 미셸 공드리의 <수면의 과학>과 토드 헤인즈의 <아임 낫 데어>에 연이어 출연했다. 그녀는 프랑스와 할리우드를 오가는 드문 여배우 중 하나로, 많은 당대의 감독들과 손을 잡고 끊임없이 작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샬롯 갱스부르는 여전히 여배우라기보다는 세르주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의 재주 좋은 딸 혹은 ‘프렌치 시크’라 불리는 대표적인 패셔니스타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안티크라이스트>를 찍기 전의 인터뷰에서 샬롯 갱스부르는 “내가 여배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정말로 힘들다. 한번도 연기학교를 다닌 적이 없고, 어린 시절엔 방학 때만 영화 일을 했다. 그래서 영화계의 일원이 아니라는 느낌을 종종 갖는다. 메소드도 없다. 매번 나는 첫 영화를 다시 찍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을 진지한 여배우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배우란, 위태로운 법이다.

<안티크라이스트>로 ‘자멸’하면서 배우로 거듭나

지난 몇년은 샬롯 갱스부르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불릴 만하다. 시작은 2007년의 뇌수술이었다. 수상스키를 타다가 사고를 당한 갱스부르는 6개월 뒤 <아임 낫 데어>의 촬영장에서 극렬한 두통을 경험했다. 파리에서 MRI로 뇌스캔을 한 그녀는 의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뇌가 한쪽으로 몰려 있습니다. 빈 공간에는 피가 가득해요. 지금쯤 죽어 있거나 반신불수여야 정상일 정도입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드릴로 두개골을 뚫는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수술에서 회복하자마자 샬롯 갱스부르는 <안티크라이스트>에 출연하기로 했다. 극단적인 역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윌렘 데포의 성기를 짓이기고, 그의 다리에 거대한 구멍을 뚫고, 자신의 클리토리스를 스크린 앞에서 잘라내야만 했다. 갱스부르는 그것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좋은 해독제였다”고 말한다. 물론 그것은 연기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좋은 해독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정말이지 극단적인 곳으로 깊숙하게 들어가기 때문에 오히려 배우로서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다.”

 

극단적으로 자신을 파멸시켜야 했던 <안티크라이스트> 이후, 그녀는 예민하고 수줍은 성격에 세르주 갱스부르라는 아이콘을 등에 업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듯하다. “나는 여전히 모든 것에 불만족스러운 상태다. 언제나 자신을 의심하고, 그런 의심이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하지만 이젠 그런 성향이 내가 일하는 방식의 하나라는 걸 깨닫고 있다. 스스로를 끝없이 부정하는 것. 그것이 나의 메소드다. 나는 균형없이 비틀거리는 상태를 내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불안정한 이 상태가 좋다. 하나를 잘하고 나면 다음 하나를 망치고, 그러고 나서 다른 하나를 훌륭하게 해내는 것. 이게 바로 내가 좋아하는 롤러코스터의 삶이다.” <안티크라이스트>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샬롯 갱스부르는 아버지 세르주와, 자신을 진짜 여배우로 인정해준 선배 이자벨 위페르에게 감사를 보냈다.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여배우 샬롯 갱스부르는 진짜로 시작한다.



샬롯 갱스부르의 여섯 순간


 

 

 

 

끔찍한 농담인가 극한의 예술인가

글:정한석 2011.04.19

논란의 영화,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크라이스트>



논란의 영화가 온다.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크라이스트>다. 제목이 풍기는 도전적인 뉘앙스만큼이나 영화는 첫 공개 직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는 찬반양론에 휩싸여왔다. 강력한 표현 수위에서부터 영화가 포괄하는 생각들까지 논란의 여지는 강력하다. 그 찬반의 의견들을 짚으며, 동시에 그 의견들이 놓치고 있는 <안티크라이스트>의 핵심을 새롭게 탐색하며 이 논란의 작품을 소개한다.


영화를 공개하여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 라스 폰 트리에 영화 작업의 진정한 최후 공정으로 자리잡은 지는 오래됐다. 극장에서의 야유와 박수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말과 글의 공방전 그 때문에 종종 일어나는 소동들. 예컨대 2009년 칸에서 열린 <안티크라이스트> 기자회견장의 풍경. 어쩌면 그 자리의 모두가 공모자였을지도 모르지만(자, 누가 시비를 거는지 보자!), 하여간 영국의 한 타블로이드지 기자가 손을 들었고 “어떻게 당신의 영화를 정당화할 것인가?” 하고 물었다. 일단 심사가 한번 꼬이면 비아냥과 허세의 제스처가 본능처럼 튀어나오는 것으로 유명한 폰 트리에다. <유로파>가 황금종려상 수상에 실패한 것에 불만을 품고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로만 폴란스키를 가리켜 “난쟁이” 운운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그가 아닌가. 그는 참지 않았다. “내가 왜 정당화해야 하는가.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 당신이나 관객을 위해 만들지 않았다. 내가 누구에게라도 설명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운을 뗐고 한번 심기가 불편해지자 마침내 그의 입에서는“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감독이다. 나머지는 다 과대평가 받았다”는 말까지 쏟아졌다. 이날의 입씨름이 꽤 시끄러웠는지, <안티크라이스트>에 관한 많은 기사와 평문들이 잊지 않고 이 시시비비를 적어두고 있다.

이후에도 찬반양론은 멈추지 않았다. 일례로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지수로 표현하는 영화 사이트 ‘로튼 토마토’를 보면 150명의 평자 중 긍정의 평이 72, 부정의 평이 78로 박빙이다. 지지의 글 중 대표적인 건 이런 것이다. “언제나 선동가였던 폰 트리에는 어떤 진지한 영화감독, 심지어는 브뉘엘과 헤어초크 이상으로 관객을 대면하고 뒤흔든다. 그는 섹스, 고통, 지루함, 신학 그리고 스타일 넘치는 실험들로 이것을 한다. 왜 아니겠나. 우리는 적어도 영화사 중역이 끔찍한 물타기를 한 이후가 아닌, 정확히 감독이 의도한 그것대로 영화를 보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로저 에버트) 수적으로 다소 우세한 비판론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라스 폰 트리에는 <안티크라이스트>로 크고 비만한 병신 예술작품을 행한다. 마치 비평적 남용과 의도적으로 연애라도 즐기듯, 이 덴마크의 악동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자의식적으로 도발적인 이미지로 이 신학적-심리학적 호러 작품을 빽빽이 포장한다.”(<버라이어티> 토드 매카시) “내장된 고통을 만들기를 원하는 <안티크라이스트>는 결국엔 진실한 경험을 투사하는 데 있어서는 덜 성공적이다. 이 급격한 전술은 결국 마비된다.”(<빌리지 보이스> 짐 호버먼)

능수능란한 이미지 직조술 vs 뻔뻔하고 폭력적인 고문 포르노

지지자들은 강력하면서도 몽환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감독의 능수능란한 이미지 직조술 혹은 배우들에게서 육체적 극한의 연기를 끌어내어 그것을 통각으로 느끼게 하는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윌렘 데포와 샬롯 갱스부르는 높은 수위의 연기를 해냈고 샬롯 갱스부르는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한편, 그 찬사의 기준들이 고스란히 역겨운 가짜로 보이거나 그것에 감독의 진심이 담겨 있다 해도 미숙하다고 판단하는 이들이 이 영화를 반대한다. 극렬 반대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영화는 일종의 뻔뻔하고 폭력적인 고문 포르노에 불과하며 자기 과시로 도배된 허깨비 같은 영화다.

