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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향기

최종심에 오른 것으로 다시 도전한다. 그럼에도 쓰는 건, 내가 즐거워서 이고...당선은 '덤' 일 뿐이고

by 아프로뒷태 2014. 1. 26.

 

 

신춘문예

 

 

한겨레 21기사 중에서

낙선자에 대한 심사평은 인색하다. 매섭다. 올해 <경향신문> 시 부문에서 떨어진 이현미(31)씨는 “내려놓기 아쉬운 분들” 가운데 한 명으로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지난해 <동아일보> 최종심과 닮았다. 당시엔 “이 밖에 선자의 관심을 끈 응모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씨는 “절망이라기보다 희망고문”이라고 말한다. 더 많은 이에겐 경외의 대상이다. 실제 <경향신문> 시 부문 전체 응모작은 5450편이었다. 1인 평균 5편만 쳐도 1090명. 그 가운데 4명만 최종심에 있었다.

한 줄로 충분하다. 절망은 벼려지고 희망은 견고해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새해 첫 절망자 8명 가운데 6명이 과거 한 차례 이상 최종심에서 낙선했다. “상투적인 표현이라는 평가에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고, “신인다운 패기가 부족하다는 말이 여전히 아프게 꽂혀 있다”. 아예 작품명만 언급된 경우도 있다.

 

2000년 첫 최종심에 올랐던 손현승씨는 마법에 걸린 듯 10년이 훌쩍 갔다. “이후 어느 신문 귀퉁이에서도 내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는 그는 “(이번 최종심으로) 10년 만에 팬티를 갈아입은 기분”이라며 웃는다.

중견 시인 나희덕(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씨는 1989년 <중앙일보>에 응모했다. 첫 신춘문예 도전이었다. “혼자 글을 쓰는 게 외롭고 막막했다.” 대학 졸업 뒤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때다. 시인은 “충분히 준비될 때까지 문학과 자신이 만나는 정황이 중요하지, 작가로서의 사회적 레테르는 부차적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문학적 토대를 넓게 쌓는 게 중요한데, 얼떨결에 등단해서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대중의 평가나 제 욕망과 능력의 괴리를 직면해야 하는 진정한 단독자로 벌판에 서야 한 까닭이다.

사내들은 매일 포장집 비닐을 들춘다 뒤통수 맞은 듯 어정쩡한 얼굴로 들어와 선 채로 잔술을 청한다 어둠, 저 많은 까마귀를 낳고도 푹푹 살이 찌는 엄마, 날지 못하는 갈매기의 흰 배를 훔쳐본 날처럼 나는 주먹을 쥔다 늙은 엄마는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누듯 양수를 퍼내온다 사내들은 비대칭이다 왼쪽의 근친과 오른쪽의 군침이 다른 모습이다 마주 보지 않은 채 엄마의 동공을 통해서 상대의 반대쪽을 확인하고 있다 사내들이 엄마에게 무정형의 신호를 보낸다 먹고 싶어, 줄래? 엄마는 뒤 돌아눕고 나는 칼을 준비한다 바지춤을 내리며 전진하는 사내들, 엄마가 칼로 몸에 거미줄을 그린다 다리에 줄무늬 스타킹을 그린다 탕탕 머리를 쳐박고 까악까악 시체를 파먹는다 사내들은 뭐 이런 엿 같은 경우가 있냐는 듯 탁탁 잔을 놓고 사라진다

엄마 곁에 앉아서 엄마라는 희귀병을 본다

-이현미, ‘엄마가 울면 엄마의 심장을 때려야 한다’ 전문

 

 

당선이 곧 희망을 뜻하지도 않는다. 소설가 방영주씨는 “신춘문예 당선 뒤 막상 원고 청탁 하나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등단 뒤 학원강사를 하거나 다른 직장생활에 치여 글을 못 쓰는 이들이 주변에도 있다”고 말한다. 이승하 시인은 “중앙지 신춘문예 당선자만 따져도 80~90%는 2~3년 안에 잊혀진 존재가 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른바 ‘신춘 고아’ ‘문단 미아’다.

 

작가 지망생들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헤어나올 수 없다. 문학은 이를 ‘중독’이라 이른다. 오영이씨는 2008년 <한국소설> 신인상 최종심에 오른 5편 가운데 2편이 제 것이었다. 당선만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는 “안 아픈 척하면서 정작 얼마나 아픈지 말할 수 있어 소설이 좋다”고 말한다. 아니, 이미 소설을 살고 있다. 처음 신춘문예에 응모하던 2002년 직접 신문사에 원고를 냈다. 기자가 서류봉투를 책상에 툭 던진다. “소설 속의 덜떨어진 여자 하나는 낯선 곳에 버리고 가는 느낌”에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매다 앓아누웠다.

투고를 통해 ‘작가’임을 확인한다

최아무개(31·필명)씨는 지난 1월5일 문예지에 또 다른 응모작들을 보냈다. <경향신문> 시 부문 심사평을 뒤늦게 읽은 날이기도 하다. 중학교 교사인 그는 “최종심에 오른 내 이름은 절망이거나 좌절이 아닌, 계속해서 쓰게 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글판을 떠날 수 없다. 밤낮으로 취해 있다. ‘왜 글인가’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란 질문과 같다. 정아무개씨는 “글을 잊은 지 30년 만의 유희”라며 “성과가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말한다. 전업주부 강가영씨는 신춘문예 첫 도전지로 <부산일보>를 골랐다. 응모란에서 유일하게 생년월을 묻지 않아서다. 시 부문 최종심까지 올랐다. 50대라고만 자신을 소개한 강씨는 “도전 자체가 하나의 기쁨이며 축제”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새해 첫 절망에 이들은 되레 감사한다. 찰나지만, 존재 증명이 올돌한 덕분이다. 이현미씨는 2008년 <창작과 비평> 신인문학상 시 부문 최종심에 올랐다. “시를 쓰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등단한대도 이만큼 되진 않을 거라 확신한다.” 심사평이 실린 문예지를 사려고 서점 몇 군데를 헤집었다. “가만히 책장을 넘기던 떨림이 아직도 생생해요. 누군가 나를 알아봐준다는 기쁨이었죠. 심사평을 달달 외울 정도였는데, 그때 시는 고쳐서 다른 곳에 응모도 하지 않고 보관 중이에요. 등단을 하게 되면 제 첫 발표작이 될 겁니다.”

신산의 기억도 달다. 기억엔 “글 한 줄 못 쓰고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서럽게 울다가 메모장을 꺼내 애먼 제 이름만 까맣게 써내려갔던 일”(김승원·<부산일보> 시 부문) 따위 창작의 고통부터 “밤새 열 편을 쓰기도 하고, 1년에 한 편을 쓰기도 했다. 20대 초반에 되려니… 아니 20대 중반을 넘기지는 말자, 그러다 취직을 하기 전에, 결혼을 하기 전에, 아이를 낳기 전에 등단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마음뿐이었던 것 같다”(최아무개)는 삶의 무게도 자리한다.

“글을 쓰고 작가의 길을 선택한 이상 결혼 같은 건 접어두기로 했습니다. 가족들이 가끔 괴롭히지만 귀를 막고 있어요. 모든 게 마찬가지지만 글을 쓰려면 많은 것들을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경향신문> 소설 부문에서 떨어진 유이지안(39·필명)씨의 말이다. 20대 전부를 은행원으로 보냈다. 글을 쓰고 싶어 그만뒀다. 5년째 등단에 도전 중이다.

세상은 코끼리가 없는 동물원과 같다. 진짜 같은 건 어디에도 없고, 진짜를 흉내 낸 사진 같은 것들이 걸려 있을 뿐이다. 아저씨의 신념은 언제든지 부수고 다시 만들 수 있는 블록 같은 거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아저씨를 향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유이지안, ‘코끼리가 없는 동물원’ 일부

 

“당선자만 기억되는 더러운 세상에서, 낙선자들의 이야기를 싣고 싶다”는 농담 섞인 취재 요청에 낙선자들은 모두 웃었다. 하지만 <세계일보>와 <한국일보> 최종심 낙선자에겐 물을 수조차 없었다. 전화번호도 관리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낙선자는 잊혀져야 하는 이름이다.

낙선 기간이 길수록 희망과 절망이 어찌 교차할지 알 수 없다. 이현미씨는 “한 10년쯤 더 낙선자로 머무른다면 그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도전 10년차 손현승씨가 대답한다. “당선이 되었다고 시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당선이 안 됐다고 시인이 아닌 것도 아니죠. 다만 예전처럼 내 시가 최고라는 자만심을 버리려고 합니다. 시를 쓰는 만큼은 나를 스무 살 청춘으로 돌려놓는 신춘문예가 그저 고맙지요.”

 

9년차 오영이씨도 말한다. “아홉 번이나 투고를 한 건 1년에 한 편이라도 심혈을 기울인 작품을 낳자는 뜻이 있어요. 해마다 열병을 앓는 작가들 틈에 끼어 자극을 받고 싶어요. 투고를 통해 정체성이 찾아질 것 같고, 스스로 작가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거든요.”

하나의 진리는 절망도 희망도 영원하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함돈균 문학평론가는 “최종심의 경우 심사위원들의 선호도에 따라 갈리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실제 올해 <경향신문> 시 부문 최종심 낙선자 강윤미(31)씨는 <문화일보>로 등단했다. <한국일보> 시 당선자 김성태(24)씨는 <조선일보>에서 떨어졌다.

“쉽게 희망에 도달하는 예술은 의심스럽죠”

1월은 절망의 달이다. 취업 실패자, 신춘문예 낙선자, 입시 실패자가 쏟아진다. 그래서 새해 첫 절망자들이 부르는 희망가는 이름 없는 루저들에게 건네는 응원이기도 하다.

“나는 쉰 살이다. 또 중증의 환자다. 그래도 매일 글을 쓴다. 절망과 희망의 경계선에서 욕망의 임계점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러니 포기하자 말라. 너희들은 아직 젊으니 나보다는 가능성이 많지 않은가? 어떤 선택이든 나는 당당해지고 싶다. 죽음 앞에서도.”(정아무개)

“저는 쉽게 희망을 말하지 못하겠어요. 누군가에게 힘내라는 말도 잘 안 해요. 쉽게 희망에 도달하는 예술을 보면 그가 가졌던 절망을 의심하게 돼요. 덜 절망했거나 타협하려 한다고 말이죠. 올해 실패한 입시는 내년에도 희망이 없을 수 있어요. 정리해고와 취업 실패는 자본주의가 극단화될수록 심각해질 거예요. 저는 영원히 새해 첫 절망자로 남을 수도 있고요. 그래도 한마디는 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이현미)

 

 

 

 

최종심에 오른 것으로 다시 도전한다.

그럼에도 쓰는 건, 내가 즐거워서이고

당선은 '덤'일 뿐이다.

 

 

한국일보 2011년 공동수상 고열

 

수인은 투명한 플라스틱 숟가락에 요리용 럼주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8ml를 최대로 하는 작은 약숟가락 안에서 럼주는 순식간에 불룩하게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파괴될 듯이 럼주의 표면은 그녀의 맥박과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미세하게 떨렸다. 팔꿈치를 식탁 위에 괴고 수인은 오로지 럼주의 작은 흔들림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흔들림이 오히려 수인의 안녕을 조절해주는 듯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간이등의 좁은 빛 테두리 아래에, 이 광경은 누군가 단단히 오므려 매달아놓은 물주머니처럼 팽팽하고 묵직하게 집안을 잡아당겼다.

 

문득 수인은 입속에 럼주를 털어 넣었다. 짤막한 숟가락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숟가락을 혀로 천천히 핥아 만졌다. 어떤 상념들이 끊이지 않고 몰려들어 수인에게 기계적으로 이 동작을 하도록 만들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외벽에 거의 짓눌리다시피 서 있던 개오동나무와 같은 것이 떠올랐다. 올 여름 태풍이 오는 징후로 조금 거세진 바람에 개오동나무는 성급하게 쓰러져버렸다. 꺾인 나무는, 낯설고 덩치 큰 어른처럼 확대되어 1층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흉물스럽게 나부끼던 잎사귀의 뒷면들이 이상하게 보기 좋아서, 수인은 좀 더 오랫동안 사람들이 그 나무를 방치해두길 바랐다. 3개월 만에, 죽은 개오동나무는 적당한 길이로 잘리고 한 데 묶여, 서 있던 자리에 다시 놓였다. 잎사귀들은 저절로 사라져버렸다. 수인은 몇 번 더 숟가락에 럼주를 채웠다 비우는 일에 시간을 내맡겼다. 처음과는 달리 타액이 묻은 숟가락에서 럼주는 쉽게 쏟아져버렸다. 차가운 럼주 병의 목을 잡고 적당히 기울여 멈추는 일에도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인은 개수대에서 약숟가락을 물로 헹궈냈다. 냅킨 한 장 위에 올린 약숟가락은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듯이 너무도 가벼웠다. 병원에서 처방을 받아온 지 이틀. 아기에게 5ml씩 6시간마다 딸기 향으로 위장된 해열제를 먹이면서, 수시로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아냈다. 특별히 나아진다는 느낌보다는 응급 상태의 고열을 간신히 면하고 있는 듯했다. 체온계를 아기의 귓속에 밀어 넣으면 열 번에 다섯 번은 경보음이 울렸다. 작은 디지털 화면에는 매번 확성기 모양을 기호화 한 경고 그림이 깜박거려 수인의 간호를 채찍질했다. 수인은 약숟가락을 냅킨으로 꾹꾹 닦아서 티셔츠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아침은 아무렇게나 지나가버렸다. 수인은 눈 뜨자마자 커튼 블라켓을 고정시키는 천정 부분을 올려다보았다. 이전에 살았던 사람, 그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못 박았던 자국이 뒤죽박죽 얽혀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는 그것을 각각 가려내는 장난어린 숙제를 하곤 했는데 규칙성을 찾아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어그러진 생활 패턴 속에서 수인은 오히려 경쾌해져 있었다. 아기는 곧잘 받아먹던 연식조차 입에 대려 하지 않았다. 한밤중에는 오한으로 끙끙댔지만 날이 밝으면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때문에 수인이 아침마다 해내던 일들에서 오히려 자유로워진 것이었다. 채 잠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머리도 묶지 못하고서 개수대에 기대어 감자나 양파 껍질을 벗겨 내지 않아도 되었다. 얼린 고기 덩어리에서 비닐을 제거할 때 팔목에 튀는 얼음 알갱이들로 불쾌해지는 일도 없었다. 물을 미지근하게 데우고 컵홀더를 준비하는 일은 물론, 아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수납장을 조심스럽게 열고 닫고 할 필요도 없었다. 행복이란 뭔가요, 당신과 나 눈물짓게 하는 바로 그것. 수인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흥얼거렸다. 9시 전후에 눈을 떠, 신발장 앞에 서서히 파고드는 햇빛을 바라보는 일. 그 빛이 평행사변형으로 변해가며 조용히 소멸하는 과정을 온전히 지켜볼 수 있는 삶이라니. 그것은 원래 내 것이 아니었나, 수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밤새 아기를 간호하는 일로 고단해 있었지만 산뜻해진 하루하루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다. 완성된 평행사변형의 빛은 점점 바닥 쪽으로 기어 내려오다가 모서리를 만나 단번에 쪼개져버렸다. 그리고 어느 사이 더 길고 가늘게 반짝거리면서 우산꽂이 속으로 들어갔으나 다시 보면 여전히 우산꽂이 밖에서 서성거렸다. 쪼개진 작은 빛이 원래의 몸체를 따라 집안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아기는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수인은 머리맡에서 해열제 먹이는 시간을 기록해둔 쪽지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소독해 두었던 젖병을 흘끔 확인하고는 좀 더 누워 있기로 했다. 아기가 깨 울기를 기다렸다.

 

수인은 젖병을 공중에 추켜세워 아기가 분유를 몇 ml나 남겼는지 확인했다. 아기는 정확히 180ml를 빨고 나서 곧장 다시 잠들어버렸다. 아기의 분신과도 같은 인형, '와와'는 며칠째 커튼 뒤에 가려져 입을 다물고 있었다. 수인은 와와를 창밖으로 내밀어 먼지를 털어내고 입속에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와와는 오렌지색 부직포 혀로 수인의 손가락을 옥죄었다. 수인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아 와와의 탁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잠시 서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기에게 목이 졸린 채 실종되기 일쑤였던 와와. 그런 와와가 같은 자리에 꼼짝 않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제 스스로 짖으면서 커튼 뒤로 걸어 들어간 것처럼 와와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던 것이다. 와와의 배 안쪽을 쓸어내리자 털로 감춰져 있던 건전지 덮개와 on, off 버튼이 드러났는데, 어딘가 부러져 달그락거렸다. 수인은 와와를 귀에 대고서 가볍게 흔들어보았다. 와와가 갑자기 멈췄을 때 아기가 했던 행동을 흉내 내 본 것이다. 수인은 중병 걸린 사람의 잠든 모습을 확인하고 걸어 나오는 사람처럼 와와를 커튼 속에 잘 가려두고서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탁자 위에는 아기 이름을 휘갈겨 적은 약 봉투와 1회분씩 점선으로 나뉜 가루약 일절, 네 번 접힌 처방전, 세 번 접힌 보험증이 병원 다녀온 날 그대로 놓여 있었다. 또한 작은 투입구가 있는 중간 마개와 그보다 더 작은 뚜껑이 빈 플라스틱 병과 분리되어 놓여 있었다. 수인은 새끼손톱만한 녹색 뚜껑을 손가락 끝으로 슬쩍 밀어 보았다. 뚜껑은 유리판 위에서 크게 반원을 그리더니 궤도 안에서 점점 짧은 동선으로 빨라지다가 멈췄다. 또 하나의 플라스틱 병에는 붉고 걸쭉한 액체가 4분의 1 정도 남아 있었는데 탁자유리 아래 끼워둔 사진을 가리고 눕혀져 있었다. 사진 속 아기와 전 남편은 플라스틱 병 속 해열제와 뒤섞여 흐릿하게 뭉개졌다. 그 옆으로 따로 오려낸 것처럼 수인이 떨어져 앉아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기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한 두 시간 간격으로 젖을 물리던 때였다. 수인은 사진 속 그날의 상한 머루포도를 떠올리며 의자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진열장 위에서 바구니 채로 상해갔던 머루포도의 냄새. 수인은 사진을 가리고 있는 플라스틱 병을 세웠다. 전 남편의 품속에 아기는 꼭 안겨 잠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수인은 왼쪽 다리를 들어 올려 의자 위로 끌어안으면서 식은 발가락들을 손으로 쥐었다. 엄지발톱 속이 꽤 오래전부터 멍들어 있었다. 수인은 별러 왔던 매니큐어를 바르기 위해 탁자 밑 서랍에서 살구색 매니큐어를 찾아 탁자 위에 올렸다.

 

몇 번씩 덧칠해나가자 감쪽같이 발톱의 멍든 부분이 가려졌다. 수인은 무릎에 턱을 괴고서 매니큐어가 칠해진 열 발가락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수동적인 기분으로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허공의 손이, 힘을 주어 수인의 머리 방향을 돌려놓으려 했다. 그 손이 이전에 받쳐 들고 있던, 안락을 관장하던 공기주머니는 거실에 내팽개쳐져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곤 해왔다. 수인은 놀라지 않았다. 플라스틱 기린 의자에 아기가 와서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기가 한 번 떨어진 뒤로, 미끄럼틀의 미끄러져 내려오는 부분을 분리해 버리고 의자로 써온 완구. 아기는 평소 이 의자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마음에 차는 곳에 앉아 있곤 했는데 지난 며칠 동안 의자는 인터폰 아래 붙박이처럼 놓여 있었다. 그 완구의 일부처럼 조그맣게 의자 속에 안겨 있는 아기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아기는 담담한 눈빛을 수인에게서 거두지 않으면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부어 오른 눈두덩과 좀 더 수척해진 몸체. 18개월 된 아기의 표정은 괴상할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살짝 벌어진 입 속에는 막상, 인조 솜뭉치가 줄줄 딸려 나올 것처럼 천진한 어둠이 엿보였다. 아기의 호흡에 따라 들썩이는 앞섶이 과장되어 보였다. 수인은 앞섶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웃고 있는 원숭이 얼굴을 주시하며 조금 더 머뭇거렸다. 그러나 아기는 평소처럼 울면서 달려오지도 하품을 하면서 두리번거리지도 않았다. 수인은 두 팔을 작게 벌렸다. 아기는 바람에 나부끼는 물체와도 같이 걸어와 수인의 품에 안겼다. 수인은 아기의 머리카락들 사이에 턱을 대고서 열을 가늠해보았다. 아기의 머리통은 여전히 뜨끈뜨끈했다. 체온계를 귓속에 넣자 아기는 머리를 가로저어 싫은 티를 냈다. 그러나 곧 체념한 듯이 '삐' 소리가 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아기는 내내 작동기차를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수인이 흡족할 만큼 음식도 받아먹었다. 화물칸에 귤 두 개를 싣고서 기차는 8자 모양 레일을 몇 번이고 오갔다. 기차 밑면의 작은 스피커에서 기적 소리가 그럴싸하게 울려 퍼졌다. 어디서 따온 소리일까, 수인은 듣기 좋아서 아기 어깨를 매만졌다. 그리고 때로 선로 변경 막대를 제쳐, 기차가 터널을 지날 수 있도록 했다. 터널 앞에 서 있는 정사각형 블록에 실무자가 꽂혀 있었다. 기차를 향하여, 모든 일상을 생략하고 손을 흔드는 영원한 친구. 실무자의 앞과 뒤가 모두 앞모습이어서 아기는 매번 양쪽에 대고 손을 흔들었지만,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수인은 정면으로 실무자의 옆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복부 비만인 실무자의 파란 제복을 보며 잠시 몸서리쳤다. 실무자는 속이 텅 빈 플라스틱 두 조각을 꽉 끼어놓은 조립품에 불과했다. 그 이음새가 앞과 뒤를 미세하게 분리하면서 몸통 전체에 길고 긴 테두리를 이루고 있었다.

 

수인은 정리함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아기 독사진 한 장과 미니 굴착기를 귤 대신 화물칸에 실어주었다. 아기는 얌전하게도, 뭐랄 것 없이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수인은 가슴 위로 손을 얹어 주머니 속에 있는 약숟가락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탁자에서 플라스틱 병을 들고 개수대 앞으로 갔다. 먼저 꽉 잠긴 녹색 뚜껑을 열고 플라스틱 병을 누르자 해열제 약물이 약숟가락으로 빨려나왔다. 다음은 약 봉투에서 1회분 가루약을 한 봉 뜯어 약숟가락 위에 쏟았다. 마지막으로, 날이 두 개 뿐인 작은 포크로 약숟가락의 둥글넓적한 곳을 천천히 저었다. 탁한 약물이 약숟가락에 명시된 '7ml'라는 작은 글씨를 지웠다. 수인은 엉뚱한 방향으로 솟아 있는 개수대 수도꼭지의 그림자를 보면서 계속해서 약물을 저었다. 또한 타일 벽 밑으로 비스듬히 길어진 그릇 선반의 그림자를 보면서도. 그릇을 받치고 있는 선반의 그림자는 규칙적인 쇠의 구조가 끊어지고 휘어져 그릇들이 공중에 떠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선반이며 그릇들, 그것들을 매달아 놓은 그림자까지 모조리 쏟아져 박살이 날 것만 같아 보였다. 수인은 수도꼭지 막대를 조금 위로 올려 물이 조용히 흐르도록 했다. 약숟가락을 물줄기 아래 가져갔다. 탁한 물방울들이 튀어 오르면서 약숟가락에 담겨 있던 약물은 순식간에 개수대 하수구 아래로 흘러 들어갔다. 약숟가락은 곧 없어질 듯이 투명해져서 계속 물줄기를 흘려보냈다. 수인은 물을 잠갔다. 그림자들은 여전히 수인의 손동작을 흉내 내고 있었다. 수인은 손을 헹구고 약숟가락을 냅킨에 닦아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손바닥에 조금 남아 있는 물기를 바지에 문지르면서 아기 옆으로 걸어갔다. 자리를 비운 사이 화물 기차는 다시 귤 두 개를 싣고 레일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수인은 갑자기 눈떴다.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밖은 어두워져갔다. 수인은 미동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남아 있는 검푸른 낮의 기운은 허허롭게 거실 이곳저곳에 서 있었다. 부드럽고 주기적인, 수인의 날카로움을 포박해 오직 둥글게만 유지하려는 압박감에 수인은 좀 더 주의를 기울였다. 아기는 수인의 등 뒤에 달라붙어 잠들어 있었다. 해변은 얼마나 지겨운가. 수인은 다시 눈을 감았다. 벼랑 위 나무 한 그루가 불 타 없어진 해변. 해변을 더욱 지겹게 하는 것은 해변을 가득 매운 그 둥근 광물질들이었다. 수인은 조용히 화가 났다. 해변에서는 깨진 병조각조차도 날카로움을 유지하지 못했다. 수인은 해변을 북북 찢어버리고서, 그 둥글고 온순해진 돌들을 바닷물 속에 처박아버리고 나서야 다시 눈을 떴다. 돌들의 굉음과 함께 해변은 물속으로 한꺼번에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밖의 육지, 또 그 밖의 육지가 해변을 대신하여 해변이 되어갔다. 아기의 복부는, 커다란 손처럼 섬세하고 뜨듯하게 수인의 등허리를 밀었다 놓았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쳤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인은 자신의 옆구리에 놓인 아기의 가는 팔을 가만히 치우고 일어나 앉았다. 체온계는 아기의 귓속에서 종전과 다른 경보음을 자꾸 건져 올렸다. 그것은 측정 기준 이하의 온도를 측정할 때 나타나는, 고열과는 전혀 다른 경보였던 것이다. 거뭇거뭇해져가는 사위 속에서 잠든, 그녀의 아기를 어둠과 구별해내는 일은 이제 더는 어려워졌다.

 

창을 열자 쓰레기장에 내놓은 와와와 장난감 일절이 한눈에 들어왔다. 와와에게도 눈이 쌓였다. 와와는 덤프트럭의 노란 적재함 속 어딘가, 눈덩이에 파묻혀 의연하게 서 있을 것이었다. 골목 어딘가에서 헛돌고 있는 바퀴소리가 계속해서 뭔가를 파헤쳤다. 갑작스런 굵은 눈발은 커다란 분리수거 통의 지저분한 뚜껑을 모두 가렸다. 수인은 패딩 점퍼를 걸치고 투명창 마저 열었다. 과일 바구니 손잡이에 멋을 낸 오래된 리본이 눈발과 함께 휘날렸다. 출산 기념으로 전 남편이 사들고 왔던 과일 바구니. 수인은 그 바구니에 1년간 다른 계절의 옷들을 담았었고, 그만도 못하게 되었을 때 폐전선과 버리기 애매한 전자 소모품 등을 담아뒀었다. 그것마저도 다 버리고 난 뒤에, 수인은 빈 과일 바구니를 그냥 창고에 보관했다. 바구니에 담긴 잡동사니 위에 순서 없이 눈이 쌓였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제트기 여섯 대, 오감발달 딸랑이 6ps와 물오리를 함께 넣어 뚜껑을 덮은 둥근 통, 150mm 욕실화 한 켤레, 소꿉용 절굿공이, 말하는 덤프트럭과 굴착기 한 세트. 긴 막대 끝에 매달린 가위바위보용 노란 손바닥이 폭설을 저지하는 단호한 손짓으로 바구니 구석에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수인은 이삿짐센터에서 소개 받은 남자에게 다시 확인 전화를 걸었다. 남자는 고물상에 중고 물품을 되파는 일꾼이었다. 막 신호가 가는 와중에, 일꾼은 트럭을 몰고 골목에 들어서고 있었다. 수인은 방범창 사이로 손을 내밀어 초행인 일꾼에게 흔들어보였다. 그제야 운전석에서 일꾼이 고개를 운전대로 가까이 대고 밖을 올려다보았다. 일꾼은 집 앞 담벼락에 차를 돌려놓고 시동을 껐다. 수인은 계단을 텅텅 울리는 일꾼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조금 더 그대로 있었다. 트럭 뒤의 빈 화물칸에는 푸른 천막을 벽돌로 눌러 놓았고, 물건들을 동여매기 위한 고무밧줄 더미도 칭칭 감겨,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어느 곳에나 눈이 쌓였다. 수인은 창문을 닫았다.

 

무게 때문에 옮기지 못한 전동침대 외에는 모두 거실로 내온 참이었다. 수인은 미리 적어 놓은 물건 목록을 일꾼에게 보여 주면서 말을 꺼냈다. 일꾼이 목록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동안 수인은 흘낏 일꾼의 얼굴 생김새를 훑어보았다. 잠깐 사이에 이 중년 남자의 야구모자에는 눈이 묻어 있었다. 일꾼은 가슴 주머니에서 단추를 열고 펜을 꺼냈다. 그리고는 목록을 짚어가며 물건 상태를 점검하고 매입 가격을 계산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절차가 생겨났다. 수인은 이런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따분해져서, 몸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여유로워져서 팔짱을 낀 채로 일꾼의 동선을 지켜보았다.

 

"그건 조립만 다시 하면 돼요."

 

둘러보던 끝에, 일꾼의 눈이 미끄럼틀에 멈췄을 때 수인은 재빠르게 덧붙였다.

 

"이런 건 자리만 차지하고 단가가 낮아서 안 되겠네요."

 

일꾼은 수인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잘라 말했다. 게다가 목록 중에 대부분이 그런 이유로 탈락될 만한 것들이라고 지적했다. 수인은 일꾼의 발목을 단단히 여미고 있는 작업복 하의를 보고 있었다. 7만원. 그나마 서랍장, 식탁세트, 전동요람 정도의 목록 때문에 좋은 값을 쳐줄 수 있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또한 그것이 자신에게 그리 큰 이득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늘 하루가 조금은 허탕인 셈이라는 뉘앙스까지 던져줬다. 일꾼은 볼펜 끝을 손바닥에 톡톡 두들기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전동요람은 일 년 전 가격으로 이십 만원 상당의 것이었고 나머지 물건들의 가격을 다 합쳐 어림잡아도 50만원은 훌쩍 넘기는 물건들이었다. 게다가 오늘같이 눈이 많이 오는 날 누가 고물을 내다 팔겠는가? 수인은 기린 의자의 팔걸이 부분을 만지면서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당장 이 버릇없는 일꾼을 쫓아내고서 현관문을 쾅 닫아버리고 싶었다.

 

"그냥 가져가세요."

 

수인은 일꾼이 쓸모없다고 폄하한, 수인에게 그동안 없어서는 안 됐던 물건들을 모두 이 집안에서 끌어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일꾼은 뜻밖의 제안에 잠시 시간을 끌었다. 수인은 일단 일꾼의 손에 들린 메모를 돌려받았다. 일꾼이 탈락시킨 물건들은 거실 한가운데 크고 작게 솟아 있었다. 수인은 갑자기 그 목록과 실재 물건이 일치한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여겨졌다. 도살되는 가축에게서 끝없이 쏟아져 나온 배창자처럼 믿기지 않는 규모였던 것이다.

 

눈은 그쳤다. 일꾼은 차례로 물건들을 날라 트럭에 실었다. 수인은 안방 창문 앞에 줄곧 서서 트럭에 실린 물건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장 값이 나가는 것 순서로, 트럭의 앞쪽을 채워나갔다. 수인이 한 번 씩 목록을 검토했다. 주방 옆 서랍장이 있던 자리가 비고 나면 덩치 큰 냉장고를 그리로 옮길 셈이었다. 그리고 주방을 차지하고 있는 4인용 식탁은 버릴 참이었다. 그러면 냉장고가 가리고 있던 베란다 창이 훤히 드러날 것이었다. 테이블을 하나 구입해야지, 수인은 그곳에 앉아 베란다 창으로 난 연통에서 콸콸 빠져나가는 연기가 어떻게 사라져가는 지를 종일 보고 싶어 했었다. 다음으로는, 창고가 텅텅 비어 있었다. 수인은 창고를 어떻게 활용할 지 생각해보았다. 물을 자주 안 줘도 잘 자라는 화분이나 몇 개 가져다 놓을까, 그러나 키우고 돌보는 일이라면 넌덜머리가 났다. 위층 사람들이 한 것처럼 테라스로 개조해도 좋을 것이었다. 창고의 작은 창문에는 위층에서 기르는 식물에서 가끔씩 길쭉한 잎사귀가 떨어져 놓여 있곤 했다. 수인은 다 쓴 티슈 통을 채우거나 기저귀를 가지러 창고로 갔다가 그 잎사귀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안방 창으로도 볼 수 있지만, 창고 쪽에서 담 너머 감나무가 더 시원하게 보였다. 수인은 숨을 크게 뱉으면서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끌어올렸다. 담 너머 감나무는 겨울에도 건강한 모습이었다. 간혹 그 단층집 사람들이 부주의하게 오가는 모습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었다. 수인은 가벼운 기분에 젖어 앞으로는 소파에서 잠들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토크쇼를 연이어볼 수 있는 채널을 검색하는 일도 잊지 말아야 했다.

 

일꾼은 마지막으로 노끈에 묶인 책 한 질을 보조석에 실었다. 한 권이 빠진, 23권짜리 유아용 전집이었다. 전 남편이, 임신 중에 사왔던 것이다. 수인은 '달걀'에 관한 1권을 따로 꺼내 언제나 장난감 정리함에 함께 넣어두고는 했었다. 때문에 그 한 권은 모서리가 다 헤지고 몇 페이지는 떨어져 나가 홀쭉해진 채로 너덜거렸다. 모든 물건의 운명이 그렇듯이 어느 날 그 책은 없어져버렸다. 손전등을 아무리 비춰도 보이지 않는, 장롱 밑 어딘가 깊숙이 들어가 먼지와 뒹굴고 있을 것이었다. 장롱을 들어내지 않는 한 꺼낼 수 없었다.

 

트럭에 실린 물건들 위로 푸른 천막이 넓게 덮였다. 일꾼이 천막을 잡아당길 때마다 눈이 툭툭 떨어졌다. 일꾼은 굵은 고무밧줄을 천막 위로 이리저리 던졌다. 차체의 작은 갈고리들에 그것을 교차시키고, 때로 물건의 몸통을 천막 위로 동여매기도 했다. 일꾼은 고무밧줄을 잡아당기느라 눈길 위에 쪼그려 앉거나 다리를 비스듬히 구부리는 자세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트럭의 한쪽 귀퉁이에서 밧줄을 단단히 잡아당겨 옭아맸다. 일꾼은 창문 쪽에서 완전히 뒤돌아서서 매듭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은 누구도 봐서는 안 되는 신성하고 비밀스런 일처럼 여겨졌다. 꽁꽁 묶여 완성된 천막의 실루엣이 수인을 잠시 당황스럽게 했다. 일꾼이 운전석 손잡이를 꽉 잡고 발 받침대에 한 발을 디뎌 트럭에 가뿐히 올랐다. 트럭은 골목 끝까지 천천히 나가다가 커브를 돌기 위해 몇 번이나 전진과 후진을 반복했다. 전봇대에 걸린 원색의 모집 현판이 그때마다 천막에 닿아 흔들렸다. 트럭이 완전히 사라지려 할 때 수인의 입에서 단단한 고체와도 같은 입김이 창밖으로 뻗어나갔다.

 

쓰레기장의 장난감 바구니는 이제 눈에 뒤덮여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길게 구부러져 솟아 있는 손잡이만이 간신히 그것이 바구니라는 것을 알려 줄 뿐이었다. 수인은 창문을 닫아 버렸다. 남의 집에 온 것처럼 수인은 점퍼 주머니에 깊숙이 손을 넣고서 집안을 서성였다. 가구와 물건을 들어낸 자리마다 반듯한 모양으로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런데도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수인은 점퍼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베개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의 무게가 수인을 땅속으로 끌고 들어갈 것 같았다. 수인은 바로 누웠다. 천장의 못 자국이 불현듯 생각난 꿈 내용처럼, 단순하고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이었다. 수인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조금만 뒤척여도 패딩 점퍼에서 요란한 마찰음이 생겨났다. 수인은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오후 4시.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가늠해보았다. 현관 바닥에 떨어진 나사못이 되어 보았다. 보일러의 다이얼식 버튼이 되어 '온수 전용' 쪽으로 돌아가 보았다. 두루마리 휴지가 되어 식탁 아래로 떨어진 다음 풀려나갔다가, 충전식 청소기 콘센트 속으로 쏙 들어가 보았다. 여름용 등받이쿠션 밑으로 종이처럼 납작해져서 숨어 있다가, 나사가 헐거워진 서랍장 손잡이가 되어 고정되어 보았다. 이름, 주변사람, 헤어스타일, 날짜 등등 자신에 관련된 것들이 떠오르지 못하도록 수인은 생각의 가동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결혼 전, 종종 이런 식의 장난을 치며 이부자리에서 게으름을 피우곤 했었다. 너무 오랜만에 해보는 것이라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수인의 머리 속에 자신의 신상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마치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인 양, 스스로에게 이질감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수인은 언제나, 이것이 오히려 순수한 자기 자신에 대한 침입이라고 생각됐었다.

 

허공의 손이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미지근하고 찐득거리는, 덩어리가 되어 가는 물질을 수인의 정수리에 조금씩 쏟아 부었다. 그 물질은 아무도 모르게 수인의 몸과 마음을 뒤덮으면서 거실 바닥으로 퍼져 나갔다. 수인을 장악하려는 손의 처분을 지켜보면서, 수인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손은 이번에는 다시 수인을 안았다. 수인은 더욱 차분해져서, 그 상한 냄새로 가득 찬 온기를 느꼈다. 몇 번이나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들고, 한눈을 팔다 보면 다시 어깨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수인은 더 이상 자세를 고치려 하지 않고 탁자 쪽을 바라보았다. 똑바로 집어넣지 않은 의자 다리들이 탁자 밑 허공을 흩어 놓았다. 빈 의자 위에는 물방울 두세 개가 남아 사라져갔다. 꺼진 TV 화면에 먼지가 얇게 덮여 있었고, 손가락이 지나간 흔적이 먼지를 지우며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수인은 깍지 끼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는 이불 속에서 나와 의자를 나란히 정리했다. 의자 등받이에 잘 걸쳐 올린 점퍼 소매가 바닥 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수인은 티슈로 의자 위의 물방울을 훔친 뒤에 천천히 TV 화면을 쭉 닦아냈다.

 

수인은 개수대에서 손을 씻었다. 그리고 물기를 바지에 문지르고는 삐딱하게 놓인 빈 의자로 가서 앉았다. 탁자 밑 서랍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거울은 재빠르게 탁자 밑면과 천장, 욕실 스위치, 전자레인지의 디지털시계 등등을 불러들였다가 수인의 얼굴을 비췄다. 윗입술이 아랫입술보다 두꺼운 편이었다. 수인은 윗입술을 들어올렸다. 입술 안쪽 피부와 입술로 이어지는, 거의 알기 힘든 경계를 찾아내려 애썼다. 그런 뒤 코에 닿을 정도로 입술을 더 들어올렸다. 잇몸과 입술을 잇는 긴 살점과 굵고 얇은 핏줄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수인은 한동안 집요하게 입안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욱신거리는 두 개의 앞니 중에 한 개를 손가락으로 잡았다. 앞니는 아무런 저항 없이 수인의 손가락을 따라 쑥 빠져 나왔다. 수인은 티슈 한 장을 탁자 위에 펼쳐 놓고 빠져 나온 앞니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손거울을 엎어 놓고서, 이가 빠져나간 자리를 혀로 꽉 채워보았다. 피가 새어 나와 입안이 찝찔해졌다. 수인은 피를 삼켜가면서 다시 손거울을 비췄다. 앞니 하나가 없어진 입 속은 더는 웃기지도 않은 고전 개그 장면처럼 지리멸렬하게 보였다. 나머지 한 개의 앞니도 수인이 잡아당기자마자 쉽게 빠져 나왔다.

 

수인은 티슈 위에 나란히 앞니 두 개를 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치아들이 뽑히는지 일일이 당겨보았다. 입속이 너무 건조해 침이 잘 고이지 않았다. 수인은 가끔씩 입에 침을 모으느라 동작을 멈추곤 했다. 빠진 이는 놀랄 정도로 입속에 있을 때보다 커 보였다. 뿐만 아니라 그 탁한 색과 울퉁불퉁한 모양새가 너무도 추하고 터무니없었다. 수인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도무지 이런 물체를 입 속에 지니고 다닌다니 무슨 조화인지 알 수 없었다. 수인은 처음에는 빠진 앞니 두 개를 멀찌감치 응시하고만 있었다. 물론 앞니가 빠진 자리를 혀로 꽉 채운 채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안에서 밖으로 또는 밖에서 안으로 자신도 모르는 것들이 드나들 것만 같았다. 놀라운 마음이 한결 가시고 난 뒤에는 한 개의 앞니를 집어 코 가까이로 가져왔다. 그리고 위조지폐를 가려내려는 사람처럼 신중하게 훑어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얼굴이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없어지면서 앞니 쪽으로 얼굴이 쏟아지는 듯이 현기증이 났다. 어디 치아뿐일까. 수인은 자신의 몸을 훑어보면서 더듬는 시늉을 해보았다. 그 생소한 느낌은 수인을 괴롭히는 동시에 자유로운 기분에 사로잡히게 했다. 수인은 예상치 못한 쾌감에서 쉽사리 빠져 나오지 못했다. 윗니, 아랫니를 다문 채로 입술을 최대한 크게 벌려서 치아가 전부 드러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손거울을 높이 치켜들었다. 수인은 거울 속 자신의 과장된 입모양과 그 때문에 더욱 과장되어 있는 자신의 표정을 언제까지나 지켜보고만 있었다. 누군가는 그때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두드렸다. 수인은 단단한 손가락 마디가 현관문에 부딪히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아직 떼어내지 않은 문 밖 메모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벨을 누르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수인은 티슈를 여러 번 접어 앞니 두 개가 빠져 나오지 않도록 잘 여미고서 그것을 다시 한 번 호일로 감쌌다. 몇 번 더 짧고 명료해진 두드림과 함께 계시냐는 질문이 현관문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인기척이 없자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았다. 수인은 종이컵을 가져다 호일에 싸놓은 앞니를 담아두었다.

