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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대학의 교육 불가능' 당신들은 대학이 신자유주의의 무대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by 아프로뒷태 2011. 6. 5.

'대학의 교육 불가능'

 

'교육공동체 벗'이 발간하는 <오늘의 교육> 2호(2011년 5·6월)의 특집 기획 '대학의 교육 불가능'을 '교육공동체 벗'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다.
<오늘의교육>은 격월간 교육 전문지로 '공교육 중심, 교사 중심의 교육 담론에서 벗어나 다양한 교육 주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교육 전문지'를 지향하고 있다. '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는
비영리단체로 올해 1월 창립했으며 <오늘의 교육>은 '교육공동체 벗'에 조합으로 참여하면 받아볼 수 있다.
2호 특집 '대학의 교육불가능'은 창간호에 실린 '2011년 한국 교육, 야만의
지형도를 그리다'의 두번째 기획이다. 총 6회에 걸쳐 연재될 이들 글에서는 대학생, 대학원생들이 자신의 체험을 중심으로 대학의 문제를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박복선 편집위원장은 "이제 대학은 신자유주의적 모순이 전면적으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공간이 됐다"며 "창간호에서 주로 초·중등교육을 통해 '오늘의 교육'을 조망했다면 이번 호에서는 '고등 교육'을 통해 야만적 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기획의 취지를
소개했다. (편집자)

 

"학부생 인질 잡힌 대학원생 등록금,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대학의 교육 불가능 ①] '잉여'들의 반란과 명륜동의 봄

지난겨울을 생각하니 벌써 온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진다. 한결같은 찬바람을 맞아도 그게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던 겨울이었고, 나는 그때 기상예보를 유난히도 열심히 챙겨 봤다. 약한 바람, 센 바람, 더 센 바람, 비바람…. 나는 바람의 소리와 결, 그 속도와 세기를 열심히 관찰하게 됐고, 그에 따라 사람의 마음도 강해지거나 약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람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이 이야기를 언젠가 꼭 글로 쓰고 싶었다.

2011년 2~3월은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들에게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 뭐부터 써야 할까. 아我와 피아彼我, 주관과 객관이 뒤섞인 시간. 먼저 우리의 '투쟁 아닌 투쟁'의 경위를 말해야겠다. '등록금 투쟁', 약칭 '등투', 속칭 '개나리 투쟁'. 아, 다 아는 얘기인가.

전야前夜, '마음이 소금밭'

전쟁 같은 학기를 마친 후 겨우 만난 꿀 같은 방학이건만, '마음은 소금밭'이다. 휴가를 가거나 귀향한 사람은 없다.
세미나논문, 그리고 중단 없는 일, 일, 일…. 4,749,000원이라는 금액이 적힌 등록금 고지서를 받아 든 두 손은 떨렸고, 마음은 급했다. 작년에 비해 4.2% 인상된 금액이었고, 학부 인상률 3%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였다.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때도 학교 당국은 학부 등록금은 동결한 반면 대학원 등록금은 5.1%나 인상해 놓고, 등록금 동결을 통해 학생들의 고통을 분담했다며 대외 홍보에 열을 올렸다.)

그 숫자는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였지만, 우리가 당면한 상황은 꽤 구체적이었다. 누군가는 대출 절차를 알아보느라 분주했고, 누군가는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이유로 세미나에 자주 결석했으며, 누군가는 소리도 없이 휴학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대학원에서 보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지만, 아무도 그들을 붙잡거나 나무라지 못했다. 교내 장학금은 등록금에 비해 턱없이 적고, 그나마 있던 인문학 장학금 제도도 폐지됐다. 학부 등록금 인상률은 정부 권고안에 따라 3% 미만으로 제한되어 있다지만, 대학원 등록금에 관해서는 아무런 규제도 없다. 그런 가운데 5년간 등록금이 무려 100만 원이나 올랐다. 그런데도 달라진 건 없다. 학교 건물은 늘어만 가는데, 연구 공간은 여전히 부족하고, 개설된 수업 수는 적으며, 학생 복지는커녕 도서관에는 책도 없다.

대학원생들이 등록금 투쟁을? 그런 말은 들어본 적 없다. 그나마 조금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곧바로 '대학까지는 국민 정서상 의무교육에 가깝다지만, 대학원? 니들이 선택한 거잖아!'라는 핀잔만 돌아올 뿐, 아무도 대학원생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안 움직이는 나약하고 안이한 부류들. 아무도 안 읽는 글을 읽거나 쓰는 데 홀로 만족하고,
교수의 심부름을 하느라 온 청춘을 다 보내도 끝내 저항하지 않을 자들. 시간강사들의 열악한 현실이 가까운 미래인 줄 알면서도 그저 참는 자들. 대학원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꼭 죄짓는 것만 같다.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 등록금을 대기 위해 일하다가 쓰러지거나, 대출 빚을 갚다 못해 자살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보도 기사는 거짓이 아니다. 우리는 죽어 가고 있다. 그래서 어느 날 누군가가 "뭐라도 좀 해 봅시다!"
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놀라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가칭 '박카스
프로젝트'가 시작된 건 2월 10일 즈음이었다. 모두들 힘들겠지만, 박카스라도 마시고 힘내 보자며 서로를 격려했다. 우리는 대학원생들이 더 이상 학교 당국의 부당한 요구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로 했다. 그간 읽었던 책에 적힌 혁명과 진보에 대한 앎을 총동원해 우리는 열띤 토론을 벌였다. 1980~1990년대에 격렬했던 투쟁 사례들이 떠올랐지만, 우리는 그 기억에 쉽게 몰입하지 못했다. 우리는 '싸움' 또는 '투쟁'이라는 역사적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꺼렸고, 대신 우리의 움직임을 '운동'이라 부르며 '혁명'과 유비했다. '투쟁'이 정의에 대한 열정과 특유의 배타적 폭력을 동시에 상기시키는 말이었다면, '혁명'은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지의 것이었고, 그 내용은 우리가 채워 나갈 것이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정서에 걸맞은 변화의 움직임을 만들고 싶었다.

우리는 비민주적이고 불합리하게 책정된 문과대 대학원 등록금액인 4,749,000원에 반대하는 의미로 2월 16일부터 3월 7일까지 '475시간' 동안
릴레이 1인 시위를 하기로 했다. 장소는 학교 본부가 있는 곳이자, 이 학교에서 가장 비싸고 상징적인 건물인 600주년 기념관 앞으로 정했다. 20일간의 짧지 않은 여정이 될 터였지만, 한 명이 하면 475시간, 10명이 하면 47.5시간, 20명이 하면 24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475시간 릴레이 1인 시위 교대 시간표'라는 세상에 없는 표를 만들었다. 각자의 시위 시간대가 적힌 네모 칸에 빼곡히 배치된 26명 동학들의 익숙한 이름들이 왠지 다르게 보였다. 그건 시각적으로 무척 아름다웠는데, 마치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가장 불온한 '성좌'처럼 보였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목표는 2011년도 등록금 동결, 대학원 연구 환경 개선, 총학생회의 반성과 쇄신! "춥고, 따분하고, 불쌍해 보일 수도 있지만 '즐겁게' 해 보자!"

싸움 혹은 축제의 시간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 일동'의 이름으로 총장 및 각 부서 처장에게 우리의 운동 취지와 요구 내용을 담은 길고도 열렬한 편지를 발송했다. 어떤 말이든 좋다. 일단 답하시라. 그러나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일동'이란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라는 참으로 촌스러운 물음이었다. '주동자', '배후' 운운하는 걸 보니 근 십 년간, 이 학교의 일천한 운동 역사를 알겠다. 학교 당국이 이런 구닥다리
매뉴얼을 갱신할 수 있는 기회를 그동안 우리는 거의 주지 않았던 것이다.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의 릴레이 1인 시위 모습. ⓒ연합뉴스


2월 16일. 드디어 '등록금 인상 반대 475시간 릴레이 1인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성명서가 교내 게시판에 나붙었다. 첫 타자가 별 어색함도 없이 거대한 건물 앞 벌판에 홀로 서 있고, 학우들이 "파이팅!"을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고 지나간다. 좋은 시작이다. 그런 격려가 '우리의 힘'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등록금은 학생 대표들이 위원으로 참여한 '등록금심의위원회'(이하 등심위)와 협의해 결정한 것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등심위 자료 공개는 대학원 총학생회의 소임이므로 학교는 그에 대한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 등심위 자료의 산출 근거를 학생들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 신임 총장이 부임한 이 시기에 국문과 대학원생들의 움직임은 '분위기'를 해친다는 것, 등록금 동결이나 재협상은 절대 불가능하며, 대신 국문과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들어주겠다는 것이 학교 측의 주장이었다. 학교 측은 학생 대표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구조화된 등심위 제도를 십분 활용했으며, 학생들의 소통 요청에 대해 고압적이고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하거나, 국문과에 특혜를 주겠다는 식으로 우리를 교묘하게 회유하려 했다.

그날 이후,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위하고 밤에 집으로 돌아와 온라인 선전을 하는 날들이 계속됐다. 나는 매일 시위 내용과 그에 대한 소회를 학과 게시판 및 각종 포털 사이트와 블로그, 트위터 등에 기록했다. '공감'과 '추천', '좋아요'와 '리트윗'에 기댄 밤들이 외롭지 않았다.

둘째 날. 영하 2도의 날씨에 시위 현장에 오롯이 서 있자니 어제에 이어 학교 측이 또 부른다. 어제와 똑같은 얘기를 하며 앉아서
커피 좀 마시란다. 하지만 이미 배부른 걸요. 밖에 서 있을 때, 학생들이 주고 간 캔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요. 3일째 되는 날에는 대대적인 학회가 있었다. 여러 학교에서 오신 선생님들이 행사장으로 들어가며 우리를 본다. 웃으며 눈인사를 나눈다. 평소라면 우리도 학회장에 들어가 선생님들의 논문 발표를 열심히 들었겠지.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나. 아아, 만물이 흔들리는 금요일이다.

시위가 계속되자, 현장에 놓아 둔 서명철에 우리의 운동을 지지하는 이름들이 빈틈없이 적힌다. 낯모르는 학우들이 따뜻한 음료와 핫팩을 슬그머니 쥐어 주고, 홀로 선 내게 이런저런 말을 건넨다. 그
감동을 전할 길이 없어, '1인 시위' 말고 '프리 허그'를 할까 잠시 생각해 본다. 동아시아학과, 철학과, 사학과, 교육대학원 원우들이 앞다투어 연대를 선언하며 지지 성명서를 발표했다. "공부하고 싶다. 먹고는 살아야겠다. 이 어디쯤에 대학원생들의 현실이 있습니다." '날것'의 분노가 담긴 이 격문과 투서들이 교내 게시판을 사정없이 메웠다.

6일째 되는 날에는 복잡다단한 절차를 거쳐 등심위 회의록을 '겨우' 열람했다. 학교는 학부 3.1%, 대학원 4.1% / 학부 3.0%, 대학원 4.2%의 두 안을 학부 총학생회장과 대학원 총학생회장에게 제시하며 선택을 요구했다. 이 안에 따르면 학부생과 대학원생은 마치 일종의 '
부채 공동체' 같다. 학교 측은 대학원 총학생회장에게 '선배로서 후배에게 양보할 것'을 제안하고, '의좋은 형제'는 그에 따르기로 한다. 뜨거운 모교애와 형제애가 흘러넘치는, 참으로 감동적인 텍스트다. 대학원 총학생회장은 학부 등록금을 3% 이상 올릴 경우, 우리 학교가 정부의 보조금을 받지 못하게 되며, 등심위를 통해 이 사안을 결정하지 못하면 등록금에 대한 의결권을 가진 총장이 더 높은 인상률로 등록금을 책정해 버리기 때문에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해명했다.

22일, 졸업식을 앞두고 학교 측은 또 한 번 우리를 부른다. "졸업식 날만이라도 시위를 중단해 달라. 너희가 외롭게 시위하는 모습이 학교의 대외
이미지를 해친다." '브랜드 이미지', '미래지향적 융복합 학문 지향' 같은 학교의 과잉 수사는 언제 들어도 허무 개그 같아서 우리에게 아주 작은 충격도 주지 못하지만, 대신 역설적으로 큰 영감을 준다. 그렇다. 외로움은 우리의 무기다. 우리의 외로움이 부를 상식적인 동정과 행동이 학교는 많이 두렵다.

27일에는 비가 많이 왔다. 텅 빈
교정에서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소리만을 벗 삼아 서 있자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비장해진다. 과연 이 짓이 정말 '변혁의 무브먼트'인지 아니면 그냥 '개고생'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오들오들 떨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잘 안 나와서, 일단은 그냥 뜨거운 김이 훅훅 나는 엄마손 칼국수 같은 걸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내 앞 주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릴레이가 끝나면 꼭 물어봐야지.

3월 2일. 믿을 수 없지만 개강이다. '학생은 사실 개강을 위해 있는 건데, 난 왜 자꾸 학교가 답답하게 느껴질까. 나쁜 학생! 나쁜 학생!' 하며 현장에 서 있자니, 신입생들이 와르르 와서 서명철에 꼬물거리는 글씨로 잘 못 알아보겠는
메시지를 써 놓고 간다. 무른 손가락을 가졌어도 실은 제법 단단한 이들이겠지. 한편, 우리의 면담 요청을 한사코 외면하던 신임 총장의 발언이 학교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려 우리의 전투력을 진작시킨다. '등록금 없으면 학자금 대출 받으라'("비전을 통해 글로벌 리딩 대학으로 도약해야" 〈성대신문〉, 2011년 3월 2일)는 말씀. 대출 권하는 대학 총장이라니! '글로벌 리더'라서 그런지 과연 범인凡人들의 상식을 초월한다.

