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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향기

쓰시마 유코 ,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의 딸

by 아프로뒷태 2014. 9. 21.

 

 

<큰 가지가 잘려나가도 계속되는 삶>

다자이 오사무 딸 쓰시마 유코 단편집 '묵시' 출간

(서울=연합뉴스) 백나리 기자 =

 

차라리 처음부터 없었다면 모를까, 있던 것이 없어지면 휑한 기분을 피할 수 없다. 특히나 가까운 존재가 사라지면 빈자리에 뾰족한 고통과 사나운 심사가 사정없이 밀어닥친다.

 

일본 작가 쓰시마 유코의 단편 '묵시'엔 아기 때 아버지를 잃고 크면서 오빠를 잃고 커서는 남편을 잃은 싱글맘이 화자다. 남매를 키우는 여자는 아이들을 데리고 도시 한복판의 일본 정원에 놀러갔다가 고양이들과 맞닥뜨린다.

 

여자는 상상한다. 아이들이 베란다에 먹이를 내놓는다. 수고양이가 한밤중에 베란다에 와서 놓아둔 먹이를 먹고 간다. 아이들은 수고양이를 아버지라고 생각한다. 서로 마주칠 일은 없다. 먹이를 먹으러 오고 먹고 간 것으로 수고양이와 아이들은 서로 존재를 인정한다. 수고양이는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든 도시 생활에서 굶주림을 면하고 아이들은 아버지에 대한 결핍을 채운다.

 

상상치고는 너무 이상한 것일까? 여자는 산속에 사는 괴물과 마을의 남자가 일 년 동안 쓸 참피나무 껍질과 떡 석 되를 교환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이런 거래를 묵시(默市)라고 부른다. 서로 무슨 짓을 하고 사는지 따져 묻고 판단하는 일 없이 괴물은 배고픔을, 마을 남자는 추위를 피할 수 있다.

 

"침묵이 필요하다. 침묵을 지키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 없이 언제든지 거래를 재개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야마오토코(괴물)와 마을 남자 사이의 그런 거래를 묵시라 부른다고 한다.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묵시가 조금도 신기한 일이 아니란 것을 나도 이제 이해하기 시작했다."(29쪽)

 

잔혹한 경험의 그늘에서도 시간은 꼬박꼬박 닥쳐오고 삶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작가는 이런 그늘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 이들이 결국은 혼자 감내할 수밖에 없는 시간을 살아내는 갖가지 방식과 태도를 이야기한다.

 

소설집 '묵시'에는 가지가 잘려나간 이후의 삶에 대한 7편의 단편이 실렸다. 작가의 아버지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1909∼1948)의 딸이다. 작가는 아기 때 아버지를 잃었고 사춘기 때 오빠를 잃은 데 이어 호흡곤란으로 어린 아들마저 잃었다.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서문에 작가는 "제 삶에서 큰 가지가 갑자기 잘려나갔던 시기를 전후해 쓴 작품을 모은 것"이라고 소개했다. "아주 큰 가지가 떨어져 나갔는데도 제 삶의 시간은 계속되었습니다. 어째서 중단되지 않는가. 그 물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중략) 참사가 한창일 때는 감정 자체가 사라져버립니다. 얼마 뒤 감정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할 때 비로소 고통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후 삶의 시간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일종의 전투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시간 속에 던져지면, 아무리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서문 중) 김훈아 옮김. 문학동네. 260쪽. 1만1천원.

 

ㆍ한일중 東亞문학포럼 참가 여성작가 3인 대담

한국·일본·중국 현업작가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는 제1회 ‘한일중 동아시아문학포럼’이 지난달 29일 서울에서 개막했다. 대산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행사에는 3국의 문인 50여명이 모였다. 경향신문은 소설가 오정희씨(61),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딸이자 일본현대본격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쓰시마 유코(61), 중국작가협회 주석을 맡고 있는 소설가 톄닝(50) 등 3국을 대표하는 여성작가들과 문학과 여성을 주제로 지난 1일 대담을 했다. 문학을 업으로 삼은 전업작가라는 동질감, 여성이라는 연대의식으로 뭉친 이들은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주고 받았다.

제1회 ‘한일중 동아시아문학포럼’에 참석한 3국의 여성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톄닝(중국), 오정희(한국), 쓰시마 유코(일본).

 


△첫 다자간 문학교류 행사이다. 3국 작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난 소감은.

