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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향기

글을 쓰는 사람들은 거품을 쓰고, 사람들은 돈을 주고 그 거품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

by 아프로뒷태 2011. 12. 19.

 

갈수록 진심이 무색해지는 세상이 되는 것 같다.

호소력이 짙은 글이 과연 무엇인가?

글은 현상, 그 자체 일뿐이다.

글이 수단이 된 시대가 되었다.

글이 돈벌이나 자본의 수단이 되면서 글이 담는 진심은 사라지고 있다.

 

요즘 들어 부쩍 글을 쓰는 일에 무기력함을 느낀다.

진심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낳는가?

자신의 만족과 행복?

자신을 홍보하고 과시하기 위한 수단?

 

글을 쓰는 학과에 가서 글을 읽고 쓴 지 십 년이 지났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고, 라면집 개 삼 년이면 라면을 끓인다고 한다.

글 쓰는 학과에 간 지 십 년이 지났건만, 글 쓰는 것이 무섭다니.

이 무슨 때 아닌 두려움인가?

 

추운날, 골방에 처박혀 밥죽을 끓여먹고 책을 보다 심란한 마음에 영화 한편을 보았다.  

영화가 마음을 흔들어주던 순간도 있었다.

그때는 영혼이 열정적이었고 맑았다.  하지만 여기저기 치이고 나서 지쳐 떨어졌다.

다시 영화로 인해 활력을 되찾고 기쁨을 가져볼까 기대하며 보았다.

이준익 감독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가 언제였던가?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았던 그때였나? 이 맘때쯤 나는 그와 연극을 보았다. 조명이 밝아올 무렵, 이준익 감독이 익살스럽게 웃으며 제작진과 사진을 찍었다. 플라스틱의 재밌는 안경을 쓴 이준익 감독의 벌린 입사이로 드러난 하얀 이가 아직도 생생하다. 이준익 감독에 대한 기억은 거기까지 였을까? 아니다. 작년까지 회사 대표는 이준익 감독 영화사의 수입에 반도 안 되는 회사의 사정을 두고 사원들에게 들으란 듯 투덜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술장사를 하면서 욕심은... 어디 상업 산업과 예술 산업이 비교할 만 하던가? 비교할 대상끼리 비교해야지. 라고 생각하며 못들은 척 했다.

 

이준익 감독의 <구름을 버서난 달>을 보고 씁쓸함을 느꼈다.

잘 만든 영화인데, 관객의 수준이 영화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해 흥행에 실패했구나.

대사, 한마디마다 기똥이 차다. 곱씹어 생각할 여지를 두는 대사, 그것이 글의 참맛이다.

그 대사의 참맛에 힘이 들어가 있고 사상이 들어가 있다.

왕은 무능하고, 신하들은 동인, 서인으로 나누어져 내실보다 명분만 내세운다. 왜놈이 처들어오고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마당에 신하들의 입에서 하는 말이라곤, 도망가자이다. 조선시대나 500년이 지난 2011년이나 형국은 똑같다. 변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추악한 것도 인간이다. 아름다움은 인간이 가진 가장 이상적인 사상일 뿐이다.

백성들은 국가가 지켜주지 못하는 나라의 평안을 위해, 왜놈의 침입을 막기위해 대동사상을 내세우고

농기구가 아닌 칼을 들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백성들이 분노하면  칼을 드는 것은 마찬가지인가 보다. 하지만 백성이 칼을 들고 나면 그 후론 너무 슬프다. 비극도 단체의 비극이다. 

 

어지러운 세상이다. 진정한 소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가식과 허물이 판을 친다. 진정성을 가장한 페이크 다큐가 사람의 진심을 흔든다. 그것에 글이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 요즘 형국이다. 소설을 쓰면서 보석같은 소설을 읽는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올해는 진정으로 가슴치며 읽은 소설이 없다. 이것이 올해의 아쉬움이다.

 

가끔 '글을 쓰는 사람들은 거품을 쓰고, 사람들은 돈을 주고 그 거품을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 ' 라는 생각이 든다. 김성동 소설가가 한 말이 참말로 이해가 간다. 30년을 쓰고도 문학을 잘 모르겠다는 말, 그건 정말 몰라서가 아니다. 뻔히 알면서도 30년동안 쓴 글이 세상에게, 사람에게, 진실을 호소하지 못해서 일게다. 병든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해서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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