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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영화 속의 일들보다 현실이 더 잔인하다.

by 아프로뒷태 2011. 6. 15.

 

엿가락처럼 구부러진 철제 기둥만이 잿더미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꽃과 상추 등을 키웠던 텃밭은 깨진 화분만이 예전 그 장소임을 알게 했다. 마을 어귀에 주차승용차트럭 등은 전소돼 앙상한 뼈다귀만 남아 있었다. 화마가 지나간 '포이동 266번지'는 사람이 산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게 잿더미로 변해있었다.

"마을 회관에서 자다가 새벽 4시께 잠이 오지 않아 집에, 아니 집이 있던 곳에 가봤죠.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어요. 새까맣게 탄
냉장고보일러 기름통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어요. 모든 게 재로 변해 있었어요."

서미자(54) 씨는 "
이젠 하도 울어서 눈물도 나지 않는다"며 "20년 넘게 살아온 집이 한순간에 이렇게 되니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싶다"고 혀를 찼다.

화마가 지나간 '포이동 266번지'

지난 12일 오후 4시께 발생한
화재로 강남구 개포동 1266번지(구 '포이동 266번지') 주민의 집 대부분이 전소됐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이번 화재로 이 곳에 살던 총 96가구(거주인원 189명) 중 75가구(100여 명)가 집을 잃었다. 자동차는 6대가 불에 탔다.

초등학생의 불장난으로 발생한 이번 화재는 판자촌 서쪽 목공소 인근에서 시작돼 판자촌 대부분에 퍼진 뒤에야 겨우 진화됐다. 집집마다 가지고 있던 부탄가스통과 보일러 기름통에 불이 붙어 대형 화재로 번졌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당국은 소방헬기 2대, 소방차 75대, 소방인력 218명을 동원해 화재 진압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지만 당장 이 지역 주민들은 생필품은 고사하고 잠잘 곳조차 없는 형편이다.
▲ 화재가 난 마을을 주민 한 명이 둘러보고 있다. ⓒ프레시안(허환주)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서미자 씨는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화장실을 갔다 온 딸이 갑자기 '불이 났다''며 황급히 깨웠다"며 "놀라서 나와 보니 멀리 떨어진 판자집에서 검은 연기가 나고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서미자 씨는 "워낙 황급히 나와서 말 그대로 몸만 빠져나왔다"며 "
협심증이 있어 약을 정기적으로 먹어야 하는데 그것도 챙기지 못했다"고 했다. 슬리퍼를 신고 있는 서 씨는 간편한 반바지와 흰 티를 입고 있었다.

인근
문구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딸은 14일까지 휴가를 낸 상태다. 입을 옷조차 없는 상태에서 출근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서 씨는 "딸아이는 근처 친구집에 있다"며 "당장 잘 곳도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한 숨을 내쉬었다.

딸은
등록금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 등을 하다 상황이 어려워져 결국 대학자퇴했다. 이후 문구점에 취직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다. 딸이 받는 월급 115만 원으로 두 식구가 생활을 하고 있었다.

화재와 함께 사라진 아내의 반지

화재로 인해 몸만 빠져나온 건 서 씨 모녀만이 아니었다. 박재만(가명·56) 씨는 "급히 나오느라 아무 것도 집에서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며 "아내에게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선물해준 다이아몬드 반지도 챙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 씨는 "나중에 화재가 진화된 뒤 집이 있던 장소에 가보니
다이아 반지도 집과 함께 불타 없어지고 반지 케이스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며 "어렵게 모은 돈으로 사준 반지인데 이렇게 없어지게 돼 안타깝다"고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김민수(가명·48) 씨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 씨의 판자집은 김 씨의 어머니와 자녀들을 포함해 총 여섯 식구가 살았다. 몸만 빠져 나온 김 씨는 아이들을 각각 고모집과 작은
아버지집에 보냈다.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자신은 '포이동 266번지' 마을회관으로 사용하는 컨테이너에서 하루를 보냈다.

집 없이 생활을 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김 씨는 "씻을 곳도 없어 마을회관 앞에 커다란
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사람들이 '고양이' 세수를 하고 있다"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나마 매 끼니는 대한적십자사에서 제공
해주고 있다. 속옷, 칫솔 등 간단한 생필품도 지급됐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대한적십자사에서 제공하는 식사도 14일까지 만이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끼니를 때워야 할지 막막한 포이동 주민들이다.

무엇보다 답답한 건
전기가 마을에 아예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화재로 인해 마을로 들어오는 전기선들이 다 녹았다. 이로 인해 지난밤에는 김민수 씨 어머니가 소방호스에 발이 걸려 넘어져 팔이 부러지는 사고도 발생했다. 마을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아 발생한 인재였다.
ⓒ프레시안(허환주)
"집은 사라졌지만 터전까지 사라지게 할 수 없다"

하지만 강남구청에서는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다. 구호 물품조차 지급하지 않고 있다. 대신 구청에서는 구룡
초등학교 강당을 구호소로 지정하고 마을 주민들에게 이동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포이동을 벗어날 수 않겠다는 입장이다. 조철순 포이동266번지 사수대책위원회 위원장은 "구청에서는 우리를 이 곳에서 쫓아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며 "이번 화재를 기회로 아예 우리를 몰아내려 하고 있다"고 지정 구호소로 가지 않는 배경을 설명했다. 이 곳은 개포동으로 통합되기 전에 '포이동 266번지 재건마을'로 불렸다. 서울 강남에 구룡마을과 함께 남은 마지막 판자촌이다. 주민 189명이 얼기설기 엮은 판잣집에서 살아왔다.