드디어 3월 7일. '등록금 인상 반대 475시간 릴레이 1인 시위 종료 선언식'이 있는 날이다. 어젯밤에 게시해 둔 3차 성명서의 제목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아침부터 집에서 각종 자료를 준비하고 여기저기 연락하느라 출발이 늦었다. 급히
택시를 잡아타니,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끝도 없이 나온다. 아, 내리고 싶지 않다!

우리의 운동을 지지해 준 모든 연대 단위들과 함께할 종료 선언식을 알리는
초대장에 나는 이렇게 썼다. "475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만큼 상식적인 시간 감각을 교란시키는 참으로 신비롭고 이상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또한 추위와 긴장, 침묵과 소란, 분노와 외로움 등 그 시간을 구성하는 그 모든 성분들이 우리 몸에 각인된, 가장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시간이기도 합니다. (……) 비바람 몰아치고, 가끔은 엷은 햇볕에 서 있는 등이 따뜻하곤 했던 475시간 동안 우리가 나눈 이야기와 눈맞춤, 그리고 희망을 기념하려 합니다."

색색깔의 피켓을 들고 도열한 우리 모습은 흔히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전혀 무질서하지 않았고 질서와 조화 그 자체로 보였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 줬는데, 그래도 그게 끝이라면 아마 울었을 게다. 하지만 우리의 움직임은 교내외에 널리 퍼졌고,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학부생
모임'이 결성되어 우리의 시위를 잇겠다고 하니, 마냥 아쉽지만은 않았다. 내가 600주년 기념관 앞에 언제나 '홀로' 서는데도, 쉽게 내 자리를 알아보고 늘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건, 그들이 항상 내 옆에 투명하게 함께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끝나도 끝나지 않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라고 외쳤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다. 열정은 더디게 자라고 냉정은 빠르게 온다. 이른 봄의 꽃샘추위도 늦겨울의 칼바람만큼 매서워서, 많은 이들이 지치고 상처받았다. 낯선 이들과의 연대에서 오는 긴장감, 점점 제도의 심층으로 육박해 가는 운동 방식, 학업과 생업, 그리고 운동의 병행으로 인한 부담은 누구에게나 버겁다. 누군가에게는
휴식이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 '교육공동체 벗'이 발간한 <오늘의 교육> 2호 표지 ⓒ교육공동체 벗

하지만 분명한 건, 국문과는 이제 더 이상 혼자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운동을 지지해 준 여러 단위들과 함께 '성균관대대학원등록금인상반대연대회의'를 출범시켰다. 이 기구는 등록금 최종 납부 기간인 3월 8일부터 11일까지 본부 앞에서 집회를 개최하는 등 2차 행동을 전개했고, 3월 22일에는 대학원 등록금 문제를 사회적으로 환기하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안을 접수했다. 이제 남은 일은 비민주적인 기존 질서와 깊이 밀착되어 개인주의가 극도로 만연한 대학원 사회를 바꾸는 일이다. 식물화된 총학생회에 우리의 권익을 전가하는 것이 아닌, 대학원생 누구나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진정한 학생 자치 기구를 만드는 일이 절실하다. 그리하여 학교와 사회가 조장하는 구조악에 맞서 학생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각종 미디어가 보도하는 고학생 드라마는 안 봤으면 좋겠다. 대학의 윤리와 정치에 대해 치열하게 사유하고 행동하지 않는 한, 대학원생은 여전히 '잉여'의 존재이며 그것이야말로 책에 대한 배반이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라 진실이다.

오혜진. 식민지 시대 문화론 같은 걸 공부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하루 종일 손바닥이 노래지도록 귤 까먹으며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지상낙원을 꿈꾼다. 이번 등록금 투쟁을 하면서 착하고 똑똑해졌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고는 크게 고무됐다. 운동이 존재를 바꾼다는, 그 말을 믿는다.

 


/오혜진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 가난할수록 공부할 수 없는


어느 알바생의 일상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어느새 밤 11시. 주섬주섬 늦은 저녁을 먹거나 씻고 나면 이미 자정이다. 온몸이 피곤에 찌들어서 그냥 쓰러져 잠들고 싶지만 아직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내일이 과제 제출일이기 때문이다. 지치고 힘들어서 울고 싶은 심정으로 시작한 과제는 언제나 막막하다.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준비해서 완성도 있는 과제를 제출하고 싶은데 하룻밤은 그저 과제를 끝내기도 벅찬 시간이다. 무엇보다도 과제를 마주할 때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그때부터 무력감이 든다. 내가 무력감을 느끼거나 말거나, 이 방대한 분량의 과제는 새벽 4시나 5시가 되어서야 끝이 난다.

과제를 하고 난 뒤엔 완전히 탈진 상태로 잠이 들어 버리고, 어쩔 땐 학교에 늦어서 밤새 한 과제를 제출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아침에 불길한 예감에 눈을 떴을 때 이미 수업 시간이라면, 그날은 일어나는 순간부터 참을 수 없는 짜증과 분노에 사로잡힌다. 먼저 제대로 일어나지 못한 한심한 내 자신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고, 그 다음으로는 무리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내 처지에 짜증이 난다. 하루는 일어나자마자 마주한 이 폭발적인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이부자리에서 그대로 가슴을 치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그렇지만 여유롭게 울 시간이 없다. 울면서 양치질을 하고 대충 모자를 눌러 쓴 다음 학교로 달려가 과제를 내야 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나는
하루에 세끼를 제대로 먹은 기억이 없다. 아침에 달려 나오느라 빈속으로 학교에 도착하고 공복을 달래느라 수업 시간에 간단한 과자나 커피를 마시고 나면 점심시간은 자연스레 어중간해지고 헛배가 불러서 밥 생각이 없다. 사실, 매일이 바쁘게 돌아가기 때문에 이런 생활이 1년이 지나도록 나는 스스로 내 식습관에 대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주말에 만난 친구와 밥을 먹다가 내가 일주일 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다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데, 우리 학교가 서울 북동쪽 끝 수유에 있는 탓에 서울 어느 지역을 가든지 이동 시간만 한 시간이 걸린다.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해 이미 학교에서
에너지를 다 탕진했는데, 버스에 실려서 한 시간을 이동하고 나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 있다. 나는 대체로 늘 아팠다. 멀미 기운에 토할 것 같거나 오면서 먹은 간식 때문에 속이 좋지 않았고 늘 미열과 두통을 겪고 한여름에도 추웠다. 보통은 이런 일상적이고 사소한 증상을 무시하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러다가 한번은 내 얼굴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는 사장님의 강권으로 조퇴를 했는데, 나는 채 10분을 걷지 못하고 길에서 쓰러져 버렸다.

아르바이트를 쉬는 날이나 일찍 끝나는 날에도 나는 할 일이 많다. 색상별로 일정을 정리해 놓은 다이어리를 열면 쉬는 날에 맞추어 미뤄 놓은
동아리 모임, 자원봉사자 회의,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의 약속이 하루에 몇 개씩 있다. 가끔은 약속을 취소하고 쉬고 싶지만, 나 때문에 친구들이 무리해서 일정을 잡는 경우가 많아 미안함 마음과 압박감에 자꾸 무리를 하게 된다. 역시나 집에 돌아오면 시간은 밤 11시. 늦은 저녁을 먹고 하루를 정돈하고 다이어리를 편다. 다만, 과제가 없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너무 비싼 대학생 인생

주변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들은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용돈을 충분히 받아서 굳이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는 없지만 하고 싶거나 가지고 싶은 것을 위해, 혹은 취미 생활로 가볍게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들이 있다. 또 다른 부류는 아르바이트비로 생활을 유지하는 생계형 아르바이트생이다. 생계형 아르바이트는 또다시
등록금을 부담해야 하는 경우, 자취비를 포함한 생활비를 자기가 충당해야 하는 경우, 용돈이 없는 경우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나는 생계형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그나마 나는 집과 학교가 서울이라 멀기는 해도 자취를 할 필요가 없었고, 360만 원이 넘는 등록금은 할머니께서 종종 내 주시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벌어야 했던 생활비는 말 그대로 집세와 집에서 먹는 밥값을 제외한 생활에 필요한 모든 비용이다. 생계형 아르바이트의 최전선도 아니니 조금 돈을 벌고 아껴 쓰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쉽지만 서울에서 대학생으로 사는 데 드는 비용은 만만치 않다. 학교와 아르바이트를 오가는 차비는 적어도 한 달에 7만 원씩 들고, 인맥 관리를 포기할 수 없으니 바쁜 중에 이곳저곳 전화하고
문자를 하다 보면 핸드폰 요금만 5만 원, 3,300원씩 하는 학생 식당이나 학교 앞 저렴한 식당을 기준으로 계산해도 식비가 최소 15만 원, 그리고 학자금 대출 이자까지, 최소한의 기초 생활비만 이미 30만 원이다. 여기에 가끔씩 사람들을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철마다 옷이나 화장품을 사는 비용까지 합하면 생활비는 50만 원을 훌쩍 넘긴다. 그렇다고 해서 호사를 부리거나 사치를 했던 적은 없다. 나는 백화점은 고사하고 명동의 쇼핑센터에 가는 일도 대단히 큰 결심을 해야 한다. 스포츠 브랜드의 운동화를 신어 본 적도 없다. 나는 가끔 자조적으로 내가 걸치고 나온 물건들의 총합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보곤 하는데 대체로 겨울이 아닌 다음에야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합이 십만 원을 넘긴 적이 거의 없다.

한번은 중간고사 기간에 학교에 갈 차비가 없었다. 고민하던 나는 묘안을 내 집에서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수유역까지는 무임승차를 하고, 수유역부턴 무료로 운행하는 학교
셔틀버스를 이용해 등·하교를 했다. 그렇게 삼일 즈음 지났을 무렵, 수유역 개찰구를 통과하는데 내 등 뒤에서 누군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저기요~ 무임승차하시면 안 되죠." 나는 정말 얼굴이 터질 만큼 빨개진 채로 달음박질해 지하철 구석으로 가 평소에 하지도 않는 욕을 하며 계속 울었다. 내 상황을 슬퍼하면 서러움에 무너질 것 같았다.

그 다음 날도 등교를 해 시험을 봤지만 수유역에 다시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수유역에서 국민대까지 장장 3시간 정도를 걷고 간신히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나를 데리러 와 달라고 전화를 했다. 친구를 만나자마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엉엉 울었고, 울음을 그치고 나서는 괜히 실없는 농담을 해 댔다. 무임승차를 하다가 적발되고 3시간을 걸어 발이 부르터도 친구에게 차비가 없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나에게 가난은 공감받지 못하는 상처고 사회적인 주홍글씨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소비생활을 하는 것도 기본적인 사회 성원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정도의 소비가 불가능한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인 척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러지 않다가 가난이 적발되면 나는 가난이라는 낙인을 찍힌 채 세상으로부터 조금씩 격리된다는 것을 본능으로, 그리고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늘
불안했다. 내가 조금만 움직이면 내 가면이 가짜라는 것을 누군가 눈치챌 것 같고, 내가 움직일 때마다 나에게서 가난의 냄새가 풍길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이 부분이 억울하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살고 두세 배 많은 일을 하지만 실제로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은 남들보다 못하거나 간신히 비슷한 수준일 뿐이었다.
가끔씩은 이런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당시의 남자 친구에게 울컥 화를 냈었다. 너는 그냥
과외해서 데이트 비용을 내면 되는 거지만 나는 그저 살기 위해서 너의 두세 배나 되는 일들을 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내가 너보다도 훨씬 열심히 살고 있고 대단한 거라고. 내가 잘못됐거나 나약한 게 아니라는 것, 오히려 이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내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 같은 거였다. 나는 그렇게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들에 간신히 맞서서 살았다.

알바와 학업 병행,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늘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절대로 학교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 대학생으로 살고 싶었고, 아르바이트는 어디까지나 학교생활을 유지하지 위한 필요악이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구하거나 고를 때의 주안점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생활을 병행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점이었다(명문대를 다니는 당시 내 남자 친구조차 과외 구하는 것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을 보고 과외는 포기했다).

하지만 학교를 포기하지 않을수록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적어진다.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위해서 제일 먼저 포기했던 것은 큰돈을 벌 수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패밀리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그래서 거기서 일하는 많은 생계형 아르바이트생들이 생활의 중심이 아르바이트가 돼 버려 학교에는 출석을 거의 하지 않거나 휴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내 자신이 그런 사례가 될까봐 두려웠다.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가능성을 버리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야 했다.

그렇지만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위협하는 일은 어디에나 있었다. 나는 강북 삼성병원에서 병원 기록을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저녁 시간에 일하는 우리 팀 15명 중 14명이 학생이라서 가끔 보충 강의나 학교 행사가 근무 시간과 겹치는 일이 있었다. 담당자는 우리의 학교 일에 매우 예민했는데, 누군가 학교 때문에 양해를 구하면 큰소리로 우리 모두를 야단치곤 했다. 그때마다 "너희는 학생이 아니라 직원이다. 학교 일보다 병원 일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하루 6시간씩 일하고 한 달에 60만 원이 조금 안 되는 비용을 지불하면서 직원이 되기를 강요하는 논리에 코웃음이 났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 아르바이트가 그래도 처우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내 현실이었다.

