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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향기

윤리학적 상상력, 신형철 강의 기록

by 아프로뒷태 2011. 12. 2.

제1강 opening : '서사윤리학'이란 무엇인가

자료 1) 문학의 윤리란 무엇인가

서영채, 『문학의 윤리』(문학동네 2005) 중에서

① 탈이념 시대에 문학은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이 책의 원고들을 쓰는 동안 나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 대답이었다. 그러나 윤리라니, 이는 문학이 함께 놀기에 너무 장엄한 말이 아닌가. 윤리에서 윤(倫)이란 순서를 뜻한다. 통상적으로, 정해진 순서를 잘 지키는 것을 두고 윤리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윤리 앞에 문학이 오는 순간 사정은 정반대가 된다. 정해진 순서를 의심하고 부정하고 뒤집어보는 것, 그것이 문학의 본성이고 윤리다. 이념이 집단 주체의 것이라면 윤리는 개별 주체의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세계의 빛나는 모습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 이념의 일이라면, 윤리는 우리 욕망의 심연을 투철하게 응시하고자 하는 시선의 산물이다. 1990년을 정점으로 하여 우리 문학의 관심은 점차 이념에서 윤리를 향해 이행해왔다.

② 탈이념의 공간에서 문학은 오로지 윤리적이 됨으로써만 자신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 윤리란, 말 잘 드는 새 나라의 어린이가 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지요. 참과 거짓이 싸울 때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이런 장중한 목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단지 내 편일뿐이라고 단호하게 대답하는 것, 그것은 충분히 윤리적입니다. 그가 거부하는 것은 참과 거짓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장엄하게 구분하고자 하는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하듯이, 부시를 재선시킨 애국적인 미국 시민들과는 다르게, 애국심을 죽이고 민족을 부정하고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의 이익과 전통과 가치체계를 의심에 찬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 주어진 선과 악의 경계에서 단호히 그 경계선에, 자기 자신의 편에, 문학 편에 서는 것, 그것은 충분히 윤리적입니다. (…) 그 어떤 국적과 성별과 종교와도 무관한 보편적 입법자의 자리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 그것은 충분히 윤리적입니다.


자료 2) 우리 시대 윤리학의 세 가지 원천

신형철, 「우리가 '소설의 윤리'를 말할 때 너무 많이 한 말과 거의 안 한 말」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중에서

[……] 먼저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있다. "나는 정서를 신체의 활동 능력(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으로 이해한다."(『에티카』, 3부, 정의 3) 정서(affectus)란 무엇인가. 그것은 신체의 변용이거나 그 변용에 대한 관념이다. 그렇다면 '어떤 변용인가'가 '어떤 정서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변용의 어떤 적합한 원인이 될 수 있다면 그 경우 나는 정서를 능동으로 이해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수동으로 이해한다."(같은 곳) 능동적인 변용이 있고 수동적인 변용이 있다. 나 자신이 원인이 될 때 신체는 능동적인 것으로 변용되며 외부에 원인이 있을 때("외부원인의 관념을 동반할 때") 신체는 수동적인 것으로 변용된다. 수동적 변용이 낳는 정서를 따로 구별하여 정념(passio)이라고 부른다. 정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내가 내 변용의 원인이 되는 것이 좋은(윤리적인) 삶이다. 그래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기쁨의 윤리학이 될 수밖에 없다."(질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2장, 강조는 인용자)

그리고 레비나스의 윤리학이 있다. 내가 나 자신의 변용의 "적합한 원인"이 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그것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 세계에는 타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쁨의 윤리학'은 세상의 눈물을 닦지 못한다. 눈물이 있는 곳을 향해, '나(동일자)'라는 좁은 세계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러나 그 빠져나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주체의 자발성이 아니다. "동일자를 질문에 부치는 일은 타자에 의해 발생한다."(『전체성과 무한』, 영어판, 43쪽) 어떻게? 고통 받고 있는 타자의 '얼굴'이 나에게 무언가를 호소할 때 거기에 응답(response)하는 방식으로, 당신에 대한 책임(responsibility)을 내가 떠맡는 방식으로 그 일은 가능해진다. 그럴 때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나가 아니다. '나'라는 존재가 질문에 부쳐지는 순간, 그와 더불어 '나'는 비로소 '주체'가 된다. 뒤집어 말하면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이는 주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는 얘기다. 주체 이전에 먼저 타자가 있고, 존재론 이전에 우선 윤리학이 있다. "타자의 현존에 의해 나의 자발성이 질문에 부쳐지는 일을 우리는 윤리라고 부른다."(같은 곳) 그래서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타자의 윤리학이다.

마지막으로 라캉의 윤리학이 있다. 일반적으로 윤리학이 추구한다고 간주되는 것은 '이상(ideal)' 혹은 '선(good)'이다. 그러나 그런 윤리학들은 속임수가 아닐까 하고 라캉은 묻는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 혹은 선한 것들은 과연 '누구에게' 선한 것인가 말이다(이종영, 『욕망에서 연대성으로』, 백의, 1998 참조). 라캉은 이상의 윤리학과 선의 윤리학이 유토피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잘못된 믿음(상상적 윤리)이거나 혹은 기만적인 규칙(상징적 윤리)이 아닐까. 그러므로 "윤리에 대한 질문은 [상상계나 상징계가 아니라] 실재와 관련하여 인간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라는 관점에서 제기되어야 한다."(『세미나 7:정신분석의 윤리』, 영어판, 11쪽)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재와의 조우에 의해 우리에게 강제된 물음 속에서 윤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알렌카 주판치치, 『실재의 윤리』, 도서출판b, 359쪽) 실재와의 조우, 강제된 물음, 그때 우리의 위치, 이런 것들이 핵심이다.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일이 문득 일어난다("실재와의 조우"). 그와 더불어 '나'의 삶이 고장 나고 '세계'라는 현실이 붕괴한다. 그러나 그 고장과 붕괴 속에 진실이 있다면?("강제된 물음") 그 진실을 포기하지 않고 붙드는 일("우리의 위치")이 윤리적인 것이다. 그래서 라캉의 윤리학은 진실의 윤리학이다. [……]


자료 3) 소설이란 무엇인가

신형철, 「만유인력의 소설학」(『몰락의 에티카』) 중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 특정한 '세계'에서 특정한 '문제'를 설정하고 특정한 '해결'을 도모하는 서사전략이다. 그러니 세계의 현실성, 문제의 현실성, 해결의 현실성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입체적인 시공간에서 특히 의미 있는 한 부분을 도려내어 서사의 무대로 삼을 경우 '세계의 현실성'이 확보되고, 그 세계 안의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고투하면서 당대의 공론장에서 기꺼이 논의해볼 만한 의제를 산출해 낼 때 '문제의 현실성'이 확보되며, 한 사회가 완강하게 구조화하고 있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좌표를 흔들면서 '문제의 현실성'을 심화·확장시키는 특정한 선택지를 제출할 때 '해결의 현실성'이 확보된다. 소설의 현실성은 위 세 단계에서 따로 또 같이 관철되거나 기각될 수 있다.
예컨대 최인훈의 『광장』은 어떤가. 『광장』은 당시의 남한과 북한을 소설적 '세계'로 선택하면서 동서냉전 시대의 보편성과 한반도 분단체제의 특수성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게 되었고(세계의 현실성), '남(밀실)이냐 북(광장)이냐'라는 민감한 '문제'를 설정하여 당대의 공론장에 뜨거운 의제를 던졌으며(문제의 현실성), 남과 북 모두를 거부하고 자살을 택하는 이명준의 '선택'을 옹호함으로써 매카시즘의 광풍을 뚫고 당대의 이데올로기 좌표를 근저에서 흔들었다(해결의 현실성). 의미 있는 세계, 민감한 문제, 전대미문의 해결이라는 세 요소가 이 작품 안에 공존한다. 이것이 『광장』의 당대적 '현실성'이었다.


자료 4) 다시, 소설이란 무엇인가

신형철, 「'윤리학적 상상력'으로 쓰고 '서사윤리학'으로 읽기-장편소설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단상」
(『문학동네』 2010년 봄호) 중에서

절단, 파열, 단절 - 단편소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단편소설은 '최소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천 개의 고원』의 저자들은 콩트와 단편을 비교하면서 단편의 본질을 규정한다. 콩트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단편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구축된다는 것이다. 콩트가 '발견'의 형식이라면 단편소설은 '비밀'의 형식이다. "피츠제럴드를 보자. 그는 천재적인 콩트 작가요 단편소설 작가이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무슨 일어났던 것일까?'라고 자문할 때 그는 영락없는 단편소설 작가다. 오직 그만이 이 물음을 이런 강렬함의 지점까지 가져갈 줄 알고 있었다." 그럴 듯한 얘기다. 그런데 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단편소설이 재료를 다루는 특별한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대목이다. 그들에 따르면 소설의 재료는 '삶의 선(線)'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 단편소설에는 고유한 발생방식이 있지만 또한 모든 사람들과 모든 장르에 속하는 이 선들을 조합하는 고유한 방식도 있는 것 같다."(371쪽) 요컨대 단편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과 더불어 발생하고 '삶의 선'들을 조합하는 고유한 방식을 통해 씌어진다. 그 '고유한 방식'이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삶이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먼저 이해해 두는 것이 좋겠다. 이를 위해서 다시 피츠제럴드의 통찰력에 의존하기로 하자.

피츠제럴드의 자전적 에세이 「the crack-up」은, 성공의 절정에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적이 있는 그의 삶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될 만한, 다음과 같은 단호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물론 모든 삶은 붕괴(breaking down)의 과정이다." 어떤 방식으로 붕괴하는가. 붕괴를 가져오는 타격(blow)을 피츠제럴드는 두 종류로 구분한다. "외부에서 오는 (혹은 오는 것처럼 보이는) 거대하고 갑작스러운 타격"이 있고 "안에서부터 오는 또 다른 종류의 타격"이 있다(289쪽). 전자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재해, 죽음, 파산 등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후자는? 피츠제럴드의 통찰력이 여기에서 빛난다. "손을 쓰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을 때, 당신이 어떤 측면에서는 다시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을 때, 그 때가 되고 나서야 당신은 그것을 느끼게 된다."(같은 곳) 여느 통찰력들이 그렇듯이 우리는 이런 문장을 읽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마치 접시에 금이 가듯 조금씩 진행되는 균열이 있는데 대개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 그러다가 이제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는 어느 날에, 문득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자신이 사십대가 되었을 때 받으려고 주문해 두었던 요리가 아님"(298쪽)을 깨닫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자기 자아의 붕괴 혹은 처형의 원치 않는 참관인이 되어있음"(299쪽)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남은 삶을 어찌해야 하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 고비를 이겨냈던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살아남은 이들은 모종의 깨끗한 단절(break)을 이루어낸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중요한 말이고 탈옥(jailbreak)과는 상관이 없다. 탈옥한 이들은 대개 새 감옥으로 가게 되거나 옛 감옥으로 되돌려 보내질 것이다. (…) 깨끗한 단절이란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다. 과거를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307쪽)

이제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삶은 타격들로 인해 붕괴한다. 먼저 외부로부터 오는 타격이 있다. 이것의 특징은 그 여파가 한 번에 다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해와 죽음과 파산이라는 타격의 결과는 이제 끝이다 싶을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어느 순간 삶의 흐름을 무자비하게 끊어버리는 이 타격을 '절단'이라고 부르자. 그리고 내부로부터 오는 타격이 있다. 이것의 특징은 타격이 서서히 진행된다는 것,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 타격의 결과를 깨닫게 된다는 것에 있다. 이 타격을 '파열'이라고 부르자. 그러나 절단이나 파열과 같은 타격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위의 인용문이 말해주듯 우리의 삶에는 '단절'들도 존재한다. 아홉 걸음을 걷고 나서 한 걸음을 더 걸으면 대개는 열 걸음이 되겠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아홉 걸음 째에 낭떠러지 앞에 선다면 그때 마지막 한 걸음은 우리를 추락하게 하거나 날아오르게도 할 것이다. 그 이후에 우리는 더 이상 걸을 수 없다. 과거를 말소시켜버리는 그런 단호한 단절도 삶에는 있다. 이제 삶이 선들로 구성돼 있다는 말이 뜻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다. 절단이 긋는 선(시작은 알되 끝은 알 수 없는), 파열이 긋는 선(끝에 이르러서야 시작을 알게 되는), 그리고 단절이 긋는 선(기왕의 삶으로부터 탈주하는). "모든 경우에 피츠제럴드는 우리에게 우리를 가로지르며 '하나의 삶'을 구성하는 세 개의 선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절단선, 파열선, 단절선."

다시 단편소설의 본질에 대한 물음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단편소설은 최소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었고 그 물음을 단편소설이 삶의 선을 조합하는 고유한 방식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갔다. 이제 단편소설은 절단선과 파열선과 단절선 모두를 효과적으로 조합할 때 성립된다고 말하면 될까?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요구일 것이다. 피츠제럴드에게서 세 개의 선을 발견해 낸 이들의 관점에 반드시 부합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나름대로 이런 최소한의 정의를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단편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고 삶에서 하나의 파열선을 발견해내는 작업이라고 말이다. 뒤집어 말하면 '삶을 가로지르는 아주 미세한 파열선 하나'를 포착하기만 해도 단편소설은 성립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불과 50매가 채 안 되는 레이먼드 카버의 「정자」, 황정은의 근작 중에서 특별하게 카버의 어떤 정수를 탁월하게 체현하고 있는 「야행」, 어떤 거대한 사건도 거창한 행위도 없이 진행되는 줌파 라히리의 가족소설 등은 어째서 훌륭한 단편소설이 될 수 있었는가. 우리 삶을 내부에서부터 천천히 갉아먹는 파열선이 그 소설들에 있기 때문이고, 그를 통해 우리가 이미 늦은 뒤에야 깨달았을 어떤 파열들을 미리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단선과 단절선에 비해 파열선을 포착해내는 일은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단편소설은 무엇보다도 뛰어난 관찰력에서 탄생한다고 말해야 옳다. 장편소설의 경우는 어떠할까.


사건, 진실, 응답 - 장편소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소설이 대답이 아니라 질문의 형식이라는 것은 널리 통용되는 규정이다. 단편소설의 경우 확실히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장편소설의 경우라면 더 적극적인 규정이 가능할 것이다. 왜 장편소설은 단편소설의 열배 이상의 분량으로 쓰일 필요가 있는가. 언젠가 이렇게 적었다. "[장편]소설이란 무엇인가. 특정한 '세계'에서 특정한 '문제'를 제시하고 특정한 '해결'을 도모하는 서사전략이다." 이 문장의 배후에는 장편소설이 그저 하나의 길고 재미있는 이야기인 것으로 자족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장편소설은 최소한의 경우 스토리텔링이이지만 최대한의 경우 의제 설정이자 사회적 행동일 수 있다. 그런 일이라면 굳이 소설일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반문도 물론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장편소설은 다른 담론형식들과 마찬가지로 의제를 제기하고 해결을 시도하되 독자적인 방식으로 그 일을 한다. 소설은 한 사회를 지배하는 여러 종류의 판단체계―정치적 판단, 과학적 판단, 실용적 판단, 법률적 판단, 도덕적 판단 등등―를 무력화하는 '문학적 판단' 기능을 작동시킨다. 그 기능은 어떤 지배적인 판단체계로도 파악할 수 없는 진실이 있음을 고지하면서 사건을 특정 판단체계의 권력으로부터 회수하여 모든 것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사유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옮고 그름에 대한 통념적 규정을 뒤흔든다는 점에 주목해 그 문학적 판단체계를 '윤리학적 상상력'이라 명명할 수 있다. 이제는 개별 작품에 내장돼 있는 그 윤리학적 상상력을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이 필요해 보인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장편소설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1995)는 우리의 구상에 유용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소설은 세 개의 부(部)로 나눠져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소설이지만 각 부별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두기로 하자. 먼저 1부. 1958년 독일의 어느 소도시에 15세의 소년 미하엘이 우연히 스무 살 연상의 한나 슈미츠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에는 특이한 규칙이 존재한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이것이 우리 만남의 의식(儀式)이 되었다."(49쪽) 한나를 안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정 분량의 책을 그녀에게 읽어주어야만 했다. 그리고 어느 날 한나는 떠나고 이 짧은 사랑은 미하엘에게 거대한 물음표로 남는다. 그리고 2부. 8년 뒤 법대생이 된 미하엘이 재판정에서 한나를 발견한다. 그녀는 2차대전 당시 유태인 수용소에 근무했고 지금은 유태인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한나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재판을 지켜보면서 미하엘은 수년 전에는 미처 눈치 채지 못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한나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141쪽) 이 사실을 밝히면 한나의 혐의는 상당부분 경감되지만 그녀는 법정에서 끝내 함구하고 미하엘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다. 마지막으로 3부. 이제 중년의 신사가 된 미하엘은 복역 중인 한나에게 15살의 자신이 그리했듯 책을 읽어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준다. 덕분에 그녀는 옥중에서 글자를 익혀 미하엘에게 편지를 쓰기에 이르지만 그는 그녀의 편지에 회신하지 않는다. 18년 후 출옥을 앞두고 한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수용소 생존자들에게 자신의 돈을 전달해 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미하엘에게 남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이 소설은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이 하나둘 사망하면서 포스트 홀로코스트 세대(극중 미하엘의 세대)가 앞 세대의 비극을 이해하는 데 겪는 어려움을 다룬 작품으로 간주되지만 그 외에도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윤리학적 아포리아를 여러 층위에 내장하고 있어서 (특히 전범 세대를 상징하는 극중 한나에게 작가가 취한 모호한 태도는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열띤 논쟁을 낳았거니와) 이를 충실히 다루려면 긴 논의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이 소설 자체에 있다기보다 이 소설의 3단 구성이 어떤 보편적 전형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 있다. 각 부가 구조적으로 맡고 있는 역할을 보라. 1부는 인생의 어느 순간에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일이 일어나는데 당사자가 그 일의 의미를 미처 이해하기도 전에 그 일이 종결되고 마는 어떤 상황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단계에서는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1부). 2부에서 그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그 자신이 과거에 겪었으나 미처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사건'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이 단계에서는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다(2부). 2부에서 3부로 이어지는 긴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이 알게 된 그 진실로부터 끊임없는 추궁을 받는다. 그는 더 이상 그 진실을 알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는 진실과 관련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이 단계에서는 주체가 진실에 응답한다(3부). 앞서 우리는 윤리학적 상상력을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더 리더』가 따르고 있는 '사건-진실-응답'의 3단 구성을 윤리학적 상상력으로 씌어지는 장편소설의 기본 문법으로 상정해볼 수 없을까.