 

폰 트리에라면 그 찬반의 태도 자체가 필시 못마땅할 것이다. 그의 작품이 논란을 몰고 온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안티크라이스트>는 그 자신의 더 개인적인 결과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폰 트리에는 <안티크라이스트>가 자신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일종의 요법으로서 출발했다고 밝힌다. 우울증이 극에 달해 있을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삶과 꿈에 불현듯 등장하곤 했던 불안과 두려움의 이미지와 유년 시절부터 즐겨 읽었던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작품의 어떤 불온한 인물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남들이라면 안식과 평안함으로 탈출하려 했을 그 공황기를 광기의 프로젝트로 탈출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내 영화 중 영화적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영화는 아니지만 이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임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의 이야기 자체가 한 인물의 파탄적인 공황상태를 치료하는 과정이다. 부부가 격정적인 섹스를 나누는 동안 그들의 갓난아기가 문이 열린 요람 바깥으로 나온다. 그러더니 창문으로 기어 올라가고 부부의 섹스가 정점에 달하는 그때 아기는 눈이 오는 창밖으로 떨어져 죽고 만다. 장면이 바뀌면 부부는 비탄에 빠져 있다. 아니, 아내(샬롯 갱스부르)가 비탄에 빠져 있고 남편(윌렘 데포)은 그녀를 치유하기 위해 애쓴다. 심리치료사인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그들이 ‘에덴’이라 부르는 아무도 없는 숲속의 작은 오두막을 찾아 안정과 정상을 회복하려 한다. 하지만 이 집 주변에서 오히려 기괴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남편의 치료가 실패할 조짐을 보이더니 마침내 아내는 광기로 물들고 남편을 해치려 든다. 폰 트리에는 프롤로그-비탄-고통(혼돈이 지배하리라)-절망(대학살)-세 거지들-에필로그로 장을 나눠 영화를 전개한다.

 

장점과 단점은 아무래도 뚜렷해 보인다. 폰 트리에의 영화는 우화 내지는 동화의 방식을 즐겨 취하며 그것으로 서사를 압축 또는 은유하는데 <안티크라이스트>도 그런 장점을 지녔다. 동시에 몇몇 놀랄 만큼 어둡고 불온한 이미지들은 때론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그림에 접근한다. 그러나 전시적 강도를 더 고려한 것처럼 보이는 위악적인 장면들이 영화를 때때로 위태롭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내의 광기가 극에 달했을 때 그녀가 남편의 성기를 학대하거나 자신의 음핵을 가위로 자르는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혹은 폰 트리에는 어떤 불가사의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매장되어 있는 과거를 불현듯 길어올리곤 하는데, 이때 그 의도의 비약이 심각하여 도리어 유치해지는 때가 있다. 이 영화의 에필로그가 대표적이다.

마지막 헌사, 고백문인 동시에 불안감 가득한 유아적 표식

장단점을 교차하면서 영화는 에덴에서 벌어지는 아담과 이브의 싸움으로, 근대적 합리성의 믿음과 태곳적 선악의 격돌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때 <안티크라이스트>에는 더 말해야 할 중요한 지점이 한 가지 남는다. 폰 트리에는 그 점에 관하여 영화가 다 끝난 다음에야 알려준다. 영화가 끝나자 다소 엉뚱해 보이는 자막이 뜬다. “이 영화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게 바칩니다.” 이미 데뷔작 시절부터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경외심을 숨기지 않은 폰 트리에지만, 이처럼 노골적인 경의를 드러낸 적은 예전에 없었다. 성기를 자르고 악마적 본성이 판치는 이 영화와 도저히 어울려 보이지 않는 이 헌사.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이 헌사에 관하여 지적은 많지만 납득할 만한 설명이 많은 것 같지 않다. “폰 트리에가 타르코프스키와 공유하는 것은 바로잡을 수 없을 만큼 위선적인 하찮음과 잔인함, 세속적 권력구조에 대한 강박적 반감”(<필름 코멘트>에 기고한 각본가 래리 그로스의 글)이라고 멋지게 표현한 글이 있지만 이 글은 매력적인 내용과 무관하게 <안티크라이스트>에 관해서는 다소 추상적인 설명이 된다. 적어도 <안티크라이스트>에서라면 두 감독의 사이는 좀더 구체적이다. “내가 조그마한 텔레비전으로 영화 <거울>을 보았을 때 나는 황홀경에 빠졌다. 만약 종교에 관하여 말한다면 이것이 종교적 관계다. 나는 그의 영화들을 수차례 보고 또 보았다. 나는 그가 나의 첫 번째 영화 <범죄의 요소>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가 매우 싫어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건 정직한 리액션으로 느껴진다. 그는 나보다 앞선 세대다. (하지만) 나는 그와 가깝다고 느낀다. 만약 어떤 감독에게 영화를 바친다고 하면 누구라도 당신이 그로부터 훔쳤다고 말하진 않을 것이고 이건 정말 도망치기 쉬운 방법이지 않겠나.” 폰 트리에의 말이다. 그러니 영화사상 대표적인 안티크라이스트(폰 트리에)가 영화사상 대표적인 크라이스트(타르코프스키)에게 영화를 바치는 이 아이러니는 순수한 경외심을 넘어서서 어떤 도전장이며, 그 말은 사실 “이 영화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게서 훔쳐왔습니다’라는 고백문인 동시에 행여 훔쳐 썼는데도 누군가가 몰라주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일부러 새겨넣은 불안감 가득한 유아적 표식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이미지를 흠모하되 그의 신앙을 반격하고 그의 미의 철학은 경외하지만 종교 철학은 부정하는 폰 트리에는, <안티크라이스트>를 철저하게 타르코프스키적 이미지로 주조하면서도 그 결과는 안티 타르코프스키적 영화에 도달한다. 비. 바람. 안개. 불. 공히 타르코프스키의 그것으로 알려진 이미지들이 <안티크라이스트>에서도 중요하고 지배적이며 꿈결 같은 순간들을 형성한다. 다만 그건 향수의 꿈이 아니라 모든 게 끔찍한 악몽의 꿈이다. 만약 인물과 관계된 것이라면, <안티크라이스트>는 언제나 아이가 최후 희망의 징표로 남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반대로 그 아이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여성, 순결하고 위대한 여성, 특히 어머니로 대변되는 일종의 마리아는 여기에 없으며 악한 본성을 발산하는 광기의 여인만이 있다(그리고 우연이겠지만 윌렘 데포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그리스도 역을 맡았다). 타르코프스키가 그의 유작 <희생>에서 구원과 호소의 노래 바흐의 <마테 수난곡>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흐르게 한다면 라스 폰 트리에는 <안티크라이스트>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거절과 외면의 노래 <나를 울게 내버려두소서>를 흐르게 한다. 마침낸 타르코프스키가 죽은 나무를 살려내는 영화(<희생>)를 세상에 남기고 떠나갔다면, 지금 폰 트리에는 <안티크라이스트>에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우뚝 세워두고 불안을 탐색한다.