주민들은 1981년 12월 정부가 강제 이주시킨 자활근로대 대원들과 동 청사 부지 거주민, 상이용사, 공공주차장 부지 거주민들이다. 강제 이주된 사람들은 30년간 이곳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강남구청은 1990년부터 주민들에게 '시유지 무단점유'라는 이유로 가구당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1억 원이 넘는 토지변상금을 부과했다.

한 마디로 빚지기 싫으면 나가라는 이야기다. 조 위원장은 "우리는 이 곳 삶의 자리에서 한 걸음도 물러날 수 없다"며 "집은 잿더미가 됐지만 다시 보금자리를 마련할 터전까지 잃을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 위원장은 "강남구청은 포이동266번지에 재난지역에 준하는 조치를 즉각 실시해야 한다"며 "우리는 그간 지켜온 우리 삶의 터전을 지킬 것"이라고 밝혔다.

ⓒ프레시안(허환주)

▲ 마을 회관 앞에 놓여 있는 대야. 여기서 주민들은 세면을 하고 있다. ⓒ프레시안(허환주)

ⓒ프레시안(허환주)

 

서울 지하철 3호선 도곡역 부근의 타워팰리스를 지나 양재천 길을 따라 200m쯤 내려가다 보면 멀리서도 한 번에 눈에 띄는 판자촌이 보인다. 나무로 벽과 지붕만들고 그 위에 보온을 위해 비닐과 천 등으로 단열재를 덧씌웠다.

곳곳에는 "죽음의
고리, 토지 변상금 철회하라, 멈춰버린 삶, 인간답게 살고 싶다"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포이동 266번지.' 구획정리로 이제는 개포동으로 편입돼 포이동이란 이름은 공식문서에서는 사라졌다.

포이동 266번지

사람 한 명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 얼키설키 아흔여섯 개의 판자집을 연결하고 있었다. 골목은 흙바닥이어서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될 듯했다. 판자집들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어 판자촌 안에는 한낮임에도 햇빛이 잘 들지 않았다.

▲ 위에서 내려다본 포이동 전경. 저 멀리 타워팰리스가 보인다. ⓒ프레시안(최형락)

마을회관으로 쓰이는 포이동 대책위원회 사무실 옆에 위치한 유병관(가명) 씨 판자집 문을 여니 5평 규모의 어두침침한 실내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신발을 벗는 곳이 세면을 하는 곳이었다. 의외로 방안에는 고급 용품들이 즐비했다. LCD TV를 비롯해 고급 원목 식탁, 드럼 세탁기, 대형 냉장고, 침대 등.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강남 고급
아파트 등에서 나오는 고물수거해 판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간혹 이렇게 좋은 물건이 나오면 팔지 않고 직접 자신들이 쓰죠. 이곳에는 이렇게 좋은 물건들이 많이 나와요. 잘 사는 사람들은 참 이상해. 이렇게 멀쩡한 물건을 버리고… 쯧."

김용금(63) 씨는 주름진
얼굴로 연신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기자에게 말을 붙였다. 김 씨는 이 곳에서 산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김 씨는 "이곳에는 현재 96가구가 살고 있다"며 "
전기수도요금은 공동으로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재래식 화장실 1개당 5~6가구가 이용하니 불편하다"며 "또한 판자집이 지어진지 오래돼 벌레들도 많다. 비가 오면 새는 곳도 있다"고 불편한 점을 말했다.

김 씨는 "하지만
지금은 그나마 처음 이곳에 올 때보다 나아졌다"고 웃었다. 김 씨는 "예전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사방천지가 '뻘'이었다"며 "그래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을 우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하곤 했다"고 말했다.

사람 잡는 토지 변상금

김 씨가 처음 이 곳으로 온 건 1981년이다. 1979년 박정희 정권은 거리를 미화한다는 명분으로 길거리에서 넝마주이(돌아다니며 헌 종이, 빈병 따위 돈이 될 것들을 줍는 사람), 도시빈민, 부랑인 등을
모아 '자활근로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서초동 정보사 뒷산에 차려진 시설에 강제 수용됐다. 김 씨도 포함됐다.

그러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1년
지역주민의 민원으로 시설에 수용돼 있던 450명의 사람들이 10개 지역으로 분산·배치됐다. 김 씨는 당시 45명과 함께 이곳 포이동 266번지에 강제 이주됐다. (이후 1996년까지 다른 지역 철거민 36가구, 상이용사 18가구가 이사를 와 총 99가구가 뿌리를 내렸다.)