바디우가 그의 『윤리학』(1993)에서 제시한 주요 개념과 도식들도 참고할 만하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책은 일반윤리의 원칙들을 제시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윤리는 존재할 수 없다. '추상적인' 주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체는, 상황 속에서, 주체가 되도록 소환되는 방식으로만 구성된다고 그는 말한다. 그 단계는 이렇다. 어떤 일이, 현재 '주어져 있는 것'(what there is)으로는 도무지 규정할 수가 없는 어떤 일이 벌어진다. "잉여적으로 부가되는"(55쪽) 그 일을 '사건'이라고 하자.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 방식을 결정하도록 강요한다."(54쪽) 물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사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받아들이면서 '사건에 따라' 상황을 사고하고 새로운 존재방식을 발명해낼 수도 있다. 후자와 같은 태도를 '충실성'이라고 부르자. 사건에 대한 충실성 속에서 하나의 '진리'가 탄생하고 그 진리를 끝까지 고집하려고 노력할 때에만 우리는 '주체'다. "우리는 충실성의 담지자, 즉 진리 과정의 담지자를 주체라 부른다."(56쪽)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윤리를 논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진리의 과정을 지속시키는 원리를 '진리의 윤리학'이라고 부를 것이다."(58쪽) 이상의 도식이 『더 리더』의 구조와 공명하는 데가 있음을 알아채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제 우리는 앞서 추출한 '사건-진실-응답'의 3단계 구조를 '진리의 윤리학'(바디우)의 풍부한 함의를 포괄할 수 있도록 다듬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시각을 '서사윤리학'이라고 잠정적으로 지칭하자.


1)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370-371쪽.
2) 스콧 피츠제럴드, 「무너져 내리다」, 『위대한 개츠비』, 이만식 옮김,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9, 부록, 289쪽. 이후에는 본문에 쪽수만 표시함. 원문(
www.esquire.com/features/the-crack-up)을 참조하여 번역 수정. 이하 동일.
3)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앞의 책, 382쪽
4) 지금 거론한 작품들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레이먼드 카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정영문 옮김, 문학동네, 2005 ; 황정은, 「야행」, 『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 ; 줌파 라히리, 『그저 좋은 사람』,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 2009.
5) 졸고, 「만유인력의 소설학-김영하, 강영숙, 박민규의 장편을 통해 본 '소설과 현실'」,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24쪽.
6)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최근 억대의 상금을 걸고 시행중인 서너 종의 장편소설 공모들이 깃발처럼 내세우는 '콘텐츠(이야기)로서의 소설'이라는 관념에 대해 그것은 소설의 최소정의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덧붙이고 싶다. 소설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맞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소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다. 그 최소기능을 우리는 존중하지만 그것이 장편소설의 미래라는 식의 주장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스토리텔링 이상의 것을 할 능력이 있는 소설가들이 우리 곁에 있는 한 말이다.
7)"이 세계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판단들'이 있습니다. 과학적·법적·도덕적·미학적·실용적 판단 등등. 그러나 그 어떤 기준으로도 손쉽게 판단할 수 없는 사건들이 있지 않았을까. (…) 그래서 문학이 필요합니다. 그 어떤 불완전한 기준으로 난도질하지 않고 사건의 진실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그 사건이 오로지 그 자체의 기준으로만 판단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세간의 숱한 판단들이 무력해지는 지점에서 문학은 비로소 판단을, 그러니까 '문학적 판단'을 시작합니다."(『주간한국』 2009년 6월 24일) 편리한 예로 최인훈의 『광장』을 놓고 생각해 보면, 이명준의 제 3국행 선택은 정치적 판단 혹은 실용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 볼 여지가 있겠으나 작품 전체를 다시 읽게 만드는 그의 돌연한 자살만큼은 온전히 [작가의] 문학적 판단의 몫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사례들의 목록은 얼마든지 길어질 수 있다.
8) 국역본은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김재혁 옮김, 이레, 2004. 본문에서 인용할 땐 쪽수만 적는다.
9) 국역본은 『윤리학』, 이종영 역, 동문선, 2001. 본문에서 인용할 땐 쪽수만 적는다

 

 

 

 

 

 

 

 

 

제2강 윤대녕 - 진정성(authenticity)의 윤리학
 
▶ 지난 강의 요점

?1991년과 더불어 문학과 정치가 아니라 문학과 윤리를 사유할 수 있게 됐다 (grand narrative → ethical turn)
?1997년 IMF 이후 신자유주의 시스템 구축, 윤리는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됐다 (전이 구조 변동 및 MB 정부 등장)
?윤리학적 상상력이 필요, 그것을 통해 문학의 종언 주장을 유예시킬 수 있다 (단편소설과 장편소설 : 문법 비교)


▶ 작품 읽기 1) 윤대녕, 「은어 낚시 통신」

?전환기의 문제작 : 후일담을 넘어서
?인간은 은어다 : 생리학적 플롯의 출현
?작품의 구조 분석 : 이쪽과 저쪽의 대립


▶ 진정성(authenticity)의 정의/용례

1) 사전적 의미
Certificate of Authenticity 정품인증서
The authenticity of the statement 성명의 진위여부
2) 예술
In philosophy of art, "authenticity" describes the perception of art as faithful to the artist's self, rather than conforming to external values such as historical tradition, or commercial worth. (영화 <시>의 경우)
3) 심리학
A common definition of "Authenticity" in psychology refers to the attempt to live one's life according to the needs of one's inner being, rather than the demands of society or one's early conditioning.
4) 실존주의 철학
In the twentieth century, Anglo-American discussions of authenticity often center around the writers of a few key figures associated with existentialist philosophy, where the term originated. (특히 하이데거의 Eigentlichkeit의 경우)
5) 경영학
제임스 챔피James Champy는 『착한 소비자의 탄생』(2009)에서 진정성을 새로운 기업 경쟁력의 원천으로 제시

▶ 진정성의 윤리학(ethics of authenticity)이란 무엇인가
찰스 테일러, 『The Ethics of Authenticity』(1992)의 국역본
『불안한 현대사회』(이학사) 중 3장 '자기 진실성의 원천들'

진정성의 윤리는 비교적 새로운 것으로 근대 문화에만 고유한 것이다. 그것은 18세기 말에 생겨났으며 개인주의의 초기 형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진정성 개념의 발전은 인간이 도덕관념을 천부적으로 부여 받은 존재라고 생각했던 18세기의 사유에서 그 출발점을 찾고 있다. (…) 옳고 그름을 이해하는 것은 결단코 무미건조한 산술적 계산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정서·느낌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이란 어떤 의미에서 마음속의 목소리인 셈이다. 진정성의 개념은 [외재적인] 도덕의 강조를 이런 마음속의 생각 쪽으로 이동시키는 일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논의에서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를 파악하려면 우리는 이것을 근대 이전의 도덕관들과 유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근대 이전의 도덕관념들에 의하면, 완전한 인간 조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근원―하느님, 말하자면 선의 이데아―과의 접촉이 필수적이라고 생각되었다.

원천이 내 마음속에 있다는 이런 관념은 물론 하느님 혹은 이데아와 인간존재의 연결고리를 배제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히려 그것들에 도달하는 인간의 적절한 길로 간주될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밖으로 나가지 말라, 돌아와 너 자신 속에 머물라. 내향적 인간에게 진실은 깃들이나니. Noli foras ire, in teipsum redi ; in interiore homine habitat veritas")

장 자크 루소(1712~1778), 『고백』,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우리의 도덕적 구원은 우리 자신들과의 진실한 도덕적 접촉의 회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또한 루소는, 나에 관한 것이 외부의 영향들에 의하여 형성되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그것을 결정할 때 비로소 나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자기 결정의 자유 관념도 함께 제시. 사회계약론과 연동됨.)

헤르더(1744~1803). 인간 각자는 자기 고유의 척도를 가지고 있다. 18세기 말엽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인간들 사이의 다양한 차이가 도덕적 의미와도 연관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결코 다른 사람의 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방식으로 내 인생을 살아가도록 소명을 받은 것. 내가 나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하면 나는 내 인생의 요점을 잃어버리는 것.

나 자신의 본연성과 독자성. 그것만이 내가 명백히 제시할 수 있고 찾아낼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것을 명백히 표현해 냄으로써 나는 또한 내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본래적으로 내 자신에 속한 잠재성을 실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 진정성의 윤리학과 90년대 한국문학
황종연, 『비루한 것의 카니발』(문학동네 2001) 중에서 발췌

원론
진정성의 파토스는 개인으로 하여금 그의 삶이 사회적으로 인정된 원칙과 일치하는가가 아니라 그 자신의 자아, 정념, 신념과 일치하는가를 묻게 한다. 따라서 그것은 개인 스스로 그 자신의 삶의 방식이나 모양을 만들려는 열정을 포함한다.

진정성은 실정적으로 정의된 어떤 행위나 상태를 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부정의 용어이다. 진정성은 진정성이 부재한다는 인식 속에, 진정성을 추구하는 행동 속에 존재한다.

진정성의 추구란 자아에 잠재된 창조적, 초월적 충동을 표현하는 것이자 자아를 종결 없는 생성에 맡기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올바로 묻는다면 그것은 결국 현재의 나를 넘어서라고 나 자신에게 명하는 것이다.

진정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개인의 자기 창조적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다. 진정성을 추구하는 가운데 기성의 윤리적 질서와 갈등이 빚어지는 것은 불가피한 사태이다. 기성 윤리가 허위를 강요하거나 자아를 왜곡하는 압제적 기율이라고 판단되는 상황에서는 진정성의 이름으로 그것에 거역하는 각종 일탈과 범죄가 찬양되기도 한다. (장정일에서 백민석까지)

소설은 다른 어떤 문학, 예술 형식보다도 진정성 추구를 다루는 데에 적합하다. 우선 진정한 자아가 욕망되고 생성되는 장소인 개인의 내면을 소설보다 효과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매체는 없다. 이른바 '투명한 마음'을 보여주는 서술기법을 다양하게 갖추어 갖고 있는 소설은 진정한 삶의 경험에 특권적으로 다가간다. (cf. 장 스타로뱅스키Jean Starobinski, 『투명함과 장애물 transparency and obstruction』)

90년대의 경우
개인을 그 내부로부터 이해하려는 노력은 문학의 일반적인 특징이지만 그것은 특히 90년대에 들어 새로운 강세를 얻었다고 판단된다. 지난 수세대의 한국문학에서 정체성의 정치를 주도한 민족주의나 민중주의는 개인의 특수한 내면적 경험의 분방한 탐험에 자리를 내주었다. 90년대 문학에 어떤 우세한 모럴이 있다면 그것은 관습적 정체성들에 순종하지 않는 것, 개인 자신에게 진실해지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진정성의 모럴이 그것이다.

윤대녕의 경우
신경숙과 함께 90년대 내면성의 문학을 대표하는 윤대녕은 특히 그의 소설의 원점에 진정성의 이상을 갖고 있는 작가이다. 그의 작가활동 초기에 발표된 단편들에서 그가 문제 삼은 실존적 위기의 핵심은 개인들 각자가 사회적으로 통제된 인간관계의 그물에 갇혀 자기 자신과 유리된 삶을 살고 있다는 데에 있다.

윤대녕이 그의 소설에서 보여준 진정성의 추구는 문학적으로는 낭만적 의식과 연관되어 있다. 그 진정성의 추구가 이루는 자아의 서사는 자아와 세계 사이의 원초적 일체성의 상실과 회복으로 요약되는 낭만주의 문학의 토포스에 충실하다.

▶ 작품 읽기 2) 윤대녕, 「천지간」
▶ 진정성의 사회학 :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문학동네 2001)
1장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에서 발췌
authenticity 개념의 재규정
- 그리스어 authentikos = eauton(자기)+theto(정립) : 자유롭게 자신을 정립한다
- 역어 ①자기진실성 ②진정성(眞情性) ③진정성(眞正性)
- authenticity에는 자신을 정립하는 주체적이고 내면적인 태도와 그런 태도가 실현될 수 있는 공적 지평에 대한 관심, 즉 상호주관적 책임의식이 동시에 내포되어 있으므로 ③이 번역어로 적합

진정성의 사회학

진정성의 윤리는 루소와 헤르더 이후의 낭만주의에서 시작되어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적 감성 속에 구현되어 있는 도덕적 기획으로서…근대적 주체의 자기 통치 기획의 한 양태이다.

서구의 경우 진정성의 문화, 진정성의 정치, 진정성의 윤리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공유되어 인정받게 된 것은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청년 대학생들의 '신좌파' 운동을 계기로 해서이다.

한국사회에서 이런 진정성의 에토스는 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형성되어 소위 386세대의 세대의식의 핵심을 구성하였고, 90년대 문학과 문화의 영역에서 더욱 심화되어 중요한 가치로서 부각…

80년대적 진정성을 '도덕적' 성격이 강했고 그리하여 개인의 충분한 성찰에 근거한 사회운동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책무나 책임의식이 선행하면서 개인들을 도덕적으로 동원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90년대의 진정성은 오히려 '윤리적' 성격을 더 강하게 띠면서 내면의 공간, 자의식의 공간, 사(私)소설적 공간이 문화적으로 확충되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진정성은]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가 총체적 구조조정의 국면에 진입하면서부터 사회의 주도적 가치로서 급격하게 퇴조… 이런 과정에서 한국사회는 소위 포스트-진정성 체제로 진입한 듯이 보인다.
20세기 후반에 세계적인 규모로, 그리고 특히 97년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본격화되고 있는 소위 '인간의 죽음'이라는 문제는 그리하여, 인간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과 해답의 공간, 인간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의 비인간과 투쟁하는 공간, 인간의 인간됨에 대한 싸움의 공간이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투쟁이 소멸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종언 이후의 새로운 인간의 모습이 바로 동물과 속물이다. 동물과 속물은 포스트-진정성 체제의 문제적 형상들이다.

▶ 총정리 : 윤대녕의 문학 세계의 변화
신형철, 「은어에서 제비까지, 그리고 그 이후」
_윤대녕, 『대설주의보』(문학동네, 2010) 해설 중에서

90년대
『은어낚시통신』(문학동네, 1994)은 1994년 3월 28일에 1판 1쇄를 찍었다. 1990년에 등단한 신인작가 윤대녕의 첫 책이었다. 그리고 1994년은 윤대녕의 해가 되었다. 물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대중적 성공 여부를 기준으로 말한다면 1994년은 공지영의 『고등어』와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해라고 해야 한다. 소위 '후일담 문학'의 성공이 절정에 달한 해였다. 그러나 혁명의 시대인 80년대를 회고하는 그 작품들에는 미네르바 올빼미의 준엄한 사후성찰이 아니라(이를 보기 위해서는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이 출간된 2000년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해질녘의 감상주의가 과도했던 것도 사실이어서, 그 해는 후일담 문학에 대한 피로와 환멸이 극에 달한 해이기도 했다. 앞의 두 작품에 쏟아진, 정당한 비판도 없지 않았으나 대개는 졸렬한 인신공격에 가까웠던 함량미달의 부정적 언사들은 그 피로와 환멸의 볼썽사나운 배출이었을 것이다. 그람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옛 것은 죽어가고 있지만 새 것은 태어나지 않고 있는' 전환기여서 그런 일도 일어났다. 한국문학에는 새로운 의제(agenda)가 필요했다. 누군가 와야만 했고 바로 그때 윤대녕이 도착한 것이었다. 비로소 한국문학은 후일담의 시대와 작별하고 '90년대 문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1994년은 윤대녕의 해였다.
당시의 열기를 알 길이 없는 2010년의 독자들에게 위와 같은 말들은 수상쩍어 보일 것이다. 이 작가가 열어젖힌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90년대적인 것'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었나. 한 평론가가 이 작가로부터 문학사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다고 판단한 취지의 대강은 이렇다. 사회역사적 상상력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체질화된 한국문학에서 '인간은 은어다'라고 말하는 생물학적 상상력이 등장했다는 것. 소설이란 무릇 인간을 살고 인간을 쓰는 작업이어서 그것은 특정한 인간학의 원인이자 결과일 수 있다. 그 인간학의 차원에서 발생한 변화를 문학사의 전환점으로 삼는 것은 수긍할 만한 처사다. 그렇다면 이 작가가 '은어'의 인간학으로 추구한 것은 무엇이었나. 15여 년 전 그의 인물들은 술에 취해 흐트러지면 "귀소하고 싶어요. 목숨을 걸고! / 영원회귀? 좋지, 거기서 우리는 죽고 우리의 아들딸들이 되어 다시 시작하는 거야!"(「은어」)와 같은 식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귀소는 "다시 시작"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침이 오기까지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내 살아온 서른 해를 가만가만 벗어던지며, 내가 원래 존재했던 장소로, 지느러미를 끌고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은어낚시통신」) 저 유명한 「은어낚시통신」의 결말부다. 막연하나마 신생(新生)을 도모하려는 의지가 있었기에 이런 결말도 가능했다. 요컨대 '신생을 위한 귀소'가 저 인간학의 모토였다.

물론 얼마간은 추상적이고 다소간은 낭만적이다. 그러나 이 추상성과 낭만성은 그것대로 90년대적인 것의 한 풍경이었다. 구체제가 몰락하고 그 자리를 천박한 신흥 부르주아들이 차지하기 시작했을 때 19세기 유럽의 젊은 예술가들은 '댄디즘'이라는 '정신의 귀족주의'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와 유사하게도 '90년대의 페르소나'라 해도 좋을 윤대녕의 인물들은 80년대의 정치적 이념과 집합적 이상이 쓸려나간 자리에 부박한 포스트모던 문화가 밀려들자 개개인의 내면으로 자발적 망명의 길을 떠난다. 이를 두고 문학의 신화적 자질에 민감한 한 평론가는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목가"라 평했고(남진우), 문학의 윤리적 자질에 예민한 한 평론가는 80년대를 사로잡은 공동체의 집합적 이상 대신 "개인의 내면적 진실"에 충실할 것을 지향하는, 루소 이래의 "진정성의 윤리(ethics of authenticity)"를 거기서 읽어냈다(황종연). 이는 지금도 여전히 규범적 가치를 인정받는, 당시 윤대녕 소설에 대한 가장 자상한 독법이자 최대치의 평가였다. 이들이 '시원'이나 '내면'의 추상성과 낭만성에 눈 감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한계가 윤대녕의 것이라기보다는 그 시대 자체의 것임을 온당하게 전제했을 뿐이다.