 

3층 복도는 사뭇 조용했다. 엘리베이터 바로 왼쪽으로 비상계단을 이용할 수 있는 문이 보였고, 3인용 대기 의자가 놓여 있었다. 복도 중간 즈음에 이르자 유리벽으로 되어 있는 치과의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수인은 치과 밖에서 잠시 두리번거렸다. 대기실에는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혼자 앉아 있었다. 여자 아이는 소파에 걸터앉아 팔로 몸을 지탱하려 하면서 다리를 쭉 폈다가 소파에 떨어지는 장난을 반복했다. 안내데스크는 비어 있었다. 유리벽 밖으로 여자 아이가 수인을 흘끔 쳐다보았다. 수인은 대기실로 들어갔다. 식수대 옆에 있는 컵 소독기에서 적외선 불빛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밖에서와는 달리, 의료기의 모터 소리가 간헐적으로 대기실을 활기차게 만들고 있었다. 수인은 여자 아이와 멀찌감치 떨어진 반대편 소파에 앉아 빈 안내데스크를 바라보았다. 조화를 심어 놓은 작은 화분들이 벽을 삥 둘러가며 선반 위를 장식했다. 우리 아이 충치 예방 어떻게 하고 계세요? 데스크에 세워놓은 알록달록한 안내 포스터가 치과 로고를 가렸다. 당신의 하얀 치아 밝은 미소를 위해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 충치 예방은 어떻게 하고 계세요? 포스터 귀퉁이에서 지나치게 인위적인 치열로 웃고 있는 백인 미녀가 자꾸 물었다. 수인은 어두컴컴한 곳에 앞니가 잘 싸여 있는지 가방 속을 들추어 확인했다. 가방 속에는 집을 나설 때 벨 위에서 떼어낸 노란 쪽지가 들어 있었다. 수인은 쪽지를 꺼내 '아기가 자고 있어요.'라는 문장을 다시 이어붙이기 힘들 정도로 두세 번 찢었다. 그리고 식수대 아래 있는 작은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여자 아이가 수인의 행동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소파 팔걸이에 기대어, 여운이 남은 채 흔들리고 있는 쓰레기통 뚜껑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수인은 여자 아이를 보고 계면쩍게 웃어 보였다. 곧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여자 아이는 고개를 기울여 수인의 입속을 확인하려는 시늉을 했다. 수인은 식수대에서 종이컵에 찬물을 받았다.

 

"몇 살이에요?"

 

여자 아이가 어눌한 발음으로 물었다. 그리고는 소파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엉덩이를 뒤로 빼며 수줍게 웃었다. 여자 아이의 앞니가 빠지고 없었다. 유치가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수인은 새치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고서 앉아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때 간호사가 치료실 문을 열고 바쁜 걸음으로 나오며 인사를 했다. 실내용 샌들 뒤의 조절 끈이 뒤꿈치 아래로 벗겨져 움직일 때마다 덜그럭거렸다. 간호사는 재재바른 동작으로 수인의 접수를 도왔다. 수인은 인적사항을 작성하기 위해 데스크에 기대어 몸을 기울였다. 한 여자가 복도 맞은편 통증클리닉에서 유모차를 밀고 나와 복도를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수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수인은 펜을 든 채로 잠시 허둥댔다. 생각지도 못한 물건이 수인의 차 트렁크 안에 여전히 있었던 것이다.

 

수인은 계단을 통해, 차를 세워둔 곳에서 가까이 있는 비상문을 열고 나왔다. 지하주차장에는 육중한 기계 모터가 갑자기 돌아가기 시작해서 수인을 각성시켰다. 키홀더에서 차 키를 골라내는 동안 지하를 흔드는 출차 경보음이 수인의 잇몸을 더욱 욱신거리게 만들었다. 수인은 운전석에 올랐다. 그리고 키홀더를 손에 쥔 채로 운전석에 잠시 앉아 있었다. 룸미러를 얼굴 쪽으로 돌렸다. 비뚤게 고정 된 귀걸이를 바로잡았고,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귀고리에 딸려 들어가 뽑히는 일이 없도록 귀 뒤로 잘 쓸어내렸다. 입안을 비춰보았다. 마치 오랫동안 없었던 것처럼 앞니 두 개를 다시 끼워 넣은 치열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워져 있었다. 치과 의사는 앞니를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해 비관적으로 말했다. 빠진 치아가 건조한 상태로, 시간이 너무 경과해버렸다는 것이다. 수인은 트렁크 스위치를 누르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지하에 '쾅'하고 울렸다. 수인은 안치실로 가는 그 길과 같이 차 뒤쪽으로 걸어갔다. 힘을 주어 트렁크 문을 들어 올리자 접힌 유모차가 옆으로 누워 있었다.

 

"그렇지, 이게 있었어."

 

혀의 어색한 움직임 때문에 수인의 되찾은 치열에서 우스꽝스러운 발음이 새어 나왔다. 유모차의 더러운 앞바퀴는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햇빛가리개 부분이 구겨져 한 쪽 고정 레버가 빠진 채 뒤틀려 있었다. 수인은 끔찍한 기분이 들어 잠시 멈칫했다. 접힌 유모차를 들어 올려 바닥에 내려놓고 양쪽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흉물스럽게 뻗어 있던 앞바퀴가 바닥 쪽으로 서서히 내려갔다. 다음은 사람의 허리부분에 해당하는 쇠의 연결부분에, 둥근 플라스틱 레버를 오른발로 강하게 밟아 눌렀다. 그러자 '탁' 소리와 함께 유모차가 네 발로 고정되어 균형을 잡았고 햇빛 가리개 부분이 팽팽하게 펼쳐졌다. 수인은 빠진 레버를 다시 끼워 햇빛 가리개의 모양을 바로잡았다. 유모차는 덩치가 큰데다 싣고 내리기가 부담스러워 트렁크에 그대로 둔 시간이 더 많았다. 게다가 처음 직면하게 됐을 때 펴고 접는 방식이 복잡해서,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오로지 수인의 몫이었던 것이다. 전 남편의 친구들은 으레 그 일을 도우려 나서곤 했었다. 그 때마다 수인은 순순히 그것을 맡겨두고 엉거주춤하게 허둥대는 뒷모습을 지켜보곤 했었다.

 

수인은 햇빛가리개의 고정 핀을 젖혀서 자신의 몸 쪽으로 당겼다. 그러자 빈 유모차의 넓고 푹신해 보이는 몸체가 드러났다. 지지대의 5단 안전벨트가 좌석에 느슨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타고 있으면 내리려 하고, 내렸다 하면 다시는 타지 않으려는 실랑이 속에서 안전벨트를 억지로 채우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던가. 사실 유모차를 트렁크에 처박아 둔 가장 큰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미친 여자처럼 윽박을 지르는 자신의 모습이 잊힐 리 없었다. 수인은 이제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것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안심이 됐다. 이제 다시는, 첩보원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누군가의 안위에 전전긍긍하며 돌아다니지 않아도 됐다. 운전 중에 카시트와 전방을 번갈아 보며 개그맨 같은 목소리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됐다. 일일이 꼽을 수도 없는 혜택이 수인 앞에 놓여 있었다. 정신없이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면 고질적인 무기력이 어느 정도 중화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무기력한 상태에 혼비백산이 된 상태가 가중되는 것, 그 뿐이었다. 일꾼이 후려쳐 깎았던 물건의 값어치만큼이나 이전의 삶이 우습게만 여겨졌다. 수인은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안전벨트를 차례로 끼워보았다. 이렇게나 쉽고 간단하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안전을 도모하는 장치가 또 있을까.

 

수인은 유모차 뒤에 쪼그리고 앉아 수납 칸에 들어 있던 몇 가지 휴대용품들을 모두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손 소독제, 기저귀 2개, 물티슈, 손수건, 장바구니, 유모차 커버 정도였다. 수인은 비상용으로 넣어 뒀던 비닐 팩에 그것들을 쓸어 넣었다. 한 손에 비닐 팩을 들고, 한적하다 못해 적막해진 지하주차장을 유모차를 밀며 가로질렀다. 수인은 대형 쓰레기통에 비닐 팩을 통째로 집어넣었다. 지렛대의 원리로 열리고 닫히는 쓰레기통 뚜껑이 거대하게 열렸다 닫혔다.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거추장스럽게 들렸다. 유모차는 말할 수 없이 가벼워져 버려서 수인의 감각보다 좀 더 빨리 굴러갔다. 때문에 어느새 수인은 손잡이를 잡고서 유모차를 따라가고 있었다. 어쩌다 지나가는 사람이 의미 없이 수인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러나 수인은 여장을 한 범죄자처럼 감정의 기복을 느끼며 좀 더 빨리 유모차를 따라갔다. 수인은 오로지 직진했다. 눈을 자주 깜박이지 않아 눈동자가 쓰라리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맹인들을 위한 오돌토돌한 지면 쪽에 바퀴가 닿자 유모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더 속도를 냈다. 수인은 거의 달리다시피 하여 겨우 유모차를 따라 가는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유모차가 낭떠러지와 같은 곳에 맞닥뜨려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은 행진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주차장 끝이 보였다. 주차장 끝에는 건물 지상으로 통하는 또 다른 자동문이 있었다. 자동문 옆으로는 빵을 실어 나르는 빈 플라스틱 박스들이 수인의 키보다 더 높이 쌓여 있었다. 수인은 조금 가빠진 숨을 고르며 유모차에서 손을 뗐다. 손이 금세 어색해져 버렸다. 자동문이 뭔가 감지하고서 혼자 열렸다 닫혔다. 자동문 안에서는 유치한 모자를 눌러쓴 빵 상점 직원이 상점 안에서 플라스틱 상자를 내놓기 시작했다. 직원은 수인을 잠시 인식하고는 심드렁하게 하던 일을 계속 했다. 직원이 내려놓은 플라스틱 박스에는 똑같은 종류의 빵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위에 또 그 위에, 같은 방식으로 빵이 담긴 박스는 몇 번이고 쌓여 올라갔다. 수인은 추운 사람처럼 옷깃을 만지작거리면서 자신의 차가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수인의 뒤에서 잠시 동안 열려 있던 자동문이 닫히고 지하주차장은 한결 더 괴괴해졌다. 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구두굽이 땅바닥을 후벼 파기라도 하는 듯이 그 소리가 수인의 귀를 파고들었다.

 

출구로 나가기 위해서는 차가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나오는 방식이 되어야만 했다. 수인은 핸들을 잡은 두 손에 힘을 주고 화살표를 따라 통로로 천천히 진입했다. 차창 밖으로 멀찌감치 빈 플라스틱 박스 더미가 보이고, 그 뒤로 어정쩡하게 세워진 유모차가 보였다. 차가 직진해 나아가는 곳에 이르자 유모차의 어두운 형체는 룸미러를 따라오며, 불안정하게 흔들리다가 시야를 벗어났다. 출차지점에 거의 다다랐을 때, 수인은 갑자기 시동을 꺼트렸다. 그러나 곧 시동을 다시 켜고 미세하게 후진을 한 뒤에,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수인은 좌회전 신호를 받기 위해 사거리 한복판에 멈춰 있었다. 길가에는 쓸어낸 눈이 여기저기 높이 쌓여 구정물로 변해가고 있었다. 수인은 수시로 룸미러를 들여다보았다. 날이 흐려 벌써부터 네온사인이 한 두 개씩 켜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지긋지긋하기는 매 한 가지인 곳이었다. 길 건너편 산책로는 텅텅 비어 있었지만, 도로 정비 때문에 길이 꽤나 막혔다. 겹겹이 이어지는 건물들 너머로 타워크레인이 높이 솟구쳐 있었다. 뿌연 하늘 아래, 수평으로 길게 떠 있는 타워크레인의 철골구조는 지독할 정도로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수인은 방향지시등을 켠 채로 울고 있었다. 쇠약해진 앞니로 혀를 살짝 물고 있었기 때문에 수인의 얼굴은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끝>

 

 

 

 

 

 

 

 

 

 

한국일보 2011년 공동수상 내기의 목적

 

인도인 프로젝트 매니저 뿌따는 자신이 인종과 피부색, 종교 차이로 인해 부당한 차별을 받았다는 이유로 부하직원인 나를 월요일 아침 회사 감사팀에 고발하였고 수요일 오후에 나는 두 번째로 인사위원회에 참석하였다.

 

나는 유태인 드레퓌스 중위보다도 더 결백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를 변호해 줄 에밀 졸라는 주위에 없다.

 

이 사건은 인도와 한국의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영국이 인도와 해결하지 못한 역사적 부채로부터 유발되었다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 - 실제로 인도 직원들이 격렬하게 항의한 대상은 한국인 동료들이 아니라 영국인 경영자들이었다. - 그래서 누구는 이 사건을 두고 "제2의 스와라지 운동"이라고 명명하였다. 하지만 회사가 공식적인 조사를 벌이는 동안 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떠한 집단행동도 금지되었으므로 나는 더욱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뿌따의 터번과 미간 사이의 붉은 표지와 수염에 대해 호기심을 보인 적이 없고, 회식 자리에서 그에게 소고기나 술을 제안하지도 않았으며, 파키스탄과의 국경분쟁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 적도 없다. 다만 인도식 영어가 아직도 익숙지 않아 "Pardon?" 이라는 대구를 연발하고 있으며 크리켓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말한 적은 있다.

 

안산 소재의 회사 건물에는 인도인뿐만 아니라 일본인과 벨로루시인과 체코인도 함께 일하고 있다. 사장은 미국 뉴저지 출신이고 연구개발센터를 총괄하는 부사장은 영국에서 왔다. 하지만 그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국적이나 지위와 상관없이 공정했다고 자부한다. - 물론, 미국식 영어가 영국식 영어보다 더 친근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것마저 내 잘못으로 간주하는 건 너무 부당하다.

 

뿌따는 그저 U3 프로젝트의 전자패널 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매니저일 따름이고 영국식 민주주의자로 개종한 순간부터 숙명에 대한 패배감을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만이 사회적 계급을 설정하지만 쉽사리 대물림되지 않는 시스템을 이해했을 것이다.

 

지난 금요일 저녁 뿌따와 함께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텔레비전 퀴즈쇼를 보다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서 비극이 탄생하였다. 퀴즈의 정답은 "불가촉천민"이었는데 그게 힌두어로 어떻게 번역되는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크샤트리아"라고 외쳤고, 한때 크샤트리아 출신이었던 뿌따가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수요일이 되어서야 듣게 되었다.

 

뿌따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과 언행들까지 자세히 증언하면서 자신의 인내심과 포용력을 입증하였다.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은 부정할 수 없었고 부정하지 않는 것들은 사실로 인정되어 판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의 가장 큰 실수라면, 토론과 합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인도인 매니저에게 업무 진행사항을 수시로 보고하면서 의견을 교환하지 않은 것이었다. 불필요한 말보다 침묵의 힘이 갈등을 줄이고 사고의 영역을 넓혀 줄 것이라는 기대는 크게 빗나갔다.

 

이로써 나에겐 두 가지의 선택이 남았다. 무죄를 증명하면서 명예롭게 퇴직하느냐 아니면 무례를 인정하고 불명예스럽게 전출을 수용하느냐.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인사위원회는 사건의 전모를 공개하지 않겠지만 내 빈자리로 쏟아지는 소문들로 나는 매일 부관참시 당하게 될 것이다.

 

뿌따는 외국계 회사의 수평적 질서를 지켜낸 공로로, 일종의 노벨평화상처럼, 전 직원 앞에서 포상을 받게 될 것이고 몰디브나 하와이로 가족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며 국제적 정치 감각을 가지고 있는 직원들을 보강하여 U3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것이다.

 

내가 뿌따라면, 무역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한 M과장보다는, 호주와 이스라엘에서 각각 1년씩 봉사활동에 참여한 C사원을 중용할 것이다.

 

여러 가지 과민성 질병을 앓고 있는 M과장과 더 이상 일하지 않게 되는 건 즉각 환영한다. 그는 단 한 번도 불평 없이 나의 지시를 수용한 적이 없으며 내 기대를 절반 이상 만족시킨 적도 없다. 하지만 미국 시민권과 영어에 무두질된 혀가 M과장에게 치외법권을 주었다. 설령 예상치 못한 기적이 설화(舌禍)에서 나를 지켜내더라도, 나는 더 이상 그를 제어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임원이 될 그는 한때 내가 자신의 상사였다는 사실부터 까맣게 잊어버릴 게 분명하다.

 

C사원과 헤어지는 건 못내 아쉽다. 신입사원인 그는 사막을 건너온 카라반 같아서 세대를 뛰어넘어 벌어지는 문화 현상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게다가 그는 나의 귀와 혀의 자격으로 뿌따가 주관하는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나와 달리 C사원은 사소한 안건을 두고도 뿌따와 의논하였으며, "Pardon?" 이란 단어도 연발하지 않았다. 와인을 즐기는 M과장과는 달리 C사원은 삼겹살과 소주를 주문하여 나를 기쁘게 하였다.

 

만약 지난 금요일 저녁 내가 뿌따와 함께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텔레비전 퀴즈쇼를 보고 있을 때, C사원이 우연히 우리와 합석하였다면, 내가 "크샤트리아"라고 외치기 전에, 그는 스마트폰으로 정답을 검색하여, "하리잔, 또는 달리트"라는 단어를 찾아주었을 것이다. M과장만 있었어도, 나는 성급하게 말을 뱉는 대신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 테스트와 경멸의 목적으로 - 그의 대답을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생이다. 수천만 가지 사건들이 각각 높은 개연성을 가지고 주위에 득실거리지만 정작 간절해졌을 땐,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가장 절망적인 사건 하나만이 허탈하게 벌어진다. 그리고 일단 벌어진 사건에 이끌려 얼마간의 생명이 소진되는 것이다.

 

소위 삼류 대학을 졸업하고 어학연수는커녕 영어 학원조차 다니지 않았던 내가 졸지에 외국계 회사의 과장으로 변신한 사연은, 창립자 2세들의 권력 싸움의 결과였다. 각각 미국과 영국의 유명 대학에서 MBA를 마치고 돌아와 조직의 주요자리를 차지한 그들은 현재의 사업을 지키는 일보단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일에만 열광한 나머지 캐시카우(Cash Cow)를 통째로 잡아먹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결국 그들은 아버지와 재산과 인생을 모두 탕진한 채 실직자가 되었다. 물론, 그들이 부자들의 습관을 즉시 버려야 할 만큼 곧바로 가난해졌다는 뜻은 아니다.

 

기억은 늘 회한의 힘으로 불어난다. 아무 소용도 없는 것들이 자신을 더욱 소용없게 만든다. 상황은 늘 개인보다 앞서고 개인은 역사를 통시적으로 감지할 수 없다. 더욱이 외국계 회사에서의 상황논리는 전적으로 세계사에 기초하기 때문에 해독은 거의 불가능하다. 학살자들을 피해 많은 동료들이 유태인처럼 떠났고, 가구처럼 남은 자들은 넉 달의 채불 임금이 조만간 해결되길 기대하며 영어학원에 등록했다.

 

합리적인 경영철학과 엄격한 다원주의는 여가와 자유의 신대륙을 잠시 보여주는 듯 했지만, 시장 점유율이 급속히 떨어지고 설상가상으로 신제품 개발 일정까지 늦어지면서 회사의 존폐가 오직 패전국 직원들의 희생과 헌신에 달려 있다는 상황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자, 외국인 상사들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야근과 주말근무를 자청하는 기이한 상황이 이어졌다.

 

매일 U3 프로젝트의 진도를 확인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매니저로서 뿌따가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나에게 아무런 경고나 격려의 말을 건네지 않은 것으로 짐작하건대, 우리의 희생으로 인해 자신이 얻게 되는 이익만큼은 계산하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나와 뿌따 중 어느 누구도 인사위원회에서 이 사실까진 증언하지 않았다.

 

모든 게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꽃은 늘 끝에서 핀다. 선택할 수 없는 순간이란 너무 많은 선택을 한 뒤에 더 이상 선택할 수 없게 된 순간이다. 십여 년을 헌신했건만 올해까지 삼 년째 차장 진급 대상자에서 탈락시키고 있는 회사에 더 이상 미련 따윈 없다. 영어 점수를 높이기 위해 가족들에게서 시간을 빼앗고 싶지도 않다. 외동딸을 유치원에 보내야 하고 이 년마다 전셋집을 떠도는 처지에서 벗어나야 하는 아내는 꽃 앞에서 깊게 체념한 다음에야 가장의 선택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 달부터 병원비 송금이 중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장인의 혈당 수치가 치명적 수준까지 높아질까 두렵다.

 

그렇다고 퇴직금 몽땅 털어서 당장 치킨 가게라도 차릴 작정은 아니다. 내 깜냥으로는 치킨 한 마리 파는 게 어렵다는 걸 인정한다. 그저 내가 잘 알고 있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새로운 환경을 찾아보겠다는 뜻이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외국인 상사에게 인종과 피부색, 종교 차이로 인해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않는 회사로 이직하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머뭇거리다가 술기운을 빌어 O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울산의 밤에 홀로 갇혀 일을 하다가 그는 잠시 스톱워치를 멈추었다.

 

그와의 인연은 1997년 11월 21일 저녁 10시 15분 참담한 표정으로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경제부장관의 성명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어려움, 유동성, 요청, 지원, 하락, 사태, 노력, 대책, 환율, 전망, 자금, 조건, 불안, 해결, 합리, 국민, 협조, 합심, 정상, 이해, 당부 등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갑작스레 중단된 텔레비전 드라마가 끝내 속개되지 않아 국민들로부터 공분을 샀다.

 

성명서에 따라 가장 먼저 아버지들이 타격을 받았고 자식들의 꿈이 차례로 거세되었다. 수십 년씩 근무한 회사의 부당한 처우에 제대로 항의 한 번 하지 못한 채 불명예 퇴직을 받아들인 아버지들의 나약함을 자식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믿었던 자들에게 배신당하고 새로 시작한 사업마다 실패하면서도 아버지들은 근엄한 권위를 존중 받고 싶었다. 그래서 아내와 자식이 떠나는데도 그들은 그저 술을 마시고 어금니를 뽑을 뿐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아버지들의 순종적인 퇴장과 자기혐오가 나와 O에게 일자리를 주었다.

 

그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전 생애가 아니라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어른거리는 미래의 1분이었고 그것을 선점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둥거렸건만 단 한 순간도 차지할 수 없었다. 그러면 나는 선술집에서 취한 채 발견되곤 하였다. 당장 무엇이라도 시작하지 않는다면 혈관 속에 맹독처럼 흐르고 있는 젊음이 나를 화석으로 전락시킬 것 같아 초조했다.

 

입사지원서를 채우는 일에도 넌더리가 날 무렵 울산 소재의 직장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곳엔 친구나 친척은커녕 추억조차 없었지만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2인용 텐트 같은 자취방을 구하고 이발을 하고 통근버스에 실려 처음 출근하는 날부터 나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4년 후 대리로 진급하자마자 그곳을 떠났다. 그 동안 살림살이는 거의 늘어나지 않았고 슬픈 로맨스도 없었다.

 

O는 최근 입사 동기들과 술을 마시면서 나처럼 자신들을 떠난 사람들에 대해 잠시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내 근황이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으나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와 성급히 끊었다고. 나는 그곳을 떠나 결혼을 했고 딸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외국계 회사의 차장이라고 말했다. - 아직도 과장이라고 고백하기엔 난 너무 닳았다. - 한때 뒷골목의 룸살롱을 전전하며 음란한 유희를 일삼던 우리는 이제 너무 낯설어져서 작별 인사조차 제대로 끝마칠 수가 없었다.

 

전세 구하기도 어려운데 지방으로 내려갈까? 유치원 가면 은미 방을 넓혀주어야 하고 당신에게도 튼튼한 화장대가 필요하잖아? 물가도 쌀 테니까 지금보단 더 여유로워질 거야.

 

역한 술 냄새를 피해 낚아채 듯 양복을 받아 든 아내는 남편의 술추렴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박했다. 은미에겐 술 안 마시고 영어를 잘 하는 아빠가 더 필요하다는 것 몰라? 난 절대로 은미를 우리의 과거로 만들진 않을 거야.

 

M과장의 아버지처럼 나도 딸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미국이든 호주로 이민을 떠나 청소부부터 시작할 각오는 되어 있다. - 가족은 서로에게 시간을 나누어 주는 관계이다. - 하지만 나는 여전히 M과장이 성공한 미래를 보장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작 그는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외국계 회사의 임원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이웃의 존경을 받는 이름은 결코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나의 딸이 인종과 성별과 국가와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상식과 습관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가치를 위해 도전하는 사람으로 자라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하여 훗날 외국계 회사의 인사위원회에 참석하여 영국인 부사장과 뿌따 앞에서 나의 무죄를 변호해 줄 에밀 졸라[1]가 되어 주길.

 

월요일 세 번째 인사 위원회에 참석한 나는 퇴근하면서 이틀간의 연차 휴가를 냈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지방출장으로 둘러대고 다음날 울산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십여 년 만의 방문은 차창 위로 실재보다 더 많은 얼굴과 풍경들을 등장시켰으나 이름이나 사연을 거의 기억할 순 없었다. 버스 안에서 읽으려고 준비했던 에밀 졸라의 문고판 책은 잘 읽히지 않았다.

 

경제부 장관의 성명서 발표 이후 수도권 부근의 연구소가 폐쇄되면서 울산 공장으로 이동하게 된 직원들은 권토중래의 의지도 없이 오직 가족을 위해 따뜻한 굴욕을 참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나처럼 신입사원들에게는 현실이 될 열의나 애정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무기수들처럼 업무가 지겨웠고 일상이 따분했으며 상사의 꾸지람을 들어도 쉽게 좌절하거나 흥분하지 않았다. 퇴근 후 함께 술집으로 몰려가는 대신 기숙사에서 저녁식사를 챙겨먹고 혼자 운동을 하다가 텔레비전 앞에서 잠드는 편을 선호했다. 그리하여 입사한 지 두 달 만에 방파제 부근 횟집에서 열린 신입사원 환영회식은 6시에 시작하여 8시에 끝났고, 신입사원 4명과 S과장만이 소주를 세 잔 이상 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4년 동안 나와 같은 젊은이들이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위험한 연애를 하거나, 쫓기 듯 결혼하거나, 폭음하거나, 이직하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떠날 무렵 O는 창원 소재의 대기업으로 이직하기 위해 면접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프랑스령 기이나의 감옥에서 유일하게 탈출한 빠삐용과 드가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여자 친구로부터 임신 사실을 통보받은 O는 탈주 계획을 폐기하였고 나는 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두 번째 직장의 상사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땐 격주 토요일마다 근무하던 시절이었고 부하직원의 월차는 반조직적 행동으로 간주되곤 하였다.

 

O는 자신의 둘째딸 사진을 보여 주었다. 정수리에서 머리카락이 많이 사라진 그는 아이들을 통해 생의 볼륨감을 겨우 감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새 상사의 꾸지람을 들어도 쉽게 좌절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내가 겪고 있는 불편함을 이해하는 것 같았으나 이직까지 고민할 만큼 부당한 사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는 내 딸의 나이와 아내의 직업과 전세 값을 묻고 혀를 차더니 묵직한 침묵에 앞서 막걸릿잔을 건넸다.

 

S 과장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건 핑크색 오두막 형상의 케이크를 O의 손에 쥐어 준 다음이었다. - 그것이 한국인에게 보편적인 행동강령(Code of Conduct)이다. - 우리는 뒷골목의 룸살롱 대신 일본식 선술집 앞에서 헤어졌고 나는 24시간 편의점에 들러 맥주 두 캔을 샀다.

 

마누라야, 여기가 거기보다 더 따뜻한 것 같긴 한데, 은미를 키우기엔 너무 우울할지도 모르겠어. 우리도 미국이나 호주로 이민 갈까? 하지만 우리가 떠나 있는 사이 또 누군가 우리 몰래 죽어갈까 봐 너무 두려워.

 

러브호텔의 물침대에서 깨어나 천장의 거울에 비친 나와 마주하고 누웠을 때, 수도원의 원장에게 속아서 다시 감옥으로 붙잡혀 온 빠삐용처럼, 나는 울고 싶었다. 추억은 이미 사라진 제국의 유물에 불과했고 내 인생을 의탁하기에 서사의 힘은 너무 미약했다. 두개골을 으깰 것 같은 두통과 노래기처럼 식도를 오르내리는 갈증은 나와 S과장이 각각 속해 있는 세상을 구분 짓고 있었다.

 

S과장은 울산으로 내려오기 전까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수상한 시절의 중요한 정보들이 옥외 재떨이 주위로 모여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부터 담배를 피우는 동료들 주위를 기웃거리기 시작하더니 끝내 담배를 입에 물었다. 물론 자신의 주머니보다 동료들 주머니 속의 담배를 더 선호했고, 불씨를 더 빨아올릴 수 있는 꽁초는 함부로 버리지 않았으며, 공짜 담배를 얻기 위한 내기를 즐기고, 해외 출장을 떠나는 동료들을 찾아가 담배 선물을 부탁했다. 그래서 옥외 재떨이 주위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한대만"과장으로 불렸다. 그는 몸집이 작고 민첩해서 옥상 출입구 앞에 세워둔 망꾼들을 허탈하게 만들곤 하였다.

 

나의 직속상사가 뿌따이듯이, 그때 S과장은 O의 직속상사였다. 나와 S과장은 같은 부서가 아닌데다가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회사에서 만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나의 가장 절친한 술벗인 O가 S과장과의 내기에서 가장 많이 졌기 때문에 술자리에서 자연스레 S과장과 친해졌다.

 

S과장에겐 친한 동료나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주로 우리와 같은 신입사원들과 어울렸다. 우리는 그에게 저녁의 술 약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비밀보안에 각별히 주의하였건만 번번이 그의 습격을 받았다. 그는 초대를 받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일단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특히 술자리 거절은 곧 손해를 의미했다. 공짜라면 그는 무엇이든 받아들였다. 심지어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고안된 고약한 제안일지라고 그는 모른 척했다. 그리고는 러시안 룰렛을 즐겼다.

 

그런 S과장이 2년 전 자살했다. 프로이트의 격언[2]에 따라 그는 목숨을 걸고 누군가와 마지막 내기를 걸었던 것이고, 나는 그가 이겼으리라 확신한다. 너무 기뻐서 술 한 잔 걸쳤겠지만 더 이상 내기를 걸 대상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우울해졌을 것이고 죽살이의 경계를 나눌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일요일 저녁 고속버스를 타고 울산으로 내려오다가, 휴게소에 내려 어묵 꼬치 두 개를 사먹었고, 바지 주머니 속에 각각 담배 한 갑씩 쑤셔 넣은 다음, 마치 길을 잃은 살쾡이처럼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속으로 뛰어들었다.

 

빈부의 격차 없이 누구나 원하는 만큼 얻고 쓸 수 있게 된 낙원에서도, 내기적 인간인 S과장은 복권을 만들어 팔고 있지 않을까. - 이건 나와 내기를 걸어도 좋다. - 몇 차례의 죽음으로 숙명론자가 된 유령들마저도 자신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착각 속에서 생의 무료함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독배를 돌려 마실 것이고, 낙첨의 불운에 크게 낙담할 것이다. 그리하여 진노한 신은 명계의 질서를 어지럽힌 그를 이승으로 다시 추방할 수도 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인종과 종교를 뛰어 넘어, 남녀의 차별 없이, 모든 인간은 서로에게 이웃이라는 사실만으로 존중 받아야 한다. 배려 때문에 희생을 감내하지는 않더라도 정당한 이유 없이 상대의 생각과 행동을 방해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비록 당신이 S과장의 내기에서 여러 차례 패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소통 방법을 매도해서는 결코 안 된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첫 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두 번째 직장으로 떠나기 전날 마지막 회식을 준비하면서 나는 빈객을 초대하지 않았다. 물론, 어떻게 알았는지 그는 늦게 운동복 차림으로 부둣가 횟집에 나타났고 내게 간단한 석별의 인사를 건넨 채 먼저 돌아갔다.

 

터미널부근의 식당에서 콩나물 해장국을 먹고 있는데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습관적으로 상사의 권위를 침해하여 조직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므로 감봉 3개월에 면직처분의 징계가 확정되었으며 내가 원한다면 다른 부서로의 전직을 추진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전혀 신원을 알 수 없는 목소리였으나 모국어로 설명해주는 것만큼은 고마웠다.

 

안산행 고속버스의 출발시간까지는 두어 시간 남아서 나는 가까운 지하 PC방으로 들어가 취업사이트에 등록하였다. 아내와 딸의 신상정보까지 기록하고 나자 노예상이라도 된 것 같아 서글퍼졌다. 태평양의 공해(空海) 같은 자기 소개서 속을 난삽하게 흘러 다니는 문자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멀미가 나서 난생 처음으로 담배까지 피워 물었다. 이로써 나는 돌연사할 조건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목적도 없이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나는 문득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알려졌는지 궁금해져서 검색엔진에 내 이름을 입력하였다. - 옥스퍼드 사전에 에고서핑(Egosurfing)이라는 단어가 등록된 것이 2003년도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 한글과 영어를 바꾸어 가면서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든 정보들로 나의 과거를 추적하였다. 만약 헤드헌터 회사가 구직자들의 동의 없이 검색엔진으로 찾아낸 개인정보까지 제공하는 게 관례라면, 뿌따의 모함은 자칫 카인의 표시가 되어 평생 나를 따라다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나의 죄목은 수많은 동명이인들의 하이라이트 속에서 가장 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10년 전에는 인터넷 자연어 검색엔진의 기능이 초보적 수준이었고, 익명의 개인들이 제공하는 정보들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매일 야근과 음주에 찌들려 있던 S과장이 어떻게 내기에서 그토록 높은 승률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이다. - 그의 기숙사 방에는 책과 신문은 거의 없고 이주일 분량의 옷가지와 낡은 카세트플레이어와 빈 소주병 몇 개가 전부였다. - 아무튼 내가 두 번째 직장에 안착할 무렵부터 인터넷 검색엔진으로 세상의 모든 도서관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얄팍한 상식을 밑천 삼아 내기하는 걸 꺼리기 시작했다.

 

S과장이 내기적 인간으로 성공했던 이유를 누군가는, 그가 3년 동안 과장 승진에서 누락되었던 경험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처남의 사업 실패 이후 자신을 찾아오는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느라 제대로 업무에 집중할 수 없는 그가 높은 인사고과 점수를 얻지 못한 건 당연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다급한 금전적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S과장에겐 진급이 절실했고, 불리한 상황을 극복할 유일한 방법은 승진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 달 동안 기숙사 도서관에 틀어박혀 시험 준비를 했고 삼수 끝에 목적을 달성하였는데, 상식 과목에서 응시자 최고의 점수를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나는 들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원칙에 예민하며 과묵했던 S과장이 내기를 고안했던 원래의 목적은 진실을 판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언쟁의 피로감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이었다. 국가 파산 이후 계속된 건기(乾期) 동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초조해져서 조그만 불씨에도 달아오르며 입속에 숨긴 칼로 검투와 자해를 시도하였으니,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들을 동원하여 오해와 갈등의 싹을 처음부터 잘라내는 것보다 영웅시대에 더 효과적인 처신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거창한 철학을 버리고 단지 공짜 술을 얻어 마시기 위해 내기를 제안하였다.

 

내기의 주제는 결코 거창하거나 진지하지 않았다. 그래서 설령 내기에서 졌다고 해서 수치스럽게 생각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우리나라 고속도로에서 가장 긴 터널[3]"따위를 모른다고 해서 수 만원의 술값을 혼자서 부담해야 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그래서 한 번은 내가 S과장에게 술잔을 건네면서, 부하직원의 얄팍한 지갑이나 털지 말고 차라리 텔레비전의 퀴즈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떳떳하게 상금을 타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한 적이 있었는데, 느리게 손사래를 치면서 그는, 나보다 내기의 승률이 낮은 인간들에게 양보하는 게 도리라고, 그리고 혹시 상금을 받게 된다면 채권자들은 더욱 악랄한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힐 것이라고 말했다.

 

S과장은 자신이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주제를 두고 내기를 거는 법이 절대 없었다. 대신 자신이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실들의 일부만을 자신 없게 말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호승심을 부추겼고 그들이 내기를 걸도록 유도하였다. 피해자는 몇 순배의 술을 마신 뒤에야 자신의 성급함과 우둔함을 후회하였으나 이미 너무 취해서 S과장을 다음 내기로 끌어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S과장은 탐욕스럽게 2차나 3차까지 따라 나섰다가 자신이 술값을 도맡게 되는 상황을 피해갈 만큼 주도면밀했다. 그는 승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상석을 피해자에게 양보했고 늘 조용하고 겸손하였으며 자신의 기호에 맞춰 주문을 하지 않았다.

 

퇴직을 결심한 이상 흉흉한 소문 때문에 명예마저 훼손되는 것을 막고 싶어서 나는 1997년 11월 21일 저녁 10시 15분 참담한 표정의 경제부 장관처럼, 희생, 헌신, 부당함, 고마움, 영어, 동료, 명예, 양심, 가족, 시작, 내기, 행운 등과 같은 단어들이 포함된 메일을 작성하였다. 그걸 누구에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 한글로 작성되어 있으므로 뿌따는 수신인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 오래 전 S과장이 남긴 메일 주소로 보냈다. 유령들과의 내기에서 이기려면 저승에 잘 알려지지 않은 진실들이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곧이어 안산행 고속버스가 터미널 플랫폼으로 들어왔고 O에게 작별의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차창에 잠시 담겼다가 사라진 것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쓸쓸했다. 에밀 졸라를 조금 읽다가 잠이 들었다.

 

안산 터미널에 내릴 무렵 O에게 전화가 왔다. 전혀 어울리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자신의 딸이 핑크색 오두막 형상의 케이크를 아주 좋아했다는 사실과 함께 S과장이 묻혀 있는 납골당의 위치를 차례대로 말했다. 나는 은미를 위해 똑같은 케이크를 샀다.

 

S과장은 아내와 이혼하면 처남의 빚을 탕감 받을 수도 있었으나 업구렁이 같은 아내를 버리고 딸을 혼자 돌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빈 월급봉투에 가끔씩 자괴감이 치밀어 오를 때면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었다고 O는 증언하였다. 하지만 굴욕에 더 잘 적응한 쪽은 S과장이 아니라 그의 아내였고 S과장의 마지막 내기 이후에도 살아남아서 억대의 보험금을 받게 되었다고, 나는 또 들었다.

 

잠든 딸과 아내를 내려다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들을 연거푸 던졌다. 질문을 아는 한 답도 알 수 있다는 잠언은 결코 사실이 아니었다. 질문이 이어질수록 밤은 더욱 깊어지면서 출구는 더욱 희미해져갔다. 가능하다면 나는 오두막 케이크 속으로 숨어들어가 아침까지 쉬고 싶었다. - 은미는 케이크 반조각도 채 먹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샌 나는 샤워를 하고 왁스로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 붉은 넥타이를 골라 메었다. 이유를 궁금해 하는 아내에게 부사장과의 회의가 있다고 둘러대었다. 그리고 회사 앞 구둣방에 들러 구두를 닦았다. 설령 출입문을 들어서다가 인사위원회의 징계 결과를 알리는 대자보를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주춤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내 책상 앞까지 걸어갈 것이다. 동료들이 나를 유령처럼 대하더라도 냉정함을 유지한 채 육아휴직 신청서를 작성하리라. 그리고 부당한 징계 덕분에 나는 무자비한 경쟁자들 대신 따뜻한 가족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만방에 공표하리라.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사무실은 고요했고 인사발령의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뿌따는 U3 프로젝트의 중간보고를 준비하느라 아침부터 자리를 비웠고 M과장은 인도에서 방문한 엔지니어들과 점심까지 거르면서 회의를 진행하였다. C사원은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해결했던 업무들에 대해 간단히 보고하더니 곧장 대전으로 출장을 갔다. 하지만 나는 언제 누가 나를 찾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자리를 오래 비우지 않았고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마치 최후의 유언을 앞둔 사형수처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육아휴직 신청서는 반려되었다. 옥외 재떨이 주위에서 내게 라이터를 빌려준 동료들만이 나의 갑작스런 변화를 불길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울산의 터미널 부근에서 콩나물 해장국을 먹다가 전화로 들은 이야기는 사실 물침대 위에 누워서 꾼 꿈의 일부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또는 조직 내부에 숨어 있던 에밀 졸라가 역사적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인사위원회에 항소한 것은 아닐는지. 일탈의 충동에서 벗어난 지 수일이 지났는데도 파국의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헤드헌터로부터 전화도 걸려오지도 않았는데, 불경기에다 고급 실업자들의 숫자를 감안하면 이해 못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도 S과장처럼 옥외 재떨이 주위의 동료들에게 내기를 걸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해와 논쟁을 막기 위해 필요한 건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의심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였다. 동료들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스마트폰의 도움 없이 선뜻 내기에 참여하는 것을 두려워했으나 돌아서서 곧장 결과를 확인하고는 사라진 행운을 아쉬워했다. 매번 내기는 성사되지 않았고 아무도 정답을 궁금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항상 내기에서 이겼다. 설령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도 나는 내기의 목적을 훼손하지 않았다. - 이것은 야바위꾼이 100% 승률을 가지고 행인의 주머니를 뒤지는 방법과 같다. 즉, 행인은 세 개의 종지 중 하나 속에는 반드시 주사위가 들어 있다고 간주하고 돈을 걸지만 사실은 세 개의 종지 어디에도 주사위는 없다. 다만, 행인이 고르지 않은 두 개의 종지를 야바위꾼은 결코 들춰 보이지 않음으로써 내기의 공정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도 S과장처럼 승자의 지위를 내세워서 패자의 슬픔을 조롱하지 않았다. 나는 허름한 음식 앞에서도 겸손하였고 동료들의 투정을 이해하였다. 그렇다고 허기가 사라질 때까지 침묵하거나 사무적인 화제들을 이어가지도 않았다. 합리적인 경영철학과 엄격한 다원주의가 권장되는 외국계 회사에서 퇴근 후 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벌이는 사적 내기는 적어도 한국인들의 애사심과 이타심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래서 나는 S과장과는 달리 2차나 3차 술자리까지 기꺼이 따라나섰고 내 차례가 되어 지갑을 꺼내는데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나는 어느 덧 문딜러로 불리기 시작했다. 문씨 성을 가진 딜러라는 뜻이겠으나, 틈만 나면 엄지와 검지를 문질러 대면서 내기를 제안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달 거래자(Moon dealer)로 이해하기로 했다. 미국인들에게 달은 가끔씩 몽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점점 나는 국제적 수준의 행동강령을 체득하고 있었다. 인도인 프로젝트 매니저인 뿌따는 인종과 피부색, 종교 때문에 부당한 차별을 받았다는 사실도 잊은 채 내가 이룩한 성과들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 눈에 보이지 않는 동료들이 일손을 돕고 있어서 우리의 프로젝트는 일정보다 더 빨리 진행되었다. - 하지만 언제나 파국은 번개처럼 왔다가 모든 걸 끝내고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자, 이제 나의 종말을 맘껏 즐기고 조롱하시라. 당신과 나 둘 중 누가 더 절망적인지 내기해도 좋다.

 

파국에 닿기 전에 S과장이 잠들어 있는 벽제의 납골당에 다녀오지 못한 걸 진심으로 후회한다. 그리고 O에게 전화로라도 고맙다고 말하지 못한 나의 졸렬함에 용서를 구한다.