오정희 =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특유의 원천적 친화력이 있다. 나는 두 분의 소설을 읽었는데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직접 만나게 되니 그 마음이 일반 독자들하고 다르지 않다.

쓰시마 = 세 나라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게 처음이라 잘 치러질까 걱정이 많았다. 작가들을 직접 대하면서 각자의 개성을 알게 됐다. 같은 일을 하는 친구들이 많이 생겨서 무엇보다 즐겁다.

톄닝 = 성과가 크든 적든 간에 ‘한중일 동아시아문학포럼’이 최초로 열렸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문학포럼의 여러 세션을 다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작가들이 쓴 발제문을 읽어보니 3개국 작가 모두 문학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있었다.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는 등 사적인 교류가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 보탬이 됐다.

△자국의 문학적 특질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다른 두 나라의 문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오정희 = 3국 작가들이 상실이나 고독,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불안은 공통적으로 다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약자나 불평등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는 일본 소설에서 가족을 발견하기 힘든 데 비해 중국소설에는 아직 가족이 있다는 것이 차이로 보였다. 중국현대문학은 루쉰 이후 한참 막혀있다가 최근 들어 갑작스럽게 한국에 소개되고 있다. 나는 문화대혁명의 경험이 중국인들의 문학에 어떻게 반영돼 있는지 궁금했는데 이를 다룬 작품들이 요즘 터져 나와서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쓰시마 = 현재 일본 문학은 상업적인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으로 양분돼 있다. 다행인 것은 일본 유력출판사와 언론사들이 아직까지는 문학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는 중국현대문학이 1992년 여성작가 심포지엄 이후 꾸준히 소개되고 있으나 아직은 양적으로 부족하다. 그에 비하면 한국문학은 좀더 빨리 소개된 편이지만 대중문학 위주여서 아쉽다.

톄닝 = 중국 현대문학은 1978년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문혁 이후 30년간 상흔문학·계몽문학·반사문학이 출현했고 서양문예사조가 수입되면서 소설기법도 유파도 다양해졌다. 그러나 시장경제체제 도입후 대중의 요구에 영합하는 작품이 많이 나오면서 문학의 전반적 수준은 후퇴했다고 본다. 현대중국문학은 아직 세월의 도전을 견뎌야 하고 독자의 검증도 받아야 한다. 일본문학과 문화는 문화대혁명 이전부터 TV나
영화를 통해 중국에 많이 소개됐다. 한국의 경우는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한국문화를 먼저 접했다. 최근들어 신경숙, 은희경 등 한국여성작가들 작품이 소개되고 있다. 오정희 선생님 작품도 번역됐다니 중국에 돌아가면 꼭 읽겠다.

△세 분 모두 20대 초반에 일찌감치 데뷔를 했다. 어떤 계기로 문학을 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또 여성전업작가로서 살아가기란 어떠한가.

오정희 =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다.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으니 자연스럽게 작가의 꿈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일과 가사의 병행은 작가가 아니더라도 자기 일을 가진 여성들이라면 갖는 영원한 딜레마이다. 분명 가족이 주는 힘도 있지만 가족에 대한 연민과 사랑에서 오는 불필요한 죄의식, 또 작가로서 좋은 작품을 쓰고 싶은 욕심 등 양가적 감정에 시달렸다.

쓰시마 = 나는 문학소녀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작가였지만, 어머니는 작가의 삶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께 효도를 하려면 작가가 돼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대학 시절, 글쓰기가 나와 맞는지 알아보려고 대학축제기념 현상공모에 응모했다. 1등을 하면 계속 글을 쓰고 안되면 그만두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선됐다. 내게는 글쓰기가 자랑스럽다기보다는 밥을 하고 요리를 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한 방법일 뿐이다. 나도 결혼을 했지만 작품활동이 늘 중심이어서 자녀들에게 많이 미안했다. 하지만 여성작가가 좋은 작품을 쓰려면 가정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요즘 일본 여성작가 중에 독신을 고집하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낳지 않고 작품만 쓰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부딪치면서 받아들이라고 권하고 싶다.

톄닝 = 나는 어렸을 때부터 책보는 걸 좋아했고 학창 시절 작문시간에 이야기를 잘 지었다. 어느날 선생님이 내 글이 좋다며 전업작가에게 작품을 선보였다. 그분이 내 글을 읽고는 ‘이런 글이 바로 소설이다’라고 평가를 했다. 이를 계기로 작가가 됐다. 첫 평가가 좋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작가로서 가장 어려운 점은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이다. 지금 쓰는 작품이 이전 작품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크다. 나는 지난해 결혼을 해서 두 분처럼 가정생활이나 아이 키우는 어려움 등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한다. 두 분의 말씀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여성작가로서 동아시아 문화공동체를 일구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는가.

