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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향기

WHO AM I? 법의 수호이냐? 인간애 실현을 위한 법의 위반이냐?

by 아프로뒷태 2013. 1. 6.

WHO AM I?

법의 수호이냐? 인간애 실현을 위한 법의 위반이냐?

양심 앞에서 갈등하는 장발장,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법의 수호이냐? 인간애 실현을 위한 법의 위반이냐? 양심 앞에서 갈등하는 장발장, 나는 누구인가?

 

 

 

프랑스 혁명은 1789년에 일어났다. 당시 베르샤유의 궁전의 주인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또와네트 왕비이다. 이들이 이끈 프랑스의 왕정은 부패할 때로 부패했다. 왕과 왕비는 백성에게 징수한 세금으로 호사스러운 왕정 생활을 누렸다. 그것도 모자라 세금을 더 올리기도 했다. 궁내에서는 사치가 만연했지만 궁밖에서는 백성들이 기근으로 죽어갔다. 일부 양심 있는 정치가들이 왕과 왕비에게 상소문을 올렸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유명한 일화로 민중이 배가 고파서 죽어갑니다. 는 상소에 마리 앙또아네트는 “그러면 케익을 먹으면 되지 않느냐” 고 대답할 정도였다. 이렇듯 왕과 왕비는 백성의 기근과 고통에 관심이 없었다. 오직 그들은 호사스러운 생활에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왕족과 귀족의 호화로운 파티와 사치는 배고픈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 충분했다. 그리하여 루이 16세는 단두대에 올라가고 마리 앙또아네트는 민중의 손에 이끌려 쫓겨나는 파국을 맞게 된다. 그렇다. 배고픔과 국가의 과도한 세금징수를 견디지 못한 민중은 봉기한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그리하여 시작되었다. 프랑스 혁명이후, 진정한 민주주의가 도래할 것 같았지만 프랑스의 경제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배고픔에 굶주리는 백성들이 즐비했다. <레 미제라블=가난한 사람들>은 그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창작된 소설이다. 소설에서 드러나듯 그러한 역사상황에서 배고픈 누이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장발장, 그 죄로 5년을 복역한다. 그리고 탈옥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총 19여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다. 국가에 대한 분노와 법에 대한 저주로 내면에 악마성을 키워갔던 장발장. 그가 부끄러움을 느끼고 새로운 인간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바로 미리엘 주교 덕분이다. 그 사연은 다음에서 알 수 있다.

 

 

 

 

‘영화는 1815년의 프랑스로부터 출발한다. 빵 한 조각을 훔쳤다는 이유로 19년간 감옥살이를 한 장발장(휴 잭맨)은 가석방된다. 하지만 전과경력이 있는 장발장은 막노동은 물론 잠자리조차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이는 오직 한명. 미리엘 주교(콤 윌킨슨)다. 그러나 장발장은 이 은혜를 성당의 은식기를 훔치는 것으로 갚는다. 결국 그는 경찰에 잡혀 성당에 다시 끌려오나, 주교는 장발장의 절도 사실을 숨기는 것은 물론 은촛대까지 쥐어주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라고 말해준다. 이후, 신분을 감추고 시장의 자리까지 오른 장발장은 인자한 성품으로 시민들의 존경을 받지만, 한 공장에서 해고된 여인, 판틴(앤 해서웨이)의 억울함을 그냥 지나친다. 궁지에 내몰린 판틴은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여자로 전락하고, 병에 걸린 그녀는 마지막 순간 장발장에게 딸 코제트(아만다 시프리드)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장발장은 그를 20년 전 죄수로 의심하는 경감 자베르(러셀 크로)를 피해 코제트와 성당에 머문다. 한편, 프랑스에선 평민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대변했던 라마르케 장군의 죽음을 계기로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시민들의 시위가 시작된다. 그 선봉대에 선 마리우스(에디 레드레인)는 장발장의 딸 코제트를 우연히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런 마리우스의 곁을 그를 짝사랑하는 여인 에포닌(사만다 뱅크스, 코제트가 어린 시절 묵었던 여관 주인의 딸)이 맴돈다.’ -씨네21-

 

 

영화의 프롤로그는 노역을 하는 장발장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당시 유럽은 신대륙 발견과 무역을 위해 세계로 뻗어나가는 일이 한창이었다. 그러한 유럽을 상징하는 힘이 바로 배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 당시 프랑스의 사정은 루이 15세가 영국과의 7년 전쟁으로 패한 상황이었다. 프랑스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는 바람에 국력이 약화되어갔다. 그리하여 숙적이었던 오스트리아와 화친을 맺고,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트와네트를 황세자비로 맞았다. 하지만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의 부도덕한 정치와 기근과 재정 악화로 백성들은 굶주려갔다. 이러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삼부회의가 소집되지만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수렴하지 못하여 평민 대표들이 국민회의를 결성한다. 로베스 삐에르가 주도하는 자코뱅당은 공포정치로 혁명을 추진한다. 내부에서는 혼란과 밖에서는 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의 침략이 한창이었다. 이러한 국내외 사정으로 인해 영화의 프롤로그는 거대한 바다로 나아갔던 프랑스의 배가 전복될 위기에 처해져 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좌초될 배를 노역들이 대륙으로 끌어올리는 장면은 꽤나 인상적이다. 노역으로 희생된 이들은 법을 위반해서 잡혀온 자들도 있지만 장발장처럼 빵 한 조각으로 20여년을 감옥살이했던 억울한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법에 대해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악법도 법인가? 법은 꼭 지켜져야 하는가? 법을 만드는 자들의 도덕과 양심, 자격에 대해 논해볼 필요가 있다.

 

 

 

 

여하튼 영화의 프롤로그가 상징하는 바는 대단하다. 짧고 강렬하지만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자베르 경감이 장발장에게 젖은 프랑스 국기를 걷어오라고 명령하는 씬을 생각해보자. 축축하게 젖은 프랑스 국기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가? 빈곤과 범죄 그리고 부패한 프랑스의 현실을 비유하는 것은 아닐까? 자베르 경감의 명령에 따라 장발장은 온 힘을 다해 국기를 들어올린다. 그 장면이 상징하는 바는 대단하다. 그 장면에서 나는 장발장이 황폐해진 프랑스를 일으켜 세워주길 바라는 작가의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빵 한 조각을 훔쳐 20여년을 교도소에서 산 한 남자가 부패한 프랑스를 구원한다는 의미로 생각해볼 만하다. 도둑 장발장에서 시장으로 개과천선하여 살아가는 장발장, 장발장은 프랑스 도시 민중들의 실업을 해결하고 배고픈 노약자나 부랑자를 위해 적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장발장이 다스리는 도시는 범죄율이 적고 치안 걱정도 없다.

