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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향기

임철우 <어둠>

by 아프로뒷태 2010. 10. 3.

 

 

 

 

임철우 <어둠>


   화장을 하기 위해 거울을 마주하고 앉는다. 세 개의 서랍이 서로 제각기 끝을 물고 물린 채 옆으로 나란히 달려 있는 화장대는 유난히 커다란 거울 때문에 늘 무너져 내릴 듯 불안하다. 거울 속엔 흘러내리지 않도록 머릿단을 수건으로 꼼꼼히 받쳐 맨 여자가 나를 쏘아보고 있다. 막 세수를 끝낸 여자의 눈가엔 군데군데 엷은 잔주름이 드러나 있고 귓불 언저리엔 버섯처럼 각질의 마른버짐도 몇 돋아 있다.

   난 거울 속의 여자와 결코 눈을 맞추지는 않는다. 그건 버릇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맞닿을 듯 가까이서 똑바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거울 속 여자의 눈은 언제나 소름끼치도록 싸늘한 적의와 간절한 파괴에의 욕구로 비수처럼 불길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그것이 다만 나의 투영된 허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인정할 수가 없었고, 그것과 마주하고 앉기만 하면 이내 새파랗게 공포에 질려버리곤 했었다.

   화장대 위에서 로션병을 집어낸다. 매끄러운 병의 감촉, 길다랗고 투명한 그 유리병을 만질 때마다 나는 가끔 흠칫흠칫 놀라곤 한다. 그것이 분명 교묘하리만큼 남근의 형상을 닮아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조그맣고 둥근 뚜껑을 비틀어 떼어내고 병을 비스듬히 눕혀 로션을 짜낸다. 그리고 손바닥에 끈적하게 묻어난 희멀건 액체를 손가락 끝에 묻혀서 뺨에 천천히 문질러 바르기 시작한다. 나는 무심히 곁눈질로 거울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찾아본다, 당신은 등 뒤쪽에서 턱을 괴고 모로 드러누운 채 아까부터 티브이를 보고 있다. 어색한 균형을 유지하며 한데 포개어져 있는 두 발바닥이 이따금 무료하게 꼼지락거리고 있는 걸로 보아 당신은 무엇엔가 짜증을 느끼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래, 당신은 지금 짐짓 티브이에 정신을 쏟고 있는 척하고 있을 뿐 사실은 나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난 그걸 알고 있다. 마치 내가 등을 돌린 채 앉아 화장을 하고 있으면서도 거울을 통해 당신의 꿈틀거리는 발가락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당신은 저녁 외출을 준비하고 있는 내 뒷모습을 끊임없이 몰래 훔쳐보고 있는 것이다.

   티브이는 쇼 프로그램이 끝났다. 웃통을 벗어 제친 사내가 우람한 근육을 시위라도 하듯 팔뚝으로 연신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손에 든 것을 꿀꺽꿀꺽 마셔대는 드링크제 선전이 있었고, 곧이어 뉴스가 시작된다. 거울 속의 티브이 화면엔 글자가 거꾸로 적힌 자막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시계를 본다. 일곱시. 좀 서둘러야 할까 싶다. 눈썹을 그리기 시작한다. 당신은 한번 이쪽에 힐끗 시선을 던져보더니, 다시 잠자코 고개를 돌려버린다.

   왜, 또 어딜 나가려구?

   시선을 티브이에 향한 채 당신은 이미 빤히 알고 있을 질문을 던진다.

   토요일엔 저녁 미사가 있어요

   나 역시 당신에겐 무의미하게만 들릴 게 뻔한 대답을 거울 쪽에 내뱉어준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이미 오래 전에 나는 성당에 나가기를 그만두었다. 그러고 나면 우리들 사이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애기가 없어져버리고 만다. 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기계적인 음성이 어색하기만 한 침묵의 틈바구니로 턱없이 활기에 넘쳐 제멋대로 끼여들고 있을 뿐 우리는 매번 난데없이 뛰어든 무뢰한을 대하듯 그 침묵의 순간을 어떻게 처치해야 할지 몰라 형편없이 당황해버리곤 한다.

