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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와 <레 미제라블> 사이에서 '시대착오'하라!

by 아프로뒷태 2013. 1. 6.

<타워>와 <레 미제라블> 사이에서 '시대착오'하라!

[5년, 작은 빛]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

김성욱 영화평론가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당신에게 애원한다. 아, 당신에게 애원한다. 죽으려 하지 말기를."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내 어머니에게 애원함'(1962))

지난 선거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판세와 여론조사로 대세를 말하고 승리를 점치는 이들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신문기사가 그랬다. 텔레비전에서는 주요한 의제를 토론하기보다는 연일 특정 쟁점이 누구에게 유리할지, 그래서 결국 누가 승리할 것인지를 말하고 있었다. 단일화와 관련한 사안도 마찬가지였다. 대세라는 공감의 전체주의를 피할 방법이란 별로 없었다.

이 자리에서 사람들을 지적하고픈 생각은 없다. 만약 문제를 삼자면 그 자체로 빛을 발하는 텔레비전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다. 가령, 종편이 그들의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란 말이 몇 년 전에 있었다. 낮은 시청률의 결과가 나오면서 별 문제 없다는 듯한 발언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낮은 시청률의 미디어들이 지난해의 선거보도에서는 대단히 중대한 일을 수행했다. 콘텐츠가 문제가 아니다. 사실 미디어들은 콘텐츠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고 보인다. 더 나쁜 것은 콘텐츠의 질이 아니라 공공공간의 오염이라는 현상이었다.

사실 보수언론이든 진보언론이든 큰 차이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사안이 마케터들의 논리와 다르지 않은 않았기 때문이다(사실, 진보언론도 영화를 다루는 기사를 보자면 마케터의 흥행논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 있지 않다). 정치의 행동을 점점 더 문화산업의 마케팅과 섞어버릴 때 어떤 일이 발생할까? 이를테면 미리 기정사실로 하는 박스오피스 성적의 대세론과 후보자의 예상득표수의 산출을 거의 동일한 수준에서 이야기하는 식이라면?

이럴 때 사라지는 것은 우리들의 현실의 감각이다. 선거의 대중을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의 관객들처럼 마케팅의 표적으로 삼고 숫자로 환산하며 대세를 말할 때, 결국 사라지는 것은 우리의 생의 감각이다. 미디어가 숫자로 대세를, 혹은 승리를 말할 때 현실의 감각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다시피 결과는 좋지 않았다. 결과로서 어떤 실패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불확실해진 현실의 감각이다.


▲ <반딧불의 잔존>(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지음, 김홍기 옮김, 길 펴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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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에서는 세대의 선호도와 투표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전히 우리는 숫자들과 마주하고 있다. 완고한 수치들. 고집스런 수치들. 모든 작은 가능성을 모조리 회수하는 그 흥행의 수치들. 그리고 이를 조장하거나 부추기는 미디어들.

새해 초에는 이런 기사들을 읽었다. 두 편의 흥행한 영화를 두고 대중을 언급한 서로 다른 이야기였다. 첫 번째, <타워>의 흥행을 두고 어느 기자는 평론가들이 이번에도 또 헛다리를 짚었다며 이런 식으로 말했다.

"대중의 기호에 맞춘 상업영화에 작가주의적 잣대를 들이대며 현학적 수사를 가하는 평론가들과 일반 영화팬들의 눈높이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 기인한다. (…) 제작비가 높은 대작일수록, 스토리의 기승전결과 구도는 가장 많은 대중의 기호에 부합하도록 쓰이기 마련인데 이는 평론가들의 취향과 어긋나기 십상이다."

이 기사의 결론은 이랬다.

"결국 영화 흥행에 대한 모든 결정권은 관객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걸 확인시켜준 게 이번 <타워>의 박스오피스 결과인 셈이다."

다른 하나. <레 미제라블>이 최근 대선 후유증을 치유하는 영화로 관객들에게 성공하고 있는 이유를 진단한 이런 기사.

"이해할 만하다. 한국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던 젊은 세대는 <레 미제라블>의 시민군 이상으로 절망감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 젊은 유권자들이 당선자가 아닌 다른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절망과 과로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변화를 꿈꾸는 게 놀라운 일이었을까? 하지만 이들이 맞닥뜨린 대선결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였다."

이 글은 여기서 나아가 한국사회의 비극을 이렇게 지적한다.

"한국사회의 비극은 사람들이 남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 내성을 지니게 됐다는 점이다. 이번 대선 결과가 이 점을 잘 말해준다. 대통령 직선제는 시민들이 피로 얻어낸 민주주의의 결실이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싸워서 얻어낸 투표권으로 사회를 구체제로 되돌리는 선택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투표를 인정하지 않았던 지도자를 복권시킨 것이다."

