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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보고 듣다(문장배달)

무라카미 하루키 「다리미가 있는 풍경」

by 아프로뒷태 2014. 11. 8.



「다리미가 있는 풍경」 무라카미 하루키

 

"아저씨."

 

"왜?"

"저는 속이 텅텅 비어 있어요."

"그래?"

"네."

눈을 감으니까 아무런 이유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눈물은 차례로 뺨을 타고 내려가 떨어졌다. 쥰코는 오른손으로 미야케 씨 치노 팬츠의 무릎 근처를 힘주어 꽉 움켜잡았다. 몸이 가늘게 부들부들 떨렸다. 미야케 씨는 팔을 그녀의 어깨에 두르고 조용히 끌어당겼다. 그래도 쥰코의 눈물은 멎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구요"하고 그녀는 한참 있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깨끗이 텅 비어 있다구요."

"알고 있어."

"정말로 알고 있어요?"

"그런 것엔 꽤 정통하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보면 대개는 낫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에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닐지도 몰라."

통나무의 어딘가에 스며들어 있던 수분이 증발할 때 나는 쉭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야케 씨는 얼굴을 들어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잠시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어떡하면 되는 거예요?"하고 쥰코가 물었다.

"글쎄……. 어때, 지금부터 나랑 같이 죽을까?"

"좋아요. 죽어도."

"진짜로 죽어도 좋아?"

"전 진짜예요."

미야케 씨는 쥰코의 어깨를 감싸안은 채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쥰코는 보기 좋게 반질반질 닳은 가죽 점퍼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아무튼 모닥불이 모두 꺼질 때까지 기다려" 하고 미야케 씨는 말했다. "애써 피운 모닥불 아닌가. 최후까지 같이 있고 싶은 거야. 이 불이 꺼지고 칠흑의 어둠에 싸이면, 같이 죽자."

"좋아요" 하고 쥰코는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죽을 거죠?"

"생각해 보자꾸나."

"그래요."

쥰코는 모닥불 냄새에 감싸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쥰코의 어깨를 감싸안은 미야케 씨의 손은 성인 남자의 손치고는 작고 묘하게 울퉁불퉁했다. 쥰코는 이 사람과 함께 살아 나갈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는 건 전혀 불가능하니까. 그렇지만, 함께 죽는 거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미야케 씨의 팔에 안겨 있는 동안 차츰 졸음이 몰려왔다. 틀림없이 위스키 탓이다. 나뭇조각은 대부분 재가 되어 부스러져 버렸지만, 가장 굵은 통나무는 여전히 오렌지색으로 빛나고 있었으며, 그 조용한 따스함이 아직 피부에 느껴졌다. 그게 모두 타 버릴 때까지는 시간이 한참 걸릴 것 같다.

"조금 자도 돼요?" 하고 쥰코는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좋아."

"모닥불이 꺼지면 깨워 줄 거예요?"

"걱정하지 마. 모닥불이 꺼지면 추워지니까, 싫어도 눈은 떠진다."

쥰코는 머릿속에서 그 말을 되뇌었다. '모닥불이 꺼지면 추워지니까, 싫어도 눈은 떠진다.' 그러고 나서 몸을 웅크리고는 잠시 동안의, 그러나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출처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문학사상사 2000

 

  

● 작가 : 무라카미 하루키- 1949년 교토에서 태어나 1979년 군조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 소설 『양을 둘러싼 모험』『태엽을 감는 새』『해변의 카프카』『어둠의 저편』 등이 있음. 노마문예신인상,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카프카상 등을 수상함.

 

● 낭독- 김종구 : 배우. 『귀족놀이』『태』『물보라』 등에 출연.
전수환 : 배우. 『관객모독』『리어왕』『가시고기』 등에 출연.
이혜원 : 배우. 『스페인 연극』『모래여자』『미친키스』 등에 출연.

● 음악- 이세하



대학교 다닐 때, 학교 근처에 '37.2'라는 이름의 카페가 있었어요. 영화제목에서 따온 것이죠. 제목은 임신한 여성의 아침 체온이 37.2도라는 데에서 따왔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런 게 아니고 두 사람이 서로 안고 있으면 도달하는 체온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그건 외롭지 않은 체온을 뜻하는 게 아닌가고 말이죠. 정상 체온은 36.5도라고 하지요. 가끔씩, 아주 가끔씩 그 온도는 외로움의 온도가 되기도 해요. 그걸 혼자 있을 때의 온도라고 할 수 있다면. 길을 걷다가 문득 옛날 그 카페가 생각날 때가 있어요. 우리의 체온은 대부분 36.5도, 정상적이죠. 외롭다고 느끼는 것도 그런 점에서는 정상적인 거죠.

 

2009년 1월 8일. 문학집배원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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