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

절망에 맞서서.

by 아프로뒷태 2012. 7. 2.

귀향

이윤영(인디고잉 편집장)

지난 4년, 저는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그것 때문에 사랑하는 인디고 서원 활동을 멈출 수 없었던 제 욕심 때문이었지요.
매주 부산을 내려가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을
셀 수 없을 만큼 받았는데,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산에서 좋은 동료들과 의미 있는 작업들을 공유하며
얻는 에너지로 낯선 도시인 서울에서의 생활을 견디고 버틸 수 있었지요.
거꾸로 서울에 올라가는 것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in 서울’을 꿈꾸는 이 땅의 수많은 수험생들과는 다르게
지난 4년, 저는 ‘out 서울’을 늘 갈망했습니다.

그 이유를 떠나는 이제야 고백하는 것이지만,
서울은 제게 두려움과 공포의 공간이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꿈꾸고 일구던 가치가 없는 공간,
또 학벌사회를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저 자신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을 일으키기도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 비해 너무나 많은 것들이 갖춰져 있지만
그 혜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이기적인 공간이었고,
동시에 그 혜택에서 완전히 배제된 이들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무감각의 도시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두려웠던 것은
제가 옳다고 믿어왔고 추구하고 싶었던
아름답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이 불가능한,
오로지 개인의 이익을 획득할 수단이 되어버린 학교입니다.
학교 그 자체가 두려웠다기보다,
저 또한 그 분위기에 휩쓸려버릴 것 같은 위기에서 느껴지는 공포였지요.

학교를 떠나는 지금, 저의 대학생활이 실패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다른 어떠한 이유도 없이
제가 불편함과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은 배척한 채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진 것으로 개인의 능력이 평가되는 경쟁구조,
그로 인해 초래된 심각한 이기적 개인주의,
보이지 않고 완벽히 설명되거나 증명되지 않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들에 가치를 매기지 않는 물질 만능주의 등
지겹고 식상하기까지 한 이름의 문제들은 여전히,
너무나도 명백히 우리 사회에 존재합니다.
처음엔 그것들에 분노하기도 하고, 변화에 대한 의지가 끓어올랐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의 힘은 훨씬 강했습니다.
점점 그 위협이 피부로 느껴지자 그러한 모순의 물살에
휩쓸릴 것이 우려된 나머지 저는 어리석게도 한 발자국 떨어져
그와는 상관없는 사람처럼 살고자 했지요.
마치 저 혼자 결백한 사람인 것처럼 문제들을
방관자의 위치에서 비판하거나 심지어 무관심으로 일관하기도 했습니다.

분노하게 하는 것, 상처를 주는 것, 두려움과 공포를 주는 것을
외면하면 변화에 대한 희망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래서 서울에서의 제 생활은 점점 무의미한 것이 되어 갔지요.
지난 몇 개월, 부산을 떠나 서울로 가는 기차에 오르는 순간부터
극도의 무기력함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삶의 활기조차 발견할 수 없는 그곳은 지옥과도 같았지요.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무의미하기 때문에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경험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하지만 저의 이 수치스러운 경험에 비추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유행처럼 번지는 ‘위로’의 테마를
한번 진중하게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것들,
예를 들어 성적을 잘 받기 위해 기계처럼 공부해야 하는 교육 시스템,
생산과 창조라는 인간 본성의 발현과는 무관한 성과위주의 노동,
돈이 없으면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자본주의 체제.
그것들에 눈감은 채 그 상처를 덮으려는 시도들이라면,
당장 그만두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삶이 행복하길 원하지만,
행복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에는 게으르고 비겁한 경우가 많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그를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문제들이 있고,
그것에 대해 끈질기게 희망할 수 있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노력 없이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려 하거나 회피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몇 가지 사회적 조건에서 성공할 수는 있어도,
'삶'이라는 본연의 임무에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정의롭지 않은 것과 그로 인해 상처입고 고통받는 존재들을 보면
느껴지는 분노 혹은 도덕적 책임감은 인간의 본성일 것입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느껴진 ‘도덕 충동’을
우리는 어떻게 해소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불편한 진실과 그로 인해 느껴지는 마음의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혹시 애써 노력하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지그문트 바우만은 고통의 감각을 잃지 마라 경고합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도덕 충동을 상처 입은 서로에게
물건을 사주는 것으로 대신하지 말라,
정녕 우리는 운동화나 장난감 따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길 원하는가!”



“물론 여러분이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일자리를 구하고 결혼을 해서 자식도 낳아야겠지요.
부자가 되어 우리 사회가 성공이라 규정하는 ‘성공’을 거두기도 할 겁니다.
재산을 모으고 사회적 지위와 권위도 쌓아갈 겁니다.
하지만 ‘좋은 삶(good life)’은 그런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좋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하든,
교사가 되든, 사회운동가가 되든
사업가, 변호사, 시인, 과학자 등 무엇이 되든,
여러분의 자식, 아니 모든 아이를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여러분의 삶을 조금이라도 투자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세대는 전쟁 종식을 강력히 요구하고,
여러분의 세대는 역사에서 아직 이뤄내지 못한 일을 해내고,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 짓는 국경을 지워버리길 바랍니다.”
- 하워드 진, 스펠만 대학교 연설 <절망에 맞서서Against Discouragement>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