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 향기

공선옥, 명랑한 밤길. 2007. 창비

by 아프로뒷태 2011. 12. 3.

 

소설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상처입은 존재들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아픔을 드러내놓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힘을 얻고 희망을 찾는다. 작가는 그간 공선옥 작품을 수식하던 '모성'의 이미지를 넘어서 우리 시대 사람들 누구나 받게 마련인 상처를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그 상처에서 비롯된 삶의 의지를 타인과의 연대의식으로 확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희는 언제 우는가?」

 

 

 

 

'아이, 아이, 애란 어미 어디 갔느냐' 영희의 시고모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영희를 보며 남편이 죽었는데 곡을 하지 않는다고 눈총을 준다. 남편의 초상중인 영희는 곡을 하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화장실도 잘 다녀오고 밥도 잘 먹는다. 눈이 내리는 초상날, 나는 남편의 죽음을 맞고도 곡을 하지 않는 영희와 그런 영희를 나무라는 시고모, 또 그런 시고모를 미워하는 아이들을 관찰한다. (현재)

 

 

'이 차가 광주 가는 차 맞나요?' 나는 영희 남편의 부고 소식을 듣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간다. 광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남자를 만난다. 남자역시 광주로 행하는 길이다. 히터가 후끈한 버스 안에서 나는 몸이 욱신거리고 춥다고 느낀다. 지난 밤, 남편과 부부싸움을 해서이다. 남편은 경마장이나 카지노를 떠돌며 돈을 달라고 나를 협박했다. '나는 남편에게 나가라고 악을 썼고 남편은 내가 악을 쓰는 것에 맞추어 나를 두들겨 팼다. 슬기엄마와 내 아이들이 합세하여 남편을 몰아내지 않았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남편은 집을 나갔다. 그리고 착한 영희 남편은 저세상으로 갔다. 영희나 나나 신세가 엉망이긴 마찬가지이다. 나는 광주로 가는 버스안에서 몸살을 앓는다. 그런 나에게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자신의 코트를 건넨다. 나는 코트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코트에서 나는 냄새가 마음을 흔든다. '얼핏 맡아지는 어떤 냄새, 오래된 기억 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냄새가 바로 남자의 옷에서 났기 때문이다. 내게 한 번 왔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냥 가버린 그 냄새. 더욱더 기이한 것은, 그 냄새인 것 같다가, 차츰 그 냄새라고 단정을 짓고 나자, 욕망인 것도 같은 혹은 분노인 것도 같고 그리움인 것도 같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어떤 감정 하나가 불쑥 고개를 들이민 것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이제야말로 그 냄새가 나는 옷의 주인에게 매달리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과거)

 

 

'비가 온다, 비가 와' 영희는 비 내리는 휴일이면 부침개를 부쳤다. 나는 영희와 공장을 다니며 3년간 같이 자취생활을 했다. 영희는 여느 또래들처럼 대학을 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다. 나역시 내색하지 않았지만 영희의 말에 동의하면서 내 의견을 내비추었다. 영희와 나는 모처럼 휴가로 해수욕장에 갈 일이 있어도 형편이 안 되면 우리가 그렇지 뭐. 하며 못가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대신 영희와 나는 복숭아를 사들고 영희의 시골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영희의 고향 친구 창석을 만난다. 그날 저녁, 영희는 나와 함께 집을 나와 창석과 창석의 친구를 만난다. 모두 곡에서 멱을 감으며 복숭아를 먹고 떠들다 잠이 든다. 잠에서 깬 나는 창석의 친구가 특별히 그의 옷을 덮어 놓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과거)

 

 

나는 버스 안에서 나에게 코트를 덮어준 남자 때문에 이십년 전, 영희의 시골집에서 만난 창석을 떠올렸다. 광주터미널에 도착하자, 남자는 몸살약과 복숭아통조림을 사주었다. 남자와 나는 각자의 길로 떠났다. (과거)

 

 

영희의 집 앞에서 터미널에서 헤어진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영희 남편, 박창석의 대학친구였다. 사상이 달라 서로 멀어지면서 오랫동안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 요 몇 년전에 박창석과 화해를 해 다시 만나게 되었다. (현재)

 

 