나는 학기 중에 꾸준히 자잘한 아르바이트도 병행했다. 때로는 교수님이 소개해 주신 대학원생의 연구 보조로 며칠 밤을 새고,
설문조사나 행사 아르바이트 보조로 적게는 2만 원, 많게는 10만 원씩 꾸준히 돈을 벌었다. 근로 장학생으로도 일했는데, 근로 장학생은 일주일에 6시간씩 두 번, 즉 한 학기에 120시간 정도 조교를 돕거나 심부름을 가는 정도의 가벼운 일을 한다. 그러나 그만큼 장학금 액수가 적었다. 25만 원씩 한 학기 동안 두 번 장학금이 지급됐다. 이렇게 번 돈은 대부분 빚잔치에 쓰인다. 보통 밀려 있는 핸드폰 요금이나 학자금 대출 이자를 냈고, 그동안 아르바이트 때문에 만나지 못해 원망을 샀던 친구들에게 밥을 사기도 했다.

아르바이트에 대한 요령을 알게 되면서는
사진관이나 외국인 전용 게스트 하우스 같은 육체적으로는 힘들지 않지만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곳에서 일을 했다. 특별히 시급이 높지 않았지만 앉아서 틈틈이 책을 읽거나 과제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 한가한 시간에도 늘 할 일이 있기 마련이었고 무엇보다도 업무 시간에 공부를 하는 것은 눈치가 보였다.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 앉아서 능률이 오르지도 않는 과제를 하다가 욕을 먹고 나면 과제도 아르바이트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학교에서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학교행사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학과가 처음 정해졌던 2학년 초기, 나는 선배의 권유로 학년 장을 맡았는데 아르바이트 때문에 시간이 나지 않아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나한테 인수인계를 받은 후배가 나중에 술자리에서 그 일로 나를 원망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르바이트가 늘어나면서는 개강 파티나 종강 파티는 고사하고 보충수업을 나가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평소에도 아르바이트에 맞춰서 시간표를 짰기 때문에 공강 시간을 맞춰 밥을 먹을 친구도 없었고, 당연히 친한 친구를 만들지도 못했다.

살기 위해 : 시간을 팔거나 사연을 팔거나

작년, 졸업
논문을 쓰기 위해서 대학 생활 중 처음으로 모든 아르바이트를 중지하고 공부에만 전념했다. 힘들기로 악명 높은 논문을 쓰면서 20학점을 듣는 미친 짓을 했는데 아르바이트보다는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처음으로 장학금을 탔다. 기뻤지만 그 이전에 아르바이트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이 억울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장학금을 신청해 생활비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내가 받을 만한 것은 각종 '차상위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장학금인데, 이 경우에는 필수적으로 나의 가난함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가난을 증명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비참한 세상. 그 인정받는 항목은 더 비참하다)

최근에 신청한 장학금 신청서에는 '신청 동기를 상세하게 기술하라'는 문구가 있었다. 선발 기준은 '가계 형편 곤란자 중 학업성적 우수자'였다. 그러니까 장학금을 받기 위해 호소력 있는 신청서를 쓰려면 내 인생의 가난을 두드러지게 써야 했다. 처음에는 내가 가난하다고 고백하는 일이 나를 파는 것 같이 느껴져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신청 마감일까지 미루다가 결국 가정 형편 곤란의 역사를 최대한 씩씩하게 적고 그 내용에 근거한 교수님의 추천서까지 받아 제출했다. 완성된 신청서에 쓰인 내 이야기는 마치 지하철에서 노래를 틀고 구걸하는 사람들이 나누어 주는 종이에 쓰인 것과 같아서, 이제까지 스스로 생계를 꾸리겠다며 열심히 살아온 내가 증발한 것 같았다.

어학연수를 신청했던 서류 심사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번은 차상위계층임을 증명하는 서류에 문제가 생겨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런데 담당자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소리로 왜 부모님가족관계증명서에 함께 나와 있지 않은지, 내가 왜 차상위계층인지를 물었다. 그 사무실에서 나는 '수혜'를 받으러 온 신청자라서 나 또한 보호받고 싶은 사생활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버럭 화를 내면서 "아빠가 어디 계신지도 모르고 연락도 안 된다"라고 거짓말을 해 버렸다. 나는 저녁마다 만나는 아빠, 그리고 아빠와 나의 사연과 우리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모두 부정하면서 그 상황에서 벗어 날 수 있었고 어학연수도 다녀올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가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일이라면, 장학금은 사연을 팔아 돈을 버는 일이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로 몸이 지치고 고단한 것처럼 장학금은 마음을 지치게 만든다. 내 사연을 팔릴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겪어 온 삶의 고유한 사연들을 버리고 전형적인 것으로 각색해야 했고, 심지어 때로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해 온 나의 노력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나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해야만 하는 아이러니와 마주하게 된다.

학업성적과 교수님의 추천으로 선발되는 장학금 신청을 위해 교수님과 면담을 한 적이 있다. 면담은 추천서를 쓸 때 으레 들어가는 가계 형편 부분에 대한 것이었는데, 장학금을 받는 사람의 수가 정해져 있으니 나란히 앉은 언니와 나는 자연스럽게 누가 더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사람인지 가정 형편의 곤란을 경쟁하는 모양이 됐다.
상담이 끝나고 나오면서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평소에는 절대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가난함이 면담 동안에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경쟁력이 되었다. 장학금 쟁탈전에서 나는 분명히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면담이 끝나고 나오는 순간부터 내 사연은 다시 내 약점이 됐다. 사실 지금까지 내가 신청서를 제출해서 수혜한 거의 모든 장학금은 보이지 않는 가난을 경쟁한 뒤에 얻은 전리품일 것이다.

처음 차상위계층으로 서류 처리를 하고는 눈물이 핑 돌았다. 나 스스로 가난을 인정하고
공증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 공식적인 가난은 비공식적인 가난보다는 훨씬 낫다. 먼저, 학자금 대출을 받을 때 취업 후 상환 대상자로 분리되어 이자가 유예됐다. 유예가 되지 않았다면 3번의 대출을 받은 나는 매달 6만 원씩 이자를 납입해야 한다. 게다가 차상위계층이 되고 난 뒤에는 오히려 신청할 수 있는 장학금의 폭이 넓어졌다. 이전에 장학금을 받을 방법은 성적을 잘 받는 것뿐이었는데, 상대평가가 이뤄지는 대학에서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해서는 장학금 탈환이 불가능하다. 결국 나는 국가가 내 가난에 붙여 준 차상위계층이라는 공증으로 내 사연에 공식적인 경쟁력을 얻었다.

하지만 해결된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차상위계층은 비공식적으로 가난할 때보다는 현재 상황을 나아지게 했지만 실제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여전히 천만 원에 가까운 빚을 안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은 단지 대학생으로 살기 위해서 생긴 거였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거나 장학금을 타서 돈을 받는 것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진 것뿐이다. 내가 생존법을 바꾼 것일 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나 장학금을 받는 것이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자수성가라는 신화

나는 자수성가에 대한 어른들의 꿈이나 말이 우리 세대에게는 완벽한 거짓말이라고 믿는다. 개천에서 용이 났던 자수성가 신화에 따르면 나는 지금쯤 아르바이트를 통해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해 안정적으로 대학을 졸업한데다, 실제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현실 감각까지 갖춘 인재가 되어 비상해야 하지만 현실은 딱히 그렇지 못하다.

내가 그렇게까지 학교를 놓지 않으려고 애쓰고 대학 생활을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내 평점은 4.0이 안 된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지만 성적 때문에 고민이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1교시 수업은 체력이 달려서 제때 들어간 기억이 별로 없고 그나마도 들어가서는 졸음과 싸워야 했다. 과제할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열심히 하기보다는 적당히 생각하고 적당히 글 쓰는 나쁜 요령만 몸에 뱄다.

나는
자격증이 하나도 없다.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에 이미 업무에 필요한 컴퓨터 프로그램은 거의 다 다룰 줄 알고, 외국인을 상대로 장기간 영어로 근무를 한 적도 있고, 심지어는 증명사진을 찍고 보정하고 인화할 줄도 아는데 관련된 자격증이 하나도 없다. 우선 보통 10만 원이 훌쩍 넘는 자격증 관련 수업에 등록할 학원비와 시험비가 없었고, 사실은 그 이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통에 진득하게 자격증을 위해서 투자할 시간이 없었다. 이력서에 경력으로 기록할 만한 단체 활동이나 인턴십에 지원하려면 자격증이 필요한데, 나는 이런 곳에 지원할 자격조차 없는 셈이다.

나는 심지어 친구도 없다.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는 워낙 학과 분위기가 좋은데다가 뒤늦게 아르바이트를 쉬게 되면서 과 행사에 참견을 많이 한 탓에 과 사람들과 인사 정도는 하고 다니지만, 친구는 없다.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아르바이트 시간에 맞춰 뛰어가고 공강 없이 시간표를 만들었으니 친구가 생길 재간이 없다. 외부 단체나 동아리 활동에서도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늘 지쳐 있고 시간에 쫓기는데다가 돈 쓸 일들을 피해서 다니다 보니 해 본 일은 많은데 거기서 친구는 만들지 못했다. 인맥 관리라는 건 애초에 내게는 주제넘은 꿈이다.

도전 정신이나 젊은이의 패기를 논하기에는 나는 늘 패배주의에 시달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보다 덜 자고 덜 먹고 더 일하고 더 애써도 내게 돌아오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무언가에서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가 없었다. 나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면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나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는 아르바이트보다 더 힘겨운 직장 생활과 맞바꾼 임금 88만 원이었다.

이런 나의 패배주의를 씻어 줬던 경험은
뉴질랜드 워킹 홀리데이였다. 비록 막노동에 가까운 식당 일을 하고 농장에서도 기숙 생활을 하긴 했지만 나는 그곳에서 내가 일한 만큼 먹고살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내가 일을 더 하면 인정도 받고 더 얻는 것이 있었고, 심지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리고 여행까지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없어도 괜찮은 척 할 필요가 없었고 가진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인정받았다. 타지에서의 자유로움도 좋았지만, 내가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는 배울 수 없었던, 내가 무언가를 개척하고 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낯선 타지에서 배웠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은 결코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주어진 매일을 견디고 버텨 나가는 일이다. 공부도 절반, 일도 절반 정도 간신히 중간을 맞추어 가면서 견디는 대학생의 삶은 능률이 낮고 성취감도 없다. 그렇게 견디어서 대학 생활을 살아 낸다고 해도 자수성가는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내가 나약하거나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 생활을 끝까지 해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대단히 고된 일을 해냈다고,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서유정 너무 용감하고 씩씩해서 무서워 보일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소녀 감성의 소유자. 가끔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사는 게 힘든 스물네 살 대학 졸업반. 현재 마음은 대학원을, 몸은 생계를 지향해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중.

 


 

/서유정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학생

 

 

'스펙 괴물'이 된 대학생의 시한부 인생 [대학의 교육 불가능③] 스펙, 그리고 내 안의 괴물

1학년 시절, 나는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서 자유인 혹은 망나니였다. 수업이 듣기 싫으면 수업에 안 가고 숙제가 하기 싫으면 안 하고 시험이 보기 싫으면 안 봤다. '대학에 와서도 고등학생처럼 할 일에 쫓기면서 살긴 싫어.' 물론 대학 새내기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이런 마음은 다 있기 마련이라지만 난 좀 심했다. TV 시트콤 <논스톱>을 많이 본 탓도 있고, 고등학교 시절 동안 억눌린 게 너무 많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엔 친하게 지낸 선배들의 도움도 컸다.

"은정아. 선생님이 꿈이랬지? 그럼 모범생 생활 접고 이렇게 막 밤새도록 놀아도 보고 성적도 지지리 못 받아 보고 그래야 해. 그래야 아이들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어?" 술에 반쯤 취해서 떠드는 선배의 얘기는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아,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라는군. 다음에 왜 수업에 안 들어왔냐고
친구들이 물으면 선배가 말한 대로 답해야지. 나는 선배의 말을 가슴에 새겨 넣으며 다짐했다. 그 학기 내 학점은 3점을 간신히 넘겼다.

아름다운 순간 혹은 후회스런 순간

내 1학년 시절을 너무 폐인처럼 묘사해 버렸지만 그 시절은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대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기도 한 때였다. 고등학교 때는 소심한 마음에 시도도 못했던 재즈
댄스 동아리에 가입해서 혼신의 몸부림도 쳐 보고, 대학에 가면 꼭 해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던 공부방 자원 교사 활동도 입학하자마자 시작했다. 나에게 "선생님, 어른이에요?"라고 묻는 눈이 맑은 초등학생 아이들과 농장에 가서 고추도 키우고 방울토마토도 키우고 나중엔 우리가 키운 배추로 지역의 다른 공부방이랑 연합해서 김장도 담그며 재미나게 1년을 보냈다.