관객을 조급하게 만드는 폰 트리에의 재능 혹은 사기술

존경하는 선배 감독 영화의 모든 미적 이미지들을 차용하되 그것으로 그의 사상을 전적으로 되받아치기. <안티크라이스트>는 그런 점에서야말로 흥미진진한 안티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해 타르코프스키와 크라이스트에 관한 강력한 패러디다. 타르코프스키는 그가 숨을 거두던 해인 1986년의 한 인터뷰에서 “나는 이 영화에서 기독교의 자기희생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에서 살아가려 발버둥치는 사람의 한 측면을 다루려고 했다”고 말했다. 현존하는 감독 중 거기에 가장 동의하지 못할 사람이 폰 트리에일 것이며 적어도 <안티크라이스트>가 그 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작품을 타르코프스키에게 바쳤다. 그런데 망자인 타르코프스키가 <안티크라이스트>를 좋아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폰 트리에가 12살 시절부터 테이블 위에 두고 보았다는 니체의 말년의 글 ‘안티크라이스트’. 폰 트리에가 신봉하는 무와 부정에의 의지 혹은 오해가 어디에 물길을 대고 있는지, 막연하게나마 그 안에 대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안티크라이스트>는 폰 트리에의 사상적 논쟁의 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안티크라이스트>에서 타르코프스키의 그림자가 중요하다 해도 그걸 일종의 주요 단서로 미뤄둔 다음 이 영화의 평가를 다시 시도할 필요도 있다. 그 마지막 헌사로서 영화는 흥미롭게 해석될 여지를 갖게 되었지만 그 알리바이와 무관하게 판단은 또한 다른 식으로 작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미적 논쟁이 다시 핵심이 될 것이다. 누군가는 <안티크라이스트>를 그냥 능란한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성스러운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한 건 이 영화에 관해 우린 어느 편에라도 서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되는데 바로 그렇게 조급하게 만들 줄 안다는 것이 더도 덜도 아닌 폰 트리에 영화 <안티크라이스트>의 뛰어난 재능 혹은 뛰어난 사기술이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대관절 왜, 어떤 사명감으로?

글:김혜리 2011.04.22


<안티크라이스트>의 ‘그녀’(She)는 풀밭의 초록으로 스며든다. 트럭 짐칸에 실려 나무 궤짝의 갈색 속으로 잠겨 들어가던 <도그빌>의 그레이스처럼 사라지고 싶어 한다.

※<황당한 외계인: 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4월1일

만우절에 썩 어울리는 영화를 휘파람 불며 보러 갔다. <황당한 외계인: 폴>(이하 <폴>)의 폴은 지구 전입 어언 60년차로 유민 생활도 관록이 붙어 반바지에 배낭 메고 히치하이킹을 하는 외계인이다. 그가 보유한 초능력은 ET의 그것과 어슷비슷하다(영화는 폴이 1981년 무렵 스필버그 감독의 시나리오 자문으로 일했다고 주장한다). 영국인 그레이엄(닉 프로스트)과 클라이브(사이먼 페그)는 코믹콘(샌디에이고에서 열리는 SF박람회 겸 오타쿠 부흥회)에 온 김에 미국 중서부의 외계인 유적지 순례에 나섰다가 폴과 근접조우한다. 흥미로운 점은, 무려 직업이 SF작가인 두 사람이 외계인을 만났는데도 그닥 환호작약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일단 당혹스러워하며 심지어 좀 떨떠름해 보이기까지 한다. SF 오컬트 장르의 팬덤에 서른줄이 넘도록 군내나게 머문 이 남자들은 어쩌면 “우리는 우리끼리 꾸민 세계에서 잘 놀아왔는데…”라는 투로, 느닷없는 실제 외계인의 출현을 성가신 훼방으로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긴, 우주에서 온 친구를 만나 진짜 인생의 지축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 <E.T.>의 엘리엇이 현실의 소년이라면 자라서도 외계인 분장을 하고 코믹콘 행사에 참석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장르 마니아들을 향해 “난 너희들의, 너희들을 위한 영화야!”라고 시종 외치고 있지만, <폴>은 21세기 SF판타지 팬들을 휘어잡을 만큼 패러디가 기발하지도 코미디가 참신하지도 않다. 어쨌거나 이제 우리는 프라모델 조립하느라 지구 정복을 등한시하는 개구리 중사 케로로까지 알고 있다. 덧붙이는 불평. 막판 카메오 출연하는 시고니 위버는 <에이리언>의 기념비적 아우라를 너무 잦은 패러디로 염가처분하고 있는 인상이다.

4월2일

봄옷 사러 나갔다 양말만 사들고 돌아왔다. <폴>에서 독실한 기독교도 루스(커스틴 위그)는 예수가 진화론자 다윈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그림이 가슴팍에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등장한다. <세상의 모든 계절>의 알코올 중독자 켄이 입은 ‘생각은 덜, 술은 더’(Less Thinking More Drinking)의 구호가 프린트된 티셔츠, 그리고 (아마도) <클로버필드>의 파티장면에 언뜻 스쳐가는 ‘엿 먹어라 요가’(Fuck Yoga) 상의와 더불어 내가 본 영화 속 3대 티셔츠 도안으로 꼽을 만하다.

