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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향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고독

by 아프로뒷태 2011. 12. 3.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97.5.12 14세 연상의 여인 루 살로메를 '운명적으로'만나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아련한 향수, 그리움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이 이름은 그야말로 시인의 대명사다. 세계인에게 가장 많은 애송시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구슬 굴러가는 것 같은 유성음으로 이루어진 이름만으로도 릴케는 시인답다. 릴케를 불멸의 시인으로 키운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와의 만남은 그중 각별한 것이었다.

 

1897년 5월 12일, 뮌헨의 소설가 야콥 바서만의 집에서 열린 다과 모임에서였다. 젊은 시인 르네 마리아 릴케(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아명)는 당대 멋진 여성의 대명사였던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만나자마자 사랑의 거센 폭풍에 휘말려 들어갔다. 열네 살이나 연상이었지만, 아니 그러기 때문에 그녀는 릴케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포근하면서도 따뜻한 모성의 여인이었다. 시원하면서도 강렬하고 자유분방한 정신세계는 또한 릴케의 젊은 열정과 만나 불꽃을 튀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만나자마자 릴케의 가슴은 루 살로메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시도 쉴 시간이 없었다.

 

 

운명의 여인 루 살로메를 만나 이룩한 정신적 도약

릴케에게 루 살로메(이하 릴케가 그렇게 불렀듯이 ‘루’라고 쓴다)가 각별했던 것은 그가 한 해 전에 읽은 그녀의 에세이 덕분이기도 했다. 루의 에세이 <유대인 예수>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은 릴케는 익명으로 그녀에게 몇 편의 시를 우송하기도 했다. 이제 그녀를 실제로 만난 릴케는 “친애하는 부인, 당신과 내가 보낸 어제의 그 황혼의 시간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짧지만 달콤한 편지를 썼다. 작가들이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애정을 표시하는 고급 독자를 쉬 뿌리치지 못하는 법. 그녀의 에세이와 함께 했던 각별한 시간을 추억하는 젊은 시인에게 루도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릴케는 “(당신의 에세이를 읽던) 그 황혼의 시간에 나는 당신과 단 둘이서만 있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두 사람 사이는 급진전되어 금세 연인 사이가 된다.

 

단순한 애정관계로 시작했지만, 릴케에게 루는 육체적인 관계를 넘어서는 정신적인 반려였다. 그녀는 릴케에게 어머니로부터 받지 못한 모성적인 사랑의 제공자였고,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데 미숙한 시인에게 현실적인 길을 안내하는 정신적 후원자였다. 두 사람은 함께 공부하고 몇 차례에 걸쳐 여행을 떠나면서 정신적으로 더욱 가까워졌다. 루는 릴케에게 프리드리히 니체(니체가 루에게 청혼한 적이 있다)의 사상을 알려주었으며, 러시아 문학을 소개했다.


1900년 경의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그녀를 만난 후 릴케에게 두 가지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첫째, 새로운 이름을 쓰게 되었으며, 둘째, 그의 서체가 변했다. 1897년 빈의 한 잡지에 릴케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이름을 쓰게 되는데, 바로 루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이후 릴케는 줄곧 이 이름을 쓰게 된다. 그 동안 릴케는 상업세계에서 주로 쓰이는 비스듬히 종이를 스치는 듯한 필체를 썼는데, 루를 만난 후에는 우아하고 유연한 루의 필체와 비슷하게 바뀌었다. 릴케의 시 세계도 더욱 원숙해져, 그는 이 무렵 초기시의 미성숙한 단계를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내 눈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부러뜨려주소서, 나는 손으로 하듯
내 가슴으로 당신을 끌어안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막아주소서, 그러면 나의 뇌가 고동칠 것입니다,
내 뇌에 불을 지르면, 나는 당신을
피에 실어 나르겠습니다.

 

- 루 살로메에게 헌정한 <기도시집>의 제2부에서(김재혁 역)

 

 

칠삭둥이로 태어나 여자옷 입고 자란 유년, 군사학교에서의 참담한 청소년 시절

어린 시절의 릴케는 불우하다거나 가난하다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결핍을 경험해야 했다. 칠삭둥이로 태어났다는 것부터가 결핍이라면 결핍이었다. 릴케는 1875년 12월 4일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제프 릴케는 장교로서 입신을 꿈꾸었으나 실패하고 제대하여 하급관리가 되었다. 허영심 강한 어머니 피아 릴케는 남편의 출세길이 가로막히자 결혼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다.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릴케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더욱이 어머니는 자신이 결혼하여 처음으로 낳은 딸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 딸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죽은 딸을 잊지 못한 어머니는 릴케를 여자아이처럼 키웠다. 릴케는 일곱 살 때까지 여자옷을 입고 자라야 했다. 여덟 살 때 부모가 이혼하자 릴케는 따뜻하지 않은 어머니 품에서 자라게 된다.