 

 

 

 

 

 

그러나 과거는 영원히 숨길 수 없는 법. 장발장은 위법으로 죄수자이라는 신분을 감추고 살아가지만 법을 수호하며 장발장을 찾으려고 혈안이 된 자베르 경감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장발장과 자베르 경감 사이의 갈등에서 우리는 법이라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법인지,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는 악법도 법인지에 대해 질문을 갖고 답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법은 정의 수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악법도 법이 될 수 있을까? 법은 누가 만들었나? 얼마 전 국회에서 ‘국회의원 연금법’을 통과시킨 일을 생각하면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의 피 같은 돈을 지도자의 배불리기에 쓰다니.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과거나 현재나 역사적으로 국민은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에 급급한 지도자들이 만든 법에 복종했고, 그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가난 속에서 배고픔을 참아가며 세금을 내왔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우리에게 법이란 무엇인가? 법이 중요한가? 인간이 중요한가? 법을 믿고 지켜온 자베르 경감과 법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켜온 장발장은 물과 기름과 같은 사이이다. 둘은 섞일 수 없다. 법을 수호하려는 자와 법을 위반하려는 자는 한 공간에서 존재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자베르 경감은 자살을 선택했다. 그렇다고 장발장이 잘했다고 말 할 수 없다. 다만 장발장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자기반성을 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장발장은 진정한 양심을 지닌 인물이다. 영화에서 장발장이 양심의 갈등을 겪는 부분은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양심의 갈등을 느끼는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장발장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첫째, 가짜 장발장이 체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이다. 장발장과 닮은 다른 누군가가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장발장은 갈등한다.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평생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 시장자리와 교도소 수감을 이행해야 하는 장발장의 위치에서 고민한다. 그리고 장발장은 재판장으로 찾아가 양심선언을 한다. “나는 ‘장발장’이요. 자베르 경감, 나를 잡아가시오.”

 

 

 

둘째, 코제트와 그의 연인 마리우스의 만남을 위해 희생을 선택할 때이다. 장발장은 프랑스를 이끌어갈 미래의 주인공들, 청춘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기로 결심한다. “사랑은 청춘의 꽃이라 하지 않는가?” 라는 장발장의 말처럼 젊은이들의 세상을 위해 중년이 희생하는 숭고미를 보여준다.

 

 

 

둘째, 코제트에게 시장으로서 아버지가 아니라, 빵 한 조각으로 20여년을 교도소에서 산 장발장이라는 신분을 털어놓는다. 나는 장발장이다.

 

 

이 영화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되었다고 하지만 영국에서 상영 중인 뮤지컬을 원작으로 하였음이 더 명확할 것이다. 뮤지컬은 다음과 같다. 이 뮤지컬은 10주년 기념으로 상연된 공연이다. 실제로 감독은 이 뮤지컬의 내용을 바탕으로 영화에 그대로 적용했다고 한다.

 

 

<레 미제라블> 10주년 공연

 

 

 

<레 미제라블> 25주년 공연

 

 

 

영화는 뮤지컬의 형식을 그대로 빌려온다. 그런데 ‘영화 <레미제라블>이 여타의 뮤지컬영화와 차별화되는 점은 배우들이 뮤지컬 넘버를 사전녹음하지 않고 라이브로 노래하는 ‘송 스루’(song through)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배우들이 사전에 녹음한 노래에 맞춰 연기하면 그 순간의 감정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한 톰 후퍼는 배우들에게 현장에서 뮤지션들의 라이브 연주에 맞춰 연기하듯 노래하도록 했다. 이러한 연출 방식이 영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뮤지컬 음악의 매력이 순간의 감정 전달이라면, <레미제라블>의 ‘송 스루’ 스타일은 현장에서 배우들이 몰입했을 바로 그 순간의 감정을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특히 장발장이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며 부르는 <What I have done>, 매춘부로 전락한 판틴의 <I dreamed a dream>, 코제트와 사랑에 빠진 마리우스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노래하는 에포닌의 <On my own>이 흐르는 대목 등이 인상적이다. 거대한 바리케이드 위에서 군중이 함께 부르는 노래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를 담은 영화의 엔딩은 이 묵직한 서사시의 커튼콜로 손색이 없다. 가난과 무지가 존재하는 한 혁명의지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할 것임을 예감한 위고의 비전을 고려한다면, 멜로디 속에 인간에 대한 뜨거운 연민을 담아낸 뮤지컬과 영화의 해석이 더욱 적절하게 느껴진다.-씨네21’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다양한 음악이 소개되어 귀가 즐거웠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영화를 워킹 타이틀이 제작했다. 워킹 타이틀이 드디어 대작을 만드는 구나. 영화사 입문하고 나는 기획 일을 하면서 국내에 딱히 롤모델이 될 만한 기획집단이 없었다. 그러한 기획성을 가진 영화사도 없었다. 그래서 롤모델로 삼은 영화사가 바로 워킹 타이틀이었다. 당시 나에게 워킹 타이틀에서 만든 영화는 진보나 보수 따위의 정치색에 오염되지 않은 중도의 위치에서 희망적이고 인간적이며 선입견이나 편견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새로움을 창조하기 위해 늘 도전하고 나아가는 창작집단으로 여겨졌다. 워킹 타이틀에서 만든 영화를 보면 늘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도대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시나리오를 기획하는지 궁금했다. 당시 내 주변에는 기성의 것에 찌들린 어른들이 많았고 새로움을 논할 영화인들이 그다지 없었다. 창작자들은 늘 도전하고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지만 반대로 기성의 제도에 오염되기 쉽다. 그들도 그랬는지 모른다.