 

어느 날 오후 옥외 재떨이 부근에서 사소한 내기가 벌어졌고 누군가 나를 이겼다. 가을비가 쏟아지려는 찰나였기 때문에 마음이 급해서 어떤 질문과 어떤 대답이 오갔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꺼내 정답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나는 서둘러 패배를 시인하였다. 그래봤자 높은 승률의 명성에 흠집조차 남길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날 저녁 회사 앞 호프집에서 만나 치킨과 맥주를 접대하였다. - 그러고 보니 B과장이라는 것 이외에 어느 부서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 맥주 한 잔에서 시작된 한기가 몸을 비틀기 시작하자 서둘러 술자리를 파하고 귀가하려는데 헤드헌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여자 목소리였다. 서울에 위치한 전자회사가 나의 이력서에 관심을 보이며 부장의 직위와 천만 원 이상 높은 연봉 조건을 제시했다는 것이었다. 솔깃한 제안이었으나 즉답을 피한 채 나는 아내와 상의해서 연락하겠다고 말했는데 전화를 끊고 나서야 그 오만한 대답이 완곡한 거절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기의 습관 덕분에 나는 현재의 일상에서 평온을 완전히 되찾았기 때문에 이번 기회를 잃게 되어도 별로 아쉬울 건 없었다. 그보다 더 파격적인 제안이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집에 도착하자 아내와 은미가 없었다.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샤워를 끝내고 감기약을 삼켰을 때 아내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자초지종도 없이 당분간 은미와 목포의 친정으로 내려가 있겠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아내는 휴대전화의 전원을 껐고 장모를 깨우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나는 내일이 만들어 낼 기적을 기대하며 잠이 들었다. 하지만 새벽에 다시 찾아온 한기가 나를 비몽사몽의 틈새에 밀어 넣고 누르는 바람에 잠을 설쳤고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규정보다 1시간이나 늦게 출근하였는데도 다행히 사무실에는 단 한 명의 목격자도 없었다. 가쁜 숨을 고르며 달콤한 행운을 만끽하고 있을 때 마치 수렵물이 덫 속에 들어가기를 기다린 사냥꾼처럼 인사팀장이 나타나서는 영문으로 작성된 징계명령서를 건넸다. 인사팀장의 해독에 따르면, 습관적으로 상사의 권위를 침해하여 업무를 지연시킴으로써 회사에 중대한 손해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동료들과 도박을 즐겨 위화감을 조성했으며 경쟁업체에 회사의 주요 기술 정보를 건네려 했기 때문에, 회사는 나를 즉시 해고하고 민사소송을 진행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온몸의 피가 정수리로 모여들었지만 나는 즉각 반박하지 않았다. 말은 오해만을 늘려갈 따름이다. 차라리 소송의 결과를 두고 내기를 제안하고 싶었지만 상대가 너무 많고 모호하여 일일이 대응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만을 달라고 부탁했다. 인사팀장이 사라지자 사무실은 안전한 무인도가 되었다. 십여 분을 서성거리면서 동료들을 찾다가 문득 아내와 은미가 사라진 집의 풍경이 겹쳐지면서 섬뜩해졌다. 잠시나마 고립감을 떨쳐버릴 작정으로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인류들과 교신을 시도해보았으나 바닷물을 마실 때처럼 갈증만 더욱 불어날 뿐이었다. 결국 나는 인터넷 검색엔진으로 에고서핑을 즐기다가 나와 관련하여 8년 전에 작성된 신문기사 한 편을 발견하였다. - 울산의 PC방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자료였다. - 나의 첫 번째 직장이 경쟁사로 이직한 직원을 상대로 기술 유출의 소송을 제기했다는 내용이었는데, 실명만 거론되지 않았을 뿐 부서와 이직날짜는 나와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런 송사에 휘말린 적이 없었던 데다가 그 소송을 준비하고 있는 실무자가 바로 S과장이었다니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분명 악몽이었다. 아니면 누군가 악의를 품고 나의 과거를 조작하였을지도 모른다.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는 미래가 과거보다 앞서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 그러니까 누군가 최근에 작성한 신문기사의 날짜를 바꾸어 옛 신문 파일 속에 끼어 넣은 것이다. - 그런데 더욱 기함할 사건은 2년 전 죽은 S과장이 내가 보낸 메일을 읽고 어제 퇴근 무렵에 답장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S과장의 부인에게서 발송되었다고 생각했다. - 죽은 자들의 이메일 계정은 일정기간 동안 유가족들이 관리할 수 있도록 묵인해 준다고 들었다. - 내용은 내가 S과장을 협박해서 뜯어낸 이천만 원을 이번 달 말까지 돌려주지 않으면 가족에게 나의 비밀을 모두 폭로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어떤 여자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그런데 수신인으로 내 이름뿐만 아니라 아내의 이름까지 지정되어 있는 게 아닌가. 여전히 휴대전화의 전원을 꺼놓은 아내에게 에둘러서라도 닿기 위해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있을 때 뿌따가 M과장과 C사원을 대동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나는 많은 인도인들이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면서 세계의 정보기술 분야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뿌따는 U3 프로젝트의 전자패널 개발을 위해 미국의 경쟁업체에서 사장이 직접 영입한 베테랑 프로그래머 중 한 명이다.

 

[1] . 아직 이해관계나 인간관계 뒤얽힌 이전투구에 휩싸이지 않은 그대들, 아직 어떤 비열한 사건에도 연루되지 않은 그대들, 순수와 선의로 목청껏 외칠 수 있는 그대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정의의 완성을 위해 일어날 것인가?- <나는 고발한다>, 에밀 졸라 저, 유기환 번역, 책세상, 2005년, p67

 

[2] "산다는 게임에서 가장 큰 판돈인 삶 자체가 걸려 있지 못할 때엔 삶의 흥미는 줄어든다."

 

[3] O는 둔내터널(3300m)이라고 주장했지만, S과장의 주장대로 죽령터널(4600m)이 더 길다.

 

 

 

 

 

 

 

 

 

 

 

 

 

 

 

 

 

 

 

 

 

 

 

경인일보 한 알의 여자 손솔지

 

여자의 어릴 적 꿈은 알사탕이 되는 것이었다. 어깨가 더 좁아지고 몸이 점점 더 조그마하고 달콤해져서 동글동글한 알사탕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이왕이면 새하얗고 시원한 향이 나는 박하사탕이 되고 싶었다. 여자의 아버지가 삼겹살집에서 나올 때 카운터에 구비된 이쑤시개와 함께 한 움큼 쥐어오던 그 박하사탕처럼 작고 새하얗게. 아 달다, 아버지는 트림을 하며 만족한 듯 중얼거리곤 했다. 아 예쁘다, 참 작아. 여자가 레이스 달린 새하얀 원피스를 입을 때면 아버지는 꼭 칭찬했다. 아버지는 여자를 허벅지 위에 앉히고 하얀 레이스 자락 밑으로 드러난 그녀의 말랑말랑한 무릎을 조몰락거렸다. 그럴 때 여자의 바람은 간절해지곤 했다. 더 조그맣고 하얗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버지의 입속은 따뜻할 것이다. 아버지의 혓바닥은, 여자의 곱게 딴 머릿단을 쓰다듬는 커다란 손바닥처럼 커다랗고 부드러울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입속에서 혓바닥에 이리저리 쓸리며 점점 녹아간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행복했다.

 

그녀는 가끔 꿈속에서 알사탕이 되었다. 그 꿈은 여자의 하얗고 보드랍던 뺨에 여드름 꽃이 필 무렵까지 계속 되었다. 꿈속에서 여자는 그 어떤 사탕보다 달콤했고 부드럽게 금방 녹아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작아졌다. 하지만 눈을 뜨면 그녀의 몸은 꼭 하루만큼 알사탕에서 멀어졌다. 줄어들길 바랐던 팔과다리는 날이 갈수록 길고 가늘어졌고 거짓말처럼 가슴이 부풀었다. 레이스가 누렇게 변색된 새하얀 원피스는 얼굴과 팔 한쪽만 끼어 넣어도 투득, 실밥 터지는 소리가 났다. 겨우 두 팔과 얼굴을 다 집어넣으면 치맛자락은 그녀의 팝콘같이 부푼 젖가슴에 뭉친 채로 걸려있었다. 여자는 새하얗게 되고 싶어 매일 칼슘 우유를 한 컵씩 마셨던 것을 후회했다. 여자가 억지로 치맛자락을 가슴 밑으로 끌어내렸을 때 투득, 투득, 원피스는 갈라졌다.

 

"안에 아직도 멀었어?"

 

신경질적으로 화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여자는 빠르게 생리대를 뜯었다. 팬티를 입고 일어나서 치맛자락을 끌어내렸다. 변기 안에 무겁게 가라앉은 생리 혈이 스멀스멀 변기구멍 쪽으로 새까맣게 몰려 기어갔다. 붉다 못해 검붉은 색이 나는 핏물은 분명 여자의 몸속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여자는 매 달마다 보는 것이지만 그 붉은 빛깔이 못내 신기해서 허리를 숙여 변기 안을 구경했다. 금세 또 노크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아쉽게 변기 물을 내렸다. 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던 동료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여자의 어깨를 툭, 치듯 스치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다니는 회사에는 화장실 안에 변기가 하나뿐이었다. 여자는 한 쪽 벽에 웅크리듯 달라붙은 세면대 앞에 섰다. 거울에는 여기저기 튄 물방울이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그 지저분한 거울에 비치는 얼굴을 바라보며 손을 씻었다. 이제 여자의 얼굴 어디에도 여드름의 흔적은 없었다. 가볍게 화장을 한 그녀의 뺨은 보드라워보였고 동그란 이마는 매끈했다. 여자는 목이 가늘고 피부가 하얘서 연분홍빛 블라우스가 잘 어울렸다. 알사탕이 되는 것을 포기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다행인 점이 있다면 여전히 피부가 하얗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여자는 언제나 그늘을 찾아 앉아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녀의 피부는 푸른 핏줄이 비칠 정도로 하얗다. 여자는 가슴이 팝콘처럼 부풀어버리고 나서부터 리본으로 장식된 브래지어만 입었다.

 

여자의 교복 단추가 가슴께에서 힘겹게 잠길 때, 독서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학생은 여자에게 화이트를 빌렸다. 독서실 칸막이에 기대어 여자가 꾸벅꾸벅 졸 때쯤 남학생은 여자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몰래 숨어들어간 여자화장실 가장 끝 칸막이에서 남학생은 속삭였다. 아 예쁘다. 꼭 선물 같아. 벌어진 여자의 교복 셔츠 사이로 꽃분홍의 리본이 보였다. 가슴 가운데에 리본이 붙어있는 그 브래지어는 여자가 가장 아끼는 속옷이었다. 남학생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개봉하는 설레는 손길로 브래지어 버클을 풀었다. 그 다음 달 여자의 생일에 남학생은 브래지어를 선물했다. 여자가 가진 것보다 더 큰 리본이 달린 브래지어는 담겨있던 상자의 포장지와 똑같은 빨간색 도트무늬였다. 여자는 남학생이 떨리는 손길로 교복 단추를 끄를 때마다 다른 색의 리본이 달린 브래지어를 입었다. 여자는 매일 매일 새로운 선물이고 싶었다. 남학생이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화장실 문을 잠글 때 여자는 가슴이 벅찼다. 남학생은 매점에서 사먹는 푸딩보다 여자의 속살이 더 부드럽다고 속삭였다. 남학생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은 푸딩이었고 여자의 젖가슴은 그것보다 더 몰캉거렸다. 그 사실이 여자는 자랑스러웠다. 남학생은 수능 성적표가 나오자 여자에게 말했다. 이제 연락하지 마, 이 싸구려 군것질 같은 년.

 

"색이 너무 싸 보이지 않아?"

 

다른 동료의 옆자리로 와 앉은 동료는 아직 물기가 남은 손을 치마에 닦으며 그 물음에 대답했다. 아냐, 올봄에는 핫핑크가 유행이잖아. 그런가? 하고 되묻는 그 입술은 여자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지금 여자의 블라우스 안에 입은 브래지어에는 동료의 립스틱과 똑같은 색의 리본이 달려있었다. 여자는 아직도 리본이 달린 속옷만 입었다. 여자는 이제 또 다른 남자를 위해 준비된 선물이었다.

 

"변 과장이 자꾸 입술을 쳐다보는 것 같단 말이야."

 

"그 변태새끼가? 께름칙하다. 얼른 지워."

 

티슈로 입술을 꾹꾹 지워내는 동료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여자는 입모양으로 변태, 하고 중얼거렸다. 여자가 생각하기에 남자는 변태하기 전의 애벌레 같았다. 여자의 몸 위에서 꿈틀거리는 남자의 손가락은 마디가 두껍고 자글자글 주름이 많았다. 틀림없는 애벌레였다. 검다 못해 푸른, 잎사귀 같은 그녀의 체모 사이를 그 손가락이 꿈틀꿈틀 기어갈 때 여자는 간지러움에 몸을 움츠렸다.

 

애벌레는 여자에게 생소했다. 어린 시절 여자의 집에는 언제나 화려하게 변태한 후의 나비들만이 있었다. 여자는 아버지가 쥐어준 사탕을 입에 넣으며 액자를 가리켰다. 내 원피스 같아요. 흰 배추 나비라고 하는 거야. 아버지는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각기 무늬가 다른 나비들은 날개 이곳저곳이 가느다란 핀에 찔린 채 액자 안에 살포시 정렬되어 있었다. 크기도 제각기고 개중에는 괴기스러울 정도로 큰 나비도 박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움직이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는 그 나비 위로 덮인 유리에 손을 댈 수도 있었다. 그런 용기 있는 행동은 아버지의 눈을 피해서 해야 했다. 아버지는 여자가 액자들을 건드리면 무섭게 화를 냈다. 활짝 핀 꽃은 곧 져버려. 예쁘지가 않지. 가장 예쁠 때는, 피어나기 전이야. 그래서 가장 아름다울 때 찍어둬야 하는 거야. 아버지는 풍경 사진을 잘 찍었다. 그래서 여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카메라 앞에 서있었다. 다리가 긴 카메라 삼각대는 여자보다 키가 컸다. 아버지는 카메라 앵글을 잘 맞추기 위해 뜸을 들였다. 여자는 그 시간이 너무 심심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날따라 요구르트 배달을 빨리 끝낸 어머니가 방문을 열었다. 아직 아버지는 앵글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방문 앞에 허물처럼 떨어져있던 여자의 원피스를 어머니가 주웠다. 우뚝 멈춰선 어머니의 발 앞에는 징검다리처럼 여자의 팬티가, 그 앞에는 레이스가 달린 여자의 양말이 떨어져 있었다. 여자는 알몸으로 아버지 방에서 어머니에게 끌려나온 이후,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희귀한 나비를 찾아서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여자는 어머니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는 여자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 한 통도 보여주지도 않았고,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아주 먼 오지로 떠났다고 했다. 어머니는 혹시 여자가 알사탕처럼 작고 달콤해질 것 같아서 두려웠던 게 아닐까. 여자는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런 예상에 더 확신을 갖곤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허벅지 위에 여자가 앉아있는 것을 보는 족족 여자를 끌어내렸고, 아버지의 방을 구경하러 가면 자꾸만 방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여자보다 키가 크고 피부가 누랬으니 여자가 자신보다 먼저 아버지의 알사탕이 될까봐 두려웠을 것이다. 여자는 지금도 그렇게 확신한다.

 

"변태는 식욕도 왕성해."

 

"맞아, 그 먹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다이어트가 된다니까. 속이 울렁거려. 이게 무슨 회식이야. 저 혼자의 만찬이나 다름없지."

 

여자가 화장실 칸막이에서 나와 손을 씻자 세면대 앞에서 맞담배를 피우던 동료 둘은 여자를 싸늘하게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그녀에게서 신경을 끄고 담배연기를 서로 후욱, 뱉어냈다.

 

"너 봤어? 그깟 놈도 마누라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아? 어디 꼽추 같은 게 애처가 흉내 내려고 회식자리에 떡하니 꽃다발이랑 과일 바구니를 옆에 두고. 먹기는 또 돼지같이 처먹고…."

 

길게 이어지는 담배 연기에 콜록거리며 여자는 화장실을 나왔다. 시끌벅적한 테이블의 빈자리에 쏙 들어가 앉았다. 바로 앞자리에 마주앉아있는 남자의 이마에서 땀이 촉촉하게 배어나왔다. 여자는 그 까무잡잡한 이마를 손으로 쓸어 닦아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소매가 맘대로 둘둘 접힌 팔뚝으로 제 이마를 쓱 닦아냈다. 그리고는 다시 열중해서 살점이 달라붙어있는 돼지 뼈를 쪽쪽 빨아먹는다.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를 흘깃 쳐다보곤 다시 뼈를 발라 먹는다. 여자는 고개를 숙여 젓가락을 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어젯밤 여자의 손가락을 입에 넣고 쪽쪽 빨았다. 그건 남자의 버릇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다섯 손가락을 차례로 빨아대며 중얼거렸다. 달다, 너무 달아. 여자는 순간 손가락이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어 젓가락을 내려놓고 손을 마주 비벼댔다.

 

남자는 사래가 들려 쿨럭이며 입을 막았다. 여자는 어깨를 들썩이는 남자 앞으로 물 컵을 쓱 밀어주었다. 남자는 잔기침을 하며 여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벗겨진 이마 위로 잘 빗겨져있던 적은 양의 머리칼이 흐트러져 흘러내렸다. 남자는 여자가 밀어준 물 컵을 놔두고 다른 컵에 물을 따랐다. 남자는 회사 사람들과 있을 때 여자가 아는 척 하는 것을 싫어했다. 여자를 똑바로 쳐다보는 적도 없었고 여자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그럴 때에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는, 옆에 놓인 꽃다발이나 과일 바구니 같은 것이었다. 여자는 며칠 전에 태어났다는 남자의 셋째 아이 이름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예쁜 이름이지? 아주 조그맣고 예뻐. 남자는 잠들기 전 그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자아이는 말이야, 남자애들이랑 또 달라. 미스 안은 아직 애를 안 낳아봐서 모르겠지만, 여자아이는 품에 안는 느낌부터 다르다니까. 뭔가 좀 더 말랑말랑하고 향긋한 느낌이라고. 여자는 앞 접시에 담긴 감자를 젓가락으로 조그맣게 부수었다. 우리 집 여편네는 원래 몸에 살집이 좀 있어서, 내 딸도 그렇게 클까봐 걱정이야. 내 딸이 미스 안을 닮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좀 더 여리하게 클 것 아니야. 응? 남자는 모로 몸을 구부린 여자의 자그마한 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다 먹었으면 이제 일어나지."

 

포식한 남자가 일어나며 말했다. 남자의 무릎 부근에서 두둑, 하고 뼈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다들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겼다. 남자는 옆에 놓았던 꽃다발과 과일바구니를 부스럭거리며 챙겨 들었다.

 

"과장님, 정말 애처가십니다."

 

사람들은 그 말에 웃거나 동의하는 말을 두어 마디 던져주었다. 남자는 쑥스러움과 귀찮음이 섞인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것들을 쳐다보았다.

 

"온통 붉은 것뿐이네요?"

 

누군가의 물음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붉은 색을 좋아해. 남자의 말에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장난 섞인 야유를 던졌다. 여자는 남자의 손에 들린 것들을 바라보았다. 밑으로 고개를 떨어뜨린 붉은 장미들과 바구니 위로 튀어나온 탐스러운 사과 몇 알. 싱싱해 보이는 딸기들과 붉디붉은 석류. 과일들이 신선해서 바구니 위로 포장된 비닐 안쪽에는 축축하게 물기가 있었다.

 

붉은 색을 좋아하는 것은 남자의 아내만이 아니었다. 예뻐. 오늘은 꼭 작고 통통한 체리 같네. 무얼 바른 거야? 남자는 식성이 좋아 여자의 입술을 터뜨릴 듯 깨물었다. 여자는 입술 신경이 잔뜩 시려왔다. 핏물이 여자와 남자의 입안으로 섞여 넘어갔다. 아니야. 시큼털털한 맛이 나는 게, 석류가 확실해.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킥킥 꼬마같이 웃었다. 홍시 셔벗 먹어본 적 있어? 살짝 얼린 홍시가 시원하고 참 달아. 남자는 여자의 다리 밑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홍시에 대해서 얘기했다. 언제나 남자는 관계를 가질 때면 자신의 미각이 기억하는 음식들에 대해 묘사했다. 여자는 남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보면 여자는 남자의 혀 아래에서 홍시 셔벗이 되었다가, 어린 양 스테이크가 되기도 했다가, 본 적도 없는 음식의 특제 소스가 되었다.

 

"이것 좀 잠깐 들어줘."

 

얼떨결에 남자의 뒤에 서있던 여자는 두 손 가득 꽃다발과 과일 바구니를 들었다. 남자는 허리를 숙여 구두 뒷부분을 끌어 잡고 발을 끼워 넣었다. 몽환적인 장미향이 여자의 코밑으로 진하게 스쳤다. 여자는 품 안에 가득 껴안은 장미 다발 속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이렇게 화려한 꽃다발을 받아본 적이 없다.

 

졸업식 날 교문 앞에서 파는 시들시들한 장미 한 송이를 그녀에게 내민 사람은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아버지였다. 여자가 어머니보다 더 키가 커진 것에 비해 아버지는 그리 많이 늙지 않았다. 아버지의 목에는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여자는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을 떼기도 전에 아버지가 채집한 나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지로 여행을 갔다던 아버지는 정말 희귀한 나비를 잡아서 돌아왔다. 아버지가 여태 채집한 나비 중에 가장 큰 나비였다. 하늘거리는 하늘색 스커트를 입고 해바라기 모양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상냥하게 웃으며 여자에게 인사를 하는 손가락이 사뿐히 내려앉은 나비 같았다. 밀가루와 계란에 흠뻑 젖은 교복을 입고 있던 여자와 별로 나이 차이가 나 보이지 않았다.

 

새장가 가는 건 그렇다 쳐도 그 계집애, 몇 살이라니? 그 애 부모는 그걸 허락했다니? 어머니는 고개를 묵묵히 숙이고 있었다. 여자는 방문을 닫았다. 문 안으로 할머니의 울음 섞인 신세 한탄이 새어 들어왔다. 그때 여자의 가슴 속에서 따갑게 불꽃같은 것이 튀었다.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바로 여자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여행을 떠난 이후부터 부쩍 말랐다. 말 수도 줄었고 목소리도 낮아졌다. 어머니는 미련했다. 아버지의 곁에서 여자를 자꾸 끌어내지만 않았어도 여자는 아버지가 여행을 떠나지 않도록 붙잡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아버지의 허벅지 위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더라면 여자는 더 부드럽고 달콤해졌을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만족스러운 웃음소리를 들으며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자와 함께 뒷자리에 탄 남자동료가 내리고 그 뒤로 한참이나 더 떨어진 동네에 와서야 여자는 뒷자리에서 조수석으로 와 앉을 수 있었다. 여자는 조수석에 놓여있던 꽃다발과 과일바구니를 뒷좌석으로 옮겼다.

 

"한 동안은 퇴근하고 바로 병원으로 가야 해. 미스 안은 그동안 밀린 야근이라도 하던지 해. 여편네가 딸애 낳은 값으로 큰 루비 알이 박힌 반지를 사달래. 정말 지겨운 여자야. 미스 안은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고개를 저으려다가 여자는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두툼한 손가락이 달린 남자의 손은 참 커다랗다. 남자는 운전대에서 한 손을 떼어내 여자의 머리칼 사이로 집어넣었다. 굳은살이 박이고 주름이 잔뜩 진 손가락들이 여자의 여린 뒷목을 가만히 주물렀다. 예쁘다… 미스 안은 소박해서 참 귀여워. 꿈틀거리는 손가락에 여자의 머리칼이 휘어 감겼다. 그 손에 감기고, 그 손이 쓰다듬는 머리칼은 방금 씻어낸 상추 다발처럼 파릇파릇하고 생생하다.

 

여자는 현관에 구두를 벗어놓고 들어와 바로 바구니의 비닐 포장을 뜯어냈다. 달큰하고 끈적거리는 향이 금세 퍼졌다. 온통 새치름하게 붉은 과일들은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다. 여자는 딸기 꼭지를 하나 따내고 입속에 집어넣었다. 과즙이 가득한 딸기는 이에 쉽게 짓물렀다.

 

사람의 손에 닿지 않게 높은 가지에 매달린 열매일수록 달다고 하더라. 그렇지만 나는 쉽게 따먹을 수 있는 게 좋아.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봉긋 솟은 여자의 젖꼭지를 깨물었다. 난 좀 시큼하고 떫은 맛도 좋아하거든. 여자는 진득한 과즙을 목뒤로 삼켜내고 곧바로 딱딱한 석류 알을 집어 들었다. 톡톡, 두드리자 노크 소리가 날 정도로 껍질이 두꺼웠다. 여자는 부엌에서 과도를 가져왔다. 터진 배꼽 같은 꼭지부분으로 칼끝을 겨눴다. 꾹 찔러 넣어 금이 가게 벌려놓고 양 손으로 잡아 뜯었다. 투드득, 원피스 실밥 터지는 소리가 났다. 자글자글한 알맹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반투명한 핏빛이었다. 어떤 루비 보석보다도 영롱한 빛깔이었다. 그 빛깔이 너무도 고와서 여자는 혀를 내어 알맹이들을 입속으로 거뒀다. 탱탱한 알들을 토독, 토독 씹을 때마다 여자는 눈가를 찡그렸다. 시큼한 맛이 그녀의 혀에 자르르 흘러들었다.

 

시큼하고 떫은 과일은 새로워서 좋아. 남자는 여자의 귓속으로 혀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여자는 귓속으로 울리는 그 목소리를 기억해내곤 자그마한 루비들을 모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여자는 좀 더 새로워지고 싶다. 신선하고 산뜻해지고 싶다.

 

우리 엄마는 날 낳을 때 태몽으로 복숭아 꿈을 꿨대. 산 속에 복숭아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대. 근데 그 복숭아가 얼마나 뽀얗고 탐스러운지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았대. 웃기지. 남자애를 낳는데 왜 그런 꿈을 꿨을까. 그런 건 너 같은 여자애를 낳을 때 꿔야 하는 건데. 남학생은 그렇게 속삭이며 여자의 교복 치마 속으로 손을 뻗었다. 동그랗게 튀어나온 여자의 엉덩이를 쥐어본 남학생은 대학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날 늦봄 무렵 여자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너를 잊을 수가 없어.

 

독서실 근처의 공원으로 밤늦게 남학생을 다시 만나러 갔을 때, 여자는 남학생이 잊을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여자는 떨어진 벚꽃 잎과 흙이 묻은 치마를 털어내 다리에 꿰었다. 나무에 기대어서서 여자를 가만히 지켜보던 남학생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가끔 그립긴 한데, 넌 너무 빨리 질려.

 

여자는 앙상하게 사과 뼈대만 남겨놓는 것을 마지막으로 바구니 속의 모든 과일을 해치웠다. 포만감은 곧장 편안한 수면으로 연결된다. 남자는 모텔 침대에서 여자의 맨 허리를 끌어안고 잠이 들 때면 두어 번 세게 흔들어도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다. 텅 빈 주스 통이 탕 탕 거실 바닥에 몇 번 튀며 굴러갔다. 여자는 팔 다리를 쭉 펴고 거실 가운데에 누웠다. 씻고 싶지도 않았고 스타킹을 벗고 싶지도 않았다.

 

예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어. 나이가 있으니 별 수 없겠지만 여기저기 축축 쳐지고 그나마 쓸모 있는 구석이라곤 거기 하나 뿐이야. 그 여편네는 참… 애들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미스 안으로 갈아치우는 건데. 여자는 묵묵히 남자의 양말을 벗겼다. 입가에 적포도주가 말라붙은 남자가 힘겹게 숨을 뱉어내자 여자는 넥타이도 풀어주었다. 빠르게 잠속으로 빠져드는 남자는 본능적으로 단 맛을 찾아 혀를 내밀어 입가를 닦아냈다.

 

적 포도. 여자는 발딱 눈을 떴다. 빈 바구니와 부스러기처럼 널린 장미 꽃잎 사이에서 핸드백을 찾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닫을 준비를 하는 동네 슈퍼로 조급하게 걸어와 여자는 지갑을 꺼내들었다. 주인아저씨는 여자가 들기 쉽게 포도를 세 상자씩 노끈으로 묶어 여자의 양 손에 쥐어주었다. 손이 무거워진 상태로 슈퍼에서 나오던 여자는 다시 뒤돌았다. 다른 과일들 사이에서 붉은 알을 하나 발견했기 때문이다. 톡 터진 입 끝을 야릇하게 벌린 석류 한 알을 핸드백에 넣고서야 여자는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여자는 다시 차근차근 입속으로 열매들을 집어넣었다. 처음에는 포도 껍질을 벗겨내고 포도 씨도 발라서 모아놓았다. 그러나 포도를 다섯 송이 째 상자에서 꺼냈을 때부터 송이를 손에 든 채로 한 알씩 똑 똑 따서 씹어 삼켰다. 껍질도 씨앗도 모두 달게 삼켰다. 목 뒤로 까슬까슬하게 넘어가는 씨앗을 느끼며 여자는 우스운 상상을 했다. 뱃속에 모인 씨앗들이 꿈틀거리며 움트는 상상이었다. 여자는 씨앗이 자라서 포도 알 같은 것이 주렁주렁 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왕이면 포도 알보다는 석류 알갱이들처럼 더 작았으면 좋겠다. 더 조그맣고 더 많은 알맹이들이 무수히 많이 자랐으면 좋을 것이다. 세포처럼 작고 많은 그것들은 이로 씹을 때마다 토독, 탁, 타닥, 제각기 소리를 내며 터질 것이다. 어떤 것은 새큼하고 어떤 것은 순하디 순하게 달고 어떤 것은 놀랄 정도로 신 맛이 난다면. 어떤 혓바닥이라도 그 새로운 맛을 모두 핥아먹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이다. 여자는 손바닥이 온통 과즙으로 끈적끈적한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금세 반수면 상태로 접어들었다.

 

안 돼, 잃으면 안 돼.

그녀는 잔뜩 몸을 웅크렸다.

동그란 공처럼. 아무것도 잃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나는 순진한 년이 좋아. 여자가 탄 버스가 신호에 걸렸을 때 여자는 차창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걔는 진짜 순진해. 아냐, 순진한 게 아니라 머리가 텅 텅 빈 것 같아. 뇌가 쪼그라든 대신에 젖가슴만 부풀었나봐. 오토바이에 등을 기댄 채 남자애들은 꼭 까마귀 떼같이 웃었다. 그 중 한명은 붉은 도트무늬로 포장된 상자를 세 상자 안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고 여자가 탄 버스는 그 속옷가게 앞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빨래 건조대에 걸린 속옷들은 명확히 어머니와 여자의 것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속옷은 늘 민무늬의 흰색이거나 칙칙한 살구 색이었다. 시장 거리에 널린 채로 파는 그것들은 전혀 창피하거나 비밀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여성이 봐도 여성스럽지 못했다. 어머니는 어떻게 그런 것을 입을 생각을 하는지, 여자는 정말 궁금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놔두고 여자에게만 연락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만나러 오렴. 아버지의 손은 여전히 컸고 자상했다. 여자의 뺨을 어루만지며 아버지는 여자에게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옛날에는 무릎에 앉힐 수 있을 정도로 귀여웠는데 어느새 이렇게… 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 처량해서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가 안쓰러워졌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찍어둬야 해. 그리 많이 늦지는 않았어. 여자는 비좁은 아버지의 사진관 구석에 스웨터를 벗어 놓았다. 싸늘한 공기에 맨살이 노출되자 팔뚝에 좁쌀 같은 소름이 돋았다. 사진관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액자 속에는 하나 같이 뽀얀 뺨을 가진 아기들의 돌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 새뽀얗고 토실한 뺨들이 꼭 동글동글한 알사탕 같아서 여자는 그 액자들 앞에서 옷을 벗는 것이 부끄러웠다. 자, 이걸로 머리를 틀어 올려서 고정시켜. 아름다운 부위를 가리면 안 되니까. 커다란 나비의 것이 분명할 흐린 물색의 머리끈으로 여자는 머리를 묶어 올렸다. 걱정할 것 없어, 날개처럼 양 팔을 벌려봐. 여자의 아버지는 신중한 눈으로 여자의 몸을 훑었다. 그리곤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겨드랑이 가까이의 팔뚝 안쪽 살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연한 살은 쉽게 여자에게 촉감을 전했다. 아, 예쁘다. 그래, 아직 예쁜 부분이 남아있구나. 기특하다.

 

아, 하는 만족스런 아버지의 감탄사는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것이었다. 여자는 감격으로 눈 안쪽이 뜨겁고 축축해져서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숨소리는 여자와 달리 세찬 바람소리를 내며 콧구멍에서 새어나왔다. 아버지는 좋은 구도를 잡기 위해서 뜸을 들였다. 그녀를 좀 더 예쁘게 다듬기 위해서 아버지는 여자의 몸을 찰흙처럼 부드럽게 반죽했다. 차가운 바닥에 여자의 엉덩이가 닿고 등뼈와 뒤통수가 닿았다. 찬 기운은 설레고 시원하게 느껴졌다. 살이 닿는 부분의 바닥은 오히려 곧 온기로 미지근해졌다. 다만 뒤통수만이 좀 시리다고 느껴질 때쯤, 잠가놓았던 촬영실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여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팔에 닿는 여자의 반대편 손바닥은 끈적끈적한 것이 바짝 말라붙어 거칠한 느낌이었다. 팔을 움직이자 바닥에 말라붙은 포도 씨에 팔뚝 살이 쓸려 따가웠다. 여자는 포도 껍질에 미끄러졌다가 다시 바닥을 짚고 허리를 일으켜 앉았다. 복부에 거북하고 답답한 느낌이 심했다.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여자는 과식했던 지난밤을 생각했다. 거실 벽시계 큰바늘은 이미 한 시를 지나있었다. 여자는 이미 출근할 기분이 아니었다. 어차피 회사 어느 자리에 앉아있더라도 남자는 여자와 눈 한번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창가의 항상 같은 자리에 놓인 화초 화분 같은 것이어서 대부분 그녀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못할 것이다.

 

여자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언제나 홀쭉해서 허리띠가 남아돌던 그녀의 복부가 팽팽하다. 팽팽한 정도가 아니라 눈에 띄게 도드라져있다. 그러나 일단 참기 힘든 요의가 자꾸만 밑으로 쏠려서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팬티를 내리고 변기에 앉은 여자는 순간, 짜릿함과 함께 가볍게 몸을 떨었다. 녹녹하고 미지근한 지린내가 변기에서 올라온다. 그녀는 팬티에 달라붙은 생리대가 새하얀 것을 보곤 다리를 좀 더 벌려 다리 사이로 변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 누는 오줌은 빛깔이 진했다. 그러나 변기 안에는 가라앉은 핏물이 조금도 없었다. 생리를 시작한 지 오늘이 이틀 되는 날이었다. 보통 그녀의 생리 주기는 일주일을 조금 넘는다. 이틀째는 핏물의 농도와 그 양이 가장 많은 날이었다. 희한한 일이다. 여자는 고개를 더 숙여 변기 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몸이 안 좋은 날이어도 하루만에 생리가 끝나지는 않았다. 여자의 생리 혈은 유난히 핏빛이 진하고 철분 냄새가 비릿하고 지독했다. 그녀가 자전거보조 바퀴를 빼고 처음으로 신나게 집 앞 거리를 달렸던 날, 안장에서 내리던 순간의 그 냄새를 여자는 잊을 수가 없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였다. 지독한 냄새와 함께 분홍색의 안장에는 붉은 핏물이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었다.

 

이제는 거리를 걸을 때에도 얌전하게 걸어야 해. 어머니는 물에 락스를 풀어 여자의 치마를 담그며 말했다. 여자는 그 독한 소독내에 코를 틀어막으며 화장실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대야에 물이 점점 묘한 색으로 오염되는 것을 구경하며 여자는 어째서? 하고 생각했다. 남자애와 너무 가까이에 앉거나 몸싸움을 하며 장난을 치는 것도 안 돼. 어째서? 여자는 날이 갈수록 목소리가 거칠게 변하는 남자애들이 좋았다. 어머니는 얼룩덜룩한 여자의 치마를 건져내며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잃는 건 쉬워. 너무 쉬워. 대야에서 쏟아진 불그죽죽한 구정물이 하수구로 끌려들어갔다.

 

여자는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었다. 뭔가 시원한 것으로 배를 채우고 싶었다. 이미 불룩한 배는 무언가를 채워 넣지 않아도 충분해보였지만 여자는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시원한 냉기가 피어나왔다. 여자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싱그러운 포도 향이 살랑살랑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여자는 간밤에 사온 포도들을 야채 칸에 넘치도록 넣어놓은 것을 기억해냈다. 기쁜 마음으로 야채 칸을 열었다.

 

촬영실 문을 열고 들어온 나비의 손에는 보온 도시락 통이 들려있었다. 흰색 털실로 짠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있었다. 아버지가 흰 원피스를 좋아한다는 것을 나비도 알고 있었을까. 혹시 아버지는 나비를 허벅지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진 않을까. 여자의 자리였던 그 허벅지 위에.

 

그 짧은 순간 여자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나비를 올려다보았다. 나비의 손에서 그 묵직한 도시락 통이 턱, 무겁게 떨어졌다. 그제야 여자의 아버지는 여자의 가랑이 사이로 집어넣었던 손가락을 천천히 빼내며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뺨에서 목을 타고 주륵, 빠르게 진물 같은 게 흘렀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아버지의 눈동자는 축축함으로 번들거렸다. 전에 본 적 없는, 잔뜩 일그러진 아버지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딸애가 변했어… 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도 애처로워서 여자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 귀엽던 딸애가… 창녀처럼 달려들었어.

 

냉장고 경고음은 지친 듯 끊어졌다. 불 꺼진 냉장고 앞에 앉아서 여자는 훅, 숨을 내쉬었다. 아예 부엌 바닥으로 들어낸 야채 칸 안에는 이제 포도 가시만이 잔뜩 남아있다. 야채 칸 구석에 떨어져 박힌 포도 한 알을 떼어내 입속에 넣는 것을 끝으로 이제 포도 알은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졌다. 그녀는 무심결에 동그란 언덕 같은 배 위에 왼팔을 걸쳤다. 몰라보게 부풀어 오른 뱃속에서 미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여자는 두 손바닥을 청진기처럼 배 위에 올렸다. 여자의 심장박동과는 또 다른 소리였다. 다른 것이 살아있는 소리였다. 여자는 놀라지 않았다. 그 일정한 울림은 여자가 여태 들어본 어느 소리보다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여자는 조심스레 배 위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녀는 뱃속에 가득 들어찬 그 무언가가 아주 싱싱하다는 걸 느꼈다. 여자는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남자는 아, 하고 그녀의 존재를 인식했다. 여자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울컥 넘어오는 감격을 삼켜내며 그녀가 낼 수 있는 가장 예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뱃속에서 뭔가 새로운 것이 꿈틀거려요!"

 

남자는 잠시 말없이 있었다. 여자는 그 시간을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남자는 여자의 뱃속에 무언가가 둥지를 틀었다면 그것이 남자 자신의 씨앗일 것을 알았다. 남자는 갓난아이까지 합해서 애가 셋이다. 남자는 찡얼거리는 애 울음소리에 밤을 지새웠던 순간들이 머릿속에 빼곡하다.

 

"병원에 가. 떼어버려. 돈을 줄 테니까."

 

미스 안, 남자는 그녀를 부르고는 훅 콧김을 불었다. 여자의 귀에 닿은 수화기에서 콧김이 시끄러운 소음으로 부서졌다.

 

"혹시, 뭔가를 바란다거나. 쓸데없는 생각일랑 하지도 마."

 

알아들어? 왜 대답을 안 해? 여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여자는 아직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지금 뱃속에 있는 무언가는 매우 싱싱하다. 새롭다. 남자를 충분히 만족시킬 것이다. 남자는 지금 이 싱그러운 느낌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여자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몰라서 입술을 벙긋거리고만 있었다. 남자는 작게 욕지기를 뱉어냈다.

 

"…좋아, 지금은 바쁘니까 액수는 나중에 협상해. 너도 똑같아. 요물 같은 년."

 

여자는 끊긴 전화기를 들고 뚜 뚜 뚜 이어지는 소리를 멍하니 들었다. 남자는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여자는 숨 쉬기가 버거워 블라우스를 벗었다. 브래지어 버클도 끌렀다. 골반 밑을 꽉 조이는 치마도 벗고 뜯어지기 일보직전인 팬티스타킹도 뜯어냈다. 고무줄이 극한까지 늘어난 팬티를 마지막으로 벗고 나니 여자는 홀가분해졌다. 부풀어 오른 배와 가슴은 그 경계가 모호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부풀면 몸매가 둥그렇고 부드럽게 이어질 것이다. 분명 뱃속에는 싱그러운 알맹이들이 옥시글거리고 있을 것이다. 역시 껍질과 함께 씨앗까지 모두 먹기를 잘했다. 그 자잘한 알갱이들은 모두 제각기 탱글탱글 잘 여물 것이다. 더 부풀려서― 여자는 뭔가 더 채울 게 없을까 냉장고를 올려다보았다.

 

냉장고 중앙 칸에 석류 한 알이 오롯이 담겨있다. 여자는 냅다 팔을 뻗어 석류를 쥐었다. 불그스름한 빛깔이 처녀의 뺨처럼 새치름하니 비밀스럽다. 여자는 속삭이듯 벌어진 석류의 입가에 양 손가락을 집어넣어 벌렸다. 뚝, 겨우 금이 갔다. 과도는 거실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거기까지 기어가기에 여자의 몸은 이제 너무 무거웠다. 여자는 더 악력을 주었다. 그러던 중 배꼽 부근이 못 견디게 간지러워져 배꼽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심하게 튼 자신의 배꼽은 한겨울에도 본 적이 없었다. 여자는 마치 곧 피어날 꽃봉오리처럼, 심하게 불거져 나온 참외배꼽을 구경했다. 여자는 그녀의 가느다란 검지로 슬쩍 배꼽 위를 어루만졌다. 근질근질한 기운을 참기 힘들어졌다. 결국 여자는 살살 배꼽 위를 긁다가 어느 순간 강하게 손톱에 힘을 주었다. 투득! 살이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반사적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뱃속에 가득 차있던 것이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시큼하고 달달한 향이 그녀를 에워쌌다. 안 돼, 잃으면 안 돼. 그녀는 잔뜩 몸을 웅크렸다. 동그란 공처럼. 아무것도 잃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허벅지로 배를 꾹 막은 상태로 다리를 꾹 감싸 안았다. 그녀의 몸은 거친 손바닥들이 전해주던 뜨거운 체온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팔목을 잡아 올리고 허벅지 살을 밀어젖히던 강한 아귀힘은 금세 그녀를 지치게 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 스스로를 감싸 안은 팔은 매우 여리고 온기마저 미지근했다. 앙상한 종아리를 휘감은 그녀의 팔이 얇디얇은 끈처럼 그녀를 상냥하게 휘감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내 안에 포근히 담겨본 적이 있던가. 어느 순간 그녀는, 온 몸에서 울리는 스스로의 심장박동을 들으며 마음 속 소란이 잠잠해 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박동은 느린 클래식처럼 그녀의 귓가로 흘러들었고 그녀의 머리통과 팔뚝과 발은 천천히 쪼그라들고 있었다. 그녀는 혈관을 흐르는 핏물 색이 점점 흐려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알 수 있었다. 비로소 그녀가 진정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처음에 남자는 그녀가 싱그러운 사과 같아서 그녀를 꾀었다. 조금씩 상해서 지금처럼 짓무르기 전에 빨리 여자를 버렸어야 했다. 모름지기 여자는 싱싱함이 생명이다. 남자는 여자의 집 앞에 주차를 하곤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너무 많은 돈을 원하면 싸대기를 몇 대 갈겨서라도 수술실로 끌고 갈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알고 있는 여자는 꽤 순한 편이어서 그렇게까지 하지 않고 조금만 겁을 줘도 될 것이다.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다. 남자는 괘씸해져 현관문을 몇 번 발로 뻥 뻥 찼다. 그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고리를 돌렸는데 너무도 쉽게 현관문이 열렸다. 그녀는 참 헤프다. 혼자 사는 주제에 문도 잠그질 않았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과일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남자는 코를 틀어막고 안으로 들어섰다. 꼭 남자의 아내가 생리를 할 때 화장실에 뿌리던 향수 냄새 같았다. 비릿하고 어딘가 달큰한 냄새는 남자를 숨 막히게 했다. 거실 바닥에 지저분하게 포도 씨와 껍질, 먹다 남은 사과, 장미 꽃잎과 같은 쓰레기가 널려있다. 남자의 눈에 익숙한 과일 바구니가 비어있다. 저걸 혼자 다 먹은 건가? 돼지 같은 년.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냉장고 문이 열려있다.

