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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보고 듣다(문장배달)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바람의 그림자」

by 아프로뒷태 2014. 11. 8.



바람의 그림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난 내가 보고 싶어서 온 줄로 생각했었어.”

 

나는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녀의 얼굴이 난처함으로 발갛게 달아오르는 걸 바라보았다.

 

“농담이야.”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네가 아직 보지 못한 이 도시의 얼굴을 보여주려는 약속 때문이었어. 적어도 이렇게 되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나를 기억할, 아니면 바르셀로나를 기억할 모티프 하나는 갖게 될 테니까.”

 

베아는 좀 슬프게 미소 지었고 내 시선을 피했다.

 

“이제 막 극장에 가려는 참이었어, 알겠어? 오늘 너를 안 보려고 말야.” 그녀가 말했다.

 

“왜?”

 

베아는 말없이 나를 주시했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을 들었다. 마치 공중으로 달아나버리는 단어들을 사냥하겠다는 듯이.

 

“어쩜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를까 봐, 그게 두려워서.”

 

그녀가 결국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낯선 이들을 연결해주는 낙심의 침묵과 석양이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뭐든지 말해야 된다고 느꼈다. 비록 그것이 마지막이 될지라도.

 

“그를 사랑해? 아니면, 아냐?”

 

그녀는 입술 끝에서 흩어져버리는 미소를 내게 선사했다.

 

“네가 알 바가 아냐.”

 

“그렇지.” 내가 말했다. “그건 단지 네 일이지.”

 

그녀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그런데 너하고 무슨 상관인데?”

 

“네가 알 바가 아냐.”

 

내가 말했다. 그녀는 웃지 않았다.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파블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걸 알아. 우리 식구들과…….”

 

“하지만 난 거의 남이야.” 내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너한테서 그 말을 듣고 싶어.”

 

“무슨 말을?”

 

“진정으로 그를 좋아한다는 말. 집을 떠나기 위해, 아니면 바르셀로나와 네 가족들에게서 멀리 떠나 아무도 너를 아프게 하지 않을 곳으로 가기 위해 그와 결혼하는 게 아니라는 말. 너는 떠나가는 거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는 말.”

 

그녀의 두 눈이 분노에 찬 눈물로 반짝였다.

 

“너는 내게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어, 다니엘. 넌 나를 몰라.”

 

“내가 잘못 알고 있다고 말해봐. 그럼 가줄게. 그를 사랑해?”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긴 시간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모르겠어.” 그녀가 결국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언젠가 누가 그랬어.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생각해보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춰 섰다면, 그땐 이미 그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 출처 :『바람의 그림자』, 문학과지성사 2005 (280-282)

 

● 작가 :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에데베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하며 활동을 시작함.  소설『자정의 왕궁』『9월의 빛』『바람의 그림자』 등이 있으며, 페르난도 라라 소설 문학상 등을 수상함.

 

● 낭독- 이지현 : 배우. 연극『춘천거기』『임대아파트』『금녀와 정희』 등에 출연.
장희재 : 배우. 연극『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드림스튜디오』『아홉개의 모래시계』 등에 출연.

 

● 음악 : 한창욱

 



넌 나만 봐야 돼. 나중에는 이런 저런 것들 볼 게 많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나만. 뭐, 그런 식의 대사를 제가 좀 좋아하는 편이죠. 언젠가 친구의 아들이 유치원에서 좋아하는 여자애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는 그렇게 말했다고 하더군요. 정말 골치덩어리네. 아무 생각이 없군. 그 얘기를 듣고 그렇게 말했죠. 아무 생각이 없으니까 세상 사람들은 가끔씩 그렇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인생을 바칠 결심도 하게 되는 거죠.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게 된 건 그렇게 아무 생각이 없었던 사람들 덕분이에요. 좋다는 느낌이 들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나중에는 이런 저런 것들 생각할 게 많아질 테니까, 어쨌든 지금은 그냥.

 

2008. 11. 13. 문학집배원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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