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1921년 11월 27일(음력 10월 28일) 서울 종로2가 관철동 158번지에서 출생.
아버지 김태욱(金泰旭)과 어머니 안형순(安亨順) 사이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증조부 김정흡(金貞洽)은 종4품 무관으로 용양위(龍塗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으며, 할아버지 김희종(金喜鍾)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의관(中樞議官)을 지냈다. 당시만 해도 집안은 부유했던 편으로, 경기도의 파주, 문산, 김포와 강원도의 홍천 등지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서 연 500석 이상의 추수를 했다. 그러나 김수영(金洙暎)이 태어났을 때는, 일제가 조선 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한 조선 토지조사 사업의 여파로 인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종로6가 116번지로 이사한다. 김수영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지전상(紙廛商)을 경영한다.
1924년 (4세) 조양(朝陽) 유치원에 들어감.
1926년 (6세) 이웃에 사는 고광호(高光浩)와 함께 계명서당(啓明書堂)에 다님.
1928년 (8세) 어의동(於義洞) 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에 들어감.
1934년 (14세) 1년여 요양 생활.
보통학교 6년 동안 줄곧 성적이 뛰어났으나 9월, 가을 운동회를 마치고 난 뒤 장질부사(장티푸스)에 걸린다. 폐렴과 뇌막염까지 앓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서너 달 동안 등교하지 못함은 물론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진학 시험도 치르지 못한다. 1년여 요양 생활을 계속한다. 그 사이 집안은 다시 용두동(龍頭洞)으로 이사한다.
1935년 (15세) 선린상업학교 전수부(야간)에 들어감
간신히 건강을 회복하여 경기도립상고보(京畿道立商高普)에 아버지의 강권으로 응시하나 불합격한다. 2차로 선린상업학교(善隣商業學校)에 응시하나 역시 불합격한다. 결국 선린상업학교 전수부(專修部, 야간)에 들어간다.
1938년 (18세) 선린상업학교 전수부를 졸업하고 본과(주간) 2학년으로 진학.
1940년 (20세) 용두동의 집을 줄여 다시 현저동(峴底洞)으로 이사.
1942년 (22세) 선린상업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감.
12월, 영어와 주산, 상업미술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일본 유학차 도쿄로 건너간다. 선린상업학교 선배였던 이종구(李鍾求: 영문학자)와 함께 도쿄 나카노(中野區街吉町)에 하숙하며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조후쿠(城北) 고등예비학교에 들어간다. 그러나 어떤 까닭에서였는지 곧 조후쿠 고등예비학교를 그만두고 쓰키지(築地) 소극장의 창립 멤버였던 미즈시나 하루키(水品春樹) 연극연구소에 들어가 연출 수업을 받는다.
1943년 (23세) 만주 길림성(지린성)으로 이주.
태평양전쟁으로 서울 시민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집안이 만주 길림성(지린성, 吉林省)으로 이주한다. 김수영도 조선학병(朝鮮學兵) 징집을 피해 겨울에 귀국하여 종로6가 고모집에서 머문다. 쓰키지 소극장 출신이며 미즈시나에게 사사받은 안영일(安英一)을 찾아간다. 안영일은 당시 서울 연극계를 주도하고 있었고,김수영은 한동안 그의 밑에서 조연출을 맡았던 듯하다.
1944년 (24세) 봄,가족들이 있는 만주 길림성(지린성)으로 떠남.
그곳에서 길림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있던 임헌태, 오해석 등과 만난다. 그들은 그때 조선, 일본, 중국의 세 민족이 참가하는 길림성예능협회 주최의 춘계 예능대회에 올릴 작품(연극)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45년 (25세) 시 ‘묘정의 노래’를 <예술부락>에 발표하며 등단.
6월,길림 공회당에서 ‘춘수(春水)와 함께’라는 3막극을 상연한다. 김수영은 이 작품에서 권 신부 역을 맡는다. 8월 15일,광복. 9월,김수영 가족은 길림역에서 무개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 개천까지,개천에서 트럭을 타고 평양으로,평양에서 열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여,종로6가의 고모집으로 간다. 서너 달 뒤 충무로4가로 집을 구해 옮겨간다.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예술부락(藝術部落)>에 발표. 이 작품의 발표를 계기로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한다.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어,어머니가 집안 살림을 도맡기 시작한다.