 

"…혹시 거기 있어?" 남자는 냉장고 문 쪽으로 다가간다. 냉장고 칸이 밖으로 나와 있고 포도를 먹고 남은 찌꺼기들이 널려있다. 더러운 광경에 남자는 눈가를 찌푸렸다. 대체 어딜 간 거지? 발걸음을 돌리려던 남자는 다시 냉장고 쪽으로 가까이 갔다. 더러운 과일 찌꺼기들 사이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이게 뭐지? 보석인가? 남자는 눈을 크게 뜨며 허리를 숙였다. 남자의 눈이 닿은 곳에는, 새하얀 박하사탕 한 알이 오롯이 빛나고 있었다.

 

 

 

농민신문

 

금령은 예나 지금이나 봄이 되면 차밭에 올라 찻잎을 딴다. 지금에야 산 중턱에 정자도 세우고 바위가 닳아 의자 구실을 하고 있지만, 금령이 젊었을 때만 해도 녹차밭에는 마땅히 쉴 만한 곳이 없었다. 금령이 힘겹게 차밭에 오른다고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감나무를 심어 곶감을 만들어 팔라고 권했다. 하지만 금령은 산에 올라 찻잎을 땄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멀리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차밭이 좋았다. 찻잎을 따는 봄이 가면, 또 봄을 기다렸다. 겨울은 길고 무서웠다. 더욱이 녹차나무가 눈에 뒤덮일 때마다 금령은 자신의 어린 시절과 마주하는 것 같았다.

 

 이틀 만에 방문을 나서는 오늘 새벽, 금령은 어릴 적 기억을 밀어내려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다미 넉장 크기의 나무로 지은 막사. 빛조차 들지 않는 방.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요강을 비우기 위해 밖으로 나왔지만 금령을 괴롭히는 기억이 다시 찾아왔다. 마당으로 내려온 금령은 반쯤 열린 대문을 보자 리엔을 떠올렸다. 리엔은 하루에 한번씩 금령을 찾아와 금령의 이름을 불렀다. 할머니… 금령 할머니. 그렇게 이름만 부르다 돌아간 리엔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금령을 찾기 위해 방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금령은 리엔을 생각하며 대문을 활짝 열었다. 리엔은 지난주부터 오늘을 기다렸다. 오늘 있을 수업을 위해 여러편의 시를 지었다며 금령을 볼 때마다 자랑을 늘어놓았다. 금령은 요강을 마당에 내려놓고 그 위에 돌을 올렸다. 안을 비워야 했지만 빈속에 오줌 냄새를 맡고 싶지 않았다. 이틀 동안 금령이 먹은 거라고는 물과 간장에 비빈 밥 한공기가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모든 냄새가 역했다. 금령은 마당의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씻었다. 리엔이 오려면 서너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전에 차밭에 갔다 와도 늦지 않을 것이다. 금령은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챙겼다. 책과 공책을 가방에 넣고, 필통을 열어 세자루의 연필과 지우개를 확인했다. 가방을 양어깨에 둘러메자 거울 속으로 금령의 가방이 보였다. 이제 아무리 허리를 펴려고 해도 금령은 허리를 펼 수가 없다. 마루에 걸터앉은 금령의 발이 고무신코를 건드리자 고무신이 제자리에서 갈팡질팡 흔들렸다. 금령은 천천히 발을 넣었다.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찼다. 여밀 옷깃이 없자 낡은 스웨터의 보풀만 애써 떼어냈다. 마을은 조용했다. 말하고 있는 건 새벽 공기와 꺾어 신은 고무신이 땅을 끄는 소리였다. 귀 밝은 개가 멀리서 짖었다. 한녀석이 짖기 시작했으니 서로가 서로에게 짖어댈 것이다. 금령은 고무신을 바로 신었다. 마을을 벗어나자 자갈이 많은 물소리가 났다. 깊지 않은 냇가를 따라 걷다 보면 거짓말처럼 강이 시작된다.

 

 금령은 마을에서 차밭까지 늘 걸어 다녔다. 다원에서 이동차량을 보내 주는 날도 있었지만 어차피 찻잎을 따는 날은 날씨가 좋은 날이다. 금령은 좋은 날, 이 강을 만나기 위해서 걸었다. 강이 끝나자 바위틈에서 자란 야생차나무가 밭으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차밭의 뒤로 또 다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어 산이, 산을 품었다. 금령은 굽은 허리를 펴 가며 자신이 오를 차밭을 가늠했다. 하지만 금령의 굽은 허리는 하늘도, 산을 품고 있는 또 다른 산도, 올려다보지 못했다. 밭에는 금령 외에 아무도 없었다. 곡우도 넘기고 오월 중순이 코앞이니, 첫물차도 아니고 새벽이슬까지 생각해 가며 잎을 따낼 사람은 없었다. 금령이 서둘지 않았어도 사람들은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에야 차밭에 올랐을 것이다. 금령은 녹차나무 앞에 섰다. 찻잎의 머리가 금령의 무릎에 닿았다. 금령은 마디가 굵은 손가락으로 찻잎을 쓸었다. 살아 있는 것들은 거칠지만 따뜻하다. 생기였다. 금령이 한잎 한잎 찻잎을 따내자 녹차나무가 작게 흔들렸다. 금령은 찻잎을 따다 말고 멈춘, 그래서 죽은 듯 보이는 강물을 마주 보았다. 강물 위에는 작은 물결이 일렁이고 있을 것이다. 물결은 바람을 따라 오고 가고, 또 가고 왔다. 그렇게 조금씩 제자리에서 벗어나는 강물을 금령은 육십년이 넘게 바라보고 있다.

 

 한달 전, 금령이 작은 목소리로 육십년이라고 리엔에게 말해 주었을 때, 리엔은 엄마야! 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정말이에요? 라고 리엔이 되물었을 때, 금령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짓말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거짓말. 그건 사실이었다. 금령은 자신이 이 마을에 온 지, 육십년 하고 이년이 지났는지 삼년이 지났는지 헤아리지 못했다. 금령 할머니 그래서 서울 가요? 라고 리엔이 되물었을 때, 무슨, 그래서 가나. 볼일이 있어서 가지, 라고 금령이 말했다. 리엔은 금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금령 할머니 서울 간대요. 라고 외쳤다. 찻잎을 따던 사람들이 일제히 금령을 쳐다보았다. 그날 이후 마을 사람들은 금령의 볼일을 알아내기 위해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금령의 외출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금령이 리엔과 한글을 배우기 위해 읍내에 간다고 했을 때에도 마을 사람들은 금령의 주위를 맴돌았다. 누군가 금령의 과거를 기억해내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젊은 금령이 했던 말들 대신 자신들이 물었던 질문을 떠올렸다. 고아? 그럼, 결혼은? 금령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고아는 아니었고, 남편이 없어도 결혼은 했었다. 아무것도 없는 현재였지만 금령의 과거는 복잡했다. 사실 위안부라는 말도 금령은 몇년 전 TV를 보고 알았다. 그전까지 금령은 자신이 누구였는지 정리하지 못했다. 돈을 벌겠다고 집을 나간 어린 금령이었는지, 하루에 스무명이 넘는 남자를 상대해야 했던 기막힌 금령이었는지, 부모한테 버림받은 젊은 금령이었는지, 이제는 늙어 죽을 날 기다리는 늙은 금령인지, 자신도 알고 싶었다. 어쨌든 금령은 죽고 싶은 순간이 많고 적음이 살아 있는 명줄과 상관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오래전의 질문들이 금령에게 쏟아졌다. 작은 파문이었다. 왜 서울에 가는데? 서울에 누가 있나? 금령은 다시 침묵했다. 그렇게 유난을 떨던 마을 사람들은 정작 금령이 언제 서울에 가는지 묻지 않았다. 리엔이, 그런데 언제 가요. 서울? 하고 물었을 때에야 그러게 언제 가는데 서울? 하고 물었다. 금령은 또다시 침묵했다. 없었던 일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길은 침묵이었다. 금령의 서울 나들이는 이틀 만에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금령은 마을 사람들이 조용해진 후에야 기억을 더듬었다. 서울이 초행길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청계천. 청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개천이라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개천을 보러 간다고? 마을 사람들 틈에서 금령이 처음으로 자기 목소리를 냈다. 그럼 나도 갈란다. 서울. 며칠 후 마을에 버스가 왔다. 서울로 가는 버스였다. 산 너머로는 처음이었다. 금령은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산 너머에 개천이 없을 리 없겠지만, 있다는 생각을 잊고 살았다. 금령은 용기를 냈다. 흰 자갈 위에 빨래를 말리던 곳, 강둑 바위에 앉아 소꿉놀이를 하던 곳. 그런 개천을 그렸다. 그런 곳이 서울 한복판에 있다니. 버스는 빨랐지만 금령의 마음을 따라잡지 못했다. 마음이 세월을 거슬러 갔다. 어린 금령이 돈을 벌겠다며 집을 떠났다. 그것은 손에 들린 작은 보따리만큼 간단한 일이었다. 너무 추워 가족과 헤어지는 일이 슬픈지도 몰랐다. 희망에 속았는지도 모른다. 어린 금령은 이틀 동안 기차를 탔다.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무르는 금령의 손이 빨갛게 얼었다. 나무로 지은 막사에 도착한 어린 금령은 어째서 사람이 사는 일이 이리 간단치 않은가, 묻고 또 물었다. 그러다 어째서 사람이 죽는 일은 이리 간단치 않은가, 를 늙은 금령은 반복해서 묻고 있다.

 

 버스가 청계천이라며 문을 열자, 젊은 여자가 버스에 올랐다. 여자 가이드는 친절했다. 제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게 이걸 목에 걸어 주세요. 마을 사람들은 가이드가 건네는 명찰을 목에 걸었다. 마을 사람들이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버스에서 내렸다. 그냥 물길이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서울이 한양이 되기 전부터 청계천은 있어 왔다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원래는 도성 안의 쓰레기를 배출하는 하수도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일제 때 청계천을 중심으로 이쪽은 한국인, 저쪽은 일본인이 살았다고 덧붙였다. 이쪽도 저쪽도 이제는 모두 높은 건물들뿐이다. 마을 사람 누구도 가이드의 설명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복개된 계천을 다시 파헤친 누군가의 거대한 힘이었다. 가이드가 힘주어 말하는 것도 그것이었다. 이제는 옛날과 달리 깨끗한 물이 흐른다고. 그래서 직장인들은 물론 여행객들에게도 휴식을 제공하고 있다고. 세상에나 서울이 달리 좋은 게 아니네. 물 나와라 하면 물 나오고, 차 나와라 하면 차 나오고. 누군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다가오는 차를 보며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금령도 신기했다. 이어 물길 위로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렸다. 직장인들을 위한 음악회… 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음악 소리에 묻혔다. 하나둘 거리의 사람들이 음악회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금령은 귀를 막았다. 가이드가 물길을 따라 걸어 보라고 했지만, 금령도 마을 사람들도 음악 소리와 멀어지기 위해 뒤돌아 걸었다. 청계천에는 물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 사람보다 건물이 더 많았다. 건물보다 차가 더 많았다. 그래서 시끄러웠다. 서울은 건물과 사람과 차로 이루어진 도시였다. 버스에 오른 사람들은 여기 말고 더 좋은 데를 찾았다. 물과 사람과 건물과 꼬리를 잇는 차 말고, 시끄러운 악기 소리 말고, 다른 곳. 가이드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두세군데 더 돌아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을 태운 버스가 붉은색 건물 앞에 섰다. 가이드가 손짓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저기 맞은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일본 대사관입니다. 수요일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고 있지요. 가이드의 설명대로 건물 앞에는 노인들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금령처럼 나이 든 여자들이었다. 그 뒤로는 교복을 입은 어린 여학생들이 서 있었다. 학생들 머리 위로 커다랗게 새겨진 글자들이 흰색의 천 위에서 깃발처럼 펄럭였다. 노인 한분이 마이크를 쥐고 큰소리로 외쳤다.

 

 “일본은 위안부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라.”

 

 버스 안으로 노인들의 목소리가 새어들었다. 사죄하라. 사죄하라. 금령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금령이 육십년 넘게 숨기며 살아온 일들이 소리 내고 있었다. 금령은 하늘 아래 이런 곳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과 그런 곳이 있었다. 금령의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난 군인들이 방에 들어오면 눈을 감아. 얼굴을 안 보면 낫지 않을까. 너는? 난 절대로 눈을 감지 않아. 똑바로 봐야지. 그래야 길을 가다 만나도 때려 줄 거 아니야. 그러니까 너도 눈을 감지 마. 아니, 난 그렇지 않아. 내가 그 사람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면 그 사람도 날 기억 못할 거 아냐. 내가 여기 있는 거 아무도 몰라야 해.

 날이 새면, 해가 지면, 어린 금령은 아이들과 이런 이야기를 했다. 밖에 나가 살 궁리였다. 그러면 심장이 뛰었고, 기분이 좋아졌다. 고향에서 보던 꽃도 보고, 물도 보고, 엄마도 아빠도 어린 동생들도 보고 싶었다. 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어린 금령은, 금령처럼 어린 아이들은, 견뎌내기 위해 눈을 감아도 보고, 눈을 떠서 기억하려고도 해 보았다.

 

 마을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금령은 대사관 앞에서 본 노인들 중 누가 자신처럼 눈을 감으려 했는지 알고 싶었다. 아니면 누가 눈을 뜨려 했는지 궁금했다. 그러기 위해선 말을, 글을 배워야 할 것 같았다. 상처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을 배워야 할 것 같았고,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글을 배워야 할 것 같았다.

 다시 갈 수 있을까? 서울. 서울을 다녀온 이후 금령은 다시 그곳에 가고 싶었다. 리엔만이 금령을 믿어 주었다. 서울, 나도 가 봤어요. 서울에서 오빠 만났어요. 그 다음날 여기 왔어요. 오빠랑. 리엔은 제 나이보다 갑절이 많은 남편을 그렇게 불렀다. 리엔은 요즘 들어 남편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리엔이 산부인과에 다녀온 지 보름이 지난 뒤였다. 리엔, 배가 나오려면 아직은 더 있어야 해. 금령이 리엔의 손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그럴수록 리엔은 금령을 향해 배를 내밀었다. 아니에요. 배 나왔어요. 보세요. 이만큼 나왔어요. 리엔이 크게 웃자 리엔의 고르지 않은 치아가 드러났다. 금령도 리엔을 따라 웃었다. 리엔이 임신했을 때 제일 기뻐한 사람은 리엔의 남편이었다. 신작로를 들어설 때부터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이 마을 전체를 밝힐 듯 했다. 그날 이후 리엔은 남편과 같이 걷는 일이 잦았다. 남편이 앞서 걸으면 리엔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다 리엔이 성큼 다가가 남편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런 리엔의 행동에 볼이 벌게진 남편은 주변을 둘러보며 리엔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리엔이 입을 샐쭉거렸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리엔은 다시 다가가 남편의 손을 잡았다. 잡고, 뿌리치기를 반복하는 두사람의 뒷모습에선 갑절이라는 나이 차이도, 리엔이 바다 건너 피부색이 다른 나라에서 왔다는 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금령은 두사람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렇게 살아.

 

 임신을 한 후 리엔은 다원에서 보내 주는 버스를 타고 차밭에 올랐다. 그러다 혼자 길을 걷는 금령을 보면 차에서 내렸다. 할머니. 같이 가요. 리엔은 금령의 손에 들린 걸망을 제 어깨에 멨다. 말이 서툰 리엔은 자주 웃었다. 긴 질문이나 대화에는 ‘예’, ‘아니오’로 짧게 대답했고, 시간이 지나자 ‘사랑해요’와 ‘좋아해요’를 자주 넣어 말했다. 드라마, 한국 드라마, 너무 좋아요. 금령도 가끔 리엔에게 말했다. 그래 리엔, 나도 네가 좋아. 서울에 가면 너한테만은 꼭 말해 줄게. 하지만 금령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틀 전 새벽, 금령은 무작정 집을 나섰다. 한시간을 넘게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금령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좋은 생각만 하자던 마음이 기어코 사라졌다. 청계천을 처음 보던 날, 금령은 대사관 앞에서 노인들이 소리치는 소리를 들었다. 마이크가 이 사람 손에서 저 사람 손으로 옮겨질 때마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하지만 거리의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으로 보세요. 노인들 머리 위로 금령이 읽지 못하는 글자들이 흰색의 천 위에서 흔들렸다. 빨강, 파랑, 검정의 글자들은 금령에게 그림이었다. 느끼고 싶어도 느낄 수 없는 것이 글자였다고 금령은 리엔에게 말했다. 그래서? 금령 할머니도 리엔이랑 같이? 리엔이 오빠와 아이를 위해서 한글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금령은 리엔에게 같이 배우자고 말했다. 그래, 나도 같이. 그렇게 금령과 리엔은 한글을 배웠다. 한글, 베트남말보다 쉬워요. 그러니까 한글 예쁜 떡 같아요. 수업 첫날 리엔이 한글이 맛있게 생겼다고 말하자, 맛있게 생겼으니 많이 먹고 빨리 배우라는 선생님의 농담에 모두가 웃었다. 금령은 모든 게 신기했다. 책상도 의자도 네모반듯한 교실도. 칠판을 보고 앉은 금령은 예뻤다. 주름이 펴지고, 눈동자가 커졌다. 하지만 금령은 제 얼굴을 보지 못했다. 칠판에 그려지는 자음과 모음이 헛갈렸지만, 금령은 그리고 또 그렸다. 자음과 모음은 언제나 헷갈렸다. 어째서 자음이 모음보다 많은가? 금령이 물었다. 지나가던 선생님이 금령의 옆에 앉았다. 그건 자음이 자식이고 모음이 엄마라서 그래요. 엄마가 자식을 낳잖아요. 많이. 뭐… 많이 낳을 수도, 적게 낳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모음은 자식을 많이 낳았어요. 그래서 자음이 많아요. 모음보다.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자음과 모음이 엄마와 자식간이었다니. 글자는 귀한 것이었다. 함부로 그려서도 함부로 배워서도 안 되는. 하지만 리엔에게 자음과 모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편지 쓸 거예요. 오빠한테. 술 먹지 말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리엔은 빨리 한글을 배워 자신보다 나이가 갑절이 많은 남편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했다. 그리고, 말만 할 줄 알면 안된대요. 오빠가 그러는데 글을 알아야 아이를 가르칠 수 있대요. 저는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 싶어요. 지금 쓸 수 있는 글자는 제 이름과 오빠 이름밖에 없다는 리엔은 오개월이 지나자 복도에 걸린 ‘다문화 가정을 위한 방안’이라는 글자를 읽어냈다. 그런데, 저런 거 싫어요. 이제 여기가 제 고향이에요. 그래서 저런 거 싫어요. 금령은 리엔의 뜬금없는 말에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리엔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엄마가 그랬는데, 아이 낳고 살면 거기가 고향이랬어요. 그러니까 우리도 한국사람들이랑 똑같이 해 주면 돼요. 왜냐하면… 이제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니까요. 말을 마치고 힘차게 교실로 들어가는 리엔이었지만 금령은 분명 리엔의 목소리가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먼저 들어간 리엔이 생글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금령이 옆에 앉자 리엔이 서둘러 말했다. 그러니까, 문장. 선생님이 오늘부터 문장을 배운댔어요. 그날 금령과 리엔이 문장을 짓기 위해 배운 단어는 모래와 모레였다. 녹차밭 아래로 흐르는 강에는 모래가 많았다. 밤이면 외지 사람들이 모래를 훔쳐 갔다. 군청에서 모래를 지키기 시작했다. 셀 수도 없는 모래를 사람들이 지켰다. 금령은 모래가 모레보다는 나은 글자라고 생각했다. 모레는…. 금령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 금령은 다다미 넉장 크기의 방에서 살았다. 나무로 지은 막사는 열다섯개의 좁은 방이 붙어 있었다. 엉성하게 짜 맞춘 나무 틈으로 신음 소리가 새어들었다. 아이들의 신음 소리는 앙칼지지 못했다. 낮게 그러다 끙끙 앓는 소리로 변했다. 그 소리를 관통하며 눌러대는 또 다른 소리가 있었다. 남자들이 내는 신음 소리였다. 금령이 누운 방바닥까지 들썩이게 만드는 소리. 귀를 막을 수도, 입을 다물 수도 없는 상황을 금령은 견뎌냈다. 그리고 밤마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다다미방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빙그르 방이 방의 꼬리를 잡았다. 그 순간 아이들이 방에 불을 붙였다. 활활 타오르는 불 속으로 아이들이 뛰어들었다. 그렇게라도 죽을 수 있다면 죽고 싶었다. 꿈에서 깬 방은 어두웠다. 너무 어두워 방이 좁은 줄도 잊었다. 날이 밝으면 죽을 거야. 그렇게 다짐하며 새벽을 기다렸지만 날이 밝자마자 일본 군인이 거칠게 문을 열었다. 죽을 시간도 없었다. 어쩌면 죽어 있던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금령은, 살아 있는 아이들은, 살아가야 할 이유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게 모레가 아니었을까? 내일이 아닌 모레는 집에 갈 수 있다는. 금령은 칠판에 적힌 모레를 공책에 그려 넣었다. 칸이 작아서 밖으로 비껴 나갔다. ‘ㅐ’와 ‘ㅔ’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말할 때는 똑같이 들리지만 적을 때는 다르게 적어야 하는 것들이 있어요. 라는 말과 함께 ‘내’와 ‘네’가 ‘래’와 ‘레’ 밑에 다시 적혔다. 금령에게는 의미 없는 글들이었다. ‘ㅐ’를 옮겨 적은 공책을 내려다보며 금령은 제집으로 가는 길을 생각했다. 저렇게 곧장 걷다가 중간에 골목으로 들어가면 내 집인데. 그렇다면 ‘ㅔ’는 작은 시냇물. 냇가 밑으로 저렇게 물이 흐르지. 도대체 말과 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말하는 모든 것을 적어내는 게 글이라면, 이런 글을 아무나 배워도 되는 것일까. 금령은 등을 꼿꼿이 펴고 앉아 있는 리엔을 쳐다보았다. 리엔이 웃고 있었다. 리엔은 저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서울 가는 기차시각이라고 금령에게 적어 주었다. 금령이 천천히 눈으로 읽었다. 서울 가는 기차가 하루에 여섯번.

 

 며칠 후,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선 이틀 전 수요일. 청계천은 여전했다. 금령은 기억을 더듬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잔디가 깔린 광장은 기억났다. 나무도 처마도 없는 잔디밭을 사람들은 광장이라고 불렀다. 금령은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금령의 고무신이 잔디밭에 파묻혔다. 고무신을 감싼 잔디가 금령의 발목을 간질였다. 일본 대사관에 갔다 온 이후, 금령은 노인들이 들고 있는 글자를 읽고 싶어 리엔과 한글을 배웠다. 금령은 서둘러 걸었다. 잔디밭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나무 사이를 걸었다. 바람이 불었고, 이마에 땀이 맺혔다. 금령의 손이 가늘게 떨렸지만 누구도 그녀가 위안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금령은 택시를 잡았다. 택시는 사람들을 지나 차들을 지나 건물들을 지나 일본 대사관 앞에 섰다. 금령은 걸음을 멈췄다. 지난번처럼 노인들이 마이크를 손에 쥐고 소리치지 않았다. 대신 노인들 머리 위로 선명하게 새겨진 글자들이 흔들렸다. 글이, 소리가 되어 금령에게 말했다.

 

 우리는 쉽게 죽지 않는다.

 

 말이, 글이, 사라진 순간을 금령은 잘 알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이 들려왔을 때, 어린 금령은 겁에 질렸다. 이틀 동안 기차를 탔으니 먼 곳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 나라 말이 사라질 정도로 먼 곳일 줄은 몰랐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수수께끼였고, 근심이었고, 치욕이었다. 일본 군인들이 무슨 말을 하던지 금령은 웃어야 했고,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렇게 웃고, 고개를 끄덕이길 반복한 탓일까. 어린 금령은 죽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래로 여전히 금령은 살아 있다.

 금령은 일본 대사관 앞을 뒷걸음질로 돌아 나왔다. 이내 주변이 조용해졌다. 금령은 택시가 지나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사람들이 광장이라고 부르는 잔디밭으로 돌아온 금령은 눈 위에 찍힌 제 발자국을 찾아 걷듯 어정어정 걸었다. 여전히 거리의 누구도 금령이 위안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두둑, 두둑. 잔디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미 하늘은 잿빛이었다. 사람들이 서둘러 뛰기 시작했다. 금령도 비를 피해야 했다. 하지만 숨을 곳이 없었다. 광장은 나무도 그늘도 처마도 없었다. 그런 곳이 광장이었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들 어디로 도망친 것일까? 금령도 숨고 싶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금령처럼 그곳에는 숨을 곳이 없었다. 비에 흠뻑 젖은 금령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축 처진 젖가슴이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금령이 자신의 봉긋한 가슴을 억세게 주무르던 손길을 생각한 건 그 순간이었다. 금령의 젖가슴도 한때는 예뻤다. 드러누워도 탐스럽게 솟는 가슴이었다. 그 가슴이 늘어져 볼품없는 가죽으로 남을 동안 금령은 하나도 얻은 게 없다. 얻은 게 있다면 자신을 버린 가족과 셈할 수 없는 제 나이이다. 금령이 횡단보도 앞에 서자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순식간에 사라진 사람들이 어느새 금령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하지만 누구도 금령에게 우산을 받쳐 주지 않았다. 금령은 일본 대사관 앞에서 본 글을 떠올렸다. 소리가 되어 다가온 글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어째서 글이 ‘ㅐ’와 ‘ㅔ’를 구분해야 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글은 자신의 개 같은 과거를 대신해야 했고, 젖가슴을 주물러대던 거친 군인들의 손길도 표현해야 했다. 또한 귀국선을 타러 가던 날 죽은 일본 군인의 얼굴을 짓이겨대던 자신의 마음도 기록해야 했다. 피 묻은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짓이겼을 때 군인은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죽었고, 금령은 살아 있었다. 어째서 이 사람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아픔을 모르는가. 이건 너무 불공평했다. 금령은 울고 또 울었다. 끝이라고 생각하니 좋아서 울었고, 왜 군인처럼 죽지 못했는가를 생각하니 슬퍼서 울었다. 금령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이 글이 되고, 글이 소리가 되는 상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에 도착하자, 젖은 몸이 마르기 전에 다시 비가 내렸다. 녹차밭을 지나 강 길을 따라 걸었다. 집에 들어선 금령은 이틀 동안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밤이면 어두운 방이었고, 해가 뜨면 환한 방이었다. 어둠 속에서의 방은 좁았고, 빛이 들어오는 방은 컸다. 금령은 알고 있었다. 좁고 초라한 것은 방이 아닌 금령이 먹어 가는 나이라는 것을. 어린 시절의 금령은, 기억해 내고 싶지 않은 시절의 금령은, 죽고 싶었다. 하지만 거기서는 싫었다. 나무로 지은 다다미 넉장 크기의 방에서는 싫었다. 그래서 다시 새벽을 맞은 어린 금령은 어떤 날은 방이 너무 커서, 어떤 날은 방이 너무 작아서 죽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 어떤 날은 막사 입구에 걸린 간판의 글씨가 예뻐서이기도 했다. 금령은 일본 군인과 간판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기 전 금령은 화장실에 앉아 있었다. 문틈으로 간판의 반쪽이 보였다. 부드럽게 휘어진 글자의 곡선을 따라 금령의 시선이 밑으로 내려갔다. 그때였다. 거칠게 화장실 문이 열리고 일본 군인들이 금령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금령의 굳은 얼굴이었는지, 쪼그려 앉은 어린 금령의 밑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순간 금령은 움직일 수 없었다. 겁에 질린 금령은 저를 보고 있는 군인들을 따라 웃었다. 군인 하나가 금령의 손을 잡아끌었다. 밖으로 끌려 나온 금령은, 저고리만 입은 채 거웃이 그대로 드러난 금령은, 그렇게 사진에 찍혔다.

 집으로 돌아온 금령은 일본 대사관 앞에서 깃발처럼 펄럭이던 글자를 떠올렸다. 그런 글을 짓고 싶었다. 금령은 엄마와 자식간이라는 자음과 모음을 떠올렸다. 자음과 모음이 만나 글이 되고, 글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생명이 되는.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는 글이어야 했다.

 

 아침 햇살이 산 능선에 이끼처럼 자란 녹차밭을 훑고 내려왔다. 이내 금령의 등을 따뜻하게 감쌌다. 금령은 닳아 의자가 되어 버린 바위에 앉았다. 바위틈으로 올록볼록 솟은 녹차나무가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 금령은 녹차나무의 잎들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가까이 맞닿은 나무를 연결하자 모음이 만들어졌다. 이제는 자음 차례였다. 자음은 복잡했다. 많게는 여섯그루의 나무가 필요했다. 금령은 여러개의 녹차나무를 이어 선을 만들었다. 서서히 금령이 써 내려간 글자들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에서 녹차밭을 훤히 비추는, 그래서 있는 그대로 초록빛을 내는 글자들이었다. 금령은 자신이 써 내려간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이제 눈이 와도 너는 자유란다.

 

 금령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침 해가 녹차밭을 비추기 시작했으니, 리엔이 금령의 집에 들렀을 것이다. 리엔은 금령보다 한글을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 드라마, 한국 드라마 리엔 많이 봐서 그래요. 금령은 지난주에 배운 글자를 떠올렸다. 지난주에는 생선가게에 갔다. 가게에서 게를 샀고, 오는 길에 개를 만났다. 금령은 개와 게의 차이를 이해했다. 금령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때였다. 멀리 강을 등지고 리엔이 올라오고 있었다. 녹차밭의 이랑을 오를 때마다 리엔의 몸이 강물에서 솟아올랐다. 리엔이 걸음을 빨리했다. 리엔도 금령을 알아본 듯했다. 리엔이 한손을 치켜들고 흔들었다. 안녕. 들리지 않아도 금령은 들었다. 금령도 손을 들었다. 안녕. 리엔이 멈춰 서서 금령의 위치를 확인했다. 리엔이 길을 바꾸자 둘은 일직선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걸었다. 강물을 등지고 걷는 리엔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금령은 리엔을 향해 천천히, 천천히, 라고 말했다. 리엔이 걸음을 멈추고 양손으로 허리를 받치고 섰다. 이제는 멀리서도 리엔의 불룩한 배가 보였다. 금령과 리엔이 정자 앞에서 만났다. 금령 할머니… 서울 갔었어요? 리엔이 물었다. 금령은 리엔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엔은 금령의 얼굴을 오래도록 쳐다볼 뿐, 서울에 대해서도 이틀 동안 무엇을 했는지도 묻지 않았다. 집에 불이 꺼져 있어 서울에 간 줄 알았다고 그렇게만 말했다. 금령과 리엔이 나란히 산을 내려갔다.

 베트남에도 차밭 많아요. 여기보다 훨씬 커요. 리엔은 할 말이 없을 때마다 고향의 차밭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높아요. 여기보다 훨씬 높아요. 하지만 저기처럼 물은 없어요. 거긴 비가 많이 오거든요. 리엔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고향의 넓은 차밭을 자랑하는 리엔이었지만 찻잎을 따는 리엔의 손놀림은 느렸다. 베트남에선 천천히 따요. 여기는 너무 빨라요. 얘들도 아파요. 그래서 천천히 따야 해요.

 차밭을 알리는 다원의 푯말을 지나자 강의 입구가 시작됐다. 리엔은 오늘 읽을 시를 보여 주겠다며 걸음을 멈췄다. 리엔의 가방에도 금령처럼 책과 공책과 필통이 들어 있다. 리엔이 공책을 꺼내 한장 한장 넘기기 시작했다. 리엔이 한글을 떡 같다고 한 이유도 공책의 칸에 있었다. 베트남에선 이렇게 네모난 공책 없어요. 긴 줄. 그 위에 글 써요. 한국 공책. 한국 떡 같아요. 그날 이후 금령도 떡에 속을 집어넣듯 글씨를 썼다. 맛있는 생각이었다. 공책을 뒤지는 리엔을 뒤로하고 금령은 강물의 물결이 밀려올까 제 키만큼 떨어져 걸었다. 리엔이 금령의 옆에 다가와 섰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당신도 나를 사랑하지요.’ 리엔의 시였다. 리엔이 다시 읽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당신도 나를 사랑하지요.

 

 묻지 않아도 리엔이 누구를 생각하며 지었는지 금령은 알았다. 금령은 글이 소리를 달았다며, 리엔의 손을 잡아 주었다.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단편소설…로스팔로스를 떠나

일곱 번째 출항이다. 불볕더위가 한창이던 오후에는 뜸하더니, 해 지고 불 밝히니까 아이들이 모여든다. 미니 바이킹은 이내 만선이다. 늦게 발동 걸리는 날이 더 재미 좋은 법.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배 가장자리에 박힌 꼬마전구들이 요란하게 반짝거린다. 두껍게 덧칠한 검정 크레파스를 긁어내며 그리는 스크래치화 같다.

 

양쪽으로 우뚝 솟은 아파트 창에 하나 둘 불이 켜진다. 손으로 불빛들을 이어 하늘까지 가로지른다. 머리 위에 시간 구분선이 그려진다. 동티모르에서 별이 켜지는 밤하늘을 본 적이 있다. 하늘이 까매지기만을 기다렸다가 날이 어둡기 무섭게 빛을 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던 별. 밀림에서는 생사의 구분이 따로 없다. 산 것이든 죽은 것이든 모두 생경하게 다가와 비현실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 잊어야 살 수 있다. 그러나 또 다 잊고는 살 수가 없다.

 

바이킹은 씨족사회가 해체되고 계급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완전한 국가를 만들지 못했다. 오랜 시간 부족 간에 피 튀기는 전쟁을 치르다, 바다로 눈을 돌려 정복 길에 나섰다. 비옥하지 않은 땅에서 여러 부족이 공평하게 나눠 먹고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생의 본능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그들은 무법자가 되어 바다를 누볐다. 침략과 약탈, 전쟁은 그들의 삶 자체가 되었다. 그런데 바이킹을 두려워하던 많은 이들이 몰랐던 사실이 있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바이킹도 고향을 떠나기 전에 밭에 씨를 뿌리고 나갔다는 것이다. 항해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여느 민족의 농부들처럼 땅에 감사하며 추수했다고 한다.

 

읽던 책을 덮는다. 바이킹의 항해는 무엇이었을까? 삶에의 몸부림? 하지만 그뿐. 동전의 다른 면을 본다고 동전의 색깔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그들에게 고마운 것은 바이킹이라는 이름과 그들의 이동 수단을 꼭 닮은 배를 가지고 먹고산다는 사실이다. 살기 위해 먼 바다를 휘저었던 그들처럼, 벌기 위해 도시 곳곳을 전전한다.

 

끝자리에 앉은 사내아이가 울음을 터트린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배를 멈춰야 한다. 페달에서 발을 뗀다. 배로 다가가 아이를 안아 내려준다. 어디선가 아이의 엄마가 달려와 아이를 데려간다. 엄마에게 안긴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 커진다. 사고라도 낸 양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편치 않다.

 

배가 출항한 이상 환불은 없다. 항해를 마치고 못 마치고는 오직 선택한 자의 몫이다. 항해 일지를 꺼낸다. ‘NI 52-5-06-4’ 국제 표준 도엽번호를 확인하고, ‘MV 100007’ 현재 좌표를 적는다. 비고란에 ‘낙오1’. 남은 자들은 타고난 뱃사람이기를 바라며 다시 페달을 밟는다. 처음에는 손으로 밀다가, 발로 구르고, 나중에 모터를 잠깐 돌려 속도를 유지한다. 자칫 가속도가 붙으면 사람도 배도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배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 탄력을 받으면 유능하고 늠름한 선장이 되어 선원들을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리고는 사명감에 찬 주문을 외운다.

 

“높이! 더 높이!”

 

선원들은 주문에 이끌려 아파트 옥상을 넘고 도시를 지나 바다로 향한다. 달빛이 출렁이는 바다 위에 배가 닿는다. 이제 선원들은 바빠진다. 제자리를 잡은 선원들이 노 저을 준비를 하고 닻을 올린다. 칼과 방패가 그려진 돛이 펄럭인다. 배 끝은 날렵하게 치솟아 있고 그 위에는 나무로 조각된 바이킹 뿔 투구가 달려 있다. 일렬로 배치된 노를 바라본다. 지중해 해적들이 타던 갤리선이 노를 2단, 3단으로 배치한 것에 비해 바이킹의 배는 모두 1단 배치 방식이다. 지중해는 평온한 바다라 맘껏 속도를 높일 수 있지만, 우리가 활동하는 북해는 거칠다. 이런 바다에서는 속도보다 생존이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안전한 1단 방식이 알맞다.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선원들의 눈이 빛난다. 별 장식이 촘촘히 박혀 있는 밤바다를 향해 오른손을 들어 올린다. 가자! 선원들이 일제히 노를 젓는다. 배가 천천히 물살을 가른다. 바람이 배에 감긴다. 얼굴에 이는 바람이 청량하다. 있는 힘껏 외친다.

 

“높이! 더 높이!”

 

 

눈을 뜬다. 식은땀에 오한이 난다.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는 꿈은 거의 비명으로 시작해 비명으로 끝난다.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도망치고 싶지만 어쩐 일인지 발이 바닥에 붙어 있다. 두 발 다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남자의 시커먼 손이 머리를 후려친다. 벽 쪽으로 나동그라진다. 단말마가 이어진다. 벽이 무너져 내린다. 몸을 짓누른다. 일어설 수도, 여자를 도울 수도 없다. 하이 톤의 비명이 끊겼다 이어진다.

 

멀어져야 할 소리가 오히려 검은 전깃줄처럼 선명해진다.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앉는다. 소리를 따라가 부엌 창문을 내다본다. 날이 어두운데도 나와 있는 사람이 상당하다. 여름 밤 아파트 단지의 활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주차장 한쪽에 색 전구로 띠를 두른 놀이기구가 그네처럼 오르락내리락한다. 소리의 근원지다. 바이킹에 탄 아이들과 줄 서서 기다리는 아이들이 함께 소리를 질러댄다. 배를 실은 트럭 옆에 한 남자가 보인다. 그는 맥주 회사 로고가 찍힌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연신 발을 구른다. 그러면서 흥을 돋우어 주듯 추임새를 넣는데 뭐라고 하는지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한다. 스타킹을 신는데 종아리에 멍이 들어 있다. 손목도 시큰거린다. 어제 또 한 건 했나 보다. 술에 취해 택시를 타고 주소를 부른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다음은 깜깜이다. 어디에서 내렸고 아파트 9층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 억지로 기억을 더듬으려니 두통이 밀려온다. 왼손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집을 나선다. 계단을 내려가는 하이힐 굽 소리가 무겁다. 해머로 동 전체를 부수는 듯하다.

 

엘리베이터는 절대 타지 않는다. 놀이기구도 타지 않는다. 어릴 때 친구의 가족과 함께 놀이동산에 다녀온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때 유일하게 탄 놀이기구는 마법의 양탄자였다. 마법의 양탄자는 앞뒤로 흔들리다 한 바퀴 휙 돌기를 반복했다. 양탄자가 올라갔다 내려올 때마다 아랫배가 간지러웠다. 한 바퀴 돌았을 때에는 울렁증이 일었다. 친구는 두 손을 올려 만세를 부르며 깔깔거렸다. 친구 눈치를 보며 울면서 웃었다. 양탄자에서 내려와 조경수 아래에 구토를 했다. 화장실에 갈 새도 없었다.

 

매일같이 여자를 때리던 남자에게도 간혹 기분 좋은 날이 있었다. 그럴 때면 남자가 천장 끝까지 올려주거나 목마를 태워줬다. 무섭고 겁이 났다. 속이 뒤틀려 내려달라고 울먹였다. 소리를 지르면 지를수록 남자는 신나 했다. 더 높이 던졌다가 받고 더 오래 돌고 또 돌았다. 목마를 타면 그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어 좋았지만, 눈 깜짝할 새에 휙 내던져질 것만 같아 늘 마음 졸였다.

 

지붕을 뚫고 날아간다. 구름을 지나고 옅은 별 하나에 손이 닿기 직전, 거꾸로 선 채 추락하기 시작한다. 아무 의지할 것 없는 운석이 되어 대기를 가른다. 갈수록 땅이 가까워진다. 머리가 내리꽂히는 순간 둔탁한 소리가 난다. 어릴 때 꾸던 악몽은 여전히 생생하다.

 

아직 5층이다. 엘리베이터도 못 타면서 9층에 사는 꼴이라니. 새삼 수정 언니가 원망스럽다. 언니는 보도 뛸 때 만난 십년지기다. 사랑 같은 것은 안 할 줄 알았던 언니는 뒤늦게 유부남과 바람이 났다. 둘은 평생을 약속하며 도시 외곽에 아파트를 얻었다. 그리고 이삼일에 한 번 만나 사랑을 나눴다. 같이 산 지 이태 만에 유부남의 아내가 들이닥쳤다. 회사 기숙사를 핑계 삼은 이중생활치고는 오래 버틴 셈이었다.