불우한 학점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그 시절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른들의 칭찬이 아니라 나의 바람이
동력이 되어 움직인다는 게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지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고, 잠시 이렇게 좀 놀다 가도 안 죽는다는 걸 배우기도 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1학년이 지나고 한 학년, 한 학년 나이를 먹으면서 고등학교 시절과 같은 압박감이 조금씩 다시 내 일상을 침범해 오기 시작했다. 사실 1학년 때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학년이 올라가면 지금처럼 지내진 못하리라는 것을. 나와 친구들은 마치 시한부 인생이라도 사는 듯 "지금 아니면 평생 못 논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학기 초에 우리와 놀아 주던 선배들은 어느 순간부터 과 행사에 나타나지 않기 시작했다. 모두가 미래를 위해 바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사범대 부속학교에 참관 실습도 다녀오고
청소년 학습 멘토링도 하면서 내가 학교라는 공간, 그리고 교사라는 일과 잘 안 맞는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 혼란에 빠졌다. 1학년 겨울방학부터 학내 자치언론 활동을 하면서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점도 혼란에 한몫을 보탰다. 잠시 언론사 취업에 관심을 가졌던 적도 있다. 그러나 난 내 자신이 하루 8시간 이상의 숙면을 취하지 못하면 불행해지는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었고, 잠도 포기하고 평범한 주말을 보내는 것도 포기하고 살 만큼 내가 그 일을 하고 싶은 건지 판단이 안 섰다. 무엇보다도 주요 신문사 몇 곳에서 인턴을 하고 글 잘 쓰기로 소문이 나 있던 선배가 계속해서 언론사 공채에서 줄줄이 고배를 마시는 걸 보니 겁이 났다. 아, 저런 분이 떨어지는데 내가 되겠는가. 아, 대체 난 뭘 해 먹고 살아야 하나.

교사가 될 거라던 굳건한 믿음은 깨졌고, 뒤늦게 찾아온 다른 꿈은 내가 가지기엔 너무 멀어 보였다. 이런 혼란들 속에서 난 자꾸만 불안해졌다. 목표가 분명치 않으니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일단은 1학년 때 망한 학점부터 살려 볼까.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학점이었다. 어딜 가든 다 기본적으로 보는 것이 학점이니까. 그러나 재수강할 과목을 보려고 성적을 확인하다 보니 한숨이 나왔다. 1학년 때 하고 싶은 거 좀만 참았어도 안 해도 됐을 고생을 지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내가 그때 엄청나게 대단한 일들을 한 것도 아니고 왜 그랬던 걸까, 이런 후회들. 문득문득 나는 자꾸만 과거의 행복했던 나마저 부정하려 들었다. 마치 그 시절이 아무런
성장도, 아무런 배움도 일어나지 않았던 무의미한 시간처럼 여겨졌다. 학점이라는 객관적 지표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괴물

하루하루를 나와 싸우면서 보냈던 것 같다. 지난 시간을 부정하다가 다시 긍정하다가, 내 자신에게 '이
자기관리도 못하는 멍청이'라고 쏘아붙이다가 그래도 그 빈틈들 때문에 네 삶이 더 풍족해지지 않았냐고 스스로를 다독이다가. 어쨌든 1학년 때와 달리 난 아무리 듣기 싫은 수업이라도 가서 딴짓을 하면 했지 되도록 결석은 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과제도 기한이 좀 늦더라도 꼭 제출하고자 했다. 일명 '학년빨'이 붙으면서 예전보다 힘을 덜 들여도 시험 점수도, 보고서 점수도 더 잘 나오는 기이한 현상도 벌어졌고, 그에 따라 자연히 학점이 예전보다 잘 나오기 시작했다.

학점이 어느 정도 오르고 졸업할 때가 가까워지니 공인
영어 시험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4학년이나 돼서 처음 본 토익 시험의 결과는 부끄러웠고, 이 토익 시험에 내 서류 통과가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드니 기분이 한없이 우울해졌다. 결국 여름방학에 강남의 유명 어학원 수강권을 끊었다. 그해 여름, 거의 200명이 한꺼번에 수업을 듣는 대형 강의실에서 난 강사가 별표를 치라면 별표를 치고 형광펜으로 줄을 그으라고 하면 형광펜으로 줄을 그으며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교 때도 이렇게 공부하지 않았는데, 200명이 강사 말을 따라 별표를 치려고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가끔은 웃기기도, 씁쓸하기도 했다.

그때 난 KBS에서
시행하는 한국어능력시험도 봤다. 방황하는 와중에도 자치언론 활동은 내 마지막 보루인 것처럼 놓지 않고 활동했는데 거기서 활동할수록 잡지나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그래서 이 시험을 봐 두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래도 한국어인데' 하고 풀어 본 기출문제집은 절반이 틀렸다. 충격을 받은 난 곧장 유명한 국어 기본서를 사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본 시험. 등급은 생각보다 잘 나왔다. 그래도 노력한 게 결실을 본 것 같아 혼자 좋아하고 있는데 왠지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고등학교 시절
모의고사 성적표를 받고 좋아하던 내 모습. 고등학교 시절, 사실 100점과 94점이나 같은 등급으로 묶이는 등급에는 큰 감흥이 안 들었다. 전체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보여 주는 백분위, 늘 그게 더 중요했다. 그런데 한국어능력시험 성적표를 들고 있는 나 역시 그랬다. '백분위가 95구나. 그럼 100명이 있다 치면 나보다 못 본 사람이 95명이라는 거네.' 예전에 한 선배가 취업 준비를 하며 자기 안의 괴물을 보았다고 했는데 그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나도 내 안에서 괴물을 봤다. 나보다 뒤떨어진 95%의 존재로부터 얻어진 자신감을 먹으며 무럭무럭 커 가는 괴물을.

스펙이 문제다, 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

한 친구와 '
스펙'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친구가 그런다. 스펙 열풍이 대학생만의 문제인 것 같진 않다고, 취업이라는 시급한 문제가 코앞에 있다 보니 더 두드러져 보일 뿐이지, 우린 사실 초·중·고 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왔다고. 그리고 대학 졸업하고도 아마 다르지 않을 거라고. 내가 취업 준비를 위해 이런저런 시험을 보면서 만난 괴물도 갑자기 난데없이 등장한 손님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내 안에서 함께 자라 온 녀석이었다. 대학에서 아무리 상대평가를 한다고 해도 그건 고등학교 시절 모의고사 성적표에 매겨지던 백분위만큼 노골적인 줄 세우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다만 내가 인식을 잘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내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고등학교 시절의 모의고사 성적표가 갖추고 있던 모양새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채 멈춰 있었다. 내가 얼마나 낭만적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는지, 취업을 준비하면서 깨달았다.

"요즘 대학생들이 스펙 쌓기에만 너무 열중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워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여느 때처럼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기사들을 보는데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사회적 기업을 만든 한 20대의 인터뷰 기사. 인터뷰의 주인공이 요즘 대학생들에게 보내는 조언에 나는 잠시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싶다가, 그녀가 말하는 스펙 쌓기에만 너무 열중하는 대학생이 나인가 싶어 움찔하다가, 이내 아니야 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시험들을 보는 것뿐이라며 자기방어를 하다가, 그런데 이 시험 공부하는 거 너무 재미없어서 사실 안 볼 수만 있다면 안 보고 싶다고 엉엉 대며 그녀 앞에 이실직고했다. 당신에게 '사회적 기업 활동도 스펙으로 보여요'라고 잠시 외쳤지만 사실은 부러워서 그랬다고, 나도 영어 점수가 없고 증명서가 없어도 내 경험들을 인정해 줄 그런 직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내 딴에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 보며 살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갈수록 힘들다고, 당신은 그렇지 않았냐고 다른 얘기들도 덧붙이면서.

바쁘다 너무 바쁘다

걸으면서는
문자도 못 써서 친구들에게 '하등 동물'이라고 놀림당하던, 도저히 멀티플레이가 안 되던 나도 상황이 급하니 멀티플레이가 됐다. 지난 학기 수강 신청 가능 최대 학점인 21학점을 복수 전공할 과목들로 꽉 채워서 듣는 동시에, 초과 학기자라 기초생활수급자임에도 불구하고 장학금을 한 푼도 받을 수 없는 탓에 근로장학생 일과 아르바이트를 했다. 과제가 거의 매일같이 있었고 일도 거의 매일같이 있었다. 하나가 끝나면 하나가 또 시작되고, 그 일이 끝나면 또 다른 할 일이 시작되는 피곤한 나날이 계속됐다. 이렇다 보니 토익 점수를 더 올려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하면서도 토익 책을 붙들고 앉아 있을 여유가 도저히 없었다. 그런데 주변에선 '어떤 선배가 토익 시험 두 번 만에 900점을 거뜬히 넘기더라', '누구는 토익이 만점이라더라' 하는 이야기가 자꾸만 들려왔다. 나는 자꾸만 나 혼자 멈춰 서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교육학 공부가 재밌어서 시작한 복수 전공은 복수 전공이다 보니 안 듣고 싶은 과목까지 들어야만 하는 경우가 생겼다. '세상에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어떻게 사니.'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던 말들을 자꾸만 자신에게 위로랍시고 들이밀었다. 때때로 안 듣고 싶은 과목 수업 시간에 다른 책을 읽거나 수업과 전혀 상관없는 글을 쓰기도 했는데, 이럴 거면 대체 왜 이 수업을 듣나 하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들이 올라왔다. 그냥 듣고 싶은 과목만 듣고 복수 전공을 하지 않으면 내가 교육에 얼마나 관심이 많고,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는지 상관없이 난 교육에 전문성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거라는 생각. 언론사나 출판사나 들어가는 길이 좁으니 안 되면 교육학 복수 전공한 거 가지고 기업 인사부나 교육부라도 지원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그것도 될 보장이라고는 없지만 본래 '보험'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아, 어느 순간 내가 좋아해서 시작했던 공부는 보험으로 변질돼 있었다.

주변의 친구들도 보험이란 말을 자주 썼다. 특히나 크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왠지 해야만 할 거 같을 때 자기 자신, 혹은 타인을 설득시키는 차원에서 보험이란 말이 자주 사용됐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 꼭 필요한 건 아닌데 혹시 모르니까", "그래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지금 힘들어도 일단은 참고 해. 해 둬서 나쁠 건 없잖아". 우리의 대화를 곱씹다 보면 대한민국 보험 업계의 미래는 세계 어느 곳보다 밝을 거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나 보험이 될 수 있는 활동이란, 다시 말해 취업이라는 위급 상황에서 써먹을 수 있는 활동이란 정해져 있었다.
공모전을 준비하는 과정이 아무리 치열했다 하더라도 수상을 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었다. 봉사활동과 같이 예전엔 스펙으로 분류되지 않던 활동마저 수료증을 발급받아 이력서에 기재할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 했다. 물론 수상을 하지 못하더라도, 수료증이 없더라도, 기업에서 주최한 국토대장정이 아니라 나 홀로 다녀온 전국 일주라 해도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는 유명한 책도 있지 않은가. 나만의 스토리로 만들어 내면 된다! 하지만 그 스토리와 스펙이라는 것의 차이를 잘 모르겠던 나는 여전히 내게 객관적으로 내 경험을 인정받을 증거가 없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꼈다. 스토리든 스펙이든 어쨌든 둘 다 내 경험의 의미를 내가 느끼고 고민한 그대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선택받을 수 있도록 예쁘게 각색해야 한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는 것 아닐까. 사실 애초에 인사 담당자들이 듣고 싶은 스토리란 것도 이미 정해져 있지 않을까. 경험의 종류는 각기 다르더라도 우리가 스토리를 통해 보여 줘야 할 메시지는 결국 '나 긍정적이고 사교성도 좋고 도전 정신도 흘러넘치는 사람인데 그 도전 정신이 회사의 명령과 지침 앞에선 발휘되지 않으며, 창의적이긴 한데 그것도 현 체제를 위협할 만한 위험한 수준은 결코 아니야' 아닌가. 그런 걸 원하는 거라면 내가 대학에 와 한 모든 경험들을 끌어모아도 내가 회사에 보여 줄 수 있을 만한 스토리란 없었다.

유일하게 숨 쉴 수 있었던 공간

정신없이 사는 와중에도 자치언론 활동만큼은 손에서 놓질 못했다. 마감 기간에는 내가 이걸 왜 했나 싶고, 머리가 부서질 것 같지만 우리가 만들어 둔 책을 보면 흐뭇했고 언제 그런 고민을 했냐는 듯 또 다음 호를 준비했다. 내게 자치언론이란 공간은 대학에 다니는 동안 내가 유일하게 내 호흡대로 살아도 괜찮았던 공간, 내 상처나 고민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고민하지 않고 말할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난 처음에 그냥 나의
사소한 불편함에서 시작한 고민이 거기에 여러 사람의 고민과 삶이 덧붙여지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으로 발전해 기획이 되고 특집이 되는 재미난 경험도 많이 했다. 아무와도 공유되지 못한 채 끝날 수 있었던 나의 고민들이 우리 책을 집어 들 3000여 명의 학우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된 것이다.

