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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향기

하이데거-대상

by 아프로뒷태 2011. 12. 3.

마르틴 하이데거

 

 

 

1933.5.1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선출된 직후 나치당에 입당하다

1933년 4월 봄인데도 불구하고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정에는 어딘가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불과 2주 만에 파면된 신임 총장을 둘러싼 스캔들 때문이었다.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당, 일명 나치가 3월의 총선거에서 무려 288석을 얻으며 정권을 장악하자, 그 여파가 결국 대학에까지 뻗쳐 오고 말았던 것이다.

 

4월 5일자로 취임한 폰 묄렌도르프 총장이 학생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 내용을 담은 현수막을 교내에서 게양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자, 나치의 영향 하에 있던 교육부에서는 그 즉시 총장을 파면 조치한다. 파면 통보를 받은 폰 묄렌도르프는 곧바로 대학 동료이며 저명한 철학 교수인 마르틴 하이데거를 찾아가 차기 총장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 간부가 총장에 임명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 하이데거는 이 대학의 총장직을 맡은 후 나치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대학내의 반유대주의 정책은 금지했다.

 

  

 

나치에 반대하다 파면된 전직 대학총장의 부탁 받고, 차지 총장 되기로 결심

4월 21일, 대학 평의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하이데거를 신임 총장으로 선출한다. 곧이어 나치 간부인 프라이부르크 시장과 당원들이 찾아와 입당을 권하자, 하이데거는 “당직을 맡지 않고, 당을 위해 활동하지도 않는다”는 조건 하에, 즉 어디까지나 명목상으로만 입당하기로 한다. 1933년 5월 1일자로, 20세기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인 하이데거가 나치 당원이 되었던 것이다.

 

5월 27일의 총장 취임식에서 '독일 대학의 자기주장'이라는 제목으로 행한 연설에서, 하이데거는 이른바 '3대 봉사', 즉 지식 추구뿐만 아니라 노동과 군사훈련에도 동참할 것을 학생들에게 강력히 호소한다. 그러나 대학 내에서는 앞서 문제가 되었던 반유대주의 현수막의 게양은 물론이고, 유대인 저자들의 장서를 도서관에서 퇴출시켜 불태우려는 행위도 총장 권한으로 여전히 금지된다. 나치의 압력에도 하이데거는 요지부동이었고 이로써 양측의 갈등은 점차 첨예화된다. 결국 그는 불과 10개월 만인 1934년 2월에 자진해서 총장직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다음이었다. 이 사건은 하이데거의 평생에서 최대의 스캔들이 되었던 것이다.


독일 출신의 정치이론가이자 한때 하이데거의 연인이었던 한나 아렌트 기념우표

 

마르틴 하이데거는 1889년 9월26일, 독일 서남부 바덴 주의 메스키르히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넉넉지 못한 집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서 예수회 장학금을 받고 김나지움에 입학했고, 이때 처음으로 ‘존재’에 관한 철학적 문제를 접하게 된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던 하이데거는 몇 년 뒤에 진로를 철학으로 바꾸고, 신칸트학파의 거장 하인리히 리케르트 밑에서 공부해 1915년에 교수 자격을 획득한다. 1916년 여름,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문트 후설이 교수로 부임하자, 하이데거는 그의 조교로 일하며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1923년에 하이데거는 마르부르크 대학에 조교수로 부임한다. 카를 야스퍼스와 루돌프 불트만 같은 동료 교수들이며, 한스 요나스와 한나 아렌트 같은 명석한 제자들과의 교제가 시작된 것도 바로 이때부터의 일이었다. 1927년에는 주저인 <존재와 시간>을 출간하고 정교수로 임명된다. 당시 교육부에서는 하이데거의 진가를 미처 모르고 다른 후보자를 정교수에 임명하려 했지만, 철학자 막스 셸러가 직접 장관을 찾아가서 “하이데거 대신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임명한다면, 당신은 대대손손 망신거리가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현상학' 창시자 후설의 제자였던 하이데거, 젊었을 때부터 명성 얻어