반론을 제기하는 목소리들이 없지 않았으나 대개가 윤대녕 소설의 상징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한 것은 그런 맥락 때문이기도 했다. 가기는 가야겠으나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는 시대였다. '내면' 혹은 '시원'은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장소'가 아니라 '미래의 시간'에 더 가까운 것으로 이해되었다. 누구도 지도를 제공하지 못하던 때에 빛나는 새 출발의 이미지 하나를 제공하였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었다. 본래 낭만주의는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라 그것이 놓여 있는 맥락에 따라 진보와 퇴행의 가치를 부여받는다. 말하자면 윤대녕의 그것은 90년대 중반이라는 전환기기와 행복하게 만났다. '은어낚시통신'이라는 컬트 집단이 '짐 자무쉬'와 '티베트'와 '롤랑 바르트' 운운하며 그것이 그들의 '헌법'이라 말할 때, 여기에는 최소한, 1991년을 기점으로 영원한 승리를 선언한 자본주의 모더니티와의 '낭만적 긴장'이 존재했다. 80년대를 향한 향수도 90년대로의 투항도 모두 불만스러웠던 이들에게 윤대녕이 권유하는 귀소와 신생은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2010년의 젊은 독자들에게 '존재의 시원'이나 '내면적 진실' 따위의 말들은 구닥다리로 느껴질 공산이 크다. 한국사회가 90년대 후반에 큰 변화를 겪었고 그 변화만큼 윤대녕의 초기 소설들이 우리에게 낯설어졌기 때문이다.

2000년대
그리고 우리는 이태 전에 그의 가장 최근 책인 『제비를 기르다』(창비, 2007)를 읽었다. 많은 사람들이 윤대녕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13년의 세월이 지난 것이다. 그 사이에 적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90년대 초중반에 경박하게 소비되었던 포스트모더니즘은 1997년의 환란(換亂) 이후 허망하게 스러졌고, 그 이후 10년 동안 한국사회는 전지구적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착실히 포섭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이 시스템의 바깥은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이제는 거의 익숙해져버렸다. 말하자면 우리는 자본주의 모더니티와의 긴장을 상실했다. 윤대녕의 최근 소설들에서도 그것을 확인한다. 시스템과의 낭만적 긴장 대신 '생'이라는 불가항력이 소설을 이끈다. 무언가를 바꾸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체념이 소설 곳곳에 자욱하다. 귀소의 모티프가 있으되 그것은 신생을 예감하는 영원회귀의 귀소가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는 수구초심의 귀소다. 서로 다른 두 세계의 교통을 신화적으로 매개하던 동적 상징들('은어', '되새떼', '유성우' 등)이 자취를 감추고 '고래등(燈)'이나 '못 구멍' 같은 정적 상징들이 다만 처연하다. 흔히 저쪽 세계가 보내오는 암호를 체현했던 여성 캐릭터에도 변화가 생겼다. 남녀를 불문하고 윤대녕의 인물들은 이제 병들어 견디고, 견디며 죽어간다.
그러나 이것을 패배주의나 허무주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판단을 끌어내고야 마는 것이 저 책의 힘이다. 다른 생 혹은 다른 세계에 대한 꿈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 자리를 채우는 것은 생의 실상을 향한 차분하고 결연한 직핍(直逼)인데, 그것이 "생의 회한과 허무"(「고래등」)와 비장하게 직면하여 숭고해질 때 그의 최근 걸작들은 독자의 마음에 한 순간 지진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저 책을 통해 그는 초기 소설과는 다른 인간학을 이룩하면서 또 한 번 전성기에 이른 듯 보였다. 「제비를 기르다」의 작부 '문희'나 「탱자」의 '고모'에게서 느끼게 되는 어떤 압도적인 기품이 그와 같은 직핍과 직면의 숭고함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제 성(聖)과 속(俗)이 분별될 수 있다는 미망을 접은 탓일 것이다. '성'은 없다. 있다면 그것은 '속'의 세계 안에서만 가까스로 있다. 그것을 뜻하는 말들이 이를테면 '정화(淨化)'(「탱자」)이거나 '대정(大定)'(「편백나무숲 쪽으로」)이거나 혹은 '무무(無無)'(「낙타 주머니」)일 것이다. 이런 세계를 '범속한 비극'의 세계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태어나 살다 죽는 일들이 비극의 단서가 되고 있기에 그것은 '범속'한 것이며, 모든 종류의 불가피함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이들의 서사라는 점에서 그것은 '비극'이다.

초기 윤대녕의 낭만주의가 그 자체로는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니었듯이, 이 '범속한 비극'의 세계는 그 자체만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비극이 우리시대에 대한 적절한 문학적 응전이 되고 있는지를 챙겨 물어야 한다. 생의 한 측면에 볼록렌즈를 들이대는 경쾌하고 발랄한 이야기들이 최근에 많아졌지만, 근원적인 가치에 대한 일체의 성찰을 모욕하는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오히려 더 많은 비극일 수 있다. 비극은 생의 정면과 직면하지 않으면 씌어질 수 없거니와, 직면 없이 어떤 성찰이 가능할 것인가. 이는 무엇보다도, 미지의 한 여인과의 한 번의 정사로 '저쪽 세계'로 건너갈 수도 있으리라는 식의 믿음을 가졌던 삼십대 초반의 청년작가가 이제 앞으로의 삶에서 결정적인 변화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십대 후반의 중견작가가 되면서 가능해진 일이겠거니와, 소위 90년대에 출발한 문학이 2000년대에 걸어갈 만한 가장 품위 있는 길 중의 하나가 어쩌면 이 어름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더 성숙해진 표정과 보폭으로 윤대녕의 소설은 2000년대 후반을 걸어왔다. 은어에서 제비에 이르는 윤대녕 문학 20년에 대해 나는 대강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제3강 신경숙 - 애도(哀悼)의 윤리학


 ▶ 연보 (밑줄 : 장편)
1985년 등단
1990년 『겨울우화』(고려원 / 개정판, 『강물이 될 때까지』 문학동네 1998)
1993년 『풍금이 있던 자리』(문학과지성사)
1994년 『깊은 슬픔』(문학동네)
1995년 『외딴방』(문학동네)
『아름다운 그늘』(문학동네 / 개정판 2004) 산문집
1996년 『오래전 집을 떠날 때』(창작과비평사 / 개정판, 『감자 먹는 사람들』 2005)
1999년 『기차는 7시에 떠나네』(문학과지성사)
2000년 『딸기밭』(문학과지성사)
2001년 『바이올렛』(문학동네)
2002년 『J이야기』(마음산책) 콩트집
2003년 『종소리』(문학동네)
2007년 『리진』(문학동네)
2009년 『엄마를 부탁해』(창비)
2010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문학동네)

▶ 신경숙의 소설과 더불어 생각해 볼 문제들

애도를 위한 문학 (작가 편에서 / 독자 편에서)
그러나 실패함으로써만 성공하는 애도
에세이에서 단편으로, 단편에서 다시 장편으로
사적 죽음을 공적 죽음으로 만들기

자료 1) 프로이트
프로이트, 「애도와 우울 mourning and melancholy」(1915)
국역본 「슬픔과 우울증」, 프로이트 전집 개정판(열린책들, 2003) 11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에 수록

1) 애도라는 정상적인 감정과의 비교를 통해 우울의 본질을 밝혀보기로 하겠다.
2)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라는 반응에서 공통점. 고통스러운 낙담,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 사랑 능력의 상실, 모든 행동의 억제 등등. 그러나 애도는 병리적인 상황이 아니며 시간이 지나면 극복되리라고 기대되나 우울은 다르다.
3) 애도의 진행과정. "현실성 검사[reality testing 현실 검증]를 통해 드러난 사실은 사랑하는 대상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그 대상에 부과되었던 모든 리비도를 다 철회시켜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된다. (…) 사랑하는 대상에 리비도를 집중시켰던 때의 어떤 기억과 기대가 각기 되살아날 때마다 리비도가 과잉 집중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현실을 존중하는 가운데 리비도의 이탈도 이루어진다."
4) 우울의 경우 애도에는 나타나지 않는 특징이 있다. 자애심의 추락. 자신을 비난하고 처벌을 원하는 태도. 즉 자아의 빈곤 현상이 나타남. "애도의 경우 빈곤해지고 공허해지는 것이 세상이지만, 우울의 경우는 바로 자아가 빈곤해지는 것이다." "애도와 우울을 비교해 볼 때 우울증 환자는 대상과 관련된 상실감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은 자아와 관련된 상실감으로 보인다."
4')또 한 가지는, 우울에서, 상실이 일어난 것은 분명하되 상실의 대상이 무엇인지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잃어버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의 어떤 것을 상실했는지 모를 경우…"
5) "이제 우리는 우울증 증상의 열쇠를 찾은 셈이다. 그것은 바로 우울증 환자들의 자기 비난이라는 것이 사랑의 대상에 대한 비난인데, 그것이 환자 자신의 자아로 돌려진 것이라는 사실이다(동일시). 자기 남편이 자기와 같은 무능한 여자에 매여 사니 얼마나 불쌍하냐고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여자는 사실 자기 남편의 무능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6) 동일시 "어떤 특정인에게 리비도를 집중시키는 일이 한때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냉대를 받거나 그에게 실망을 하게 되면서 그 대상관계가 깨지고 말았다. 정상적인 결과라면 그 대상에게 집중되었던 리비도가 철회되어 새로운 대상에게 전위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여러 가지 다른 조건들 때문에 다른 식의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즉, 저항할 힘을 지니지 못한 대상 리비도 집중은 결국 사라지게 되고, 반면에 자유로운 리비도는 다른 대상을 찾는 대신 자아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자아 속에서도 그 리비도는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아를 포기된 대상과 동일시하는 데에만 기여할 뿐이다. 그래서 그 포기된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에 드리우게 되고, 그때부터 자아는 마치 그것이 떠나버린 대상이라도 되는 듯 어떤 특수한 기관에 의해 대상처럼 취급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상상실은 자아상실로 전환되고, 자아와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갈등은 [자아와] 자아의 비판적 활동과 동일시에 의해 변형된 자아 사이의 분열로 바뀌게 된다.
7) 사디즘 "사랑대상의 상실은 사랑 관계에서 애증병존의 감정이 분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 병리적인 애도는 애도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 대상의 상실에 책임이 있고 또 그렇게 원했다는 식으로 자신을 비하시키는 자기 비난의 형태로 표출된다. (…) 자기징벌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원래의 대상에 복수를 하는 것이고 (…)" "우울증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대상 리비도 집중이 복귀함에 따라 자아가 스스로를 하나의 대상으로 취급하기만 하면, 말하자면 외부세계의 대상에 대한 자아의 원초적 반응을 표현하면서 그 대상을 향해 발산되었던 적개심이 자아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게 되면, 자아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 요약 : 애도는 대상을 떠나보내고 나로 되돌아오는 것이고 우울은 대상이 떠난 뒤에도 나를 대상으로 삼아 그 애증의 드잡이를 계속하는 것이다. 전자는 '정상적'이고 후자는 '병리적'이다.

자료 2) 자크 데리다
애도작업(travail de deuil)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역, 이제이북스, 2007, '용어 해설' 중에서
 
[전략]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Trauer und Melancholia," 1917)이라는 글에서 애도 작업을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리비도를 분리시키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반대로 이러한 정상적인 애도 작업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자아의 일부가 상실된 대상과 동일화될 때, 그리고 자아가 이 자신의 일부를 외부 대상으로 취급할 때 자아는 상실된 대상을 자기 자신의 일부분의 상실로 받아들이게 되며, 여기에서 우울증이 일어나게 된다.
 
데리다의 친구였던 니콜라스 아브라함(Nicolas Abraham, 1919~1975)과 마리아 토록(Maria Torok, 1925~1998/아래 사진)은 […] 비정상적인 애도 작업, 즉 우울증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를 통해 이러한 프로이트의 관점을 수정한다. 이들은 프로이트가 상실된 대상과의 동일화로 간주한 것을, 타자를 자아의 내부에 위치한 일종의 지하 납골당 안에 안치하는 것으로 개념화할 것을 제안하다. 이는 다시 말하자면 자아가 자신의 내부에 "합법적인 묘소"를 마련함으로써 타자의 시신을 안치하고 이를 통해 이미 상실된 타자의 죽음 이후의 삶을 계속 유지시키고, 더 나아가 자신의 동일성을 이 타자가 죽은 이후의 삶과의 동일화로 대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들의 작업의 중요성은 …… 정상적인 애도와 병리적인 애도의 경계를 문제 삼는다는 데 있으며,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자아 또는 주체와 타자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는 데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데리다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이들이 프로이트를 비록한 대부분의 정신분석가들이 동일시했던 입사(introjection)와 합체(incorporation)라는 개념을 분명히 구분하고 이를 정상적인 애도 작업과 실패한 애도 작업, 또는 납골과 각각 결부시켰다는 점이다.
 
▷ Nicolas Abraham et Maria Torok, Le Verbier de l'homme aux loups, precede de fors, Paris: Flammarion, 1976. ▷ Nicolas Abraham et Maria Torok, L'Ecorce et le noyau, Paris: Flammarion, 1987.
 
아브라함과 토록에 따르면 입사는 적절한 상징화 과정을 통해 부재, 간극의 장애를 극복하고 이를 통해 자아를 강화하고 확장하는 데 있으며, 따라서 이는 정상적인 애도 작업과 결부되어 있다. 반면 근원적으로 환상적인 성격을 지니는 합체는 대상의 부재를 상징화 과정을 통해 은유화하지 못하고 이 대상을 탈은유화해서 자아 안으로 삼켜버리며(이른바 식인성 합체), 더 나아가 이를 납골당 안에 안치시키고 이 합체된 대상과 스스로를 동일화한다.
 
데리다는 이처럼 아브라함과 토록이 입사와 합체를 구분하고 납골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비정상적인, 또는 실패한 애도 작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한 점을 높게 평가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구분은 제한적인 의미만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이러한 구분이 정상적인 애도와 병리적인 애도, 또는 성공한 애도와 실패한 애도의 구분을 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애도 작업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상징적·이상적으로 내면화하는 것, 곧 타자를 자아의 상징 구조 안으로 동일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소위 정상적 애도, 성공적인 애도는 타자의 타자성을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타자에 대한 심각한 (상징적) 폭력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데리다가 보기에 애도가 타자에 대한 존중, 타자에 대한 충실한 기억을 목표로 하는 이상, 정상적 애도는 실패한 애도, 불충실한 애도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납골로서의 실패한 애도, 합체는 타자의 온전한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오히려 성공한 애도, 충실한 애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데리다는 이 역시 충실한 애도일 수 없다고 본다. 자아 내부에 타자가 타자 그 자체로서 충실하게 보존되면 될수록 이 타자는 자아로부터 분리된 채 자아와 아무런 연관성 없이 존재하게 되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입사에서보다 더 폭력적으로 타자는 자아와의 관계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이런 분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애도의 필연성 및 불가능성이라는 역설 또는 이중 구속이며, 이는 주체가 근본적으로 식인 주체라는 점을 보여 준다. 곧 타자와의 관계 이전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자아· 주체· 우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 주체· 우리는 항상 이미 타자와의 입사나 합체를 통해 비로소 자아· 주체· 우리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상적 애도라는 관념이 전제하는 것처럼 타자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실패한 애도라는 관념이 전제하는 것처럼 타자의 완전한 합체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자아, 주체의 존재가 항상 이미 타자의 존재, 타자에 대한 애도를 전제한다면, 중요한 것은 타자의 타자성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의 문제,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타인과의 관계, 곧 정의") 타자와 어떻게 정의로운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요약 : 정상적인 애도와 병리적인 애도, 혹은 성공적인 애도와 실패한 애도를 구분할 수는 없다. 애도는 불가피하지만 동시에 불가능하다. 우리는 타자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도 없고 타자와 완전히 합체할 수도 없다.

자료 3) 슬라보예 지젝
슬라보예 지젝,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
4장 「우울증과 행동」 중에서

오늘날의 통념
애도와 우울증에 관해 말하자면, 최근의 지배적인 통념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프로이트는 정상적인 애도와 병적인 우울증을 대립시키고 있다. 우리는 프로이트에 반대하여 우울증의 개념적인 그리고 윤리적인 우선권을 주장해야만 한다. 상실의 과정 속에는 애도 작업을 통해 통합될 수 있는 잔여물들이 항상 남아 있기 마련이며, 가장 궁극적인 충절이란 바로 이 잔여에 대한 충절이다. 애도란 일종의 배신이며 대상을 "두 번 죽이는" 짓이다. 이에 반해 우울증의 주체는 상실한 대상에 대한 자신의 애착을 포기하기를 거부하면서 그 곁을 충실하게 지킨다.'

지젝의 반론
욕망의 대상-원인이 원래부터, 어떤 구성적인 방식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이라면, 우울증은 이 결여를 일종의 상실로 이해한다. 마치 이전에 갖고 있었는데 나중에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 역설적인 것은 결여를 상실로 옮기는 우울증의 이 기만적인 번역이 우리로 하여금 대상의 소유를 주장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을 상실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역으로, 무언가를 상실했다면 이전에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바로 이런 논리 하에 우울증자는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상실한 대상에 고착시키고, 바로 그 상실의 포즈 속에서 그럭저럭 대상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우울증의 책략
우리가 이전에 결코 가져본 적이 없었던, 애초부터 상실된 상태였던 어떤 대상을 소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아직 완전히 수중에 넣고 있는 어떤 대상을 마치 그것이 이미 상실된 것인 양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우울증자는 애도 작업을 완수하는 것에 대한 거부를 그와 정반대의 형식으로, 즉 아직 대상이 상실되지도 않았을 때조차 그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애도를 표하는 거짓 장면을 연출하는 방식으로 하게 된다.

우울증적 연애 관계
에 나타나는 독특한 정취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비록 두 연인이 아직 함께 있고 깊이 사랑하며 서로의 존재를 즐기고 있지만 미래의 이별이라는 그늘이 그들의 관계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까닭에 그들은 다가올 재앙의 장막 아래서만 현재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다가올 행복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통을 감내한다는 표준적인 생각은 여기서 정반대로 뒤집혀서 나타난다.

욕망의 대상과 원인은 다르다
아직 상실되지 않은 대상, 여전히 여기에 놓여 있는 대상에 대한 애도라는 이 역설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 것일까? 이 수수께끼를 푸는 우울증에 대한 프로이트의 정확한 공식 속에 놓여 있는데, 그에 따르면 우울증자는 상실한 대상에서 자신이 무엇을 상실한 것인지 깨닫지 못한다. 욕망의 대상과 원인을 구분한 라캉을 떠올려야만 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욕망의 대상이 단순히 우리가 욕망하는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욕망의 원인이란 그것 때문에 우리가 그 대상을 욕망하게 되는 대상의 어떤 특징이다.