"제가 좀 더 일찍 들어왔으면 졸업 앞두고 그렇게 흔들리지 않았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날 좀 붙잡아 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어요." 이번에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신입 편집위원 언니가 이 말을 하자 앉아 있던 구성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말은 안 했어도 조금씩 이 공간에서 위로받고 있었나 보다. 생각해 보면 나도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강박감에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야 할 일들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던 힘든 때에 '대학생, 놀자'라는 기획을 하면서 힘을 얻은 적이 있었다. 같이 기획에 참여했던 언니들의 모습을 보며 '와, 저렇게 알차게 놀 수도 있구나' 하고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마음껏 놀기 힘든 우리네 현실을 나누며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는 위로를 받기도 했다. 함께 고민을 나눈다는 건 서로가 혼자 울다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위대한 일이었다.

그런데 점점 졸업과 취업 준비로 바빠지면서 난 자연히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게 없었던 이 공간을 가장 먼저 뒷 순위에 놓고 살기 시작했다. 회의도 잘 안 나가고 다른 이들의 글을 거의 읽지도 못했다. 무엇보다도 취업을 하려고 준비하다 보니 자치언론에서 하는 고민들과 내가 하는 일이 자꾸만 공존할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매달 토익 시험을 열심히 치고, 복수 전공 수료에 열을 올리며, 매일 취업 준비
게시판에서 내가 할 만한 인턴십이나 공모전이 없을지를 뒤지고 있으면서, 자치언론에 가선 경쟁 위주의 교육을 비판하고, 빈곤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이 '피어라 청춘'을 외치며 가는 해외 봉사 활동을 비판한다는 게 어쩐지 가식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꼭 가식이 아니라 하더라도 두 가지를 동시에 한 마음속에 품고 한다는 건 어려웠다. 자치언론에서 글을 쓰는 행위란 기본적으로 나와 세상이 부딪히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는데, 취업 준비란 건 나에게 누군가 그건 옳지 못한 자세라고 하면 당장 뜯어고칠 준비가 돼 있어야 하고, 이 일을 위해선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 연기를 해서라도 그런 사람처럼 보여야 하는 과정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과정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앞머리가 귀여웠던 내 친구는 취업 상담 중에 너무 어려 보이면 기업에서 안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앞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대기업 임원 면접까지 올라갔던 한 친구는 그랬다. 그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이 '글로벌 인재'라면 사람들은 갑자기 미국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적극적이고 쿨하며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처럼 연기를 시작한다고, 기업마다 각기 다른 인재상에 맞춰 연기를 바꾸기가 힘들다고 말이다. 나 역시 앞머리를 기르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사회에서 좋아하지 않을 만한 내 단점이나 부족한 면들을 남에게 노출하면 안 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다. 당시 난 학교에서 진행하는 청소년 멘토링 프로그램 기획팀에 참여하려고 면접을 봤는데 마치 회사 면접 자리에 온 것처럼 바짝 긴장해 일장 연설을 했다. 그런 나를 보며 담당자분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편하게 말하셔도 돼요." 딱히 그 면접 때문에 긴장했다기보다도 그 당시 내 정신 상태가 누굴 만나든, 어딜 가든 그랬다.

그리고 다시 여기로

"은정아, 요즘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어. 너에게 무슨 일이 있긴 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본인조차도 잘 모르는 것 같아." 지난 학기 말, 오랜만에 만난 편집장 언니가 조심스레 건넨 말에 나는 갑자기 내가 왜 우는지도 모른 채 사람들이 북적이는 사범대 식당에서 서럽게 울었다. 언니가 한 말대로 난 안 그래도 그 즈음 지나치게 무덤덤한 내 마음 상태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예전에는 찾아보지도 않던 기업 연봉 순위를 찾아보고, 취업 준비 카페에 매일 들어가 다른 사람들 스펙을 구경하며 전의를 불태우고, 그러면서도 내 행동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던 자신이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론 '남들 다 이렇게 사는데 나 혼자 뭐가 잘났다고 그러나. 일단은
취직을 하고 그 다음에 고민하자'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런데 그게 그냥 꾹꾹 참아 온 것뿐이었던가 보다. 잠자다가 수업 못 갈 때도 많았던 허술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갑자기 회사에 당장 입성할 준비가 되어 있는 빈틈없는 '사회인' 연기를 하려니 엄청 피곤하기도 했겠지. 울면서 내뱉는 나의 말들에 그냥 "괜찮다"고 말해 주는 언니를 보다 보니 그동안 억지로 쓰고 있던 가면이 홀라당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냥 아직 이 못나고 어린 모습을 남들에게 좀 더 보여 주면서 살아도 되겠다고, 이런 사람도 받아 주는 공간이 있겠지, 안 되면 내가 대출받아서 만들지 엉엉, 그 짧은 순간에 지금 생각하면 웃기기도 한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리고 지난 겨울방학. 내가 대학 시절 동안 기댔던 자치언론처럼 졸업 후에도 어딘가 부빌 언덕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교육공동체 벗〉에서 하는 일리치 읽기
모임에 참여했다. 졸업 후 어디에서 내가 일하게 되더라도 내가 그동안 옳다고 생각하고 지키고 싶었던 가치들을 서로 지탱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힘든 줄도 모르고 한참 잘못된 길로 가도 누구 하나 손 내밀어 잡아 줄 수 사람이 없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사범대 식당에서 날 울렸던 편집장 언니처럼 멍 때리며 살고 있을 때 또 한 번 날 울려 줄 그런 동료가 필요했다. 그런데 운 좋게도 학점도, 영어 점수도, 증명서도 요구하지 않고 면접 자리에서 저녁을 차려 주시며 "밥할 줄 알아?"를 묻는 이 공간에서 일을 하게 됐다. 그것도 내가 만들고 싶었던 교육 잡지를 만드는 일. 솔직히 지금도 놀랍다. 나의 취업 과정을 들려주면 친구들이 "엥? 뭐 그리 간결?" 한다.

"요즘 대학생들이 스펙 쌓기에만 너무 열중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워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다시 사회적 기업에서 활동하던 그녀의 말. 벗에 취직한 걸 부러워하는 친구들이 상당히 많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게 어디 흔한 일이냐고, 돈도 별로 못 벌 텐데 용기 있다며, 자기가 나중에 부자가 돼서 나를
후원해 주겠다는 깜찍한 말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간 내 안에 있었던 일들을 잘 모르는 친구들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묵묵히 걸어오다가 이런 공간에서 일하게 된 것처럼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그렇지 않은데 넌 대단하다며, 괜히 내 앞에서 자기가 하고 있는 취업 준비 이야기를 하길 부끄러워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기업의 그녀가 말한 것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는 건 지금 이 사회에선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이 세상엔 완전히 스펙 쌓기에만 열중하는 대학생도, 완전히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씩씩하게 사는 대학생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 양쪽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 보려 날마다 싸우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오늘도 인터넷에서 '스펙 쌓기만 해도 바쁠 시간에 이런 훈훈한 일을 하는 대학생 A모 군' 따위의 기사를 접하며 괜히 자기가 뭔가 잘못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있을 친구들에게 괜찮다고, 아니 안 괜찮아도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다. 네가 살고자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지 안다고, 그래도 혹시나 너무 힘들면 나도 어디 식당에서 널 한번 울려 주겠다고, 연락하라고 말이다.

최은정. 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하지만 독일어를 못하고 교육학을 복수 전공하지만 교육이 뭐냐고 물으면 머릿속이 '청순해지는' 사람입니다. 〈교육공동체 벗〉에서 현재 수습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직 졸업은 안 했습니다.

 

/최은정 <오늘의 교육> 기자

 

 

 

 

"접대 자리엔 인문학 전공자 노래 한 곡이 효과적" [대학의 교육 불가능④]학문하지 않는 대학

교양이 죽은 그해 봄

2010년 대학의 봄은 자보와 함께 찾아왔다.

김예슬의 자발적 퇴교 선언이
한창 언론의 관심을 휩쓸던 무렵, 플래시 세례는 받지 못했지만 서울대 인문대 앞에도 자보 하나가 붙었다. "'삶과 인문학' 강의에 요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이 자보는 자보체가 아닌 일상어로 작성돼, 김예슬 선언에 솔직히 잘 공감할 수 없었던 대학생들까지도 공감할 수 있는 소박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인문대에서는 그해 봄부터 인문학을 활성화한다는 명목으로 '삶과 인문학'이란 강의를 개설해 신입생들이 의무 수강하도록 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 보니 이것이 '스펙경영학'과 다름없는 강의였던 것이다. 첫 강연자였던 현대산업개발의 최동주 사장은 강의에서 "투자 자본을 구하는 접대 자리에서 숫자 얘기를 하는 것보다 인문학이나 예술을 전공한 직원이 노래나 한 곡 불러 주는 편이 효과가 좋다"며 인문학의 '유용성'을 강조했다. 또 자신의 회사가 참여한 용산 개발 사업을 버젓이 홍보하는가 하면, 학생들에게 꼭 경제·경영학을 복수 전공해 경쟁력을 갖춘 인재가 되라고 당부했다. 순식간에 인문학을 기업을 위한 도구로 만들고, 인문대생을 '경영대에 합격하지 못한 예비 사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인문대생들의 자보는 이 사태에 대해 대학의 신자유주의화 반대와 같은 거대 담론을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학생으로서 가장 기본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수업권, 자치권 존중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인문학을
취업을 위한 스펙으로 흔쾌히 팔아 버린 대학에 대한 경악과 자유와 중립성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마저 잃어 가는 대학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었다. 즉, '대학이 과연 이래도 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문제 제기는 인문대 학장단 측의 극히 행정적이고 사무적인 답변으로 봉합되었다. 수업의 개설 여부는 교수 회의에서 결정할 사항이라는 들으나 마나 한 답변 속에는 인문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이 들어 있지 않았다.

교양 수업은
고등학교 때까지 부모와 선생님, 사회적 압력에 의해 자기 억압적인 공부를 해 왔던 학생들에게 자신의 갈등을 학문적으로 풀어 보고 부딪쳐 볼 수 있는 자유를 처음으로 제공한다. 교양 수업을 통해 학생들은 삶의 목적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들부터 성, 국적, 종교, 교육, 경제력 등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다양하고 특수한 결에 대한 고찰, 전공 분야와는 무관한 영역에 대한 순수한 지적 추구까지 무궁무진한 궁금증을 자기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자아 찾기, 진로 찾기를 통해 삶의 주도권을 회복하고,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삶과 인문학' 수업이 불러 온 사태는 대학이 공개적으로 그런 교양 수업의 종말을 선언한 것을 의미했다. 스펙이 되니까 배워야 한다는 타율적인 논리로 학생들과 대학 스스로를 조련하는 것이 이제는 꼭 갖춰야 할 '교양'이 된 것이다.

학생들의 자보는 학문의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대학의 참혹상을 보며 대학생들이 지른 비명이다. 그해 봄 유난히 쏟아졌던 대학생의 자기 선언들과 마찬가지로,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 대학 안에서 대학생으로 살아가는 일의 고통을 어떤 식으로든 토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학 체제는 그 안에 속한 개인들의 고통에는 무관심한 채 굴러갔다. 언제나 그래 왔다는 듯이.

자본이 우리를 옥죄는 방법


이 사태는 서울대 안에서 교양과 교과를 구성하는 판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에 불과했다. 사실 '삶과 인문학' 수업은 학생들이 함께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기에 눈에 띈 사례였을 뿐, 서울대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업을 위한 인재 양성 기관을 자처하며 변해 가고 있었다. 일례로 2009년에 신설된 자유전공학부는 다양한 전공의 학습을 통해 폭넓고 깊이 있는 사고를 지닌 인재를 양성하겠다던 본래 취지와 달리, 경제·경영학과의 정원을 간접적으로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2009년 이후 의무화된 제2전공(각주 참조)도 학생들이 좀 더 다양한 교양 수업을 수강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면서 많은 학생이 '스펙에 도움이 되는 전공'을 복수 전공하도록 권고하는 조치가 되었다. 교수들은 무리한 학제 변화가 인기 학과의 독식을 조장하고 학생들이 교양과 내실 있는 공부에 전념할 수 없게 하는 결과를 낳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막거나 완충하는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다. 이런 변화들이 구성원들 스스로가 그 내부의 논리를 다듬거나 준비할 여유도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것은 교과만이 아니었다. 대학의 홍보 매체에는 기업인이 참여하는
행사프로그램사진과 함께 전면에 등장했고, 기부자 명단과 액수를 나열한 목록이 학술 활동 현황에 대한 양적 보고와 함께 나란히 강조되었다. 양적이고 표면적인 기준에 의한 대학 평가의 허구성과 그것이 조장하는 학문의 변태적 발전은 비판받음과 동시에 또한 끊임없이 추구되었다. 어쨌건 연구 성과가 부진한 교수들에 대한 내부 평가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 않냐, 또 현재의 위계적이고 비민주적인 대학 내 의사소통 구조 안에서 내부적 개혁을 단행하느니 외과적 수술을 받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느냐는 자조적 체념이 오고 갔다. 그 속에서 교수들은 점차 침묵했다.