1946~1948년 (26~28세) 문인들과의 만남 및 외국 잡지 번역
연희전문 영문과에 편입했으나 곧 그만두고, 이종구와 함께 성북영어학원에서 강사, 박일영과 함께 간판 그리기, ECA 통역 등을 잠깐씩 한다. 김병욱, 박인환, 양병식, 김경린, 임호권, 김경희 등과 친교. 그들은 곧 <신시론(新詩論) 동인>을 결성하고, 동인지를 내려고 작품(시)을 모았다. 그러나 김병욱과 김경린의 주도권 다툼으로(이것은 해방 공간의 좌우 대립과 관련된 것이었다) 김병욱, 김경희가 탈퇴하고, 김수영도 탈퇴하려 하나 임호권의 만류로 남는다. 이 시기, 김수영은 신시론 동인 외에도 배인철, 이봉구, 박태진, 박기준, 김기림, 조병화, 김윤성, 이한직, 김광균 등 많은 문인들과 만남을 가지며, 임화를 존경하여 그가 낸 청량리 사무실에서 외국 잡지 번역을 하기도 한다.
1950년(30세) 김현경(金顯敬)과 결혼, 돈암동에 신혼 살림을 차림.
서울대 의대 부속 간호학교에 영어 강사로 출강한다.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28일, 서울이 이미 점령되고, 월북했던 임화, 김남천, 안회남 등이 서울로 돌아와 종로2가 한청 빌딩에 조선문학가동맹 사무실을 연다. 김수영은 김병욱의 권유로 문학가동맹에 나갔고, 9월 문화공작대라는 이름으로 의용군에 강제 동원되어, 평남 개천으로 끌려가 1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는다. 10월 20일, 유엔군의 평양 점령. 김수영은 평양 북쪽의 순천에 배치되었고, 유엔군과 인민군의 혼전을 틈타 야간 탈출을 시도, 서울 충무로의 집 근처까지 내려왔으나 경찰에 체포당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다. 곧 수용소 내 미 야전병원의 통역관이 된다. 12월 26일, 가족들은 경기도 화성군 조암리(朝巖里)로 피난한다. 12월 28일, 피난지에서 장남 준(儁)이 태어난다.
1951~1952년(31~32세) 거제 수용소로 이동.
미 군의관들을 따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부산 거제리(지금의 부산 거제동) 수용소로 이동한다. 이때 미 군의관 피스위치와 가깝게 지냈으며, 그에게서 <타임>, <라이프> 지 등을 받아보게 된다.
1953년(33세) 석방 후 부산으로 감.
겨울, 거제리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부산으로 간다. 그곳에서 박인환, 조병화, 김규동, 박연희, 김중희, 김종문, 김종삼, 박태진 등과 재회. <자유세계> 편집장이었던 박연희의 청탁으로,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傷病) 포로동지들에게’를 썼으나 발표하지 않는다. 박태진의 주선으로 미 8군 수송관의 통역관으로 취직하지만 곧 그만두고 모교인 선린상업학교 영어 교사를 잠시 지낸다.
1954년(34세) 서울로 돌아와 주간 <태평양>에 근무.
신당동에서 다른 가족과 함께 살다가, 피난지에서 아내가 돌아오자 성북동에 분가를 해 나간다.
1955~56년(35~36세)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으로 6개월가량 근무.
1955년 6월, 마포 구수동(舊水洞)으로 이사, 번역일을 하며 집에서 양계를 한다.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채마밭으로 둘러싸인 구수동 집은 전쟁을 겪으면서 지친 김수영의 몸과 마음에 큰 안정을 가져다준다. ‘여름뜰’, ‘여름아침’, ‘눈’ 등은 그런 배경 속에서 씌어졌다. 안수길, 김이석, 유정, 김중희, 최정희 등과 가까이 지낸다.
1957년(37세) ’폭포’ 발표.
김종문, 이인석, 김춘수, 김경린, 김규동 등과 묶은 앤솔로지 [평화에의 증언]에 ‘폭포’ 등 5편의 시를 발표한다.
1958년(38세) 11월,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6월 12일, 차남 우(瑀)가 태어난다.
1959년 (39세)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 출간.
그간 발표했던 작품들을 모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춘조사(春潮社)에서 출간한다(시인 장만영이 경영했던 춘조사에서 <오늘의 시인 선집> 제1권으로 기획한 것이다).