수도 등 제반 시설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촛불을 켜놓고 비닐하우스에서 생활을 했다. 당시 강남 지역은 거의 논과 밭이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혐오감을 준다고 낮에는 외출조차 하지 못했다. 이들을 지키는 감독관, 즉 담당 경찰들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처음 이 곳에 왔을 때는 판자집도 없었다. 공동으로 살던 비닐
하우스가 삭아서 쓰러질 지경이 되자 판자 등을 구해와 판자집을 지었다.

생계는 빈병 등을 주워 파는 걸로 근근이 유지했다. 다른 곳으로 가려해도 여의치 않았다. 김용금 씨는 "사글세 방 하나 얻을 돈도 없는 상황에서 어디를 갈 수 있었겠냐"고 반문했다.

그렇게 이 곳에서 생활을 한지 10년째 되던 1990년께에 김 씨는 한 통의
고지서를 받았다. 요지는 정부의 토지를 무단으로 사용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 토지 변상금 통지서였다. 하지만 이를 내기가 어려웠다. 변상금이 300만 원이나 했기 때문이었다. 낼 돈도, 의지도 없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1989년 자활근로대는 해산됐다. 이 때 서울시는 공공부지 재활용과 도시 재정비 정책에 따라 토지구획정리를 하면서 기존에 이들이 살던 포이동 200-1번지를 포이동 266번지로 변경했고, "시 소유인 포이동 266번지를 불법점유했다"며 이들에게 국유지 무단점유 변상금을 낼 것을 요구했다. 정부에 의해 강제 이주돼 관리까지 받아온 이들이지만 시에서는 강제 이주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자활근로대 해산 이후부터 토지 변상금을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김 씨의 경우, 지금까지 쌓인 변상금만 해도 7000만 원이 넘는다. 연 평균 20%의
연체이자는 뺀 금액이다. 김 씨는 "이 곳을 벗어나려 해도 변상금이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이 곳 세대주는 몇 년 전까지는 자기 명의로 통장도 만들지 못했다. 구청에서 변상금을 안 낸다는 이유로 세대주의 모든 재산에 압류를 걸어놨기 때문이다.

2010년 7월 기준으로 주민들에게 부과된 총 변상금은 23억6100만 원, 가산금은 14억4000만 원으로 총 38억100만 원이다.

조철순 포이동 대책위원회 위원장은 "구청에서는 변상금을 부과하면 우리가 나갈 줄 알았겠지만, 나가면 변상금으로 인한
가압류 때문에 사글세도 하나 구하지 못한다. 어디를 어떻게 가란 말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주해온 99가구 중 여태껏 단 3가구만이 이 곳을 빠져나간 이유다.

또한 주변으로부터의 개발
압력도 거세다. 이들이 뿌리 내린 지 30년 동안 강산은 변해 뻘이었던 이 곳은 금싸라기 땅이 됐다. 근처 개포4동은 개별공시지가만 3.3㎡에 1000만 원에 육박한다.

 

연이어 두 아들을 잃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

누군들 이런 곳에서 살고 싶어 할까. 주민들 모두들 벗어나고 싶어 했다. 살기 힘든 것은 둘째 치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자손들에게는 자신이 받았던
손가락질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올해 서른한 살인 딸아이가 작년 12월에
결혼을 했어요. 쉽지가 않았죠. 아이는 학창시절 단 한 번도 집에 친구를 데려온 적이 없었어요. 부끄러워했던 거죠. 결혼 적령기에서도 남자를 만날 생각도 안 했어요. 포이동 출신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이었죠."

조 위원장은 "이런 건 비단 우리 아이만이 아니다"라며 "이곳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이 곳 출신인 걸 숨기려고 한다"고 말했다.

실제 포이동 인근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불과 300m도 되지 않는 거리를 굳이 멀리 돌아서 등교한다. 자신이 포이동 출신이라는 걸 들키기 싫어서다. 만약 자신이 포이동 출신이라는 걸 아이들이 알 경우, 거지라고 '왕따'를 당하기 일쑤다. 색안경을 끼고 이들을 바라보는 선생님도 있다고 한다.

그런 취급을 당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부모마음은 찢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집에서는 아이를 한 명 이상은 낳지 않았다고 한다. 김용금 씨도 올해 스물네 살 된 자식 하나다. 김 씨는 "마흔에 자식 하나 낳았다"며 "이런 생활을 하는 데 아이를 낳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가난을 물려주기도, 손가락질 당하는 걸 물려주기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 뒷편에 네모난 컨테이너 박스가 포이동 대책위 사무실이다. 꼭대기에는 여러 개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가난하다는 이유로 자식을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도 있었다. 조 위원장도 마찬가지였다. 조 위원장이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는 남편이 '자활근로대'인 걸 속였다. 사실을 안 건 결혼한 지 6개월이 지나서였다. 하지만 남편이 착하고 인간성이 좋아 그냥 살았다.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냐는 생각이었다. 포이동으로 결혼해 들어온 여자들은 대개 속아서 결혼을 했다고 한다.

