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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2000년대부터 한국사회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던 자기계발서는 사람들의 인성을 망쳤다.

by 아프로뒷태 2011. 8. 1.

 

 

 

나는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2000년대부터 한국사회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던 자기계발서는 사람들의 인성을 망쳤다. 물론 자기계발서가 주는 이로움은 있다. 삶은 힘들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때, 자기계발서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인생을 글로 배울 순 없다. 성공을 글을 통해 단기간에 터득한다는 것은 다소 무의미하다. 인생은 경험을 통한 지혜의 탑쌓기이다.

그러므로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급상승하듯 인성을 개척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게 하는 자기계발서, 

그 책에 일침을 가한다.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서와 위로 신드롬이 붐인 이유는 무엇인가?

 

 

 

 

2000년대 한국사회에는 자기계발서가 도서가를 점령했다. 자기계발서를 읽을 때에는 어떤 어려운 일도 금방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생긴다.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본래 자기의 생활로 돌아온다. 우리는 자기계발서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테스트해볼 수 있다. 작심삼일이 될 수도 있고, 그보다 더 의지를 갖고 노력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자기계발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권하고, 사람들은 자기계발서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하다가 좌절하기도 한다.

 

 

이때 등장하기 시작한 책이 위로의 테마를 갖고 출발된 책들이다. 위로 신드롬이 확산되면서 우리는 자기계발서와 위로 신드롬의 책이 과연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고, 향후 이 책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대안을 줄 수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자기계발서나 위로 컨셉을 가진 책들이 일으키는 신드롬의 특징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주체가 되고자 하는 두려움에서 이 책을 찾는다는 공통점을 알 수 있다. 자기계발서는 삶을 운영하는 방법을 조언해준다. 위로 컨셉의 책은 삶에서 겪는 좌절을 위로해준다. 둘 다 한 개인이 주체로 살아가는 것이 무척 힘이 들 때 도와주는 조언자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왜 한국 사람들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을까? 이것은 근본적으로 한국사회가 가진 모순에서 비롯된다. 서구적인 모더니티는 주체 성립의 과정에서 계급, 가문, 혈통과 같은 관계에서 자유로운 개인이 탄생하였다. 이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던져졌고 심리학도 시작되었다. 19,20,21세기에 들어 개인은 상당히 안정된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다르다. 한국사회에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사회는 주체 형성의 역사적인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사회는 글로벌화되면서 주체적인 삶을 적응해가지 못하고 자꾸 조언을 구하거나 위로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까페 점집이나 타로카드점이 자꾸 생겨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주체적인 자아를 형성하기도 전에, 모든 성공과 실패를 개인의 몫으로 껴안다보니 불안해진 것이다. 누군가 그 답을 미리 말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해결되거나 극복될 수 없다. 근본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주체 형성의 역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주체들은 혈연, 지연, 학연과 맞물려 있고 그 관계속에서 사회활동을 한다. 그래서 그러한 관계를 단절하면 대단히 피곤하다. 그렇다고 관계하는 단체가 개인의 역할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집단과의 관계를 맺는 대신 개인은 여전히 책임감 있는 역할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관계속에서 살다보니 한국사람들은 피곤한 것이다.

 

 

사실 조언이나 위로는 책보다는 사람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요듬 사람들은 타인과의 관계를 힘들어 한다. 타인에게 자기를 위로해 달라고 요구하거나 자신의 나약한 부분을 노출하기 꺼려한다. 혼자 떠도는 섬처럼 살면서 책이나 대중문화를 통해 위로받는다.

 

 

특히 영화, 드라마, 오락프로그램과 같은 대중문화를 통한 조언이나 위로는 사람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카타르시스적인 위로가 많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나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담은 오락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은 감정이입을 하고 동병상련을 느낀다. 인물에게 일시적으로 감정을 몰입하면서 사회에서 좌절하고 실패한 자신의 경험을 이입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분노하는 것이다. 막장 드라마가 뜨는 것도 아마 분노하고 소리치지 못하는 아줌마들이 꽉 막힌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줄 무언가가 필요해서 흥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매스컴이나 영화, 연예, 오락 프로그램을 통해 얻는 위로는 사람의 사고를 퇴행시킨다. 그런면에서 책을 통해 위로는 집중하고 사고하게 하여 낫기는 하다. 하지만 결국 위로에 지나치게 의지해서도 안 된다. 자꾸 위로에 몰두하면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고 여기에 중독되면 주체적 자아 형성은 어려워진다. 자기 연민은 심리적인 마스터베이션이기 때문이다. 그 또한 욕망 해소의 한 방법으로서 맛에 길들어져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위로나 조언은 현실의 문제에 대한 나의 책임보다 원인을 찾아 설명하려 한다. 그래서 내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위로나 조언의 뒤에는 불안, 공격성, 분노, 적개심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진정한 치료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를 돌아보아야 한다. 나를 성찰하는 시간, 나 자신과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또한 사회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애정이 전제된 비판의식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사회는 내 편 아니면 네 편, 강남과 강북, 여당과 야당, 좌파와 우파, 사장과 노동자라는 흑백논리가 강하다. 그래서 자폐적인 해결방식으로 이루어지거나 다른 것에 대한 공격성을 적개심으로 풀려는 방식이 강하다. 이것은 진정한 위로가 아니다.

 

 

불안하는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서와 위로 관련 서적이 일으킨 신드롬은 결국 한국사회에 문제가 있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려면 개인부터 바꾸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정책부터 바뀌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자기한테 몰입해서 자기와 다른 것은 용납 못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는 나르시시즘이 강하다. 어디서도 위로를 받지 못하면 대상을 찾아 헤매고, 그 대상을 찾게 되면 이상적인 것을 더 요구하게 된다. 그러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분노하고 외면한다. 남이 자기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누구나 사람은 자기에게 간섭하는 것을 싫어하고 분노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양가적인 태도가 심하다. 성공에 집착하며 읽는 자기계발서나 위로 관련 도서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부분이 나르시시즘과 일치한다.

 

 

지금 한국사회는 상처받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위로를 유형화하여 위로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위로는 어느 것이 더 심각하고 덜 심각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와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다가가고 그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한국사회는 정서공유의 경험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슬픔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유하는 것이다. 정서를 공유하는 경험들이 풍요롭게 축적되면 의사소통은 한결 부드럽고 수월해진다. 정서를 공유하는 관계는 어렵지 않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본능과 상통한다. 즉 놀이를 통해서 공유가능하다. 어떤 분야이든 즐겁게 할 수 있는 놀이를 통해 함께 정서를 공유하고 재미를 느끼고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같은 집단의 사람들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하는 것도 그와 같은 것이다.

 

 

삶은 좋은 기억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사람과 사람의 정서공유와 치유는 꼭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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