우울증의 재규정
우울증자는 상실한 대상에 고착되어 있어 애도작업을 수행할 수 없는 주체가 아니라, 차라리 대상을 소유하고 있는, 그러나 그 대상을 욕망하게끔 만들었던 원인이 철회되어 효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욕망을 상실해버린 주체이다. 우울증은 대상을 박탈당한, 좌절된 욕망의 극단적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차라리 그에 대한 욕망이 제거된 대상 그 자체의 현존을 대변한다. 우울증은 우리가 마침내 욕망하던 대상을 얻었을 때, 그러나 그것에 실망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 요약 : 우울증이 애도보다 윤리적이라는 주장은 기만적이다. 애초부터 없었던 대상을 마치 잃어버린 것처럼 오도하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라캉을 통해 다시 규정되어야 한다.

 

 

 

 

 

 

 

 

제4강 은희경 - 시니시즘(cynicism)의 윤리학
 
■ 작품연보
1995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부문 당선 「이중주」
1996 『새의 선물』 (1995년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타인에게 말걸기』
1998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1999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그것은 꿈이었을까』 (개정판 2003, 개정판 2008)
2001 『마이너리그』
2002 『상속』
2005 『비밀과 거짓말』
2007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2010 『소년을 위로해줘』(근간)

■ 문학사적 개요
1990년대 중반의 작품 세계에서 2000년대 중반의 작품 세계로
『새의 선물』 『타인에게 말걸기』 ……… 『비밀과 거짓말』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은 하나의 장르다. 1995년 1월의 등단작 「이중주」에서 2005년 1월에 출간된 장편 『비밀과 거짓말』에 이르기까지, 이 장르의 생명력은 10여 년간 완강하였다. 지금 막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삶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었던가를 뒤늦게 깨닫는다. 90년대 중반에 그녀의 소설과 만난 후 우리는 90년대 초반 한국소설이 빠져 있었던 어떤 편향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를 일러 '교술 편향'과 '서정 편향'이라고 부르려 한다. 그녀의 소설은 충분히 지적이었지만 거기에는 소위 지식인 소설의 엄숙과 훈계가 없었다. 읽는 이보다 얼추 반걸음 정도 앞서 가는 그녀의 지성은 상쾌했을 뿐 부담스럽지 않았다. 더불어 그녀의 소설은 충분히 문학적이었지만 거기에는 소위 내성(內省) 소설의 정념 과밀 현상이 해소되어 있었다. 한국소설이 으레 운명처럼 끌고 다닌 눅눅한 감상이 탈수된 자리에 그녀가 복권한 것은 통쾌한 산문정신이었다.
'냉소'와 '위악'이 저 장르의 유전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말들에는 그 유전자의 진화과정이 생략돼 있다. 냉소와 위악은 정주하는 정신의 속 편한 포즈가 아니라 끊임없이 약동하는 정신의 어떤 태세다. 한국의 근대화는 절름발이였다. 시스템의 근대화가 심성(mentality)의 근대화를 너무 앞서갔다. 물질적 기반이 부단히 갱신될 때 의식의 거미줄들은 채 걷히지 못했다. 은희경이 공들여 쓴 소설들은 그 거미줄들을 하나씩 철거하는 의식의 재개발 사업이었다. 허위와 싸우기 위해 냉소가 동원되었고 위선과 싸우기 위해 위악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넓게 말해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는 것들과의 유연한 격전이었다. 내 안에 나 아닌 그 어떤 것도 들여놓지 않겠다는 부단한 긴장이 그녀의 것이었고, 풍속의 세목들을 저인망으로 훑으면서 끝내 '진정성'이라는 '이타카(Ithaca)'로 귀환하는 자기의식의 여행이 그녀의 방법론이었다.

집단 정치에서 개인 윤리로의 전환이라는 말로 90년대 소설의 차이를 규정할 수 있고, '심층 근대화'를 위한 각개약진의 시기라는 말로 90년대의 문학사적 의의를 규정할 수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특히 은희경의 소설들은 "개인주의적 파사현정(破邪顯正)의 한 절정"(황종연)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지금 우리는 '90년대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개인 각자가 자신의 삶을 결단할 수 있는 선택의 왕국에서만 90년대적인 것은 가능하다. 그것이 착각이었을지언정 당시 우리에게는 선택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10년 동안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시스템의 변화는 주체를 파괴하고 끝내 적응시킨다. 지금 이 세계가 유일한 세계일지 모른다는 절망, 이제 세계는 전진하지 않는다는 체념이 체화되었다. '역사의 종언'이 새삼 뼈아픈 실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금 막 상실을 겪은 사람은 자신의 삶이 일종의 거대한 착각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완강한 시스템 속에서 고독한 개인들과 더불어 은희경 문학이 다시 시작된다.

_신형철, 「거대한 고독, 인간의 지도」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창비 2007) 해설 중에서

 

0. 은희경의 소설에서 냉소주의의 근원과 그 양상

진희의 냉소는 무엇보다도 상처를 피하기 위한 전략이며
이는 두 가지 계기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대상에 대한 지적이고 냉철한 접근 태도를 유지하는 일이다. 소설의 첫머리에서 진희는 삶이 자기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부터 그에 대처하기 위해 삶에 대해 거리를 가지고 대하기 시작했다고,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38세의 진희가 말하고 있는 '똑바로 바라보기'의 전략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기에게 위협적인 것으로, 공포나 억압으로 다가오는 대상에 대처하는 방법은 그 대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요컨대 대상에 대한 앎을 통해 공포나 불안을 극복한다는 것이며, 이 경우 냉소란 대상에 대한 지적이고 냉철한 자세를 뜻한다.

둘째는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진희의 용어를 쓰자면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것인데 이는 곧 진짜 자기를 감추기 위한 것임은 긴 말이 필요치 않다. 진희는, 어머니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상처를 가지고 있고 이로 인해 남들이 자기에 대해 뒷공론을 하거나 자기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게 된다. 그렇다고 저 어두운 자폐증의 동굴 속으로 도망가 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터득한 자기 위장의 전략이 곧 자아의 분리라는 것이다.
_서영채, 『문학의 윤리』, 문학동네, 2005, 142-3쪽.

1. 시니시즘이란 무엇인가 : 습속으로부터의 자유

Cynicism (Greek: κυνισμ?), in its original form, refers to the beliefs of an ancient school of Greek philosophers known as the Cynics. Their philosophy was that the purpose of life was to live a life of Virtue in agreement with Nature. This meant rejecting all conventional desires for wealth, power, health, and fame, and by living a simple life free from all possessions. As reasoning creatures, people could gain happiness by rigorous training and by living in a way which was natural for humans. They believed that the world belonged equally to everyone, and that suffering was caused by false judgments of what was valuable and by the worthless customs and conventions which surrounded society. Many of these thoughts were later absorbed into Stoicism.

The first philosopher to outline these themes was Antisthenes, who had been a pupil of Socrates in the late 5th century BCE. He was followed by Diogenes of Sinope, who lived in a tub on the streets of Athens. He took Cynicism to its logical extremes, and came to be seen as the archetypal Cynic philosopher. He was followed by Crates of Thebes who gave away a large fortune so he could live a life of Cynic poverty in Athens. Cynicism spread with the rise of Imperial Rome in the 1st century, and Cynics could be found begging and preaching[설교하다] throughout the cities of the Empire. It finally disappeared in the late 5th century, although many of its ascetic[금욕적인] and rhetorical ideas were adopted by early Christians.

 2. 스피노자의 『에티카』 3부 : 정념으로부터의 자유
▶ 3부 「정서의 정의」 부분
정신의 수동 상태라 불리는 정서는, 그것에 의하여 정신은 자신의 신체(혹은 그 일부)에 대해 이전보다 더 크거나 작은 존재력을 긍정하게 되고 또 그것에 의해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한층 더 많이 사유하도록 결정하게 하는, 혼란스러운 관념이다.
∴정서의 세 가지 기본 유형 : 기쁨, 슬픔, 욕망

▶ 3부의 「서문」
정서들과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해 썼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의 공통된 법칙을 따르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을 넘어서 있는 것을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실로 그들은 자연 안의 인간을 마치 '국가 속의 국가'로 파악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를 따른다기보다는 그것을 교란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절대적 역량을 가지며, 따라서 자기 자신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인간의 무력함과 불안정함의 원인을 자연의 공통적인 역량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내가 알지 못하는 인간 본성의 어떤 결함 탓으로 돌려서 그것을 한탄하고 조롱하고 경멸하거나, 혹은 대부분의 경우 그렇듯이, 그것을 저주한다. 그래서 인간 정신의 무능력을 더 유창하고 더 신랄하게 들추어낼 줄 아는 사람은 신의 영감을 받은 사람으로 간주된다. (중략)

나는 인간의 정서와 행위를 이해하기보다는 저주하거나 혹은 조롱하기 좋아하는 그런 사람들로 되돌아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들에게는 내가 인간의 결함과 어리석은 행동을 기하학적 방식으로 다루려고 하고 또한 이성에 반하고 공허하며 불합리하고 끔찍하다고 그들이 외치는 것을 내가 확실한 방식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근거는 이것이다. 자연 안에서는 그것의 결함 탓으로 돌릴 수 있는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은 항상 같은 것이고 어디에서든 하나이며 그것의 힘과 작용하는 역량은 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에 따라 모든 것이 일어나고 또한 하나의 형태에서 또 다른 것으로 변화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자연의 법칙과 규칙은 어디에서나 항상 같은 것이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것이든 사물들의 본성을 파악하는 단 하나의 동일한 방식, 즉 보편적인 자연의 법칙과 규칙을 통한 방식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 자체로 고려되는 증오, 분노, 시기 등의 정서는 또 다른 단일자들과 같은 본성의 필연성과 힘으로 인해 생긴다. 그래서 증오, 분노, 시기 등과 같은 정서는 그것을 인식시켜주는 확실한 원인을 가지며 또한 확정된 특성을 갖기에, 그것을 관조하는 것만으로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는 다른 모든 것의 특성과 동등하게 우리가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정서의 본성과 힘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정신의 역량을 앞서 신과 정신에 대해 다룬 것과 같은 방법으로 다룰 것이며, 그래서 인간의 행위와 욕구를 마치 선, 면, 물체의 문제처럼 고찰할 것이다.

▶ 『에티카』 본문 중에서

정리14
만일 정신이 언젠가 동시에 두 가지 정서에 의하여 자극받았다면, 정신은 후에 그 중 하나에 의해 자극받을 때 다른 하나에 의해서도 자극받을 것이다.

정리15
모든 사물은 우연에 의하여 기쁨이나 슬픔 또는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물에 의해서 a와 b라는 정서를 동시에 자극받았을 때, 후에, 그 사람이 다른 사물에 의해서 단지 정서 a를 자극 받기만 해도 정서 b가 동시에 발생한다. 이 '다른 사물'이 정서 b를 자극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다.

정리16
기쁨이나 슬픔으로 정신을 자극하는 대상에 다소 유사한 무엇을 갖는 어떤 것을 우리가 표상한다는 이유만으로, 대상과 유사한 그 점이 그러한 정서를 일으키는 원인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거나 증오할 것이다.

→ "이 정리에 따르면 타자는 대개 그의 정신을 기쁨으로 변용시키는 누군가와 내가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다. (…) 우리가 공유하는 그 특질이 기쁨의 정서의 작용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타자는 나를 사랑한다. (…) 내가 타자의 사랑의 대상과 나누고 있는 그 유사함 때문에 타자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므로, 그는 나를 첫 눈에 앞서서도 사랑한 것이다."(미란 보조비치, 「첫 눈에 앞서」, 『암흑지점』, 도서출판b, 66쪽)

정리41
만일 어떤 자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는다고 표상[상상]하며 더욱이 자기는 사랑받을 아무런 원인도 부여하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는 도리어 그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

→ "나는 타자가 내 안에서 보는 것을 나 자신 안에서 보지 못하는 한, 사랑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에 따르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을 낳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자인 타자가 내 안에서 보는 것과 사랑받는 자인 내가 나 자신에 관해 상상하는 것 사이의 근본적인 불일치인 것이다."(미란 보조비치, 같은 책, 64쪽)
→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하려면, 내가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그녀가 타인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점점 더 그녀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바로 그 원인 말고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녀가 느끼게 해야 한다.
∴ 요점 :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3. 90년대 문학에서 은희경 초기 소설의 두 가지 기여
1) 서정적 태도를 넘어서기, 혹은 산문정신
→ 밀란 쿤데라의 『커튼』에 따르면 진짜 소설가는 서정성의 덫에서 벗어날 때 탄생한다. 한 개인이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고 있는 시기, 자신의 고유한 영혼에 대해 말하려는 욕망에 들려 있는 시기가 바로 "서정적 시기"이다. "반(反)서정주의로의 개종은 소설가의 이력서라면 반드시 들어 있는 기본 항목이다."(124쪽) 개종 이후 숙고해야 할 것은 "나는 항상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고자 했다"(86쪽)라는 플로베르의 말이다. "소설의 유일한 도덕은 인식이다. 실존의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어떠한 단면도 발견하지 못하는 소설은 곧 비도덕적이다."(87쪽) 뒤집어 말하면, 실존의 알려지지 않은 단면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소설의 임무다.
→ 산문정신 : (국어사전) 외형적 규범, 낭만적 감상, 시적 감각을 배제하고, 현실을 객관적으로 탐구하여 자유로운 문장으로 표현하려는 문학상의 태도. (보충 필요 → 유종호, 「산문정신고(考)」, 『유종호 전집 1권-비순수의 선언』)

2) '낭만적 사랑'의 탈낭만화
첫 눈에 반하기(우연을 운명으로), 상대방을 이상화하기(환상의 틀), 불가능성을 사랑하기(죽음충동)
∴ 사랑에 대한 사랑
ex. 「그녀의 세 번째 남자」와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 (『타인에게 말걸기』 수록)
∴사랑은 없다는 게 목표가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
울리히 벡·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새물결 1999) 중에서

과거로부터 끌어온 풍부한 증거를 왜곡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나는 사랑과 결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주요한 시기를 구분하고 싶다.

첫 번째 시기는 고대와 중세 전체를 포괄하고 18세기말까지 이어지는 긴 단계이다. 이 단계의 기본적인 전제는 사랑과 열정은 결혼에 반하는 죄악이라는 것이었다. "아내를 첩처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은 없다."(세네카) 따라서 이것은 적어도 귀족과 지배계급에서 결혼의 의무나 권리로부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첩과의 사랑은 고상할 수도 있었음을 의미했다. [결혼은 출산을 위한 신성한 것. 열정이나 성욕이 개입해서는 안 됨. 그러면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매춘부처럼 대하는, 수치스러운 일.]

두 번째 시기는 18세기 말에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산업주의의 과실 위에서 성장한 새로운 중간 계급은 귀족들의 '방종한 도덕'을 비난하면서 사회에 청교도적 태도를 강요했다. 그 결과 욕망은 지하로 내려갔고 변태는 심리학자와 의사들의 치료를 받아야 할 '일탈적 성행동'의 범주로 떠밀려 들어갔다.

세 번째 시기는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단계이다. 중간 계급의 엄격한 도덕은 도리어 금지된 기묘한 행동에 대한 은밀한 관심을 일깨웠고, 그리하여 온갖 이국적인 환상들이 널리 퍼져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랑은 아주 유혹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사랑은 성욕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자유를 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의 태도가 되었고 개인들에게 중간 계급의 규범에 맞서 자기 운명을 추구하고 삶의 기쁨과 슬픔에 맞설 수 있도록 해준 온갖 대담한 발상들은 이제 공동의 재산이 되었다. 사랑은 자아들의 만남이자 당신-나를 중심으로 한 현실의 재창조이며 어떤 금지도 부과되지 않는 범속화된 낭만주의로서 지금 대중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사랑이라는 세속적 종교로 말이다.
 

 

 

 

 

 

 

제5강 김영하 - 충동의 윤리학
 
■ 작품연보
1995 등단 : 「거울에 대한 명상」 @ 계간 『리뷰』(1995년 봄호)
1996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제1회 문학동네작가상
1997 『호출』
1999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2001 『아랑은 왜』
2003 『검은 꽃』
2004 『오빠가 돌아왔다』
2006 『빛의 제국』
2007 『퀴즈쇼』
2010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자료 1) 기본 개념들 : 본능, 충동, 욕망, 사랑

눈을 섞고 몸을 섞고 심지어 피마저 섞어도
_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과 박찬욱의 『박쥐』

본능, 충동, 욕망, 사랑. 언뜻 비슷해 보이는 개념들입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개념들끼리는 서로 겹치는 데가 있어 보입니다. 본능이나 충동이나, 충동이나 욕망이나, 욕망이나 사랑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그러나 왼쪽 끝과 오른쪽 끝을 비교해 보면 선뜻 그게 그거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본능과 사랑은 썩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네 가지를 일종의 스펙트럼으로 간주해 보면 어떨까요. 빨강에서 보라까지, 본능에서 사랑까지. 인간이라는 우주 안에는 저 네 가지 종류의 정념(적당한 표현은 아니지만 마땅한 게 없네요)이 일종의 스펙트럼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러 헷갈립니다. 지금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이 정념은 본능일까, 충동일까, 욕망일까, 사랑일까. 헷갈려서 불안하고, 불안해서 실수하고, 실수해서 후회합니다. 이 네 가지를 명확히 구별할 수 있다면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사는 일이 한결 편해질 텐데요.

1. 금지가 없으면 욕망도 없다 - 『테레즈 라캥』의 경우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1867, 문학동네, 개정판, 2009)은 출간된 지 백년도 훨씬 넘은 소설이지만 이 소설에서 시대착오적인 데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고전의 힘?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이 소설이 앞서 지적한 저 정념의 스펙트럼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정념에 휘둘린다는 점에서는 19세기 중반의 사람들이나 21세기 초반의 우리나 별 차이가 없으니 이 소설이 여전히 재미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자연주의'의 대가(大家) 졸라의 작품 아닙니까.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도입하여 인간을 실험실의 쥐처럼 가차 없이 해부하는 문학사조를 일러 '자연주의'라고 부르거니와, 졸라는 '자연주의 그 자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이 사조를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이 소설은 26세의 졸라가 발표한 첫 장편이지만, 두 주인공 로랑(남)과 테레즈(여)의 연애 전말기(顚末記)를 해부하는 졸라의 필치는 훗날의 자연주의를 예고하듯 어김없이 날카롭습니다. 자, '실험'의 결과는?