 

 

 

워킹 타이틀이 이번에 만든 <레 미제라블> 은 영화사 자체의 기획과 제작의 내공이 얼마나 탄탄한가를 보여주었다. 영화를 보면서 워킹 타이틀을 극찬하고 싶었던 점은 다름 아닌 제작사가 감독을 믿고 지지해준 일이다. 뮤지컬을 그대로 착용하여 영화화하겠다는 감독의 의도를 존중하였고,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서 장발장 개인의 역사에 조명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장발장 개인이 직면한 시대의 불안을 드러내는 일에 심혈을 기울었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영화의 반은 장발장 개인의 역사에 주목하고 나머지 반은 프랑스의 민중혁명의 역사에 주목한다. 워킹 타이틀은 시나리오 기획단계에 들어가면 시나리오 단어 하나하나부터 엄격하게 검열작업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 각색으로 네 명의 작가들의 이름이 엔딩 크레딧에 올랐다.

 

 

"노동자에게 사랑받는 문학의 거장"

빅토르 위고

프랑스의 19세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프랑스 최고의 작가로도 불린다. 소설 레 미제라블노틀담의 꼽추는 그의 최고 작품으로 꼽힌다. 시인으로도 유명했던 위고는, 숙고 (Les Contemplations) 와 세기의 전설 (La Légende des siècles) 이라는 시도 남겼다. 젊은 시절에는 보수주의였다가 시간이 갈수록 정치적으로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진보적 지식인이 되었으며, 유럽 연합의 설립과 공화주의를 위해 힘을 썼다. 실례로 빅토르 위고의 대표작인 레 미제라블속에는 프랑스 민중들의 비참한 삶과 사회혁명의식이 담겨있다.

2002년 1월 7일 프랑스의 모든 학교 교실에서는 대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의 시가 일제히 낭송됐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에 걸친 2주간의 노엘방학을 마친 프랑스의 모든 초·중·고교 학생들이 이날 새해 첫 수업을 빅토르 위고의 시를 읽는 것으로 시작한 것이다.

이는 프랑스 교육당국이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의 거장 빅토르 위고가 태어난 지 2백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새해 첫 수업시간에 교과목에 관계없이 위고의 시를 읽을 것을 권장했기 때문이었다.

자끄 랑 당시 교육부 장관도 이날 파리의 달랑베르 초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1853년 위고가 쓴 서사시인 <징벌시집>(Les Chatiments)의 한 구절을 암송해줬다.

우리에겐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1862)과 <파리의 노르트담>(Notre-Dame de Paris, 1831)의 작가 정도로 알려진 위고는 프랑스인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문인이다.

시낭송뿐 아니라 그해 프랑스에서는 2월26일 빅토르 위고 탄생 2백주년을 전후해 심포지움, 연극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지는 것을 비롯해 한해 내내 위고 관련 행사가 진행됐다.

 

그가 이처럼 프랑스인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는 것은 문학적인 업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혁명의 세기라 불릴 정도로 격동적이었던 19세기 프랑스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빅토르 위고의 83년 긴 생애에서 문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그가 추구했던 사회진보에의 열망은 프랑스인들의 가슴에 깊이 남아있다.

"레 미제라블, 현실에서 그린 지옥"

특히 그의 대표작 <레 미제라블>은 발표될 당시부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들이 주머니를 털어 조금씩 모은 돈으로 책을 사서 돌려본 이래로 빅토르 위고는 특히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왔다.

<레 미제라블>은 위고의 인간애와 사회진보에의 열망을 담은 대표작이었지만 동시대의 작가와 비평가들에게는 혹독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플로베르는 "의도적으로 부정확하고 저속한 문체로 쓰여졌다"고 비난했고 보들레르는 "추잡하고 하찮은 책"이라고 악평을 했다.

하지만 프랑스 문학 특유의 고상하고 귀족적인 문체를 배제하고 실제 파리 하층계급이 쓰는 일상언어와 실감나는 표현과 어휘로 쓰여진 이 작품은 19세기 문학의 대중적인 성공 사례로 꼽혔고 "주머니에 12프랑이 있으면 노동자들은 이 책을 샀고 제비뽑기로 읽는 순서를 정했"을 정도로 당시 노동자들에게 인기였다.

'레 미제라블(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위고가 1845년부터 구상했던 것으로 가장 연약한 자들의 비참함, 노인들의 궁핍, 굶주린 아이들의 참상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 대중소설로 평가되고 있다. 1830년대 파리의 현실을 그린 이 작품에 대해 위고는 "단테가 시에서 지옥을 그려냈다면 나는 현실을 가지고 지옥을 만들어내려 했다"고 말했다.

나폴레옹, 위험인물로 분류

빅토르 위고는 1802년 브장송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나폴레옹 휘하 장군이었고 어머니는 왕당파 집안 출신이었다. 위고는 유년 시절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유럽의 여러 곳을 여행할 수 있었다.

아버지 레오폴은 아들을 군인으로 키우고 싶어 했으나 빅토르 위고의 관심은 이미 문학으로 향해 있었다. 그의 문학적 재능은 1817년 15살의 나이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문학 경시대회 시부문에 입상하면서 증명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와 소설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한 그는 1819년 형 아베르와 함께 <문학 수호자>라는 잡지를 창간한 이후 소설과 시집을 출간하며 파리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문학적인 명성을 높여가기 시작한 20대때 그의 정치적 성향은 민주주의와 자유 왕정제 사이에서 맴돌고 있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이후 1830년까지 계속된 왕정복고시기에 그는 검열에 대해서는 일체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으며 '레지스탕스' 기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1830년 7월 혁명이 성공한 후 샤를르 10세가 금지시켰던 그의 희곡 <마리옹 드 로름므>가 열광적인 분위기로 공연됐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이어졌던 이 '7월왕정' 체제 하의 프랑스에서는 거의 매년 노동자와 학생들의 봉기가 이어졌고 이 혁명적인 분위기는 이후 빅토르 위고의 작품에 큰 영향이 끼치게 됐다.