 

하나둘 날아드는 여름영화 예고편에 관한 메모. 1) <개구쟁이 스머프>: 대관절 왜, 어떤 사명감으로, 우리는 아늑한 2D 마을에서 오순도순 살고 있는 이 작은 이웃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못하고 번잡한 3차원 맨해튼으로 끌어내 수시로 피부색을 언급당하는 ‘괴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걸까? 영화를 보기까지는 그 뜻을 헤아릴 엄두도 안 난다. 2)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 가만, 이 영화가 언제부터 이렇게 잭 스패로우(조니 뎁) 선장의 1인극이 됐지? 출범 당시에는 분명 앙상블 드라마였던 것 같은데. 복습, 복습이 필요해! 3) <분노의 질주: 언리미티드>: 비키니 여인의 숏과 자동차 충돌 숏의 교차편집만으로 이루어진 순수의 결정체.

4월3일

케이블 채널에서 <엑스맨: 울버린>을 보다. 영웅은 악당을 위해 존재하고, 악당은 영웅의 핑계로만 존재한다면 그건 허약한 영화의 징후로 여겨도 좋다. 부모는 자식 때문에 죽지 못해 산다고 말하고, 자식은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현상만큼 현실 세계에 해를 끼치지는 않지만 지루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가지 더. 시리즈물 가운데 흥미로운 인물 하나를 집어내 뒷이야기를 펼치는 스핀오프 기획은 안전해 보이지만 커다란 위험을 안고 있다. 허술하게 만들어져 인물에 깊이를 부여하긴커녕 “고작 그거였어? 차라리 말하질 말지”라는 반응을 부를 경우, 모호한 대로 매력적이었던 캐릭터의 미스터리를 말살해 본편 프랜차이즈의 보유 자산까지 갉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4월4일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윌 스미스 부자와 신작을 찍는다는 뉴스를 읽고 흥뚱항뚱 웹을 돌아다니다 <타임>의 평론가 리처드 콜리스가 샤말란의 <라스트 에어벤더>에 출연할 기회를 놓친 배우들을 가리켜 (의역하자면) 부두에 지각 도착해 타이타닉호에 승선하지 못한 운 좋은 승객에 비유한 독한 문장을 읽다. 그런가 하면 한 네티즌은 문제의 차기작 소식에 “나라면 샤말란에게 화장실 디렉션도 안내받지 않을 텐데”라는 참견을 날렸다. 영화감독이 타 장르 예술가에 비해 오래 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아침 뉴스쇼의 PD가 주인공인 <굿모닝 에브리원>은 로맨틱코미디다. 단, 주인공의 연애 상대가 남자가 아니라 직업일 따름이다. 한데 이 로맨스는 알맹이가 비어 있어 특이하다. 베키(레이첼 맥애덤스)는 성공하기를 열망하고 그만한 자격이 있을 만큼 성실하지만, 무엇을- 어떤 방송을- 추구하며, 어떤 방식의 성공을 바라는지의 문제는 괄호로 남아 있다. 그녀는 그냥 성공을 원한다. 이 점이 비슷한 소재를 다룬 80년대 영화 <브로드캐스트 뉴스>와의 결정적 차이다. 물론 <브로드캐스트 뉴스>는 경성 뉴스와 연성 뉴스가 경쟁을 벌이던 시대의 산물이었고 <굿모닝 에브리원>은 후자가 이미 승리한 시대의 이야기이므로 자연스러운 결과다. 순응을 그린다고 나쁜 영화라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다만 거기엔 미량의 아이러니가 들어 있어야 재미있다.

 

<의혹>과 <도망자>의 해리슨 포드 연기를 좋아한다. 게다가 그는 인디아나 존스이며 한 솔로이고 <블레이드 러너>의 데커드다. 즉, 한 사람이 영화사에 남길 수 있는 몫의 공헌을 진즉 마쳤다는 뜻이다. 그러나 최근 10년간 나는 포드가 정말 훌륭한 배우일까 불경한 의심을 남몰래 품곤 한다. <굿모닝 에브리원>에서 베테랑 앵커맨으로 분한 그는 하나의 표정으로 일관하는데 그 단조로움이 스티븐 시걸 못지않다.

4월5일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안티크라이스트>를 보고 한바탕 푸닥거리를 치른 기분이다. 권력을 가진 교정자와 종속된 환자, 가해자와 희생자의 자리를 서서히 바꿔치기하며 점증법으로 고통의 카니발을 벌이는 주인공 부부(샬롯 갱스부르와 윌렘 데포)는, 자해하는 감독의 두 분신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도 둘로 나누어야만 할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도, 영화가 최초 공개된 2009년 칸영화제에서 살인범 심문하듯 달려들었다는 기자들도, 모두 다 착한 관객이다. 정확히 감독이 의도한 대로 반응하고 있으니까. 그는 소음을 내지 않는 영화, 누구도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 영화를 경멸하는 작가다. 언젠가 그는 다른 점잖은 감독들에게 일갈했다. “자기 작품이랑 결혼이라도 할 셈인가?” <안티크라이스트>의 시사회에 다녀왔다고 하니, 한 트위터 팔로워는 이 영화를 보고 애인과 언쟁하다 위경련으로 바닥을 굴렀던 기억을 전해왔고, 부산의 한 팔로워는 <킹덤> 심야상영 뒤 귀갓길에서 야쿠르트 아줌마를 보고 놀란 나머지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 추억을 들려주었다. 영화 팬이라면 누구나 라스 폰 트리에 영화에 얽힌 미담 하나는 있는 거잖아요? 그렇잖아요? (다음에 계속)

 

 

[전영객잔] 크라이스트 세계의 그 텅 빈 공허!

글:안시환 2011.05.05

여성 수난의 거울에 비친 크라이스트의 세계 <안티크라이스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100여분의 러닝타임 동안 펼쳐진 악몽의 세계보다 영화 엔딩의 자막, 즉 <안티크라이스트>를 타르코프스키에게 헌정한다는 내용의 자막이 더 당황스럽고 끔찍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타르코프스키가 <희생>에서 자신의 영화를 아들에게 바친다고 썼던 그 자리에, ‘라스 폰 트리에’라는 (상징적) 아들은 자신의 (상징적) 아버지에게 <안티크라이스트>라는 거울상의 영화로 응답하고자 한다. 그것이 그의 진심이든 농담이든 간에(나는 진심으로 보는 입장이다), 그렇게 라스 폰 트리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타르코프스키에게 그가 구축하려 애썼던 세계의 뒤집혀진 이미지를 내민다. <안티크라이스트>와 타르코프스키 영화간의 전도된 연관성, 달리 말해 향수의 꿈을 위해 사용된 자연의 상관물이 악몽의 꿈으로 사용되고, 최후 희망의 징표로 남겨졌던 아이가 죽음을 맞으며 영화의 문을 여는 등에 대해서는 이미 정한석이 지적(<씨네21> 799호, “끔찍한 농담인가 극한의 예술인가”)한 이상, 이를 굳이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주목하려 하는 것은 <안티크라이스트>가 타르코프스키적인 상징뿐만 아니라 상징의 함축적 의미를 그와 상반된 것을 지시하기 위해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 글이 각각의 상징적 의미를 도상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 의미로 고착화된 상징물에서 상반되거나 이탈된 의미를 마주하는 경험은 <안티크라이스트>의 ‘안티’적 태도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관문이다. 왜냐하면 남성-크라이스트-이성의 상징적 체계에 대한 불신이야말로 <안티크라이스트>를 추동시키는 궁극적인 힘이며, 더구나 여성학살의 역사가 드러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오만함에 히스테리로 반응하다