1928년에 후설이 정년퇴임하자 하이데거는 그 후임으로 모교인 프라이부르크 대학에 돌아온다. 이미 명성은 확고해진 다음이었지만, 불과 10개월 간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재직함으로써 그는 평생을 따라다니게 될 오명을 자초한다. 총장 퇴임 이후 15년여 간이 하이데거의 생애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나치 집권 하에서는 정부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지만, 종전 후 프랑스 군정 하에서는 나치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강의가 금지되었던 것이다. 그가 다시 복권되어 강단에 돌아온 것은 1951년 9월의 일이었다. 1976년에 사망할 때까지 철학자로서 그의 위상은 결코 흔들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와서 하이데거의 철학과 나치즘의 관계에 대한 논란들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사상사적 위업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리라. 하지만 그 명성의 크기가 워낙 크기 때문에 그의 행적이 드리운 그림자가 더욱 크고 짙은 것도 사실이다.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표지


독일인들 사이에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과연 언제쯤 독일어로 번역이 이루어질까?” 하는 농담이 있다. 그 유명한 철학서가 워낙 난해한 것을 꼬집는 이야기다. 그러니 이 짧은 글에서 그의 사상 전반에 관해 한 마디로 정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리라. 아마도 하이데거의 저서가 지닌 난해함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그가 사용한 용어의 생경함 때문일 것이다. 가령 ‘현존재’나 ‘세계-내-존재’ 같은 그의 용어들은 우리말로 쓰건 독일어로 쓰건 간에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이른바 ‘존재론’의 근원적 문제에 천착하여 깊은 사유를 펼치기 때문이다.


‘존재’ 또는 ‘-이 있음’이라는 철학적 주제는 하이데거 이전까지만 해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가정되어 왔다. 이처럼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또는 거의 탐구되지 않았던 영역을 건드리다 보니, 때로는 동료 철학자들조차도 하이데거의 진면목을 몰라보는 실수를 범하곤 했다. 가령 <존재와 시간>을 탐독한 사르트르가 그 영향을 받아 펴낸 <존재와 무>는 실존주의의 이론서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훗날 그 책을 읽은 하이데거는 “이건 내 철학을 오독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물론 그 정도면 ‘창조적 오독’의 사례로서 나름의 가치가 있겠지만.) 일각에서는 이를 근거로 하여, 하이데거를 ‘실존주의자’라고 뭉뚱그려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하이데거,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 대해 "이건 내 철학의 잘못 읽은 것"

그나저나 하이데거는 과연 무엇 때문에 나치에 협력했던 것일까? 일설에는 그의 아내인 엘프리데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도록 권했다고 한다. 물론 하이데거는 골수 나치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영웅도 아니었다. <존재와 시간>의 초판부터 들어 있던 스승 후설(그는 유대인이었다.)에게 바치는 헌사를 삭제한 출판사의 행위를 묵인한 것은 그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지적된다. 과거사에 대한 아무런 참회도 변명도 없는 그의 ‘완강한 침묵’은 더욱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966년 하이데거는 독일의 대표적 주간지 <슈피겔>과의 대담에서 1933년의 총장 취임 사건에 대해 나름대로 해명하지만, 그의 요구에 따라 이 기사는 사후인 1976년에야 발표되었고 역시 논란을 불러 일으킨다. 물론 하이데거가 나치 덕분에 개인적 영달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총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일종의 불순분자로 취급되었고, 전쟁 말기에는 학내에서도 ‘쓸모 없는 교수’로 분류되어 5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라인 강변에서 참호를 쌓는 강제노역에 동원된다. 비슷한 시기에 라인 강 저편의 스위스 바젤에서는 신학자 칼 바르트가 역시 5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참호 속에 들어앉아 있었다. 하이데거와 달리 바르트는 강의 때마다 “히틀러 만세!”를 외쳐야 한다는 지시를 거부하다가 독일에서 추방당했고, 모국인 스위스로 돌아가 육군에 입대했던 것이다. 20세기 철학계와 신학계를 대표하는 두 사상가의 삶은 라인 강의 이편과 저편처럼 전혀 달랐던 셈이다.