1845년 <레 미제라블>를 집필하기 시작할 무렵 자유 왕정을 지지했던 위고는 루이 필립 왕의 측근이 돼 프랑스 상원의원에 임명되기도 했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보통선거에 의한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자 위고는 급진파 의원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2월 혁명으로 수립된 제2공화국은 반공화파인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위기를 맞게 됐다. 루이 나폴레옹은 교육을 교회에 종속시키는 팔루(Falloux)법을 선포하자 '교육의 자유에 대한 논설'을 발표하며 이에 맞섰던 위고는 결국 위험인물로 분류됐다.

1851년 12월 2일에 루이 나폴레옹은 군사를 동원한 쿠테타를 일으키고 사회주의자들이 꾸미는 음모를 타도하기 위해 계엄을 선포한다는 명분 하에 의회를 해산하고 빅토르 위고 등 급진파 의원들을 체포했다.

위고는 출옥 후 경찰의 눈을 피해 저항운동을 조직하다 벨기에로 망명했다. 이 기간동안 쓰여진 <징벌시집>은 정변을 일으켜 반동체제를 수립한 루이 나폴레옹을 꾸짖는 내용이었다. "사회주의자"임을 선언하고 반나폴레옹 투쟁을 벌인 위고는 1859년 나폴레옹 3세의 사면을 거부하고 게르느제 섬에 머물며 1848년 2월 혁명 이후 중단했던 <레 미제라블> 집필을 재개하는 등 작품활동에 몰두했다.

 

19세기 프랑스역사 온몸으로 부딪쳤던 꼬뮨전사의 벗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몰락 이후 오랜 망명생활을 마치고 그가 파리로 돌아왔을 때 파리 시민들은 그를 뜨겁게 맞이했다. 그리고 파리시민은 그를 국회의원으로 선출했다.

1871년 3월 파리꼬뮨 시기 그는 잠시 브뤼셀에 머무르고 있었다.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꼬뮨파의 편에 서있었고 벨기에에서도 파리의 동지들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위고는 파리꼬뮨이 진압된 후 벨기에로 도망 온 꼬뮨전사(꼬뮤나르드)들에게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지 않는 벨기에 정부에 항의하다 기피인물로 낙인찍힌 후 추방당했다.

룩셈부르크 등지를 떠돌다 1872년 파리에 정착한 위고는 망명시절 쓴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급진파 상원의원에 선출돼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만년을 보냈다. 1885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프랑스 국민들은 성대한 장례의식을 베풀었으며 팡테옹까지의 운구행렬에는 수많은 애도인파가 몰렸다.

빅토르 위고의 생애는 제1제정, 왕정복고, 7월왕정, 제2공화국, 제2제정, 제3공화국으로 이어진 19세기 프랑스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억압체제에 저항하며 노동자계급과 꼬뮨전사의 편에 서고자 했던 그의 작품과 생애는 당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Ⅰ. 생각해보기

빅토르 위고

가장 유명하고 가장 대중적인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는 기상천외한 인물이었다. 장수하며 방대한 문학 작품을 써낸 작가이자 재능 넘치는 데생 화가이며, 정치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정치인이자 만족할 줄 모르는 만인의 연인으로 ‘세기의 전설’이었다. 그의 삶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그는 역사의 현장 속으로 직접 뛰어들었으며 (…) 급작스럽게 정치적 성향을 바꾸면서도, 인도주의적인 자신의 신념만큼은 충실하게 지켰다. 정치적이기보다는 이상주의적이었던 그는 ‘권력가’라기보다는 자유와 정의를 섬기는 ‘사상가’였다.-델핀 뒤샤르

“단테가 시로 지옥을 그려냈다면 나는 현실로 지옥을 만들어내려 했다.”
-위고가 『Les Miserables』을 설명한 말.

▲ 위고는 1830년대에 프랑스 문단에서 낭만주의의 선도자로 명성을 떨쳤다.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는 낭만주의 운동을 이끈 시인이며 소설가·극작가로 유명하다. 위고는 1802년 나폴레옹 군대 장군인 아버지 레오폴드 위고(Leopold Hugo)와 왕당파 집안 어머니 사이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렸을 적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등지로 옮겨 다니며 1812년부터 파리에 정착하여 기숙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와 시를 즐겼으며 1817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콩쿠르에 이어 1819년에는 투르즈의 아카데미 콩쿠르에 시가 입상을 한 것을 계기로 형 아베르와 함께 낭만주의 운동에 공헌한 잡지 ‘문학수호자(Conservateur Litteraire)’를 창간하였다.


1820년대에는 전통적인 형식인 ‘서정 단시(Les Odes)’를 발표하여 성공하고, 고전주의 아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를 중심으로 젊은 시인들과 화가들은 ‘세나클(Cénacle/ 뜻을 같이하는 문학가, 예술가의 모임)’을 형성하여 위고는 사실상 낭만주의자 지도자가 된다.


그는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날 무렵부터 약 13년간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경향이 짙은 서정시를 포함한 많은 걸작을 남겼다. ‘가을의 나뭇잎(Les Feuilles d'Automne, 1831)’, ‘황혼에 대한 노래(Les Chants de crepuscle, 1835)’, ‘마음에 대한 소리(Les Voix interieures, 1837)’, ‘빛과 그림자(Les Rayons et les Ombles, 1840)’, 희곡 ‘왕은 즐긴다(Les Roi s'amuse, 1832).’ 등을 발표 하였으며 특히 소설 작품으로는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노트르담 드 파리(Notre-Dame de Paris, 1831)’가 있고 또한 4권으로 이루어진 유명한 서정 시집 ‘뤼 블라(Ruy Blas, 1838)’등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시에서 개인적 감정이나 심정을 표현 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자 했다. 그는 시인은 말없는 민중에 대한 목소리를 시로써야 하며, 민중의 선두에 서서 지도자처럼 앞장을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1843년부터 10년간 위고 삶은 연극 ‘성주(Buraves 1843)’공연 실패와, 장녀인 레오폴딘이 사고로 목숨을 잃어 실어증에 걸리며 힘든 여정의 삶을 살았고, 이 시기 펜을 놓고 정치활동을 하며 삶에 대한 방향을 모색하였다.

▲ 고아 소녀 코제트. 1862년 초판본에 수록된 에밀 바야르의 삽화.