남편의 관이 있는 방에서 영희는 앉아 있으며 곡을 하지 않는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병풍이 무색하기만 하다. 시고모는 영희가 곡을 하지 않는다고 눈총을 준다. 그런 영희가 불쌍하다며 자식들은 영희에게 밥을 건네준다. 영희는 자식들이 준 밥을 말없이 받아 먹는다. 자식들을 챙기지 않고 제 입만 챙긴다. 이를 본 나는 영희가 자식을 챙기지 않는 매정한 어미로 보인다. 더욱이 영희가 언제 울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나는 창석의 친구인 남자를 보며 20년전 말하지 못한 사랑을 떠올린다. 그때 말했더라면 지금의 남편이 아닌 인연을 맺었을까. '잊고 말고 할 그 무엇도 없는 그날 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것은 순전히 가짜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가짜 기분에 취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또 어쩌자고 그런 맘이 들었던 것일까. 가짜라도 좋으니 그가 끈이 되어주고 내가 그 끈 붙잡고 실컷 한번 울어봤으면, 그러면 좋겠다는 마음이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진작 알고 있었다. 그는 절대로 내게 오지 않을 것임을, 그가 내게 올 이유가 없음을, 그러면 내가 붙잡을 끈은 어디에 있는가' '상여가 떠난 영희 집은 조용했다. '나는 집에 전화를 걸어 아이들이 잘 있는지 안부를 물어본다. 그리고 내일은 올라간다고 전한다. 그날 나는 창석의 친구인 남자가 떠난다는 말에 가슴이 덜컹한다. 영희가 남자를 배웅하러 나간다는 말에 '나는 운다. 기가 막혀 운다. 무엇이 기막힌다. 웃기는 내 감정이 기막히다고 하기가 싫다. 그래서 그냥 운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서럽게. 울면서 나는 내 울음의 이유를 부지런히 찾는다.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맘껏 울어젖혀지지가 않는다. 맘껏 울지 못할 울음 우는 게 창피해진다. 나는 손님을 배웅하고 방으로 들어오는 영희를 보며 묻는다. '너는 언제 울래?' 영희는 대답한다. '나, 지금부터' 영희는 처음에는 진양조로, 그러다가 휘모리로 운다. 시고모는 우는 영희를 보고 '해앵, 인자서 우는가비, 그려, 울어라, 울어'라고 한다. 영희는 지금 살려고 우는 것인지 살려고 우는 거라면 나도 울 수 있는데. 우는 것이 목숨줄이라 했겠다. 그러면 나도 울어야겠다. 이제야 말로 정말 울어야겠다. 세상천지 집어삼키고도 남을 울음 울어야겠다. 고 생각하며 나는 다리를 쭉 펴고 힘차게 울음을 터뜨린다. '때맞추어 대숲에서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고 있다.' (현재)

 

 

 

 

 

공선옥, 「명랑한 밤길」, 2007, 창작과 비평사

 

 

 

단편,「명랑한 밤길」은 서술과정에서 형식적상 라디오 소리를 활용하고 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말은 인물의 심리를 대변해주는 역할을 한다. ‘사람은 가도 라디오는 영원할 것 같다’는 작가의 말처럼 사람은 신뢰를 쉽게 져버리지만 라디오는 끝까지 믿음을 준다는 의미가 드러나 있는 것 같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나는 치매 걸린 엄마와 단 둘이 산다. 엄마가 치매에 걸린 건, ‘아버지 장례를 치른 지 사흘째부터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도시로 나가 살고 싶은 그 열망 하나로 간호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간호학원을 마치자마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형제들은 제 살 곳으로 떠났고 나는 할 수 없이 치매 걸린 엄마를 모시고 살아야 했다. 솔직히 형제들의 형편도 말이 아니었다. ‘두 오빠는 신용불량자’이고 ‘언니는 이혼하여 모자가정의 가정’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불안정한 가족을 구성원으로 둔 가장의 역할을 책임지고 있다. 가장의 역할은 희생을 요구한다. 한국사회에서 전통통가족은 아버지가 가장을 전임했다. 하지만 IMF이후, 가장으로서의 아버지.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위치는 몰락했다. 대신 어머니가 가장의 역할을 전임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식, 그중에서도 막내인 여성(스물한살의 청춘)이 가장의 역할을 전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의료원에서 간호조무사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에 농공단지 안 플라스틱공장 사장 만배를 만난다. 만배는 '커피를 마시고 가라고 해서' 나는 공장안으로 들어간다. 언제부터인가 마을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장은 사출기 돌아가는 소리, 플라스틱 찍어내는 소리, 라디오 소리가 기계 소리와 라디오 소리는 제각각 악을 쓰며 공장 천장으로 치솟았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쳐대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트로트를 따라부르며 일을 하던 외국인 노동자 남자가 나를 홀끗거리자 만배가 침을 뱉듯이 거칠게 쏘아붙였다.’ ‘그랬더니 얼굴이 검고, 목이 검고, 손이 검고, 몸피가 가늘고 눈이 가는 외국인 노동자 남자가 씨익 웃으며 대꾸하는 것이었다.’ 이에 만배가 외국인 노동자를 쏘아붙인다. 그 광경을 보고 나는 만정이 떨어져 커피를 마시지 않고 돌아선다. 여기에서 나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거리감을 두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를 학대하는 만배(한국인, 나)는 가해자이면서 오히려 외국인 노동자에게 피해를 받고 있다는 시각을 지니고 있다.