2008년 이후 인문대에서는
공사가 끊이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신축 공사와 리모델링으로 인해 교수와 학생들은 연구 공간과 공동체적 생활 공간을 잃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 많은 공사를 왜 해야 하는지, 무엇이 사라지고 무엇이 생기는지에 대한 논의도 없이 벽은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졌다. 공사로 인해 생긴 수많은 출입 통제 공간을 지나 복잡하게 얽힌 미로 같은 복도에서 헤매다 어쩌다 마주치면, 우리는 이것도 어쩌면 인문학의 반란을 막는 전략 중 하나일 거라며 씁쓸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예전보다 매끄러워진 건물들 안에는 어김없이 더 매끄러운
간판을 단 외부 업체가 들어서곤 했는데, 그로 인해 학교 안 공간에는 새로운 위계가 생겼다. 비싼 커피집과 싼 커피집, 비싼 식당과 싼 식당. 값비싼 다양성은 증가하는 가운데 값싼 선택지는 줄어들었다. 대학은 이 같은 변화가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에 응하기 위한 것인 양 포장하면서, 그러한 변화를 원치 않는 학생들, 또는 변화의 방식을 문제 삼는 목소리들을 묵살했다. 값비싼 식당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값싼 식당밖에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의 존재를 묵살할 수 있는 근거로, 값비싼 등록금을 기꺼이 지불하는 학생들의 존재가 등록금에 허덕이는 학생들의 고통을 가벼운 배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만드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그 새로운 위계 속에서 경제적 고통은 점점 개인의 문제가 되어 갔다.
공존과 공동체적 배려가 논의되던 장에는 돈이 없다면 값싼 밥을 먹으면 되는 것이고, 학과 해외 연수에 참여할 돈이 없다면 참여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쿨한 가치관이 스며들었다. 생계와 생존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어느 때보다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지만, 그 고통에 공감하는 감수성은 메말라 갔다. 자본이 만들어 낸 새로운 위계와 구획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차별이 탄생하는 것을 목격했다. 있는 자가 누리고 없는 자가 주리는 것은 결코 그 자체로 정당하거나 모두가 동의하는 원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원칙처럼 자리 잡아 갔다. 이처럼 교양을 빼앗기고, 생활 공간을 빼앗기고, 경제적 불안은 가중되는 가운데, 내면화된 자본의 원칙이 공동체의 윤리까지 앗아 가면서 우리는 사지가 묶인 개별자가 되었다.

어제보다 더 학문하는 오늘

대학원에 와 첫 1년은 견딜 수 없이
우울하고 외로웠다. 왜 그랬던가를 굳이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욕심이 많아서' 그랬던 것 같다. 학부 때 하고 싶은 딴짓은 다 해 보고, '학문'은 잠깐 맛만 보았지만, 잠깐 경험한 학문의 오묘한 맛이 좋아 대학원에 왔다. 그러나 대학원은 학문을 하기에 이상적인 공간은 아니었다. 꽉 짜인 학제 안에서 정해진 과목을 의무적으로 배우고, 정해진 형식의 논문을 읽고 비평하고, 학기가 끝날 때면 정해진 형식의 논문을 어떤 식으로든 짜 내는 것이 대학원 과정의 전부였다. 물론 어떤 수업에서는 보다 심도 있는 학문적 관점, 또는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는 번뜩이는 방법들과 그 발견의 내용들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 그런 수업을 앞둔 날이면 밤새 이런저런 고민을 해 보고, 내 발견을 기록해 수업에서 함께 나누며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학기가 끝나면 사람들은 바쁘게 흩어졌고, 나도 다른 수업과 일에 쫓겨 자신의 발견으로부터 멀어졌다.

교수들 가운데 자신의 연구와 학생 지도에 매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였고, 젊은 교수들은 학술진흥재단의 연구 지원 사업 등에 동원되느라, 중년 교수들은 각종 보직을 수행하느라 바빴다. 한 젊은 교수님은 연구도, 학생 지도도 제대로 할 수 없어 괴롭다, 이러기 위해 공부를 한 것이 아닌데, 하루에도 몇 번씩 사직서를 쓰고 싶은 심정이라고 솔직하게 토로하기도 했다. 지원을 받기 위해 연구 계획서를 쓰고,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연구를 하고, 지원을 받은 만큼 보고서를 쓰고, 그 거추장스런 행정과 형식을 갖추느라 지쳐 정작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교수님이 그렇게 솔직하게 토로라도 해 주는 건 참 고마운 일이었다. 많은 교수들은 그런 내적인 갈등을 학생들과 나누거나 그들의 고민을 들어 줄 만큼 정신적, 시간적 여유도 없었으니까.

대학원 과정에 대한 회의와 불만, 그것을 토로할 수 있는 공간의 부재 속에서 학문을 하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나 자신이 학문에 맞지 않는 것인지, 전공을 잘못 선택했기 때문인지,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의심하는 가운데 모든 것은 점점 더 알 수 없어졌다. 그러는 동안 학문을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가장 힘들고 절망적인 때에도 책을 읽는 시간만큼은 어김없이 행복했다. 책을 읽는 것이 너무 좋다는 사실이 대학원이라는 제도화된 틀을 견뎌야 하는 충분한 이유는 되지 못했지만, 내가 학문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되었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든 읽고, 고찰하고, 글로 써서 나누는 일의 본질적인 즐거움이 내 삶의 동인이 되게 하는 것, 그렇지 못하게 만드는 제도와 환경의 거추장스런 훼방을 떨쳐 내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학문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학에서 요구하는 것들에 바쁘게 응하기보다는 나의 삶에서 충실한 깨달음을 천천히 쌓아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작업이고 외적인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성취가 아니어서, 책을 읽어도 논문을 써도 학문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내적 갈등을 끊임없이 느껴야 하는 작업이다. 그런 갈등 속에서 표면적인 결과에 만족하지 않고 결과를 회의하고, 그것을 한 꺼풀 들춰 새로운 논의를 충실히 쌓아 가는 과정, 또는 경향성이 학문하는 일의 본질이다. 따라서 어떤 제도도 그 자체가 학문을 수행하거나 보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제도 안에 있는 개개인이, 그들이 만든 학문 공동체가 그와 같은 내적 충실함을 전통처럼 쌓아 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학 제도 안에선 표면적인 성과가 너무 중요해서, 채 배움이 무르익기도 전에 결과를 내놓아야 하고, 또 내놓은 것을 곱씹을 여유도 없이 다음 실적을 위해 경쟁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적 대학 평가가 우리를 끝없이 채찍질하는 가운데 교수도 학생도 자신들이 어제보다 더 '학문하고 있는가'를 성찰할 수 없게 되어 가고 있다. 더 큰 특권과 이익을 추구하는 대학은 학문이라는 알맹이와는 점점 더 맞지 않는 공간이 되어 가고 있다. 대학원생과 교수는 그와 같은 대학의 '수익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동원되면서 학문하는 정체성을 점점 지키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대학원에도 점점 한국에서 공부하는 것은
유학을 가기 위한 스펙 쌓기일 뿐이라거나, 대학원 우수논문상 시상식에서 학과장이 "우수논문상을 받으면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건네는 식의 자조적인 담론이 잠식해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학문하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담론에 포섭되는 순간 학문은 정말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적 대학 구조에 협력하는 한 학문은 있을 수 없음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학문을 꾸려 나가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배척하는 폭력성 외에 어떤 합리성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그에 맞서 싸우는 것을, 그리고 학문하는 것을 포기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변하지 않는 것

한편 오늘날 대학의 위기 또는 '학문할 수 없음'은 새로운 과제이면서 또 오래된 과제이기도 하다. 현재의 상황을 대학의 '신자유주의화'로 풀어 내는 것은 따라서 틀린 말은 아니되 충분하지도 않다. 대학의 신자유주의화가 문제라고 할 때, 신자유주의 이전의 대학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이 자본의 논리에 직접 영합하게 되기 이전에도 교양 수업 및 전공 수업의 내실이나 배우는 내용의 낡음에 대한 문제 제기는 있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 제기는 대학 내의 뿌리 깊은 구조적 한계로 인해 늘 대대적인 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다만 뜻있는 교수 및
강사들의 지속적인 노력 속에서 기성 질서에 의문을 던지는 수업들이 개설돼 종종 학생들의 지적 갈증을 채워 줬다. 또 04, 05학번 정도를 마지노선으로, 그 이전까지 대학생들은 수업에서 얻지 못한 지식을 다양한 동아리와 학회, 소모임을 통해 배우고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의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됨에 따라 수업의 가치는 '학점'으로 수렴되고, 동아리 등 자치 단위의 가치도 '스펙'으로 수렴되게 되었다. 교양과 학문의 가치를 시험하던 장들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지만, 대학 안에서 교양과 학문에 대한 문제 제기 자체가 사라지게 되면서 그 역동성을 점점 잃어 가고 있다. 즉, 풀어야 할 과제는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데 질문하는 주체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다. 침묵과 순종.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대 대학의 진짜 풍경이다.

변하지 않은 것이 또 하나 있다. 이 위기를 헤쳐 나가는 방법이다. 2009년 서울대 법인화 반대를 위한 공개 토론회에서 법인화를 왜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한 장시간의 발제, 토론이 끝나고 자유 발언 순서가 되자 전국대학노조 국공립대 본부장 전태산 씨는 참가자들에게 외쳤다.

"서울대 법인화, 뭐가 문제인지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간단한 거 아닙니까. 대학별로 자율권 주고, 전폭적인 경쟁 체제로 나가겠다 이거 아닙니까. 저는 서울대 법인화를 어떻게 막아 낼지를 듣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서울대 사람들은 반대가 절실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가슴이 꽉 막힌 심정입니다."

여러 해에 걸쳐 점진적으로 침투해 온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대학에 미친 영향은 자명하다. 차등적 지원금을 놓고 벌어지는 경쟁에 대학 주체들이 동원되면서 학문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법인화' 역시 대학의 '자율권 강화'를 명분 삼아, 사실상 국가 보조금을 줄이고 경쟁을 더욱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빤히 보이는 덫을 눈앞에 두고도 우리가 그것을 막아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통탄할 일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대학에서 학문하고자 하는 주체에게 요구되는 것은 냉철한 분석력과 민감한 감수성, 그리고 뜨거운 행동력이다. 물론 이 세 가지 모두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지금은 어떤 의미에서는 총체적 난국이지만, 학문하는 일의 적극적인 의미를 깨우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알고, 느끼고, 행동하는 지성이 기존의
아카데미 안에서 길러질 수 없었음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학문의 사회성을 회복하는 일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절실한 과제이다.

1) 대학 측은 복수 전공을 원하지 않는 학생들은 '심화 전공'을 할 수 있다는 부속 조항을 마련했지만, 이는 심화 전공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전공 학점이 개설되지 않는 중·소규모 학과에서는 불가능한 선택이다. 다시 말해, '비주류' 학과의 학생들은 반드시 복수 전공을 할 수밖에 없다.

문수현 2004년 서울대 새내기로 입학해 지금은 영문과 대학원생으로, 학교에 머문 지 7년째다. 학회와 동아리 활동에서 배운 것들이 수업에서 얻은 것들보다 유익했고, 논문을 쓸 때보다 학생자치언론 《교육저널》에 글을 쓸 때 더 많은 성장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래도 학문을 계속하고 있다. 대학에 대한 깊은 애증 속에서 더 올바른 배움을 향한 갈망을 길어 내길 희망하면서.

 


 

/문수현 서울대 영문과 석사과정·<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대학이 악마와 거래한 이후, 나는 내몰렸다.[대학의 교육 불가능⑤]두산그룹의 중앙대 인수 그 이후

2008 5월 두산그룹은 학교법인 중앙대학교를 인수했다. 두산그룹은 대학 인수의 첫 번째 조건으로 총장 임명제를 내걸었고 박범훈 총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기존의 총장 선출 구조는 제한적으로나마 구성원들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었고 따라서 최소한의 민주적 통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선출직 총장은 재단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받을 수 있었지만, 임명직 총장은 임명권자인 재단 이사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박범훈이라는 '걸출한' 총장이 등장했다. 그는 학생들과 상의도 없이 새터(새내기새로배움터)
행사를 불허하더니 총장과 학교 본부를 비판한 교지를 전량 회수하고 교지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더 나아가 박 총장은 자신과 재단을 비판한 진중권 교수를 해임시키고 학교의 기업식 구조조정에 반대 목소리를 낸 학생들에게 퇴학 등의 중징계와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 모든 것이 두산그룹이 학교를 인수한 후 박 총장이 쌓아 올린 업적들이다. 박용성 이사장의 공세도 매서웠다. 그는 2009년 8월 〈중앙일보〉에 쓴 글에서 교수와 학생들을 향해 "주인 의식을 갖는다고 해서 실제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며 대학에 "과도한 '주인 의식'이 퍼져 있는 게 아닌"지를 걱정했다. 자본주의는 어디에서나 통한다는 그의 지론답게 그는 교수 사회에 성과급형 연봉제를 시행했고 전공에 관계없이 모든 학생들에게 회계학 수업을 의무화했다. 그리고 이후 기초 학문의 통폐합을 밀어붙여 살벌한 분위기는 극에 달했고 계열별 부총장제의 시행으로 재벌 총수 1인을 정점으로 한 위계적 지배 구조를 대학 사회에서 완성시켰다.

