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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

움베르트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

by 아프로뒷태 2013. 2. 17.

에코 할아버지가 또 책을 내셨네. 에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감칠맛나지. 밤새도록 책을 읽고, 다음날 아침, 에코 할아버지와 마주보며 커피 한 잔 마시고 수다를 떨고 싶다.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싫어할 테니..에코 오빠. 라고 부르며 궁금한 걸 다 물어보는 그런....모습 상상한다.

 

이 책 기대된다.

"오직 증오만이 날 흥분케 하네!"

[프레시안 books] 움베르트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

최재봉 <한겨레> 기자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내가 지어낸 인물은 단 하나, 주인공 시모네 시모니니뿐이다."

소설 <프라하의 묘지>(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펴냄) 말미에 붙인 '작가 후기 또는 학술적 사족'을 움베르토 에코는 이런 말로 시작한다. 대부분의 소설들에서 작가가 등장인물과 실존인물을 구분해서 읽어 줄 것을 요구하는 것과는 뚜렷하게 대비된다. 에코의 말인즉슨, 19세기를 배경 삼은 이 소설에서 주인공 시모네 시모니니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인물이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이들이며 소설에서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 역시 모두 실제로 그들이 했던 말과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은 반유대주의의 강력한 근거가 된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보통은 '시온 장로 의정서'로 번역된다)을 비롯해 19세기 유럽 사회를 뒤흔든 여러 건의 위서(僞書)를 작성하고 크고 작은 사건들에 관여해 온 악당 시모니니의 활약상(?)을 그린다. 그러니까 문제의 문서 '프로토콜'을 포함해 실존했던 문헌들과 역사적 사실들의 배후에 시모니니라는 허구의 인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꾸민 이야기가 <프라하의 묘지>인 셈이다. 허구의 인물이 이탈리아와 독일과 프랑스를 휘젓고 다니면서 실존 인물들과 만나 당대의 커다란 이슈가 되었던 사건들을 일으키도록 만들자면 작가 쪽의 치밀한 준비와 공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니 앞세운 에코의 말은 사실은 엄청난 자부심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나는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 작가의 길을 걸었다면 꽤 성공을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몇 개 되지 않는 단서들만 가지고 마법의 장소, 세계 지배의 음모가 꾸며지는 어둡고 으스스한 요처를 만들어 냈다."

 

 

 

 

 


▲ <프라하의 묘지>(움베르트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여기서 에코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꾼으로서의 자부심을 표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프라하의 묘지>의 주인공 시모니니다. 그의 자부심의 근거가 된 '프로토콜'은 1905년 러시아에서 처음 책의 형태로 출간되었으며 유럽 전역에서 반유대주의의 유력한 근거로 동원되었다.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가 "그 민족의 삶이 끊임없는 거짓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저 유명한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에 분명하게 나와 있다"고 한 것은 이 거짓 문서의 영향력을 짐작하게 한다.

 

 

 

 

 

 

 

이탈리아 토리노 출신인 시모니니가 제 나라 이탈리아는 물론 프랑스와 독일까지 활동 무대를 넓혀 가면서 접촉하는 인물들과 꾸며내는 사건들은 19세기 유럽사에 웬만큼 밝은 이라 하더라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시시콜콜하다(물론 프로이트나 알렉상드르 뒤마, 드레퓌스처럼 잘 알려진 이들을 소설 속에서 만나는 즐거움이 없지는 않다). '옮긴이의 말'에는 에코의 "역사와 문학에 관한 박학다식"과 "허구적인 삽화들과 역사적인 사건들을 한데 버무리는 지적인 재능"의 과시를 비판적으로 지적한 어느 이탈리아 교수의 서평이 소개되어 있는데, 옮긴이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런 지적이 설득력 있게 들리기도 한다.

이 소설이 소재로 삼았고 그 자신 논란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 반유대주의 역시 한국 독자들에게는 유럽인들에게만큼 피부에 와 닿지는 않는 듯하다. 유대인에 대한 배척과 탄압은 유럽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악습이고 결국 인류사 최악의 광기라 할 나치의 유대인 말살책으로 이어졌지만, 적어도 지금의 우리 눈에는 팔레스타인을 대하는 이스라엘의 태도가 더욱 문제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에코의 의도 역시 반유대주의라는 특정 이념의 해악을 새삼스럽게 고발한다기보다는 허구의 텍스트가 현실을 왜곡하고 조작하는 메커니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우리 식으로 흥미롭게 읽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선, 시모니니라는 캐릭터의 '매력'에 집중해 보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시모니니는 '나는 증오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금언을 신조로 삼는 인물이다. 말하자면 증오의 존재론이라 하겠는데, 그가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발휘해서 가짜 문서를 작성하고 수상쩍은 사건을 꾸며내는 세밀한 과정보다는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증오의 철학이 독자에게는 더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 같다.