어머니의 양육은 섬약한 시인의 감수성을 타고난 릴케에게는 고통 그 자체였다. 1886년 릴케는 장크트푈텐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했다. 감수성 예민한 소년에게 어린 시절부터 군사교육이라니, 릴케 스스로 가장 참담한 시기였다고 말할 정도로 군사교육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군대의 공포는 나중에 40대에 입대함으로써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나마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생의 의욕을 느꼈다.

 

1890년 육군 유년학교를 마친 뒤에 메리슈-바이스키르헨 육군 고등실업학교로 진학하지만 결국 병 때문에 그만둔다. 이어서 3년 과정의 상과학교에 들어가지만 역시 포기한다. 나중에 프라하 대학과 뮌헨 대학, 베를린 대학에서 예술사, 문학사, 철학, 법학 등을 공부했다. 릴케의 학창시절은 시인의 길을 가는 데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대학에서 닦은 인문학적인 소양은 훌륭한 산문을 쓰는 밑거름이 된다.

 

 

창조적 직관의 힘으로 완숙기엔 '사물시'의 진풍경 펼쳐

독일 라이프치하에서 출판된 <기도시집>의 표지.
릴케의 종교적 치열성을 담고 있는 시집이다.


릴케의 문학이 처음부터 화려한 꽃을 피운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독학하다시피한 문학청년 시절에 첫 시집을 냈으니, 미숙할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청소년기에 두각을 나타낸 아르튀르 랭보 같은 천재는 아니었다. 릴케가 처녀시집 <삶과 노래>(1894)를 낸 것은 18세 때였다. 첫 시집을 비롯하여 루 살로메를 만나기 전까지의 시들은 원숙기 시들에 비하면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격정을 숨기지 않는 청년의 감수성을 십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루 살로메를 만난 후 러시아 여행 등을 거쳐 인식의 지평을 넓힌 릴케의 문학은 바야흐로 날개를 달게 되었다. 이 시기에 씌어진 <기도시집>(1905년 출간)은 1899년, 1901년, 1903년, 세 차례에 걸쳐 한 부씩 창작함으로써 완성된다. ‘기도서’를 문학적으로 수용한 이 시집은 자신의 시 창작이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치열성을 담고 있음을 암시하면서 멀리 있는 존재인 신을 향한 끝없는 날갯짓임을 웅변하였다. 이 시집을 펴냄으로써 릴케의 문학은 평자와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형상시집>(1902)과 <신시집>(1907)은 릴케 문학의 또하나의 궤적이다. 사물과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데 ‘바라보기’가 릴케의 미학적 성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특히 <신시집>의 이른바 ‘사물시’는 대상을 응시하는 시인의 감각적 관찰이 오롯이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이 무렵 로댕과 함께 일하면서 질료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내는 조각의 세계가 시인의 창조적 직관 속에서 독특한 진경을 창출해낸 것이었다.

 

스치는 창살에 지쳐 그의 눈길은
이젠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다.
그 눈길엔 마치 수천의 창살만이 있고
그 뒤엔 아무런 세계도 없는 듯하다.

 

아주 조그만 원을 만들며 빙빙 도는,
사뿐한 듯 힘찬 발걸음의 부드러운 행보는
하나의 커다란 의지가 마비되어 있는
중심을 따라 도는 힘의 무도(舞蹈)와 같다.

 

가끔씩 눈동자의 장막이 소리 없이
걷히면 형상 하나 그리로 들어가,
사지의 긴장된 고요를 뚫고 들어가
심장에 이르면 존재하기를 그친다.

 

- 「표범—파리 식물원에서」 전문(김재혁 역)

 

 