 

 

어느날 저녁 한 남자가 응급으로 들어온다. 함께 일하던 수아는 환자를 보고도 퇴근하지만 나는 환자를 받아 간호한다. 스물한살의 나는 남자를 적극적으로 간호하면서  ‘직업적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뿌듯함과 잘생기고 낯선 이성 앞에 섰을 때의 부끄러움’을 느낀다. 남자는 나에게 꼭 은혜를 갚겠다며 ‘내 전화번호를 따고 자신의 전화번호를’ 남긴다. 그리고 어느날 저녁에 전화를 걸어온다. 남자는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그 집은 ‘언젠인가 수아가 꼭 한번 들어가보고 싶다고 말한 바로 그 집’ 이었다. 나는 남자에게 묘한 이끌림을 느낀다. ‘뭔가 정확히 가르쳐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남자는 내가 ‘별이 빛나는 밤에 라는 라디오프로의 씨그널 음악으로만 알고 있는 것을 남자는 누구의 어떤 음악이라는 것으로 정확히 알고’ 있어서이다.

 

남자의 방에는 ‘내가 보통 집에서 본 적이 없는 많은 책들이 쌓여’ 있었고, ‘책장과 벽에는 영화포스터와 엽서와 사진과 오려진 신문기사 조각들이 압정에 꽂혀 있었다.’ 남자는 ‘빌리 할리데이, 스목게츠인유어아이스’를 들려주었고 자신의 지적인 능력으로 나를 유혹하였다. 나는 그의 유혹에 넘어가면서 한편으로 생각났던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지금 몰래 빠져나간 딸의 행방을 찾아 마당을 서성이고’ 있을 지도 모른다. ‘비척거리고 골목을 나와 지팡이로 땅바닥을 치며 울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애가 날 버렸어요. 지 애비처럼 우리 애가 날 버렸다구요’ 라고 나를 탓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남자가 내 몸속에 스미고 내 영혼을 적시는 느낌이 싫지 않아서 일어서지 못한다.

 

‘남자는 처음에는 이따금 밤에 전화를 해서 나를 불러냈다.’ ‘남자와 내가 첫키스를 하던 날’ 남자의 들려준 음악은 내가 처음 듣는 음악이었다. 여기서 나는 남자의 모든 행동과 말에 매료되어 신비감에 빠진다. 사랑의 환상에 빠진 것이다. 남자가 ‘배고픈 어린 짐승처럼 내 가슴을 파고드는데 열중’할 때 나는 ‘그가 있어야만 닿을 수 있는 나라를 여행’하는 것을 슬퍼한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슬픈 풍경과 맞딱뜨린다. 엄마가 ‘나를 기다리며 먼지 푸석푸석한 마당에서 밤중 내맴을’ 돌아서이다. 여기서 나는 가장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이 점은 가장이 되어야 하는 내가 꽃다운 청춘에 연애도 당당히 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작가가 지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남자는 은근슬쩍 나에게 농사를 짓지 않냐고 운을 띄운다. 내가 직접 기른 채소를 가져다 주겠다고 하자, ‘착하고 사랑스러운 너를 내가 지켜줄게’ 라는 달콤한 말로 나를 달군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밤길을 걸으며 ‘엄마가 나를 기다리면서 마당을 뱅뱅 돌지 않게 할 방법’을 생각하다 엄마에게 농사를 짓게 하기로 결론을 내린다. ‘우울증적 치매에는 무엇보다 녹색세상을 열어주는 것이 좋다는 말을 라디오에서 들은 것도 같아서’ 이다. 하지만 ‘우리집은 농토는커녕 텃밭도 없다’ 그럼에도 나는 ‘아침저녁으로 마당을 일구어 채소밭을 만든다. 드디어 첫물 고추가 열렸을 때’, 남자를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나를 불러주지 않았고, 나는 고추가 저러다 ‘가지가 휘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주저리주저리’ 열린 고추를 보며 남자가 불러주길 기다렸다. 여기에서 엄나에게 농사를 짓게 하는 나의 태도는 가장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엄마의 희생을 통해 얻은 고추를 나의 성적 욕망의 대상인 남자에게 주려는 의도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고추와 무공해채소를 따 남자를 찾아간다. 남자는 나를 집으로 들이지 않는다. 나는 문짝을 잡고 ‘남자가 가로막고 선 다리 사이로 보이는 여자의 신발이 수아의 쌘들과 비슷’하고 ‘수아가 지난 일년간 착실히 부어온 적금을’ 깨고 ‘시내 전자랜드’에 가서 남자의 노트북을 사주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수아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함께 일할 자신이’ 없어서 ‘연세가정의원’에서 ‘김한의원’으로 옮긴다. 김한의원이 급여가 더 적은데도 말이다.