조 위원장은 남편을 따라 포이동을 온 이듬해에 첫째 아이를 낳았다. 그때 생각한 건 아이를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돈을
모아 이 곳을 빠져나와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다.

"악착같이 일을 했어요. 조그마한 공간에서
고물 집을 하면서 갓난아기였던 첫째 아이를 큰 플라스틱 양동이에 놓은 뒤 모기장을 덮어 두고 일을 했어요. 하나 밖에 없는 조그마한 형광등에는 셀 수 없는 파리와 모기떼들이 득실거렸죠. 약을 한 번 뿌리면 빗자루로 수북이 쓸어 담아야 할 정도였죠."

그렇게 악착같이 일을 했지만 산다는 건 쉽지 않았다. 개구쟁이였던 둘째 아이가 4살이 되던 해, 고물을 싣고 들어오던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조 위원장은 "그 때 일만 생각하면
지금가슴이 미어진다"며 눈물을 닦았다.

이런 일이 조 위원장에게만 있던 건 아니다. 최근
간경화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는 한 명의 아들이 더 있었다. 병에 걸린 아들에게 변변한 치료 하나 받지 못하고 떠나보낸 것이 못내 마음이 아픈 어머니였다.

그런데 그런 것도 잠시, 하나 남은 아들 역시 간경화에 걸렸다. 치료만 받으면 살 수 있는 병인지라 어머니는 어떻게든 아들 치료비를 구하러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노쇠한 몸으로 무거운
리어카를 이끌고 폐품을 구하러 사방팔방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허사였다. 아들은 변변한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먼저 간 아들을 따라갔다. 두 아들을 연이어 잃은 어머니는 충격으로 치매에 걸려 아직도 아들 병원비를 구하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동네 곳곳을 누비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집의 경우, 아들이 스물여섯 살인데 덜컥 결핵에 걸렸다. 하지만 역시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병원에서 임종을 맞았다. 죽는 순간에도 아들은 혼자 남게 될 어머니가 걱정돼 병원에 어머니의 건강 진단을 부탁한 뒤 숨을 거뒀다.

병원에서는 죽은 아들의 소원이 안타까워 어머니의
건강 검진을 진행했다. 그 결과 어머니는 암 판정을 받았다.

건강세상네트워크가 2006년에 포이동 주민들을
조사한 결과 주민들 중 1년간 1일 이상 입원한 경험이 있는 경우가 27.3%(서울시민 평균 5.3%)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주민 중 의료급여 수급자는 10.5%(서울시민 평균 1.3%), 건강보험, 의료급여 등의 건강보장책이 없는 경우도 10.5%(서울시민 건강보장 미가입자 0.7%)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외에도 조사대상자 중 67.4%가
의료비 부담으로 의료이용을 못한 적이 있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의료비 부담으로 병을 키운 경험이 있느냐는 물음에도 40.9%가 '한두 번 정도', 31.8%가 '3회 이상'이라고 응답했다.

조 위원장은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사연 없는 사람들은 없다"며 "다들 가슴 속에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간다"고 전했다.

ⓒ프레시안(최형락)

권익위, 포이동 조사결과 5월 발표

아직도 이곳 주민 대부분은
타워팰리스 등에서 내놓은 폐품을 수거해 파는 돈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일부는 강남 대형 식당 등에서 서빙을 하거나 사무실 청소 등을 하기도 한다.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빠듯하다.

현재 '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은 토지변상금 철회와 점유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강제이주를 시켜놓고 변상금을 내라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또한 30년을 이 곳에서 살았으니 계속 이 곳에서 살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해달라는 것.

조 위원장은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서울시 소유"라며 "그래서
주택을 짓겠다느니, 주차장을 만들겠다는니, 그런 이야기가 늘 들려온다. 그럴 때면 언젠가는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주민들은 두려움에 떤다"고 말했다. 이들이 점유권을 주장하는 이유다.

과거에 비해 이들의 요구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는 눈치다. 지난 2월초 국민권익위원회가 서울시청,
강남구청 관계자와 이 곳을 방문해 주민들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국민권익위원회는 주민들이 총회를 통해 토지변상금 철회 및 점유권 보장 등의 요구사항을 정해 다시 만나자고 했고 주민들은 2월 16일, 다시 포이동을 방문한 국민권익위원회 관계자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조 위원장은 "권익위에서 우리
문제조사 중이다"며 "오는 5월께 조사 결과가 나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조 위원장은 "우리 역시 우리가 강제 이주 당했다는 증거자료 등을 찾아서 권익위에 제출한 상태"라며 "구청이나 시에서도 권익위에서 전향적인 결과가 나올 경우, 따르겠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그간 서울시와 구청에서는 토지변상금과 점유권 인정을 두고 "선례가 없다", "(강제 이주 당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해왔었다. 조 위원장은 "우린 이 곳을 떠날 수도 없다"며 "권익위에서 부디 올바른 결정을 내려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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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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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자연을 만들었고,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

도시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에 의해 끊임없이 변모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 만든 도시는 과연 사람을 위한 곳인가? 도시를 만드는데 기여한 사람은 정작 도시가 제공하는 편익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가?