저승의 신 하데스도 감동시킨 오르페우스의 노래를 꿈꾸다

소설 <말테의 수기>도 릴케 문학의 완숙기에 창작된 중요한 작품이다. 덴마크 출신의 젊은 시인 말테가 파리에서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수기 형식으로 담은 이 소설은 릴케의 문학과 인생에 대한 고민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릴케는 순수 유미주의 미학보다는 샤를 보들레르나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정신에 자극받아 ‘문둥이 옆에 눕는 것’, 현실 문제를 깊이 성찰하는 태도를 보인다. 무엇보다도 릴케 문학의 정점은 <두이노의 비가>(1923)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1923)이다. “내가 이렇게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 중 대체 그 누가/내 목소리를 들어줄까? 한 천사가 느닷없이/나를 가슴에 끌어안으면, 나보다 강한 그의/존재로 말미암아 나 스러지고 말텐데. 아름다움이란/우리가 간신히 견디어내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이므로”(김재혁 역)라고 시작되는 첫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비장한 목소리의 파도 속에 휩싸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리 탁시스 후작 부인이 제공한 ‘두이노 성’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쓴 이 시는 당시 교류했던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에 비견될 만한 ‘생의 약동’에 대한 웅대한 찬양가이다. 무용수 베라 오우카마 크노프를 위해 쓴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는 진정한 사랑의 노래로서 시인 릴케의 꿈을 보여주는 시이다. 시인은 스스로 오르페우스가 되어 에우리디케가 된 크노프를 향한 구원의 노래를 부른다. 삶에 발을 둔 지하 세계의 방문객이었던 오르페우스, 저승의 신 하데스도 감동시킨 그의 노래야말로 시인의 꿈이었음을 보여주는 시라고 하겠다.

 

 

결혼생활은 잠깐의 꿈 - '사랑을 찾아'많은 여인들을 만난 한평생

릴케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 여인들과의 관계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여인들과의 관계를 일일이 거론하기는 힘들다. 그의 여인들이 릴케와의 관계를 고백한 회상록들만 해도 꽤 여러 종이다. 루 살로메는 물론이고, 피아니스트 마그다 폰 하팅베르크, 출판업자 카타리나 키펜베르크, 화가 루 알버트 라자르트 등이 회상록을 남겼다.

 

릴케의 여인들에 대한 볼프강 레프만의 분류는 재미있다. 그에 따르면 릴케의 여자는 항성과 유성 같은 혜성으로 나뉘는데 루 살로메, 카타리나 키펜베르크, 마리 탁시스 부인이 릴케의 생애 내내 사라지지 않은 항성이라면, 마그다 폰 하팅베르크, 루 알버트 라자르트, 화가 발라디네 클로소프스카는 잠깐 스쳐간 유성 같은 혜성에 해당한다. 릴케가 이렇게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은 것은 정신적인 연인 루 살로메가 수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뿌렸던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당시의 분위기였던 면도 있다.

 

화가파올라 모데르존 베커가 그린 릴케의 아내 클라라 베스트 호프(왼쪽)와 릴케의 초상

 

 

또 하나 슬픈 여인을 소개해야 한다. 릴케의 아내인 화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이다. 그들은 1901년 4월 28일 혼인했고, 같은 해 12월 12일 딸 루트를 낳았다. 이 무렵만 해도 릴케는 보헤미안적 생활을 버리고 한 곳에 정착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실제로 결혼생활 직후 릴케는 자신의 일에 매우 충실했다. 심지어는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쓰기 위해 식사할 때는 창을 통해 들여온 음식을 서재에서 먹었다. 그러나 안정적인 생활을 구축하려던 릴케의 계획이 차츰 실패했다는 것이 확실해진 1902년부터 릴케와 처자식은 서로 만날 기회가 드물어졌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가시를 감춘 아름다운 생애를 벗어던지다

시인의 운명은 생각보다 일찍 저물었다. 릴케는 1923년 발병하여 몸져눕게 된다. 그때 이미 백혈병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흔히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었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장미 가시에 찔린 적은 있었다. 1926년 9월 릴케의 여행을 도와줄 이집트 여인 니메트 엘루이가 찾아왔을 때 그녀를 위해 장미를 몇 송이 따주다가 그만 장미 가시에 손가락을 다친 것이었다. 백혈병 때문에 상처가 쉬 아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죽음의 원인이 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1926년 12월 29일 새벽,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죽음의 원인은 백혈병이었다. 이듬해 1월 2일 키펜베르크 부부, 레기나 울만, 난니 분덜리 폴카르트, 베르너 라인하르트, 루 알버트 라자르트, 그리고 몇몇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라롱의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릴케의 유언에 따라 다음 시구가 새겨졌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

(김주연 역)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책세상에서 펴낸 <릴케 전집>(전13권)은 릴케의 명작들을 속속들이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시와 소설, 산문, 희곡, 예술론까지 릴케가 쓴 거의 모든 것이 이 전집에 망라되어 있다. 이들 작품 속에 푹 빠지면, 한 계절이 넉넉할 것이다.