 

재단 가위를 들고 온 그녀는 말없이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 시트만 갈가리 찢어놓았다. 손찌검은커녕 힐난의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돌아갔다. 지레 겁먹은 유부남은 현지 발령을 자원해 중국으로 내뺐다. 언니는 태어나 처음 꾸린 가정을 포기하지 못했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중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러던 중 전세금을 올려주어야 했고, 보다 못해 그것을 부담하고 들어왔다.

 

언니는 지금 병원에 있다. 밤일을 하면서 중국까지 오가니 체력이 남아날 리 없다. 언니가 쓰러지던 날, 의사는 전문직 여성에게 하듯, 업무가 많으셨나 봐요, 과로예요 했다. 미련하기는……. 사나흘 쉬면서 몇 가지 검사를 더 받기로 했다. 언니를 입원시키면서 일이고 중국이고 당장 때려치우고 들여앉혀야겠다고 생각했다.

 

후문 경비실 앞에 흰색 카니발이 서 있다. 뛰다시피 가서 차에 탄다. 운전하는 영민이는 여기까지 오는 걸 못마땅해한다. 오피스텔이나 근처 모텔에서 한꺼번에 태우면 될 일을 진작 한물간 늙다리까지 모시러 다니는 게 배알이 꼴릴 만도 하다. 미안한 마음에 팔짱을 끼며 농담을 던진다.

 

"바람도 쐬고 좋지? 누나도 여기가 좋아서 있는 게 아니란다. 누라를 이해해다오."

 

팔을 푼 영민이가 담배를 꺼내 문다. 불을 붙여준다. 에어컨을 끄고 차창을 내린다. 이런 애들은 오래 못 간다. 어릴 때야 노는 게 좋으니까 놀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지만, 월급이 오르는 것도 아니고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재미없으면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다. 잘해야 어디 지배인으로 풀리고 그것도 안 되면 내내 꼬붕 노릇만 하다 나이 들어 후회한다. 하긴 꼬붕이나 늙다리나.

 

 

아이들의 함성에 맞춰 맹렬히 진두지휘하는데 그녀가 지나간다. 어제와 색만 다른 민소매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었다. 향수도 진하게 뿌렸을 것 같다. 데이트라도 가는지 후문 쪽으로 뛴다. 오후에 문 열자마자 달려 나올 줄 알았다. 뻔뻔한 건지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건지……. 그녀의 다소곳한 사과를 기대했던 자신이 겸연쩍다.

 

어젯밤 마지막 선원들과 북해를 누비고 있을 때였다. 돌아간다! 모두가 기다리는 곳으로! 고향으로 뱃머리를 돌리던 찰나, 어디선가 나타난 불청객이 선장의 뺨을 때렸다. 노란 파마머리를 대충 틀어 올린 젊은 여자였다. 순식간에 배는 멈추었고, 선원들은 놀란 토끼가 되었다. 여자는 비틀대며 배 입구로 올라가더니 인질이라도 구해내듯 아이들을 하나씩 안아 배 밖으로 내려놓았다. 그녀의 허리를 조인 은색 벨트가 차랑거렸다. 웃을지 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 있던 아이들은 금세 사라졌다. 고요한 바다에 포효하는 고래라도 나타난 듯 긴장이 감돌았다.

 

“무서워하는 거 안 보여? 동네 떠나가라 소리 지르고 난리를 치는데 높이는 무슨 얼어 죽을 높이야?”

 

그녀는 닻도 제대로 못 내린 배를 발로 차며 욕을 퍼부었다. 한바탕 해대는 그녀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 잠시 땅을 보고 서 있던 그녀가 갑자기 배 끝으로 갔다. 바이킹의 자존심인 뿔 투구를 좌우로 잡아당기다가 이내 주먹으로 내리쳤다.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었다. 트럭에 따라 올라가 그녀를 끌어내려 했다. 그녀는 완강히 버텼다. 보기와 다르게 손아귀 힘이 셌다. 몇 분간 옥신각신하다 우리 둘 다 계단을 굴렀다. 그야말로 묻지마 봉변에 화가 치밀었다. 한 대 맞으면 술이 깨겠지 싶었다. 마음먹고 손을 올리는데, 조개구이집 털보형님이 달려와 말렸다.

 

“고마해라. 이짝 동 사는 안데, 술만 무면 저칸다. 눈에 뵈는 것 없는 짐승맹키로 죽자고 안 댐비나. 그마이 하다 가겠지 했는데, 오늘 니한테는 더 심한 거 같데이. 그케도 단골이라꼬, 내 이래 달려 왔다 아이가.”

 

문제가 커져서 좋을 게 없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영업에 제동이 걸려서는 안 되었다. 주민들이 시끄럽단다, 아이들이 무서워한다, 위험한 놀이기구다 등등의 사유로 앞서 여러 번 쫓겨나지 않았던가. 장터 사람들과 추렴해 낸 부녀회 기금도 못 뽑고 이틀 만에 나갈 수는 없었다. 언제나 당하는 쪽만 억울하다.

 

섭섭함을 누르며 그녀가 사는 아파트를 올려다보는데 아까부터 트럭 주위를 돌던 개가 끙끙거린다. 어제 아이들이 군것질거리를 던져주던 그 녀석이다. 아이들은 녀석을 ‘숙자’라고 불렀다. 이름만 듣고 암놈인 줄 알았는데, 배 밑을 보니 수놈이다. 덥수룩한 털이 군데군데 뭉쳐 있는 행색으로 봐서 숙자의 성은 ‘노’일 것 같다. 휘파람으로 알은 체하자 가까이 온다. 의자 앞에 턱 하니 앉아 설렁설렁 꼬리까지 친다. 잿빛 털 사이로 검은 눈이 보인다. 무언가 원하고 또 원망하는 눈빛.

 

동티모르에 간 것은 내전 후의 평화 유지와 복구 작업 지원을 위해서였다. 인도네시아 군이 철수한 섬은 UN 평화유지군이라는 간판이 무색하리만치 평화로웠다. 실탄을 가지고 다녔지만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로스팔로스에서 원주민에게 고기를 배달하는 차를 운전했다. 로스팔로스는 그들이 쓰는 테툼어로 ‘넘쳐흐르는 땅’이랬다. 길고 긴 싸움을 마친 주민들의 얼굴엔 고단함만이 넘쳐흘렀다.

 

자주 가던 마을에서 군인을 잘 따르는 떠돌이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털이 짧고 다리가 긴 누렁이였다. 녀석에게 ‘모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마음 둘 곳 없던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되었다. 함께 고기를 배달하고 밥을 나눠 먹었다. 바다까지 달리기 시합을 하고 모래밭을 뒹굴었다. 녀석과 같이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몰랐다. 철수 명령이 떨어질까 봐 조마조마할 만큼 정이 들었다.

 

그날도 막사 안에서 모래와 책을 읽고 있었다. 해군함에서 얻은 독도법 소책이었다. 티모르 섬 도시들의 좌표를 더듬더듬 읽으며 관측병 흉내를 냈다. 그러다 마음대로 사람과 위치를 알파벳으로 표기하고 특이점을 숫자로 나타낸 고유 좌표를 찍고 놀 때였다. 별안간 밖에서 총성이 울렸다. 모두 반사적으로 뛰어나갔다.

 

중대장이었다. 권총으로 여섯 마리의 개를 죽이고 있었다. 어쩌다가 육지에서 건너온 떠돌이 개 중에는 눈 색깔이 파랗거나 하얀 녀석들이 있었다. 병에 걸린 게 아니라 타고난 색 자체가 그런 거였다. 중대장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의무병을 불러 광견병 진단을 내리게 했다. 총성 없는 전쟁터에서 길고 긴 평화를 불안해하던 중대장이 살기를 참지 못하고 기어이 일을 낸 것이었다. 총 맞은 개들은 파랗고 하얀 눈을 멍하니 뜬 채 죽어 있었다.

 

조용하던 모래가 중대장을 향해 눈을 치떴다. 뾰족한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면서 마구 짖어댔다. 끌어안고 말려도 소용없었다. 뛰어나가 그의 허벅지를 물어뜯을 기세였다. 모래는 분명 친구들의 억울함을 울부짖고 있었다. 그제야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그가 실쭉 웃었다. 이제 끝난 줄 알았다. 흥분해서 허연 침까지 흘리는 모래를 안고 뒤돌았다. 한 걸음 떼는데 뒤통수에 그의 목소리가 꽂혔다.

 

“그 개새끼 내려놔. 명령이다!”

 

머릿속이 싸했다. 우리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중대장을 죽이고 모래를 살리고 싶었다. 정확히 말해서, 모래를 살리려면 중대장을 죽여야만 했다. 안 그래도 보잘것없던 생의 좌표가 잘게 쪼개진 구역들 사이에서 허우적댔다.

 

“뛰어!”

 

모래를 내려놓으며 중대장을 향해 돌진했다. 머리로 그의 허리춤을 받았다. 뒤로 넘어간 그를 재빨리 깔고 앉았다. 투실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쉼 없이 가격했다. 사람들이 달려와 우리를 떼어냈다. 다행히 모래는 보이지 않았다.

 

사건 이후, 모래를 다시 볼 수 없었다. 전쟁보다 무서운 평화였다. 동티모르에서 돌아오자마자 육군교도소로 직송되었다. 죄목은 상사 폭행, 하극상이었다. 살인미수일 줄 알았던 중대장은 그가 겨눈 총이 비어 있었다는 이유로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모래가 새끼들을 데리고 부대 앞 백사장에 나타난 꿈을 꾼 날 출소했다. 동기들보다 빨리 제대했지만 불명예였고, 오라는 데 없는 전과자였다.

 

포장마차에서 산 순대 일 인분을 숙자 앞에 놓아준다. 주인에게 부탁해 간과 허파를 많이 넣었다. 숙자는 검정 비닐봉지 주변을 돌다가 내처 코를 박고 먹는다. 숙자 앞으로 아이들이 선다. 손에 천 원짜리 지폐를 들고 있다. 문득 아이들 코 묻은 돈이라는 그녀의 말이 떠오른다. 그런 돈이나 빼먹는 작자는 아니다. 임무에 충실한 선장일 뿐이다.

 

선원들을 승선시키고 안전 바를 내린다. 기대감 가득한 선원들의 눈을 보면 다리에 힘이 절로 들어간다. 의자에 앉아 슬슬 페달을 밟는다. 새로이 출항이다. 알록달록 불을 밝힌 배가 진자 운동을 한다. 발을 빠르게 움직일수록 진자 주기가 짧아진다. 자연스럽게 페달에서 모터로 연결한다. 밤바다에 가슴이 트인 선원들이 환호한다. 흥이 난 선장은 목청껏 주문을 외친다.

 

“높이! 더 높이!”

 

 

WV 400055

 

금요일 밤에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와야 한다. 일주일치 피로를 풀겠다고 일 년 갈 피로를 얹어주는 놈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난달에 맺은 5대 5 계약이 힘이 된다. 기본 고객은 8대 2 그대로인 대신 등록된 단골, 정액권 고객, 고객 지정 예약 시 5대 5로 수당이 계산된다. 그 이하로는 일하려 들지 않는 애기들 잡으려고 실장이 내놓은 궁여지책이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좀 모아봐야겠다. 이자도 안 나오는 수정 언니 전세금에 돈이 묶여 있으니……. 요즘 인기라는 자산관리통장이라도 하나 만들까 싶다.

 

확실히 어린 애들은 다르다. 모이면 CMA, 펀드, 주식 따위를 화제로 삼는다. 어떤 금융의 어느 지점에 대박 매니저가 있다더라, 얼마 전 상장된 중소기업에서 신약 개발에 성공했다더라. 언제부터 이런 일로 돈 모으고 살았다고 프리랜서 행세들이다. 그래도 배울 건 배워야 살아남는다. 화장하는 동안 열심히 귀동냥을 한다.

 

화장을 마무리할 즈음 휴대폰 액정화면에 문자 메시지가 뜬다. 소나무방. 웰빙 시대답게 테마방으로 바뀐 실내는 전보다 훨씬 안락하다. 방문을 열자 솔향이 훅 끼쳐온다. 아무도 없다. 푸른 조명 아래 소나무 가지가 늘어져 있다. 스파 안에도 솔방울이 걸려 있다. 탕 안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면 삼림욕이 따로 없다. 고객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마을 뒷산에 널린 게 소나무다. 마누라랑 애들 데리고 산에 갈 생각은 안 하는 치들이 괜히 이런 데 와서 웰빙 운운하며 소나무 찾는다.

 

베트남 참전 용사였던 남자는 오른손이 없었다. 그 부분에는 사계절 내내 검은 가죽 장갑이 끼워져 있었는데, 항상 그 장갑이 벗겨지면 어쩌나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론 남자의 빈 손목이 궁금했다. 남자는 열 마리의 플라스틱 동물이 스프링으로 매달려 있는 리어카를 끌었다. 스무 곡의 동요가 진종일 반복되는 리어카였다. 리어카 옆에서는 여자가 꽃을 팔았다. 철 양동이를 앞에 놓고 목욕탕 의자에 앉은 여자는 일주일에 사흘은 퉁퉁 부은 얼굴이었다. 배꼽 언저리의 공기구멍을 열면 금세 쭈그러들 고무 튜브 같았다.

 

아이들은 남자에게 백 원씩을 내고 동물 위에 올라탔다. 아이들 코 묻은 돈이라는 말은 그때 배웠다. 수시로 남자에게 맞던 여자도 가끔 악다구니를 썼다. 남자가 아이들 코 묻은 돈으로 술을 퍼마시고 노름을 하거나 복권을 왕창 샀을 때였다. 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여자를 흠씬 두들기고 어린 딸을 높이 던졌다 받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리어카의 동물 중에서 귀가 큰 코끼리를 좋아했다. 텔레비전에서 아기 코끼리 목욕시켜주는 엄마 코끼리를 본 후였다. 코끼리와 친해지면 공중에서 아랫배 간지러운 증상이 고쳐질 것 같았다. 코끼리를 타고 다른 동물들과 경주하고 싶었다. 스프링에 몸을 맡기고 격렬하게 흔들고 싶었다. 하나 남자의 눈치만 보고 있던 어느 일요일, 빚쟁이들이 몰려와 리어카를 끌어 가버렸다. 길바닥에 꽃 양동이가 엎어졌고, 멍해진 여자는 한숨 대신 쉬이익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고객이 들어온다. 큰 덩치에 비해 머리는 작고 얼굴이 발갛다. 초저녁부터 한 잔 걸친 모양이다. 이런 고객은 대개 마누라가 엄한 부류로, 술 한 잔 하고 2차로 안마받고 열두 시 전에 집에 들어간다. 번들거리는 얼굴을 감추려고 집 앞에서 달리기를 하거나 전기구이 통닭을 산다. 계산하면서 시간을 좀 벌어 옷에 닭 냄새를 배게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꽤나 치밀한 부류인 만큼 구석구석 요구 사항도 많을 것이다. 첫 고객부터 땀 좀 빼게 생겼다.

 

퇴근길, 아파트 앞에 다다르자 한 잔 생각이 간절해진다. 조개구이집으로 향한다. 구석자리를 잡고 앉자 털보 사장이 눈인사를 건넨다. 그러더니 웬 남자를 끌고 와 앞에 앉힌다. 화해하라며 소주 한 병까지 놓고 간다. 화해라니? 털보의 말이 의아하다. 남자는 이미 어지간히 취해 있다. 가만히 보니 옷차림이 낯익다. 주차장 바이킹, 하려는데 남자가 버럭 화를 낸다.

 

“내 배가 그렇게 싫어요? 왜 멀쩡한 남의 배를 못살게 구냐고!”

 

종아리에 멍이 든 까닭을 알겠다. 술잔을 채워 연거푸 마신다. 남자의 잔도 채워준다. 말없이 서너 잔을 주고받는다. 남자는 애들 코 묻은 돈 모아서 당신 보란 듯이 배를 살 거란다. 사람 태우는 진짜 배.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어버린다. 그놈의 코 묻은 돈 얘길 또 떠들었나 보다. 수그러들었던 남자가 재차 언성을 높인다.

 

“웃지 말아요. 그러는 댁은 뭐하는데? 대체 뭔 일을 하길래 이 오밤중에……. 거, 술 취해서 아무한테나 시비 걸고 그러면 안 돼요.”

 

“배 타요.”

 

명료한 답에 일순 남자의 눈빛이 흔들린다.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 배도 배니까. 우스갯소리로 이해했는지 곧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조개가 늦었뿐네. 우째 둘이 화기애애한 기가? 화기애매한 기가? 코오드만 맞으매 이래 친구로 지내는 것도 좋다카이. 야야, 니 그카다 야 연이틀 업어뿌는 거 아이가.”

 

모듬 조개 접시와 소주를 들고 온 털보가 남자의 어깨를 두드린다. 단골보다 몇 번 안 봤을 남자와 더 친해 보인다. 얼굴이 홧홧해진다. 술 먹고 소동만 부린 게 아니었다. 싱겁게 웃은 남자가 석쇠에 조개를 올려놓으며 묻는다.

 

“그래, 어디 가봤어요?”

 

“세부.”

 

갖다 붙이고 보니 수정 언니가 노래 부르던 섬이다. 일곱 빛깔의 바다를 가졌다는 남쪽의 여왕섬 세부. 신혼부부들이 많이 찾는 세계적인 휴양도시라고 했다. 언니는 유부남을 만나면서 처음으로 어딘가에 가고 싶어 했다. 삼백삼십 년에 이르는 스페인 침략을 견디며, 필리핀에서 유일하게 스페인과 맞서 싸워 이긴 적이 있다는 그곳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고도 했다. 그러나 둘은 떠나지 못했다. 그 흔한 대하 축제 한 번 간 적이 없다. 세부에 대해 주워들은 대로 늘어놓는다. 남자 역시 들리는 대로 주워 삼키는 눈치다. 남자에게 배를 사서 어디에 갈 거냐고 묻는다.

 

“바다.”

 

짧은 한마디에 조개가 움직인다. 바다라는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입을 짝 벌린다. 바다에 살고 싶어요, 바다는 넓고 깊어서 억울한 일도 말 못할 일도 없을 테니. 자기도 모르게 들뜬 남자가 금방이라도 바다에 뛰어들 기세로 말한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바닷가 모래밭을 거니는 것처럼 먼 곳을 응시한다. 술이 오른다. 몸이 자꾸 늘어진다. 미안하다는 말이 입 안에서 맴돈다.

 

 

MV 500369

 

여자가 술상에 엎어진다. 첫인상과 달리 얌전히 잠이 든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여자다. 털보 형님 말대로 여자를 또 업는다. 그나저나 9층까지 어떻게 올라갈지 걱정이다. 어제 여자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겠다고 버텼다. 선원 잃고 선장까지 잃은 배를 난파선처럼 버려두고, 쓰러진 여자를 업은 길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무슨 사자의 관이라도 되는 양 발버둥을 쳤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했으면서도 엘리베이터 문을 잡고는 도무지 놓지 않았다.

 

삼 층씩 끊어 쉬며 올라간다. 여자는 어린애 앙앙대듯 비밀번호를 댄다. 문을 열자마자 거실 소파에 여자를 팽개친다. 맞은편 소파에 눕는다.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천장을 받치고 있는 사방의 벽들이 빙글빙글 돈다. 몸이 떠오른다. 천장이 차차 가까워진다. 옆으로 돌아누우니 여자가 보인다. 벽은 계속 돈다. 천장에 누워 소파를 이고 있는 여자를 올려다본다. 뱅뱅 도는 소용돌이의 중심에 여자가 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소용돌이가 일시 정지된다. 탐스럽게 구불거리는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푸르게 변한다. 에메랄드빛 물결이다. 세부의 바다가 뇌리를 스치는 순간 바닥은 바다가 되어 출렁인다.

 

물 위의 여자에게로 간다. 몸이 바다에 닿는다. 뜻밖에 여자가 눈을 뜬다. 이제 항해를 시작하자고 한다. 서로에게 닻을 내린다. 하나 된 배가 천천히 움직인다. 바다 속에서 진주를 머금은 조개가 입을 벌린다. 연분홍색 산호는 손을 흔든다. 광활한 사탕수수 섬을 지나자, 뭉게구름이 얕게 내려앉은 바다가 펼쳐진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진풍경이다. 한 쌍의 연인이 다정하게 해변을 걷는다. 흰 포말이 모래를 적신다. 여기가 바로 세부다. 여자가 탄성을 내지른다. 속도를 높여 세부 깊숙이 들어간다. 열대 우림 사이로 식민지 시대의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여자가 얼굴을 찡그린다. 마젤란이 세웠다는 나무 십자가와 교회, 낡은 성곽과 요새가 상처처럼 남아 있다.

 

여자를 다시 바다로 이끈다. 후텁지근한 적도를 지나 남회귀선을 통과한다. 아프리카 동쪽에 위치한 프랑스령 레위지옹이 보인다. 여자에게 아프리카에 있는데 왜 프랑스 땅이냐고 묻는다. 샐풋 웃은 여자가 필리핀 해에 있는 괌은 미국 땅이라고 답한다. 아프리카를 크게 돌아 지중해로 향한다. 세부를 침략했던 스페인이 보인다. 여자가 고개를 돌린다. 더, 더, 알 수 없는 말들을 내뱉는다.

 

드디어 북해에 진입한다. 바다가 거칠어진다. 바이킹의 배들이 안개를 헤치고 전진한다. 그 뒤를 3단으로 노를 젓는 갤리선이 따라온다. 바이킹과 나란히 북해를 거슬러 오른다. 갤리선과의 거리가 점차 벌어진다. 여자의 호흡이 가빠진다. 풍랑이 배를 덮쳐도 우리는 묵묵히 나아간다. 저 멀리 부두에서 가족들이 손을 흔든다. 바이킹도 뿔 투구를 벗어 들고 흔든다. 가족들 뒤로 황금벌이 넘실댄다. 바이킹이 만족스럽게 웃는다.

 

펑, 폭죽이 터진다. 귀환을 축하하는 메시지다. 몸을 뒤틀던 여자가 눈물을 흘린다. 머리 위에 오색 불꽃이 피어오른다.

 

 

WV 600009

 

눈을 떴을 때 남자는 옆에 없었다. 찬물에 샤워를 했다. 이상하게 몸에서 짠내가 났다. 소금기가 쉽게 가시지 않는 바닷바람이 불었다.

 

수정 언니에게 가려고 준비할 때 휴대폰이 울린다. 노인 요양소라는 곳에서 낯선 이름을 물어온다. 곧 아는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다급하게 수화기를 내리는데 상대방이 그의 죽음을 알린다.

 

전쟁에서 오른손을 잃고 동물 리어카를 끌던 남자, 수시로 교도소를 들락거리고 집에서는 폭력을 휘두르던 남자가 죽었다. 기분 좋은 날이면 어김없이 목마를 태우고, 높이 들어올려 서울 구경을 시키던 그 남자가 죽었다. 겨우 이름 석 자가 희미해진 사이, 그늘진 한쪽 구석방에서 죽어 버렸단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의 죽음처럼 받아들이고 싶다. 그것이 마땅하다. 아버지라는 작자를 변명 삼아 악착같이 배를 탔으니.

 

무심히 화장을 하는데, 화장대 거울 안에 꽃을 든 아버지가 서 있다. 실장에게 내쫓기던 차림 그대로다. 검정 매직으로 굵게 쓴, 꽃 사세요. 가슴팍에 종이 팻말도 전과 같다. 감색 털모자를 쓴 트럼프 병정이 서툴게 입꼬리를 올린다. 생전에 본 적 없는 미소다. 가죽 장갑을 벗은 온전한 손으로 장미 한 송이를 내민다. 잡고 나면 어서 올라타라고 어깨라도 들이밀까 봐 외면했던, 그 손이다.

 

기습한파가 닥쳤던 초겨울. 때 이른 추위에 백화점 모피가 동났다고 조잘대는 애기들 틈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마스카라를 덧칠하는데 늙수그레한 남자가 들어왔다. 한 송이씩 포장된 장미 다발을 안고 꾸벅 인사했다. 이미 여러 해 술에 기대 살아온 듯 몸을 심하게 떨었다. 눈이 퀭한 남자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꽃을 디밀었다. 관심 없이 자리에 앉는데 눈앞에 불쑥 장미가 피었다. 떠는 손보다 반대쪽 가죽 장갑이 먼저 보였다. 급히 눈길을 거뒀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남자가 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직도 많아 보였다. 남자도 한순간 주춤했다. 늦게 알고 쫓아온 실장이 개시도 안 했는데 웬 비렁뱅이냐며 성을 냈다. 남자는 실장의 구둣발에 채여 쫓겨났다.

 

거울 속 아버지의 어깨가 서서히 움츠러든다. 우물거리는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입가에 팔자 주름만 깊어진다. 할 말이 남았었나, 당신. 두려움과 반가움 사이에서 부유하던 손을 내민다. 딸의 두 손이 장미를 향하자, 꽃사래를 친다. 곱게 자란 꽃잎이 후드득 떨어진다. 비로소 마음 편히 강을 건널 수 있다는 듯이 애써 웃음 짓는다. 누런 이가 환하다. 빈 가지를 든 채 뒤돌아선다. 담배와 껌 있습니다. 그림자 같은 종이 팻말이 얼른거린다. 축 처진 뒷모습이 점점 뿌예진다.

 

상대방 눈치를 보며 울면서 웃는다. 수화기 속에서 말이 이어진다. 딸이 하나 있는데 어릴 때 목마 타는 것을 좋아했다고, 죽기 전에 꼭 한 번 보고 싶지만 지은 죄가 많아 그럴 수 없다셨어요. 돌아가시고 보니 장갑 속에 명함 한 장이……. 전화를 끊는다. 아득하고 어지럽다. 헐거워진 몸 사이로 바다와 세부, 남자와 바이킹, 아버지가 하얀 파도처럼 드나든다.

 

 

MW 70000001

 

떠날 시간이다. 노점을 해체하는 상인들의 걸음에서 고단함이 뚝뚝 떨어진다. 미니 바이킹의 선장도 다음 출항을 위해 트럭에 오른다. 바지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가 짤랑거린다. 조수석에 앉은 숙자가 꼬리를 흔든다. 녀석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어야겠다. 창틀에 발을 얹고 내다보는 녀석의 시선을 따라가다, 여자의 아파트를 올려다본다. 불이 켜져 있다. 무인도에서 흘러나오는 생존자의 신호 같기도 하고, 밤길을 비춰주는 작은 섬의 등대 같기도 하다.

 

쓰러지기 전에 여자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 말이 꼭 세상이 건네는 위안처럼 들렸다.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적이 있던가?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바다에 가면 필요 없는 말일지 모르니, 육지에 있는 동안 한 번은 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시동을 걸고 핸들을 잡는다. 누군가 반쯤 열린 창문을 두드린다. 여자다. 뛰어내려와 숨이 찬 목소리다.

 

“한 번 태워 줘요.”

 

여자가 뒤에 실린 바이킹을 가리킨다. 두어 번 컹컹대던 숙자가 운전석과 창을 번갈아본다. 다소 뜨악한 여자의 요청을 수락한다. 도리어 기다린 것처럼 마음이 차분해지기까지 한다. 여자를 차에 태운다. 인적 뜸한 강쪽으로 차를 몬다. 우리가 빠져나온 아파트 단지가 룸미러에 비친다. 평지에 비죽 솟은 아파트에 저녁 놀빛이 찰랑댄다. 옆 좌석에서 잠시 숨을 고른 여자는 차창에 머리를 기댄다. 진짜 탈 수 있겠냐고 묻자,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붉게 상기된 얼굴이다.

 

“바이킹, 뭔지나 알고 타겠다는 거요?”

 

“해적…… 아닌가요?”

 

순진한 대답이다. 머릿속에 언뜻, 추수 후 흥겹게 한 판 노는 바이킹의 축제가 그려진다. 춤과 노래를 즐기는 유쾌한 민족, 자유인으로서 일부일처제의 가정을 꾸린 독립적인 농민이라는 책 구절도 떠오른다. 여자에게, 어쩌면 그들은 단순히 바다의 울렁거림이 좋아 배를 타고 나간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려다 만다.

 

일차로 다리 위에 차를 세운다. 배를 덮은 파란 천막을 걷어낸다. 배는 어디라도 갈 수 있다는 듯 위용 있는 모습이다. 서둘러 색 전구에 불을 밝힌다. 돛과 갑판이 환해진다. 여자는 난간에 서서 강을 내려다본다. 물살이 제법 세다. 여자에게 손을 내민다. 손을 잡은 여자는 긴장한 표정으로 배에 오른다.

 

여자에게서 영점이 보인다. NI 52-0-00-0, MW 70000001. 도엽번호를 수정하고 여자와 교차한 좌표명을 정한다. 여섯보다 상세한 여덟 개의 숫자. 다음 좌표는 WM 80000002일 것이다.

 

출항! 닻을 올리고 천천히 노를 젓는다. 양손으로 밀다가 발로 페달을 밟는다. 점차 속도를 높인다. 여자가 눈을 질끈 감는다. 안전 바를 잡은 여자의 손이 몹시 떨린다. 페달에서 모터로 연결해놓고 몸을 날려 배에 오른다. 여자의 뒷줄에 앉는다. 고개 숙인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여자의 귀에 대고 말한다. 미안해요. 밤하늘에 켜진 별들이 끝 간 데 없는 뱃길을 그려낸다. 배 한 척이 그 위를 미끄러져 나간다.

 

우리는 로스팔로스를 떠나, 바다로 간다. 선장이 막 주문을 외우려는데 새로 온 선원이 온몸을 달달 떨며 외친다.

 

“높이! 더 높이!”

 

-끝-

 

 

 

 

강원일보 스쿠티카 정의권

 

1

 

날이 희붐히 밝아오자 수조 속이 한눈에 들어왔다. 죽은 광어들이 수조 가운데 서 있는 환수기둥에 가득 들러붙었다. 어젯밤에 예상했던 폐사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저녁에 사료를 주고 나서 수조의 물을 환수시킬 때면 다음날 광어가 얼마쯤 죽었을지 쉽사리 감이 왔다. 먹이를 잘못 먹었거나,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은 녀석들이 빠르게 헤엄쳐 다녔다. 이른바 회유(回遊)였다. 건강한 광어는 거의 돌아다니지 않는다. 양식업자들도 놈들이 그저 수조바닥에 엎드려 있길 바랐다. 회유란 광어에게 어떤 병이 서서히 퍼져온다는 불길한 신호였다.

 

뜰채를 이용해 폐사 한 마리를 건져 올렸다. 하얀 뱃바닥에는 부항을 뜬 모양새로 둥근 피멍이 울룩불룩 돋아났다. 골프공 크기로 촘촘히 구멍을 뚫어놓은 환수기둥에 몸이 휘감긴 채 온밤을 보낸 탓이다. 얼룩덜룩한 주검얼룩도 등 곳곳에 돋아났다. 뒷지느러미 옆으로 메추리 알만한 내장까지 쑥 튀어나와 있었다. 등에 동전 크기의 궤양이 생겨 표피가 허옇게 헌 놈, 농양으로 몸 여기저기서 고름이 흐르는 놈들을 뜰채로 휙휙 들쑤시며 환수기둥에서 건져냈다.

 

폐사를 다 떼어내고 수조에서 돌아 나오려는데 저만치서 광어 두 마리가 물 위로 정신없이 오르락내리락거렸다. 스쿠티카 기생충이 뇌를 갉아 먹는 탓에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 나는 놈들을 낚아채려 수조 끝을 향해 걸어갔다. 방수복을 입은 터라 걸음걸이가 쉽지 않았다. 눈알까지 썩어가는 두 놈을 멀찍이서 뜰채로 낚아챘다. 발 근처에 엎드린 광어를 재미삼아 쿡 짓밟았다. 엷은 피를 토해내며 부리나케 내빼는 녀석을 보자 히쭉 웃음이 새어나왔다. 평소처럼 광어 몇 놈의 대가리를 장화 굽으로 콱콱 내리밟고서 물 밖으로 올라왔다. 통로에 놓인 폐사통 여남은 개를 손수레에 내싣고 사육동에서 느릿느릿 걸어 나오다 마당 가운데 서 있던 오소장과 그만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희수 오늘 일 안 나온댔수꽈?”

김반장이 잰걸음으로 오소장에게 다가갔다.

“폐사했소.”

오소장이 짧게 대답했다. 무단결근이란 뜻이다. 애써 피해 다녔지만 소장은 나를 계속 눈빗질했나 보다. 도끼눈을 지릅뜬 채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무척 매서웠다. 매사 철두철미한 그가 희수의 무단결근을 여태 모를 리 없다. 벌써 사육동을 샅샅이 뒤집어 보고 다녔겠지. 물론 녀석이 일을 관뒀음을 모른 채. 험상궂은 얼굴로 줄곧 나를 쏘아보았지만 아무런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과음한 탓에 속이 미식거렸다. 일하는 게 너무 귀찮아졌다.

“이녁, 어제 희수랑 밤새 술 먹었쩌?”

오소장의 눈치를 살피던 김반장이 잽싸게 나를 다그쳤다. 손수레에서 폐사통을 내리던 나는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양식장 꼴 참 잘 돌아간다, 잘 돌아가. 에라 이.”

 

 

제 성질을 못 이긴 오소장이 대뜸 폐사통을 걷어찼다. 폐사통 하나가 팩 나동그라지더니 미끈한 점액질과 함께 광어 예닐곱 마리가 땅바닥으로 쭉 미끄러졌다. 썩은 내가 코를 찔러왔다.

“야, 조성룡이. 그 새끼랑 얼마나 퍼마셨길래 여태 일을 안 나와?”

직원들도 가시눈을 뜨고서 나를 흘겨보았다. 간밤에 술집 여급까지 숙실로 데려와 술판을 벌린 게 영 못마땅하다는 기색이었다.

“정말 혼자 소주 한 병 마시고 잤다니까요.”

여전히 나는 의아하다는 몸짓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술도 덜 깬 얼굴에다 입에는 역한 술내까지 풍겨댔지만 오히려 능청스러우리만큼 태연해졌다. 오소장이 나를 믿건 말건 이제 그 따위는 전혀 대수롭지 않았다. 끝까지 우기고 들면 다들 어쩔 거야. 오로지 내 머릿속에는 어젯밤 희수의 그 섬뜩한 눈빛만 계속 맴돌았다. 그때 좀 전에 넘어진 폐사통 안에서 광어 두 마리가 불쑥 튀어나와 파다닥거렸다. 스쿠티카에 걸려 눈알이 썩어 비어져 나온 채 물 위를 어지러이 맴돌던 놈들이었다.

“야 임마, 한두 번 말해! 숨 붙었다 싶으면 병어(病魚)수조에 넣어두랬잖아!”

병어수조까지 걸어가기 귀찮아서 놈을 폐사통 밑바닥에 감춰 나온 게 화근이었다. 나를 노려보는 오소장의 퉁방울눈이 또 한 번 희번덕거렸다. 그곳에 넣어두더라도 이삼일도 더 못살 놈이었다. 하긴 어병이 심해지자 수시로 활어차가 들락날락거렸다. 병이 들었지만 조금이라도 숨이 붙은 광어는 폐기처분치 않고 헐값으로 떠넘긴다.

“김반장, D사육동에도 폐사가 이리 많소? 병 심한 수조부터 빨리 팔아치워야지 원.”

“너무 신경 쓰지 마우다. 다른 양식장에도 스쿠티카가 많이 돕서…….”

내가 바닥에 흐트러진 폐사를 줍는 사이 오소장이 김반장에게 뭔가를 거듭 되물었다. 나는 직원들의 폐사통을 슬쩍 쳐다보았다. 죽은 광어들이 평소보다 곱으로 많았다. 독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병만 점점 더 심해져갔다.

“진작 임파실린 먹였으면 이 꼴 안 났지. 희수가 이 개자식, 니가 결국 요 따위로 개긴단 말이지. 제기랄, 성질 같아선 그 새끼 입에다 임파실린 한 통을 통째로 부어버릴 판인데. 다들 뭣들 하고 섰어! 치어동부터 임파실린 급이할 거니까 약사료 만들 준비나 해. 성룡이 너는 성어동 물 빠지는 대로 얼른 다 포르말린 약욕(藥浴)시켜!” 오소장의 얼굴색이 연신 붉으락푸르락거렸다. 포르말린을 놓아둔 창고로 들어서려는데 그가 내 뒤통수에 대고 연이어 잔소리를 날렸다. “임마, 너도 술 좀 그만 처마셔.”

희수가 결근해 이렇듯 일손이 바쁘니 오늘은 그냥 넘어가겠다는 말투였다. 그간 내가 그와 한 조가 되어 군소리 없이 일해 온 점도 참작했겠지. 하지만 나도 이젠 양식장 일이 슬슬 지겨워졌다. 오소장의 질책이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약욕이고 뭐고 모두 다 귀찮아졌다. 까짓 광어가 회유를 좀 한들 어쨌단 말이냐. 나는 간밤 술자리에서 희수가 거침없이 내뱉던 냉소만 자꾸 떠올랐다. 임파실린이 영심이표 매독이란 의뭉스런 비유와 함께였다.

 

2

 

“이 자식아. 수조 좀 똑바로 내려다보지 마라. 이젠 귀에 못이 박힐 정도잖아.”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희수가 내 팔을 와락 잡아끌었다. 사료박스를 손수레에 싣고 치어사육동에서 돌아 나오다 무심결에 수조 안으로 고개를 쭉 내밀던 참이었다. 어린애 손바닥만한 광어들이 부챗살 펴지듯 달아났다. 이내 꼬물꼬물 몰려다니며 허연 뱃바닥을 엎치락뒤치락대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무심코 내딛는 발자국 소리에도 스트레스 받아 병 생긴댔잖냐. 수면 위로 들락날락대는 놈들 좀 봐라, 봐.”

술병이 난 탓인지 그는 손으로 연신 가슴을 훑어 내렸다. 나는 수조에서 몇 자국 떨어져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다. 광어 몇 마리가 물 위로 정신없이 고개를 치밀며 맴돌았다.

“눈깔이 뻘겋게 튀어나온 저 놈?”

“그래. 기생충이 안구까지 퍼져 눈이 썩어가는 거다. 뇌도 야금야금 파 먹혀 망사꼴 났겠지. 스쿠티카 이게 양식장에선 엄청 골치 아픈 병이야.”

희수는 한쪽 다리를 남 보기에 불편할 정도로 떨었다. 더구나 녀석은 두 손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말 내내 사료주걱을 이손 저손 옮겨 쥐길 반복하더니 돌연 눈을 빗뜬 채 나를 쳐다보았다.

“마땅한 치료방법이 정말 없어?”

“저렇게 증상이 눈에 보이면 치료는 아예 물 건너갔다. 날 때부터 감염돼 잠복했거든. 일단 발병하면 뒤늦게 치료한답시며 설쳐대도 실은 내성만 잔뜩 키울 뿐이지.”

희수는 버릇처럼 입술을 비쭉 말아 올리며 콧숨을 휙 내쉬었다. 여전히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눌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녀석은 일 하나만큼은 딱 부러졌다. 양식장에서 치어사육을 전담하려면 최소한 칠팔 년은 경력을 쌓아야 했다. 치어는 그만큼 폐사율이 높아 노련한 관리가 필요한 거였다. 다들 희수는 양식장 일이 천직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는 일을 마치면 어김없이 술에 절어들었다. 술이 취하면 꼭 혼자서 뭔가를 중얼거리며 돌아다녔다. 나이 많은 직원들에게도 예사로 하대하니 그들과 잘 섞이지 못하고 늘 외돌았다.

“참, 오소장이 내일 치어동부터 임파실린 먹이겠다던데.”

“뭐야? 소장놈이 그예 약 갈아버렸어?”

“응, 아침나절에 나랑 같이……”

얼결에 내뱉은 말이 화근이었다. 이 약을 두고 2주전부터 그는 오소장과 신경전을 벌려 왔었다.

“지랄, 어딴 놈이 또 그 약 쓰자고 자꾸 부추겼나 보네.”

때마침 오소장과 직원 몇몇이 성어사육동에서 걸어 나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희수가 그들을 빤히 쳐다보며 씨우적거렸다.

“부추기긴 누가 부추겨. 스쿠티카 확 퍼져버리면 누가 다 책임지나.”

오소장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대꾸했다.

“병 나돌아 골 아파 죽겠는데 그딴 내성이 뭔 대수라고.”

“야야, 너 고생이야 잘 안다만 이번엔 오소장님 시키는 대로 해.”

“그래. 제발 좀 적당히 설쳐대라. 매사 왜 그리 복잡하게 굴어.”

다른 직원들도 하나같이 오소장을 거들고 나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희수는 얼빠진 놈 마냥 입술을 비죽대며 오소장을 노려보았다. 뭔가를 꺼내려는지 한쪽 손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한참이나 주물럭거렸다.

“다들 뭣들하고 섰어. 사료 언제 다 먹일 거야!”

오소장은 직원들에게 사료급이가 더디다며 괜한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가 관리책임자라하나 실은 희수가 양식장을 도맡아 관리하는 형편이었다. 치어관리는 물론 약 뿌릴 시기와 광어에게 먹일 사료량, 출하계획까지 그가 알아서 일일이 직원을 부려대니 오소장으로서는 제 일거리를 거의 다 덜은 셈이었다.

오소장이 사무실로 급히 들어가버리자 희수와 나는 냉동고에서 사료박스를 꺼내 손수레에 실었다. 두 수레만 더 뿌리면 오늘 급이도 모두 끝이라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둘은 수레를 하나씩 끌고 치어사육동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침착하게 변해 있었다. 고기들이 놀라지 않게 발걸음을 조심조심 내딛으며 사료를 집어 들었다.

“늘 말하지만 사료 줄 땐 골고루 흩뿌리는 게 제일 중요해. 서로 받아먹으려고 다투지 않게 최대한 넓게 퍼뜨려야 한다. 사료찌꺼기가 바닥에 쌓이면 꼭 병이 생기니 항상 양 신경 써서 골고루 먹이고. 저렇게 고기 많이 몰린 곳엔 좀 더 뿌려주는 식으로.”

희수의 손놀림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다. 양식장에서 꽤나 인이 박힌 사람조차 그의 솜씨를 따라가지 못했다. 사료주걱을 한 손에 쥐고 탁구 드라이버 날리듯 휙 뿌려대면 사료가 투망 퍼지듯 쫙 흩어지며 수면 위로 사르르 내려앉았다. 그 큰 양식수조 절반이 한 번에 덮어졌다. 나 같으면 네댓 번을 뿌려도 못 따라갈 만큼 기막힌 솜씨였다. 어딘가 정신을 놓아버린 듯하다가도 일을 할 때면 사람이 달라졌다. 더구나 다른 직원과 달리 자신의 말을 조금도 어김없이 그대로 실천했다. 늘 술에 절어 사는 인간에게서 어떻게 저런 성실함이 나오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사육동 주위로 차차 어둠이 내려앉았다. 급이를 마친 직원들이 마당에 모여 사료박스를 물세척했다. 희수와 나는 씻어놓은 사료박스를 물기가 빠지게끔 냉동창고 벽을 따라 세워나갔다. 반시간 쯤 지나 뒷정리가 모두 끝나자 다들 부랴부랴 사옥식당으로 들어섰다. 식탁에 둘러앉아서 저마다 소주를 맥주컵 가득 채웠다. 밥이 나오기 전에 한 잔 쭉 비워내면 꽁꽁 얼붙은 몸이 하루의 피곤과 함께 노근노근 녹아내렸다. 온몸에 잔뜩 밴 비린내가 후끈한 콧숨 밖으로 사라지고, 기분이 멍하니 좋아져 저녁이면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어라. 한강 상수원에 포르말린 무단방출로 구속이라고?”