<프레시안>은 진보적 도시 연구
집단 한국공간환경학회와 공동으로 '도시 주인 선언' 기획 연재를 시작한다. 현재 시민 열 명 중 아홉 명이 도시에서 거주하고 있다. 도시에 거주하지 않는 나머지 시민도 도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다. 이 기획은 도시의 거주자와 이용자는 누구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도시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우리에게 아직 생소한 개념인 "도시에 대한 권리"에는 도시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평등하게 누릴 권리, 도시 공공 공간에 대한 자유로운 이용권, 도시 행정에 대한 참여권 등 도시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권리들이 포함된다. 또 이 안에는 자유롭게
무선 인터넷에 접속할 권리 등 최근에 새로 포함되었거나 되어야 할 권리도 있다. 다른 나라의 도시에서는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로 인정되고 있는데도, 아직 우리의 도시에서는 생소한 권리도 있다.

앞으로 매주 화, 금요일 두 차례씩 이어질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하여, 지금 대한민국의 도시에서 도시의 주인이어야 할 시민들이 과연 적절한 수준의 권리를 누리고 있는지, 당연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침해받거나 무시되는 권리는 없는지,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되는 사람들은 없는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기획을 통해 우리의 도시에서 도시 거주자나 방문자가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더 확장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우리의 도시에서 배제되는 사람들

서울 은평구에 있던 한양주택 마을은 비록 낡고 오래된 단독 주택 단지였지만, 서울시가 '아름다운 마을'로 지정했을 정도로 정겹고 살 만한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서울시가 이 지역을 은평뉴타운 구역으로 지정하고 재개발을 추진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면서 이웃과 동네에 정이 많이 든 주민들은 재개발을 반대했으나, 서울시는 뉴타운 사업을 밀어붙였고 결국 이 마을은 철거되었다.

자신들이
소유한 땅과 집에서 그냥 살겠다는 한양주택 주민들의 주장은 묵살되었다. 한양주택 주민들이 주장했던 자신의 집과 땅에서 계속 살 수 있는 권리는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도시에서 이 정도의 권리 침해는 별로 큰 사건으로 간주되지도 못한다. 토지나 건물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훨씬 더 끔직한 일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림 씨는
가족과 함께 용산에서 호프집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용산 일대 재개발 추진으로 인해 졸지에 생업을 중단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삶이 막막해진 이 씨는 호프집에 이미 투자했던 권리금과 시설비 등의 보상과 생계 대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실정법에서는 토지나 건물의 소유주가 아닌 세입자는 그 동네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살았어도, 또 그 지역의 상권 형성에 아무리 기여했어도 재개발 과정에서 부재 지주가 행사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용산에서만 무려 26년간 장사를 한 당시 71세 이상림 씨는 실정법이 보장해 주지 않는 '생존권'을 주장하고자, 농성이라는 '불법' 행위를 택했다. '불법' 행위의 대가는 참혹했다. 테러 진압 임무를 띤 경찰특공대에 의해 강제 진압을 당하는 과정에서 이 씨는 인간의 가장 소중한 권리인 생명을 잃었다.

용산 참사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고(故) 이상림 씨의 아들 이충연 씨는 현재 공무 집행 방해, 건조물 침입 등의 죄목으로 구속되어 현재 복역 중이다.

박래군 씨와 이종회 씨는 용산 참사의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을 촉구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그러나 '불법 폭력' 시위 혐의로 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오랫동안 인권 증진을 위해 몸 바쳤던 한국을 대표하는 인권운동가 박래군 씨는 이 사건으로 인해 전과 11범이 되었다.

ⓒ프레시안

안종녀 씨는 서울 홍익대학교 근처에서 작은 칼국수 집 '두리반'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지역 재개발이 추진되면서, 안 씨는 이미 투자한 1억 원의 상가 권리금과 시설비에 대한 아무런 보상 없이 단지 이사 비용 300만 원만 받고 나가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를 거부한 안 씨는 2009년 말부터 두리반을 점유한 채 철거 반대 투쟁을 시작했다. 안 씨의 남편인
소설가 유채림 씨와 인연으로 많은 문인들이 여기에 참여하면서, 두리반 투쟁은 점점 문화 운동의 성격으로 나아갔으며 1년 반 동안 음악회, 낭독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이런 까닭에 두리반을 철거할 '합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재개발 시행사는 강제 철거를 시도하지 못했다. 다만 지난해 여름부터 시행사의 요청으로 한국전력공사가 전기 공급을 중단하는 등 압박이 이어졌다.

그러다 지난 6월 8일 시행사와 두리반이 '두리반
이주 대책 등을 담은 합의서'에 조인하면서 531일간의 농성이 막을 내렸다. 여기엔 두리반이 인근 상권에 다시 문을 열 수 있도록 시행사가 영업 손실 배상금 명목 2억 5000만원을 지급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프레시안

2010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 회의는 대통령과 주류 언론이 우리나라 '국격'을 상승시켰다고 대단히 칭송했던 행사이다. 그러나 G20 정상 회의를 앞두고 이주노동자, 노점상, 노숙인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실시되었다. 대한민국 시민권을 가진 노점상, 노숙인도 G20 정상 회의 행사를 위한 단속 대상이 되었다. (☞관련 기사 : "G20 개최의 조건? 노숙인·노점상은 나가 있으라고?")