끔찍한 비극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요? 테레즈와 카미유 부부 사이에 로랑이 나타납니다. 테레즈와 로랑은 단번에 서로에게 매혹되고 둘의 열정은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치닫습니다. 카미유 때문에 방해받고 있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급기야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합니다. 카미유는 죽었습니다. 이제 둘은 자유로워졌을까요?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욕정이 사라진 것이다."(152-3쪽) 방해물이 사라지자 오히려 열정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살인에 대한 자책, 살인을 저지른 상대방에 대한 혐오, 공범자인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옵니다. 예상치 못한 자책, 혐오, 공포에 시달리느라 두 사람의 관계는 파탄 지경에 이르고 급기야 상대방을 살해할 음모를 세웁니다. 이 두 번째 살인의 문턱에서 두 사람은, 더 이상 애초의 열정 따위는 남아 있지 않으며 둘 모두가 "끝없고 거대한 휴식과 망각"(348쪽)을 원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동반자살을 선택합니다.

앞에서 우리는 네 종류의 정념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면 인생의 불행이 줄어들 것이라는 투로 말했습니다. 테레즈와 로랑이야말로 그 정념의 스펙트럼에서 길을 잃고 만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저 정념들의 논리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본능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인간은 늘 이렇게 해왔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한다." 욕망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이것이 금지돼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할 것이다." 충동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나는 이것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을 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테레즈와 로랑은 금지된 관계였기 때문에 그토록 뜨거운 욕망을 가질 수 있었고, 금지가 사라진 순간 욕망을 잃어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가학/피학 충동뿐입니다. 사랑이라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욕망이었고,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욕망의 버팀목이었으며, 버팀목이 사라진 자리에는 맹목적인 충동만이 남았습니다. 이것이 이 연애의 전말기입니다.

2. 소설에서 영화로, 얻은 것과 얻을 뻔한 것 - 『박쥐』의 경우

아시다시피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는 이 소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졸라의 자연주의 소설이 뱀파이어 장르와 결합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제 짐작으로 박찬욱 감독은 아마도 소설의 이런 대목에 밑줄을 쳤을 것만 같습니다. 카미유를 살해한 이후 두 연인이 가학과 피학의 충동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대목입니다. "그들의 키스는 무섭게도 잔인했다. 테레즈는 입술로 로랑의 부풀고 뻣뻣한 목덜미에서 카미유가 물어뜯은 자국을 찾았다. 그리고는 흥분에 떨며 자신의 입술을 그곳에 갖다 댔다. 거기엔 생생한 상처가 있었다. 이 상처가 나으면 두 살인자는 조용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런 사실을 알았으므로 애무의 불꽃으로 그 상처를 없애려 했다. 그러나 입술이 타기만 했다. 로랑은 묵직한 탄식을 내지르면서 우악스럽게 테레즈를 떼밀었다. 자기 목에 뜨거운 쇠를 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친 듯한 테레즈는 또다시 흉터에 키스하려 했다. 카미유의 이빨이 쑥 들어갔던 그 피부 위에 입을 대면 거친 쾌감이 느껴졌다."(238쪽)

이 대목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테레즈가 로랑의 목덜미에 마치 "뜨거운 쇠를 대는 것"처럼 키스를 하려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이것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을 하고 있다."라는 충동의 논리를 따르면서 말이지요. 목덜미라니, 뱀파이어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본래 뱀파이어는 충동의 화신입니다. 그들은 원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어야만 합니다. 뱀파이어 캐릭터가 그토록 우리를 매혹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우리가 더러 사로잡히곤 하는 충동의 논리를 선명하게 구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앞에서 우리는 『테레즈 라캥』의 서사가 욕망에서 충동으로 이동하는 서사라고 설명했습니다. 말하자면 졸라의 소설 안에서 두 연인은 카미유를 살해한 이후부터는 이미 뱀파이어라고 해도 좋다는 뜻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자신이 오래 품어온 뱀파이어라는 소재를 저 불행한 연애 서사의 후반부에 녹여낼 수 있는 근거를 소설 안에서 찾게 된 것은 아닐까요. 엄밀히 말하면 영화 『박쥐』는 『테레즈 라캥』의 서사를 몸통으로 삼고 그 전반부와 후반부에 뱀파이어 이야기를 덧댄 형국입니다. 그렇다면 소설과 영화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봐도 좋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몇 가지 소소한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첫째, 소설에서 살인에 앞장서는 것은 로랑(남)이지만 영화에서는 테레즈(여)입니다. 심지어 살인을 유도하기 위해 거짓말까지 하지요. 영화에서 테레즈는 팜므파탈(악녀)의 캐릭터에 더 가까워졌습니다. 둘째, 아마도 그래서일 텐데요, 소설에서는 카미유가 죽으면서 로랑의 목에 흉터가 남지만, 영화에서는 테레즈의 귀에 상처가 남습니다. 셋째, 저 상처와 관계있는 것이거니와, 소설에서 둘의 죄의식은 죽을 때까지 해결되지 않지만 영화에서는 다릅니다. 소설에서 로랑의 목에 남은 상처는 끝내 없어지지 않습니다만, 영화에서는 테레즈가 뱀파이어가 되면서 그녀의 상처가 사라집니다. 즉 영화는 후반부의 어느 지점에서 졸라의 서사를 끝내고 자유롭게 뱀파이어 이야기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런 차이들에 근거해서 영화 『박쥐』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요. 얻은 것은 있지만 잃은 것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앞서 말했듯 『박쥐』는 『테레즈 라캥』의 몸통을 거의 그대로 살리되, 이와 내적으로 관련돼 있는 뱀파이어 모티프를 앞뒤에 덧대어 원작 소설의 이야기를 확장시켰습니다. 즉 소설의 130%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이 영화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잃은 것이 별로 없다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어쩌면 '얻을 수도 있었을' 어떤 것을 충분히 얻지 못했습니다. 소설에는 없는 설정, 그러니까 '뱀파이어가 된 신부'라는 설정을 첨가했으니, 이 영화는 졸라가 던지지 못한 문제까지 추가로 던질 만 했습니다. 첫째, (타인의 피를) 먹을 것인가 먹지 않을 것인가. 둘째, (테레즈와 섹스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셋째, (카미유를)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 뱀파이어인데, 게다가 신부이고, 또 게다가 살인자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난관입니까. 이 딜레마를 작정하고 파고든다면 이 영화는 『올드보이』보다 더 묵직한 영화가 되겠구나, 본능과 충동과 욕망과 사랑의 문제, 심지어는 신성의 문제까지 주파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원작의 200%에 도달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저는 잔뜩 기대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영화는 제가 기대했던 영화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저 세 가지 딜레마에 대해 영화는 별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영화에서 로랑은 고뇌하지 않습니다. 거의 체념적인 태도로 신속하게 모든 일을 실행해버리고 맙니다. 고뇌가 빠져 있는 자리를 박찬욱 감독 특유의 유머가 채웁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충분히 진지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어떤 인터뷰에서 자신은 '느끼함'을 견딜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해는 합니다만, 진지함과 느끼함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닐 텐데 말예요.

3. 한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랑

말하자면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제가 애초 기대했던 영화와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박찬욱 감독의 열렬한 지지자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이 영화에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두 번째 보면서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부이건 뱀파이어건 살인자이건 혹은 그 무엇이건 간에 그것들은 이 영화에서 본질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이건 그냥 로랑과 테레즈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가.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의 하나는, 맨발로 거리를 달리는 테레즈에게 로랑이 구두를 신겨주는 장면입니다. 두 인물이 재로 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 구두가 툭 하고 떨어지면서 영화의 문을 닫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영화는 구두로 시작해서 구두로 끝나는 영화가 아닐까. 그 두 번의 구두 사이에서, 이 영화는 사랑에 빠진 남녀가 통과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단계를, 그 단계마다 겪게 되는 거의 모든 정념들을 따라가는 영화인 것은 아닐까. 참으로 사랑이라는 것은 눈빛을 섞고 몸을 섞고 심지어 피마저 섞어도 뜻대로 안 되는 사업인 것이군요. 그래서 끝으로 저는 엉뚱하게도 이런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박찬욱 감독님, 좀 느끼하더라도 참으시고, 정말이지 100%의 사랑영화 한 번 만들어 보시라는!


자료 2) 김영하의 초기 소설에서 욕망과 충동
「당신의 X, 그것은 에티카」
『몰락의 에티카』 중에서

1. 「거울에 대한 명상」

욕망의 법정에 한 쌍의 남녀가 출두한다. 여자의 말에 따르면 남자는 마녀이고 그녀 자신은 그 마녀의 독사과를 먹은 백설공주다(268-9쪽). 한편 남자는 그녀의 말은 부당하며 그녀야말로 호세를 배반한 카르멘이라고 주장한다(272쪽). 김영하의 데뷔작 「거울에 대한 명상」(1995)은 이 살인적 나르시스트와 치명적 팜므파탈의 분쟁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현장검증이다. 그들 사이에 또 하나의 여자가 끼어 있다. "나는 아내와 가희를 만나고, 가희는 나와 아내를 만나고, 아내는 가희와 나를 만난"(275쪽)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정부인 가희와 함께 버려진 자동차 트렁크로 들어간다. 정부 가희는 문득 그 트렁크 문을 안에서 닫아버림으로써 동반 죽음을 자초한다. 섹슈얼한 공간인 트렁크는 순식간에 죽음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나'는 죽음을 기다리면서 가희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세 사람의 관계 이면의 진실을 듣게 된다. 나는 아내 성현을 사랑하고 성현은 친구 가희를 사랑하며 가희는 나를 사랑한다는 진실 말이다.

이 이야기가 흔해빠진 삼각관계 이야기와 구별되는 까닭은 일차적으로 세 주체가 각각 이성애자, 양성애자, 동성애자로서 이 삼각형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물음은 이 삼각형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었나에 걸려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운명적 비극 따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그것이 엄밀한 '계약'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바로 그 삼중 계약의 주체들이다. 김영하의 초기 소설에서 우리는 흔히 이와 같은 '계약'을 만난다. 실로 김영하의 세계는 엄격한 자본주의적 교환 논리의 외양 속에서 욕망이 거래되는 시장이다. 이를 배경으로 이 소설은 안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시스템이 실상 치명적으로 허약하다는 것, 그것은 붕괴 혹은 공황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때 김영하는 『정치경제학비판』의 저자를 뒤따라 '욕망경제학비판'의 저자가 된다. 이 시스템은 왜 붕괴되었는가?

얼핏 그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 읽혀온 듯 보인다. 문제는 그의 나르시시즘이고 무책임함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그는, 계약의 주재자는 오직 자기 자신일 뿐이고 자신이 바라는 대로 욕망의 경영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어리석다. 그는 자신의 상상적 계약 속에서 자만했고 그 계약의 '실재'를 알지 못했다. 그 계약의 실제적인 주재자가 다른 두 여자였음이 밝혀질 때 그의 상상적 '거울'이 깨어지고 그의 존재가 (트렁크의 암흑 속으로) 상징적으로 말소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의 나르시시즘이 문제의 핵심인 것은 아닌 듯 보인다. 비록 가희는 "마녀는 스스로 파멸하죠"라는 말로 파국의 책임을 '나'에게 전가하고 있고 "나르시시즘은 파멸의 길로 간다"(268쪽)는 명제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는 오도적이다. 왜인가?

그 계약은 셋 모두의 공동 참여로 구성된 시스템이다. '나'의 이중 계약은 가희와 성현의 승인이 없었더라면 이행될 수 없었을 테니까. 이 욕망의 시스템은 '나'에게로만 귀속되지 않는다. 게다가 계약의 실질적 주재자는 두 여자들이 아니었던가. 양성애자 가희의 욕망이 충족되면서(가희에게 한 남자가 주어지면서) 동시에 동성애자인 성현의 욕망이 충족되려면(가희를 영원히 잃지는 않으려면) 그녀들에게는 타자(두 여자)의 욕망에 무관심한 채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만 몰두하는 어리석은 남자 하나가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에겐 형 같은 나르시스트가 필요했던 건지도 몰라."(274쪽) 이 시스템이 계약에 기반하고 있다면 그것을 파국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로지 계약의 '위반'일 밖엔 없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 욕망의 거래에서, 누군가가 욕망이 아니라 충동을 유통시킴으로써 계약을 위반했다.

트렁크 안에서 트렁크의 문을 닫음으로써 계약을 파기한 것은 물론 '가희'다. 그녀는 저 타협적인 '욕망의 거래'의 한 주체였지만,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계약을 파국으로 말 그대로 몰아간다(drive). 김영하의 '욕망경제학비판'에서 한 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고집할 경우 그것은 때로 자살적인 죽음 충동(drive)으로 변전될 수 있고 합의된 상징적 질서를 붕괴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주체는 완전히 다시 태어나거나 혹은 (이 소설의 경우처럼) 영원히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트렁크 문을 스스로 닫아버림으로써 상징적 질서를 일시 정지시켜버린 가희의 섬뜩한 행동은 '자신의 욕망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라캉) 자세에서 비롯된 '행위(act)'에 가깝다. 이것은 선인가 악인가, 혹은 쾌락인가 고통인가?

본래 진정한 행위의 섬뜩함은 저 양자택일을 무력화시키는 곳에서, 그래서 우리가 손쉽게 상징화하기 어려운 '한 걸음'을 내딛는 데서 생겨난다. 가희의 행위는 '선악을 넘어서'(니체, 『선악을 넘어서』) 있을 뿐만 아니라 '쾌락원칙을 넘어서'(프로이트, 『쾌락원칙을 넘어서』) 있다는 말이다. 이런 행위는 '윤리적 행위'라 불려 마땅하다. 내 안의 진실과 대면하기 위해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았고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는 한 걸음이었고, 그 행위 뒤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똑같이 남아 있지 않게 될 어떤 파열"을 향한 투신이었기 때문이다. 이 행위의 배후에 있는 것은 고만고만한 '욕망'들이 아니라 거의 자살적인 '충동'이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이처럼 내 욕망의 결과가 타자의 끔찍한 충동으로 되돌아오는 사태일 것이다. 물론 이 두려움은 비윤리적이다.

2.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런 식으로 '나'의 자유주의적인 욕망의 시장은 가희의 자살적인 충동의 공습으로 붕괴하고 만다. 이와 같은 서사의 모체(matrix)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1996)에서도 여전하다. 남자들은 여전히 나르시스트이고 여자들은 또 자살한다. 그러나 시장은 공황을 겪으면서 단련되는 것인가. '거울'이 깨어진 후 이 욕망 경제의 시스템에도 얼마간 변화가 일어난다. 주인공 C는 여전히 나르시스트이고 그는 「거울」의 '나'를 반복하고 있다. 변화는 다른 곳에서 일어난다. 『파괴』에는 그와는 적잖이 다른 또 하나의 남자가 있다. 작가는 그를 '자살가이드'라고 부른다. 이 특별한 한 남자의 등장 덕분에 여자들의 모습도 적잖이 달라졌다. '가희'라는 고유명을 갖고 있는 치명적인 한 여자 대신, 클림트의 '유디트'를 닮았다는 이유로 모두 '유디트'의 범주로 묶이는 여자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거울」에서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거래가 시작된다. 어떤 거래인가?

이 소설은 결국 자살 가이드인 '나'의 고객이 된 두 여자에 대한 기록이다. 클림트의 '유디트'를 닮은 가출소녀 '세연', 그리고 행위예술가 '유미미'. 그녀들의 특징은 욕망의 영도(零度) 상태를 체현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여성으로서의 삶이 욕망의 지속적인 좌절로 점철되었기 때문에 혹은 자신의 욕망에 대해 늘 타협해왔기 때문에 초래된 근원적 우울의 상태이다. 예컨대 세연은 기계적으로 섹스를 하고 습관적으로 '추파춥스'를 빤다. 욕망이 고갈된 삶이 고통이라서 앞으로 다가올 죽음은 휴식이 된다. 어렸을 적에 관 속에 들어가 봤을 때 느낀 그 편안함이 그녀를 지금껏 매혹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목표는 북극에 가는 것이다("북극에 가고 싶어. 한없이 지루해졌음 좋겠어."(50쪽). 북극은 그녀에게 욕망의 영도 상태로부터의 영원한 탈출 혹은 휴식의 장소이다. '나'를 만나 자살을 결정한 그녀는 꿈꾸던 북극행을 앞두고 이제 이렇게 말한다. "갑자기 신이 나는 거 있죠. 내게 인생이란 제멋대로인 그런 거였어요. 언제나 내 뜻과는 상관없는 곳에 내가 가 있곤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75-6쪽) '미미' 역시 자살가이드인 '나'를 만나기 전에는 그녀 자신의 결핍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그녀가 "한 번도 나를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어디론가 계속 도망치는 기분으로 평생을 살아왔던 느낌"을 받게 되면서 모든 것은 달라진다. 그녀 역시 욕조에 몸을 담그고 동맥을 긋기로 결심한다. 그녀들은 모두 자살가이드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죽음을 향해 간다.

주의하지 않는다면, 가희의 자살과 유디트들(세연과 미미)의 자살이 놓여 있는 층위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놓치게 될지 모른다. 전자의 죽음이 죽음충동에 의해 촉발되어 상징적 질서를 붕괴시키는 섬뜩한 윤리적 '행위'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면, 후자의 죽음은 상징적 질서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죽음이며, 죽음이야말로 죽음충동에 대항하는 최선의 피난처라는 사실을 실증하는 듯한 죽음이다. 그녀들은 이제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 나를 트렁크 속으로 이끌지도 않는다. 클림트의 그림처럼 '나'의 응시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적당히 위험하고 적당히 매혹적인 '유디트'일 뿐이다. 비록 '세연'이 "누군가를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은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해"(52쪽)라고 말할 때처럼 불현듯 '가희'를 떠올리게 할 때가 없지는 않지만, 이는 차라리 예외적인 경우다. 이런 맥락에서 『파괴』의 독자들이 이 소설에서 '미학적 자살'을 발견한 것은 정당하지만, 그것은 이 자살이 더 이상 '윤리적 자살'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러할 뿐이다. 그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이 자살가이드의 지위에 대해서 심문해야만 한다. 자살 그 자체보다도 자살에 이르는 그 과정이 특별하다. 이 소설의 '유디트'들은 그녀들이 자살하고 싶은 이유를 털어 놓은 뒤 누구나 알 수 있는 몇 가지 자살 방법을 안내 받고는 그에게 돈을 지불하고, 자살한다. 이는 자본주의적 교환논리의 차원에서는 터무니없는 거래로 보인다. 그들이 가이드에게서 거래의 대가로 얻어내는 것이 고작 그런 것이라면, 가이드는 왜 필요하고 그에게 돈을 지불해야 할 이유란 대체 무엇인가? 주체는 자살자들 자신이고 가이드란 단지 유령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교환논리에 의거할 때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또 하나의 다른 계약을 참조해보는 것이다. 정신분석에서 분석주체(analysand, 피분석자)와 정신분석가(analysist)가 맺는 계약 말이다.