 

1851년 루이 나폴레옹 쿠데타를 반대하여 19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였다. 망명 생활동안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를 반대하는 내용의 ‘정벌 시집(Les Châtiments, 1853)’ 딸과의 추억과 철학적 사상이 담긴 ‘정관 시집(Les Contem-plations, 1856)’,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 1852)’등을 발표 했으며 그 외 몇 편의 소설과 시집 및 희곡도 썼다.


1870년 보물전쟁에서 패배한 나폴레옹3세가 몰락하자 파리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귀국했으며 귀국 후에도 창작 활동은 계속되었다. 1881년 2월 26일, 위고의 80세 생일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군중이 그의 집을 찾아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한 위고는 8월 31일에 유언장을 썼다. “신과 영혼, 책임감. 이 세 가지 사상만 있으면 충분하다. 적어도 내겐 충분했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죽을 것이다. 진리와 광명, 정의, 양심, 그것이 바로 신이다. 가난한 사람들 앞으로 4만 프랑의 돈을 남긴다. 극빈자들의 관 만드는 재료를 사는 데 쓰이길 바란다.(...)내 육신의 눈은 감길 것이나 영혼의 눈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을 것이다. 교회의 기도를 거부한다. 바라는 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단 한 사람의 기도이다.”


2년 뒤 그는 위 유언장을 더욱 짧게 고쳐 썼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5만 프랑을 전한다. 그들의 관 만드는 값으로 사용되길 바란다. 교회 추도식은 거부한다. 영혼으로부터 기도를 요구한다. 신을 믿는다.” 1885년 5월 18일에 위고는 폐렴으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22일에 파리에서 사망했다. “검은 빛이 보인다.”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날 밤 파리에는 천둥과 우박을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6월 1일에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졌고, 200만 명 인파가 뒤를 따르는 가운데 그의 유해는 팡테옹에 안장되었다.1885년 5월 22일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감하였다.

1850년 후의 낭만주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 소설에서는 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가 대두되었고, 시에서는 고답파를 거치며 상징주의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문학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며 19세기를 살아온 긴 세월 동안 수천 편의 시를 쓰고 모든 장르의 작품들을 발표한 위대한 시인, 위대한 극작가, 위대한 소설가, 위대한 사상가였고 또한 위대한 투쟁가이기도 했다. 한때 그의 목소리는 프랑스 민주주의 양심이며 감정과 희망의 목소리였으며 그의 박애주의, 인도주의 사상은 19세기 후반에 전 유럽 사회에 빛을 밝혀주었다.

Ⅱ. 생각 확대하기

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불쌍한 사람들)』
젊은 시절부터 사회 고발 소설을 구상했던 위고는 1845년부터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가 16년 만에 망명지인 건지 섬에서 탈고했다. “단테가 시에서 지옥을 그려냈다면, 나는 현실을 가지고 지옥을 만들어내려 했다.” 집필 당시에는 제목이 『레 미제르(Les Misères, 비참함)』였지만, 나중에는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불쌍한 사람들』로 바뀌었다. 주인공 이름 역시 원래는 ‘장 트레장’(Jean Trejean)이었지만, 나중에는 ‘장 발장’(Jean Valjean)으로 바뀌었다.

1. 줄거리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던 무렵 장 발장은 홀로 된 누이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울부짖는 어린 조카들의 참당한 광경을 그대로 볼 수 없어 한 조각 빵을 훔치다 체포되어 5년 형을 받는다. 복역 중 장 발장은 누이와 조카들의 굶주림이 걱정되어 탈옥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형별만 누적되어 19년이라는 긴 세월을 교도소에서 보낸다.


형기를 마친 후 교도소 생활에서 해방 되어 알프스 산 밑 작은 소도시 디뉘 거리에 나타난다. 그는 누더기 같은 허름한 옷차림, 피곤에 지친 모습으로 여인숙과 음식점, 가정집 등을 전전하나 이미 그가 전과자라는 소문이 나돌아 아무도 그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려 하지 않는다. 교도소에서 조금씩 모은 약간의 돈이 있음에도 매정하게 내쫓긴 것이다. 심지어 개집에서도 사나운 개에게 쫓겨나고 만다. 더 걸을 수도 없는 상황이 되자 ‘나는 개보다도 못한 신세로구나!’ 탄식하면서 성당의 돌로 만든 의자 위에 쓰려진다.


그때 지나가던 사람이 일러준 성당 사제관 문을 두드려 미리엘 주교로부터 따뜻한 음식과 쉴 곳을 제공받는다. 처음으로 따뜻한 음식과 깨끗한 시트가 깔린 침대에서 쉴 수 있었지만 순간적인 충동을 이기지 못하여 사제관의 은접시를 훔쳐 달아나다 경찰에게 잡혀온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미리엘 주교가 경찰에게 은접시는 그에게 준 것이라 하여 위기를 벗어난다. 미리엘 주교는


“이것을 가져가라, 그리고 정직한 인간이 되어마오. 네 영혼은 내가 사서 하느님께 바쳤다.”고 말하면서 나머지 은촛대까지 얹어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무쇠같이 단단하고 용광로 같이 끓어오르던 장 발장의 증오심과 반항적 기질은 녹아 없어지고 변화된 인간으로 부활하게 된다. 하지만 반성의 눈물을 흘리고 미리엘 주교 집을 나온 장 발장은 다시 유혹에 빠져 가난한 소년이 가지고 있던 은전 한 닢을 도둑질하게 되고 도둑질 한 그 순간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통곡 한다.


이후 2년여 세월이 흘렀다. 장 발장은 이름을 마드레느라 고치고 과거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게 되며 노력 끝에 공장을 세우고 노동자에게 많은 급여를 주며, 학교와 병원을 짓는 등 사회사업에 힘을 쏟게 된다. 시민들의 존경을 받게 된 마드레느는 시장으로 추대되어 가난한 시민들을 구제하고 보호한다.


그의 공장 여공 중에 팡틴이라는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공장에 취직하기 위하여 어린 딸 코제트를 테나르디 부부에게 맡기나 그들은 코제트를 학대하면서 팡틴 부인의 급여를 양육비로 몽땅 빼앗아 간다. 딸의 양육비를 벌기 위해 매춘부로 몸을 팔게 된 그녀는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마드레느 시장에게 구출된다.