많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G20 정상 회의를 대비한 치안 확립을 명분으로 추방되었다. 그 와중에 단속을 피하던 한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가 추락사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위시하여 수십 년 동안 떠들썩한 국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른바 '국격'을 위하여 도시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공권력의 단속 대상이 되어 거리에서 추방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G20 정상 회의 서울 개최는 또 다른 예술적 범죄자(?)를 만들었다. G20 정상 회의
홍보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린 대학 강사 박정수 씨는 공용 물건을 손상하는 조직적 범죄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관련 기사 : '쥐 포스터' 그린 박정수 "쥐 형상이 특정인하고 결부되냐")

얼마 전에는 서울대학교 디자인 그룹 FF가 오세훈 시장이 추진하는 '디자인 서울' 정책을 조롱하는 스티커 작업 (이른바 '해치맨 프로젝트')을 하다가 경찰에 소환되었다.

이들은 도시에 머물 권리가 없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사례들은 모두 대한민국의 도시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이다. 위 사례들 모두 대한민국의 법을 엄정하게 집행하는 공권력에 의하여 쫓겨나거나 처벌받거나, 그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쫓겨나거나 처벌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큰 소리로 공권력을 비난하고 자신들이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당당이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권리 주장에
공감하고 동조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고 G20 정상 회의를 개최하는 선진화된(?)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후진국형 참사인 용산 참사의 원인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불법" 점거 농성을 한 세입자보다, 강제 진압을 한 공권력과 함께 세입자를 배제하는 현 재개발 사업의 문제점을 비난했다.

다양한 집단과 개인들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두리반을 "불법" 점유한 안종녀 씨를 후원했다. 용산 참사로 구속되었던 박래군 씨는 세계적 인권 단체 국제앰네스티에 의해서 양심수로 선정되었다. 국제엠네스티는 경찰력의 과도한 사용을 야기하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강제 단속과 집단 추방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G20 정상 회의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린 박정수 씨를 돕기 위한 각계의 구명 운동도 펼쳐지고 있다. 과연 누가 옳은가? 왜 많은 사람들이 실정법이 인정하지 않는, 혹은 실정법을 위반하는 권리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가?

실정법과 공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쫓겨나는 소수의 사람도 있다. 경기도 화성의 한 아파트 단지 주민들은 집단적으로 한 정신 지체 장애인 가족에게 그 아파트 단지를 떠날 것을 강요했다. 2009년 봄 정신 지체 장애인이 지역 주민을 때린 사건 때문이었다. 장애인 가족은 피해자 가족에게 피해 배상금을 주고 합의했으나 일은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의 부녀회와 입주자대표회가 나서서 정신 지체 장애인과 같은 아파트에 살수 없으니 이사를 가라고 장애인 가족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집단 이사 강요에 시달린 장애인 가족은 아파트 주민 대표들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장애인 단체도 나서서 정신 지체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적 인식을 항의하면서 이
소송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과연 누가 옳은가? 폭력 사건을 일으킨 정신 지체 장애인은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아니면 우리가 보듬어 안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가?

서울역과 같이 만인이 이용하는 공공장소를 점유하는 노숙인은 일반 시민에게 혐오감을 준다. 그래서 노숙인 단속을 반기는 사람들도 있다. 거리를 점유하고 있는 노점상은 시민들의 보행에,
바로 앞 상가의 영업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노점상 단속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요구가 있기 때문에 공권력이 단속에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이들을 공공장소나 거리에서 단속하고 쫓아낸다면 노숙인이나 노점상이 갈 곳은 어디인가? 우리의 도시에서 이들이 우리와 함께 머물 수는 없는 것인가? 이들에게는 도시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 수 있는 권리가 없는가?

용산에서 호프집을 운영했던 이상림 씨, 홍익대학교 앞에서 칼국수 집을 운영하는 두리반의 안종녀 씨는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피해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도시 상권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이들이 쫓겨난 이유는 토지나 주택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사회적 차별에도 불구하고 우리 도시 경제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이들이 쫓겨난 이유는 시민권 혹은 체류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도시에 기여한 이들이 도시에 머무를 수 있는 권리는 없는 것인가?

이렇게 도시에서 배제되고 추방되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대안을 줄 수 있는 담론이 하나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도시에 대한 권리" 담론이 바로 그것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1901-1991년)는 도시에 거주하는 주민 누구나 도시가 제공하는 편익을 누릴 권리, 도시 정치와 행정에 참여할 권리, 자신들이 원하는 도시를
스스로 만들어 나갈 권리를 뜻하는 "도시에 대한 권리(Le droit a la ville, The Right to the City)"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출신의 비판적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사람들이 누려야 할 권리 중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소홀히 취급받고 있는 것이 바로 도시에 대한 권리, 즉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도시를 만들고 고쳐 나갈 권리, 그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 스스로를 변화시킬 권리라고 주장했다.