오정희 = 성의 문제를 떠나서 지속적으로 사회 내의 취약점, 마이너리티의 문제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자꾸 들춰내서 알리는 것이 작가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쓰시마 = 모두가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을 작품에 반영하고 싶다. 여성이 강하게 표현된 민요나 신화, 설화 등이 각국마다 존재한다. 이를 바탕으로 작품을 쓰고 싶다.

톄닝 = 일단 여성성을 초월해 작가로서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인간의 정신세계를 한층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본다. 작가들이 따스함을 공유하고 조화를 강조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써나간다면 동아시아문화공동체는 저절로 이뤄지지 않겠는가.

 

“마이너리티에 관심 갖는 건 작가의 임무”

 

“사라져 가는 것들을 복구하는 게 내 문학”
“이야기란 자장가 같아 어머니서 딸로 이어져”

제1회 ‘한·일·중 동아시아 문학포럼’에 참가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두 여성 작가가 만났다. 신경숙(45)씨와 쓰시마 유코(61). 1995년 가을 일본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2006년 1년 동안 두 나라를 대표하는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과 <스바루>에 서간 에세이를 합동 연재해 <산이 있는 집, 우물이 있는 집>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냈다. 두 사람의 대담은 지난달 30일 쓰시마가 묵고 있는 서울 시내 호텔 회의실에서 이루어졌다. 쓰시마가 포럼 참가에 앞서 중국을 여행하던 중 감기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신경숙씨는 홍삼과 대추 등을 넣어 직접 만든 ‘감기약’을 병째 건넸다. 대담은 1995년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받은 첫인상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쓰시마=당시만 해도 신경숙씨의 작품이 아직 일본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을 때라 구체적으로 어떤 소설을 쓰는 작가인지는 몰랐지요. 참가한 작가 중 가장 젊은 여성이라고 소개 받았는데, 젊은 작가라면 가장 생기있고 떠들썩할 줄 알았더니 조용하고 어쩐지 부끄러움을 타는 듯한 인상이 강렬했어요.

=그땐 아직 어렸고 그런 큰 행사에 참가하려니 그냥 얼었던 거죠.(웃음) 쓰시마 선생님은 오히려 깊은 눈을 가진 소녀 같았어요. 매우 활달해 보였죠. 복거일씨의 영어 공용어화론에 대해 반박하는 토론을 들으면서 크게 공감했던 기억이 있어요.

쓰시마=서로를 잘 모르면서도 이상하게 끌리는 상대였던 것 같아요. 그 뒤 한국과 일본에서 열린 이런저런 문학 행사에 함께 참여하면서 자주 파트너가 되어 토론을 벌였죠. 행사를 위해 번역된 한두 편의 단편만 읽자니 신경숙씨의 소설 세계를 제대로 만나 보지 못한 갈증을 느끼던 차에 <외딴 방>이 일본에서 출간되면서 그 갈증이 해소되었어요. <외딴 방>은 어려운 시대를 거쳐 온 어린 여성의 경험을 자연스러우면서도 치밀한 구성 속에 담은 소설이었어요. 과거형과 현재형을 오가는 독특한 문체는 제가 신경숙씨와 잡지를 통해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흉내를 내 보기도 했죠. 제 세대만 해도 한국문학 하면 정치적이고 남성적인 이미지가 강했는데, 신경숙씨의 소설은 개인의 섬세한 내면과 바깥 사회의 정치적 상황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어 큰 공감을 주었죠.

신경숙

글 읽지못하는 어머니 표현욕구
어쩌면 어머니 대신 쓰는지도


=저 역시 쓰시마 선생님의 소설은 몇 편의 단편만 접할 수 있었어요. 소설집 <나>가 2003년에 번역되어 나오긴 했지만, 장편을 읽고 싶은 마음이 컸죠. 마침 이번 포럼에 맞추어 두 장편 <웃는 늑대>(김훈아 옮김)와 <불의 산>(전2권, 이송희 옮김)이 한꺼번에 나와 아주 반갑게 읽었습니다. <불의 산>은 두 권 합쳐서 1000쪽 가까이 되는 긴 소설이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아주 잘 읽히는 소설이었어요. 일본의 근현대사를 가족사의 틀 속에서 흥미롭게 풀어 나간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몇 겹의 구조를 지닌 형식도 특이했구요.