뉴스를 보던 직원 하나가 까짓 포르말린을 얼마나 방출했다고 구속까지 됐냐며 비웃어댔다.

“한강에다 약욕시키고 물 안 갈아줘서 잡혀부렸냐? 하긴 제때 새 물 안 틀면 한강 고기 허벌나게 뒤집어질껄, 허허.”

옆에 앉아 있던 직원 역시 우스갯소리로 떠들어댔다.

“흥, 광어가 웃다 뒤집어지겠다. 놈들에게 밤낮없이 포르말린 뿌려대면서.”

빈 소주잔을 내려놓는 희수의 손이 어느새 떨리지 않았다. 다시 소주를 컵 가득 부어 단숨에 들이켰다.

“일주일이면 독기 대충 빠진다는데 뭐 어때? 우리 먹을 것도 아닌데. 아닌 말로 고기만 안 자빠지면 그만이지. 백 번을 치던 이백 번을 치던.”

“그럼 실험실 포르말린에 쩌려 놓은 물고기나 회쳐 매일 술안주 하시지.”

희수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말고 오소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무엇을 꺼낼 듯 오른손을 바지주머니에 계속 집어넣은 채였다.

“암만 그래도 임파실린 회보단 낫겠지. 흐흐.”

 

누군가 농담조로 임파실린을 거들먹거리자 희수의 눈빛이 순간 험해졌다. 이내 바지주머니에서 흰색 알약을 한 주먹이나 꺼내 식탁에 쏟아 부었다.

 

“다들 술안주로 하나씩 씹어 먹지 그래. 이 만병통치약을 물고기에게 다 주긴 너무 아깝잖아.”

“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못하는 짓이 없어. 누가 임파실린 함부로 들고 다니랬나.”

오소장이 실눈을 뜬 채 호통을 쳤다. 숟가락까지 식탁에다 세차게 내려놓자 이에 지지 않고 희수도 거칠게 대거리했다.

“우선 소장님부터 네댓 알 맛보시라고.”

그는 알약 몇 개를 소장의 밥그릇 앞으로 밀어 올렸다.

“니기미. 니가 광어 애비애미냐! 고기 다 자빠지면 니가 몽땅 책임질 꺼야!”

오소장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짜고짜 밥그릇을 바닥에다 내동댕이쳤다. 희수도 그를 매섭게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들더니 소장에게 내던져버렸다. 만원권 지폐 예닐곱 장이 밥상 위로 파라랑 흩어졌다. 밥을 먹다말고 모두들 그것에 눈길이 쏠렸다.

 

“좋소. 누가 진짜 약발 받나 두고 봅시다. 두고 봐.”

희수는 식당문을 발로 홱 걷어차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씨불씨불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었다.

“저, 저 싸가지 없는 늠이. 소장님한테 하는 말버릇 좀 보주게. 늬귀 앞에서 대가릴 빠딱 쳐들어, 나참.”

털털대는 식당문에 눈길을 두던 김반장이 얼붙은 분위기를 녹이려 뒤늦게 눙치듯 나섰다.

“골 빈 새끼. 여태 정신 못 차렸군. 남들 다 임파실린 치는데 지 혼자 사육환경개선이니 어쩌니 떠들다 고기 다 쥑여버리고선 어디 와서 또 말아먹을 작정이야.”

“잘난 친환경양식장 만들어보려 그랬다잖아. 대학물 먹은 놈들은 저래서 안 된다니까.”

재빨리 돈을 주워 간추리던 직원 둘이 오소장의 험한 인상을 살피며 이에 맞장구쳤다. 가만히 돈을 받아 쥐던 그가 지폐 한 장을 탁자 위에다 툭 내려놓았다.

“겉멋만 잔뜩 든 새끼 같으니라구. 부러 지놈 하는 대로 좀 내버려뒀더니 이젠 아예 누굴 가르치려 들어. 자자, 이 돈으로 다들 간단히 소주나 한잔 더 하도록 해. 지놈 보너스인데 안 받겠다면 그만이지, 흠.”

오소장 또한 식사를 관둔 채 식당에서 나가버렸다. 여느 때처럼 화를 애써 삭이며 한발짝 물러선 거였다. 직원들은 그가 남기고 간 돈으로 소주를 잔뜩 사와 왁자지껄 술을 마셨다. 나는 식사를 대충 마치자마자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양식동 뒷마당에 위치한 숙실로 돌아왔다. 2층과 마찬가지로 방이 모두 세 개였지만 두 곳은 잡다한 자재를 쌓아놓았다. 나머지 하나를 희수와 내가 공동으로 썼다.

 

나는 비린내가 잔뜩 밴 작업복을 벗지도 않고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뜨거운 난방열에 등이 흐물흐물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를 찾아 인근 술집으로 가보려했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잠시 눈을 붙이려다 내리 두 시간이나 자버렸다.

“야, 샌님. 여태 잔 거야? 오늘 임파실린 간다고 고생 좀 했을 걸. 어서 목이나 달래라. 히힛.”

막 잠에서 깰 무렵 희수가 방문을 열어 젖혔다. 그의 손에는 검은 봉지가 하나 들려있었다. 술집 여급으로 보이는 아가씨도 뒤따라 들어왔다. 허리까지 늘어지는 긴 생머리에다 짧은 가죽치마 차림이었는데, 글래머에 가까운 몸매에다 얼굴 또한 상당한 축이었다. 어쩐지 계면쩍어진 나는 짐짓 눈을 비비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인사해라. 감로다 단란주점 영심이다. 광어 스무 마리나 팔아도 요년 육회 한 점 맛볼까 말까지.”

희수가 그녀의 사타구니를 쓰다듬으며 힐쭉거렸다. 소장이 임파실린을 쓰겠다고 말할 때부터 녀석은 난데없을 만큼 사람이 달라져버렸다.

“요새 영심이 땜에 양식장 사내들 등골 다 빠질 판이야. 고기 몰래 훔쳐내느라고.”

“그새 또 단란주점에 갔었어?”

“오냐, 접대 받으러. 소장놈 앞으로 달고 일찌감치 이차 데리고 나왔다. 따따블 주고.”

“소장 앞으로 달았다구? 같이 있었던 거야?”

“그 자식 활어차놈과 짜고 무게 속이다 나한테 걸렸었지. 입막음조로 찔러주던 돈 아까 몽땅 되돌려줬잖냐. 대신 아가씨 한번 데리고 놀겠다는데 지놈이 어쩌겠어. 크크큭.”

“그건 그렇고 아까 왜 그리 열불을 냈어? 임파실린이 대체 뭔데 그래? 아침에 소장과 같이 믹서로 갈았는데 목이 어찌나 가렵던지 여태 가래가 끓어.”

“짜식아. 영심이에게 직접 물어봐라. 양식장 놈들이 영심이 진가를 몰라서 함부로 설쳐대지. 흐흥.”

희수는 그녀의 옆구리를 손으로 쿡 찌르며 거듭 의뭉을 떨었다.

“오빠 정말 몰라서 물어? 악성 매독치료에나 쓰이는 지독한 항생제잖아.”

영심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껌을 쫙쫙 씹어댔다.

“두 알이면 영심이 거시기도 숫처녀보다 깨끗해질 걸.”

희수가 그녀의 치마를 살짝 들치며 말했다.

“아냐. 완전 내성이야. 이젠 두 알론 어림도 없다니까. 호호홋.”

앉은 자세를 바꾸려 영심은 한쪽 다리를 치켜세웠다. 은빛 망사팬티가 유난히 내 눈을 자극했다.

“하긴 사람 거시기인들 내성이 안 붙겠어.”

희수의 말에 따르면 이 약은 내성을 극대화시키는 부작용이 항상 뒤따른다고 했다. 광어가 더 죽어나가기 전에 이런저런 위험을 감수하며 잠시 병세를 지연시킬 마지막 극약처방인데, 양을 조금만 잘못 계산해도 독기를 못 견뎌 물고기가 죽어버리는 탓에 마리수와 무게를 따져 정확한 용량을 지켜야 한다면서.

 

술이 몇 순배 돌 무렵 나는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걸어 나가려는데 눈앞에 위치한 D사육동에서 인기척소리가 들려왔다. 사육동 출입문이 반쯤 열렸고 그 안에서 손전등 불빛이 간간이 새어나왔다.

“아래위로 다 해처먹는군. 이젠 또 저놈들이 설쳐대니.”

희수가 바지춤을 추스르며 내 뒤로 다가왔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육동에서 직원 둘이서 집어상자를 마주 들고 부랴부랴 걸어 나왔다.

“이봐, 그리 서둘지 말어. 오소장 그놈 지금 계집질에 정신없을 테니.”

희수가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난데없이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화들짝 놀라 상자를 바닥에다 떨어뜨려버렸다. 둘 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댔다. 곧 직원 하나가 우리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왔다.

 

 

“희수 너 언제 들어왔냐? 술 한창 퍼마실 시간 아냐?”

그가 겸연쩍은 낯빛을 감추며 물어왔다.

“고깟 한 상자 훔쳐서 어느 년 육횔 맛보겠어. 모텔 잡아놓고 두 놈들끼리 비역질이나 한 번 하고 나오면 끝이겠군 그래.”

희수는 팔짱을 끼고 서서 둘을 응시했다.

“육회는 무슨. 오소장이 소주값만 주고 안주값은 안 주고 가서 말이지. 헤헤헤.”

그는 방문 앞에 놓인 여자 구두를 내려다보며 빈 웃음을 지어보였다. 뭔가 더 말을 하려다 말고 손을 두어 번 흔들며 서둘러 돌아섰다.

“그럼 우리도 회나 한 마리 처 먹어볼까.”

 

그들이 양식장 밖으로 사라지자 희수도 뜰채를 쥐어들었다. 사육동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후에야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길쭉한 접시 하나가 들려있었다. 나는 생각 없이 젓가락을 쥐어들다 그만 놀라버렸다. 두 줄로 가지런히 담긴 회 가장자리에 광어의 머리가 놓였던 게다. 놈은 아직도 주둥이를 뻐끔뻐끔거렸다. 그 사이로 작은 물거품이 일다 사라졌다. 검붉게 썩은 눈알이 핏기를 머금은 걸쭉한 점액질에 뒤덮인 채 주둥이까지 비어 나와 간댕거렸다.

“아이잉, 이게 뭐야. 징그럽게.”

나 못지않게 영심 또한 무척 당황한 얼굴이었다.

“자, 먹어봐라. 이게 바로 스쿠티카 회다. 신선한 기생충까지 덤으로 회쳐 먹는. 영심이 망사팬티 좀 봐라. 이놈도 뇌에 바람구멍이 숭숭 나버렸잖냐.”

희수는 우리의 뜨악한 시선에 아랑곳 않고 젓가락 가득 회를 집어 들고 질겅질겅 씹어댔다. 나는 살아서 팔닥팔닥거리는 광어의 대가리를 짓씹은 듯 구역질이 치밀었다.

“오빠는 여기서 얼마나 일했대?”

영심은 벌렸던 다리를 모으며 내 쪽으로 돌렸다. 나 역시 접시에서 급히 눈길을 거두고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이틀 뒤면 두 달이지. 근데 그딴 건 왜 물어?”

“다들 두세 달을 못 견디고 관두니까 그러지. 양식장 사내들도 우리처럼 달첩질한다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나왔겠어. 호호홋.”

“하긴 그새 전임소장을 시작으로 네 놈이 일을 관뒀군.”

 

내가 양식장에 들어온 첫날에 직원들이 서로 입을 맞춘 양 건네던 말이 있었다. 여기서 얼마나 일할 거냐? 한두 달 일하려면 내일이라도 당장 관둬라. 그렇게 말하던 자들이 벌써 반이나 떠나갔다. 그들 역시 기껏 몇 달을 버티다 오간단 말도 없이 `회유'해버린 꼴이었다. 하긴 사장부터 면세유 도용에다 불법 매립, 분식회계로 돈을 빼돌렸지 않았나. 수시로 바뀌는 직원을 핑계 삼아 늘 정원에서 한두 명씩 적게 고용했다. 그렇게 챙긴 돈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뒷돈을 대다 적발돼 감옥에 가버렸다. 다급해지자 이유 없이 전임소장을 해임시키고 친척인 오소장을 부랴부랴 불러들였다.

 

“왜 다들 한곳에 진득하니 못 붙어 있고 그리 떠도는 거야?”

“정말 몰라서 물어?” 희수가 나를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계속 가래를 킁킁 끓더니 사이 뜨게 대답했다. “내성 탓에 부단히 회유하는 꼴이지. 그렇다고 양식장서 뛰쳐나간 놈들이 다른 일 할 것 같아? 이 지역에 양식장만 몇 백 개가 넘는다. 그러니 열에 아홉은 다시 양식장으로 달첩질하러 기들어 가지. 어딜 가더라도 별 어려움 없이 바로 작업할 수 있잖냐. 수차례 양식장 떠돌다보니 이 일엔 아주 판수익었거든.”

“에이, 오빠들. 일 얘긴 그만하고 어서 한잔들 해. 이러다 밤시간 다 날리겠네. 포르말린과 항생제 따위가 뭔 대수야. 그딴 건 요놈처럼 골 다 파 먹힌 광어도 안단 얘긴데 뭘.”

줄담배를 피워대던 영심이 광어 머리에다 꽁초를 눌러 껐다. 미간에 주금이 잔뜩 잡힌 채였다. 희수는 그런 그녀에게 군눈조차 돌리지 않고 말을 내리엮었다.

“흐흥, 오소장 그 능구렁이 같은 새끼가 우리 머리 위에서 펄펄 날고 있단 말이야. 어디 지놈부터 영심이표 매독 한번 단단히 맛봐라지.”

오늘따라 녀석은 뜻 모를 비웃음을 유별스레 자아냈다. 사실 소장이 지난 몇 주 동안 스쿠티카를 잡으려고 한 일은 치료가 아니라 단지 항생제 쏟아 붓기에 불과했다. 한 양식장에서 병이 생기면 그곳의 고기 배설물이나 먹이 찌꺼기가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이 바닷물을 끌어다 쓰는 다른 양식장에도 덩달아 병이 옮겨진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양식장마다 비슷비슷한 병이 나돈다. 그러면 또 너도나도 항생제를 뿌리는 일이 반복되기 마련이었다.

 

 

“영심이표 매독과 매한가지야. 차차 병 옮고 옮기다보면, 흐흥.”

“영심이표 매독?”

“임마, 임파실린 말이야.”

희수는 얼이 빠진 듯 멍하니 빈 잔을 내려다보았다. 어쩐 일인지 까닭 없이 실실 웃어대다가 또 화내기를 반복했다.

“아까는 임파실린 쓰면 안 된다더니 지금은 또 무슨 소리야? 스쿠티카 땜에 너 요즘 너무 과민반응하는 거 몰라? 까짓 임파실린은 또 뭐라고. 그 일로 양식장 문 닫았다더니 그래서 그런 거야?”

“어느 새끼가 그러던? 김반장 또 그놈이이야! 약 안 쓰겠다고 똥고집 부리다가 거덜 났다고. 오냐, 논 팔고 집 팔고 빚까지 내서 양식장 차렸다 이 년도 못가서 다 말아 처먹었다. 왜? 너도 내가 우습게 보이냐? 그래 니놈도 실컷 비웃어라.”

그는 회접시에다 가래를 탁 내뱉더니 혼잣말을 계속 더 중얼거렸다. 내가 불쾌한 얼굴색으로 꿍하게 앉아 있자 이내 타이르듯 말해왔다.

“근데 술 다 떨어졌잖아. 자, 나가자. 나가서 술 한잔 더 빨아야지.”

“이제 그만 마시자. 내일 또 일해야 하잖아.”

“임마, 폐사통에서 뭔 일을 해. 아가씨도 특별히 불러 앉혔는데 뽕을 뽑아야지. 영심이 넌 이 인간 어떻게든 꿰차고 나가서 골을 쏙 빼먹어버려라.”

 

 

3

 

포르말린을 채운 말통 예닐곱 개를 성어사육동으로 모두 옮기는 사이 성어수조마다 물이 발목까지 빠졌다. 나는 빈 말통에다 포르말린을 반쯤 담고서 급히 수조 안으로 들어갔다. 우선 말통에다 물을 가득 담아 골고루 섞었다. 이를 바가지에 한 가득 퍼 담아 수조 위로 조심스레 흩뿌렸다. 그리 주의를 기울였건만 나도 몰래 포르말린 희석액이 눈에 한 방울 튀어들었다. 눈알이 화끈화끈 달아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기름에 달달 볶은 고춧가루를 눈에다 휙 부어버린 느낌이었다.

 

 

“니기미, 오늘 밤 잠 또 다 잤네.”

나는 급한 마음에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뭔가 손에 걸려 재빨리 꺼내보니 민망하게도 여성팬티였다. 영심의 망사팬티가 왜 내 주머니에 들었는지 의아스러웠지만 앞뒤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이를 움켜쥐고 눈 주위를 살며시 닦아냈다. 자칫 손으로 비벼댔다간 병든 광어처럼 눈이 시뻘겋게 충혈될 뿐만 아니라 바늘로 눈알을 쿡쿡 쑤셔대는 듯한 고통까지 밤새도록 당해야 했다.

 

애꾸눈으로 어렵사리 성어동에서 약욕을 마치자 벌써 점심때가 가까워졌다. 직원들은 소장이 아침나절 만들어놓은 임파실린사료를 손수레에 가득 싣고서 저마다 분주히 급이하고 있었다. 희수가 결근한 탓에 다들 가외로 떠맡은 수조가 두세 개씩 더 늘어났다. 점심식사에 늦지 않으려면 발바닥에 약내가 날 정도로 빨리 움직여야 빠듯이 끝낼 터였다.

“다들 사료 주지 말어!”

냉동고에서 사료를 꺼내 손수레에 툭툭 싣는데 별안간 발자국 소리가 요란스레 들려왔다.

“야야야. 사료 주지 말란 말이야!”

누군가 다급히 사육동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외쳤다. 사육동 안에선 절대 뛰어다니면 안 되잖아. 나는 입버릇처럼 이 말을 외며 뒤를 돌아보았다. 직원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내게로 달려왔다.

“큰일 났다. 약 잘못됐는지 치어 다 나자빠진다.”

나는 사료박스를 내팽개치고 치어사육동으로 뛰어갔다. 직원들이 죄다 그리로 모여들었다. 치어들이 수조 곳곳에서 배를 허옇게 뒤집은 채 죽어 있었다. 아직 숨이 붙은 놈들이 그 사이로 힘없이 헤엄쳐 다녔다. 잠시 뒤 수조 가운데서부터 치어들이 도미노 무너지듯 와르르 뒤집혔다. 분명 임파실린 양이 과했던 게다.

“뭘 보고 있어! 빨리 물 틀어 환수시켜. 환수. 어서, 이 자식들아!”

오소장이 직원들을 향해 다급히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미 늦었음을 다들 잘 알았다. 이건 약욕이 아니다. 새로 물을 갈아서 독한 포르말린을 빼내는 일과는 전혀 달랐다. 이미 고기가 약을 먹어버렸는데 이제서 어쩌란 말인가. 치어가 거의 다 죽어버렸다. 요행히 살아남은 녀석들도 독한 약기운에 찌들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치어수조 모두가 온통 폐사통으로 변해버린 꼴이었다.

 

 

“뭣들 해! 어서 뜰채 가져와, 뜰채. 산 놈이라도 건져내란 말이야!”

오소장의 입에서 목멘 소리가 연신 튀어나왔다. 치어 수십 마리가 물위로 날면들면 주둥이를 치켜들고 맴돌았다. 그때였다. 놈들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스쿠티카에 걸린 광어는 먼저 눈부터 점점 번들거린다. 해가 져 수조 속이 차차 어두워지면 녀석들의 눈알은 식인상어만큼이나 예리한 빛을 뿜어댔다. 순간 나는 어젯밤 희수가 나에게 내보이던 눈빛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 임파실린이나 쭉쭉 뿌려대라, 히힛. 개새끼들, 어차피 치료할 놈도 치료 받을 놈도 없잖냐. 아예 싹부터 몽땅 쓸어버려야 할 판이지. 어디 양식장 한 곳만 유독 병이 심하겠어.”

 

 

나는 희수를 이끌고 양식장으로 되돌아가려 했다. 물론 녀석은 끝내 되돌아가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또또 그 얘기. 이제 그만 양식장으로 들어가자니깐.”

“지랄, 너나 폐사통에 처박혀 천년만년 폐사나 건져내고 살아라. 이 새끼야. 출근해 봤자 난 내일부턴 할 일도 없어.”

내 말에 아랑곳 않고 희수는 계속 술을 마시려 들었다. 술기운에 금방이라도 머리꼭지가 팩 돌 지경인 나는 혼자서라도 술집을 나서려 했다. 그러자 녀석도 덩달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야! 술값 내버려두랬잖아. 요년이나 데리고 나가고.”

희수가 영심의 어깨를 떠밀며 출입문 쪽으로 휘청휘청 걸어왔다. 내가 카운터에 계산서를 내려놓고 보란 듯이 지갑을 꺼내들자 녀석이 갈퀴눈을 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너, 너 이 새끼. 니가 왜 계산하려 해? 오라, 광어 훔쳐 판 돈으로 술 처먹고 계집 주무르긴 역겹다 이 말이야!”

이건 다만 술기운을 못 이겨 내보이는 행동이 아니었다. 나에 대한 불신이 가슴 가득 끓어오르는 지 몹시 사나운 얼굴이었다.

“저쪽에서 임파실린 써버리면 내성 탓에 이쪽에선 암만 고길 잘 관리해 왔어도 한순간에 물거품 돼버리는데..... 이 자식, 지금 감히 날 비웃는 거야? 골 나간 새끼. 사람들 회유가 뭐 어째!”

 

돌연 그의 눈이 번쩍거렸다. 영심이를 어깨에다 훌러덩 엎쳐 매더니 팬티를 쭉 벗겨냈다. 그녀를 땅에 도로 내려놓기 무섭게 은색 망사팬티를 내 머리 위에다 너무도 능수능란하게 덮어씌워버렸다.

 

 

“누구야? 어느 새끼가 어제 갈아놓았던 약통에 손댔어? 어느 놈이 임파실린 건드렸냐구!”

오소장이 쇳소리에 가까운 절규를 내지르며 치어수조로 텀벙 뛰어들었다. 미친 듯이 두 손을 휘적거리며 고기들을 건져 올렸다. 직원들도 덩달아 그를 뒤따랐다. 다들 고개를 들었다 숙였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정신없이 설쳐대는 꼴이 스쿠티카에 걸려 물 위로 수시로 머리를 내미는 저놈들과 너무나 흡사했다.

 

어느새 내 눈은 병든 광어를 바라보는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바닥에 나뒹구는 뜰채를 냅다 주워들고 습관적으로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급히 일어선 탓인지 머리가 핑 돌았다. 두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며 뱃가죽을 드러낸 채 몸이 붕 떠오르는 듯했다. 숙취에다 실내를 가득 감도는 강한 약냄새 탓도 있었다. 포르말린으로 눈이 팅팅 부어 앞이 점점 더 가물거렸다. 급기야 다리가 휘청거려 손에 쥔 뜰채를 수조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방향감각을 잃은 듯 몸이 앞뒤로 자꾸만 흔들렸다. 누군가 되레 나를 휙 낚아챌 것만 같았다. 겁결에 나는 앞뒤 따질 겨를도 없이 다른 직원들처럼 수조 속으로 허겁지겁 뛰어내렸다. 죽은 고기들에 휩싸인 채 내 몸도 그들과 같이 위아래로 심히 요동치는 거였다.

 

 

 

홍루/김가경(본명 김숙희)

 

녀석이 톱밥 속으로 숨어들었다. 녀석은 밀크셰이크처럼 어감이 달콤한 밀크스네이크 종이다. 먹이 줄 것과 따뜻하게 해 줄 것, 간단한 러시아 단어로 적어 놓은 메모지를 들여다보았다. 이반이 출항하기 전 남긴 글이다. 이반은 녀석의 등을 쓰다듬고 마지막 선물처럼 케이지를 앞에 내려놓았다. 한국 사람과 러시아 사람은 닮은 구석이 많아, 이반은 러시아 사람들도 개나 고양이, 새 같은 애완동물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뱀이라니, 나는 검정 바탕에 노랑, 빨강 줄무늬가 있는 이국의 낯선 뱀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러시아에서 뱀은 집을 지키는 수호신과 같다고 생각해. 녀석을 보고 놀란 나에게 위로라도 하려는지 이반은 한국에도 그런 얘기가 있다는 걸 어디선가 들었다고 했다. 명자, 이반은 내 이름을 부르고 입으로 휘이휘이 휘파람 부는 흉내를 냈다. 그러면 집안이 텅 비게 돼, 녀석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종종 휘파람을 불던 내게 이반은 러시아 속담을 빗대 말했다. 나는 멀찍이 녀석을 내려다보며 이반의 익살에 웃음을 내보였었다. (현재)

 

이반을 만난 것은 클럽 로즈에서였다. 로즈는 P시에서 속칭 텍사스촌으로 불리는 외국인 거리에 있었다. 예전에는 주로 미군들이 드나들었는데 미군이 철수하고 러시아 선원과 상인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날도 나는 로즈에서 맥주를 마시며 립스틱이 번지지 않았는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젊은 러시아 청년 하나가 보드카를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마담 장 앞에서 한국 얘기를 듣던 선원 중 하나였다. 술을 마실 때 거울을 보면 안 돼요, 아름다움까지 먹어버리거든요, 귓불에 입술을 갖다 대며 그가 속삭였다. 흔한 작업멘트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그의 나긋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반이라고 했다.

 

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처음 출발하는 곳이 고향이라고 말했다. 나는 시베리아 열차가 끝없이 달리는 드넓은 숲과 초원을 떠올렸다. 그에게 러브 오브 시베리아란 영화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양손을 허공에 올려 내 얼굴을 길게 그려보였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왼쪽 손목에 새겨진 푸른색 돛이 펄럭였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내가 여주인공과 닮았다고 했다. 나는 그가 그린 얼굴이 허공에 그대로 떠 있는 것처럼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러시아 사람과 첫 대면을 할 때 영화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면 사람들은 영화 속 여주인공을 만난 것처럼 이국의 여자들에게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대개 영화 속 지명이나 주인공의 이름을 들먹이는 선에서 끝이 났다. 러시아말로도, 한국말로도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순간에 이르면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가 턱을 괴고 조용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여행지처럼 나를 설레게 했다. 음악이 흘렀고, 클럽 로즈는 마치 떠나는 사람과 돌아오는 사람을 품고 있는 대합실 같았다. 그의 손목에 새겨진 푸른 돛 때문이었을까, 나는 문득 그라면 함께 여행을 떠나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같이 여행을 떠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월요일만 아니라면 언제라도 좋아요, 월요일 여행은 불행하거든요, 러시아 속담이에요. 느닷없는 제안이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나는 벽면에 붙은 러시아 달력을 바라보았다.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마치 오래 전에 만난 사람처럼 손을 잡고 아무 손님도 잡지 못한 나타샤를 지나쳐 거리로 나왔다. 밤하늘에는 만국기가 꽃잎처럼 나풀거렸고 만국기의 행렬이 끝나는 곳에서 우리는 입을 맞추었다. 두 블록 떨어진 내 숙소로 걸어올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지금도 이반이 러시아 속담을 말하며 내 입술에 입을 맞출 것만 같다. (과거)

 

시계가 밤 아홉시를 넘겼다. 녀석은 원색의 몸을 감춘 채 아직 기척이 없다. 나는 열선을 펴서 케이지 크기만큼 접었다. 그 위에 타월을 깔고 케이지를 얹었다. 사람 옷 입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판매원이 열선 까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겨울철, 스스로 온도 조절을 하지 못하는 녀석에게 열선은 생명줄과 다름없다고 했다. 녀석에게 25도의 체온으로 이국의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쩌면 불행일 수 있었다. 나는 콘센트에 코드를 꽂고 케이지에서 멀찍이 물러섰다. 거실의 불을 낮추고 이반이 남긴 메모지를 냉장고에 붙였다. 주방 창가로 가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북향으로 나 있는 주방에서 밖을 보면 아래층에 있는 중국집 ‘홍루’의 뒤꼍이 훤히 보였다. 홍루 뒤꼍에 가로등 빛이 희미하게 새들었다. 쥐라도 쫓는지 고양이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담자락을 타고 지나간다. 지난봄, 가게의 주인이 바뀌면서 홍루(紅樓)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홍루는 붉은 다락방이라는 뜻이지만 이곳에 사는 화교들은 늙은 기생의 방이라는 별칭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변두리 사거리의 허름한 중국집 이름 홍루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거리는 스산할 정도로 빛이 꺼져 가고 휑하니 바람만 몰아 불었다. 멀리 텍사스 거리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등 뒤로 손을 넘겨 자주색 민소매 드레스의 지퍼를 올렸다. 목선이 등 뒤로 깊게 파인 드레스였다. 이반을 만났을 때 이 드레스를 입었다. 이반이 긴 허리를 굽히고 마른 등에 입술을 댈 때면 나는 수줍은 소녀처럼 간지러움을 참아내곤 했다. 나는 거울을 보며 빨강 립스틱을 덧바르고 귓불 뒤에 향수를 뿌렸다. 구제를 구입해 수선한 밍크를 꺼내 걸치고 자투리로 만든 밍크 모자를 머리에 비스듬히 얹었다.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장갑을 꼈다. 은색 스팽글이 촘촘하게 박힌 카우치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몹시 차가웠다. 텍사스촌에 접어들자 겨울 내내 공중에 걸려 있던 해진 만국기가 바람에 나풀댔다. 그 아래, 술에 취한 러시아 선원 두 명이 러시아 혁명가 스텐카 라진을 부르며 지나갔다. 나는 시애틀 노래주점을 지나고 캄차카 노래방을 지나 클럽 로즈로 걸음을 옮겼다. (현재)

 

로즈에는 러시아 민요인 백만 송이 장미가 흐르고 있었다. 낮고 고혹적인 중년 여가수의 목소리가 담배 연기와 흐린 불빛에 섞여 들었다. 손님이라고는 한국 선원 두 명과 러시아 선원 두 명이 전부였다. 마담 장이 표정 없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반을 만났던 자리에 앉아 장갑을 벗어 테이블 위에 얹었다. 한국 선원과 함께 있던 나타샤가 다가와 서툰 한국어로 언니, 마셔? 라고 물었다. 나는 보드카와 러시아 닭 꼬치인 샤실릭을 시켰다. 담배를 피워 물고 천천히 로즈 안을 둘러보았다. 마담 장이 무료하게 하품을 해댔다. 필리핀에서 온 구잘은 러시아 선원과 섞여 백만 송이 장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음악이 끝날 무렵 나타샤가 보드카와 샤실릭을 내왔다. 나는 담배를 끄고 보드카를 한 잔 따랐다.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자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목까지 치닿았다. 이반은 보드카를 마시는 순간이면 고향을 떠났다는 것도, 추운 바다 위를 떠돈다는 것도 모두 잊는다고 했다. 나는 열기가 되뿜어져 나오는 목을 진정시키기 위해 샤실릭 꼬치에서 닭 가슴살 한 점을 빼 마요네즈에 찍어 입에 넣었다. (과거)

 

내가 보드카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미군이 철수하고 나서였다. 러시아 선원들이 골목을 차지하고 거리의 젊은 여자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짐을 꾸려서 떠났다. 고작 러시아 선원의 비위나 맞추며 살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마담 장도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갔던 여자였다. 나는 미군 대신 러시아 선원을, 맥주 대신 보드카를, 영어 대신 러시아어를 몸에 익혔다. 이 거리에 나타샤와 구잘이 찾아들었다. 나타샤는 러시아에서 발레리나였고 구잘은 필리핀에서 가수였다고 했다. 그렇게 누군가는 꿈을 찾아 이곳을 떠났고 또 누군가는 또 다른 꿈을 좇아 이곳으로 왔다. 하지만 텍사스촌으로 되돌아 온 사람들은 좀체 이 거리를 다시 벗어나지 못했다.

 

마담 장이 러시아 민요 대신 빠른 행진곡으로 음악을 바꾸었다. 선원들이 경쾌한 해군의 노래에 맞춰 무릎과 팔을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보드카 병이 순식간에 비어 갔다. 시계는 벌써 열한 시를 넘겼다. 한국 선원이 나타샤의 뺨을 비비며 등줄기를 훑었다. 선원 하나가 그녀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는 순간 그녀가 마담 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마담 장이 전화를 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아가씨가 클럽 안으로 들어왔다.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는 여자였다. 계산을 마친 그들이 클럽 안을 빠져 나갔다. 손님은 이제 러시아 선원만 남았다. 유난히 손님이 없는 밤이었다.

 

살집이 많은 러시아 선원 하나가 보드카를 마시며 계속 나를 주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선원은 보드카 병을 쥐고 일행을 벗어나 내 쪽으로 걸어왔다. 구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틀거리는 선원보다 구잘이 먼저 내 테이블 앞에 와 선다. 러시아 선원이 들으라는 듯 러시아말로 이번에도 손님을 채 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한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선원이 멈칫거리는 사이 구잘이 밖으로 나갔다.

 

선원이 내 앞에 앉는다. 그는 잔에 보드카를 따르며 자신의 고향 이야기로 말을 건넸다. 나는 그에게 이반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어깨를 추켜올리며 자신이 이반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주색 드레스가 마음에 든다며 슬쩍 어깨를 감싸 쥐었다. 해군의 노래가 끝나고 러시아 혁명가가 시작되었다.

 

구잘이 필리핀 친구와 함께 나타났다. 구잘의 친구가 러시아 선원의 팔을 꿰찼다. 멍청이! 저 언니 나이 많아, 주름 많아, 구잘이 선원에게 하는 말이 들려왔다. 구잘의 말에 선원이 내 앞에 앉은 선원에게 손짓을 보냈다. 동료가 만류하는 손짓을 무시하듯 선원이 지갑을 꺼내 보드카와 샤실릭 값의 두 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지켜보고 있던 구잘이 거칠게 다가왔다. 언니 년 나빠! 그녀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놀란 선원이 성급히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의 돈을 챙겨 일행 쪽으로 가버렸다. 망할 년! 어린 년이! 마담 장이 구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언니 년, 나빠! 구잘이 악다구니 끝에 손을 풀었다. 그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샤실릭 꼬치가 꾸들꾸들 말라갔다. 러시아 혁명가가 끝나고 경쾌한 아코디언 연주와 함께 새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유난히 손님이 없는 밤이었다.

“이 짓도 이제 지긋지긋해, 러시아 년들을 한국 놈들에게 붙이고 필리핀 년들은 러시아 놈에게 붙이고, 이렇게 갈보 년들 불러대는 것도 신물이 난다구!”

그녀가 보드카를 마시며 넋두리를 해댔다. 쿨럭쿨럭, 천식 때문인지 잔기침이 뒤따랐다.

“그래도 옛날에 이 바닥에서 명자, 하면 알아줬는데, 사내들을 홀리는 묘한 매력이 있었지, 그 시절에는 먹물 튄 년이 드문 때였으니…….”

그녀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흐릿한 불빛을 타고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거에 혹해서 사내놈들이 많이 찝쩍댔지…… 그때 한 놈 잡아 떠나지, 무슨 미련이 있다구…….”

그녀의 목소리는 무대 위에 홀로 앉은 재즈가수의 독백처럼 한없이 낮았다.

“너나 나나, 진즉에 이 바닥을 떴어야 하는데……, 사나운 팔자는 이래도 저래도 막히니…….”

그녀는 마치 거울을 보듯 나를 보고 있었다. 손님은 더 이상 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코트를 걸쳤다. 카우치 백을 열어 계산을 마치고 조용히 로즈를 나왔다.

 

홍루의 간판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나는 홍루 앞에서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기고 모자를 반듯하게 썼다. 보드카 때문인지 속에서 열이 올랐다. 어두운 계단을 지나 2층 현관문을 열었다. 녀석은 아직도 톱밥 속에 파묻혀 있다. 녀석에게 다가가 케이지 밑에 조심스럽게 손을 갖다 댔다. 따뜻했다.

 

월요일에 길을 떠나면 여행이 불행하게 된다고 했던 이반은 정작 월요일에 떠났다. 이반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건 단순히 그가 월요일에 떠났기 때문이리라. 나는 욕실로 들어가 화장을 지우고 드레스를 벗었다. 거울에 깡마른 몸이 드러났다. 이반이 명자, 라고 이름을 부른 뒤 커다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그려 보이면 나는 러시아 회화 책을 뒤지듯 그가 허공에 그려낸 그림을 꼼꼼히 살폈다. 이반은 종종 그렇게 자신이 탈 배가 지나갈 곳을 손으로 그려 보여주었다. 그럴 때마다 이반의 손목에 새긴 푸른 돛이 허공에서 움직였다. 이반은 지금 어느 바다를 지나고 있을까, 나는 깡마른 몸에 샤워기의 물을 뿌렸다. (과거생각)

 

이른 아침, 잠에서 깬 것은 녀석 때문이었다. 문득 녀석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반이 떠나고 녀석을 제대로 본 적도 없다. 나는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나갔다. 케이지에서 멀찍이 떨어져 톱밥 위를 보았다.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반이 떠나고 녀석은 줄곧 톱밥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일까, 나는 케이지 안을 살폈다. 톱밥의 곡선이 흐트러짐 없이 처음 그대로였다. 나는 냉동실 문을 열고 이반이 사 놓은 먹이를 하나 꺼냈다. 먹이는 알루미늄 포장지에 싸여 있었다. 개수대에 따뜻한 물을 받아 포장된 먹이를 그대로 담갔다. 재스민 차를 우려내 창가로 간다.

 

눈이 흩날렸다. 홍루 지붕에는 엘피 가스통 4개와 물탱크,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작업복과 면장갑, 깨진 그릇이 나뒹굴었다. 그 낡은 지붕 아래 자장면과 짬뽕 옆으로 적힌, 익숙하나 한 번도 맛을 본 적 없는 횡서 끝자락의 낯선 메뉴를 떠올린다, 어쩌면 남자가 만들어 본 지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감조차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그 메뉴 밑으로 삐뚤삐뚤하게 적힌 러시아 음식들. 흑빵과 함께 홍루의 남자는 육개장과 비슷한 쌀단까나 빈대떡과 비슷한 블린 같은 러시아 음식도 만들었다. 종종 러시아 사람들이 중국 음식 중에 끼어 있는 러시아 음식을 주문하였다.

 

눈이 내려앉는 홍루 뒤꼍에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가 등을 보이고 양파 껍질을 벗기기 시작한다. 내가 보는 것은 언제나 남자의 등이다. 남자는 마치 그림 속에 들어 있는 사람처럼 묵묵히 앉아 양파를 깠다. 넓은 고무 대야를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물에 붇고 있는 양파 껍질을 벗겨 낸다. 인조털이 달린 두툼한 점퍼에 가려진 남자의 양 옆 어깨가 끊임없이 움직인다. 나는 껍질과 뒤섞인 혼탁한 물에 한 쪽 손을 깊숙이 집어넣고 남은 양파 알을 찾는 남자의 기울어진 어깨를 본다. 언뜻언뜻 삐져나오는 남자의 붉고 물에 불은 손. 남자는 허리를 펴고 위를 올려다보는 법이 좀체 없다.

 

남자의 등 뒤로 살금살금 나타샤가 다가간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허리를 익살스럽게 굽히고 남자의 등 뒤에 몰래 다가섰다. 나타샤가 두 손으로 남자의 눈을 가린다. 남자가 양파 껍질이 묻은 젖은 손을 차마 나타샤 손에 포개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나타샤가 손을 풀었다. 나는 뒤돌아보고 멋쩍어하는 남자의 표정을 바라보며 식어가는 찻잔을 볼에 대고 눌렀다.

 

나타샤가 남자 앞에 턱을 괴고 앉는다. 분홍색 털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클럽에서와는 달리 앳돼 보였다. 남자가 양파 껍질을 벗기는 일을 멈추었다. 나타샤가 일어서더니 뒤꿈치를 모으고 양발을 벌려 발레의 폴리에 자세를 취한다. 두 팔을 뻗어 머리 위로 올리고 천천히 발 앞굽을 세워 잔걸음으로 뒤꼍을 옮겨 다녔다. 한눈에 봐도 그녀가 백조의 동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타샤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총총걸음으로 뒤꼍을 돌아 남자 앞에 섰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동그랗게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남자를 향해 웃고 있는 나타샤를 보며 식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개수대에 던져놓은 녀석의 먹이가 녹았다. 먹이를 건져서 접시에 담고 알루미늄 포장지를 벗겨냈다. 손가락 한 마디를 좀 넘긴 연한 핑크색 먹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나는 숨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 쥐가 녀석의 먹이라니. 처음 기지촌에 왔을 때처럼, 처음 러시아 선원을 만났을 때처럼 무섭고 낯설었다.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집게로 새끼 쥐를 집어 올려 녀석에게로 갔다. 톱밥 위는 아직도 텅 비어 있었다. 케이지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고 먹이를 내려놓았다.

 

휘파람을 분다. 녀석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휘파람을 분다. 어릴 적 나는 늘 혼자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면 아무도 없는 집 마루에 앉아 허공을 향해 휘파람을 불어대곤 했다. 설령 어른들의 말처럼 뱀이 나온다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휘파람을 불면 곁에 누가 있는 것처럼 무서움이 가셨다. 이반의 말대로 휘파람을 불어서 집이 비었는지 집이 비어서 휘파람을 불었는지 지금도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케이지에서 시선을 거두고 소파에 앉아 여행자를 위한 러시아 회화 책을 폈다. 90쪽 ‘거리’에서부터 120쪽 ‘모자 가게’까지는 이반이 떠나기 전 러시아어로 읽어주었다. 151쪽 기차여행 편을 한글로 따라 읽는다. ‘그제야 마구 쎄스츠 나 보예즈제?’ 어느 기차에 타야 합니까?

 

홍루 뒤꼍으로 함박눈이 쌓였다. 나는 눈을 밟으며 홍루로 갔다. 홍루에는 나타샤와 한국인 두 명만이 앉아 있었다. 주방 안으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종업원에게 이반이 즐겨 먹었던 쌀단까와 흑빵을 주문했다. 종업원 대신 나타샤가 내 쪽을 힐금거리며 주방 입구로 갔다. 그리고 주방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주문을 받아 전해준다. 나는 낮은 선반 위에 펼쳐진 러시아 회화 책을 잠시 쳐다보았다. 남자도 틈틈이 회화 책을 뒤지며 러시아 말을 익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습관처럼 폴리에 자세로 발을 벌리고 서 있는 나타샤의 뒷모습이 왠지 서글퍼서 고개를 돌렸다.