'분석주체'라는 명칭은 정신분석 임상에서 분석의 '주체'가 피분석자 자신임을 강조한다. 분석가의 안내가 있긴 하지만 스스로 분석을 수행하는 것은 분석주체 자신이다. 그런데 왜 분석가에게 돈을 지불하는가? 그것은 분석가의 노동에 대한 대가라기보다는 차라리 분석의 효율을 위한 것이다. 분석가가 분석주체의 정념의 난맥 속으로 연루되는 것을 막고 그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조처다. 매춘부가 고객과 정서적으로 연루되지 않고 섹스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을 받아야만 하듯이, 그리고 고전적 탐정소설에서 탐정이 범죄자들의 커넥션에 정념적으로 연루되지 않기 위해 반드시 보수를 받아야 하듯이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분석가를 '마음의 매춘부'에 비유한다. 『파괴』의 가이드는 이런 차원에서 움직이는 존재다. 그는 타자의 충동에 연루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거울」의 '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방편이다. 김영하의 주인공은 이렇게 이상한 방식으로 진화했다.

그들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내 이름도 고향도 출신 학교도 심지어 취미도 알지 못한다. 나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함으로써 내 취향을 은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상정한 인간 유형에서 자꾸만 벗어나는 나를 보고 당혹해할 따름이다. 하기사 당연한 일이다. 누구도 신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 수는 없는 법이다. (15-6쪽)
「거울」에서의 비대칭적 거래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우위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면, 『파괴』에서 욕망의 경영학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로 나타난다. 「거울」의 가희가 그 자신의 욕망을 고집함으로써 거래를 내파했다면, 이제 『파괴』에서의 가이드는 교환관계의 내부에서 미끄러지며 부유한다. "건조하고 냉정할 것"(8쪽)이라는 철칙을 그는 '예술가의 지상덕목'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평범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이 욕망의 계약 속에서 타자의 욕망과 충동으로부터 철저하게 탈(脫)연루된 채로 움직이는 유령적 존재의 철칙이 될 때 상황은 기묘해진다. 미소를 띠며 타자에게 죽음을 선물하는 존재, 이는 악마의 얼굴을 한 분석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주체가 스스로 자신의 욕망의 실재와 대면하게 함으로써 환상 너머의 순수한 욕망, 혹은 타자로부터 분리된 그 자신의 욕망에 이르도록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휴식'이라는 이름으로 욕망의 소외 상태를 단지 끝장내주는 존재. 그런데도 여전히 보수를 받고 있으니 참으로 냉혹한 경영학이다. 이 욕망 경영자가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납득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살인을 사주하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런 도발은 그저 내가 찾는 취향의 사람인가를 판별하는 리트머스 용지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살해하도록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사람들이 무의식 깊은 곳에 감금해두었던 욕망을 끄집어내고 싶을 뿐이다. 일단 풀려난 욕망은 자가 증식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상상력은 비약하기 시작하고 궁극엔 내 의뢰인이 될 소질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15쪽)

이상한 욕망 경영자의 독특한 직업윤리다. 그는 이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위협적인 '가희'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파괴』의 세계 역시 욕망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교환 논리의 세계인 것은 여전하지만, 그는 이제 그 거래 관계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거나 혹은 그 거래를 초월할 것이다. <너는 너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하는 그는 '그러나 나에 대해서는 아니다'라고 덧붙이기를 잊지 않는다. 스스로 욕망의 주체이길 고집하다가 붕괴되지 않기 위해(자신의 거울이 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욕망을 철저하게 비우고 오직 타자의 욕망을 되비추는 존재가 되길 원한다(스스로 거울이 된다). 『파괴』의 '나'는 이처럼 「거울」의 '나'와 결별하면서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마라'에서 '사르다나팔'로의 전환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사르다나팔의 형상은 분석가의 형상을 반향하면서 남성 입법자로서 삶을 도모하는 한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마라처럼 파멸하지 않기 위해 이 세상 모든 유디트들의 충동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끝내 사르다나팔의 위치를 고수하는 것 말이다. 김영하 소설의 '쿨'함의 근원에는 이런 경영학이 있다.

여성인물들의 자살적 행위가 보여주는 섬뜩한 윤리가 있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남성인물들의 악마적 초연함이 있다. 김영하는 이 두 층위를 발견하여 욕망과 충동의 영역에서 그 남성적 양태와 여성적 양태를 매우 매혹적인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 그러니 김영하의 이 모든 이야기들을 ('제1회 문학동네작가상'의 심사평에서 한 심사위원이 명명한 것처럼) '판타지'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한 진단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현실'이라는 판타지에 의존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충동의 섬뜩한 '실재'(the real)를 간신히 외면한 채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몰라야 할 어떤 진실이 있고, 현실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말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야 할 어떤 말들이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고 제니 홀저(Jenny Holzer)는 말했지만(이것은 '현실'의 편에서 하는 말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프랑소와즈 사강은 말했다(이것은 '실재'의 편에서 하는 말이다). 윤리가 발생하는 지점은 후자다.

* 슬라보예 지젝,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100쪽.
* Slavoj ?i?ek, on Belief, Routledge, 2001, p.17.
* 『파괴』의 내러티브는 서술자인 자살가이드가 클림트의 '마라(Marat)'를 응시함으로써 시작되고 스스로를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Sardapalus)'과 동일시함으로써 종결된다. 샬롯 코데이의 칼에 찔려 욕조 속에서 죽어가는 마라는 가희에 의해 트렁크 속에서 타살된 「거울」의 '나'이고 자신의 여자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냉정하게 관조한 바빌로니아의 왕 사르다나팔은 곧 『파괴』의 '나'다.

 

 

 

 

 

 

 

 

 

 

제6강 김훈 - 자연사(自然史)의 윤리학
 
■ 약력 및 작품 연보

1948년 출생 (부친 김광주)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입학, 영문과 4학년 중퇴
1973년 <한국일보> 입사
1986년 5월 11일자 신문부터 '문학기행' 시작. 『김훈·박래부 기자의 문학기행 1, 2』(따뜻한 손, 2007)

* 기타 산문집 『내가 읽은 책과 세상』, 『선택과 옹호』

1989년 <한국일보> 퇴사

1994년 산문집 『풍경과 상처』
1995년 경장편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 미완성 장편 『한모금의 당신』

1998년~2000년 <국민일보>와 <한국일보>에서 근무
2000년 <시사저널> 편집국장. <한겨레21> 인터뷰(*자료 참조) 논란돼 사임.

2000년 산문집 『자전거여행』 출간
2001년 장편 『칼의 노래』 (동인문학상)

2002년 2월 <한겨레신문> 민권사회2부 입사. '거리의 칼럼' 집필. 2002년 대선 후 1월 20일 사임.

2004년 장편 『현의 노래』

* 장편 『개』(2005)

2006년 소설집 『강산무진』 (「화장」 이상문학상, 「언니의 폐경」 황순원문학상)
2007년 장편 『남한산성』 (대산문학상)
2009년 장편 『공무도하』

* 기타 여러 권의 산문집
『원형의 섬, 진도』 『공 차는 아이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밥벌이의 지겨움』 『바다의 기별』 등

 

자료 1) 2000년 9월말


김훈 국장은 1980년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그는 한국기자협회(기협) <한국일보> 지회 부회장이었다. 당시 계엄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기협 지도부로부터 1번 타자로 파업을 치고 나가라는 지침을 받았지만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는 기협 지도부 선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고 나면 동료들이 한명씩 끌려가는 판에 파업을 절대 지휘할 수 없다. 신문은 정상 제작한다. 당신들은 감방으로 가시오."

그는 당시 신군부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자신이 모조리 작성했다는 것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안 썼으면 딴 놈들이 썼을 테고… 난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때 나를 감독하던 보안사 놈한테 이런 얘기를 했지. 내가 이걸 쓸 테니까 끌려간 내 동료만 때리지 말아 달라. 걔들이 맞고 있는 걸 생각하면 잠이 안 왔어. 진짜 치가 떨리고…." 그러면서 자신이 죄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다분히 위악적으로 느껴졌다. (anti위선, 자학)
 
* 여성 : "난 남녀가 평등하다고 생각 안 해. 남성이 절대적으로 우월하고, 압도적으로 유능하다고 보는 거지. 그래서 여자를 위하고 보호하고 예뻐하고 그러지."
* 기자 : "이걸 알아야 돼. 칼이 펜보다 강한 거야.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사기를 평생 해가지고 이 모양이 된 거지. 세상에 펜이 어떻게 칼보다 강할 수 있어. 칼 쥔 놈들은 칼이 강하다고 말 안 해. 왜냐면 본래 강하니까."
* 민중 : "모든 민중을 고귀하게 만드는 게 민중주의지, 다 똑같이 수드라를 만드는[만들어 놓은] 것은 민중이 아니잖아. 그런 점에서 난 민중이 아니에요. 나는 절대 민중인 적도 없었고, 나는 지식인이고 엘리트거든."
* 거대담론 : "거대담론, 가치판단, 선악, 정오… 이런 거 매일매일 판단하잖아. 이것도 시건방진 수작이고. 일단 '존재'를 판단해야 해. 이것이 옳으냐 아니냐를 판단하기 전에 '이것은 무엇이냐'에 대한 판단을 먼저 해야 한다고. What is this! 존재판단이 확실하지 않을 때는 가치판단을 유보해야 하고… 무엇보다 거대담론을 하지 말아야 해."

_김규항·최보은의 쾌도난담 : 김훈편 [한겨레21, 2000년 9월 27일 제327호]

 

자료 2) 2002년 3월 20일

 

밥에 대한 단상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외국 대사관 담 밑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광장에서, 전경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다. 닭장차 옆에 비닐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먹는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다 먹으면 신병들이 식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잔반통을 치운다.

시위 군중들도 점심을 먹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전경들이 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의 길을 열어준다. 밥을 먹고 있는 군중들의 둘레를 밥을 다 먹은 전경들과 밥을 아직 못 먹은 전경들이 교대로 둘러싼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 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_김훈
기자hoonk@hani.co.kr (편집 2002.03.21(목) 00:15)

 

자료 3)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 『몰락의 에티카』 중에서

 

1. 말할 수 없다

 

김훈은 장편 역사소설 세 권으로 당대를 사로잡았다. 김훈이 처음부터 역사소설을 썼던 것은 아니다. 그의 첫 소설은 서울 시가지 한복판에서 고투하는 소방관의 이야기였다. 이 경장편 소설 안에 김훈 소설의 유전자 정보가 다 들어있다. 이후 씌어진 세 권의 역사소설을 정확히 읽어내기 위해서는 첫 소설로 되돌아가야 한다. 20년을 기자로 살았던 이가 40대 중반의 나이에 문득 소설을 쓰게 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 책의 자서(自序)에 김훈은 이렇게 적었다. "애초에 내가 도모했던 것은 언어와 삶 사이의 전면전(全面戰)이었다." 당시 김훈을 사로잡고 있었던 욕망의 정체가 이 문장 안에 들어있을 것이다. 그에게 소설쓰기는 애초부터 일종의 싸움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몇 문장 뒤에 그는 이렇게도 썼다. "나는 참패하였다." 언어와 삶 사이의 전면전이란 무엇인가. 왜 그는 참패했다고 말하는가.

살아갈수록 모호한 것들과 명석한 것들, 몽롱한 것들과 확실한 것들, 희뿌연 것들과 뚜렷한 것들은 뒤섞인다. '살아갈수록'이라든지 '뒤섞인다' 같은 말들은 사실 무책임하고 부정확하다. 모호한 것들과 명석한 것들은 '살아갈수록'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뒤섞여 있는 것이며,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것들을 분별해서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토기』 79쪽)

이 말들은 어쩔 수 없이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리게 한다. "도대체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논리철학논고』 머리말) 『논리철학논고』는 오랫동안 논리실증주의의 성서로 간주되어 왔다. 단 후반부(6.4 이후)에 갑자기 등장하는, 논리학이나 언어철학과는 무관해 보이는 윤리학과 미학에 대한 몇 개의 불친절한 명제를 무시할 때만 그렇다. 그러나 훗날 공개된 편지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그 책의 요점은 윤리적인 것입니다"라고 썼다. "내 책은 윤리적인 것의 영역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 내부로부터 한계를 긋는 것이며, 나는 이것이 그런 한계를 긋는 단 하나의 엄격한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내부로부터 한계를 긋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윤리와 비(非)윤리의 경계를 구획하고 이를 언표함으로써 윤리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을 언표하는 일이 어째서 불가능한 것인지를 밝힘으로써 윤리에 대한 모든 언설들을 무위로 돌리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허튼소리만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내 책에서 그런 문제에 관해 침묵함으로써 모든 것이 확고하게 제자리를 찾게 하는 일을 수행했다." 바로 이것이다.

김훈의 말들이 그러하다. 그의 첫 소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그의 고단한 사변들은 결국 다음과 같은 명제로 수렴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말할 수 없다. 이 동어반복만이 유일하게 가당한 말이라고,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한 가장 정직한 입장이라고 그는 믿었던 것 같다. 죽은 동료 소방수 장철민에게 '나'는 말한다. "철민아 본래 대답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결국 대답할 수 없다."(『토기』 120쪽) 혹여나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려 하면 말들은 다음과 같이 뒤틀리고 만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토기』 144-5쪽) 이런 문장들이 겨냥하는 것이 허무주의이거나 불가지론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알 수 없다고, 분별되지 않는다고, 식별되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 없었다고 그토록 숱하게 언어의 무능을 고백할 때, 그것은 알 수 있는 것, 분별되고 식별되는 것, 이해할 수 있는 것들만을 수습해내기 위한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자신의 책에는 씌어지지 않은 나머지 절반이 있다고, 그 절반이 더 중요하다고 덧붙였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불가능한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패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김훈은 '언어와 삶이 모두 무장해제된 시원(始原)의 평화'(『토기』 자서)를 도모하는 불가능한 싸움을 시작했다. 20년을 기자로 살았던 사람이 품어봄직한, 기자의 말로 세상의 언어를 가지런히 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조급과 허영이 세상을 불행에 빠뜨린다고 믿었던 그에게 그것은 시도해 볼만한 싸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언어의 윤리, 윤리의 언어를 만들어보겠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가능을 확인하는 문장들만을 무수히 만들어내야 했다. 그것이 그의 패배였다. 그러나 그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세상의 부박한 말들에 맞서는 길 하나를 인상적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그의 승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문장들은 제 무능을 고백할 때 가장 당당해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의 첫 책이 그러했던 것처럼, 김훈의 첫 소설은 우선 언어에 대한 소설이지만 은밀하게는 윤리에 관한 책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윤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2. 유물론의 유물론

 

똥과 오줌일 것이다. 똥과 오줌은 슬프다. 그것들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들에 몰두할 때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은 더러 망각된다. 똥과 오줌이 억압되면 인간은 추상화되거나 이상화될 것이다. 한국문학사는 그때마다 똥과 오줌으로 되돌아가서 균형을 잡고는 하였다. 멀게는 김남천의 「물」(『대중』 1933년 6월호)이 있었고 가깝게는 김영현의 「벌레」(『창작과비평』 1989년 봄호)가 있었다. 경향문학의 시대에 김남천은 「물」을 썼다. 화씨 90도를 오르내리는 두평칠합(二坪七合)의 협착한 공간에서 열 세 명이 부대낄 때, 이념은 관념이고 육체는 현실이다. 갈증이 모든 것을 압도하고 사내는 헤겔의 『법철학』 서문을 집어던진다. "이 견딜 수 없는 욕망, 그리고 지극히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이 요구"를 위해서라면 바위에 몸을 찧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마침내 냉수 한 사발을 얻어 마시고 사내는 이내 설사를 한다. 어쩌면 「물」은 그 똥에 관한 소설이다. 민중문학의 시대에 김영현은 「벌레」를 썼다. 「벌레」의 사내는 옥중에서도 민주주의를 외친다. 입에는 방성구(防聲具)가, 손에는 수정(手錠)이 채워진다. 견디다 못해 오줌을 싼다. "그때 나는 놀랍게도 내가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해 가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벌레」는 그 오줌에 관한 소설이다.

「물」의 주인공은 똥이고 「벌레」의 주인공은 오줌이다. 그것들은 주체의 의사와 무관하게 기어이 밀려 나온다. 똥과 오줌이 슬프기 때문에 이 소설들을 슬프다. 한 시대의 전위들이 이 슬픔을 인정하기는 어려웠다. 「물」을 두고 소위 '물논쟁'이 벌어졌다. 임화는 「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경험에 매몰된 작가가 사회적 인간을 포기하고 생물학적 인간만을 내세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벌레」를 두고 '김영현 논쟁'이 벌어졌다. 작가는 자유주의에도 동의하지 않지만 속류 유물론에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명해야 했다. 경향문학과 민중문학에서 이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깊은 곳에서 그것들을 다시 사유하기 위한 소설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선택한 방책이 똥과 오줌의 복권이었고, 의식의 뒷전으로 밀려난 육체의 재발견이었다. 그 소설들은 당대의 유물론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똥 싸고 오줌 누는 몸과 대면하지 않는 유물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설사하는 몸과 오줌 싸는 몸은 인간의 조건이다. 그 조건을 잊는 순간 유물론은 타락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소설들이 내장하고 있는 똥과 오줌의 유물론은 '유물론의 유물론'이었다. 김훈의 소설이 그와 같은 계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소설 곳곳에서 우리는 똥과 오줌에 대한 강박적 집착을 본다. 그리고 그 유물론은 '타자의 유물론'으로 나아간다.

 

3. 타자의 고통

 

그는 똥과 오줌으로 상징되는 육체의 타자성을 어떤 경우에도 놓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앞에서 다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일이 논리학의 소관이 아니라 윤리학의 소관이라면, 김훈의 타자론(他者論) 또한 그 윤리학의 그늘 안에 있을 것이다. 그에게 타자는 무엇인가. 그의 첫 단편 「화장」은 이 질문에 대한 전력투구의 응답이다. 김훈은 늙은 아내의 죽음과 젊은 부하직원 추은주의 출산에 대해 말한다. 그의 말은 차갑도록 객관적인데, 실상 이 소설의 시선은 기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기자의 윤리는 팩트와 육하원칙에 근거하는 것이다. 인간의 팩트는 몸이고 그 몸의 육하원칙은 생로병사일 것이다. 그래서 김훈은 몸과 그 생로병사를 기록하는 데 몰두한다. 그런 맥락에서 아내의 죽음과 추은주의 생명(출산)은 그것이 모두 '몸의 일'이라는 측면에서는 원리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 타자들 앞에서 또 다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가 인간에게는 몸이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일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그 몸의 일들이 갖는 '의미'이다. 사실과 의미 사이에는 아득한 거리가 있다.