 

 

대철학자 하이데거, 50대 나이에 라인강변에서 참호 쌓는 강제노역에 동원돼

제프 콜린스의 말마따나, “나치즘과 하이데거는 20세기의 역사와 문화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골칫거리”다. 이 둘의 만남이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대 철학의 크나큰 스캔들이며, 해결하기 힘든 과거사로 남은 까닭은 하이데거의 명성과 나치즘의 악명 모두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리라. 아울러 이는 정치철학적으로 매우 어렵고도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일각에서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요나스, 아렌트, 가다머, 레비나스 등의 사상가들이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각별히 관심을 쏟게 된 것도 결국 하이데거의 과오 때문이었다고 본다.


지금까지 하이데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는 잠시 실수를 했을 뿐이고, 그의 저서는 정치와 무관하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하이데거는 일종의 ‘확신범’이었다. 즉 자신이 평소 생각한 독일 민족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나치즘에서 발견했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나치즘에 동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하이데거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치즘에 가입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악담일지 몰라도, 최소한 나치즘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한 오판을 범한 것은 사실이다. 본인은 나치즘의 광기를 자신의 철학으로 교화시켜 선을 추구할 수 있다고 자신했는지 몰라도, 현실은 오히려 반대였던 것이다.


하이데거가 묻힌 곳. 자신이 태어난 독일 메스키르히에 잠들어있다.

 

 

나치 정권으로부터도 비난 받고, 나치 몰락 후에도 비난 받는 모순의 철학자

G. 해프너는 하이데거의 저서에 친나치적인 대목들이 분명히 있으며, 그것이 종종 길 위에 난 돌부리처럼 독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도 사실이라고 시인한다. 하지만 어떤 길이 좋은지 나쁜지 오로지 그 위에 돋아난 돌부리로만 판단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 그의 반문이다. 물론 욕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다. 하지만 욕한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하이데거처럼 오늘날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상가의 행적에 관해 한 마디로 비난하거나 두둔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해법이 아니다. 그를 비난하거나 두둔하기는 쉽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선택이 과연 합당했는지 아닌지를 음미함으로써 우리에게 필요한 어떤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이리라.


철학자가 정치에 관여하려 시도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공자가 수레를 타고 천하를 주유했던 것이라든지, 플라톤이 시라쿠사의 참주를 교화시키려 했던 것도 결국 정치적 야심 때문이었다. 어떤 정치적 사건을 자신의 철학적 이상과 성급히 동일시한 까닭에 헤겔은 조국 프러시아를 침공한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보며 ‘세계영혼’이라고 찬탄했다. 사람은 누구나 오판을 하게 마련이고 위대한 철학자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각자의 명성의 크기에 따라서 악명의 크기도 정해지는 것뿐이다. 하이데거는 악당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히틀러의 폭주조차도 묵인하며 나치의 대두에서 민족 부흥의 가능성을 바라보고 광분한 비양심적인 독일인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일찍이 야스퍼스가 히틀러를 “교양이라곤 없는 인간”이라고 비판하자, 하이데거는 그게 뭐 중요하냐면서 “우아하기 그지없는 그의 손을 보라”고 반박했다. 그 우아한 손에 묻은 피를 못 보았다는, 또는 못 본 척 했다는 것이야말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하이데거라는 ‘현존재’(인간)의 일생일대 실책이었으리라.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하이데거와 나치즘의 문제에 관한 단행본 중에서는 제프 콜린스의 <하이데거와 나치>(이경현 옮김, 이제이북스, 2004)가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핵심을 상당히 잘 요약, 정리해 주고 있다. 박찬국의 <하이데거와 나치즘>(문예출판사, 2001)은 이 문제에 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위의 본문에서는 상당히 단순화시켜 설명했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하이데거의 과거 행적에 대한 여러 증언조차도 그 진위 여부 자체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부록에는 하이데거의 총장 취임 연설 및 <슈피겔> 지 인터뷰 등의 발췌 번역문이 수록되어 있어서 도움이 된다.

