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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보고 듣다(문장배달)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 「자기 앞의 생」

by 아프로뒷태 2014. 11. 8.





「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

아이를 입양하는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저능아다. 저능아란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자라지 않기로 마음먹은 아이다. 그러면 난처해진 부모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예를 들어 열다섯 살짜리 아이가 열 살처럼 행동을 하는 식이다. 문제는 그런 아이는 혼자 벌어먹고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 같은 열 살짜리 아이가 열다섯 살처럼 행동하면 학교에서는 내쫓아버리기도 한다. 학교가 엉망이 된다나.

 

"얼굴이 온통 초록색인 게 예쁘구나. 그런데 왜 얼굴을 초록색으로 했니?"

 

그녀에게서 너무 좋은 냄새가 나서 나는 로자 아줌마 생각이 났다. 왜 그렇게 냄새가 다른지.

 

"이건 얼굴이 아니에요, 그냥 헝겊이에요. 우리는 얼굴 같은 걸 만들면 안 돼요."

 

"뭐라고? 안 된다구?"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아주 재미있어하는 그리고 아주 친절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아르튀르 앞에 쭈그리고 앉았지만 사실은 나 때문에 그러고 있었다.

 

"나는 회교도인이에요. 우리 종교에서는 얼굴 같은 거 만들면 안 돼요."

 

"얼굴을 만들면 안 된다니?"

 

"그건 신에 대한 모독이거든요."

 

그녀는 무표정한 채 슬쩍 내게 눈길을 던졌지만 나는 그녀가 속으론 무척 놀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너 몇 살이니?"

 

"처음 만났을 때 말했잖아요. 열 살이에요. 오늘이 바로 내 열 번째 생일이에요. 하지만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요? 나에겐 여든다섯 살 먹은 친구가 있는데 아직 살아 계세요."

 

"이름은 뭐지?"

 

"그것도 이미 물어봤잖아요. 모모예요."

 

그녀는 계속해서 일을 해야 했다. 그녀는 거기가 녹음실이라고 내게 설명해주었다. 화면의 등장인물들은 말을 하는 것처럼 입을 움직이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에게 목소리를 불어넣어주는 것은 그 녹음실 사람들이었다. 어미새들처럼, 그들은 등장인물들의 목구멍에 소리를 심어주고 있었다. 순간을 놓쳐서 목소리가 제때에 나오지 않으면 다시 해야 했다. 그러면 멋진 일이 벌어졌다.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서 살아 있을 때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누군가가 단추를 누르자 모든 것이 뒷걸음질쳐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자동차들이 거꾸로 달리고 개들도 뒤로 달리고, 무너졌던 집에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시체에서 총알이 튀어나와 기관총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살인자들은 뒤로 물러서서 뒷걸음질로 창문을 훌쩍 넘어 나갔다. 비워졌던 잔에 다시 물이 차올랐다. 흐르던 피가 시체의 몸으로 다시 들어가고 핏자국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으며 상처도 다시 아물어버렸다. 뱉은 침이 다시 침 뱉은 사람의 입으로 빨려들어갔다. 말들이 뒤로 달리고 팔층에서 떨어졌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창문으로 돌아갔다. 거꾸로 된 세상, 이건 정말 나의 빌어먹을 인생 중에서 내가 본 가장 멋진 일이었다. 나는 튼튼한 다리로 서 있는 생기 있는 로자 아줌마를 떠올렸다. 나는 좀더 시간을 거슬러올라 아줌마를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었다. 그러자 눈물이 났다.

 

● 출처 :『자기 앞의 생』, 문학동네 2003

 

 

● 작가 : 에밀 아자르 – 프랑스 유명작가 로맹 가리(1914~1980)와 동일인물. 소설『가면의 생』『그로 칼랭』등이 있으며 공쿠르상을 수상함. 로맹 가리는 유서를 통해 자신이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것을 밝힘.

 

● 낭독 – 김용선 : 배우. 연극 『덧치맨』『1月 16日에 생긴 일』『메디아』『나비』 등에 출연.
김상규 : 배우. 연극 『청춘예찬』『경숙이 경숙이 아버지』『민들레 바람되어』 등에 출연.  이상희 : 배우. 연극 『특급호텔』『선녀와 나무꾼』『기차』『봉순이 언니』등에 출연.

 

● 음악 : 한창욱

 



내가 다가갈 때, 엘리베이터 문이 막 닫힙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타려던 버스가 지나갑니다. 그럴 때면, 뭐, 그런 일이 다 있는가 라고 생각하죠. 속상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남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일도 아니죠. 엘리베이터, 버스가 아니더라도 살다 보면 방금 뭔가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있지요. 저 같은 경우에는 작년 초여름이 그랬답니다.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를 걷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피곤하다. 옛날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광화문을 걸어 다니고 싶은데. 그때는 이보다는 더 좋았던 것 같은데. 이제 그 시절은 모두 지나간 모양이다. 옛날처럼 살 수는 없을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요. 만약 그렇게 살고 싶어서 옛날처럼 굴다가는 저능아 소리를 듣겠죠. 저능아 같은 소리지만, 서른아홉이 되기 전의 나날로 돌아가고 싶군요.

 

2009. 2. 26. 문학집배원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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