도시에 대한 권리

최근 유엔(UN) 산하 기관인 유네스코(UNESCO)와 유엔-해비타트에서는 이른바 "도시에 대한 권리" 캠페인을 통해 도시를 더 따뜻하고 포용적으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도시가
인류 대다수의 삶의 터전이 되고 있는 도시화 사회에서, 도시에서의 배제나 추방이 우리의 삶 자체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과 효율, 이윤 추구라는 신자유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각국의 도시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런 캠페인 추진의 배경이다.

더 포용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해 이런 국제 기구들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캠페인도 있지만, 아래로부터의 운동도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도시 빈민의 문제가 심각한
남미의 도시에서는 오래전부터 "도시에 대한 권리"를 슬로건으로 내건 운동 단체들의 투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브라질 같은 곳에서는 이러한 투쟁의 결과, 무허가 정착촌 주민들의 주거권 보장 등을 포함한 "도시에 대한 권리" 보장이 헌법이나 법률로 명시화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요즘 미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운동 단체도 바로 '도시에 대한 권리 연대(the Right to the City Alliance)'이다. (☞바로 가기 : 도시에 대한 권리 연대)

도시에 대한 권리를 외치는 이들의 주장은 도시 거주자라면 누구나, 재산이나 토지 소유 유무, 나이, 성별, 계층, 인종, 국적, 종교의 차이에 따른 차별이나 배제 없이 도시가 제공하는 편익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앞에서 예를 든 우리 도시에서 쫓겨나거나 처벌받는 사람들의 주장이, 실정법을 앞세운 공권력보다 오히려 더 정당해 보인다.

역사적으로 권리의 개념은 고정되거나 영구불변한 개념이 아니었고, 실정법의 테두리 속에 갇혀 있던 개념도 아니었다. 시대적 흐름과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진화, 확장・발전되어온 개념이 바로 권리 개념이다.

지금의 선진국에서도 한 때 노예 소유가 합법적 권리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노예제는 불법이다. 한때 동성애자는 공권력에 의해 감옥에 가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는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감옥에 가지는 않는다. 여전히 사회적 편견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점차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사라지는 추세에 있다.

한때는 밀폐된
버스비행기에서도 담배를 자유롭게 피우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개방된 광장에서도 담배를 피우면 처벌된다. 흡연권은 제한되고 대신 비흡연권이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에는 당연한 권리였던 것이 이제는 처벌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로 과거에는 불법이었던 것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제는 당연한 권리로 인정되기도 한다. "도시에 대한 권리"는 지금 전 세계적으로 도시 거주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인정 받아가는 추세에 있는 권리이다.

앞으로 진행될 이번 기획 연재에서는 다양한 필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세입자, 노점상, 노숙인, 장애인, 이주노동자, 시위대 등 우리 도시에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이유로 배제되거나 소외되는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도시의 구성원으로서 도시가 주는 편익을 함께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주장은 현재의 실정법 혹은 우리의 보편적 통념과는 다른 주장일 수 있다. 또 기존의 인권을 강조하는 논의와도 조금 다른 시각일 수 있다. 그렇지만 "도시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새로운 외침은 우리의 도시를 보다 따뜻하고 살기 좋은 장소로 만드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강현수 중부대학교 도시행정학과 교수·한국공간환경학회 회장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 도래하는 느낌이다.

바야흐로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 도래하는 느낌이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희한한 이야기들이 예삿소리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는데도, 자주 들은 이야기라선지, 사람들은 이제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 온라인오프라인에서 그렇게 실성해 넋 빠진 '사건'들이 이 땅의 초여름을 끈적끈적하게 누비는 중이다.

이른바 '
부산저축은행사건'이 터질때만 해도 그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고엽제 매립의혹'이 폭로되고 '남북비밀접촉' 사실이 불거지면서, 이들 세 사건을 하나로 엮어내는 '미친 짓'까지 고개를 들었다. 김 아무개라 자신을 소개한 한 네티즌의 주장은 줄거리야 초등학생만화정도의 수준이지만, 최근 이곳저곳에서 눈 부릅뜨는 유사한 억지소리와 궤를 함께하는 것 같아, 우려스러움이 증폭되고 있다.

'
광주의 특정고교 인맥이 주도한 금융마피아 사건'(그렇게 불렀다)이 터져, '남한 친북좌파세력'이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금융마피아 사건'을 은폐하고, '친북좌파'들을 살리기 위해, '미군의 고엽제 매립의혹'이 제기됐으며, 북한이 '남북비밀접촉'사실을 폭로했다는 스토리가 등장한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김정일 정권이 남북한 좌익세력을 총동원해 대한민국을 분열시키려는 계략이라 했다.

