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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보고 듣다(문장배달)

보르헤르트 「적설」

by 아프로뒷태 2014. 11. 8.




「적설」 보르헤르트

 

그래서 그는 노래를 불렀다. 공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한숨 소리도 안 들리고 땀이 얼어붙지도 않게 그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이제 공포가 들리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자 이제 그에겐 한숨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러시아의 숲속에서 그는 큰 소리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렀다. 러시아의 숲속 검푸른 나뭇가지에 눈이 매달려 있었다, 많은 눈이.

 

그런데 갑자기 큰 가지 하나가 뚝 부러졌다. 기관총 사수는 숨을 죽였다. 그러고는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는 피스톨을 뽑아들었다. 그때 상사가 눈 속을 껑충껑충 뛰어 그에게로 다가왔다.

 

이제 나는 총살당할 거야. 기관총 사수는 생각했다. 초소에서 노래를 불렀으니 나는 이제 총살당하고 말 거야. 어느 사이에 상사가 다가온다. 그의 뛰는 꼴이라니. 초소에서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이제 그들이 와서 나를 총살하려는 거야.

 

그래서 그는 피스톨을 단단히 손에 잡았다.

 

상사가 가까이 다가와서 그의 앞에 멈추어 섰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헐떡거렸다.

 

아이쿠, 날 좀 잡아주게, 응. 아이쿠! 원 참! 그러고는 그는 웃었다. 두 손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렇지만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크리스마스 캐럴이야. 이 저주받은 러시아의 숲속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니. 지금은 2월이 아닌가? 벌써 2월이 아닌가 말야. 그런데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게 되다니. 이 무서운 정적 때문이네.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니! 아이고, 또! 여보게, 나를 좀 꼭 잡아주게. 좀 조용히해. 자! 아니, 이제 끝나버렸잖아. 웃지 말게. 상사는 말하고 나서 다시 헐떡거리며 기관총 사수를 꼭 붙잡았다. 자네, 웃지 말게. 그렇지만 그것은 정적 때문이야. 몇 주씩이나 계속되는 이 적막함. 쥐새끼 소리 한번 안 들린다! 아무 소리도! 그런데 어느새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리는 거야. 이미 때는 2월인데. 그렇지만 그것은 눈 때문이지. 여기에는 눈이 참 많기도 하다. 어이, 웃지 말게. 그것이 사람을 미치게 한단 말야. 자네는 이제 겨우 이틀째 여기 있지. 그렇지만 우리는 벌써 여러 주째 눈 속에 앉아 있다네. 숨소리도 없이. 아무 소리도 없이. 그것이 사람을 미치게 하지. 끝없이 천지가 조용하다. 숨소리조차 안 들린다. 몇 주 동안을. 그런데 점차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린단 말야. 응. 웃지 말아. 그런데 내가 자네를 보자마자 갑자기 노래들이 사라져버렸어. 아이고,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니까. 이 영원한 정적이. 이 영원한.

 

상사가 아직도 헐떡거렸다. 그러고는 웃었다. 그를 꼭 잡았다. 그래서 기관총 사수도 그를 다시 단단히 붙잡았다. 그러고는 둘이서 웃었다. 러시아의 숲속에서. 2월에.

 

 

  

● 출처 :『이별 없는 세대』, 문학과지성사 2000 (13-15쪽)

 

● 작가 : 보르헤르트- 1921년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태어남. 열다섯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연극 배우로도 활동함. 시집 『등불, 밤, 별들』, 단편집 『민들레꽃』『이번 화요일에』와 사후에 유고를 함께 묶은 『보르헤르트 전집』이 있음. 1947년에 작고함.

 

● 낭독: 윤복인- 배우. 연극 <갈매기> <첼로> <처음해 본 이야기> 등에 출연.
이승준- 배우. 연극 <관객모독> <흉가에 볕들어라> <포트> 등에 출연.
장용철- 배우. 연극 <진짜 신파극> <햄릿> <문득 멈춰서서 이야기하다> 등에 출연.

● 음악 : 한창욱

 



한 십년 전쯤에 박완서 선생님에게 들은 말씀은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전 기자였고, 소설 쓰는 게 이렇게 힘든데 계속 써야만 하나?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래서 선생님께 “선생님은 이제 소설 쓰는 게 하나도 힘드시지 않겠네요?”라고 여쭤봤더니 선생님께서는 ‘소설 안 써봤으면 말을 하지 마’, 이런 표정으로 제게 말씀하셨지요. “다른 기술 같은 거면 삼십년 했으면 눈 감고도 잘 할 텐데, 소설은 새로 쓸 때마다 처음 쓰는 것처럼 힘들어요.” 선생님, 그 때 그 말씀에 정말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도 저는 소설을 새로 쓸 때마다 죽을 것 같은데, 원래 그렇다는 거 그 때 처음 알았거든요.

 

2008. 10. 9. 문학집배원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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