   그렇다. 당신과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다.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낱낱이 들여다보고 있긴 하지만 사실상 등은 늘 돌려진 채이고, 우리가 나누는 말은 지금처럼 단지 거울을 향해, 켜진 티브이 화면을 향해 제각기 무근 가래침처럼 무책임하게 내뱉아질 따름이다. 그렇듯 헛되이 내버려진 우리 둘의 연결되지 못한 이야기들은 집 안 어디에고 함부로 떨어져 수북하게 쌓여 있게 마련이어서, 당신이 출근하고 없는 한낮에 홀로 남아 있을 때면 나는 손이며 발, 몸뚱이 할 것 없이 어디나 가 닿는 곳마다 진득거리며 엉겨붙는 그것들의 징그러운 촉감 때문에 온종일 진저를 ㄹ쳐야 하는 것이다. 입술을 그린다. 선지피보다 더 진한 붉은 빛으로 짙게, 더 짙게…

   이제 얼마 후면 나는 이 선연하리만큼 싱싱한 핏자국을 어느 사내의 입술에 옮겨주게 될 것이다.

   아아, 당신은 아는가. 이 엄청난 음모를…

   당신이 등을 돌리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바로 이 순간에 거울 앞에서 태연스레 준비하고 있는 나의 이 은밀한 배반을 도대체 당신은 짐작이나 하고 있는가.

   티브이의 목소리는 마침 화재 사고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서커스단에 불, 단원 한 명 사망, 아까처럼 글자가 거꾸로 박힌 자막이 거울에 나타났다.

   어라. 저건 바로 우리 동네잖아.

   당신은 별안간 놀란 시늉으로 소리친다. 간밤, 산수동 오거리 공터에 임시 가설된 서커스단의 천막에서 일어난 화재로 단원 한 사람이 불에 타 숨졌다는 거였다. 김 누군가 하는 이름 석 자와 이십사라는 숫자가 뚜렷하게 씌어진다. 아마도 죽은 자의 나이를 뜻하는 듯한 그 숫자가 무슨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화면에 나타나는 순간 나는 들고 있던 립스틱을 딸깍 화장대 위에 내려놓는다. 한동안 두시머리의 근육이 팽팽히 당겨져오는 듯하다.

   바로 어제 오후에 나는 그 서커스를 구경했었다. 언제나처럼 빈집을 혼자 지키고 있다가 아파트 골목을 돌아다니며 오란스런 유행가 가락과 함께 왁자하니 떠들어대는 확성기 소리에 별 생각도 없이 끌려 나갔던 거였다. 멀지 않은 오거리의 공터에 그 엉성하기 그지없는 천막은 가설되어 있었다, 손님이라야 철없는 조무래기들과 나이 지긋한 중노인들이 고작인 그 서커스단의 천막 속에서 나는 한없이 을씨년스런 공연을 지켜보았다. 두꺼운 하늘색 스타킹을 신은 두 여자가 좀처럼 올라가지 않는 다리를 낑낑 들어올리며 둔한 율동으로 조잡한 드럼소리에 맞춰 춤을 추었고, 그 외에 난쟁이의 묘기, 마술, 줄타기, 공중제비 따위의 진부한 프로그램이 전부였는데 모르긴 해도 다 합해야 열이 될까말까 한 단원들은 부지런히 옷만 바꿔입고서 몇 라례식이나 무대에 나오곤 했다.

   그들 중 누구일까. 죽은 사람은 남자라고 했다. 앙상하게 야우니 두 다리가 훤히 비치도록 엷은 바지를 입고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하며 겅중겅중 줄타기를 하던 청년, 원숭이를 부리던 남자, 그리고 비닐을 씌운 간이 의자를 손님들에게 이백 원씩 받고 빌려주고 있던 또 다른 청년의 모습이 뇌리에 선히 떠오른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윤곽이 또렷하지 않다. 그 희미한 얼굴들에다가 보다 확실한 선을 그려넣으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끝내 허사일 뿐이다. 그들 셋은 저마다 요란한 원색의 의상을 차려 입은 채 한동안 내 시야를 가득 채우며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줄을 타거나, 원숭이를 향해 박수를 치거나 혹은 의자를 들고 쭈뼛쭈뼛 다가오거나 하더니 이윽고 그것마저도 지워져 버린다. 어젯밤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가 죽었고 그리고 바로 그 누군가가 불길에 휘ㅃ사여 숯덩이처럼 지글지글 살을 태우고 있을 순간에 나는 잠결에 취해서 더듬거리는 남편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 곤히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화장은 끝났다. 머리에 두른 수건을 풀어내리면서 탈바가지처럼 무표정한 여자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조용히 웃고 있다. 보일락말락 숨은 그 웃음은 뜻 모를 잔인성마저 띠고 있다. 장롱 서랍에서 하얀 블라우스를 꺼낸다. 형광등 불빛을 받아서 블라우스는 눈부시게 희다. 아침에 그것을 세탁하여 정성스레 다림질까지 해두었던 것이다. 표백제를 정량보다 더 진하게 풀어넣고 몇 번씩 확인하며 씻어내었지만 풀물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아싿. 지금도 자세히 살펴보면 희미한 얼룩을 몇 군데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턱을 괴고 엎드려 멀거리 내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 옷을 다 갈아입은 한동안 당신 앞에 등을 드러내놓은 채 서 있어본다. 나는 차라리 기다리는 것이다. 당신의 시선이 내 등에 탄환처럼 무수히 날아와 박혀주기를 … 정말이다. 당신은 기억해야 한다. 저주받은 자의 낙인처럼 내가 흙덩이의 얼룩과 풀물을 묻혀 돌아오기 전에 지금 돌려세우고 있는 나의 등을, 눈부시도록 환한 순백의 블라우스 빛깔을. 이 순간 당신의 뇌리에 뚜렷하게 남겨두어야 한다. 그리고 부릅뜬 눈으로 늦은 귀가를 지켜 기다리다가 내가 꾸며온 이 배반의 흔적은 오늘만은 기어코 확인해 주어야 한다.