<안티크라이스트>는, 그리고 라스 폰 트리에는 일반적인 상징적 체계를 믿지 않는다. 아니, 믿을 수 없다. 부인은 남편에게 말한다. 당신이 자신의 논문을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정말 천박한 논문이 되었다고. 마치 성경의 창세기에서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라는 표현을 상기시키는 이 대화는 <안티크라이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아이의 죽음 이후 부인은 혼돈에 사로잡히는 반면, 남성은 그 외부(그로부터 면죄된 자의 위치)에서 부인의 심리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명명’하려 한다. 에덴이라는 숲을 관객에게 처음으로 소개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논문에 대한 대화 직후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누는데, 이때 라스 폰 트리에는 갑작스럽게 에덴 숲의 모습을 길게 삽입한다. 우리는 숲 이후, 그것을 바라보는 부인의 눈, 목, 귀, 헐떡이는 가슴, 떨리는 손, 뒤통수 등을 순차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숏의 배열은 잠시 뒤 다시 한번 반복되는데, 이때 남편은 이를 ‘불안’의 신체적 증상으로 ‘명명’한다. 남편은 부인의 심리적 혼돈을 체계화하기 위해 피라미드의 빈칸을 하나둘씩 채워나간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피라미드의 맨 위칸이 채워지는 순간이다. 남편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부인을 대신해 ‘나’(me)라고 쓰며 ‘그녀 자신’(herself)이라 말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하는 의문은 왜 여성은 남성의 언어에 의해 ‘나‘라고 서술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여성은 스스로를 ‘나’로서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언어에 의해 그렇게 규정된다는 것이다. 남성 지식의 산물로서의 여성.

 

부인 논문의 주제였던 중세시대의 여성학살(gynocide)은 남성의 언어에 의해 여성이 어떻게 규정되고 단죄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며, 이는 남성-크라이스트-이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실제로 남편이 부인을 직접 치료하기로, 아니 구원하기로, 아니 조사하기로 결정했을 때, 남성은 부인의 고백을 자신의 지식으로 전유하고, 이를 통해 여성의 세계에 대한 표상 체계를 수립하려 한다. 그것은 크라이스트의 세계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미명하에 여성을 자신의 통제하에 둘 수 있었던 동력이다. 우리는 남편에 대한 부인의 린치가 바로 이 순간부터, 그러니까 남편이 부인을 대신해 ‘나’라고 쓴 직후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남성이 부인의 혼돈을 하나의 체계로 정립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순간, 부인은 자신의 광기를 폭발시킨다. 즉, <안티크라이스트>는 실제를 특정한 무언가로 규정하려는 상징적 행위 또는 그 오만함에 대해 히스테리로 반응하는, 달리 말해 대타자(상징적 체계)에 대해 의심으로 가득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명명의 행위는 <안티크라이스트>가 여성혐오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오해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라스 폰 트리에가 동일시하는 인물은 남편이 아닌 부인이다. 그는 부인의 위치, 달리 말해 대상을 명명하는 자가 아니라, 그렇게 명명된 대상 세계 앞에서 질식할 듯한 고통에 직면해 있는 자의 위치에서 상징적 명명 행위의 주체를 바라본다. 즉, 죽은 새끼를 출산하는 노루나 똬리에서 떨어져 죽은 새들의 모습 등을 통해 에덴(숲)이라는 생명의 근원적 공간을 죽음에 대한 충동으로 충만한 공간으로 변주하고, 예수의 탄생을 맞이하기 위해 길을 나섰던 동방박사를 ‘세 거지들’이라는 죽음의 사도로 전환시키며, 남성 성기가 생명이 아닌 죽음의 피를 사정하게 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 일반적인 상징적 체계에서 벗어나려는 라스 폰 트리에의 태도는, 끊임없이 자신을 규정하려 하는(하지만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을) 남편에 대해 미칠 듯이 날뛰는 부인의 모습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안티크라이스트>는 원죄를 부여받으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인간의 행위와 본성을 (원)죄로 규정해왔던 남성-크라이스트-이성에게 그 (원)죄를 되돌려주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에 가깝다. 이는 <안티크라이스트>가 자신을 짓누르는 상징적 체계에 가하는 라스 폰 트리에의 복수담이라는 의미이며, 또한 이 영화의 제목을 ‘ANTICHRIS♀’로 표기한 이유, 그러니까 T의 자리에 여성을 상징하는 ‘비너스의 거울’을 위치시킨 이유일 것이다. 즉 <안티크라이스트>는 남성(지식)에 의해 규정되어 왔던 여성이라는 거울을 통해 그 (원)죄를 그의 몫으로 되돌려주려 한다. 이러한 면에서 주목할 장면은 앞서 언급한 숏의 배열이 다시 반복될 때이다. 이는 영화 후반부에 남편이 부인의 목을 조를 때 다시 등장(배열의 순서는 다소 불일치한데, 그럼으로써 더욱 혼란스러운 느낌을 준다)하는데, 이때 불안의 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남편의 몸이다. 남편은 (부인에 대해) 자신이 명명했던 그 증상에 사로잡힌다. 달리 말해, 불안의 대상(숲)에 녹아들라고 했던 부인을 향한 남편의 충고는,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누가 (원)죄를 짊어져야 하는가

이러한 면에서, <안티크라이스트>는 라스 폰 트리에의 소망 충족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자신의 고통과 불안의 원인을 대타자(남성-크라이스트-이성의 세계)의 몫으로 넘긴 채, 그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려는, 또는 그로부터 자신의 고통과 불안의 이유를 인정받으려 하는 자기 전시의 판타지. 달리 말해, 나는 고통받고 있는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대상은 여전히 무지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에 대한 분노, 그래서 <안티크라이스트>는 그 고통의 순간을 더 강렬한 시청각적 이미지로 전시하려 한다. 오해는 말라. 나는 지금 라스 폰 트리에가 겪었던 우울증의 고통이 과장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국내 개봉 버전에서는 부분적으로 거세된 장면에서) 부인은 자신의 클리토리스를 자극하며 자위행위를 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거세하기도 한다. 이 자위와 자학의 몸짓은 크라이스트의 세계에 대한 모욕이자 힐난이다. 이 호소는 지젝이 (프로이트의 꿈 분석을 응용하여) 이야기하는, “아버지 내 몸이 불타는 게 보이지 않으세요”라며 꿈꾸는 아버지를 힐난했던 아들을 상기시키며, 라스 폰 트리에의 호소는 바로 이 아들의 위치와 가깝다.