2009년 8월 - 계획된 우연, 진중권 교수 해임 사태

진중권 겸임교수는 내가 중앙대에 입학한 2003년부터 독문과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의 강의는 기존 한국 대학에서 찾기 힘들었던 최신 미디어 미학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매 학기 강의실에 앉을 자리가 없을 만큼 강의는 인기가 많았고, 그의 강의는 독문과를 넘어 중앙대학교로서도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런데 2009년
여름방학이 끝나 갈 무렵 진 교수가 더 이상 우리 학교에서 강의를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단 얘기들이 흘러 나왔다. 그가 박범훈 총장과 두산재단을 향해 던진 거침없는 비판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교무처는 진 교수의 해임을 겸임교수의 임용 요건 강화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라고 설명했지만 우리를 납득시킬 순 없었다. 대학 본부가 원칙을 그렇게 강조하던 같은 시기, 이재오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초빙 교수직에 이어 명예박사 학위까지 학교로부터 수여받았다. 우리는 진 교수의 해임을 사적 보복이자 교수 사회 길들이기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학생들은 반발했다. 독문과 학생회는 방학 중 학생총회를 소집해 정치적 이유로 진 교수의 재임용을 거부하고 학생들의 수업권을 침해한 대학 본부의 결정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을 마친 학생들은 항의 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총장실로 향했다. 총학생회장을 필두로 일부 학생들이 따라 들어가 총장실 구석구석에 레드카드를 붙였다. 레드카드는 퇴장을 의미했다. 나갈 사람은 진 교수가 아니라, 여 제자에게 "이렇게 생긴 토종이 애도 잘 낳고 살림도 잘한다"며 "감칠맛 난다"고 발언한 당사자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 레드카드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되돌아 왔다. 총장실을 무단 침입했다는 이유로 징계위원회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은 것이다. 나를 포함해 총 7명의 학생들에게
핸드폰 문자로 소환 통보 메시지가 왔다. 재밌는 점은 그날 기자회견에 참여하지 않았던 휴학생들에게도 문자가 갔다는 것이다. 사정을 알아보니 학생처 직원들이 현장에서 직접 채증하거나 언론 기사에서 확보한 사진을 가지고 독문과 조교들을 불러다 앉힌 뒤 일일이 대조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비슷하게 생긴 학생들을 혼돈한 것이었다. 경찰도 아니고 교육기관이 직원들을 동원해서 평화롭게 진행된 학생들의 기자회견을 징계 목적으로 채증한 것도 모자라, 학생들의 선배 격인 조교들을 불러 놓고 취조나 다름없는 짓을 할 생각을 하다니…. 학교 인수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어느덧 2학기가 시작됐고 진중권 교수 재임용을 위한 싸움은 학생 징계를 철회시키기 위한 싸움으로 국면이 전환됐다. 개강 후 우리는 학우들에게 이번 사태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서명 받을 준비도 하고 이틀 밤을 새
현수막 100여 장을 써 교내에 게시하기도 했다. 부당하게 수업권을 침해당한 상황에서 부당한 징계까지 당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모두가 총력전을 벌였다. 그리고 2차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학교 측의 무작위 채증과 징계 시도에 대한 항의로 마스크를 썼다. 항의도 항의지만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학생처 직원들은 또다시 학생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학생들은 계획한 퍼포먼스를 뒤로하고 교무처장, 학생처장과 면담을 한 뒤 징계위원회에 출석해 항변했다. 면담에서 나는 직원들을 동원해 학생들을 불법적으로 채증하고 징계권을 발동한 대학 당국을 비판했다. 대학 본부로서도 무리한 학생 징계 시도로 인해 안팎의 여론이 안 좋은 상황에서 애초에 표적이 아니었던 학생들을 굳이 징계할 필요가 없었다. 결국 학생들이 박범훈 총장에게 유감을 표하는 걸로 일을 마무리하자는 중재로 총장과의 면담이 성사됐다. 그러나 우리의 유감 표명은 서로에게 궁색한 절충안일 뿐이었다.

결국 학생 징계 시도는 철회됐지만 우리는 진중권 교수를 마지막 공개 강의를 끝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그날 강의실은 몰려든 학생들로 꽉 찼다. 한상준 교무처장은 말했다. "진 교수 정도의 강의를 할 사람은 쌔고 쌨다." 망언을 할수록 학내에서 등급이 올라가기라도 하는 걸까. 자신의 전공 학문도 아닌 분야의 정상급 권위자를 근거 없이 모독하고, 학생들의 수업권을 침해하고도 꼬박꼬박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게 교무처장 자리라면, 그런 자리야말로 할 사람 쌔고 쌨다. 진중권 교수의 재임용을 두고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교수 사회를 이전보다도 경직시켰다. 대학 본부와 재단의 방침에 맞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면 어떤 대가를 치를 수 있는지, 그들은 진 교수를 통해 확실히 보여 줬다.

2009년 11월 - 시국 선언과 독일연구소의 시련

진중권 교수를 떠나 보낸 슬픔이 채 아물기도 전에 독문과에는 또 한 건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인문한국HK 사업에 지원한 독일연구소가
전문가 집단의 심사에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도 4위까지 지원 자격이 주어진 대상자 선정 과정에서 탈락한 것이다. 이는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지난여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정국 때 독문과 교수 전원이 시국 선언에 동참하고, 진중권 교수의 부당한 해임에 강력히 반발한 것에 대해 정치적 보복을 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가장 엄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할 학문 영역에마저 정치권력이 작동한 것이다.

독문과 학생회는 즉각 성명을 내고 "교과부가 자의적 판단으로 학계 전문가 집단이 장기간 합숙하며 산출해 낸 최종 심사 결과를 뒤집은 것은 학문의 영역에 정권이 가치 조정적 개입을 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후 학생들은 교내에서 유인물을 배포하는 것을 시작으로 교과부 앞에서 집회를 열고 항의 서한을 제출했으며, 헌법 소원 및 인권위 진정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정부의 '지식인 집단 길들이기'를 규탄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정작 연구 중심 대학을 강조해 온 총장과 대학 본부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겨울비 맞아 가며 기자 한 명 찾아오지 않은 초라한 기자회견을 이어 간 학생들의 간절한 외침을 총장과 대학 본부는 끝내 외면한 것이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뒤, 한상준 교무처장으로부터 당시 박범훈 총장도 인문한국 사업 관계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며 독일연구소를 위해 노력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독일연구소가 교과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준비할 때 박범훈 총장이 나서서 이를 만류했다는 소식을 이미 접한 터라 그 '노력'이라는 것이 참 괘씸했다. 그의 모습은 2008년 2월 로스쿨 정원 배정 문제에 대해 "정치적 편향으로 이뤄진 자의적이고 작위적인 결정"이라며, 이에 항의하기 위해 머리띠를 싸매고 교과부 앞에서 시위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1년여에 걸쳐 한국연구재단을 상대로 독일연구소가 한 법정 싸움은 결국 패소하고 말았다. 형식 요건 심사 단계에서 소송을 제기한 독일연구소의 당사자 능력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송은 총장이 제기해야만 성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정을 잘 알았던 총장은 보란 듯이 이를 외면했다. 그런 총장의 모습을 보며 그가 말한 '연구 중심 대학'이란 과연 어떤 대학을 말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2010년 4월 - 60m 타워크레인에 오르다

2009년 2학기를 휩쓸고 지나간 두 번의 사태는 재단과 대학 본부가 인문학을 육성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 줬다. 그리고 얼마 후 숨 돌릴 여유도 없이 본부는 기업식 구조조정 계획안을 발표했다. 본부가 내세운 초기 계획안은 기존의 18개 단과대, 77개 과를 10개 단과대, 40개 과·부로 줄이겠다는 것(후에 46개로 조정). 박범훈 총장이 말한 구조조정의 이유는 대학의 학과가 너무 백화점식으로 세분화돼 있어 미래지향적인 학문간 통섭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학과를 없애거나 축소할 수도, 확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부 측이 학문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게 문제였다. 경영대의 정원 확대와 기초학문의 축소. 그들이 말하는 학문의 가치란 무엇일까.

2010년 새 학기를 앞두고 구조조정의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통폐합의 대상으로 지목된 학과들은 반발했다. 그중에서도 독문과, 불문과, 일문과 이렇게 3개 학과에서 먼저 행동에 나섰다. 3개 학과는 개강 후 본관 앞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유난히 쌀쌀했던 그해 봄, 세찬 바람에 천막이 휘어지고 날아가고 수북이 쌓인 눈에 무너지고를 반복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얼음장처럼 굳어 버리는 추위 속에서도 우리는 간절한 호소를 통해 대학의 정책을 바꿔 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박용성 이사장은 "나는 눈이 작아 농성장이 안 보인다"며 우리의 투쟁 자체를 부인하고 조롱했다.

우리는 일방적 구조조정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출범식을 앞두고 본관 앞 연못 주위의 나무를 온통 검은 천과 빨간 천으로 뒤덮었다. 또 '눈이 작은' 사람들도 잘 보일 수 있게 연못을 가로질러 '기초학문 수호'라는 현수막을 크게 내걸었다. 박용성 이사장을 위한 '배려'였다. 학교 측에선 천과 현수막을 철거하지 않을 시 외부 용역을 통해 철거를 대신 집행하고 비용 200만 원을 청구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학교가 금전적 손해를 제시하며 학생들을 협박한 것은 전에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두산의 오랜 버릇이기도 했다. 박용성 이사장은 창원 두산중공업 회장 재직 시절, 노조의 합법적 쟁의 행위에 대해서까지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일삼아 정당한 노조 활동을 탄압했다. 그 때문에 한 노동자가 분신을 시도했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그는 그 기술들을 교육 현장에서도 재현했다.

농성 기간 중 대학 본부와 몇 차례 접촉이 있긴 했지만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소통하기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단지 확정된 구조조정안을 통보하기 위한 형식적인
만남에 그쳤다. 학교는 설득을 시도하기보다 학생들과 교수들을 따로 불러다 앉힌 뒤 회유하는 일에만 골몰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도 더 이상 분쟁을 조정해 볼 여지가 없었다. 이미 재단의 구조조정 강행 의지가 확고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보름 넘게 지속된 우리의 요구에 귀를 닫고 묵묵부답하던 대학 본부와 재단을 풍자하기 위해 대학 본관 앞에 '불통의 벽'을 쌓기로 했다. 수시로 상황을 체크하러 오는 직원들의 감시를 피해 천막 안에서 비밀리에 블록을 쌓았다. 어렵사리 견고한 벽체가 완성됐다. 분주했던 주말이 지나가고 공동대책위원회의 출범식 행사가 대학 본관 앞에서 진행됐다. 독문과, 불문과, 일문과를 중심으로 많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총학생회와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에서 성명서를 낭독하고 불통의 벽을 허무는 퍼포먼스로 행사를 마무리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행사장 한편에서 소란이 일었다. 학생들이 돌아가며 불통의 벽을 깨부수고 있는데 학생처 직원들이 몰래 학생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다 들킨 것이다. 당시 현장에서 학생처 하관용 계장은 징계 목적이 아니라 했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없었다. 당시 하관용 계장을 계속 추궁하다 실랑이를 벌인 총학생회 교육국장 김주식은 그 사건으로 인해 며칠 뒤 퇴학을 당했다. 김주식 퇴학 사건은 대학 사회를 순식간에 공포로 몰아갔고, 대학 본부 앞에 세웠던 농성 천막도 강제 철거됐다. 퇴학을 당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학생들도 더 이상 저항하지 못했다.

그러나 대학 본부의 공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총학생회장과 나에게 징계 절차에 들어가겠다고 통보해 온 것이다. 출석일은 4월 8일. 구조조정 최종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이사회가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그들은 4월 8일부로 비판의 싹을 뽑아 버리고 학생들의 반발이 가라앉길 기대했을 것이다. 교수 사회의 분위기도 학생들과 다르지 않았다. 처음 농성에 돌입할 때 가졌던
자신감은 크게 위축되고 재단의 전방위적 공세 속에 교수들은 하나둘씩 등을 돌렸다. 교수들 간에도 본부에 대한 대응을 두고 언쟁이 잦아졌고 결국 기업식 구조조정에 맞서 보고자 했던 하나의 뜻은 그렇게 허물어져 갔다.

그렇다고 이대로 뒷짐 지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공동대책위원회의 출범식을 정점으로 대학 본부와 재단의 징계 압박은 점점 강해졌고 학생들의 분위기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모종의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구조조정 최종안이 통과되는 가장 상징적인 날을 가장 조용하게 보내게 될 판이었다. 뭔가 분위기를 반전시킬 대책이 필요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총학생회와 문과대 학생회 그리고 독문과, 불문과, 일문과 학생회장들을 만나 고공 시위를 제안했다. 대부분이 처음에는 반대했다. 너무 위험하기도 하고, 이사회 당일 최대한 학생들을 모아 일단 항의하고, 유감스럽지만 징계위원회에도 일단 출석해 항변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김주식의 퇴학 사건에서 보여 줬듯 이미 합리적인 판단이란 걸 잊은 징계위에 굳이 출석할 이유가 없었다. 또 학생들을 모아 항의를 하는 것 역시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학생들을 모으려면 교수들의 협조가 관건인데 이미 재단의 회유와 압력 속에 구조조정에 맞서 보고자 한 교수 집단도 와해된 상황이었다. 김주식의 퇴학으로 인해 총학 역시 '그로기' 상태였다.