   그전 내심으로 혼자 오랫동안 바라왔던 파국이었다. 언제나 당신 앞에서 밤 외출을 준비할 때마다 나는 차라리 이 위태위태하고도 끈질긴 곡예가 그렇게 당신의 손에 의해 무참하리만큼 깨어져버리기를 바라왔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당신의 눈빛은 오늘도 청맹과니의 그것처럼 시종 흐릿하다. 마치 멀리 떨어진 풍경을 가늠해볼 때처럼 멍하고 무심한 당신의 시선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아득한 절망감을 확인한다.

   하느님두 좋지만 오늘은 좀 빨리 들어왔으면 좋겠어. 방구석에서 혼자 마누라 기다리는 마자 기분도 생각해주라고, 쯧.

   누운 채 턱을 잡아당겨 쩌억 하품을 뽑아내며 당신은 말한다. 그 얼굴은 벌써 따분함을 역력히 준비하고 있다.

   아니, 저 목걸인 놔두고 빈손으로 갈 거야?

   그제서야 나는 깜박 잊고 있었다는 시늉으로 돌아서서 화장대 위에 놓인 것들을 집어든다. 그러나 성경과 성가집은 그대로 놓아두고 묵주만을 가지고 가기로 한다. 당신이 장난스레 목걸이라고 부르는 이 묵주는 독실한 신자인 친구에게서 받은 선물이다. 괴롭고 견디기 어려울 땐 기도를 해,. 그 사고만 해도 그렇지, 너로서도 어쩔 수 없었잖니. 그녀는 내게 자못 근엄한 표정으로 마치 판결을 내리듯 그렇게 말했었다. 로자리오. 말갛고 투명하게 반짝이는 쉰 몇 개인가의 유리알은 영락없이 갓 피어나 ㄴㅂ룩은 장미꽃 이파리처럼 아름다웠다.

   연속극이 마악 시작되려 하고 있고 당신이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담배를 찾아 머리맡을 더듬거릴 즈음 방을 빠져나온다. 거실엔 불이 켜진 채 텅 비어 있다. 거리를 달려 지나가는 자동차의 소음이 나직이 귀에 잡힌다.

   현관문 앞에서 나는 잠시 거실을 둘러본다. 아무도 없는 실내의 풍경이 섬뜩한 한기마저 품고 강렬하게 내리쬐는 천장의 불빛으로 해서 어찔한 현기증을 일으키게 한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누워 티브이를 보고 있을 안방과 내가 문을 나서기 위해 서 있는 이 현관 사이의 결코 넓지 않는 공간이 불현듯 처음도 끝도 가늠하기 어려운 엄청난 거리감으로 확대되어 다가온다. 어쩌면 이 아득한 공간은 당신과 내가 사 년 육 개월의 결혼 생활 동안에 끊임없이 만들어온 거리인지도 모른다. 우리 저마다 어딘가를 향해 함께 부지런히 질주하고 있노라고 믿고 있었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당신과 내가 등을 맞대고 출발한 달리기였음을 이제야 나는 확연히 깨닫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얼핏 당신의 기침 소리가 들린 듯하여 황급히 문을 열고 나온다. 그리고 천천히 되닫는다. 거실 안의 불빛이 완강하게 달라붙었다가 차츰 뒷걸음질로 밀려들어가 이윽고 딸깍 잠겨버린다.