 

쌀단까와 흑빵이 나왔다. 이반은 홍루의 쌀단까 맛이 고향의 맛과 같다고 했지만 홍루의 쌀단까 맛은 육개장과 별반 다름없는 맛이었다. 천천히 흑빵을 뜯어 입에 넣었다. 흑빵이 입안에서 거칠게 씹혔다. 나는 반쯤 뜯어 먹은 흑빵을 남기고 홍루를 나왔다.

 

케이지 안에 먹이가 그대로 있었다. 녀석이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나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케이지의 뚜껑을 열고 먼지떨이를 거꾸로 찔러 넣어 천천히 톱밥을 휘저었다. 녀석은 나타나지 않았다. 막대기로 커다랗게 원을 그은 뒤 안으로 조금씩 좁혀가며 톱밥을 감아 올렸다. 녀석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반이 곁에 있었다면 아마도 내가 휘파람을 불어 모든 게 텅 비어버린 거라고 말했을 것이다. 녀석은 어디로 간 것일까.

 

눈이 녹고 있었다. 녀석이 사라진 지 일주일째, 부두에 배가 들어왔다. 텍사스 거리는 러시아 선원들과 보따리 상인들로 붐볐다. 나는 클럽 문을 열었다. 로즈도 러시아 선원들로 북적였다. 여전히 러시아 음악 백학이 흘러나왔고 조명은 더 흐려 있었다. 나는 이반을 만났던, 거울이 걸린 자리에 앉았다. 장갑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리고 카우치 백에서 담배를 꺼냈다. 언니 머? 구잘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는 보드카와 샤실릭을 주문했다. 마담 장이 새로운 선원들을 앞에 두고 예전 텍사스 거리에 몰려들었던 미군들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선원들이 이야기를 채근하듯 마담 장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시절 마담 장의 사랑을 구하려는 한 미국 병사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털어 백만 송이 장미를 사다가 거리에 뿌렸노라고 말하자 선원들이 속았다는 듯 몸을 털며 허탈한 웃음을 웃었다. 러시아에 전해 내려오는 백만 송이 장미에 얽힌, 가난한 화가의 슬픈 사랑이야기란 것을 이내 알아챈 모양이었다.

 

마담 장은 배가 들어올 때마다 선원들을 앞에 두고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내곤 했다. 선원들은 이국의 낯선 이야기에 자신들 나라의 이야기가 섞여 든 것을 알아채자 긴장이 풀렸는지 보드카를 연거푸 마셨다. 마담 장이 의자를 돌려 몸을 반쯤 틀고 있는 러시아 선원들을 달래듯 두 손을 들어 허공을 다독였다. 선원들이 다시 마담 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타샤는 한국인 선원들 사이에 섞여 있었고 이미 취해 보였다. 한국인 선원이 길고 곧은 나타샤의 등줄기를 더듬어 내려가다 허리를 감싸 안고 일어섰다. 마담 장이 재빠르게 나타샤와 눈길을 주고받았다. 나타샤와 한국인 선원이 계산을 마치고 클럽 밖으로 나갔다.

 

홍루의 남자가 클럽에 들어선 것은 내가 두 번째 담배에 막 불을 붙일 때였다. 남자는 이곳이 처음인 듯 두리번거리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다소 들뜬 표정으로 구잘에게 주문을 했다. 그의 테이블에 맥주와 마른안주가 올려졌다.

 

나는 보드카를 한 모금 마셨다. 마담 장이 음악을 바꿨다. 빠르고 경쾌한 음악이었다. 러시아 선원들이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한다. 러시아인들의 춤은 마치 목각 인형이 줄에 매달려 움직이는 것처럼 무릎과 팔이 절도 있게 꺾어졌다. 격렬하면서도 율동 사이사이에 강한 매듭이 있는 러시아 춤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정신이 맑아졌다. 춤이 격렬하면 할수록 더 그랬다. 나는 선원들이 원무를 이뤄 추는 가팍을 보며 이반을 떠올렸다. 이반도 어디선가 함성을 지르며 저들처럼 가팍을 추고 있을까, 나는 보드카를 마시고 샤실릭을 한입 베어 물었다. 바에 앉아서 계속 몸을 흔들고 있던 마담 장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육중한 그녀의 몸이 빠른 리듬에 맞춰 민첩하게 움직였다. 선원들의 함성이 추임새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음악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들의 춤은 자정까지 계속될 것이다. 구잘이 나타샤가 없는 빈자리를 대신하여 분주히 움직였다. 마담 장은 점점 술에 취하고 흥에 취해갔다. 가끔 이렇게 마담 장이 흥에 취해 선원들과 춤을 추면 그녀가 어김없이 해 오던 일, 러시아 아가씨를 한국 선원에게 붙이고 필리핀 아가씨를 러시아 선원에게 붙이는 일을 잊었다. 더불어 나의 존재도 잊었다. 그녀가 잊는 것은 단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천식처럼 오래된 이 거리의 모든 것들, 그녀를 되돌아오게 만들었던 익숙한 모든 것들, 그녀의 생 모두를 잊을 것이었다. 이반의 말대로 휘파람을 불면 무언가 텅 비게 되는 것처럼 그녀도 텅 비어가는 것이리라. 원무에 끼어 점점 격렬하게 몸을 흔들 때마다 그녀가 한줌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기라도 할 듯 깡마른 손을 허공에 내밀었다.

 

홍루의 남자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남자는 무릎 사이에 손을 찔러 넣고 눈은 줄곧 나타샤를 찾았다. 나는 마지막 보드카를 입에 털어 넣었다. 남자가 취했는지 점점 고개를 떨궜다. 녀석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문득 잊고 있던 녀석을 떠올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남자가 고개를 든다.

 

거짓말처럼 녀석을 찾은 것은 소파 밑에서였다. 환전소에 가기 위해 러시아 동전을 지갑에 넣는 중이었다. 소파 밑으로 굴러들어간 동전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누렇게 바랜 벽지에 노랑 빨강 검정 색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소파 안쪽 벽 틈에 일자로 붙어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가만히 녀석을 지켜보았다. 녀석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먹이를 꺼내 따뜻한 물에 담근 다음 물기를 닦아 소파 입구에 놓았다. 집게를 들고 소파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녀석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숨을 삼켰다. 먹이 앞까지 조심스럽게 다가간 녀석이 고개를 들며 혀를 날름거렸다. 녀석의 여린 혀가 재빠르게 입속을 반복해서 드나들었다. 녀석이 먹이 앞으로 다가가 먹이를 덥석 무는 순간 집게로 녀석을 집어 케이지에 넣었다. 녀석의 입에는 삼키다 만 새끼 쥐의 여린 몸이 반쯤 물려 있었다.

 

로즈 앞에는 며칠째 클로즈라는 안내판만 달려 있었다. 겨울이면 도지는 마담 장의 천식 때문에 잠시 문을 닫았다고 했다. 나타샤도 가끔씩 목욕탕이나 환전소에서 마주치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 한국 선원을 따라 이곳을 떠났다는 말도 있었고 임신을 해서 로즈에서 쫓겨났다는 소문도 있었다. 텍사스 거리는 다 해진 만국기를 걷어내는 상인들로 분주했다. 나는 만국기가 끝나는 곳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이반을 처음 만났던 날, 이반의 달콤한 입술이 나의 입술에 닿던 순간, 나는 내 여행이 이대로 끝이 나길 간절히 바랐었다. 이반은 지금 어느 바다를 지나고 있을까? 나는 만국기가 걷히는 하늘을 바라보며 블라디보스토크 행 비행기표 판매소를 지나 환전소로 갔다.

 

마지막 남은 먹이를 녀석에게 넣어주었다. 녀석이 조심스럽게 먹이에 다가간다. 잠시 목을 추켜세우더니 슬그머니 방향을 틀었다. 또 먹이를 먹지 않을 모양이었다. 온수에 목욕을 시키면 좀 도움이 될 겁니다. 수의사는 전화로 간단하게 처방을 내렸다. 소화불량이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정상적으로 탈피를 하기 힘들어진다고도 했다. 대야에 온수를 받아 케이지 옆에 놓았다. 케이지 뚜껑을 열고 널브러지듯 몸을 길게 풀고 있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집게를 들다가 내려놓았다.

 

녀석의 외피에 손을 조심스럽게 갖다 댔다. 녀석의 차가운 체온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천천히 선을 그으며 머리 쪽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녀석의 입을 지나 턱쯤에 손가락이 닿았을 때 녀석이 감미로운 몸동작으로 손에 감겨든다. 소름인지 전율인지 무언가 몸속으로 울려들었다. 나는 녀석을 안듯 들어올려 온수에 담갔다. 녀석이 천천히 물속으로 스며든다. 나는 물끄러미 녀석을 보다가 물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미끄러지듯 내 손을 비켜나가는 녀석의 꽁무니를 따라가며 손을 저어 작은 물보라를 일으켰다. 녀석이 점점 생기를 찾은 듯 작은 원을 그리며 빠르게 움직였다. 잠시 뒤 작은 수건으로 민첩하게 손아귀를 벗어나는 녀석을 떠내 마른 수건을 깔아놓은 그릇에 옮겨 담았다. 녀석을 재빨리 수건 위에 굴린 뒤 케이지 안으로 털어 넣었다. 명자, 아주 잘했어, 이반이 보았더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홍루를 지나고 로즈를 지나 도로 건너편에 있는 수족관으로 갔다. 파충류 먹이 있음. 간판 옆에 적힌 글씨를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점원이 햄스터 케이지를 열다가 내 쪽을 본다.

“뭘 드릴까요? 손님.”

점원이 케이지 안에서 햄스터를 꺼내며 물었다.

“밀크스네이크 종인데……먹이 좀 사려고요.”

나는 나무토막을 기어오르는 비단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한다.

“뱀을 키운 지 오래되셨나 봐요. 처음 키우는 사람은 그렇게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거든요.”

점원이 손에 쥔 햄스터를 비단뱀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이렇게 한창 클 때는 녀석도 산 먹이를 찾아요, 그래야 탈피를 제대로 할 수 있거든요.”

나무막대를 기어오르던 녀석이 슬그머니 방향을 틀며 혀를 날름거렸다. 케이지에 던져진 햄스터가 꾸물꾸물했다. 움직임을 감지한 녀석도 먹이를 견준 채 꼼짝 하지 않다가 입을 벌리고 먹이를 물어 삼켰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점원에게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는 말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런 속담이 있었나요?”

점원은 손에 묻은 햄스터 털을 털어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님, 냉동 쥐로 드릴까요?”

점원이 물었다. 나는 햄스터의 하얀 몸이 비단뱀의 입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점원은 케이지에서 꿈틀거리는 분홍색 새끼 햄스터 한 마리를 꺼냈다.

“녀석들이 종종 냉동 먹이를 먹지 않는데…… 그건 아마도 탈피를 하려고 그럴 겁니다. 제대로 크고 있다는 증거죠.”

나는 점원에게서 새끼 햄스터를 받아 골목으로 돌아왔다. 날이 풀리고 있었다. 곧 부두에 배가 들어온다고 했다. 나는 문이 닫힌 로즈를 지나 홍루에 들러 쌀단까와 흑빵을 시켰다. 남자는 여전히 등을 보이고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 탁자 위에는 너덜너덜해진 러시아 회화 책과 비닐도 뜯지 않은 발레 슈즈가 올려져 있었다. 나는 흑빵을 뜯어 쌀단까에 적셔 먹었다. 맞은편 거울에 흑빵을 씹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밥을 먹을 때 거울을 보면 안돼요, 아름다움까지 먹어버리거든요, 이반이 내 귓불 뒤에 입술을 갖다 대며 속삭일 것 같았다. 홍루의 간판이 바람에 흔들거렸다.

 

 

 

 

 

 

 

한국일보 고열

 

수인은 투명한 플라스틱 숟가락에 요리용 럼주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8ml를 최대로 하는 작은 약숟가락 안에서 럼주는 순식간에 불룩하게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파괴될 듯이 럼주의 표면은 그녀의 맥박과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미세하게 떨렸다. 팔꿈치를 식탁 위에 괴고 수인은 오로지 럼주의 작은 흔들림만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흔들림이 오히려 수인의 안녕을 조절해주는 듯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간이등의 좁은 빛 테두리 아래에, 이 광경은 누군가 단단히 오므려 매달아놓은 물주머니처럼 팽팽하고 묵직하게 집안을 잡아당겼다.

 

문득 수인은 입속에 럼주를 털어 넣었다. 짤막한 숟가락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숟가락을 혀로 천천히 핥아 만졌다. 어떤 상념들이 끊이지 않고 몰려들어 수인에게 기계적으로 이 동작을 하도록 만들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외벽에 거의 짓눌리다시피 서 있던 개오동나무와 같은 것이 떠올랐다. 올 여름 태풍이 오는 징후로 조금 거세진 바람에 개오동나무는 성급하게 쓰러져버렸다. 꺾인 나무는, 낯설고 덩치 큰 어른처럼 확대되어 1층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흉물스럽게 나부끼던 잎사귀의 뒷면들이 이상하게 보기 좋아서, 수인은 좀 더 오랫동안 사람들이 그 나무를 방치해두길 바랐다. 3개월 만에, 죽은 개오동나무는 적당한 길이로 잘리고 한 데 묶여, 서 있던 자리에 다시 놓였다. 잎사귀들은 저절로 사라져버렸다. 수인은 몇 번 더 숟가락에 럼주를 채웠다 비우는 일에 시간을 내맡겼다. 처음과는 달리 타액이 묻은 숟가락에서 럼주는 쉽게 쏟아져버렸다. 차가운 럼주 병의 목을 잡고 적당히 기울여 멈추는 일에도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수인은 개수대에서 약숟가락을 물로 헹궈냈다. 냅킨 한 장 위에 올린 약숟가락은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듯이 너무도 가벼웠다. 병원에서 처방을 받아온 지 이틀. 아기에게 5ml씩 6시간마다 딸기 향으로 위장된 해열제를 먹이면서, 수시로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아냈다. 특별히 나아진다는 느낌보다는 응급 상태의 고열을 간신히 면하고 있는 듯했다. 체온계를 아기의 귓속에 밀어 넣으면 열 번에 다섯 번은 경보음이 울렸다. 작은 디지털 화면에는 매번 확성기 모양을 기호화 한 경고 그림이 깜박거려 수인의 간호를 채찍질했다. 수인은 약숟가락을 냅킨으로 꾹꾹 닦아서 티셔츠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아침은 아무렇게나 지나가버렸다. 수인은 눈 뜨자마자 커튼 블라켓을 고정시키는 천정 부분을 올려다보았다. 이전에 살았던 사람, 그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못 박았던 자국이 뒤죽박죽 얽혀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는 그것을 각각 가려내는 장난어린 숙제를 하곤 했는데 규칙성을 찾아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어그러진 생활 패턴 속에서 수인은 오히려 경쾌해져 있었다. 아기는 곧잘 받아먹던 연식조차 입에 대려 하지 않았다. 한밤중에는 오한으로 끙끙댔지만 날이 밝으면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때문에 수인이 아침마다 해내던 일들에서 오히려 자유로워진 것이었다. 채 잠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머리도 묶지 못하고서 개수대에 기대어 감자나 양파 껍질을 벗겨 내지 않아도 되었다. 얼린 고기 덩어리에서 비닐을 제거할 때 팔목에 튀는 얼음 알갱이들로 불쾌해지는 일도 없었다. 물을 미지근하게 데우고 컵홀더를 준비하는 일은 물론, 아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수납장을 조심스럽게 열고 닫고 할 필요도 없었다. 행복이란 뭔가요, 당신과 나 눈물짓게 하는 바로 그것. 수인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흥얼거렸다. 9시 전후에 눈을 떠, 신발장 앞에 서서히 파고드는 햇빛을 바라보는 일. 그 빛이 평행사변형으로 변해가며 조용히 소멸하는 과정을 온전히 지켜볼 수 있는 삶이라니. 그것은 원래 내 것이 아니었나, 수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밤새 아기를 간호하는 일로 고단해 있었지만 산뜻해진 하루하루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할 수 없었다. 완성된 평행사변형의 빛은 점점 바닥 쪽으로 기어 내려오다가 모서리를 만나 단번에 쪼개져버렸다. 그리고 어느 사이 더 길고 가늘게 반짝거리면서 우산꽂이 속으로 들어갔으나 다시 보면 여전히 우산꽂이 밖에서 서성거렸다. 쪼개진 작은 빛이 원래의 몸체를 따라 집안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아기는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수인은 머리맡에서 해열제 먹이는 시간을 기록해둔 쪽지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소독해 두었던 젖병을 흘끔 확인하고는 좀 더 누워 있기로 했다. 아기가 깨 울기를 기다렸다.

 

수인은 젖병을 공중에 추켜세워 아기가 분유를 몇 ml나 남겼는지 확인했다. 아기는 정확히 180ml를 빨고 나서 곧장 다시 잠들어버렸다. 아기의 분신과도 같은 인형, '와와'는 며칠째 커튼 뒤에 가려져 입을 다물고 있었다. 수인은 와와를 창밖으로 내밀어 먼지를 털어내고 입속에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와와는 오렌지색 부직포 혀로 수인의 손가락을 옥죄었다. 수인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아 와와의 탁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잠시 서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기에게 목이 졸린 채 실종되기 일쑤였던 와와. 그런 와와가 같은 자리에 꼼짝 않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제 스스로 짖으면서 커튼 뒤로 걸어 들어간 것처럼 와와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던 것이다. 와와의 배 안쪽을 쓸어내리자 털로 감춰져 있던 건전지 덮개와 on, off 버튼이 드러났는데, 어딘가 부러져 달그락거렸다. 수인은 와와를 귀에 대고서 가볍게 흔들어보았다. 와와가 갑자기 멈췄을 때 아기가 했던 행동을 흉내 내 본 것이다. 수인은 중병 걸린 사람의 잠든 모습을 확인하고 걸어 나오는 사람처럼 와와를 커튼 속에 잘 가려두고서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탁자 위에는 아기 이름을 휘갈겨 적은 약 봉투와 1회분씩 점선으로 나뉜 가루약 일절, 네 번 접힌 처방전, 세 번 접힌 보험증이 병원 다녀온 날 그대로 놓여 있었다. 또한 작은 투입구가 있는 중간 마개와 그보다 더 작은 뚜껑이 빈 플라스틱 병과 분리되어 놓여 있었다. 수인은 새끼손톱만한 녹색 뚜껑을 손가락 끝으로 슬쩍 밀어 보았다. 뚜껑은 유리판 위에서 크게 반원을 그리더니 궤도 안에서 점점 짧은 동선으로 빨라지다가 멈췄다. 또 하나의 플라스틱 병에는 붉고 걸쭉한 액체가 4분의 1 정도 남아 있었는데 탁자유리 아래 끼워둔 사진을 가리고 눕혀져 있었다. 사진 속 아기와 전 남편은 플라스틱 병 속 해열제와 뒤섞여 흐릿하게 뭉개졌다. 그 옆으로 따로 오려낸 것처럼 수인이 떨어져 앉아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기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한 두 시간 간격으로 젖을 물리던 때였다. 수인은 사진 속 그날의 상한 머루포도를 떠올리며 의자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진열장 위에서 바구니 채로 상해갔던 머루포도의 냄새. 수인은 사진을 가리고 있는 플라스틱 병을 세웠다. 전 남편의 품속에 아기는 꼭 안겨 잠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수인은 왼쪽 다리를 들어 올려 의자 위로 끌어안으면서 식은 발가락들을 손으로 쥐었다. 엄지발톱 속이 꽤 오래전부터 멍들어 있었다. 수인은 별러 왔던 매니큐어를 바르기 위해 탁자 밑 서랍에서 살구색 매니큐어를 찾아 탁자 위에 올렸다.

 

몇 번씩 덧칠해나가자 감쪽같이 발톱의 멍든 부분이 가려졌다. 수인은 무릎에 턱을 괴고서 매니큐어가 칠해진 열 발가락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수동적인 기분으로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허공의 손이, 힘을 주어 수인의 머리 방향을 돌려놓으려 했다. 그 손이 이전에 받쳐 들고 있던, 안락을 관장하던 공기주머니는 거실에 내팽개쳐져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곤 해왔다. 수인은 놀라지 않았다. 플라스틱 기린 의자에 아기가 와서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아기가 한 번 떨어진 뒤로, 미끄럼틀의 미끄러져 내려오는 부분을 분리해 버리고 의자로 써온 완구. 아기는 평소 이 의자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마음에 차는 곳에 앉아 있곤 했는데 지난 며칠 동안 의자는 인터폰 아래 붙박이처럼 놓여 있었다. 그 완구의 일부처럼 조그맣게 의자 속에 안겨 있는 아기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아기는 담담한 눈빛을 수인에게서 거두지 않으면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부어 오른 눈두덩과 좀 더 수척해진 몸체. 18개월 된 아기의 표정은 괴상할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살짝 벌어진 입 속에는 막상, 인조 솜뭉치가 줄줄 딸려 나올 것처럼 천진한 어둠이 엿보였다. 아기의 호흡에 따라 들썩이는 앞섶이 과장되어 보였다. 수인은 앞섶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웃고 있는 원숭이 얼굴을 주시하며 조금 더 머뭇거렸다. 그러나 아기는 평소처럼 울면서 달려오지도 하품을 하면서 두리번거리지도 않았다. 수인은 두 팔을 작게 벌렸다. 아기는 바람에 나부끼는 물체와도 같이 걸어와 수인의 품에 안겼다. 수인은 아기의 머리카락들 사이에 턱을 대고서 열을 가늠해보았다. 아기의 머리통은 여전히 뜨끈뜨끈했다. 체온계를 귓속에 넣자 아기는 머리를 가로저어 싫은 티를 냈다. 그러나 곧 체념한 듯이 '삐' 소리가 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아기는 내내 작동기차를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수인이 흡족할 만큼 음식도 받아먹었다. 화물칸에 귤 두 개를 싣고서 기차는 8자 모양 레일을 몇 번이고 오갔다. 기차 밑면의 작은 스피커에서 기적 소리가 그럴싸하게 울려 퍼졌다. 어디서 따온 소리일까, 수인은 듣기 좋아서 아기 어깨를 매만졌다. 그리고 때로 선로 변경 막대를 제쳐, 기차가 터널을 지날 수 있도록 했다. 터널 앞에 서 있는 정사각형 블록에 실무자가 꽂혀 있었다. 기차를 향하여, 모든 일상을 생략하고 손을 흔드는 영원한 친구. 실무자의 앞과 뒤가 모두 앞모습이어서 아기는 매번 양쪽에 대고 손을 흔들었지만,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수인은 정면으로 실무자의 옆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복부 비만인 실무자의 파란 제복을 보며 잠시 몸서리쳤다. 실무자는 속이 텅 빈 플라스틱 두 조각을 꽉 끼어놓은 조립품에 불과했다. 그 이음새가 앞과 뒤를 미세하게 분리하면서 몸통 전체에 길고 긴 테두리를 이루고 있었다.

 

수인은 정리함에서 손에 집히는 대로, 아기 독사진 한 장과 미니 굴착기를 귤 대신 화물칸에 실어주었다. 아기는 얌전하게도, 뭐랄 것 없이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었다. 수인은 가슴 위로 손을 얹어 주머니 속에 있는 약숟가락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탁자에서 플라스틱 병을 들고 개수대 앞으로 갔다. 먼저 꽉 잠긴 녹색 뚜껑을 열고 플라스틱 병을 누르자 해열제 약물이 약숟가락으로 빨려나왔다. 다음은 약 봉투에서 1회분 가루약을 한 봉 뜯어 약숟가락 위에 쏟았다. 마지막으로, 날이 두 개 뿐인 작은 포크로 약숟가락의 둥글넓적한 곳을 천천히 저었다. 탁한 약물이 약숟가락에 명시된 '7ml'라는 작은 글씨를 지웠다. 수인은 엉뚱한 방향으로 솟아 있는 개수대 수도꼭지의 그림자를 보면서 계속해서 약물을 저었다. 또한 타일 벽 밑으로 비스듬히 길어진 그릇 선반의 그림자를 보면서도. 그릇을 받치고 있는 선반의 그림자는 규칙적인 쇠의 구조가 끊어지고 휘어져 그릇들이 공중에 떠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선반이며 그릇들, 그것들을 매달아 놓은 그림자까지 모조리 쏟아져 박살이 날 것만 같아 보였다. 수인은 수도꼭지 막대를 조금 위로 올려 물이 조용히 흐르도록 했다. 약숟가락을 물줄기 아래 가져갔다. 탁한 물방울들이 튀어 오르면서 약숟가락에 담겨 있던 약물은 순식간에 개수대 하수구 아래로 흘러 들어갔다. 약숟가락은 곧 없어질 듯이 투명해져서 계속 물줄기를 흘려보냈다. 수인은 물을 잠갔다. 그림자들은 여전히 수인의 손동작을 흉내 내고 있었다. 수인은 손을 헹구고 약숟가락을 냅킨에 닦아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손바닥에 조금 남아 있는 물기를 바지에 문지르면서 아기 옆으로 걸어갔다. 자리를 비운 사이 화물 기차는 다시 귤 두 개를 싣고 레일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수인은 갑자기 눈떴다.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밖은 어두워져갔다. 수인은 미동 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남아 있는 검푸른 낮의 기운은 허허롭게 거실 이곳저곳에 서 있었다. 부드럽고 주기적인, 수인의 날카로움을 포박해 오직 둥글게만 유지하려는 압박감에 수인은 좀 더 주의를 기울였다. 아기는 수인의 등 뒤에 달라붙어 잠들어 있었다. 해변은 얼마나 지겨운가. 수인은 다시 눈을 감았다. 벼랑 위 나무 한 그루가 불 타 없어진 해변. 해변을 더욱 지겹게 하는 것은 해변을 가득 매운 그 둥근 광물질들이었다. 수인은 조용히 화가 났다. 해변에서는 깨진 병조각조차도 날카로움을 유지하지 못했다. 수인은 해변을 북북 찢어버리고서, 그 둥글고 온순해진 돌들을 바닷물 속에 처박아버리고 나서야 다시 눈을 떴다. 돌들의 굉음과 함께 해변은 물속으로 한꺼번에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밖의 육지, 또 그 밖의 육지가 해변을 대신하여 해변이 되어갔다. 아기의 복부는, 커다란 손처럼 섬세하고 뜨듯하게 수인의 등허리를 밀었다 놓았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쳤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인은 자신의 옆구리에 놓인 아기의 가는 팔을 가만히 치우고 일어나 앉았다. 체온계는 아기의 귓속에서 종전과 다른 경보음을 자꾸 건져 올렸다. 그것은 측정 기준 이하의 온도를 측정할 때 나타나는, 고열과는 전혀 다른 경보였던 것이다. 거뭇거뭇해져가는 사위 속에서 잠든, 그녀의 아기를 어둠과 구별해내는 일은 이제 더는 어려워졌다.

 

창을 열자 쓰레기장에 내놓은 와와와 장난감 일절이 한눈에 들어왔다. 와와에게도 눈이 쌓였다. 와와는 덤프트럭의 노란 적재함 속 어딘가, 눈덩이에 파묻혀 의연하게 서 있을 것이었다. 골목 어딘가에서 헛돌고 있는 바퀴소리가 계속해서 뭔가를 파헤쳤다. 갑작스런 굵은 눈발은 커다란 분리수거 통의 지저분한 뚜껑을 모두 가렸다. 수인은 패딩 점퍼를 걸치고 투명창 마저 열었다. 과일 바구니 손잡이에 멋을 낸 오래된 리본이 눈발과 함께 휘날렸다. 출산 기념으로 전 남편이 사들고 왔던 과일 바구니. 수인은 그 바구니에 1년간 다른 계절의 옷들을 담았었고, 그만도 못하게 되었을 때 폐전선과 버리기 애매한 전자 소모품 등을 담아뒀었다. 그것마저도 다 버리고 난 뒤에, 수인은 빈 과일 바구니를 그냥 창고에 보관했다. 바구니에 담긴 잡동사니 위에 순서 없이 눈이 쌓였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제트기 여섯 대, 오감발달 딸랑이 6ps와 물오리를 함께 넣어 뚜껑을 덮은 둥근 통, 150mm 욕실화 한 켤레, 소꿉용 절굿공이, 말하는 덤프트럭과 굴착기 한 세트. 긴 막대 끝에 매달린 가위바위보용 노란 손바닥이 폭설을 저지하는 단호한 손짓으로 바구니 구석에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수인은 이삿짐센터에서 소개 받은 남자에게 다시 확인 전화를 걸었다. 남자는 고물상에 중고 물품을 되파는 일꾼이었다. 막 신호가 가는 와중에, 일꾼은 트럭을 몰고 골목에 들어서고 있었다. 수인은 방범창 사이로 손을 내밀어 초행인 일꾼에게 흔들어보였다. 그제야 운전석에서 일꾼이 고개를 운전대로 가까이 대고 밖을 올려다보았다. 일꾼은 집 앞 담벼락에 차를 돌려놓고 시동을 껐다. 수인은 계단을 텅텅 울리는 일꾼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조금 더 그대로 있었다. 트럭 뒤의 빈 화물칸에는 푸른 천막을 벽돌로 눌러 놓았고, 물건들을 동여매기 위한 고무밧줄 더미도 칭칭 감겨,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어느 곳에나 눈이 쌓였다. 수인은 창문을 닫았다.

 

무게 때문에 옮기지 못한 전동침대 외에는 모두 거실로 내온 참이었다. 수인은 미리 적어 놓은 물건 목록을 일꾼에게 보여 주면서 말을 꺼냈다. 일꾼이 목록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동안 수인은 흘낏 일꾼의 얼굴 생김새를 훑어보았다. 잠깐 사이에 이 중년 남자의 야구모자에는 눈이 묻어 있었다. 일꾼은 가슴 주머니에서 단추를 열고 펜을 꺼냈다. 그리고는 목록을 짚어가며 물건 상태를 점검하고 매입 가격을 계산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절차가 생겨났다. 수인은 이런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따분해져서, 몸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여유로워져서 팔짱을 낀 채로 일꾼의 동선을 지켜보았다.

 

"그건 조립만 다시 하면 돼요."

 

둘러보던 끝에, 일꾼의 눈이 미끄럼틀에 멈췄을 때 수인은 재빠르게 덧붙였다.

 

"이런 건 자리만 차지하고 단가가 낮아서 안 되겠네요."

 

일꾼은 수인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잘라 말했다. 게다가 목록 중에 대부분이 그런 이유로 탈락될 만한 것들이라고 지적했다. 수인은 일꾼의 발목을 단단히 여미고 있는 작업복 하의를 보고 있었다. 7만원. 그나마 서랍장, 식탁세트, 전동요람 정도의 목록 때문에 좋은 값을 쳐줄 수 있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또한 그것이 자신에게 그리 큰 이득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늘 하루가 조금은 허탕인 셈이라는 뉘앙스까지 던져줬다. 일꾼은 볼펜 끝을 손바닥에 톡톡 두들기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전동요람은 일 년 전 가격으로 이십 만원 상당의 것이었고 나머지 물건들의 가격을 다 합쳐 어림잡아도 50만원은 훌쩍 넘기는 물건들이었다. 게다가 오늘같이 눈이 많이 오는 날 누가 고물을 내다 팔겠는가? 수인은 기린 의자의 팔걸이 부분을 만지면서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당장 이 버릇없는 일꾼을 쫓아내고서 현관문을 쾅 닫아버리고 싶었다.

 

"그냥 가져가세요."

 

수인은 일꾼이 쓸모없다고 폄하한, 수인에게 그동안 없어서는 안 됐던 물건들을 모두 이 집안에서 끌어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일꾼은 뜻밖의 제안에 잠시 시간을 끌었다. 수인은 일단 일꾼의 손에 들린 메모를 돌려받았다. 일꾼이 탈락시킨 물건들은 거실 한가운데 크고 작게 솟아 있었다. 수인은 갑자기 그 목록과 실재 물건이 일치한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여겨졌다. 도살되는 가축에게서 끝없이 쏟아져 나온 배창자처럼 믿기지 않는 규모였던 것이다.

 

눈은 그쳤다. 일꾼은 차례로 물건들을 날라 트럭에 실었다. 수인은 안방 창문 앞에 줄곧 서서 트럭에 실린 물건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장 값이 나가는 것 순서로, 트럭의 앞쪽을 채워나갔다. 수인이 한 번 씩 목록을 검토했다. 주방 옆 서랍장이 있던 자리가 비고 나면 덩치 큰 냉장고를 그리로 옮길 셈이었다. 그리고 주방을 차지하고 있는 4인용 식탁은 버릴 참이었다. 그러면 냉장고가 가리고 있던 베란다 창이 훤히 드러날 것이었다. 테이블을 하나 구입해야지, 수인은 그곳에 앉아 베란다 창으로 난 연통에서 콸콸 빠져나가는 연기가 어떻게 사라져가는 지를 종일 보고 싶어 했었다. 다음으로는, 창고가 텅텅 비어 있었다. 수인은 창고를 어떻게 활용할 지 생각해보았다. 물을 자주 안 줘도 잘 자라는 화분이나 몇 개 가져다 놓을까, 그러나 키우고 돌보는 일이라면 넌덜머리가 났다. 위층 사람들이 한 것처럼 테라스로 개조해도 좋을 것이었다. 창고의 작은 창문에는 위층에서 기르는 식물에서 가끔씩 길쭉한 잎사귀가 떨어져 놓여 있곤 했다. 수인은 다 쓴 티슈 통을 채우거나 기저귀를 가지러 창고로 갔다가 그 잎사귀를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안방 창으로도 볼 수 있지만, 창고 쪽에서 담 너머 감나무가 더 시원하게 보였다. 수인은 숨을 크게 뱉으면서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끌어올렸다. 담 너머 감나무는 겨울에도 건강한 모습이었다. 간혹 그 단층집 사람들이 부주의하게 오가는 모습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었다. 수인은 가벼운 기분에 젖어 앞으로는 소파에서 잠들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토크쇼를 연이어볼 수 있는 채널을 검색하는 일도 잊지 말아야 했다.

 

일꾼은 마지막으로 노끈에 묶인 책 한 질을 보조석에 실었다. 한 권이 빠진, 23권짜리 유아용 전집이었다. 전 남편이, 임신 중에 사왔던 것이다. 수인은 '달걀'에 관한 1권을 따로 꺼내 언제나 장난감 정리함에 함께 넣어두고는 했었다. 때문에 그 한 권은 모서리가 다 헤지고 몇 페이지는 떨어져 나가 홀쭉해진 채로 너덜거렸다. 모든 물건의 운명이 그렇듯이 어느 날 그 책은 없어져버렸다. 손전등을 아무리 비춰도 보이지 않는, 장롱 밑 어딘가 깊숙이 들어가 먼지와 뒹굴고 있을 것이었다. 장롱을 들어내지 않는 한 꺼낼 수 없었다.

 

트럭에 실린 물건들 위로 푸른 천막이 넓게 덮였다. 일꾼이 천막을 잡아당길 때마다 눈이 툭툭 떨어졌다. 일꾼은 굵은 고무밧줄을 천막 위로 이리저리 던졌다. 차체의 작은 갈고리들에 그것을 교차시키고, 때로 물건의 몸통을 천막 위로 동여매기도 했다. 일꾼은 고무밧줄을 잡아당기느라 눈길 위에 쪼그려 앉거나 다리를 비스듬히 구부리는 자세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트럭의 한쪽 귀퉁이에서 밧줄을 단단히 잡아당겨 옭아맸다. 일꾼은 창문 쪽에서 완전히 뒤돌아서서 매듭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은 누구도 봐서는 안 되는 신성하고 비밀스런 일처럼 여겨졌다. 꽁꽁 묶여 완성된 천막의 실루엣이 수인을 잠시 당황스럽게 했다. 일꾼이 운전석 손잡이를 꽉 잡고 발 받침대에 한 발을 디뎌 트럭에 가뿐히 올랐다. 트럭은 골목 끝까지 천천히 나가다가 커브를 돌기 위해 몇 번이나 전진과 후진을 반복했다. 전봇대에 걸린 원색의 모집 현판이 그때마다 천막에 닿아 흔들렸다. 트럭이 완전히 사라지려 할 때 수인의 입에서 단단한 고체와도 같은 입김이 창밖으로 뻗어나갔다.

 

쓰레기장의 장난감 바구니는 이제 눈에 뒤덮여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길게 구부러져 솟아 있는 손잡이만이 간신히 그것이 바구니라는 것을 알려 줄 뿐이었다. 수인은 창문을 닫아 버렸다. 남의 집에 온 것처럼 수인은 점퍼 주머니에 깊숙이 손을 넣고서 집안을 서성였다. 가구와 물건을 들어낸 자리마다 반듯한 모양으로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런데도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수인은 점퍼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베개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의 무게가 수인을 땅속으로 끌고 들어갈 것 같았다. 수인은 바로 누웠다. 천장의 못 자국이 불현듯 생각난 꿈 내용처럼, 단순하고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이었다. 수인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조금만 뒤척여도 패딩 점퍼에서 요란한 마찰음이 생겨났다. 수인은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오후 4시.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가늠해보았다. 현관 바닥에 떨어진 나사못이 되어 보았다. 보일러의 다이얼식 버튼이 되어 '온수 전용' 쪽으로 돌아가 보았다. 두루마리 휴지가 되어 식탁 아래로 떨어진 다음 풀려나갔다가, 충전식 청소기 콘센트 속으로 쏙 들어가 보았다. 여름용 등받이쿠션 밑으로 종이처럼 납작해져서 숨어 있다가, 나사가 헐거워진 서랍장 손잡이가 되어 고정되어 보았다. 이름, 주변사람, 헤어스타일, 날짜 등등 자신에 관련된 것들이 떠오르지 못하도록 수인은 생각의 가동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결혼 전, 종종 이런 식의 장난을 치며 이부자리에서 게으름을 피우곤 했었다. 너무 오랜만에 해보는 것이라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수인의 머리 속에 자신의 신상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마치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인 양, 스스로에게 이질감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수인은 언제나, 이것이 오히려 순수한 자기 자신에 대한 침입이라고 생각됐었다.

 

허공의 손이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미지근하고 찐득거리는, 덩어리가 되어 가는 물질을 수인의 정수리에 조금씩 쏟아 부었다. 그 물질은 아무도 모르게 수인의 몸과 마음을 뒤덮으면서 거실 바닥으로 퍼져 나갔다. 수인을 장악하려는 손의 처분을 지켜보면서, 수인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손은 이번에는 다시 수인을 안았다. 수인은 더욱 차분해져서, 그 상한 냄새로 가득 찬 온기를 느꼈다. 몇 번이나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들고, 한눈을 팔다 보면 다시 어깨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수인은 더 이상 자세를 고치려 하지 않고 탁자 쪽을 바라보았다. 똑바로 집어넣지 않은 의자 다리들이 탁자 밑 허공을 흩어 놓았다. 빈 의자 위에는 물방울 두세 개가 남아 사라져갔다. 꺼진 TV 화면에 먼지가 얇게 덮여 있었고, 손가락이 지나간 흔적이 먼지를 지우며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수인은 깍지 끼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는 이불 속에서 나와 의자를 나란히 정리했다. 의자 등받이에 잘 걸쳐 올린 점퍼 소매가 바닥 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수인은 티슈로 의자 위의 물방울을 훔친 뒤에 천천히 TV 화면을 쭉 닦아냈다.

 

수인은 개수대에서 손을 씻었다. 그리고 물기를 바지에 문지르고는 삐딱하게 놓인 빈 의자로 가서 앉았다. 탁자 밑 서랍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거울은 재빠르게 탁자 밑면과 천장, 욕실 스위치, 전자레인지의 디지털시계 등등을 불러들였다가 수인의 얼굴을 비췄다. 윗입술이 아랫입술보다 두꺼운 편이었다. 수인은 윗입술을 들어올렸다. 입술 안쪽 피부와 입술로 이어지는, 거의 알기 힘든 경계를 찾아내려 애썼다. 그런 뒤 코에 닿을 정도로 입술을 더 들어올렸다. 잇몸과 입술을 잇는 긴 살점과 굵고 얇은 핏줄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수인은 한동안 집요하게 입안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욱신거리는 두 개의 앞니 중에 한 개를 손가락으로 잡았다. 앞니는 아무런 저항 없이 수인의 손가락을 따라 쑥 빠져 나왔다. 수인은 티슈 한 장을 탁자 위에 펼쳐 놓고 빠져 나온 앞니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손거울을 엎어 놓고서, 이가 빠져나간 자리를 혀로 꽉 채워보았다. 피가 새어 나와 입안이 찝찔해졌다. 수인은 피를 삼켜가면서 다시 손거울을 비췄다. 앞니 하나가 없어진 입 속은 더는 웃기지도 않은 고전 개그 장면처럼 지리멸렬하게 보였다. 나머지 한 개의 앞니도 수인이 잡아당기자마자 쉽게 빠져 나왔다.

 

수인은 티슈 위에 나란히 앞니 두 개를 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치아들이 뽑히는지 일일이 당겨보았다. 입속이 너무 건조해 침이 잘 고이지 않았다. 수인은 가끔씩 입에 침을 모으느라 동작을 멈추곤 했다. 빠진 이는 놀랄 정도로 입속에 있을 때보다 커 보였다. 뿐만 아니라 그 탁한 색과 울퉁불퉁한 모양새가 너무도 추하고 터무니없었다. 수인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도무지 이런 물체를 입 속에 지니고 다닌다니 무슨 조화인지 알 수 없었다. 수인은 처음에는 빠진 앞니 두 개를 멀찌감치 응시하고만 있었다. 물론 앞니가 빠진 자리를 혀로 꽉 채운 채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안에서 밖으로 또는 밖에서 안으로 자신도 모르는 것들이 드나들 것만 같았다. 놀라운 마음이 한결 가시고 난 뒤에는 한 개의 앞니를 집어 코 가까이로 가져왔다. 그리고 위조지폐를 가려내려는 사람처럼 신중하게 훑어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얼굴이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없어지면서 앞니 쪽으로 얼굴이 쏟아지는 듯이 현기증이 났다. 어디 치아뿐일까. 수인은 자신의 몸을 훑어보면서 더듬는 시늉을 해보았다. 그 생소한 느낌은 수인을 괴롭히는 동시에 자유로운 기분에 사로잡히게 했다. 수인은 예상치 못한 쾌감에서 쉽사리 빠져 나오지 못했다. 윗니, 아랫니를 다문 채로 입술을 최대한 크게 벌려서 치아가 전부 드러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손거울을 높이 치켜들었다. 수인은 거울 속 자신의 과장된 입모양과 그 때문에 더욱 과장되어 있는 자신의 표정을 언제까지나 지켜보고만 있었다. 누군가는 그때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두드렸다. 수인은 단단한 손가락 마디가 현관문에 부딪히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아직 떼어내지 않은 문 밖 메모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벨을 누르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수인은 티슈를 여러 번 접어 앞니 두 개가 빠져 나오지 않도록 잘 여미고서 그것을 다시 한 번 호일로 감쌌다. 몇 번 더 짧고 명료해진 두드림과 함께 계시냐는 질문이 현관문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인기척이 없자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았다. 수인은 종이컵을 가져다 호일에 싸놓은 앞니를 담아두었다.