 

볼프강 레프만의 <릴케—영혼의 모험가>(김재혁 옮김, 책세상, 1997)는 심혈을 기울여 쓴 평전이다. 릴케의 전기나 평전은 이 책 말고도 몇 종 더 있지만,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으로는 단연 최고이다. 이 평전을 통해 우리는 릴케야말로 뼛속까지 시인이


릴케-영혼의 모험가하얀 길 위의 릴케내가 사랑한 시인 내가 사랑한 릴케

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것을 그대로 살아내려 한 시인이었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도덕관념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릴케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장미처럼 아름다웠지만, 가시를 가지고 있는 삶, 그늘을 드리울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꿈이 릴케의 시만큼이나 절절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온몸으로 시를 쓴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의 <하얀 길 위의 릴케>(김상영 옮김, 모티브, 2003)는 릴케 평생의 정신적 연인 루 살로메가 쓴 릴케에 대한 회고록이다. 생각보다 냉정하고 담담하다. 하기야 릴케의 이중성(모순성)에 대해 루 살로메만큼 적나라하게 알고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때로 고매한 사람이었고, 때로는 그저 침묵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두 가지 모습에 대해 이름을 각각 정해주었다. ‘라이너’와 ‘또 다른 라이너’, 그가 이 이름들에 대해 분노를 표현했을 때, 나는 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릴케는 자신에게 ‘냉소적인 자아’가 있다는 생각에 분노하곤 했다. 장미의 가시가 그 냉소적인 자아를 상징한다면 적절할는지?

 

루 알버트 라자르트의 <내가 사랑한 시인 내가 사랑한 릴케>(하늘연못, 1998)는 릴케의 또 다른 연인이 쓴 회고록이다. 이 회고록은 루 살로메의 것에 비해 릴케를 추억하는 여인의 숨결이 훨씬 가깝게 들린다. 이 여인을 통해 느껴보는 릴케의 육체가 자못 생생하다. “그 무엇에 의해서도 중단되지 않은 길고 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밤의 한 부분이 완전히 지워진 것을 알고 놀라는 때도 많았다”라는 그녀의 고백을 들으면서 간간이 릴케의 시 한 편씩을 감상해보라. 우리들의 밤은 생각보다 짧다.

 

 

 

 

릴케-고독

 

예술이 가면 안 되는 길은 예술은 외부세계를 모방하면 안 된다. 이것이 릴케가 보기에 예술과 삶 사이에 격차를 두는 것이다. 예술은 아이들이 하는 유리구슬 놀이처럼 비춰보는 것이지 모방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과 필연적 관련성이 있다. 현실시대에 밀착되어 경향성을 가지거나 유용성을 가지면 덜 예술적이게 된다. 예술이 아니라 생활이 된다.

위 두 가지를 생각하며 릴케는 예술이 나아가기 위해 할 일은 사물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물은 예술가와 융해되고 사물이 예술가에게 소리를 낸다. 시물이 비밀을 예술가에게 털어놓는다. 이것이 하이데거에 가면 은폐성으로 표현된다. 하이데거는 사물이 끝까지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릴케는 사물을 철저히 주관적으로 이해한다. 김춘수가 일본유학에서 릴케시집을 발견하고 수용하면서 관념론자로 받아들인다. 내용은 새 시대의 입금을 품는다. 형식은 파괴하고 초월하려는 자, 전사와 같은 모습을 갖는다. 형식속의 편입합. 미의 고행자나 미의 금욕자라 한다. 형식 탐색자가 된다. 형식에 몰두하고 지적하면서 좁게 간다. 형식은 발견될 수 있을 뿐, 찾을 수는 없다.

릴케는 억지로 형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발견하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내성적 고독과 고백에 의해 나온다. 그렇다고 형식이 부수적인 것은 아니다.

릴케의 시사상 전개 방향을 살펴본다.

릴케는 초기시를 부정했다. 보통 초기작을 선망하는 것과 다른 태도이다. 중기시는 여행에서 그리고 마지막 최후에 뛰어난 시를 썼다. 98년 이전에 <인생과 소곡>,<가신봉축>, <꿈의 관을 쓰고>, <강림절> 1899년에서 1900년 사이에 러시아 여행하면서 시를 발견한다. <무상과 영원> 러시아의 설원에서 무상영혼, 삶과 죽음의 시가 형성된다. 인간의 유한함과 신의 존재를 깨닫는다. 1902년 프랑스 여행을 통해 로댕의 비서 역할을 한다. 예술적인 엄격함이 무엇인지 로댕의 작품 창조 과정을 지켜보면서 깨닫는다. 시는 돌을 정교하게 깎듯, 언어를 사용하여 사고의 치밀성과 정확성 진지성을 드러내야 한다. 로댕 밑에서 언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뼈아픈 각성을 한다. 현재 알려진 대부분의 시는 중기시이다. 1923년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인간이 세상에 와서 겪는 모든 정서를 드러낸다.

릴케는 미는 가공한 말한 무한한 실체라고 한다.

릴케는 현대시 개념을 개인이 자기 고독으로 파고들어 가려하는 것이라 한다. 개인시를 드러내는 것은 형식에서 차별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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