   복도는 어둡다. 전구가 나간 걸까. 스위치를 올렸지만 불은 켜지지 않는다. 한 순간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무엇인가 바로 곁에 서 있는 듯한 불길한 느낌에 등골이 서늘하다. 주저주저 고개를 돌려 살펴보지만 역시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아래층 복도에 켜놓은 불빛이 흐릿하게 발 아래쪽으로 기어들어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좁은 엘리베이터 속에 여럿이서 함께 서 있을 때처럼 야릇한 거북스러움과 긴장감이 묵직하게 가슴을 누른다. 천천히 계단을 밟아 내려간다. 여전히 무언가 바짝 붙어서 뒤따라오고 있는 듯한 불길한 느낌…아아, 소리. 그건 숨결 소리이다. 혼자 방안에 앉았을 때나 한밤중 잠결에 문득 눈을 뜨고 일어나 ㅆ을 때나, 아무도 없는 대낮의 후미진 골목길을 돌아나갈 때에나 때때로 나는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숨소리를 확연히 가려낼 수가 있었다. 바람결처럼 은밀하고 나직하게 그러나 분명히 그 불길한 숨소리는 들려왔다. 처음엔 혼자의 것처럼 들리다가도 어느새 그것은 점점 불어나서 이윽고는 수많은 숨소리로 변해버리곤 했다.

   누굴까 누군가가 항상 내 곁을 보이지 않게 따라다니고 있어.

   눈같이 흰 송이송이를 엮어 만든 이 화관을 겸손되이 당신 발아래 바칩니다.

   손가락으로 묵주알을 세어 돌리며 한 걸음씩 내어딛는다. 불과 오층인데도 통로는 한없이 이어질 듯 길기만 하다. 일층 어느 집인가의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고, 그 쿠웅 소리는 통로를 타고 공허하게 울리며 기어올라와서는 귓가에 잔 파동으로 머물다가 금세 지워져 버린다. 흡사 어느 지하 감옥의 맨 밑바닥에 붙은 단 하나의 육중한 출입문이 내려닫히는 것 같은 아뜩한 절망감조차 그 음향은 숨기고 있다.

   통로는 다시 조용해져버리고, 내려딛는 내 발소리만 음산하게 울리기 시작한다. 자꾸만 이대로 몸뚱이가 한발 한발 깊숙이 가라앉아버리고 마는 건 아닌가 싶게 불안함. 그리고 불안감이 이내 목줄기를 빳빳하게 만들고, 잊어버리고만 싶은 어느 날의 어두운 기억을 애써 잠재워둔 의식 속에서 부옇게 불러일으켜 세우기 시작한다.

   

   아이는 길가에 서 있었다.

   나는 멀리서부터 분명히 그 아이를 보았었다. 유치원 건물을 지나 주택가가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왼쪽으로 언덕을 낀 채 나선형의 도로가 꼬이듯 이어졌다. 언덕엔 어느 농업 학교의 실습팀이 있었고 거기에는 빽빽하게 들어찬 벽오동나무들이 이제 한참 피어나기 시작하는 연보라 꽃송이를 가드 달고 도로를 따라 길다랗게 늘어서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그 지점에서부터 약 백여 미터까지의 아스팔트 도로는 거의 일직선으로 뻗어 있으므로 시야를 가릴 만한 것은 없었다. 더구나 근처엔 인가가 별로 없는 변두리 야산의 고갯길이라 인적도 드물었다. 꼬불꼬불한 커브길을 다 돌아나와 거기서부터는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였기 때문에 당신은 방심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난 차가 커브를 돌아서자마자 첫눈에 그 아이를 발견했었다.