"내 두 눈을 찌를 듯이, 그렇게 확실하게 살아서 머리타래를 흔들며 밥을 먹고 있는 당신의 모습은 매몰된 지층 밑의 유적이나 풍문처럼 아득하고 모호했습니다. 그 확실함과 모호함 사이에서 저는 아둔하게도 저 자신의 빗장뼈와 목 밑 살을 더듬고 있었지요."(「화장」 57-8쪽. 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

타자는 존재론적으로 확실하고 인식론적으로 모호하다. 그래서 너라는 타자는 바로 그곳에 확실하게 있지만 나의 부름은 너의 이름, 혹은 너라는 존재의 의미들에 닿지 못한다. "어째서, 닿을 수 없는 것들이 그토록 확실히 존재하는 것인지요."(79쪽) 이것은 한 남성이 다른 여성을 향해 발설하는 탄식이지만 이를 남녀의 문제라고 한정할 수는 없다. 「언니의 폐경」에서 자매들은 생리의 체험을 공유하지 못한다. "나는 내 몸의 느낌을 언니에게 설명할 수가 없었고 불덩이 같은 것이 왈칵 쏟아져 나온다는 언니의 느낌에 닿을 수 없었다."(「언니의 폐경」 234쪽) 여성이 남성에게 타자라면, 여성은 여성에게도 타자일 것이다. 몸이라는 확실하고도 모호한 것이 그들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난감하고도 근본적인 어떤 문제이다. 존재와 의미의 이 간극은 타자의 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들, 예컨대 병이 생겨나고 고통을 느끼는 일들과도 관련된다. "종양의 발생과 팽창은 생명현상이다. 종양과 생명을 분리시킬 수는 없다."(38쪽) 아내의 종양을 존재론적으로 승인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도대체 그것의 의미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의사의 설명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은 비어 있었다."(「화장」 38쪽) 타인의 고통 앞에서도 나는 무력하다. 고통 역시 존재론적으로 확실하지만 인식론적으로는 모호하다. 아내의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 고통으로 건너갈 수 없고 닿을 수 없다. "나는 아내의 고통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아내의 고통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고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화장」 46쪽)

이런 식의 세계관은 정말이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의 고통은 윤리적이다. 그래서 그가 추은주에게서 "지층 밑에 묻혀버린 먼 고대국가"(「화장」 54쪽)를 떠올릴 때 그런 문장들에서 '여성=자연, 남성=문명'의 도식을 읽어낸다면 그것은 난감한 일이다. '고대국가'는 존재론적으로 확실하지만 인식론적으로 모호한 타자성의 은유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가히 해부학적이라고 해야 할 시선으로 파고들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하거나 아예 말하지 않는 그의 태도이다. 이것이 기왕의 한국소설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김훈의 유물론이고 유물론적 타자론이다. 이를 두고 냉혹하다고 말하는 것은 동어반복이 아닐까. 아마도 냉혹한 것은 주체와 타자 사이의 그 간극일 것이지 그 간극을 기록하는 자의 시선이 아닐 것이다. 이를 두고 '여성의 대상화'를 운위하는 것 역시 동어반복이 될 것이다. 김훈이 주로 여성을 '대상화'한다면 그것은 남성에게 가장 아득한 타자가 바로 여성이기 때문이다. 나쁜 것은 동일화이지 대상화가 아닐 것이다. 대상화는 불가피하다. 예컨대 "수많은 질들의 개별성을 극복하기가 어렵다"(「화장」 51쪽)와 같은 문장이 씌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타자의 대상화에 관한 한 그의 태도가 그토록 완강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실로 우리의 인간주의적 통념을 불편하게 한다. 만약 인간주의(휴머니즘)라는 말이 '만물의 척도인 인간은 세계를 형성하고 개선할 자유와 책임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면, 김훈은 확실히 그런 의미에서의 휴머니스트는 아니다. 그리고 김훈의 이런 반(反)인간주의는 현대의 여러 이론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천명해 온 반인간주의적 입장과 만난다. 알려진 대로 알튀세르는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천명했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철학적 신화들을 잿더미로 만들면서만 인간의 어떤 것에 대해 '인식'할 수 있다."(「마르크스주의와 인간주의」) 그에게 인간주의란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방해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라캉의 반인간주의는 정신분석학적 윤리학의 구상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실천적 반인간주의'(지젝, 『How to read Lacan』 3장)라고 할 만하다. 인간적인 것의 한 가운데에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어떤 것이 있다, 그것과 고통스럽게 대면하지 않는 모든 윤리학은 허위다, 라는 것이 정신분석학적 윤리학의 공리다.

이런 논점들은 김훈의 반인간주의도 얼마간 공유하는 것들이다. 그는 "한국 문학의 거의 대부분은 인간에 대한 연민의 바탕 위에서 놓여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연민의 문학을 거절하는 까닭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을 명철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아름다운 통념들을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인간을 믿지 않고 연민하지 않을 때 역설적이게도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능해진다, 라고 그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반인간주의는 역설적인 인간주의가 된다. 그가 『토기』 이후 『칼』을 쓰게 된 데에는 개인적인 연유가 있을 것이나, 논리적으로 보자면 그 선택은 매우 자연스럽다. 반인간주의적 인간주의가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이 그에게는 필요했을 것이다. 몸, 타자, 그리고 세계. 이 완강한 유물론의 삼각형을 구현할 수 있는 최상의 시공간을 찾아 그는 떠났다. 우리가 흔히 '역사'라고 부르는 곳이다.

 

4. 몰락의 윤리

 

소재로서의 '역사'란 무엇인가.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는 시공간이다. 어떤 경우에도 우륵은 551년에 신라에 투항하여 신라 관원 세 사람에게 가야금을 전수한 후 숨을 거둘 것이고, 이순신은 1598년에 노량 앞바다에서 전사할 것이며,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칸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릴 것이다. 역사의 시공간은 완결되어 있고, 누구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토기』에서 소방관은 소방관답지 않게 말이 많았으나 『칼』의 무인은 말이 없다. 당대는 열려 있다. 열려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 열려있음과 싸워야 한다. 『토기』에 그토록 많은 사변적 언설들이 필요했던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닫혀 있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역사적 시공간을 도려내는 것만으로 특정한 세계관은 전달될 수 있다. 이제 그가 왜 역사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헤아릴 수 있다. 그는 역사의 진실을 복원한다거나 과거에서 미래의 길을 읽어낸다거나 하는 취지와는 무관한 곳에서 쓴다. 그에게 역사는 우리의 현재가 이미 '역사'라는 형식으로 과거에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수단에 가깝다. 그에게 역사는 '닫힌 당대'다.

세 편의 장편 소설에서 인물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은 헛것을 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들은 헛것을 정밀하게 짜 맞추어 충과 의의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의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았다."(『칼』 18쪽) 말하자면 팩트에 입각하지 않은 채,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기를 쓰고 말하는 자들의 세계에 그들은 있다. 이것은 이순신의 독백이지만 우륵의 독백이기도 하고 인조의 독백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의 바깥에서, 모두가 헛것을 쫓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판단이 그들 당대의 판단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이의 판단이라는 것이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칼』 21쪽)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자의 시선에서 보면 당대의 그 모든 칼부림과 말부림들은 헛것과의 투쟁, "난폭한 무의미"(『토기』 128쪽)일 뿐이다. 그러니 무사와 악사와 임금은 '선택 가능성'이라는 차원에서는 모두 등가(等價)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다."(『칼』 65쪽) 이들의 태도는 역사의 진행 방향에 개입하여 그것을 진보로 이끄는 영웅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그들의 소관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닫힌 공간에서는 도대체 무엇이 가능한가. 아수라의 현장에서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인간의 존엄은 자신의 몰락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뿐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것, 이것이 김훈이 역사에 경의를 표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만 그 양상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칼』 65쪽) 김훈의 이순신은 전쟁터에서 죽기를 선택한다. "소리는 살아 있는 동안의 일"(『현』 60쪽)이기 때문에, 설령 한 지옥에서 다른 지옥으로 가는 길이 될지라도(『현』 226쪽), 우륵은 신라로 투항해 소리를 지키고 자연사한다. "임금의 몸이 치욕을 감당하는 날에, 신하는 임금을 막아선 채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는 백성들이 살아남아서 사직을 회복할 것"(『산성』 9쪽)이어서 또한 인조는 치욕을 무릅쓰고 백성을 지키기를 선택한다. 이것이 그들의 선택이다. 본래 소설의 결말은 가능한 것의 장(場) 안에서 불가능한 것이 솟아오르게 하여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좌표를 뒤흔드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결말의 정치학이고 몰락의 윤리학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역사소설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미 결말이 정해져 있는 엄격한 사실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늘 그래왔듯 김훈의 소설은 가능한 것(말할 수 있는 것)과 불가능한 것(말할 수 없는 것)의 냉정한 분별 위에 서 있다. 좌표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김훈의 소설은 역사소설이어야 했고,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이념도 없고 민족도 없고 진보도 없다. 다만 한 내면의 구원이 있을 뿐이다. 이는 항간의 우려와는 달리 김훈의 소설이 결코 영웅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특정한 이념의 뒷받침 아래 민족의 욕망을 재현하면서 진보를 견인하는 인물이 영웅이다. 그러나 김훈의 인물들은 영웅이 되기보다는 다만 자신의 삶의 구체성들에 충실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려고 한다. 이순신은 바다의 사실에 입각할 뿐이고, 우륵은 소리의 본질에 충실할 뿐이며, 인조는 임금의 도리를 다할 뿐이다. 그들의 내면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담론은 그야말로 고담준론이다. 이는 김훈의 소설이 정치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도 좋다. 그의 소설들은 근본적으로 반정치적 소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의 소설은 역설적이게도 정치적인 소설로 읽히고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의미심장한 경향 중의 하나는 정치에 대한 거부다. 마치 정치 같은 것은 본래 없었다는 식이다. 2007년의 한국인들이 자기 삶을 규정하는 근원적 요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정치(담론)가 아니라 경제(생존)다. 김훈의 주인공들은 정치에 자신의 운명을 의탁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독자로서 스스로 입법한 윤리적 기율을 따를 뿐이고, 고담준론하는 정치 속에서 자신의 생을 존엄하게 도모하는 길을 찾는다. 이와 같은 반정치성이 이 시대의 어떤 기류와 공명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반정치성은 반역사성으로 이어진다. 이제 우리는 김훈 소설의 핵심부로 진입하려고 한다.

 

5. 자연사(自然史)의 이념

 

자연 속에서 인간들은 역사를 만들지만 역사 안에서 자연은 죽어 없어지지 않는다. 김훈의 소설에서 공들여 묘사되는 자연은 여느 역사소설에서처럼 인간의 배경으로 물러나 있지가 않다. 늘 이미 그 자리에 있는 자연의 어느 한 시공간에서, 인간의 생멸이 부질없이 밀려왔다 밀려가고, 자연은 다시 늘 이미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 이것은 역사이되 역사일 수가 없다. 그가 다루는 과거의 한 시대는 이전 시대와 단절하는 계기가 되거나 이후의 미래를 예비하는 출발점으로 기록되지 않는다. 이순신의 죽음도, 우륵의 죽음도, 남한산성의 굴욕도 결국에는 자연에서 나와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거대하고 공허한 시간의 한 마디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 저녁에도 나는 적에 의해 규정되는 나의 위치를 무의미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힘든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지는 어느 날, 내 몸이 적의 창검에 베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은 결국 자연사일 것이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지는 풍경처럼, 애도될 일이 아닐 것이었다. (『칼』 65쪽)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가야를 태우는 연기가 강 건너로 밀려왔다. 연기에 덮여 건너편 산맥이 흐려졌다. 이사부를 태우는 연기가 가야를 태우는 연기와 섞이면서 넓게 퍼졌다. 강에 안개가 걷히고 바람을 하류 쪽으로 불어갔다. 연기가 강을 따라 길게 흐르면서 물굽이를 돌아갔다. (『현』 275쪽)

이순신의 죽음은 비 내리고 바람 부는 일 속에서 가뭇없고, 죽인 자와 죽은 자의 연기는 결국 뒤섞여 하류 쪽으로 흘러간다. 이 인용문들을 한 문장으로 축약하면 그 문장의 구조는 "우륵은 가을에 죽었다"(『현』 286쪽)와 같은 형식이 될 것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가을에 우륵은 죽었다'와는 전혀 다르다. 인용한 문장에서 '가을에'는 주어('우륵은')와 술어 ('죽었다') 모두를 가운데에서 장악해버린다. 문법상의 주어는 우륵이지만 실제상의 주어는 가을이라는 말이다. 가을이 오듯 한 생명은 죽는다. 바로 이것이 김훈의 소설을 막막하게 만든다. 역사와 자연의 우열이 전도되어 있다는 것 말이다. 이런 식으로 김훈의 역사소설은 역사소설이되 역사의 목적과 진보를 승인하는 '역사주의'와는 무관한 곳으로 간다. 그는 이미 첫 번째 소설에서부터 "인간으로부터 역사를 밀쳐내버릴 것을 도모"(『토기』 자서)하였다. 이 반(反)역사주의가 내장하고 있는 사관은 차라리 '자연사(自然史, Naturgeschichte)'의 그것에 가깝다. 굳이 명명해야 한다면, 그의 소설은 '역사소설'이 아니라 '자연사소설'이다.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무상(無常)한 것이라는 인식이 소위 '자연사의 이념'이다. 역사는 몰락의 과정일 뿐이고, 역사가 남긴 것은 잔해와 파편일 뿐이라는 인식이 그 이념 안에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특정 시기의 국면을 인류 역사 전체로 확대해서 일반화하는 무지의 소치이며, 역사의 진행을 무위로 돌리는 반동적인 입장인가. 이 물음을 던지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그의 소설이 품고 있는 자연사의 이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역사와 자연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로 구분하고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는 서로를 조건 짓는다고 적었다(『독일이데올로기』). 마르크스는 자연과 역사의 대립을 지양하는 변증법을 사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을 제압하면서 찬란한 문명을 구축해 온 것으로 간주되는 인간의 역사에서 거꾸로 변함없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자연의 항구성을 인식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수천수만 년 동안 변함없이 인간을 규제해온 것으로 간주되는 자연의 거대한 힘 속에서 거꾸로 역동적으로 진보해온 역사의 과정을 인식해야 한다. 이 두 인식은 정확히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아도르노는 이렇게 적었다. "사상의 과제는 모든 자연과 자연으로서 설정되는 모든 것을 역사로 파악하고, 또한 모든 역사를 자연으로서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연과 역사는 '항상적인 자연'이라는 신화와 '항상적인 진보'라는 신화를 깨는 상호비판적인 규제이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변증법의 한 축을 가장 강력하게 감당하고 있는 것이 김훈의 소설이다. 우리는 그의 소설에서 역사를 관통하면서 울려 퍼지는 자연의 거대한 울음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울음 속에서 인간의 역사를 향해 제기되는 강력한 항의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의 소설이 품고 있는 그 막막한 무상함(Verganglichkeit) 속에서 자연과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교섭한다. 다시 아도르노의 말이다. "무상함을 통하지 않고는 초월성에 대한 어떤 기억도 불가능하다. 영원성은 그 자체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덧없는 것을 통해 파손된 상태로 나타난다." 초월성의 기억과 파손된 영원성이 그 안에 있지 않다면, 김훈의 소설이 우리에게 감동적일 리가 없다.

김훈의 소설이 지향하고 있는 탈정신성과 무매개성이 멀게나마 파시즘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세간의 지적에 대해 김훈은 대답한다. 그 말은 옳다, 그러나 정신주의가 공허하다는 견해도 마찬가지로 옳다. 동일한 논법이 다음과 같이 성립될 수 있다. 김훈의 소설이 터하고 있는 '자연사의 이념'이 지나치게 허무주의적인 것이 아닌가 하고 누가 말한다면, 그 말은 옳다. 그러나 역사에는 목적이 있고 진보가 있다는 '역사주의'가 공허하다는 말도 마찬가지로 옳다. 그는 인류의 역사가 약육강식의 질서로 움직여왔다는 것을 '긍정'할 수는 없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인정하되 긍정하지 않는 길이 어려운 길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긍정과 인정 사이에 그의 역사철학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남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의 역사철학이 갖고 있는 단호함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는 그 윤리학의 단호함이다. 그 단호함이 그의 매력이지만 동시에 그의 벽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데리다는 어떠한 법칙도 없는 곳에서만 윤리학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이지 모를 때 책임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런 모험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세계 안에서는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다. 기자의 윤리 혹은 사관(史官)의 윤리는 모험을 알지 못한다. 그가 당대를 다룬 소설로 다시 돌아온다면, 결말이 정해져 있지 않은 당대의 그 막막한 열려있음 앞에서, 그는 이 모험의 불가피성에 대해 숙고하게 되지 않을까. 기자 혹은 사관은 모험하는 '마성적 주인공'(루카치 『소설의 이론』)의 자리로 옮겨갈 수 있을까. 그가 앞으로 쓰게 될 소설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되어줄 것이다.

 

자료 4) 김훈, 『공무도하』 중에서

 

그는 인간의 존재를 표준으로 내세워 이 세계를 안과 밖, 이쪽과 저쪽으로 구분하지 않았고, 사물과 풍경에 함부로 구획을 설정하지 않았으며, 그의 언어는 개념을 내세워서 사물을 무리하게 장악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모든 보이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과 친화할 수 있었고, 친화로써 비밀에 닿았고, 그 친화의 힘으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통로를 열었고, 그 통로를 따라 글은 전개되었는데, 그가 찾아낸 비밀을 단순하고 또 명료해서 비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의 문체는 순했고, 정서의 골격을 이루는 사실의 바탕이 튼튼했고 먼 곳을 바라보고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자의 시야에 의해 인도되고 있었다. 그의 사유는 의문을 과장해서 극한으로 밀고 나가지 않았고 서둘러 의문에 답하려는 조급함을 드러내기보다는 의문이 발생할 수 있는 근거의 정당성 여부를 살피고 있었다.