1960년 (40세) 4·19를 계기로 열정적으로 작품 발표.
4월 19일, 4·19혁명이 일어난다. 김수영은 ‘하…… 그림자가 없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기도’, ‘육법전서와 혁명’, ‘푸른 하늘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있지만’,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 ‘거미잡이’, ‘가다오 나가다오’, ‘중용에 대하여’, ‘허튼소리’,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 ‘그 방을 생각하며’, ‘나가타 겐지로’ 등을 열정적으로 쓰고 발표한다. 그는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혁명의 열기와 보폭을 같이하면서, 규범적 의미의 시를 부정하고, 시를 넘어서 자유에 이르고자 했다.
1961년 (41세) 시와 시작(詩作) 노트를 계속 발표.
5·16군사 쿠데타 발발. 김춘수, 박경리, 이어령, 유종호 등과 함께 현암사에서 간행한 계간 문학지 <한국문학>에 참여하고 동지에 시와 시작(詩作) 노트를 계속 발표한다. 이 무렵 김수영은 일본 이와나미 문고에서 나온 하이데거의 [횔덜린의 시와 본질]을 읽었던 듯하다.
1965년 (46세) 한일협정 반대시위에 동조.
6·22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 반대시위에 동조하여 박두진, 조지훈, 안수길, 박남수, 박경리 등과 함께 성명서에 서명한다. 신동문과 친교.
1968년 (48세) 6월 15일 사망.
<사상계> 1월호에 발표했던 평론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발단으로, <조선일보> 지상을 통하여 이어령과 뜨거운 논쟁을 3회에 걸쳐 주고받는다. 이 논쟁은 문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4월, 부산에서 열린 펜클럽 주최 문학세미나에서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경주에 들러 청마 유치환의 시비를 찾는다.
6월 15일, 밤 11시 10분경 귀가하던 길에 구수동 집 근처에서 버스에 부딪힌다. 서대문에 있는 적십자병원에 이송되어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다음날(16일) 아침 8시 50분에 숨을 거둔다. 6월 18일, 예총회관 광장에서 문인장(文人葬)으로 장례를 치르고, 서울 도봉동에 있는 선영(先塋)에 안장된다.
1969년 시비 건립.
6월, 사망 1주기를 맞아 문우와 친지들에 의해 묘 앞에 시비(詩碑)가 세워진다.
1974년 9월, 시선집 [거대한 뿌리] 출간(민음사).
1975년 6월, 산문선집 [시여, 침을 뱉어라] 출간(민음사).
1976년 8월, 시선집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 출간(민음사).
산문선집 [퓨리턴의 초상] 출간(민음사).
1981년 [김수영 시선], [김수영 전집] 출간.
6월, [김수영 시선] 출간(지식산업사). 9월, [김수영 전집 1-시], [김수영 전집 2-산문] 출간(민음사). 전집 출간을 계기로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하고, 김수영이 태어난 날인 11월 27일에 제1회 '김수영 문학상' 시상식을 갖는다.
1988년 6월,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출간(창작과비평사).
1991년 4월, 시비를 도봉산 국립공원 안 도봉서원 앞으로 옮김.
2001년 <금관 문화훈장> 추서받음.
9월, 최하림이 쓴 [김수영 평전] 출간(실천문학사). 10월 20일,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받는다.
김수영 시인 자료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6904&path=|462|570|&leafId=841
김수영-온몸으로 시 쓰기
<시의 침을 뱉어라><반시론>
수영에게 시를 쓰는 일은 온몸을 다하는 일이다. 정신의 작업만이 아니라 육체의 움직임도 요구된다. 그래야 정신과 육체는 하나로 나아간다. 김수영에게 시를 평하는 일은 시를 쓰는 일과 같은 일이다. 그만큼 시를 평하는 것은 시를 쓰듯 어려운 일이고, 시를 쓰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시를 쓰는 과정에서 존재가 있는 세계를 불러 대상화시키기 위해서는 온몸을 다한 경험이 요구된다. 그래야 시가 탄생한다. 온몸을 다한 경험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하이데거의 <대지의 은폐>에 반대되는 의미이다. 하이데거는 대지는 은폐되어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대지의 은폐성과 세계의 개시성을 찾아가는 것이 진리라고 했다. 그런 하이데거의 이론에 김수영은 관심을 보인다. 하이데거는 시를 쓰는 일은 실재의 언어가 아닌 언어를 쓰는 일이라고 했고, 그것을 위해 존재로 투사하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수영은 시를 쓰기 위해 산문을 쓰듯 쓴다고 한다. 그만큼 형식의 구애를 받지 않고 나아가는 대로 시를 쓰는 것이다. 형식에 얽매이다 보면 내용이 뛰어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김수영이 시의 내용은 형식과 일치한다고 언급한 것 같다. 사람들은 그의 시가 참여시라는 말을 하지만 김수영은 그 말이 듣기 어색한가보다. 김수영의 시론을 읽으며 그 문장에서 그런 뉘앙스가 느껴진다.