   우연이었을 것이다. 꽤 먼 거리였는데도 아이의 하얀 옷 빛깔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아스팔트의 검은 바탕 위에 잘못 떨어진 자그맣고 희끗희끗한 무슨 옷보퉁이라고나 해야 좋을 만큼 무심히 여기며 나는 그것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당신은 곁에서 그때 무엇 때문인지 큰 소리로 웃어대고 있었다. 산부인과 의사의 그다지 우스울 것도 없는 농담을 벌써 여러 번씩 되풀이하며 혼자서 턱없이 헤프게 웃음을 터뜨리곤 했었으므로 오히려 나는 심드렁해져서 말없이 앞쪽에 시선을 던져둔 채 앉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당신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나는 당신의 퍽 들떠 있는 웃음소리를 헤아리며 눈앞으로 급하게 다가오는 아스팔트 한쪽 가장자리의 작고 희끗희끗한 물체를 무심히 바라보던 한 순간이었다. 그 물체가 어떤 자그마한 어린 아이의 윤관으로 얼핏 드러났고, 아이는 마침 손을 저으며 맞은편을 향해 걸어나올 듯 몸을 흔들고 있었으며 아이가 바라보고 있는 길 건너편엔 리어카가 한 대 서 있었고, 그 리어카 곁에서 부부인 듯한 남녀가 무엇인가 가득 담겨진 상자를 리어카에 옮겨 싣고 있다는 정도의 그저 평범하기만 한 풍경이 별안간 어떤 엄청난 위기감으로 내 머릿속에 퍼뜩 튀어올랐을 때 나는 다급하게 당신을 부르려했다.

   하지만 일은 이미 늦어 있었다. 그보다 조금 앞서 아이는 도로 한가운데를 향해 돌연 기묘한 달음박질로 뛰어 들어왔고 당신과 나는 동시에 어억 비명을 질렀다. 뭔가 감지되기조차 어려운 만큼 미약한 충격이 차체의 앞부분으로부터 전해져왔다. 당신은 뒤늦게야 핸들을 깊숙이 꺾으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는 소름끼치도록 커다랗게 이빨을 갈며 기우뚱 멈추었다. 한동안 세상의 모든 것이 시간조차도 완전히 정지해버린 듯 고요했다.

   당신은 핸들 위에 얼굴을 처박고 엎드려 있었고 나는 가린 손바닥이 엉켜 붙은 듯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눈 깜짝할 순간에 모든 것은 시작되었고 또 끝이 난 거였다. 결혼한 지 삼년 만에 그토록 바라던 아이를 머잖아 갖게 되리라는 기쁨을 확인 받은 지 불과 한 시간도 채 못 되어서였다.

   정말 다행입니다. 제야 솔직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부인께선 잘못하면 불임이 될 소지가 많은 편이어서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었거든요. 기적 같은 일입니다. 허허헛, 아마 주인 양반께서 솜씨가 보통이 아니신 모양인데요.

   의사의 약간 과장된 말에 당신은 머리를 긁적이며 요란하게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어린애처럼 기뻐하는 당신의 제안대로 우린 곧장 산장까지 드라이브를 하기로 하고서 마악 시가지를 빠져나오던 참이었다. 

    

   화투를 치는지 경비실 안에서 두 사내가 고개를 모으고 마주 앉아 있다. 계단을 내려섰을 때까지 그들 중 누구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밖은 어둡다. 도시의 크고 작은 골목을 휘돌아 내불어오는 바람은 메마른 먼지 내음을 짙게 풍기고 있다.

   화단을 둘러친 쇠사슬 모양의 낮은 방책 위에 사람들이 서넛 모여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다. 파자마 차림의 뚱뚱한 남자가 슬리퍼를 끌며 지나간다.

   나는 가로등 불빛에 시계를 비춰본다. 좀더 걸음을 재게 옮긴다. 놀이터엔 아무도 없다. 온종일 떠들썩하게 붐비던 그곳은 아이들이 떠나간 밤엔 페허처럼 을씨년스럽다. 혼자 있는 낮이면 거실의 유리창에 이마를 기댄 채 나는 종종 아이들이 노는 모양을 내려다보곤 했다. 아이들은 특히 그네 쪽으로 모여들었다. 고작 세 개뿐인 그네는 으레 몸집이 큰 아이들의 차지였다. 언젠가는 다섯 살 가량 되어 보이는 계집애가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기다리다가 끝내 몫을 차지하지 못하고 풀이 죽어 돌아서는 모양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그 단발머리 계집애를 밀어내고  저 혼자 그것을 독차지한 채 한참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며 그네타기에 열중해 있는 키 큰 사내아이를 당장에 쫓아나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버리고 싶은 잔인한 적의로 몸을 떨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네터도 비어 있다.

   우린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짧은 정적을 깨뜨린 것은 처절한 여자의 비명 소리였다.

   아이의 어머니는 들고 있던 상자를 내던지고 양팔을 벌린 채 미친 듯 길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상자 속에서 새빨간 핏방울 같은 것들이 와르르 쏟아져 사방으로 가득히 흩어졌다. 딸기알이었다. 아이는 대여섯 걸음이나 멀리 튕겨져나와 아스팔트 바닥에 나가떨어져 있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아이의 아버지가 달려왔다. 당신은 그제서야 도어를 열고 황급히 뛰어나갔다.