그의 글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하려고 떼를 쓰지 않았으며 논리와 사실이 부딪칠 때 논리를 양보하는 자의 너그러움이 있었고, 미리 설정된 사유의 틀 안에 이 세상을 강제로 편입시키지 않았고, 그 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세상의 무질서를 잘라서 내버리지 않았으며, 가깝고 작은 것들 속에서 멀고 큰 것을 읽어내는 자의 투시력이 있었다. (25-6쪽)

 

자료 5) 김훈·홍세화 대담, 2007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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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남한산성>을 잘 읽었습니다. 그 소설 속 상황을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관련해서 이해하는 이들도 있다는데, 저는 거기에는 별로 동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냥 쉬운 이야기부터 하죠. 김 선생의 경우에는 글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김: "글이요? 글쎄요. 저는 사실 글을 쓴다는 일에 대해서 아주 잔혹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에요. 제가 글을 쓰는 것은 아직도 내가 내 자신을 훈련시키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죠. 글에서, 말하자면 예술가로서의 자유 같은 건 저에게 일체 없는 거예요. 이것이 저에겐 노동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죠. 밥을 벌어먹는 노동이기 때문에 그건 끔찍한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거죠."

홍: "뭐, 저에게도 글쓰기가 비슷한 밥벌이의 수단인 건 사실인데, 꼭 그것만은 아닌 것 또한 사실이죠. 역시 글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소통의 문제를 무시할 순 없다고 봅니다."

김: "저도 홍 선생께서 쓰신 책을 많이 봤는데, 역시 지금 말씀하신 소통의 문제, 소통을 통해서 세계를 개조하려는 열망, 그런 것들을 읽을 수 있었어요. 근데 글이 세계를 개조하는 수단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매우 아득하고 신뢰하기가 어렵고 위태로운 말처럼 들리기도 해요. 그것은 글을 쓰는 자들의 절망적인 답답함인데, 무기는 세계를 개조하잖아요? 미국의 무기는 오늘 아침도 이 세계를 정확하게 때려부셔가지고 개조해 버리는 것이죠. 그 개조의 방향이 옳든 그르든 간에 그네들의 이익에 맞게끔 세계를 개조하는 것이죠. 근데 말이 세계를 개조한다는 것은 거기에 비하면 참 아득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나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안 믿는 사람이에요."

홍: "지금까지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볼 때 지금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 그러한 현실에 저항해 온 사람들에 의해서 그나마 지금과 같은 정도의 이성적인 사회가 가능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인간은 물론 전쟁을 일으키는 도구적 이성의 소유자임에 틀림이 없지만, 동시에 성찰적 이성 역시 지니고 있어서 그걸 토대로 부당한 현실을 상대로 한 싸움을 계속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글쓰기 작업도 그런 것의 하나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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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다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사는 이들. 그러나 개인적인 글쓰기의 동기, 그 바탕을 이루는 세계관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탐색전을 생략한 채 득달같이 일합을 겨룬 느낌이었다. 과열된(?) 분위기도 식힐 겸 두 사람의 성장기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 보았다. 홍 위원이 1947년 12월생이고, 김훈씨는 1948년 5월생이어서 두 사람은 5개월여의 시차를 두고 같은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김훈씨가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두 사람은 같은 학번이 되었는데,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이르도록 한 번도 같은 학교에서 만나지는 않았다.

김: "제 어린 시절은 가난과 억압뿐이었어요. 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왔는데 거기서 좀 자라서 왔어요. 거기서 미군이 철조망 너머로 던져주는 껌과 초콜렛을 얻어먹었죠. 대학 들어갈 무렵 나와 내 친구들의 꿈은 오직 하나였어요. 밥을 먹는 것. 밥. 밥을 좀 먹는 나라를 만들어서, 도대체 밥 세 끼를 좀 먹고 살아야겠다는 소망이 있었어요. 간절한 소망이었죠. 우리는 고조선때부터 그 시대까지 밥을 못 먹었어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보면 해마다 굶어죽은 놈이 수만명씩 나오잖아요. 그리고 우리 어렸을 때도 해마다 보릿고개만 되면 굶어죽었어요. 우리 정부의 행정구호가 '기아퇴치'였다고, 기아퇴치. 밥을 먹는 나라를 만들려는 게 우리들의 비통한 소망이었지. 근데 우리는 밥을 먹는 나라를 만드는 데 성공했어요. 그러니까 그 시대의 박정희 대통령이 밥을 먹는 나라를 만든 것이고 우리는 그 밑에서 노예처럼 일했어요. 마소처럼 일하고 개처럼 짓밟히면서 일해가지고 밥 먹는 나라를 만든 거예요."

홍: "전후의 상황이라는 게 대부분이 가난했고 저 역시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어요. 그나마 조금 나은 축에 속한다고 할까. 고등학교 때까지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해서 빨리 출세를 하나 하는 것이었죠. 처음에는 영어보다 수학을 잘해서 이과를 갔고 공대에 들어갔는데, 바로 대학 들어간 해에 한국 현대사에 대해서, 내 가족이 6.25 당시에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던가를 통해서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있었어요. 아까 '기아퇴치'라고 하셨는데 전 그에 관한 기억은 별로 없고 대신 학교 담벼락마다 붙어 있었던 '반공방첩'이라는 구호가 아주 강력하게 남아 있어요. 저 역시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 구호를 저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였는데, 대학에 들어가면서 그 가치관이 붕괴되고, 그래서 공대고 뭐고 다 재미없어지고 방황하게 된 시기가 바로 20대 초반이었어요."

김: "전 대학 졸업을 못했어요. 영문과를 다니다가 중퇴를 해버렸는데, 그리고 다시는 대학에 들어가지 않았고. 내가 그때 학교를 그만둔 것은 돈이 없어서였어요. 등록금이 없어가지고. 그런데 지금 밥 얘기를 더 하자면, 밥을 먹는 세상을 만들어 놨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악과 억압과 비리를 저질러 가지고,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에요. 야, 밥을 먹는 것에 대한 무서운 대가가 바로 그거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죠. 노무현 대통령은 아마 우리가 밥을 먹는 과정에서 벌어진 구조적인 악들에 도전했다가 참패하신 것 같아요. 그분이 참패한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을 개조하고 거기에 도전하는 일은 차기 정권의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계승해 나갈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박정희, 이승만 이후로 깔려버린 구조화된 악과 억압이라는 것은 정말로 만만치가 않은 것이죠. 노 대통령 같은 낭만주의나 대중주의, 혹은 민주주의의 힘으로도 그것은 부술 수가 없는 훨씬 더 뿌리깊고 강한 구조적인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어요. 이만큼 생각한 것도 나로서는 상당히 사고가 진보된 것이죠. 그 전엔 그런 생각 안 했어요." (웃음)

홍: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 같아요. 저는 노무현 대통령과 그 지배세력들이 민중이나 이런 걸 표방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명분과 실리를 같이 취하려다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죠. 그것이 물론 지금까지 말슴하신 대로 축적된 모순과 60년 가까이 수구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는 물적 토대, 각 부문별로 결합되어 있는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대한민국 국민이 변화를 요구하면서 노무현 정부를 세웠던건 사실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과반수의 국회의석도 주었고. 근데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결국 자기를 뽑은 민중을 스스로 배반한 결과라고 저는 생각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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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에서 노무현에 이르는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에서 두 사람은 예상 가능한 차이와 뜻밖의(?) 공감대를 보였다. 두 사람이 공감대를 이룬 바탕에 <한겨레> 입사동기라는 인연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이쯤 해서 2002년, 두 사람이 <한겨레>에서 한솥밥을 먹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두 사람은 어떤 계기로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한 것일까.

김: "당시 저는 혼자 구석방에 들어앉아서 책만 읽고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내가 완전히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유령 같은 인간이 되어 가고 있구나 하는 위기를 느꼈어요. 어디론가 다시 삶의 현장으로 나가지 않으면 나 자신이 괴멸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당시 김종구 사회부장(현 편집국장)에게 찾아가서 채용해 달라고 부탁했죠. 신문사에 들어갔더니 월드컵의 대규모 거리 응원이 벌어지고, 그 다음에 효순이 미선이 사건, 이어서 대통령 선거까지 대중들의 힘의 폭발이 이어졌어요. 월드컵은 놀라웠죠. 난 그런 대중의 힘을 처음 봤어요.
대중의 힘은 매우 맹목적인 것 같기도 했는데, 효순이 미선이 사건에 이어 대선까지 그 분위기가 이어지는 걸 보면서 '난 다시 집으로 가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내 밀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대통령이 당선되던 그 다음날 사표를 내고 <한겨레>를 떠났죠. 미선이 효순이 사건, 그것은 범죄는 아니었죠. 사고였어요. 그런데 그것을 범죄로 몰아가고 결국 반미주의로까지 끌고 나가는 일련의 흐름에서 <한겨레>는 자기의 사명을 다했죠. 그 과정을 바라보면서 '내 생각하고는 상당히 다른 사람들의 집단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것이 나와 <한겨레>의 큰 갈등이었어요."

홍: "저는 프랑스에 머물다가 귀국하게 된 계기가 바로 <한겨레> 입사였어요. <한겨레>에 입사하기 위해서 귀국한 것이죠. 그런데 저는 처음 들어올 때부터 어떻게 해서든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죠."

김: "심하다, 심해." (웃음)

홍: "미선이 효순이 사건은 말씀하신 대로 사고인 게 분명하죠. 그런데 만약 미군쪽에서 처음부터 그것에 대해서 그야말로 점령군이 아닌 평등 차원에서의 선언이나 이런 것이 나왔다면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빠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사건이라고는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한·미 간의 구조적인 문제, 역학 관계에 대한 인식을 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는 <한겨레>가 역할을 하는 게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감정적 부분을 동원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 때문에 점령군이라는 미군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죠."

김: "그것은 대중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결과도 되었으리라 생각해요. 효순이 미선이 사건은 앞으로도 언론의 보도와 관련해서 고통스러운 전례를 남긴 것입니다. 안타까운 사고를 계기로 미군과 미국측의 태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생산적인 결과라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대중의 이성이 매우 교란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홍: "그것은 참 어려운 문제죠. 우리처럼 지독한 미국중심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는 사회에서 대중의 이성은 벌써 오랫동안 마비되어 온 것이 사실이거든요. 거기에서 어떻게 균형감각을 가지게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게 무척 어려운 지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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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아까 소통에 관해 말씀하셨죠. 제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의 말들이 당파성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과 의견이 뒤죽박죽이 되는 일이 많아요. 의견을 사실처럼 말해버리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당파성이 지향하는 바의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언어의 소통기능은 점점 마비되고 언어는 무장하게 되는 것이죠. 무장된 언어가 사회를 막 교란하고 뒤집어엎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결국 말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시대 언어의 풍경인 것이죠."

홍: "동의합니다. 예컨대 인터넷이 활성화하면서 마치 인터넷이 쌍방향간의 소통의 장이 열린 것이다 라고 하지만 저는 회의적입니다. 토론이란 자기 견해를 밝히는 것뿐 아니라 남의 견해도 들으면서 자기 견해를 수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이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바로 배설해버리는 식인 것 같아요. 그것은 집단의 외피를 쓴 이기적인 개인들의 뻔뻔한 때문인 것 같아요. 집단의 뒤에 숨어 있는 개인들이 문제인 거죠. 그리고 그게 다 경제지상주의적 가치관 때문인데, 경제사회에서 문화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토론과 교육, 소통에 기댈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해요."

김: "민주사회에서 공동체적인 가치를 위해서 개인의 이익을 양보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고,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는 토대 위에서 이 사회는 이루어진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전개되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홍: "그와 관련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관해 조금 말해 보죠. 저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가장 중요한 건 문화적인 측면에서 접근을 해야 하는 점이라고 봅니다. 특히 농촌의 피폐화가 걱정이에요.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나,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면 그야말로 무서운 변화가 올 수도 있는데, 그런 부분들에 대한 성찰이 너무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죠."

김: "저는 한 나라는 이념이 아니라 이득을 추구해야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국가의 도덕성이라고 생각해요. 국가가 이익을 이행하는 것은 도덕적인 일은 아니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부도덕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도덕이나 부도덕을 말할 수가 없는,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저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이득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참 따지기 어려운 것이죠. 나는 우리 정부가 그것이 결국 이득이 되게끔 앞으로 그걸 헤쳐 나가야 하고 그 이득이 제발 국민 각계각층에 골고루 미치는 이득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죠. 난 자유무역협정은 잘했다고 생각해요.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된 다음에 <한겨레>가 노무현 대통령의 이념의 일관성을 집요하게 시비한 적이 있었어요. 노무현이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했는데 이것은 진보의 일관성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를 따지는 것은 참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전 그런 기사가 나올 때 <한겨레>를 좋아하지 않아요. 다만 농민이라는 한 계층 전체를 희생시키면서 이걸 추진한다는 것은 참 무리하고 부당하고 부도덕한 측면이 조금 있어요. 그에 대해서는 정부의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마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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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자유무역협정에 와서 다시 부딪쳤다. 얘기가 다시 격렬해지려는 참에 마침 찻집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 대신 적포도주가 곁들여지면서 좀 더 솔직하고 내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두 사람은 음식을 앞에 두고 다시 배 고팠던 지난 시절을 회고한 다음, 요즘 젊은이들이 소중한 청년기를 너무 소홀히 보내는 것 같다는 데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찍었다는 김훈씨가 노무현 정부에 대한 기대를 표한 것은 다소 뜻밖이었다.

김: "저는 노무현 대통령께서 정말 약자의 편이 되기를 바랐어요. 전 노 대통령 치하에서 세금 많이 냈습니다. 세금 낼 때 기분이 좋았어요.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책을 써서 인세를 받아서 세금을 많이 낸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었어요. 저는 의료보험도 많이 냈어요. 우리 시대의 분배에 기여한다면 정말 좋은 일이죠. 그런데, 신문 보니깐 아니더라고. 강남의 성형외과 의사, 소득세 50만원 올렸다고 시위하고 말이죠. 우리나라 조세정책은, 대통령의 리더십은 거기서 망가지는 것 같더라고요."

홍: "그렇게 당연히 사회에 내놔야 되는 사람들이 정작 내놓지 않는 그 문제에 대해서 당연히 분노해야 되는 것이죠."

김: "저 분노하고 있어요."

홍: "분노의 방식이 문제인데요. 분노가 어떻게 표현되고, 어떻게 바꿔나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요."

김: "그건 권력이 해야죠. 정치권력이."

홍: "한국과 같은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거대 언론과 기득권 세력이 버티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정치권력이 그런 일을 순조롭게 하리라고 믿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 아닐까요?"

김: "무슨 말씀인지 알겠는데, 저는 <한겨레>가 기본적인 객관성을 가지길 바랍니다. 부는 악이고 빈이 선이다, 라는 이분법을 버려야죠. 노동은 선이고 자본은 악이다, 그런 이분법적 정서가 있는 거잖아요. 전 그렇게 생각 안해요. 지금 한국 노동의 문제는 노동세력 타락의 문제예요. 노동귀족들의 타락에 국민들은 절망하고 있죠."

홍: "그걸 과연 노동귀족들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있구요. 또 하나, 한국 사회에서는 타락할 권리가 있는 사람과 타락할 권리조차 없는 사람으로 나뉘어진다고 봅니다. 어느 자리에 서면 다 타락합니다. 타락하게 되어 있어요."

김: "홍 선생의 전공이 '똘레랑스'입니다만, 똘레랑스라는 건 본래 보수주의자의 것이었어요. 우리가 빼앗긴 거죠. 보수주의의 관용 안에서 많은 걸 해결할 수 있고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구요. 그런데 그걸 놓친 거예요. 보수주의자가 타락해서 자기 기득권만 방어하면 된다, 이런 식이 되면서 망하게 된 거죠."

홍: "'똘레랑스'의 어원 자체가 참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그것을 관용이라고 하기보다는 용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차이를 받아들인다는 거죠. 가장 정확한 것은 사자성어 '화이부동'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똘레랑스'를 이야기하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바로 수구세력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앵똘레랑스에 대한 반대라는 측면이었습니다."

김: "저는 우리 현행법에 모든 정의와 개념이 있다고 생각해요. 법치주의를 완성해야 합니다. 법치주의의 틀 안에서 '똘레랑스'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법치주의를 깨자고 들면 곤란하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이죠. 인간의 능력이나 경제적 처지가 평등하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죠. 다만 법률 앞에 평등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홍: "김 선생과 저는 사회를 관찰하고 해석하고 데에서는 많은 부분 일치하는데,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하는 데에서 갈라지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대로 우리 사회에 힘의 논리가 관철될 때 기본적으로 그 힘은 법에 의해 규제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 법조차 힘의 논리에 의해서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앞서 부와 빈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한겨레> 논조가 부는 악이고 빈은 선이다, 그런 것은 아니죠. 그것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빈곤이 죄악시되고 있는 것에 대한 반사물이라고 봅니다."

김: "가난은 탈피할 대상이지 장려 대상은 아닙니다. 옹호할 가치는 아니죠. 가난에 선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우수한 것은 아니에요."

홍: "우리가 공화주의를 지향한다고 할 때, 그 핵심이라 할 애국주의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한 사회에서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위함을 받았다는 경험 때문이 아닐까요. 한국에서는 그런 경험이 없죠. 끝없이 관리통제의 대상이 될 뿐이죠. 자발성이 없는 거예요. 이를테면 무상교육 얘기를 해 보죠. 그것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육자본 형성 비용을 사회가 대준다는 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계층간 연대와 세대간 연대가 이루어진다는 데에 핵심이 있는 겁니다. 소득이 많은 사람이 소득이 적은 사람의 비용 대주는 것이 계층간의 횡적연대라면,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을 가령 국민연금 같은 형태로 돌려주는 것은 세대간의 종적연대라 할 수 있는 것이죠. 나로 하여금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준 윗세대가 은퇴할 때 그들에게 지금의 경제활동 인구가 받은 것을 되돌려준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죠."

6
식당 역시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 이야기를 시작한 지 벌써 여섯 시간이 훌쩍 넘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보는 세상과 <한겨레>에 대해 열변을 토했지만, 초반과 같은 팽팽한 긴장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포도주로 불콰해진 얼굴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보였다. 김훈씨가 대담을 마무리하는 발언을 했다.

김: "저는 사실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우리 둘이 매우 다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말을 나누어 보니 기본은 같다는 걸 알았어요. 그런데 방향은 정말 달라졌네요. 그도 그럴 것이 삶의 여정이 매우 달랐잖아요. 그런 만큼 서로를 더 존중하고 긍정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의 바탕이 천진해야 해요. 천진성이 있어야죠. 천진성이라는 게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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