 

물론 이 아들의 위치는 상징 너머의 세계인 실재계이며, 이는 상징적 질서(남성-크라이스트-이성의 세계) 자체의 기초, 또는 그 이면을 가리킨다. 이러한 실재계는 대립항들이 일치하는 세계이다. 성행위의 절정 순간에 아이가 죽음을 맞는 영화 도입부의 장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조르주 바타이유를 떠올렸다. 그에게 에로티즘은 자기로의 웅크림인 비연속적 폐쇄 상태를 파멸시키는 ‘작은 죽음’이자 삶의 약동이 꿈틀거리는, 달리 말해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다. 종교 역시 쾌락과 폭력, 환희에 기반한다는 점(잔인하기 짝이 없던 종교 의례를 생각해보라)에서, 애초에 에로티즘과 종교는 한몸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크라이스트의 세계는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에로티즘을 ‘악마’로 규정하며, 이 둘을 분리(상징적 거세)한다. 얼핏 <안티크라이스트>는 본성과 이성이 이원론적으로 대립하는 세계를 다루는 것처럼, 달리 말해 이성을 압도하는 본성의 세계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이원론적 대립의 해체를 이야기하는 작품에 가깝다. 이 도입 장면에서, 노골적인 섹스신(성기 노출을 포함한)으로 최대치의 미적 순간을 빚어내고, 그 위로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아리아인 <울게 하소서>를 흐르게 할 때(<리날도>는 십자군 시대를 배경으로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예찬하는 작품이다), 우리는 미(또는 성(聖))와 추의 경계가, 생명(또는 성(性))과 죽음의 경계가, 심지어는 성(聖)과 성(性)의 경계마저 흐릿해지는 순간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안티크라이스트>는 크라이스트의 상징적 세계가 ‘거세’하기 이전의 에덴을 형상화하려 한다. 이는 에덴이 남성-크라이스트-이성 외부의 자연이 아닌 그 내부의 본성이라는 것, 또는 상징적 명명 행위가 자신의 한계에 봉착하는 무능의 지점을 형상화함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남편이 부인의 심리적 혼돈을 체계화, 도식화했던 피라미드 꼭대기에 ‘나’라고 쓸 때, 그것이 부인이 아닌, 말 그대로 자기 자신(남성-크라이스트의 세계)임을 깨닫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결국, 남성-크라이스트-이성은 외부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자신의 적대자(본성-악마)를 자기 자신으로 경험하는 딜레마에 직면하고 만다. 흥미로운 것은 <안티크라이스트>에서 크라이스트 세계의 폭력적 본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영화 후반부, 아내는 광기에 사로잡힌다. 이러한 광기의 몸짓은 크라이스트의 세계가 여성(본성)을 악마로 규정하며 여성 학살의 구실로 삼았던 (남성의) 지식 체계를 수용한 결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크라이스트의 세계가 자신을 정립하기 위해 에덴이라는 원초적 세계에서 스스로를 분리(또는 상징적 거세)했던 행위를 되비추는 거울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원)죄는 여성이 아닌 그것을 강요한 크라이스트의 세계가 짊어져야 할 짐이다.

 

부인이 크라이스트의 세계가 에덴에 행한 거세를 자신의 육체 위에 새기며 스스로를 단죄할 때, 남편은 이에 눈감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녀가 아들의 죽음을 방기했다는 사실 역시 그녀와 관객만이 공유하는 비밀일 뿐 남편은 알지 못한다. 마치 짊어진 십자가를 내려놓듯, 몸에 박힌 돌덩이를 벗어던진 남편은 아내를, 이미 상징적으로 죽은 부인을 다시 한번 단죄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지식의 불완전성에 기반하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크라이스트의 세계는 전체를 알지 못한다. 그것이 세상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오만함을 뽐내면서도, 단 한명의 여성도 구원하지 못한 이유이자, 남성-크라이스트-이성의 궁극적 한계다. 궁극적으로 <안티크라이스트>가 단죄하는 것은 여성이 아닌, 자신의 무능(본성과 원죄까지도)에 눈감고 있는 크라이스트의 세계다. <안티크라이스트>를 걸작이라 부를 만큼 창의적인지는 다소 의심스럽지만, 환상 속에서 숲에 들어섰던 부인을 여우굴(이후 남편이 자신을 스스로 매장하는 장소이기도 하다)의 시점에서 담아내던 그 시선처럼, 라스 폰 트리에는 크라이스트의 세계의 그 텅 빈 공허를 꽤 유용한 방식으로 관통한 것처럼 보인다. 확실한 것은 <도그빌>을 좋아하면서도 그 연작을 궁금해하지 않았던 내가 그의 다음 작품을 처음으로 기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멜랑콜리아>라는.

 

 

 

[영화읽기] 비록 나 자신이 괴물이 되어간다 할지라도

글:이동진 2011.05.12

두려움의 심연을 응시하기를 멈추지 않는 라스 폰 트리에와 <안티크라이스트>를 지지함


1.
“악마를 연구하는 것은 삶, 성(性), 죽음의 혼합 상태를 연구하는 것이다.”(장-디디에 뱅상)

2.
극중 등장하는 숲 이름이 에덴인 데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듯, 물론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크라이스트>의 내용은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 동산 이야기를 비틀어서 만들어졌다. 폰 트리에는 이 영화를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에서 발생한 상징적 이야기로 읽히도록 두 주인공에게 이름도 부여하지 않았다.

 

성경의 에덴은 낙원이지만, 이 영화 속 에덴은 지옥이다(하지만 두 에덴 모두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악이 선존하고 있었다. 성경에선 뱀이, 영화에선 자연 자체가 악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유혹자는 여성이었지만 여기선 남성이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여자는 에덴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몇 개월 전에 그 지옥을 경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는 지속적으로 여자가 그곳에 가야 한다고 주장(유혹)한다. 심리치료사로서 그는 두려움의 근원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극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에덴에 가게 되는 남자는 그곳이 초행이다. 그렇기에 펼쳐질 일들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똑똑하게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던 이 이성적인 남자는 에덴에서 철저히 무력해진다.