하이데거와 나치하이데거와 나치즘하이데거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책으로는 이수정과 박찬국 공저의 <하이데거: 그의 생애와 사상>(서울대학교출판부, 1999)과 한길 로로로 전기 시리즈 중 한 권인 발터 비멜의 <하이데거>(신상희 옮김, 한길사, 1997)가 있다. 비멜의 책은 일반적인 전기와는 달리 하이데거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에게는 약간 어려울 수도 있겠다. 이기상 편저의 <하이데거 철학에의 안내>(서광사, 1993)에도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을 쉽고 간략하게 설명한 쾨스터스와 해프너 등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오토 페겔러의 <하이데거 사유의 길>(이기상 외 옮김, 문예출판사, 1993)은 하이데거가 생전에 자신의 사상 개설서로 공인한 책이다. 그래서인지 하이데거와 나치즘과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논평은 20년 뒤인 제2판 후기에만 들어 있다.


하이데거의 저서로는 주저인 <존재와 시간>의 소광희 번역본(경문사, 1995)과 이기상 번역본(까치글방, 1998)이 대표적이며, 그 외에도 주요 저술이 꾸준히 간행되고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철학은 결코 만만히 볼 것이 아니며, 초심자가 읽고 단숨에 이해하기에는 적잖이 무리가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하이데거-대상

 

후설은 현상학을 노에마, 노에시스로 설명한다. 노에마는 지향성의 상관자, 대상인 것, 사물의 의미이다. 노에시스는 의식의 지향성이다. 현상학은 내면세계, 의식의 세계 연구이다.

존재가 존재자인 인간이아 대상에 투사하면 그것이 존재로 투영된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존재자에게 가서 다시 존재로 온다. 당시 신 부재의 시대 즉, 옹색한 시대라 불린다. 니체의 신의 죽음과 관련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세계에 인간이 존재할 본질을 통찰할 수 없다. 죽음, 사랑, 권한에 대한 그늘 때문에 불안을 느껴서이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의 죽음을 결정했는데, 신의 부재로 그러하지 못하고 불안정하여 언제 어떻게 죽음이 다가올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존재에 대해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세계를 불러 대상화시킨다. 쇼펜하우어의 <의식과 표상의 세계>에서 의식을 표상, 대상으로 표현한 것이 곧 세계이다. 그 세계를 빠져나오고 들어간다. 그러다 보니 의식이 문제이다. 인간의 의식, 우울이나 불안을 제거해야 한다. 여기에서 세계가 대상화 된다는 것은 기술이다. 기술은 드러낸 것, 대상화되면 심연에 답이 있다. 세계내면화 되고, 보이지 않게 정신화되면서, 자신의 상실, 망각에 이르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의욕과 의지 때문이다. 이때 노에마와 노에시스의 작용에 의해 나가 내면세계로 들어감으로서 본질에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빨리 들어가서 전회시키는 사람이다. 하이데거는 전회를 언어를 통해 해야 한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생각에서 나온 의식과 의욕과 다르다. 그 언어는 언어를 뚫고 들어가고 나오는 언어이다. 이 때 언어는 절대성을 지닌 언어, 존재를 말한다. 즉, 실재에 들어갔다 나온 언어이다. 그러나 이때 언어는 이미 시니피앙으로서 표상이고 대상화한 것으로 언어의 한계에 부딪친다. 언어를 통해 실재를 대상화를 하는데, 그 언어는 언어를 뚫고 나온 또 다른 언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시를 쓰는 일은 실재의 언어가 아닌 언어를 쓰는 일이라고 했고, 그것을 위해 존재로 투사하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했다. 결국 하이데거는 사물, 대지, 대상은 은폐되어 있어서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여주는 세계의 개시성을 찾아가는 것이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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