여느 때 같으면 온라인을 떠도는 '그냥 해보는 헛소리'라 보고, 웃어넘기거나 무시해 버릴 수도 있으나,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라는데 있다. 엊그제 '반값등록금 시위'나 6·10 민주항쟁 기념일과 관련해서도 터무니없는 소리는 나왔다. 보수단체들은 유인물에서 반값등록금 집회는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내란 시도"라 했고, "6월 10일은 수치스런 반란의 날"이라 단정했다. 그래서였을까, 학생들에게 정부는 등록금 내기 힘들면 유급지원병으로 군대나 가라고 했다.

▲ 청계광장에 모인 시민들. 일부 한나라당 의원은 반값 등록금 집회에 대해서도 '색깔론'을 제기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허나 '반값 등록금'은 이 나라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후보의 대선공약이었다. 6·10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행위를 좌파행사라 시비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어느 대목이 '수치스런 반란의 날'인지 알 수가 없다. 심지어 남과 북의 수뇌가 합의해 발표한 6·15 선언을 '반역 선언'이라며 폐기하라고 악도 쓴다. '국가 정통성'과 '정부 차원 외교행위의 일관성과 연속성'을 깡그리 부정하라는 이야기다.

"친북좌파가 창궐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종북세력은 북쪽이 그렇게 좋으면 북으로 보내라"는 외침도 있다. "나는 북쪽이 좋은 종북세력"이라 하는 사람 별로 눈에 띄지 않고, 전처럼 감옥에 갈만한 '사상범'이, 따로 모여 악을 써야 할 만큼 있어 보이지 않는데도 뜬구름 잡듯 자기들끼리 그런다. 온라인상에도 그런 소리가 부쩍 늘었다.

특히 4·27 재보선 이후 보수우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지나친 위기감을 느끼는 듯하다. 김아무개 씨도 내년 대선을 걱정하고 있다. 자신들의 '안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들 빼고는 모두 '종북'이나 '좌파'로 몰아대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때맞춰 대통령은 '80년 광주학살은 북한 특수부대 소행'이라는 주장에 동조하는 인사헌법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장관급)에 발탁했다.

발탁된 분은 '5·18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반대' 청원운동을 주도한 '국가
정체성회복 국민협의회'의 발기인이었으며, 현재도 극우성향 단체인 국제외교안보포럼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을 '반미·좌익단체'로 규정하기도 했다. 알다시피 5·18은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분명한 민주화운동이고, 최근 유네스코가 이를 인정했는데도 대통령은 그랬다. 이 나라 정부와 세계가 인정한 민주화운동을 대통령이 부정한 꼴이 되었다.

앞서 김 아무개 씨의 주장은 "이번 고엽제 사건에
미국 좌파와 한국 좌파가 연계돼 있는지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는 턱없는 내용까지 포함돼 유통되고 있다. 특히 한미동맹을 위태롭게 하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등 "일부 좌익세력의 무리한 요구에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간곡한 목소리도 적혀있다. 에이전트 오렌지 등으로 알려진 그 맹독성 약제는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이 땅에서도 뿌려졌다.

마스크장갑도 끼지 않은 채 맨손으로 철모에 받아 뿌려댔던 이 땅의 불쌍한 병사들은 이미 고령자들이 되었다. 고엽제 피해자로 남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다. 어느 미군기지 어느 지점에 '드럼통'들이 묻혀있는지 밝혀지지도 않았다. 더 이상의 처참한 비극을 막고 뒷수습을 위해서라면, SOFA 아니라 SOFA 할아버지라도 개정을 검토해야 한다. 미국에 대한 '애정 유무'와는 별개의 문제다.

'무리한' 요구를 해서라도 '흔들림'은 있어야 한다. '일부 좌익세력' 아니라도 그 문제는 요구해야 옳다. 그게 미국에도 좋다. 물론 한미동맹에도 좋다. 더구나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건 '보수'의 중요한 덕목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면 이 나라 보수의 우두머리임에 틀림없는 이명박 대통령부터 진정한 의미의 보수는 아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민주주의와 인권을 원천적으로 심각하게 후퇴시켰다. 금융권 인사나 물가관리에서 보듯, 시장의 자유와 자율을 깔아뭉갰다.

공동체를 살아가며 이끌어가야 할 명예와 도덕성이 물건너 간 건 이미 오래다.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밥 먹듯 했다. 국민을 우습게 알면서 불안하게 했고, 지금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이야말로 사이비 보수에 엉터리 보수다.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정통 보수우파'의 잣대를 놓고 따져봐도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는 게 이 나라의 자칭 우파요, 자칭 보수다. 해괴한 우파요, 해괴한 보수다. 바로 한국형우파, 한국형 보수다.

자기들끼리 배타적
울타리를 쳐놓고, 자의적으로 구분해 명명(命名)한 '좌파'들을 향해 손가락질 해대는 게 한국형 사이비 보수의 본 모습이다. 이 땅의 보수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이제부터라도 보수로서의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한눈이나 팔면서, 자기편이 아니라고 멋대로 경계선 그어대며 종북이니 빨갱이니 단정해 비난을 일삼는 건 자신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다. 이 나라 사이비 보수들은 건강해져야 한다. /오홍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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