 

성경의 에덴에서 두 사람은 타락할지언정 늘 함께했다. 하지만 여기서 남자와 여자는 곧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남자는 오로지 선의로만 여자를 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온통 초록색이야”라면서 편재하는 악으로서의 자연을 두려워하는 여자에게 “저항하지 말고 그냥 초록과 동화되는 거야”라는 말로 전문가답게 요구(유혹)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에덴에 대한 지식은 질서정연한 세계를 확신하는 남자가 아니라 혼돈 속에서 흔들리는 여자가 소유하고 있었다(성경의 선악과는 지식을 가져다주는 열매였다). 남자는 뱀처럼 오만했지만, 뱀과 달리 무지했다. 여기서 남자의 가장 큰 잘못은 바로 (오만으로 둘러싸인) 무지였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에덴의 자연은 온통 소멸의 공간이다. 성경의 에덴 중앙엔 생명의 나무가 있지만 여기선 서서히 썩어들어가는 죽은 나무가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다. 이곳에선 탄생 역시 죽음과 직결된다. 사슴은 사산하고, 도토리는 썩어가며, 어린 새는 개미와 매의 먹이가 된다. 이때 죽음은 추락의 수직 이미지로 시각화된다. 사슴의 죽은 새끼는 바닥에 툭 떨어지고, 도토리는 폭우처럼 낙하해 지붕을 때리며, 어린 새는 둥지에서 후두둑 미끄러져내린다. 속절없이 떨어져 사멸해가는 어리고 여린 것들.

 

남자와 여자의 어린 아들 역시 추락했다. (이 영화의 첫 숏에서) 샤워기로부터 방금 벗어나온 물방울이 천천히 추락하고, 하늘에서 금방 쏟아져 내린 눈송이가 천천히 추락하는 그곳에서, 아이 역시 열린 창문 너머로 천천히 추락한다. 그러니 아들을 잃은 여자가 에덴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추락하는 것에는 섹스도 있다. 에로스는 타나토스를 동경한다.

 

3.
남자와 섹스하는 도중에 여자는 과연 아들이 떨어져 죽는 것을 보았을까. 이 영화의 프롤로그에선 바닥으로 꺼져가는 아찔한 엑스터시로서의 추락에 현기증을 느낀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아 그 광경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묘사된다(성적인 절정 속에서 클로즈업된 여자의 얼굴은 그 직전 클로즈업된 아이가 그랬듯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는 것으로 시각화된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광기에 가득 차 자신의 음핵을 스스로 잘라내기 직전의 플래시백에선 그녀가 섹스 도중 눈을 뜬 채 그 모습을 보고도 제지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중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언뜻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후반부의 목격은 죄책감이 빚어낸 기억 속 왜곡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명확한 것은 여기서 쾌락이 죽음과 근친관계에 있다는 것이다(섹스의 결과인 출산을 거의 언제나 죽음과 연결시키고 있는 이 영화의 상징 제조법을 생각해보라). <안티크라이스트>의 프롤로그는 가장 극적인 순간에 두 종류의 추락을 교차편집으로 한데 묶어 동류로 치환한다(그때 추락하는 여자뿐만 아니라 추락하는 아이 역시 즐거워한다). 아이의 죽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아이가 탄생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난 것은 이전에 부부가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아들을 잃은 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섹스를 요구하는 것은 늘 여자다. “섹스는 일시적인 해소책일 뿐”이라고 했던 남자는 틀렸다. 여기서 섹스는 인간의 본능이면서 자연과 일체가 되려는 시도인 동시에 소멸에 다가가려는 일종의 자해이기 때문이다. 성적 쾌락을 과용함으로써 부정하는 여자의 태도는 기독교가 규정한 출산의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성경에서 출산은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도록 하는 축복이 아니라 에덴에서 신의 뜻을 거역했던 것에 대한 벌이었다.

 

이 영화에서 섹스를 촉발하는 것은 거의 언제나 두려움이나 고통이고(악몽을 꾸고 난 뒤나 자해를 하고 난 다음에 여자는 섹스를 요구한다), 섹스를 마무리하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자연의 풍광이다. 이때 고통이나 두려움(두려움이란 고통에 대한 예감이다)은 섹스를 격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종종 섹스의 일부가 된다. 그러다가 결국 섹스를 대체한다. 남자의 벌거벗은 몸을 장난스러운 전희처럼 간질이다 실수로 상처를 내던 여자는 나중엔 죽음의 손으로 가득한 나무 아래서 섹스 도중 때려달라고 요구한다. 남자가 있어야 하는 섹스에서 남자가 필요없는 자위로 옮아가던 여자는 결국 상대의 성기를 짓이기고 자신의 음핵을 잘라낸다. 오로지 쾌락만을 위한 기관인 음핵을 제거함으로써 여자는 죽음의 근원인 쾌락을 거세한다.

이 끔찍한 가학과 자학의 점층법을 정당화할 수 있는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실존의 증거로서의 고통이다.

 

4.
“당신이 겪는 비탄에는 특별한 게 없다”고 했던 남자는 여자의 고통을 폄하하고 인정하지 않았다(칼로 찔러도 상해를 입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던 중세시대 마녀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 존재로 치부됐다). 그리고 아내가 겪고 있는 고통의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는 남자는 치유한다는 명목하에 여자의 두려움을 도식화함으로써 그녀의 정체성을 자신의 잣대로 정립한다.

 

그러자 여자는 ‘마녀’가 된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자신의 고통을 소유하기 위해서, 여자는 마녀가 된다.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여성들 중에서도 가장 약한 여자들이었던 중세의 마녀와 달리, 그녀는 무지막지한 폭력을 구사하는 강한 마녀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들이 왜곡된 상상으로 규정하며 두려워하는 척했던 마녀의 실제 모습이었다. 남자들에 의해 ‘악’으로 규정되었지만 그것을 고통 속에서 부정하며 객체화되어 죽어갔던 오래전 약한 여자들과 달리, <안티크라이스트>의 그녀는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악’으로 비칭한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남자의 요구에 따라 마침내 “초록과 동화”된 마녀는 지독한 공격을 가해 끔찍한 통증을 안김으로써 고통에 무지한 남자에게 고통이란 일반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생생한 꿈을 꾸고 난 뒤 그게 꿈이었는지 알아보려고 흔히들 볼을 꼬집어보는 것은 고통이 가장 확실한 현실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도토리는 울지 않는다”고 호언했던 남자는 전혀 몰랐다. 아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오두막에서 뛰쳐나갔던 여자가 발견한 것은 우는 아들이 아니라 통째로 통곡하는 자연이었다. 자연은 저마다의 특별한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느낀다”고 헤겔은 말했다. 아들을 잃은 여자에겐 고통만이 유일한 정체성이며 실존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여자가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계기가 두 가지로 암시된다는 점이다. 하나는 남편이 아내의 두려움을 분석하면서 삼각형 맨 위칸에 ‘그녀 자신’(Me)이라고 적어넣음으로써 여성의 타자로 완성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난 여름 에덴에서 자신이 아들에게 의도적으로 신발을 거꾸로 신겼다는 사실을 여자가 뒤늦게 자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크라이스트’에 가장 가까운 상징이 있다면 그건 아마 어린 아들 닉일 것이다(그리스도는 스스로를 ‘인간의 아들’로 칭했고, 니콜라스를 줄인 이름인 닉의 그리스어 어원은 ‘인간의 승리’를 뜻한다. 닉이 창고에서 장작을 반으로 가른 나무토막을 가지고 노는 장면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목수였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여자가 나중에 남자의 성기를 짓이길 때 사용한 도구 역시 장작을 반으로 가른 나무토막이었다). 신발을 거꾸로 신기는 것은 일종의 학대이고 변형된 폭력이다. 어린 아들은 성숙하기 전의 남성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역시 남성이다.