김수영은 시를 쓰는 태도에 두려움이 없고 혼란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사회가 주밀하게 조직화되고 시인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게 되면 이미 중대한 일이 모두 다 종식되는 때다. 그래서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 혼란 속에서 온 몸을 다하는 열정이 나오고 시가 나온다. 그래서 김수영은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말을 근거로 시인에게 혼란은 불가피한 것이고 이에 대적하는 강단이 요구된다고 하는 듯하다.
김수영은 항산恒産이 恒心이라고 한다. 생활에 과히 불안을 느끼지 않으면 정신의 불필요한 소모가 없어진다나. 생활이 편하면 고뇌의 시, 절실한 시가 나오지 않는단다. 그래서 불안을 느껴야 하고 혼란을 느껴야 시가 나온다고 한다. 나는 그의 생각에 동조하며 슬며시 미소가 흘러나온다.?반시론?에서 김수영에게 슬슬 매력이 끌리는 이야기가 몇 개 있다.
한번은 김수영이 출판을 위해 어쩔 수없이 원고를 수정한 일이 있다. 그런데 그때 심정을 강간당하고 순결을 잃은 것 같다고 표현한다. 나는 그 표현에 탄식하고 만다. 그렇다. 여전히 많은 작가들은 편집자들에게 강간당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이뤄지고 있다. 나도 언젠가 강간당할까 무섭다.
예술가에게 가난은 자발적 가난이다. 김수영은 시인은 거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거지가 되어야 새벽 거리에서 청소부의 심정도 알고, 행인의 표정도 알게 된다나. 그래서 밑바닥까지 꿰뚫어볼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고 한다. 시를 아는 경지에 이르면, 새벽 청소부의 광태狂態와 그 옆을 태연하게 지나가는 행인의 무표정한 얼굴이 꿰뚫어보이게 된다. 바늘구멍이 터지게 된다. 나는 언제나 문학을 하면서 밑바닥에서 꿰뚫어보기 위해 칼 같은 눈을 가지고 싶었다. 혼란과 가난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여 왔다. 그런 작업은 예술가로서 평생 진행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가라는 선택은 나의 순수 의지로 선택한 일이라 행복하지만 한편으론 지독히 고독하고 힘들다.
김수영이 어머니 손만 한 문학이 하고 싶다고 한 말이 계속 떠오른다. 김수영의 어머니는 가난하지만 절에 가서 꼭 시주를 한다고 한다. 김수영은 어머니가 헛돈을 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와 비교해보니, 돈도 못 벌면서 문학을 한답시고 술집에 가서 술을 사 마시는 것과 다름없다고 한다. 헛돈을 쓰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나. 어머니나 김수영이나 허한 일을 하고 있지만 김수영은 적어도 어머니의 일은 헛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김수영은 어머니의 손만 한 문학을 하고 싶다고 한다. 로버트 프루스트가 시는 지리地理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김수영은 시는 대지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밭을 갈구는 어머니의 손만 한 문학을 하고 싶다고 한다.
김수영은 시인은 자기 시를 모른다고 한다. 농부가 자기 일을 모르듯이, 노동자도 자기 일을 잘 모른다. 자기 일이 세계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모르면서 일을 하는 거다. 그래서 시인은 자기 시를 모르고 써야 한다고 한다. 자기가 쓴 시를 안다고 하는 순간, 시가 아니라고 한다. 여기와 저기를 오가야 하는데, 창작자에게 비평보다 창작이 우선이다. 먼저 창작을 하려면 자기가 뭘 썼는지 몰라야 한다. 일단 쓰고 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비평은 그 후에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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