쓰시마=아버지(자살한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가 돌아가신 뒤 홀몸으로 저를 키워 오신 어머니가 쓰러지신 일이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이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고향인 야마나시현 고후와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는 영영 묻히는 게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들었죠. 어머니에게 물어보았지만 부질없는 일이라며 안 가르쳐 주시더군요. 결국 저 혼자 현지 취재도 하고 공부도 해 가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요. 쓰는 동안에 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셨죠. 개인적으로는 어머니께 바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은 저희 어머니와는 다른 것 같네요. 저는 글을 쓰다가 풀리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이야기를 시켜 봅니다. 기억 나는 옛날 일을 이야기해 달라면 말씀을 잘 해 주셔요. 어머니는 비록 글을 읽지 못하시지만 마음 속에는 어떤 표현 욕구가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저는 어머니의 말을 대신 쓰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쓰시마=저희 어머니와는 확실히 다른데(웃음), 아마도 제 어머니가 조금 독특한 분이셨던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이야기란 자장가처럼 어머니에서 딸로, 다시 그 딸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럼 아버지는 필요없다는 거냐, 라고 항변한다면, 그런 건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 아버지 또는 남자는 지성, 문화, 문명 이런 것에 관계하는 존재이고, 어머니 또는 모계라는 건 말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는 자양분을 제공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남성 작가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요.(웃음)

=단편에서는 환상적인 문체를 자주 구사하시더니, 장편을 보니까 무엇보다 이야기의 풍요로움에 놀랐어요. 선생님은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이신 것 같아요.

쓰시마=제 생각에는 저보다는 신경숙씨가 더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는 자각이 강한 것 같아요. 아마도 지방에서 서울로 왔다는 경험이 작용한 게 아닐까요. 반대로 저는 도쿄에서 나고 자랐으니까 그런 경험이 많지 않았고.

=저 역시 고향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덜했을 텐데,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하다 보니까 고향의 옛것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자각이 더 날카로워졌던 것 같아요.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들을 어떻게든 소설로 복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제 문학의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쓰시마 유코

제국은 문명, 식민지는 야만?
실상은 정반대가 아니었을까

쓰시마=제 소설 중에 <밤의 빛에 쫓겨>라는 작품은 어린 아들을 잃고서 쓴 작품입니다. 천 년 전 헤이안 시대와 오늘의 이야기를 연결시켜서 써 보았죠. 처음에는 이런 걸 굳이 써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소설을 쓰고 나니까 비슷한 아픔을 경험한 독자들이 공감하는 내용의 편지를 많이 보내 오더군요. 그 전까지는 못 느꼈는데, 그 일을 겪은 뒤 비로소 글 쓰는 사람의 임무, 무언가를 전해야 한다는 그런 임무를 확실히 느끼게 됐습니다.

=<밤의 빛에 쫓겨>도 읽어 보고 싶네요. 제목도 좋구요. 빨리 번역되었으면 좋겠어요. 지난번 서한을 주고받을 당시, 일제 식민지배 때 대만에 간 일본 여성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쓸 거라고 하셨는데 마무리하셨는지요?

쓰시마=다행히도 지금 막 끝났어요. <너무나도 야만스러운>이라는 제목입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자신들이 매우 문명적이며 피식민지인들을 야만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정반대가 아니었을까 하는 게 그 소설의 문제의식입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나이도 먹고 해서 언제까지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쓰고 싶은 작품을 아직 못 썼다는 마음도 있어요. 써야 할 이야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저 역시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의 연재를 방금 끝낸 상태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다음 작품이 세 편쯤 동시에 떠올라서 그 중 어떤 걸 쓸지 고민하고 있는 중이에요. 누군가와 소통하는 데 언어만큼 친밀하고 내밀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되었기 때문에 한·일 문학심포지엄이나 이번의 한·일·중 문학포럼에서 쓰시마 선생님을 비롯해 일본과 중국의 동료 작가들도 만날 수 있게 되었구요. 저도 열심히 쓸 테니까 선생님도 계속 좋은 작품 써 주시기 바랍니다.

쓰시마=고맙습니다. 신경숙씨의 건필을 빕니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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