 

결국 여자는 아이의 비극적 죽음으로 미쳐간 게 아니다. 그 겨울 집에서 아들이 추락사한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난 여름 숲에서 발생했던 일이다. 여자의 광기는 아들이 죽기 전인 그 여름 숲에서 자각의 형태로 확인한 그녀의 본성이었다. 말하자면 여자는 아들을 죽이고 싶었다(그런데 숲에선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신의 아들을 학대했던 것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근원적 죄책감에서 그녀는 그때까진 자유롭지 않았다). 그래서 섹스 도중 아이가 떨어질 위험에 처한 것을 목격하고도 제지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죽음을 이끌었다(그러니까 나는 후반부 플래시백에서 아이가 추락하는 모습을 여자가 섹스 도중 목격하는 장면은 죄책감이 빚어낸 기억 속 왜곡이라고 보지 않는다).

여자가 숲에 가길 두려워했던 진짜 이유는 그곳에서 자신의 혼돈스럽고 광기 가득한 본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세시대 무지와 왜곡으로 뒤틀린 남자들에 의해 마녀로 규정되어버린 여자들이 갖고 있는 것으로 모함되었던 그 가공할 힘이었다. <안티크라이스트>의 후반부에서 여자는 광기에서 잠시 놓여나 눈물을 흘리다가도 곧 “우는 여자는 기만적인 여자”라는 말을 내뱉으며 “다 소용없다”는 말과 함께 다시 복수의 화신이 된다. 피해자-여성의 방패였던 눈물 대신 가해자-남성의 창이었던 폭력으로 회귀한 그녀는 오래전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가했던 행위를 고스란히 되갚아준다(예를 들어 성경의 에덴에서 쫓겨날 때 남자에게 부과된 형벌인 노동을 상징하는 맷돌과 거기에 달린 파이프로 남자의 몸을 꿰뚫는 것은 상징적인 강간이다).

 

이 영화의 상징이 참신하고 창의적인 것은 폰 트리에가 상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신화와 역사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과 태도 때문이고, 그가 옹립하려는 상징체계가 서구 문명을 지배해온 주류 상징체계에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라스 폰 트리에가 몰두했던 니체의 책 <안티크리스트>는 “모든 가치의 전도!”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5.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아내가 남편을 공격할 때, 여성성은 남성성을 공격하고, 자연은 문명을 공격하며, 육체는 정신을 공격한다. 그때 실존은 역사를 공격하고, 소멸은 구원을 공격하며, 죽음은 삶을 공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순간에 카오스는 온 힘을 다해 코스모스를 공격한다. 이 영화에서 여자가 악하다면, 그것은 그녀가 질서 대신 혼돈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에서 가장 큰 폭력은 광기로 날뛰는 아내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대응하려는 남편이 저지른다. 남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마녀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카오스의 상징인 그 육체를 불태워 제거함으로써 코스모스를 회복하려고 한다. 이번 마녀는 스스로가 마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극악하게 날뛰었다는 점에서 다루기가 매우 힘들었지만, 어쨌든 남성은 이제 또 한번의 성공적인 마녀사냥을 끝냄으로써 질서있는 세계로 안전하게 귀환할 것처럼 보인다.

 

에덴에서 탈출한(혹은 에덴에서 다시 추방당한) 남자는 허겁지겁 산딸기를 따먹다가 언덕 위로 올라오고 있는 수많은 얼굴없는 여자들(잠재적인 마녀들)과 마주친다(이 장면은 이 영화를 뒤덮고 있는 추락의 이미지와 날카롭게 대조된다). 이때 그는 자신의 곁을 무심히 스쳐 올라가는 여자들을 보면서 망연자실한다. 에덴에 들어설 때 거기서 무슨 일이 펼쳐질지 짐작하지 못했고, 에덴에서 머무르는 동안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던 남자는 에덴을 벗어날 때까지도 철저히 무지했다. 그곳에서 벗어난 남자의 존재와 상관없이 에덴은 그 자체로 오롯하다.

 

이 영화의 산딸기는 지식을 가져다주는 성경의 선악과와 같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남자가 짐작하기 시작하는 순간은 산딸기를 입에 넣고 난 뒤 산을 오르는 여자들과 마주쳤을 때, 그러니까 에덴에서 벗어난 마지막 지점에서야 비로소 찾아온다.

 

지식이 없으면 진정한 고통도 없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의 고통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관계를 맺는 행위가 이뤄진 순간에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뒤늦게 인식하면서부터 고통은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안티크라이스트>에서 남자의 진짜 고통은 에필로그에서 산딸기를 따먹은 뒤 여자들이 숲을 오르는 모습을 볼 때 비로소 시작된다. 이제 남자는 숲에서 자신이 당했던 일이 아니라 행했던 일을 떠올리며 진정한 고통에 몸부림칠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그건 영화의 구두점 바깥에서 발생할 것이다.

 

6.
철학자 비엔느는 “나는 두려워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Timeo ergo sum)고 했다. 라스 폰 트리에 역시 그렇게 존재하는 예술가다. 많은 이들의 지적과 달리, 나는 <안티크라이스트>에서 폰 트리에의 허세와 사기술을 발견하지 못했다. 니체는 <안티크리스트>에서 “보이는 것을 보려 하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는 것. 이것을 나는 거짓이라고 부른다. 가장 습관적인 거짓말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이다”라고 했고, 폰 트리에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한명의 감독으로서나 한명의 자연인으로서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두려움의 근원을 향해 끝까지 파들어갔다. 다시 니체식으로 말한다면, 다만 그 두려움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폰 트리에는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가는 것을 알아채고도 끝까지 응시를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