4월 3일, 이사회를 앞두고 후배들과 상여를 만들었다. 구성원의 의견을 무시한 채 진행한 이사회의 일방적인 의결이 대학의 가치와 민주주의를 죽게 한다는 의미였다. 고공 시위의 경우 학생회장들을 이사회 전날 밤까지도 계속 설득하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침묵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어느 하나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문과대 옥상 현수막의
페인트는 서서히 굳어 갔다. "대학은 기업이 아니다! 중앙대 기업식 구조조정 반대!" 결국 자정이 지날 무렵 처음 고공 시위를 생각했던 나와 김창인, 표석은 동시에 고공 시위를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새벽 다섯 시. 100m 길이의 천으로 만든
대형 현수막을 들쳐 메고 내가 먼저 공사장의 벽을 넘었다. 10여 분을 쉬지 않고 올라가 뚜껑을 열고 상판에 올라섰다. 발 아래로 슬퍼 보이는 교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새벽녘부터 도서관에 나와 무한 경쟁에 지쳐 뿌연 담배 연기를 토하듯 내뱉는 청춘들. 영정을 앞세우고 상여를 들고 그 뒤를 쫓으며 학우들에게 참여와 관심을 호소하는 후배들. 어색한 정장 차림을 하고 모여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씩씩거리는 사내들. 해가 중천에 다다를 무렵 본관을 빠져 나와 미끄러지듯 노들길로 탈주하는 검은 세단 속의 영감님들. 현수막을 만들고 버려진 페인트 깡통 같은 그들의 텅 빈 교육철학. 모든 게 슬프게 보였다.

다행히 한강대교
아치에 올라간 두 명도 한 시간 가량을 버티다 안전하게 연행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장 걱정했던 안전사고가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많은 취재진들이 몰려와 우리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물론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구조조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 충분히 대학의 기업화에 대해 상징적 파열음을 만들어 냈다.

타워크레인에서 내려오자마자 연행되면서 나는 두산건설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그리고 4일 뒤인 4월 12일, 학교로부터 2,500여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를 받았고 그로부터 한 달 뒤 퇴학당했다. 군부독재 시절에도 시위에 나선 학생들이 연행되거나 구금되면 총장이 직접 학생들을 꺼내 오기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고 한다. 그러나 박범훈 총장은 학생들이 연행도 되기 전에 고소장을 미리 준비했고, 법정형이 더 높은 업무 방해로 기소해 줄 것을 당일 직접 경찰서를 돌며 부탁했다. 독재 정권의 압력에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을 징계하던 엄혹한 시절에도 중앙대는 학생들을 징계하지 않고 오히려 총장이 나서서 학생들을 보호했다. 그게 지난 90여 년간 쌓아 온 중앙대의 전통이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역사와 전통이 일순간에 뒤엎어졌다.

2010년 5월 - 징계 철회를 위한 싸움

퇴학 징계와 손해배상에
맞선 학생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거액의 손해배상 앞에 학생들은 줄 것은 이것밖에 없다는 의미로 학교 본관 앞에서 집단 삭발식을 갖고 돈 대신 잘린 머리카락을 모아 총장실에 전달했다. 그리고 당일 삭발한 머리를 하고 징계위에 출석해 돈으로 학생들의 입을 틀어막고자 하는 대학 당국의 자성을 촉구했다. 당시 부총장이었던 안국신(현재 총장)은 학생들의 시위로 인해 재단의 투자 의지가 꺾일까 우려된다며 학생들에게 무조건적인 반성과 사과를 요구했고 재단의 이사들, 즉 두산의 직원들도 기업의 이미지가 실추됐다며 우리를 질책했다. 그러나 정작 실추된 것은 학교와 두산의 이미지가 아니라 교육기관으로서 대학이 가지고 있던 도덕적 위상이었다.

퇴학 처분 결정 통지서에 찍혀 있는 직인은 총장의 것이지만 그것은 결국 이사장의 의지라고 봐도 무방했다. 더 이상 대학 본부와의 다툼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에 우리는 이 모든 분란을 주도한 두산그룹 본사
앞으로 갔다. 두산과 박용성 이사장을 우리 싸움의 대상으로 전면화하기 위한 자리에서 나는 한 손에 "학교는 이사장의 놀이터가 아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등에 도끼가 꼽힌 채 쓰러져 있는 상황을 연출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두산그룹의 명의로 중부 경찰서에 고발장이 접수됐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퇴학 처분을 무효화시키기 위한 소송을 준비했다. 후배들의 안타
까운 소식을 듣고 법조계에 있는 선배들이 나서 변호인단을 꾸렸다. 그러나 학교는 이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안국신 현 총장이 변호인단 대표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퇴학생들의 소송을 도우면 고시반에 대한 지원을 줄일 것이라고 협박을 한 것이다. 학교 측의 회유는 선의로 후배들을 돕겠다고 나선 동문 변호인단마저 돌려 세웠고, 우리는 결국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도움을 받아 소송을 진행해야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소를 제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측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가처분 소송을 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른바 '학교출입금지가처분'이었다.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학교가 학생들의 교정 출입을 막아 달라고 가처분을 신청한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교육기관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출입금지가처분을 청구했다는 것은 대학이 최소한의 교육적 양심마저 버렸음을 보여 줬다. 그들은 학생 징계 역사에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내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되고 시끄러웠던 학교도 잠잠해져 갈 무렵, 학교는 학생들의
국토대장정 행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국토대장정은 두산이 학교를 인수한 후 학생들의 자치적 행사인 새터를 폐지시킨 뒤 시작한 행사였다. 두산의 행사답게 16박 17일의 일정 중에 박용성 이사장이 전에 회장으로 재직했던 창원 두산중공업 견학도 포함돼 있었다. 나는 국토대장정 행렬을 삼보일배로 뒤쫓기로 결심하고 두산의 국토대장정에 맞선 삼보일배 대장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전북 익산에서부터 두산중공업 공장이 있는 창원까지, 보름 가까이 되는 일정을 함께할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이때 흔쾌히 삼보일배에 동참해 준 친구가 철학과의 박효진과 독문과의 조민호였다.

마침내 국토대장정의 첫날. 학생들이 체육관에 모여 기념
촬영도 하고 들뜬 분위기 속에 출정식을 하던 시간, 우리는 5m 크기의 펼침막을 세 명이서 붙잡고 출정을 알리는 조촐한 기자회견을 마친 뒤 익산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우리는 익산에서 창원까지 약 260km의 거리 중 약 100km의 구간을 삼보일배로 갈 계획이었다. 막상 시작된 일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에스코트해 줄 차량이 없는 우리는 도로변에서 계속 사고의 위험에 노출됐고 열악한 재정 탓에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허기를 달래며 강행군을 이어가야 했다. 뙤약볕에 프라이팬처럼 달궈진 아스팔트에서 절을 할 때면 낮게 엎드린 온몸으로 복사열이 스며 올라왔고 변덕스런 장대비는 몸을 자꾸 무겁게 했다. 온몸은 파스로 뒤범벅이 됐고 밤마다 허리에 붕대를 감아 통증을 견뎌야 했다. 그렇게 악전고투를 하며 창원에 도착한 우리는 비슷한 처지에 있던 두산중공업 해고 노동자들과 공장 일대에서 삼보일배를 한 뒤 공장 정문 부근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것으로 전체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오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두산중공업은 우리의 삼보일배마저 고발했다. 피고발인 명단엔 함께한 박효진도 포함돼 있었다. 친구가 받은 부당한 징계를 철회시키고자 보름 동안 삼보일배의 고행을 감수한 대가는 대기업으로부터 난생처음 받아 본 고발장이었다. 박효진은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함께 연대해 준 이들에게까지 고발장을 날리는 그 잔인함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삼보일배를 통해 몇몇 두산 계열사 노조와 인연을 맺은 우리는 이후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2010년 7월 21일 두산 본사 인근에서 열린 두산자본규탄대회에서 두산 노동자들과 중앙대 학생들은 "노동 탄압 중단, 노동기본권 보장, 해고자 복직, 중앙대 기업식 구조조정 반대, 학생 징계 철회"를 한목소리로 외쳤다. 두산은 노동자와 학생이 함께 집회를 여는 것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두산과 학교 측은 학생들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학생처 직원 3명과 두산중공업 소속 직원 2명을 집회 현장에 보내 동태를 파악케 하였다. 그날 두산중공업 소속 오승준 대리는 '노영수 관련 동향 보고'라는 A4 5매 분량의 문건을 소지하고 있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문건에는 나의 최근 행적에 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명백히 기업에 의한 학생 사찰이었다. 당시 박범훈 총장도 며칠 후 보도 자료를 통해 학생들에 대한 감시를 지시했다고 시인했다. 덧붙여 이번 일은 재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강조했다. 스스로 제자 감시를 인정한 총장의 모습에 한 번 놀랐고, 어떠한 경우에도 재단만큼은 비호하겠다는 그 충성심에 두 번 놀랐다.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8월 중순부터 흑석동 교정에서는 세계비교문학대회가 열렸다. 인문학 장사를 접겠다고
폐업 정리를 마친 점포에서 인문학 축제를 개최한다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었다. 워낙 규모가 있는 행사다 보니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마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마스크를 쓰고 평화롭게 피켓팅을 하겠다고 나섰다. 우리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안국신 부총장과 일부 보직 교수들이 몰려 왔다. 무리 중에는 졸업생이라는 선배도 있었다. 그는 "왜 학교의 행사를 방해하냐?"고 나에게 손가락질을 했고 출입금지가처분을 의식한 듯 "퇴학생은 밖으로 나가라"며 고함을 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국문과 이찬욱 교수였다. 인문학을 가르친다는 교수가 보여 주는 모습에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2학기 개강을 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우편물 한 통이 집으로 날아왔다.
노량진경찰서에 사이버 명예훼손으로 고소장을 하나 접수했는데 그게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예전에 중앙대 학생 커뮤니티 게시판에 파로레라는 필명을 쓰는 누군가가 징계받은 학생들을 비난하는 글을 썼는데(비판의 요지인즉슨, 요즘 학생들이 스펙 쌓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은데 자기들은 데모질이나 하고 있냐는 것이었다) 거기에 우리의 성적 같은 개인 정보를 공개해 고소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무혐의 처분이라는 결과보다 피고소인란에 있는 이찬규라는 낯선 이름에 더 시선이 갔다. 궁금해서 알아본 뒤 알게 된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국문과 이찬규 교수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세계비교문학대회 때 피켓팅을 하던 우리에게 고함을 쳤던 이찬욱 교수가 문득 떠올랐다. 그들을 과연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2011년 1월 - 승소,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학교

전쟁 같은 2010년이 지나가고 2011년 1월 14일. 반년 넘게 벌여 온 퇴학처분 등 무효확인 청구 소송은 우리들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우리는 "학교 측의 과도한 징계권 행사는 무효다"라는 법원의 결정을 듣고 '이제 해결됐다'는 기쁜 마음으로 법원을 나섰다. 나는 오랜만에 수업을 듣는다는 생각에 1학기
등록금을 내고 수강 신청도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복학을 준비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학교 측은 2월 25일자로 징계위원회를 재소집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3월 24일, 학교는 징계를 받았던 3명의 학생들에게 다시 정학 처분을 내렸다. 나는 1년 2개월의 유기정학, 김창일은 1년 6개월의 유기정학, 김주식은 무기정학을 받았다. 대학 측은 이전의 징계에 대해 어떤 입장 표명이나 반성도 없이 중징계를 되풀이했다.

승소를 하고도 단 한마디의 해명을 듣지 못한 채 다시 학교 밖으로 내쳐진 우리의 억울함은 누구에게 호소해야 할까. 시간은 벌써 한 해를 돌아 새로운 봄이 찾아왔지만 우리의 시간은 여전히 징계를 받았던 작년 그 시간에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5월을 맞이한 싱그러운 교정에 우리가 설 자리란 없었다. 그러는 동안 학교는 기초학문 통폐합에 대한 우려의 잡음이 말끔히 사라진 듯, 2018년까지 세계 100대 명문대학 안에 들겠다는 각오를
홈페이지 곳곳에 써 붙여 뒀다. 본부의 한 홍보 직원은 학교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경중외시'에서 '서성한중'의 시대가 열렸다며 애들도 안 하는 서열 놀이를 통해 학교의 발전(?)을 자축했다. 대학 본부가 앞장서서 입에 담기도 민망한 대학 서열의 은어를 공공연히 선전하는 모습이라니. 그 모습에서 너무나도 가벼운 대학의 무게가 느껴졌다.

"정직과 용기를 보여 주는 사람만큼 미래를 맡겨도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두산의
광고 카피다. 그들이 말하는 정직과 용기란 무엇일까. 내가 보여 줬던 용기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사람이 미래다"라던 두산의 광고가 오늘따라 더욱 씁쓸하게 느껴졌다.

노영수. 지난 2010년, 중앙대의 기업식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현재는 진보신당 동작구 당원협의회 사무국에서 일을 돕고 있습니다.

 


 

/노영수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학생

 

 

 

이 기사를 스크랩하면서 눈물이 났다. 나또한 이들과 똑같은 경험으로 지금의 자리에 와 있다. 신자본주의가 대학에 들어와 남긴 것은 무엇인가? 발전인가?

지금의 상황은 난장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모두들 외면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장 자기 먹고 사는 일도 힘드니깐. 살아야 하고, 살려면 돈이 필요하고, 앞날을 위해 오늘도 자본주의 시스템 속으로 기어들어가 야 하니깐.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모두 어디로 머리를 쓰고 있단 말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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