   아이는 밀짚 인형 같았다. 아무렇게나 사지를 벌린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여자가 그 밀집 인형을 허겁지겁 안아들었다. 지푸라기처럼 가드다란 아이의 두 다리가 여자의 무릎 아래서 디룽거렸다.

   아이는 그때 이미 숨이 끊어져 있더라고 당신은 후에 말했다. 이상하게도 아이의 작은 몸뚱이 어디에서도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여자가 아이의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힘없이 감긴 눈자위로 때 묻은 눈물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번엔 여자가 손바닥으로 아이의 뺨을 후려쳤다. 그래도 밀짚 인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는 반쯤 입을 벌린 채였다. 여자의 입도 따라 커다랗게 벌려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여자의 벌려진 입 속으로부터 아무런 울음도 터져나오지 않았다. 꺽 꺼윽, 숨넘어가는 소리를 몇 번 계속하다가 그녀는 기어코 까무라치고 말았다. 남자는 당신의 멱살을 쥘 생각도 미처 못 하고 있는 듯했다. 사지를 디룽거리고 있는 밀짚 인형을 껴안아 당신이 급히 차에 실었고 역시 거의 실신 상태에 있는 여자마저 질질 끌 듯이 옮겨 실었을 때까지도 남자는 얼이 나가 있었다. 마침내 당신이 몇 번이나 핸들을 잘못 꺾는 실수를 저지른 다음에야 차는 오던 길을 향해 방향을 바꾸었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만 아스팔트 바닥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무수한 딸기알들이 그 핏빛 동그라미들이 온통 시야를 가득히 덮으며 굴러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아파트 정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후미진 골목길을 접어든다. 골목은 얼마쯤 계속되다가 성당 앞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거기서 신작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 주택가가 끝나고, 산장으로 통하는 언덕길이 시작된다. 사고가 났던 곳은 바로 그 언덕길 너머였다.

   성당 입구의 아치형 기둥엔 외등이 환하게 켜 있다. 고개를 들면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성당의 뾰죽 지붕과 그 끝에 솟아 있는 거대한 십자가가 괴물처럼 어렴풋이 드러나 보인다. 성당 입구는 텅 비어 있다. 토요일엔 미사가 없다. 졸린 눈으로 티브이 채널을 이리저러 돌려보고 있을 당신을 애써 생각하지 않기로 하며 바삐 걸음을 옮긴다. 손안에 든 묵주의 감촉이 차갑자.

   성당의 담을 마주하고 꽤 많은 술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반쯤 열어놓은 어느 집 유리창 사이로 남자들의 취한 웃음소리가 들려나온다.

   후미진 골목 귀퉁이에서 대학생 차림의 젊은 애들 셋이 모여 있다. 하나는 쪼그려 앉아  욱욱거리며 연식 구역질을 해대고 있고 하나는 등을 두드려주며 뭐라고 중얼거린다. 또 다른 하나는 책가방을 부둥켜안은 채 성당의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꽃밭에는 꽃들이 한 송이도 없네

    오늘이 그날인가 그날이 언제일까

    해가 지는 날 별이 지는 날

    지고 다시 오르지 않는 날이…

   골목을 빠져나올 때까지 노랫소리는 들려왔다.

  

   빌어먹을, 재수가 없으려니까 원.

   이틀간의 구치소 생활에서 돌아온 당신은 대뜸 그 말부터 내뱉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뭐. 피해자측이 순진한 사람들이기에 망정이지 까닥했더라면 돈을 들 만큼 들고도 속깨나 썩였을 건데 말야. 당신은 그 아이의 가난한 부모로부터 합의서를 쉽게 받아내었다는 데 대해서 만족해하고 있었다.

    불쌍하긴 하지만 차라리 부모들한테 잘된 일인지도 몰라. 소아마비에다가 다섯 살인데도 말조차 잘하지 못하는 병신이었다고 하잖아. 가만 눈치를 보니깐 아비란 작자고 그 보상금 받아서 앞으로는 행상 집어치우고 다른 걸 시작해볼 생각이라지 뭐야.