그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 시모니니(실존인물이다!)한테서 유대인과 프리메이슨에 대한 격렬한 험담을 주입받았다. 그런 성장 배경은 그에게 하나의 신념으로 고착되었으며 그의 삶 자체를 결정지었다. 시모니니가 삶의 푯대로 삼은 증오의 철학, 증오의 존재론은 러시아 첩보원 라치콥스키(당연히, 실존인물이다)가 그를 만나서 하는 다음과 같은 말에 적절히 요약되어 있다.

"증오는 그야말로 원초적인 열정입니다. 사랑이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감정이죠.(…) 누군가를 평생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건 이룰 수 없는 희망입니다. 그래서 간통이며 모친 살해며 친구를 배신하는 일 따위가 생겨나는 겁니다. 반면에 누군가를 평생토록 미워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증오가 사랑보다 강하며 지속성도 있다는 것인데,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스스로 '평생의 작업'이라 표현한 '프로토콜'을 완성해 라치콥스키 쪽에 넘긴 뒤 시모니니가 허탈감과 애수, 더 나아가 "유대인들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까지 느끼는 장면은 그 주장을 그럴싸하게 뒷받침한다.

<프라하의 묘지>를 우리 식대로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은 '프로토콜'에서 유대인의 그림자를 지워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가령 시모니니가 라치콥스키의 수하 골로빈스키(역시 실존인물)에게 자신이 작성한 '프로토콜'의 내용을 설명하는 이런 대목을 보라.

"신문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허울뿐인 언론 자유를 통해 여론을 광범위하게 통제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소. 랍비들의 말에 따르면, 대다수 정기 간행물을 독점해야 하고, 그것들이 일견 서로 다른 견해들을 표명하게 함으로써 사상이 자유롭게 유통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되, 실제로는 어느 신문이나 잡지든 유대인 지배자들의 의견을 대변하게 만든다는 것이오."

이런 구상에서 '유대인'과 '랍비'를 제거하면 어떻게 될까? 이탈리아의 언론 재벌로 총리 자리에까지 올랐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그리고 우리 사회의 여론을 지배하며 왜곡하고 있는 조중동의 존재가 떠오르지 않겠는가. 그런가 하면 이런 주장 역시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이번에는 '프로토콜'의 앞선 버전에 나오는 한 랍비의 발언이다.

"어리석은 이민족들은 공화 정치 체제에서는 전제 정치 때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실상을 보자면 전제 정치 체제에서는 현자들이 통치를 하지만 자유 체제에서는 천민들이 통치를 하고 이들은 우리 유대인들의 돈에 쉽게 조종되오."

하층 계급이 선거 때마다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이 아니라 반대쪽 정당에 표를 던지는 행태, 그 결과 '이명박근혜 정권'의 탄생을 낳은 우리의 지난 대통령 선거 결과를 떠올리게 한다면 아전인수일까?

문제의 '프로토콜' 자체는 1921년 <런던 타임스>의 보도로 거짓 문서임이 드러났지만, 그 안에 담긴 주장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오고 있다. 골로빈스키에게 문서를 넘겨준 뒤 시모니니는 그 문서의 운명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되는 추측을 해 본다. 하나는 그것이 러시아 및 관료들 특유의 건조한 문서로 바뀌어서 "아무도 읽으려 하지 않"게 되는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내 랍비들의 사상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 마지막 해결책이 뒤따를" 가능성이다. 나치가 시도했던 '마지막 해결책'(Endlosung)은 시모니니의 두 번째 추측이 올발랐음을 보여주었지만, 히틀러의 독일이 패전했다고 해서 '마지막 해결책' 또한 시효가 다했다고 안심하기는 이르다.

에코가 예의 '작가 후기 또는 학술적 사족'에서 "그(=시모니니)는 여전히 우리들 사이에 있다"고 쓴 것은 시모니니와 '프로토콜'로 대표되는 음모론이 여전히 횡행하고 있는 세태를 겨냥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음모론은 반유대주의라는 좁은 범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약자 및 소수자를 대상으로 삼는다(비근한 예로 '대량 살상무기'의 존재를 근거로 자행된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보라).

에코는 '프로토콜'을 넘긴 것으로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던 시모니니가 다시 지하철 공사장 폭탄 테러를 준비하는 모습으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오로지 증오만이 심장을 다시 뜨겁게 만든다"며 시모니니는 자신을 북돋는데, 이 장면을 <이기적 유전자>(홍영남·이상임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의 도킨스 식으로 재해석해 볼 수도 있겠다. 시모니니라는 특정한 개인의 생존 여부와 무관하게, 증오와 음모의 유전자는 영구히 존속하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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