이런 글들에 어떤 논평을 하기보다는 그저 한 권의 책을 추천하고 싶다. 앞으로의 5년을 견디기 위한 책이라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새해의 첫 시작에는 권하고 싶은 책이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김홍기 옮김, 길 펴냄)이다. 지난 해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자주 손길을 주었던 책이다.

저자나 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 글의 취지와 어울리지 않으니 본론만을 말하고 싶다. 디디-위베르만이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은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파솔리니가 서로 다른 시기에 반딧불에 관해 썼던 글이다. 반딧불이란 이탈리아어로 'Lucciola'로 이는 빛을 의미하는 'Luce'를 귀엽게 쓴 말이다. 'Luce'가 큰 빛이라면 'Lucciola'가 작은 빛이라 할 수 있다.

파솔리니는 반딧불에 대한 첫 번째 글을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1941년에 썼다. 말하자면, 이탈리아 전 국토가 무솔리니 최고통치자인 두체(Doce)의 큰 빛(Luce)으로 덮여 있던 시대다. 무소불위의 강력한
서치라이트가 세상을 비추던 시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두리의 후미진 곳에서는 반딧불이 있었다. 문학과 사상, 그리고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는 반딧불 같은 젊은 소년들도 있었다. 큰 빛에 회수되지 않는 작은 빛들은 반딧불의 생이자 절망적인 시대의 희망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글이 있다. 파솔리니는 1975년에 '1960년대의 초,
대기오염이 원인으로 특히 시골에서 물이 오염되었던 탓에 반딧불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신문의 짧은 기사에 적고 있다. 공해에 오염되었던 탓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오염이 희망을 사라지게 했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에의 욕망, 소비주의라는 새로운 파시즘의 침투가 무솔리니조차 할 수 없었던 이탈리아 전역을 가려버리는 큰 빛을 만들어낸 것이다. 파솔리니는 상품 전체주의의 권력에 모두동화되어 문화산업이 영화, 섹스, 에로스를 움켜쥐고 이제 예술마저도 소비의 회로의 주입하는 상황이라 지적한다. 저항의 실천을 의미하던 문화가 이제 일반화된 관용이 깃든 왕국에 포획되고 있었다. 반딧불은 이제 사멸했다. 파솔리니는 절망적이었다.

디디-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은 그런 파솔리니의 논의를 전용하면서도 파솔리니의 결론과는 달리 반딧불이 잔존하고 있을 가능성을 '찾는' 책이다. 파솔리니의 염세주의는 사실 반딧불의
소멸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반딧불을 찾아내는 희망의 상실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소멸이란 존재의 상실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것을 찾는 사람이 포기할 때 발생한다. 더 이상 동일한 장소에서 무언가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간에서 무언가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니 진정으로 시대착오적인 것이 필요하다. 파솔리니는 오직
위상차와 시대착오 속에서 드러나는 것만이 동시대적인 것이라 이미 말했던 적이 있다. 그의 발언을 빌자면 진정한 동시대인이란 현시대의 스펙터클한 밝고 큰 빛을 어둡게 만들어, 그 어둠 속에서 우리에게 도달하려 애쓰는 작은 빛을 발견하려는 사람이다.

아마도 앞으로의 5년은 더 큰 빛들이 많아질 것이다. 서치라이트는 강해질 것이며
텔레비전의 불빛이 더 오랫동안 켜질 것이다. 파솔리니의 논의를 따라 반딧불이 사라졌다거나 대중이 소멸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두 세계 사이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 하나는 빛이 가득하고 영광이 가득하다. 다른 하나의 세계에는 오직 미광만이 있다. 빛이 가득한 곳에는 그 영광을 채우기 위해 동원의 갈채를 끌어오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빛에서 내몰리고 쫓겨나, 혹은 후퇴해 밤으로 도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딧불-민중들. 그리하여 디디-위베르만이 지적한 이 구절을 다시 읽는다.

"반딧불의 소멸을 방관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우리에게 달려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운동자유, 고립이 아닌 후퇴. 대각선의 힘. 일말의 인간성을 출현하게 하는 능력, 파괴할 수 없는 욕망을 스스로 실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반딧불이 되어야 하고, 이를 통해 욕망의 공동체를 다시 형성해야 한다. 그 공동체는 미광을 발산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을 추고, 사유를 전달한다."

나로서는 그 작은 반딧불이 여전히 영화다. 정치든 문화든 마케터들의 흥행논리와 대세론의 큰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세계를 비추는 것은 여전히 내게는 영화다. 영화는 어두운 곳에서 태어났고, 그 어둠이야말로 영화를 위한 물질적 조건이었다. 대낮의 긴장과 밝은 불빛 때문에 영화도 어려워질 것이다. 하지만 이 어둠이 이제는 한편으로는 축복이기도 하다. 영화는 어두운 곳을 채워나가는 영상의 빛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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