    순간 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부엌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깨어진 찻잔의 파편이 하얗게 타일 바닥에 깔렸다. 맞았다. 그때 난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사고가 나던 그 짧은 찰나 기묘하게 절뚝이며 차 앞으로 뛰어들던 아이의 모습을, 그리고 여자의 품에서 힘없이 디룽거리던 가냘프고 비틀린 두 다리를…

    그 후, 나는 가끔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꿈속으로 아이는 언제나 절뚝거리며 달려 들어왔다. 어느 때 어디를 가나 내 귓전에 바싹 붙어 따라다니는 숨결을 아무리 해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물이 끊겨 쉿쉿 소리를 내는 수도꼭지를 틀다가도 화원의 꽃무더기에서도 정육점 윈도의 시뻘건 불빛에서도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선 여인의 현란한 물방울 무늬 원피스에서도 나는 그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죽은 다섯 살짜리 병신 아이의 영상을 찾아내고는 몸서리를 쳐야 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얼마 후, 처음이자 영영 마직막일지도 모르는 내 뱃속의 또 다른 아이는 원인도 없이 유산되고 말았다. 임신 넉 달째 되던 무렵이었다.

   

   산장으로 통하는 언덕길을 오른다. 여기서부터는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다지 어둡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저 만큼 펼쳐진 시가지의 야경이 반사되어 이곳까지 어슴푸레한 빛을 던져주고 있는 탓이리라. 몇 쌍의 연인들이 나직한 음성으로 이야기하며 언덕길을 걸어내려 오거나 올라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멀잖은 곳에 딸기밭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바로 앞에 두 남녀가 걸어간다. 어깨를 바싹 붙이고 한덩어리진 채로다. 조금 있으면 그들은 딸기밭 군데군데에 독버섯처럼 돋아난 파라솔 밑에 앉아 색깔도 알아볼 수 없는 까만 딸기알을 아작아작 씹어댈 것이고, 그리고는 밤이 늑기 건에 근처의 어느 싸구려 여관을 찾아 기어들어갈 것이다. 끼르륵 앞쪽에서 여자가 웃는다. 불현듯 행복에 겨워 끼드득대고 있는 그 풋내 나는 계집아이의 머리채를 나꿔채어 미친 듯 흔들어 주고 싶은 까닭모를 증오가 치솟는다. 이를 악물고 힘껏 잡아채면 손에 한 움큼 머리칼이 뽑혀 나올 것이고 그 긑엔 팥죽처럼 진득이는 피 묻은 살점도 영여 있을 게다.

   길가 언덕바지에 벽오동이 빽빽이 늘어서 있다. 벽오동은 밑동이 밋밋하다. 사람의 키 다섯 배나 될 듯한 높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지는 무성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하고 그 까지 끝에 넓적한 연보라빛 꽃이 달리는 것이다. 오월, 일 년 전의 그날도 벽오동꽃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나무들을 살핀다. 꽃은 좀체 분간하기가 어렵다. 어둠이 먹빛으로 나무들을 감싸 안고 있을 뿐이다.

   사내는 벌써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

   등을 이쪽으로 비스듬히 돌린 채 시가지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다가서려던 걸음을 멈춘다. 바로 이 자리다. 그날 아이는 밀짚 인형처럼 이 새까만 아스팔드 바닥위에 누워 있었다. 빨갛게 무르익은 딸기알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그 자리에서 오늘은 저 사내가 나를 기다라고 서 있다.

   잠바를 걸친 사내의 등이 오늘따라 더 허전해 보인다. 사내가 바람을 피해 돌아서서 손바닥으로 둥지를 만들어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나를 발견한다.

   늦었군,

   뚜걱뚜걱 다가와 내미는 그의 손에 내 것을 쥐어준다. 불현듯 내 육신의 깊숙한 어디에선가 잠자고 있던 욕정이 그 부드러운 불덩이를 불러 깨워 온몸을 아릿아릿 핥아대기 시작한다. 언제나처럼 사내는 내 손을 이끌고 묵묵히 풀섶을 헤쳐 들어가고 있다. 허리 높이까지 차오르는 풀잎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직이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흔들려 넘어진다. 간간이 질주해가는 자동차의 엔진음이 등 너머로 어지럽다.

   내가 사내를 처음 만난 것도 아까 그 자리였다. 그날은 산마루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달이 유난히도 밝았다. 그즈음 난 늘 지쳐 있었다. 그 은밀한 숨소리의 환영은 귓전을 떠나지 않았고, 어수선한 꿈으로 조각조각 이어지는 잠자리는 견딜 수 없이 피곤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날도 홀로 아무 생각도 없이 아파트를 빠져 나와 얼마쯤 걷다보니 어느 결에 벽오동이 늘어서 있는 그 언덕길까지 와 있었고 그 길에서 사내를 처음으로 만났던 것이다.