마드레느는 코제트도 구해 줄 것을 약속하나 불행히도 장 마르티이유 사건이 일어나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장 마르티이유라는 노인이 앞서 장 발장이 소년의 은화를 훔친 진범으로 몰려 재판을 받게 된 사건이었다. 이 사실을 안 시장 마드레느는 아무 죄도 없이 교도소로 가야 하는 노인을 생각하고 고민하게 된다. ‘시장의 지위와 영광을 가지고 행복한 생활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장 발장임을 밝히고 벌을 받을 것인가’ 마음속으로 양심과 싸우던 그는 법정에서 자신이 진범이라고 밝힌다. 이 충격으로 팡틴 부인은 숨을 거둔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투옥된 장 발장은 코제트를 구출하기 위해 작업장에서 교묘히 탈출하여 테나르디 집에서 혹사와 학대받고 있던 코제트를 구출하여 파리 교외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쟈베르 경감에게 추적 당하게 되어 옛날 자신이 도와준 포슐르방 노인의 도움으로 수도원에서 일하게 되고 코제트는 수도원 학교에서 공부하게 된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는 왕당파와 공화당파가 세력을 다투고 있었다. 공화당파 당원인 마리우스 퐁메르시 청년은 공원에서 만난 코제트를 사랑하게 된다. 포슐르방 노인이 죽은 후 장 발장은 코제트를 데리고 수도원을 떠난다.


1833년 6월 5일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 중 장 발장은 쟈베르 경감의 목숨을 구해준다. 끝까지 추적을 거듭하면서 장 발장을 체포하려던 원칙주의자인 쟈베르 경감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장 발장에게 깊은 감동을 느껴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춘다.


장 발장은 폭동 진압으로 중상을 입고 쓰러진 마리우스 퐁메르시를 등에 업고 하수도를 통해 도피한다. 시가전도 끝나고 마리우스 퐁메르시 상처도 회복되어 코제트와 마리우스 퐁메르시는 결혼한다. 늙고 병든 장 발장은 두 사람의 행복을 빌면서 목숨을 거둔다.


“너희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아! 빛이 보인다. 나에게 더 가까이 오려므나 나는 즐겁게 숨을 거둘 수 있다.”

2. 휴머니즘 문학의 최고 걸작


문학은 파괴된 인간성을 복원하고, 기득권을 위한 제도나 폭압적인 권력을 고발하고, 억울하게 희생되어가는 사람들을 대변해왔다. 즉, 가난한 자와 약한 자로부터 인간에 대한 고귀한 가치를 발견하여 그들이 겪는 고통과 고단함을 통해 인간은 숭고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존재, 신으로 부터 사랑받는 고귀한 존재임을 상기시켜 준다.


또한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이 기득권층을 위한, 물질 획득이 목표가 아니라 인간 영혼 속에 들어있는 자유와 평등, 조건 없는 사랑, 헌신적인 휴머니즘을 강조한다. 이는 살아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근원이며, 가치 있는 삶으로 사회의 균열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활력을 넣어주는 원천이 된다.


이러한 작품으로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디킨스 『위대한 유산』, 톨스토이 『부활』이 있다. 이들 작품은 사람에게서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로 사람으로부터 방황하고 좌절한 영혼이 구제받아 행복과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휴머니즘의 승리를 나타내고 있다. 지위와 관계없이 사람이 중요하다는 휴머니즘에 대한 개념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상생의 평화와 복지를 실현시키려는 박애사상을 뜻한다.


그러나 프랑스대혁명 시기 ‘라 브리’ 마을의 날품팔이 노동자 장 발장이 누이동생과 조카 와 살면서 겪는 생활고 끝에 빵 한 조각을 훔치다 체포되어 5년형의 선고 받아 형을 살게 되는 사회는 결코 정상적인 사회라 할 수 없다.


교도소는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아가며, 심한 육체노동을 강요한다. 육체가 갇히면 정신도 함께 갇히게 되어 극심한 고립감에 빠지게 된다. 이때 장 발장은 남은 가족의 생계를 걱정한 나머지 목숨을 건 탈옥을 시도하다 붙잡혀 형은 19년으로 늘어나게 된다. 1815년 형기를 다 채우고 교도소에서 나와 사회에 북귀하나 중년이 된 사내,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면서도 자신을 파멸로 이끈 사회에 대해 뼈에 사우치는 분노와 증오심을 품은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만인은 신 앞에 평등하다면 억울한 사람은 생겨나지 않아야 한다. 사회가 정의롭지 않다면 사람은 도둑질하게 되어있다. 맹자는 “생계수단이 든든해야 마음도 든든해진다(恒有産 恒有心 항유산 항유심)”하다고 했다. 이러한 기본적인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제2, 제3 장 발장은 생겨날 것이다.


때문에 휴머니즘 운동은 중요한 것이다. 사회악이라고 규정한 사건에 대해 발단 원인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살펴보고 반성과 성찰 없이 처단, 격리, 구금하는 방법은 옳은 방법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표 소설이『레미제라블』이다. 빅토르 위고 장편소설『레미제라블』 뜻은 ‘불쌍한 사람들’이다. 힘없는 불쌍한 사람들은 인류가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다. 때문에 혁명은 위기 때마다 사람들을 불러 보았다. 프랑스 대혁명은 부유한 지배층과 가난한 서민층의 빈부격차가 심하게 되어 사랑과 자비가 사라진 자리에 불신과 갈등이 들어와 첨예하게 대립되던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다. 상대적인 박탈감이 크면 클수록 휴머니즘은 사라지고 극단적인 위화감과 괴리가 자리 잡아 사회가 불안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파란만장한 한 인간의 이야기가 『레미제라블』이다.



▲ 영화 <레미제라블> 스틸컷

 



Ⅲ. 생각정리하기

1. 장 발장의 ‘노블레스 오블리제’
초기 로마 왕과 귀족들은 평민보다 앞서 솔선수범과 절제된 행동으로 국가의 초석을 다졌다. 특히 포에니 전쟁 때에는 전쟁세를 신설, 재산이 많은 원로원들이 더 많은 세금 부담을 감수했다. 그들은 제일 먼저 기부를 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수레에 돈을 싣고 국고에 갖다 바쳤다. 이것을 본 평민들도 앞 다퉈 세금을 내게 됐다.