 

나는 저녁에 ‘고추와 상추와 치커리와 가지를’ 신문지에 싸서 한시간이나 걸어 남자를 찾아간다. ‘지난날의 어느 한밤에 당신이 보고 싶다고 나를 불러내서 한 말을 잊었느냐고. 내 귓불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곤 하던 어느 한밤에 당신이 내게 무공해채소들을 정말로 가져다줄 거냐고 묻지 않았느냐고. 또한 그러한 날 밤에, 내 가슴에 머리를 처박고 한 말들을 잊었느냐고, 그리고 나는 기억한다. 나를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던 밤에 그가 내게 한 말과 행동들을. 그걸 모른다 하면 그는 내게 죄를 지은 것이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를 집에 들이지 않는다. 더욱이 ‘무공해고 뭐고 이제 그만’ 가져오라고 한다. 나는 ‘당신은 나쁜 사람이라는 진짜 내 속마음을 말하기가’ 두려워 꾹 참는다. 하지만 남자가 조소하자 그때서야 용기를 낸다. ‘장치든 설정이든 하여간에. 난 누구처럼 엠피스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신에게 노트북도 사줄 수 없어요.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건 무공해채소뿐이었어요. 나를 가지고 장난치지 마세요. 나는 이제 겨우 스물한살이에요. 스무한살 처녀한테 이러시면 죄받겠죠? 더군다나 당신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고 비록 노트북 없으면 못 쓰지만 이런 집고 구해서 글도 쓰고 하는 사람이잖아요?’ 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다짜고짜‘야, 그동안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래? 너 올 때마다 내가 음식 해주고 음악 들려주고 했던 거 생각 안 나? 생각난다면 이러면 안 되지. 너가 이러는 거 행패 부리는 거야. 행패 부리자면 너만 부릴 줄 알어? 나도 부릴 줄 알어. 하지만 내가 언제 너한테 행패 부린적이나 있어? 단적인 예로 정미소 건만 해도 그래. 내가 나쁜 맘만 먹었어도 정미소 지날 때 너 가만 안 뒀지. 근데 나 너한테 한번도 험하게는 안했잖아. 그리고 내가 굳이 너 같은 애한테까지 깊은 속예기 할 필요가 없어서 안했는데, 내가 잘나가는 사람 같으면 뭐 이런 데서 이러고 있겠냐? 나도 누구처럼 여건만 된다면 너같이 돼먹지 못한 계집애한테 무이런 수모를 당할 사람이 아니란 거 너 알어? 야. 내가 아무리 이런 집에서 이렇게 산다고 니 눈에 내가 거지로 보이냐? 이거 필요 없으니 가져가, 쌍. 촌년이 발랑 까져가지구서는, 에잇, 재수없어.’ 라고 말하며 문전박대한다.

 

나는 비가 오는 길을 걸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그 길에 두 명의 남자를 발견하고 정미소로 숨는다. 정미소 처마밑에는 내가 버린 무공해채소 봉지가 펼쳐져 있다. 남자는 외국인 노동자 깐쭈와 싸부딘이다. 깐쭈와 싸부딘은 봉지에 든 채소를 보고 삼겹살에 소주가 먹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돈이 없다며 한숨을 토한다. 공장 사장이 돈이 없어서 월급을 달라는 소리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이다. 깐쭈와 싸부딘은 고향에 언제 돌아갈 거냐고 서로에게 묻는다. 그때 깐쭈는 ‘여동생이 한국사람과 결혼했어. 시골이야. 동생이 남편한테 맞았어. 동생 많이 슬퍼. 형이 한국여자랑 결혼했어. 형 여자 도망갔어. 조카 있어. 형이랑 조카 많이 슬퍼. 부모님 돌아가셨어. 우리나라, 방글라데시 가도 나는 아무도 없어. 한국에 다 있어. 난 잘 수 없어. 형 다쳤어. 손가락 잘렸어. 조카 살려야 해’ 라고 말하며 한국에서 슬플 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같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 라고 하여 노래를 부른다. 이에 싸부딘도 ‘어머나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 더 이상 내게 이러시면 안돼요’를 부른다.

 

나는 깐쭈와 싸부딘을 몰래 훔쳐 보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사랑했나봐 잊을 수 없나봐 자꾸 생각나 견딜 수가 없어 후회하나봐 널 기다리나봐’를 부른다. 공선옥 작가는 깐쭈와 싸부딘의 처지를 나와 배치시켜서 동병상련을 느끼게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시선으로 느껴지던 둘의 관계가 사라지는 절묘한 순간이다. 스물한살의 첫경험을 한 여자, 가족의 가장이 되어야 하는 여자, 무공해채소를 닮은 여자가 한 남자의 놀음에 놀아나고 배신당했을 때의 처절함을 외국인 노동자의 처지와 이입시켰다. 이것이 이 작품이 쉬운 이야기이면서도 다채로운 이야기인 이유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