   아무도 없으리라 여겼던 길가 풀섶에 누군가 웅크리고 앉아 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기절할 듯 놀랐었다. 처음엔 술에 취한 사내가 거기서 토해내고 있는 줄로 여겼다. 끅 그윽, 기묘한 신음을 짜내며 쭈그려 앉아 있는 사내 곁을 멸 걸음 지나쳤을 때였다.

   졌어. 내 인생은 패배한 거야!

   분명히 사내는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울음 섞인 음성.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다보았다. 멀리 커브길을 돌아나온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무서운 속력으로 질주해오고 있었다. 탄환처럼 섬뜩하고 강렬한 불빛이었다. 불빛 속에 둥그렇게 등을 말고 있는 사내의 야윈 몸뚱이가 환하게 드러났다. 순간 나는 사내에게 뛸 듯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사내는 울고 있었다. 뚜꺼운 안경 너머로 줄줄 흐르고 있는 눈물을 나는 얼핏 보았다. 차는 재빠르게 스쳐지나갔고 우리 둘은 다시 어둠속에 함께 내던져졌다.

   흔들리고 있는 좁은 어깨에 내가 말없이 두 손을 얹었을 때, 사내는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난 빼앗겼소. 칠 년의 세월을. 아니, 내 젊은 시절은 결국 이 꼴로 송두리째 도둑질당하고 만 거요. 아아. 사내의 넋두리엔 응어리진 분노와 슬픔의 냄새가 눅진하게 묻어 있었다. 그건 어둠의 냄새였다. 핏빛 죽음의 냄새였다. 활자, 감옥, 신문, 실업자, 칠 년, 아내, 아내가 번 돈 따위의 뜻 모를 낱말들이 무질서하게 뛰어나오는 그의 울음 섞인 넋두리를 듣다가 나는 왈칵 사내를 부둥켜안고 말았고, 그 중년의 사내는 어린 아이처럼 내 품에서 엉엉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풀더미를 고른 다음 나는 몸을 눕힌다. 등에 와 닿는 젖은 풀잎의 감촉이 차갑다. 오늘밤 사내는 조금 서두르고 있다. 가슴을 더듬는 손가락 끝에 팽팽하게 힘이 들어가 있다. 눈을 떠본다. 하늘엔 별이 가득하다. 별들은 물기를 머금은 채 저마다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언뜻 손바닥에 무엇인지 딱딱한 것이 잡힌다. 묵주다. 여태껏 그걸 손에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내의 가쁜 입김이 귓전에 뜨겁게 부어지지 시작한다. 별이 흔들린다. 어두운 하늘 저편으로 누군가 줄을 타고 있다. 앙상한 하체가 죄 드러나 비치는 얇은 옷을 입고 겅중겅중 줄을 타고 있다.

   피같이 붉은 송이송이를 엮어 만든 이 화관을… 아이가 뛰어나온다.…… 겸손되이 당신 발아래 바치나이다. 지푸라기처럼 가느다란 다리로 꼬일 듯 비틀릴 듯 엇갈리는 아이가 뛴다. 당신이 커다랗게 웃고 있다. 두 팔을 벌리고 여자가 달려온다. 상자에서 빨간 핏방울들이 와르르 쏟아져나와 아스팔트 바닥에 널린다. 별들이, 무수한 딸기알들이 하늘 가득히 흩어지고 있다.

   사내가 움찔 몸을 사린다. 그리고 한 순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다.

   아아. 갖고 싶어.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늘을 향해 나는 두 무릎을 세운다. 어둠 저편으로 하늘이 떨고 있다. 이윽고 나는 후드득 무너져내려오는 사내를 온몸으로 받아 안는다.

 

 

 

 

 

 

 

임철우 소설가

 

출생     1954년 10월 15일 (전라남도 완도)
소속    한신대학교 (교수)
학력    전남대학교대학원 영문학 박사
데뷔    1981년 소설 '개도둑'
수상    2005년 제22회 요산문학상 1998년 단재상
경력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소설     백년여관 2004
            그 섬에 가고 싶다 2003
            등대 2002
            아버지의 땅 2001
            밤꽃 2000
            붉은 산, 흰 새 2000
            봄날 1997
            직선과 독가스 1995
            등대 아래서 휘파람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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