끊임없는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이 나자 전시국채를 발행, 유산계급과 원로원 의원 및 정부요직에 있는 사람들만 구입토록 했다. 평민들에겐 전비 부담을 요구하지 않은 것이다.


또 평민들보다 먼저 전쟁터에 나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 같은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미덕은 중세와 근대 사회에서도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의 표본으로 간주됐다.


한 사회의 상층부가 이렇게 솔선수범하는 것을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 한다. 프랑스어에서 파생한 이 말은 ‘고귀한 신분에 따른 윤리적 의무’를 뜻한다. 경제적 부와 사회적 위세를 독점하는 만큼 이들은 이에 대한 윤리적 의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란 상층집단의 규범적 태도이자 전략이다.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윤리적 덕목과 부의 사회적 환원을 강조해 왔으며, 이것이 다름 아닌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을 이뤄왔다


빅토르 위고 소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서민 출신 주인공 장 발장이 살아가는 방식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유럽에서는 소설 속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주로 상류층 자식들이 입학하는 영국 최고의 명문인 이튼스쿨의 학생들은 전쟁이 나면 앞장서서 전쟁터로 달려가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한 학급 전체가 전쟁터에서 전사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2. 쟈베르 경감의 법지상주의(法至上主義)

國無常强無常弱 奉法者强 則國强 奉法者弱 則國弱(有度)
국무상강무상약 봉법자강 칙국강 봉법자약 칙국약(유도)

“항상 강한 나라도 없고 항상 약한 나라도 없다. 법을 받드는 것이 강하면 강한 나라가 되고, 법을 받드는 것이 약하면 약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法不阿貴 繩不撓曲 法之所加 智者弗能辭 勇者弗敢爭 刑過不避大臣 賞善不遺匹夫 故矯上之失 詰下之
법부아귀 승부요곡 법지소가 지자불능사 용자불감쟁 형과부피대신 상선부유필부 고교상지실 힐하지
邪 治亂決繆 羨齊非 一民之軌 賞善不遺匹夫 故矯上之失 詰下之邪 治亂決繆 羨齊非 一民之軌 莫如法
사 치란결무 선제비 일민지궤 상선부유필부 고교상지실 힐하지사 치란결무 선제비 일민지궤 막여법
屬官威民 退淫殆 止詐僞 莫如刑 刑重則 不敢以貴易賤 莫如法 屬官威民 退淫殆 止詐僞 莫如刑 刑重則
속관위민 퇴음태 지사위 막여형 형중칙 부감이귀역천 막여법 속관위민 퇴음태 지사위 막여형 형중칙
不敢以貴易賤 法審則上尊而不侵 上尊而不侵則主强 而守要 故先王貴之而傳之 人主釋法用私 則上下不
부감이귀역천 법심칙상존이부침 상존이부침칙주강 이수요 고선왕귀지이전지 인주석법용사 칙상하부

“법은 귀족을 봐주지 않는다. 먹줄이 굽히지 않는 것과 같다. 법이 시행됨에 있어서 智者도 이유를 붙일 수 없고 勇者도 감히 다투지 못한다. 과오를 벌함에 있어서 대신도 피할 수 없으며, 선행을 상줌에 있어서 필부도 빠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윗사람의 잘못을 바로 잡고, 아랫사람의 속임수를 꾸짖으며, 혼란을 안정시키고 잘못을 바로 잡으며, 例外를 인정하지 않고 공평하게 하여 백성들이 따라야 할 표준을 하나로 통일하는 데에는 법보다 나은 것이 없다. 관리들을 독려하고 백성들을 위압하며, 음탕하고 위험한 짓을 물리치고 속임과 거짓을 방지하는 데에는 형보다 나은 것이 없다. 형벌이 엄중하면 귀족이 천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못하며, 법이 힘이 있으면 임금은 존중되고 침해받는 일이 없다. 임금이 존중되고 침해받는 일이 없으면 임금의 권력은 강화되고 그 핵심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므로 옛 임금들이 이를 귀중하게 여기고 전한 것이다. 임금이 법을 버리고 사사롭게 처리하면 아래 위의 분별이 없어진다.” “법은 귀한 사람이라 해서 아부하지 않고, 먹줄은 굽은 곳이라 해서 굽혀 긋지 않는다.”는 말이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 즉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비자

3. 자유와 평등의 관계(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
근대 이전의 시대에는 인간의 불평등이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사회 그 자체의 근거를 제공하는 우주론의 일부로까지 생각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제시한 대표적인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인데, 그는 “자유민과 노예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노예상태가 노예에게 정당하고 바람직한 것은 명백하다. 마찬가지 이유로 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한쪽이 더 우수하고 다른 한 쪽이 열등하며, 한쪽이 지배하고 다른 한쪽은 지배 받는다”고 적고 있다. 인간의 불평등을 이렇게 설명하는 경우에는 인간의 불평등이 자연적인 동시에 신이 제시한 우주질서의 일부라고 생각하여, 불평등을 개선하거나 불식시킬 어떠한 노력도 할 수 없음이 자명하다.


루소는 인간에게 두 가지 불평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인 불평등이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나이, 건강, 체력, 신장, 정신능력, 감각 등의 차이를 통해서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일종의 약속에 의거하여 사람들의 합의에 의해 정해지거나 적어도 허용되는 것으로서, 사회적인 불평등 또는 정치적인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반하면서 누리고 있는 여러 가지 특권과 이권, 남보다 많은 재산을 차지하거나, 남보다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거나, 남보다 많은 사람을 자신의 권위에 복종시키는 것 등을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불평등 중에서 루소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불평등이다.

4. 민주주의 원리인 자유와 평등
자유와 평등은 민주주의 핵심 요소로, 민주 사회에서 개인 간 상호 관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개념들이다. 자유와 평등을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상호 보완하면서 민주주의를 끌고 나가는 요소로, 이 두 요소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는 성립되기 어렵다.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란 각 개인이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자신의 욕구에 따라 삶의 조건들을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만일 이러한 자유가 제한되면 보람 있는 삶을 실현할 가능성은 그만큼 위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모든 개인과 집단이 자신들의 욕구 실현만을 주장하거 다른 사람들의 욕구 실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갈등과 충돌만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나아가 각자가 무제한적인 자유를 주장하는 사회에서는 상호간의 다툼 때문에 실제로는 욕구를 실현하기도 어렵게 되고 만다. 따라서 민주주의 아래에서의 자유 경쟁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제약은 사회 구성원, 다시 말해 모든 개인이나 집단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며, 결코 선별적이거나 차별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 출처 : 서유석, 『자유와 평등은 양립할 수 있는가』

Ⅳ. 논제 찾아보기
사회와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는 큰 원칙은 법치이다. 빅토르 위고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보듯 쟈베르 경감은 피도 눈물도 없는 법치 맹신주의자다. 그는 법에 살고 법에 죽는다. 그에게 정의는 오직 합법과 권위밖에 없다. 모든 위법은 부정의(不正義)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은접시를 훔친 장 발장에게 은촛대까지 얹어준 관용을 베푼 미리엘 주교와 크게 대비된다. 법치가 아닌 사람이 목적이라는 문제의식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쓰시오.

 

 

 

 

영화와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제작사인 영국 워킹타이틀의 팀 베번 공동 회장

 

씨네21은 창간 15주년 기념으로 워킹타이틀에 대한 특집기사를 다루었다. 왜 이제서야 워킹타이틀? 인가 했더니 영국관광청과 내일여행, 그리고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한국 라이선스 뮤지털 제작사 메지스텔라의 협조를 통했다고 한다. 그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워킹타이틀의 규모확장은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엄청난 성공덕분이라고 한다. 영화사 '워킹타이틀'이 한물 간게 아닌가... 라는 의구심을 품고 있을 때, 워킹타이틀은 다른 곳에서의 엄청난 성공으로 훨씬 커져있었다.

 

 

"우리는 새로운 재능들을 발견하고 소개하면서 성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스티븐 프리어스, 리차드 커티스, 휴 그랜드, 코엔 형제, 폴 그린그래스, 조 라이트, 로완 앳킨스, 에드가 라이트

 

 

"퀄리티야말로 모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심하면, 디벨로프먼트 과정은 그날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시나리오의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전부 재검토의 대상이다."

 

 

 

한국에 있는 거의 모든 영화제작자들이 롤모델로 삼던 시절이 있었다.

로맨틱코미디의 명가로 불리며, <러브 액추얼리>를 찍어내던 시절의 워킹타이틀이었다.

로맨틱코미디에서의 성과를 뒤로 하고, 워킹타이틀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그리고 다시 10년.

워킹타이틀에서 '영국'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아졌다. 이제 워킹타이틀은 할리우드 제작사이다.

다만, 할리우드에서 뭔가 좀 색깔이 다르다 싶은 영화가 만들어질 때 그 앞엔 워킹타이틀 로고가 뜬다.

이것은 성과일까? 아니면 실패일까? 개인적으로는 지금의 워킹타이틀이 조금은 아쉽다.

 

Selected History (from 씨네21)

2010 WTTV(Woking Title TV) 런칭 - NBC 유니버설과 제휴

2005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런칭 - 대성공

1999 폴리그램, 유니버설에 인수

1992 폴리그램 지원 선언 - 레드클리프 퇴사 & 에릭 펠너 영입

1984 설립 (팀 베번 & 사라 레드클리프) - 뮤직비디오와 저예산 TV영화로 시작. 주목받았으나 재정난은 지속

"시나리오 개발작업에 우리 시간 5%를 할애했다. 감독을 찾는 작업도 5%를 차지했다. 나머지 90%

의 시간에는 모자라는 영화제작비를 조달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Selected Filmography

 

1983년 탄생한 워킹타이틀은 지난 30여년 동안 120편의 작품을 제작했다. 연평균 4편. 놀라운 수치다.

 

2010 Green Zone --- 폴 그린그래스와의 2번째

2009 A Serious Man --- 코엔형제

2009 The Soloist --- 조 라이트와의 3번째

2009 State of Play --- 스릴러이되 흥행은 되지 않는 워킹타이틀표 정치스릴러 이미지 굳히기

2009 The Boat That Rocked --- 리차드 커티스의 근황

2008 Frost/Nixon

2008 Burn After Reading --- 코엔형제

2008 Definitely, Maybe --- 오랜만에 로맨틱 코미디. 예전같지 않아진 감

2007 Elizabeth: The Golden Age

2007 Atonement --- 조 라이트와의 2번째

2007 Hot Fuzz

2006 United 93 --- 폴 그린그래스 소환

2005 Pride & Prejudice --- 조 라이트의 발굴

2005 The Interpreter --- 워킹타이틀표 정치스릴러의 시작. 할리우드 같은 스펙터클에 할리우드보다 무거운.

2004 Bridget Jones: The Edge of Reason

2004 Wimbledon

2004 Shaun of the Dead

2003 Love Actually --- 워킹타이틀표 로맨틱코미디 역량의 총집결

2002 About a Boy --- 닉 혼비 라인 두번째 가동

2001 Bridget Jones's Diary

2000 Billy Elliot

2000 High Fidelity --- 닉 혼비 라인 가동

1999 Notting Hill --- 워킹타이틀표 로맨틱코미디의 대표작

1998 Elizabeth --- 영국이야기의 성공적인 할리우드 입성

1998 The Big Lebowski --- 코엔형제와의 4번째 작품

1997 Bean --- 워킹타이틀의 중심축 리차드 커티스-로완 앳킨슨 라인의 등장

1996 Fargo --- 코엔형제와의 3번째 작품

1995 Dead Man Walking --- 팀 로빈스와의 두번째 인연. 미국 인디영화 제작사로서의 워킹타이틀

1995 French Kiss

1994 The Hudsucker Proxy --- 코엔형제와의 2번째 작품

1994 Four Weddings and a Funeral --- 워킹타이틀의 이름을 알린 '영국식 로맨틱코미디' 성공작

1992 Bob Roberts

1991 Barton Fink --- 코엔형제와의 오랜 인연 시작

1984 The Man Who Shot Christmas --- 최초의 워킹타이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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