 

3층 복도는 사뭇 조용했다. 엘리베이터 바로 왼쪽으로 비상계단을 이용할 수 있는 문이 보였고, 3인용 대기 의자가 놓여 있었다. 복도 중간 즈음에 이르자 유리벽으로 되어 있는 치과의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수인은 치과 밖에서 잠시 두리번거렸다. 대기실에는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혼자 앉아 있었다. 여자 아이는 소파에 걸터앉아 팔로 몸을 지탱하려 하면서 다리를 쭉 폈다가 소파에 떨어지는 장난을 반복했다. 안내데스크는 비어 있었다. 유리벽 밖으로 여자 아이가 수인을 흘끔 쳐다보았다. 수인은 대기실로 들어갔다. 식수대 옆에 있는 컵 소독기에서 적외선 불빛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밖에서와는 달리, 의료기의 모터 소리가 간헐적으로 대기실을 활기차게 만들고 있었다. 수인은 여자 아이와 멀찌감치 떨어진 반대편 소파에 앉아 빈 안내데스크를 바라보았다. 조화를 심어 놓은 작은 화분들이 벽을 삥 둘러가며 선반 위를 장식했다. 우리 아이 충치 예방 어떻게 하고 계세요? 데스크에 세워놓은 알록달록한 안내 포스터가 치과 로고를 가렸다. 당신의 하얀 치아 밝은 미소를 위해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 충치 예방은 어떻게 하고 계세요? 포스터 귀퉁이에서 지나치게 인위적인 치열로 웃고 있는 백인 미녀가 자꾸 물었다. 수인은 어두컴컴한 곳에 앞니가 잘 싸여 있는지 가방 속을 들추어 확인했다. 가방 속에는 집을 나설 때 벨 위에서 떼어낸 노란 쪽지가 들어 있었다. 수인은 쪽지를 꺼내 '아기가 자고 있어요.'라는 문장을 다시 이어붙이기 힘들 정도로 두세 번 찢었다. 그리고 식수대 아래 있는 작은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여자 아이가 수인의 행동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소파 팔걸이에 기대어, 여운이 남은 채 흔들리고 있는 쓰레기통 뚜껑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수인은 여자 아이를 보고 계면쩍게 웃어 보였다. 곧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여자 아이는 고개를 기울여 수인의 입속을 확인하려는 시늉을 했다. 수인은 식수대에서 종이컵에 찬물을 받았다.

 

"몇 살이에요?"

 

여자 아이가 어눌한 발음으로 물었다. 그리고는 소파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엉덩이를 뒤로 빼며 수줍게 웃었다. 여자 아이의 앞니가 빠지고 없었다. 유치가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수인은 새치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고서 앉아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때 간호사가 치료실 문을 열고 바쁜 걸음으로 나오며 인사를 했다. 실내용 샌들 뒤의 조절 끈이 뒤꿈치 아래로 벗겨져 움직일 때마다 덜그럭거렸다. 간호사는 재재바른 동작으로 수인의 접수를 도왔다. 수인은 인적사항을 작성하기 위해 데스크에 기대어 몸을 기울였다. 한 여자가 복도 맞은편 통증클리닉에서 유모차를 밀고 나와 복도를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수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수인은 펜을 든 채로 잠시 허둥댔다. 생각지도 못한 물건이 수인의 차 트렁크 안에 여전히 있었던 것이다.

 

수인은 계단을 통해, 차를 세워둔 곳에서 가까이 있는 비상문을 열고 나왔다. 지하주차장에는 육중한 기계 모터가 갑자기 돌아가기 시작해서 수인을 각성시켰다. 키홀더에서 차 키를 골라내는 동안 지하를 흔드는 출차 경보음이 수인의 잇몸을 더욱 욱신거리게 만들었다. 수인은 운전석에 올랐다. 그리고 키홀더를 손에 쥔 채로 운전석에 잠시 앉아 있었다. 룸미러를 얼굴 쪽으로 돌렸다. 비뚤게 고정 된 귀걸이를 바로잡았고,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귀고리에 딸려 들어가 뽑히는 일이 없도록 귀 뒤로 잘 쓸어내렸다. 입안을 비춰보았다. 마치 오랫동안 없었던 것처럼 앞니 두 개를 다시 끼워 넣은 치열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워져 있었다. 치과 의사는 앞니를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해 비관적으로 말했다. 빠진 치아가 건조한 상태로, 시간이 너무 경과해버렸다는 것이다. 수인은 트렁크 스위치를 누르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지하에 '쾅'하고 울렸다. 수인은 안치실로 가는 그 길과 같이 차 뒤쪽으로 걸어갔다. 힘을 주어 트렁크 문을 들어 올리자 접힌 유모차가 옆으로 누워 있었다.

 

"그렇지, 이게 있었어."

 

혀의 어색한 움직임 때문에 수인의 되찾은 치열에서 우스꽝스러운 발음이 새어 나왔다. 유모차의 더러운 앞바퀴는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햇빛가리개 부분이 구겨져 한 쪽 고정 레버가 빠진 채 뒤틀려 있었다. 수인은 끔찍한 기분이 들어 잠시 멈칫했다. 접힌 유모차를 들어 올려 바닥에 내려놓고 양쪽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자 흉물스럽게 뻗어 있던 앞바퀴가 바닥 쪽으로 서서히 내려갔다. 다음은 사람의 허리부분에 해당하는 쇠의 연결부분에, 둥근 플라스틱 레버를 오른발로 강하게 밟아 눌렀다. 그러자 '탁' 소리와 함께 유모차가 네 발로 고정되어 균형을 잡았고 햇빛 가리개 부분이 팽팽하게 펼쳐졌다. 수인은 빠진 레버를 다시 끼워 햇빛 가리개의 모양을 바로잡았다. 유모차는 덩치가 큰데다 싣고 내리기가 부담스러워 트렁크에 그대로 둔 시간이 더 많았다. 게다가 처음 직면하게 됐을 때 펴고 접는 방식이 복잡해서,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오로지 수인의 몫이었던 것이다. 전 남편의 친구들은 으레 그 일을 도우려 나서곤 했었다. 그 때마다 수인은 순순히 그것을 맡겨두고 엉거주춤하게 허둥대는 뒷모습을 지켜보곤 했었다.

 

수인은 햇빛가리개의 고정 핀을 젖혀서 자신의 몸 쪽으로 당겼다. 그러자 빈 유모차의 넓고 푹신해 보이는 몸체가 드러났다. 지지대의 5단 안전벨트가 좌석에 느슨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타고 있으면 내리려 하고, 내렸다 하면 다시는 타지 않으려는 실랑이 속에서 안전벨트를 억지로 채우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던가. 사실 유모차를 트렁크에 처박아 둔 가장 큰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미친 여자처럼 윽박을 지르는 자신의 모습이 잊힐 리 없었다. 수인은 이제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것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안심이 됐다. 이제 다시는, 첩보원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누군가의 안위에 전전긍긍하며 돌아다니지 않아도 됐다. 운전 중에 카시트와 전방을 번갈아 보며 개그맨 같은 목소리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됐다. 일일이 꼽을 수도 없는 혜택이 수인 앞에 놓여 있었다. 정신없이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면 고질적인 무기력이 어느 정도 중화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무기력한 상태에 혼비백산이 된 상태가 가중되는 것, 그 뿐이었다. 일꾼이 후려쳐 깎았던 물건의 값어치만큼이나 이전의 삶이 우습게만 여겨졌다. 수인은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안전벨트를 차례로 끼워보았다. 이렇게나 쉽고 간단하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안전을 도모하는 장치가 또 있을까.

 

수인은 유모차 뒤에 쪼그리고 앉아 수납 칸에 들어 있던 몇 가지 휴대용품들을 모두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손 소독제, 기저귀 2개, 물티슈, 손수건, 장바구니, 유모차 커버 정도였다. 수인은 비상용으로 넣어 뒀던 비닐 팩에 그것들을 쓸어 넣었다. 한 손에 비닐 팩을 들고, 한적하다 못해 적막해진 지하주차장을 유모차를 밀며 가로질렀다. 수인은 대형 쓰레기통에 비닐 팩을 통째로 집어넣었다. 지렛대의 원리로 열리고 닫히는 쓰레기통 뚜껑이 거대하게 열렸다 닫혔다.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거추장스럽게 들렸다. 유모차는 말할 수 없이 가벼워져 버려서 수인의 감각보다 좀 더 빨리 굴러갔다. 때문에 어느새 수인은 손잡이를 잡고서 유모차를 따라가고 있었다. 어쩌다 지나가는 사람이 의미 없이 수인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러나 수인은 여장을 한 범죄자처럼 감정의 기복을 느끼며 좀 더 빨리 유모차를 따라갔다. 수인은 오로지 직진했다. 눈을 자주 깜박이지 않아 눈동자가 쓰라리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맹인들을 위한 오돌토돌한 지면 쪽에 바퀴가 닿자 유모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더 속도를 냈다. 수인은 거의 달리다시피 하여 겨우 유모차를 따라 가는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유모차가 낭떠러지와 같은 곳에 맞닥뜨려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은 행진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주차장 끝이 보였다. 주차장 끝에는 건물 지상으로 통하는 또 다른 자동문이 있었다. 자동문 옆으로는 빵을 실어 나르는 빈 플라스틱 박스들이 수인의 키보다 더 높이 쌓여 있었다. 수인은 조금 가빠진 숨을 고르며 유모차에서 손을 뗐다. 손이 금세 어색해져 버렸다. 자동문이 뭔가 감지하고서 혼자 열렸다 닫혔다. 자동문 안에서는 유치한 모자를 눌러쓴 빵 상점 직원이 상점 안에서 플라스틱 상자를 내놓기 시작했다. 직원은 수인을 잠시 인식하고는 심드렁하게 하던 일을 계속 했다. 직원이 내려놓은 플라스틱 박스에는 똑같은 종류의 빵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위에 또 그 위에, 같은 방식으로 빵이 담긴 박스는 몇 번이고 쌓여 올라갔다. 수인은 추운 사람처럼 옷깃을 만지작거리면서 자신의 차가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수인의 뒤에서 잠시 동안 열려 있던 자동문이 닫히고 지하주차장은 한결 더 괴괴해졌다. 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구두굽이 땅바닥을 후벼 파기라도 하는 듯이 그 소리가 수인의 귀를 파고들었다.

 

출구로 나가기 위해서는 차가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나오는 방식이 되어야만 했다. 수인은 핸들을 잡은 두 손에 힘을 주고 화살표를 따라 통로로 천천히 진입했다. 차창 밖으로 멀찌감치 빈 플라스틱 박스 더미가 보이고, 그 뒤로 어정쩡하게 세워진 유모차가 보였다. 차가 직진해 나아가는 곳에 이르자 유모차의 어두운 형체는 룸미러를 따라오며, 불안정하게 흔들리다가 시야를 벗어났다. 출차지점에 거의 다다랐을 때, 수인은 갑자기 시동을 꺼트렸다. 그러나 곧 시동을 다시 켜고 미세하게 후진을 한 뒤에,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수인은 좌회전 신호를 받기 위해 사거리 한복판에 멈춰 있었다. 길가에는 쓸어낸 눈이 여기저기 높이 쌓여 구정물로 변해가고 있었다. 수인은 수시로 룸미러를 들여다보았다. 날이 흐려 벌써부터 네온사인이 한 두 개씩 켜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지긋지긋하기는 매 한 가지인 곳이었다. 길 건너편 산책로는 텅텅 비어 있었지만, 도로 정비 때문에 길이 꽤나 막혔다. 겹겹이 이어지는 건물들 너머로 타워크레인이 높이 솟구쳐 있었다. 뿌연 하늘 아래, 수평으로 길게 떠 있는 타워크레인의 철골구조는 지독할 정도로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수인은 방향지시등을 켠 채로 울고 있었다. 쇠약해진 앞니로 혀를 살짝 물고 있었기 때문에 수인의 얼굴은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끝>

 

숲의 정적   - 김영옥

 

눈이 쌓인 숲 속은 안온했다. 편백나무와 소나무가 뼈다귀처럼 박혀 있을 뿐 보이는 전부가 눈이었다. 삼일 째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익숙하고 질이 난 것을 차츰차츰 생경하게 하며 땅을 덮고, 길을 덮고, 숲을 덮었다. 눈은 더럽고 지저분한 것도 다 덮었다. 마치 거대한 붓으로 흰색을 칠해버린 듯이 온 천지는 깨끗하고, 간결하고, 단조로웠다. 나무십자가 앞에 서 있던 기정은 걸음을 옮겨 묘지 옆으로 갔다. 흰 페인트칠을 한 나무십자가는 서너 살배기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것만 한 크기였다. 숲에서 누군가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쉬지 않고 내리는 눈은 숲속을 다시 넓혀놓았으나 눈 벽이라도 생긴 듯 아늑하고 소리 또한 들리지 않았다. 산짐승이 나타나 자신을 물어뜯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무섭게 고요한 이 공간에서 쉬어가야 기정은 숨을 쉴 수 있었다. 사흘 전부터 오고 싶었으나 몰드작업이 끝난 오늘에서야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묘지 옆에 쭈그리고 앉은 기정은 손을 펴 두툼한 눈으로 덮인 묘지를 쓰다듬었다. 나무십자가 아래의 왼편은 길쭉하고 네모진 검은 대리석 묘지였고, 오른편은 역시 평토장인 대리석 묘지 하나가 더 있어야 짝이 맞을 아직은 맨땅이었다. 잘 있었어? 차가운 눈과 매끄러운 대리석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새를 들고 오는 줄 알았는데 카메라네요, 라고 중년부인이 여객선 뱃머리 쪽으로 오는 그와 기정에게 말했다. 커다란 바위에는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고, 동박새나 황조롱이가 자기네 아파트에서 부리를 내밀고 있는 광경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뱃머리 쪽이 붐볐다. 편편한 바위에는 바다사자들이 햇볕을 쬐고 있었다. 기정은 카메라에 동박새와 황조롱이와 바다사자와 그를 가두었다. 풍랑이 거세다고 선실 안으로 들어오라는 방송이 이어졌다. 돌아서는 기정에게 한 여자가 카메라를 건넸다. 기정은 할 수 없이 그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며 카메라를 받았다. 침통한 그의 얼굴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여자와 해군 애인이 팔짱을 끼었다. 해군의 흰 모자와 세라복의 흰 선과 흰 바지가 눈을 부시게 했으나 뭔가 쫓기는 마음이어서 그냥 셔터를 눌렀다. 등 뒤에서 물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배 난간에 달라붙어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는 맹수의 아가리 같이 곤두선 물이 그를 삼켜버린 뒤였다. 기정은 사물이 온통 하얗게만 보여 눈을 마구 비비다 쓰러졌다.

잘 있어, 또 올게. 손이 닿아 드러난 대리석에 깨끗한 눈을 쓸어다 덮은 뒤 기정은 일어섰다. 묘지 왼편에서 소나무 줄기를 타던 청설모가 멈칫거리더니 까만 눈으로 기정을 바라보았다. 몸집보다 더 큰 붓털 같은 꼬리는 청설모를 모형처럼 보이게 했다. 때론 가짜라도 필요하잖아, 라는 게 모형을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안녕, 하고 기정은 손을 흔들었다. 손짓이 두려운 건지 부끄러운 건지 청설모는 쏜살같이 우듬지로 숨어버렸다. 소나무가 눈을 한 무더기 떨어뜨렸다. 기정은 숲을 내려왔다. 내려가는 길을 완전하게 모르지만 몸에 맡겨 놓으면 되었다. 일 년여 전, 처음 몇 번은 비탈길에서 발이 미끄러져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지만 곧 몸이 익숙해지면서 방향감각을 익혀나갔다. 발소리조차 눈에 묻혀버리고, 침 삼키는 소리조차 귀에 생생하게 닿는 숲속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신께 다가가는 세 가지는 세상과의 단절, 혼자만의 생활, 내면의 고독이라더니 숲속에, 눈 속에 계속 있으면 정말 신께 다가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구름을 뚫고 내려온 빛이 숲속을 투명하게 하고, 기정을 툭 건드렸다. 기정은 잠시 서 있었다. 무엇인가가 휙 허공을 차고 푸드득, 올라갔다. 기정은 놀라 움찔거렸다. 꿩이 나무와 나무 사이의 공간 속을 날아가고 있었다. 꿩이 앉았던 동그란 낙엽더미 위에는 어른 주먹만 한 돌멩이 두 개가 있었다. 손을 대보면 따뜻할 것 같았다. 꿩이 품고 있었던 것일까. 돌멩이를 새끼라고 여긴 걸까. 에잇, 그럴 리가 있나. 기정은 도리질을 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줄기가 두 개인 쌍소나무가 많이 보였다. 갈라진 두 줄기는 신기하게도 굵기가 똑같고 모양도 똑같았다. 기정의 머리 위로 꿩이 거푸 잽싸게 날아올랐다. 몸을 모로 세워서 바윗돌 사이를 빠져나오자 숲길이 좀 편편해졌다.

숲 아래로 뻗은 샛길이 끝나자 길이 넓어지면서 오른편에는 성당건물과 공무원연수원 건물이, 왼편에는 석유저장소가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석유를 실은 둥그런 수송차량들이 지나다녔다. 서둘러야 했다.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았다. 대로변으로 나와 택시를 탔다. 뒷자리에 앉자 점퍼 호주머니에 든 손수건을 꺼내 번들거리는 점퍼와 축축한 바짓가랑이를 대강 닦았다. 숲은 제작소와는 걸어서 이십분 거리에 있었다. 택시를 타면 칠 분 가량 걸렸다. 뭔 놈의 눈이 내리 사흘로 내리나 몰라, 오십 년만의 폭설이라더니 줄기차게도 퍼부어대는구먼. 운전사가 투덜대는 소리에 모자를 벗고 머리를 매만지던 기정은 차창 밖을 보았다. 높이 치솟아 있으나 격자 형태로 정리된 건물들 옆으로 잿빛 눈이 생뚱한 물건처럼 쌓여 있었다. 차가 엉킨 대로변에서는 노란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양손에 깃발을 들고 수신호를 보냈다. 자세히 보니 사람이 아니라 자동로봇이었다. 노란 제설차가 지나가며 염화칼슘을 뿌렸고, 한쪽에서는 인부들이 눈을 치우고 있었다. 눈은 땅을 덮고 더러운 것을 감추는데 인간은 그걸 다시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나갈 채비를 하고 있던 팀장이 기정의 등산화를 힐끗 내려다보며 점심시간이 너무 긴 것 아니냐며 타박했다. 기정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완이 학원에 좀 다녀올게.”

“완이가 무슨 사고라도 쳤나요?”

“방학 동안 토킹클래스 학원에 보내놨더니 시험시간에도 빨간색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런 모양이야. 그 꼴을 못 본 놈 하나가 크레이지 백이라면서 가방을 창밖으로 집어던져 버렸나봐. 완이가 그놈을 물어뜯고, 패고, 묵사발로 만들어버렸다고 하는데.”

팀장은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서 가보세요.”

팀장이 나가고 나자 기정은 흰 가운으로 갈아입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실물크기의 사람모형이나 인형이 기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매번 그랬다. 필요 없는 살이나 구질구질한 것은 싹 제거하고, 하고 싶고, 보고 싶은 대로 만드는데도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낯설고 섬뜩해서 몇 분간은 진저리쳤다.

“늦었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얼굴과 손 두 짝이 없는 성인남자의 몸뚱이에 붓으로 색을 칠하고 있던 미스 오가 물었다. 알몸의 성인남자는 아직 완전하게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한 눈에도 부드럽고 살아 있는 듯 생생했다. 한쪽 작업대 위에는 오전에 기정이 떠 놓은 성인남자의 얼굴과 손 두 짝의 밀랍몰드가 굳어가고 있었다. 팀장은 자료사진을 보며 뼈대 위에 점토를 붙이고, 얼굴과 손을 모델링했다. 거의 실제모델과 닮아 있는 얼굴원형은 팀장의 정교하고 세밀한 손끝에서 나왔다. 기정은 모델링이 끝난 얼굴과 손을 밀랍몰드로 떴다. 몰드만 떠놓으면 반은 완성된 거라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벌꿀 집 성분인 밀랍은 강화플라스틱이나 실리콘보다 상온에서 쉽게 잘라지고 형태를 만들기가 쉽고 어떤 착색제와도 잘 섞였다. 우리나라의 배우들이 초상권 침해라며 치우게 할 정도로 밀랍인형은 사람에 가까웠다.

“어디 아무도 모를 곳에 애인이라도 숨겨놓은 거 아냐?”

미스 오는 노랗게 염색한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솟아 있어 머리를 까딱일 때마다 국화 덤불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무스를 뿌려 세운 것일 테지만 감지 않아 떡덩이가 진 것 같았다. 사십이 가까운데도 노랗게 염색한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실밥이 터진 짧은 청반바지에 레깅스를 입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기정은 사흘 전쯤에 그려놓은 지오의 정면도안과 측면도안을 들여다보며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내일 아침이 되어서야 밀랍을 벗겨내고 원형뽑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지오를 만들어볼 셈이다. 지오는 키가 170센티이고, 스물다섯 살의 남자이다. 주문 제작이 아니라 기정의 작품이었다. 일거리가 없을 때 틈틈이 만든 모형이나 인형이 다섯 점이었다. 이번에 만들 지오와 두어 점 더 만들어 내년쯤에 전시회를 열어볼 계획이었다. 팀장의 이름을 딴 ‘성재범 제작소’는 밀랍인형과 인물모형과 더미와 인형을 만드는 곳이었다. 팀장의 이름 때문에 끊이지 않고 주문이 들어오는 편이기는 해도 주문은 극히 제한적이라 팀장과 기정은 자신의 작품을 해나가면서 제작소를 꾸려나갔다. 팀장이 만든 진흙모델 중에서 자동차는 꽤 알려졌다. 이번에는 꼭 여체같이 생긴 커다란 신발과 기마문화에 감명 받아 말대가리를 만들었는데 사실은 둘 다 자동차였다. 발표를 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기정은 한스 벨머의 인형을 좋아했다. 한쪽 다리가 없는데다 무서운 가면을 쓰고 뒤를 돌아보며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는 인형은 기정을 들쑤셔놓았다. 인형은 주관적인 현실에 가까웠지만 팔이 붙어야 할 곳에 다리 두 짝이 붙어 있거나 몸통에 젖가슴만 붙어 있는 한스 벨머의 작품은 창작의 쾌감과 창작 욕구를 느끼게 했다. 일본의 요츠야 시몬이 한스 벨머의 인형을 발전시켜 구체관절인형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기정은 퇴근 후에 따로 구체관절인형 만드는 법을 배웠다.

기정은 완성된 정면도안과 측면도안에 머리, 몸통, 팔, 다리 부분으로 나누어 표시를 했다. 도안에 미농지를 대고 5mm 안쪽에 빨간 선을 그렸다. 미농지에 그린 부위별 도안을 가위로 잘랐다. 아이소핑크 덩어리 위에 자른 도안을 부위별로 얹고 그대로 따라 그려주었다. 톱으로 모양을 따라 잘랐다. 조각칼로 파내어 형체를 잡아냈다. 머리는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구 모양으로 깎았다. 정면도의 머리, 몸통, 우측 팔, 우측 다리 4개와 측면도 4개의 심재를 만들었다. 분홍색 몸통이나 팔 다리는 정육점에 걸린 뿔그스름한 고깃덩어리 같았다. 사람의 몸도 결국은 고깃덩어리라고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영혼이나 정신을 뺐을 때이다. 기정은 가끔 자신과 꼭 같은 밀랍인형을 만들어 무게를 재어보고 싶었다. 53Kg에서 밀랍인형의 무게를 뺀 나머지를 영혼이나 정신의 무게라고 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심재에 테이프를 친친 바르고 나자 뻣뻣한 양 어깨를 주물렀다. 이제 자연스럽게, 탄탄하게 건조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알루미늄 와이어를 잘라 뭔가를 살짝 움켜쥔 듯한 손과 걷고 있는 듯한 발 심재를 만들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팀장은 바로 퇴근하겠다며 기정에게도 집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냐고 묻자 큰일은 없었다고만 했다. 미스 오는 매운탕 거리를 사가지고 애인 작업실에 가야한다며 서둘러 퇴근을 했다.

33번 버스는 삼십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버스정류소는 눈 때문에 연착인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기정은 한 정거장 더 걷기로 했다. 눈은 그쳤다. 눈 위로 상점가의 노랗고 빨간 불빛이 번들거려도 여전히 눈은 하얄 뿐이었다. 추위가 언제쯤 끝나고, 눈이 언제쯤 멈출지 몰랐다. 가구 가게가 밀집해 있는 내리막길을 지나니 다리였다. 사흘째 폭설이 내리고 있고, 칼바람이 불어도 강은 얼지 않았다. 좀체 도심의 강은 얼지 않았다. 기정은 언 강이 보고 싶었다. 얼음을 부수는 쇄빙선도 보고 싶었다. 강에는 화물선 한 척도 지나가지 않았다. 강은 정지된 듯 보였다. 갈수록 부츠가 눈 더미에 푹푹 빠졌다. 한순간 몸이 휘청거려 다리난간을 붙들었다. 부츠 앞코가 물고 있는 눈을 난간에 탁탁 털어도 발톱으로 난간을 움켜쥐고 있는 갈매기 두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정이가 발톱을 뽑으려고 들어도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날씨가 조금씩 풀려가고 있을 때 간혹 V자를 끌고 수면 위를 종종거리던 오리들도 보이지 않았다. 기정은 머플러를 끌어당겨 입을 막고는 발길을 돌렸다. 당장 오늘 저녁에 먹을 찬거리도 없었지만 슈퍼 앞을 그냥 지나쳤다.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진 자동차들도 전부 눈을 싣고 있었다. 눈으로 만든 모형자동차 전시 중인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자동차가 아니라 신발이나 비행기나 배일 수도 있겠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데 1503호의 아주머니가 탔다. 눈을 맞았는지 머리카락과 그레이 밍크코트가 엘리베이터 불빛에 간간이 반짝거렸다. 아주머니는 기정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거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각을 맞춘 거울 모서리에 아주머니는 스무 개쯤으로 불어나 있었다. 밍크코트 때문인지 등을 웅크린 고독한 늑대들 같았다.

“요즈음 잘 안 보이시는 거 같아요.”

기정 쪽을 돌아보는 아주머니의 시선이 아직도 거울 한곳에 있는 듯 낯설고 멀어보였다. 키가 작고, 몸집도 작아 소녀 같은 아주머니는 가까이서 보니 얼굴에 주름이 꽤 많았다. 나이는 육십 중반쯤으로 보였다. 몽롱하고 폐쇄적이고 쿠마리처럼 초경도 하지 않은 채 늙어버린 여자 같았다.

“나야 항상 집에 있지. 아, 얼마 전에는 북해도에 다녀왔어.”

“거기도 눈이 많이 오죠?”

“천지가 눈뿐이지. 차 마시러 와.”

“네, 그럴게요.”

집에 들어온 기정은 서둘러 보일러를 틀었다. 거실에 훈기가 들 때까지는 좀 더 기다려야 했다. 커피를 타 소파에 앉았다. 벽에 눈길이 닿았다. 벽지는 은은한 녹색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면 보석무늬가 일정하게 박혀 있었다. 불빛을 받으면 비단벌레처럼도 보였다. 어머니의 수의에 비단벌레를 달아주고 싶었다. 구할 수만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집으로 이사 오면서 직접 벽지를 골랐고, 갖고 싶었던 돌침대나 자개농을 들여놓았으나 삼 년도 살지 못하고 관광차 전복 사고로 작년 겨울에 세상을 떴다. 그때도 눈이 많이 내렸다. 31평이나 되는 집이 벅차 원룸으로 옮겨간다간다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며 그대로 살았다. 한쪽 벽면은 장미꽃이 사선으로 배열된 벽지였다. 위쪽에서 내려다보면 직선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기정은 사선보다 직선 쪽을 보았다. 장미꽃이 훨씬 많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여서. 텔레비전 위의 벽에는 칠층이나 되는 건물을 하나의 나선형으로 쌓아올린 구겐하임미술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미술관 앞에 서 있는 기정의 왼쪽과 그의 찢어진 청바지가 빛을 튕기며 번득였다.

모마미술관에서 100호가 넘는 대형 화판에 먹으로 찍은 점 세 개밖에 없는 그림을 삼십분 이상이나 지켜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가 발걸음을 옮겼을 때 기정은 한국인이냐고 묻고, 왜 그 그림 앞에 삼십분이나 서 있었냐고 물었다. 그는 그저 그림을 바라만 보았을 뿐이고, 삼십분이나 서 있은 줄은 몰랐다고 했으며, 점 세 개가 수없이 다르게 보였다고 했다. 구겐하임미술관 건물은 소라고둥으로도, 엎어놓은 컵케이크로도, 먼지기둥으로도 보였다. 그 건물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무릎이 터진 청바지가 낯설지 않아 기정은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까 모마에서 마주친 그 남자였다. 구겐하임미술관의 나선형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서 기정은 몇 번 남자와 엇갈리기도 하고 마주치기도 했다. 꼭 둘이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 칠층까지 오른 뒤 난간에 서서 올라왔던 길을 내려다보았다. 길은 나선형으로 꼬여 있었다. 남자도 반대편에서 기정과 똑같은 자세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정은 그와 함께 돌아왔다.

인터폰이 울렸다. 막 일어서서 샤워를 하려던 기정은 인터폰을 받았다.

 

“놀러와, 내가 줄 것도 있고.”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대화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서만 나는 약간의 떨림이 있었다. 거절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샤워를 하고 가려던 마음을 고쳐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맨 꼭대기 층인 1503호는 기정의 집과 똑 같은 31평에 구조도 똑 같았지만 훨씬 넓어보였다. 벽지나 소파나 커튼이 흰색이었고, 별다른 장식장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린 건 거실을 여러 번 둘러보고 나서였다. 가까이 가서 보아도 흰 커튼에는 무늬조차 없었다. 흰색이 깨끗하기보다는 텅 비어 무섭기까지 하다는 걸 느낀 건 처음이었다. 넓은 것이 무섭다는 것도. 흰 것이 무서워 아무 것이나 그려대고 걸레자국이라도 남기는 것일까. 베란다 밖으로 강이 내려다보이는 것은 똑 같았다.

베란다 창 앞에서 기정은 아주머니와 함께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가가 눈으로 덮여 있어 더욱더 강은 넓어보였다. 강 건너편의 공원을 덮고 있는 눈도 도톰했다. 미끄럼 타는 사람들 함성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을 경사진 공터는 어둑어둑해져 가는 풍경 속에서 더욱 희고 넓게 보였다.

“북해도에 가보았어?”

기정은 고개를 저었다.

“거긴 정말 눈이 많이 오지. 지금 오는 눈보다 세 배쯤 많이 오고, 두께도 세 배쯤 두텁다고 생각하면 돼.”

아주머니는 흐린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향해 손을 뻗는 시늉을 했다. 기정도 따라했다.

“북해도의 눈 속에서 나는 세상과 단절했고, 또 세상과 화해했어.”

아주머니의 지적인 말투에 기정은 속으로 놀랐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남편이 죽었어.”

기정은 수키와에 붙어 자라는 콩란과 암키와에 붙어 자라는 풍란을 내려다보았다. 베란다에는 그것 외에는 없었다.

“공군 장교였는데 경비행기 시범비행 도중에 골짜기로 바로 추락사했어. 믿을 수가 없었어. 한 일 년은 어떻게 지냈는지 몰라. 그러다가 북해도에 갔어. 북해도로 들어갈수록 점점 세상과는 상관없는 곳으로 가는 것 같았어.”

눈이 베란다 창 주위를 맴돌거나 안으로 들어오려고 베란다 창을 툭툭 때렸다.

“눈이 퍼붓는데, 보이는 것은 전부 눈뿐이었는데 전혀 현실 같지가 않았어. 이대로 눈에 갇혀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다가 다음날에 도야호수로 가던 길에 정말 눈뿐인 세상을 보았어. 계곡이 전부 눈뿐이었어. 모든 게 눈으로만 이루어진 듯했어. 그 계곡에 내렸지. 눈 속에 오랫동안 서 있었어. 눈이 점점 나를 덮어가더라고. 그때 난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눈 속에 묻어버렸어. 눈으로 덮어버렸지. 모든 것을 덮어버렸어. 남편과 결혼한 사실조차도. 처음 만나 연애하면서 테이트 하고, 그 좋은 시절만 쏙 빼놓고 다른 건 다 눈 속에 묻어버렸어. 그렇게 되니까 남편은, 도로 애인이 되었어.”

기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애인과 함께 북해도에서 돌아왔어. 그리고는 함께 살았어. 그런데 그런 애인은 오 년 이상 사귀기가 힘들지. 또 고비가 찾아왔어. 그래서 아들을 입양했어. 입양하기 전에 북해도로 갔어. 그 계곡의 눈 속에서 내가 아들을 낳았지.”

기정은 무심코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아주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두 얼굴은 포개질 듯 말 듯 했다.

“아들이 내게는 애인이었어. 피아노학원에도 같이 가고, 태권도장에도 같이 가고, 어디든 같이 갔지. 아들이 아니라 인형놀이를 하는 거 같았어. 그러지 말자고 다짐해도 그때뿐이었어. 걔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니까 내 하루 일과가 마트에 가서 먹을거리를 잔뜩 사 배달을 시키고, 걔가 올 때를 맞추어 음식을 만드는 게 전부였어. 걔가 성인이 되었을 때도 내 곁에 붙잡아두었어. 귀가시간도 일곱 시로 정해놓고. 밤에는 걔를 불러 내가 잠이 들 때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어. 정말 세헤라자데였지. 그런데 그런 아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어. 언제나 다른 사람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굴었지. 그러더니 내가 그렇게 말려도 기어코 미국지사로 나가버렸어. 일 년에 한두 번쯤 연락이 오더니 몇 년 전부터는 아예 연락도 없어. 나도 하지 않았고. 그게 속 편하니까. 그런데 연락이 왔는데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고 하더라고. 별다른 말은 없고, 미국여자라는 말과 사냥을 배우고 있다고만 했어. 내가 왜 사냥을 배우냐고 물었더니, 뉴저지에 통나무집을 마련했는데 숲속이라 밤에 멧돼지나 곰이 습격해올지도 몰라 그렇다고 했어.”

아주머니의 긴 속눈썹이 약간 떨렸으나 얼굴은 이미 아들을 버려버린 듯 냉담했다.

“오늘이 아들 결혼식이야. 결혼식에는 꼭 참석해달라고 했는데, 내가 안 갔어.”

“…어디 다녀오셨어요?”

“갈 데가 없어서 하루 왼 종일 여기저기 쏘다니다 왔어.”

기정은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주 상가에서 빵을 사오는데 분수대 앞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커피숍에 가서 차나 한 잔 하자고 했으나 일이 밀려서 집에 가야 된다고 했다. 그때도 아주머니에게는 혼자 감당하기 힘든 나쁜 일이 있었을 것이다. 기정은 미안했다.

“사실 그 애가 미국지사로 나갔을 때 또 북해도로 갔었어. 흰 눈밭 속에 서서 아들을 입양했던 일을 다 묻어버렸어. 아들을 입양한 적이 없다고. 입양한 사실을, 함께 살았던 사실을 눈으로 다 지워버리고, 다 덮어버렸지. 그러니까 편해졌어. 지금은 아주 편해.”

아주머니는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난 저 강만은 무서워.”

아주머니는 매일 베란다 창에 서서 강만 내려다보았다. 창 안에서 바라보는 강은 움직이지 않고 푸르기만 했고, 끝없이 넓기만 했다. 베란다 안에, 강 속에 갇힌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는 사교적이지 못해서 친구도, 이웃도 없었다. 활달하고 사교적이고 집에 잘 붙어 있지 못하던 기정의 어머니조차 모르는 것으로 봐서 지독하게 폐쇄적이었다. 아주머니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이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무서웠다. 아주머니에게는 몇 십 년이 그냥 달력 한 장이었다.

“아, 내가 차도 주지 않았네.”

아주머니는 주방으로 갔다. 기정도 거실로 따라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소파는 때가 타지 않아 새것처럼 보였다. 아주머니는 튤립이 그려진 겐조 찻잔에 말차와 알록달록한 색깔의 화과자를 내왔다. 해마다 겨울이면 북해도에 갔다 오는 모양이었다. 북해도의 눈을 보러가야 하는 이유가 어떻게 일 년에 한 번 뿐일까 싶었다. 아마 수십 번도 더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말차를 먹어 입술에 녹색거품이 살짝 묻은 아주머니는 잠깐, 이라고 하며 일어서 안방으로 가더니 무엇인가를 들고 나왔다. 수줍은 표정으로 선물이라며 기정에게 건넸다. 기정은 예의를 차리고 싶어 풀어보아도 되냐고 물었다. 아주머니가 그러라고 했다. 나무상자 속에 든 것은 오르골이었다.

“오타루의 오르골 공방에서 샀는데, 아가씨에게 주고 싶어졌어.”

기정은 채로 오르골을 탁 때렸다. 풍성한 치마를 입은 여자가 뱅글뱅글 돌자 여자 속에 남자가 숨어 있는 것처럼 여자남자 혼성 이중창이 흘러나왔다. 고맙다는 말에 아주머니가 말했다.

 

“내가 이담에 무얼 부탁하면 들어줘.”

아주머니의 얼굴이 검고 탁하게 번들거렸다. 기정은 어둡고 무섭고 축축하고 차가운 동굴 속을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사람모형의 텅 빈 속이나 박제되어가는 동물의 텅 빈 속을 보고 만 기분이었다. 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나 손을 덥석 물고 늘어져 함께 봉합해 버릴 것 같은.

“겁나는데요.”

 

택시에서 내린 기정은 성당건물과 공무원연수원 건물 앞과 석유저장소 앞을 지나 샛길로 접어들었다. 샛길 양편에 있는 버드나무, 플라타너스 우듬지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세 번째 버드나무에는 새집이 비쭉 드러나 있었다. 흰색으로 새로 도색을 한 듯한 새집에는 새가 보이지 않았다. 어미 새는 먹이 찾으러 갔을 것이다. 샛길 끝으로 보이는 숲도 너무 하얘서 멀고 신비로워보였다. 샛길이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는 입구 같았다. 구레나룻을 기른 외국남자와 파카를 입은 청년이 샛길을 걸어 내려왔다. 깔끔한 스포츠형 머리 때문인지 파르스름한 뒤통수 때문인지 외국남자는 사제복이나 군복이 어울릴 것 같았다. 동시통역인 청년의 말소리는 영어방송을 틀어놓은 것처럼 깊고 넓게 울렸다. 예닐곱 살쯤 된 사내아이가 플라타너스 꼭대기를 향해 탕탕, 총을 발사하며 지나갔다. 외국남자가 구레나룻을 씰룩이며 끌끌 웃었다. 기정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요즈음 장난감 총은 정말 진짜 같아 맞으면 얼굴에 피멍이 들고, 눈이 실명까지 갈 수 있으니 어린아이가 총을 들고 아파트 밖으로 나오면 무조건 압수하겠다는 공고가 엘리베이터 벽에도 붙어 있었다. 사내아이는 어깨에 총을 얹고 숲 쪽으로 갔다. 사내아이도 눈 오는 날 토끼나 꿩을 사냥하고 싶은 기운이 발동한 걸까. 기정은 숲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도 확실히 모르지만 자신의 방향감각만 믿고 몸에 맡겨 놓으면 되었다. 공기는 축축하고, 상쾌했다. 눈 내리는 숲속은 한 가지 색뿐이라서 더 넓어보였다. 그래도 넓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혼자 서 있는 고독감 같은 걸 느낄 필요도 없었다. 눈 밑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깨끗하고 아름다운 눈만 보면 되었다. 잠깐 멈추어 서서 숨을 골랐다. 손을 뻗어 숲 앞면 역할을 하던 커다란 바위를 대리석 묘지를 쓰다듬듯 쓰다듬었다. 차갑지만 튼실하고 믿음직스러운 기운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숲으로 들어갈수록 세상과는 동 떨어진 곳으로 가는 것 같았다. 북해도로 들어갈수록 점점 세상과는 상관없는 곳으로 가는 것 같았다는 아주머니의 말이 이해되었다. 등 뒤에서 흩날리는 눈이 자신을 뒤에서부터 지워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좋을 것 같았다. 숲으로 깊이 들어가자 풍경은 더욱더 신비로워졌고, 성스러운 감정이 차올랐다. 아무도 모르는 공간이 비밀스러운 것이나 모르는 게 더 나은 것이나 침묵이 더 나은 것을 알게 하거나 엿보게 할 것 같았다. 신께 한 발짝 더 다가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산짐승이 나타나 자신을 물어뜯고 피투성이로 만들어놓아도 좋을 것 같았다. 가까이서 늑대가 눈 오는 하늘을 향해 주둥이를 쳐들고 울부짖어도 전혀 놀랄 것 같지 않았다. 소나무의 흑갈색 껍질은 눈 속에서 더욱더 투박해보였다. 기정은 손바닥으로 껍질을 쓸면서 소나무들을 지켜보았다. 소나무 사이로 여우가 폴짝폴짝 뛰어올 것 같았다. 곧 기정은 여우는 어미라서 먹이를 구하러 좀 멀리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올라갈수록 눈이 내리고 있는 하늘과 눈을 받아내고 있는 땅이 하나로 엉켜들었다. 이대로 저 속으로 실종되어버리고 싶었다. 안개가 수평선을 뭉개버리는 호수에서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싶은 것처럼. 그래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흰 페인트칠을 한 나무십자가는 더욱 희게 보였다. 눈이 살짝 부셨다. 기정은 나무십자가 앞에서 눈을 맞았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걱정도 불안도 없이 빈항아리처럼 깨끗한 마음이 되었다. 그러나 뚜껑이 없이 풀숲에 버려진 빈항아리에는 잡풀이든 쓰레기든 담겼다. 자신의 마음은 언제나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는 빈항아리인 것이 못마땅해 기정은 눈을 떴다. 묘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손을 뻗어 눈 무더기를 쓸고, 검은 대리석을 쓰다듬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잘 있었어? 검은 대리석에 기정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자기 눈이 꼭 타인의 눈처럼 기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기정은 고개를 돌렸다. 아까는 몰랐는데 묘지 옆과 뒤에 기정의 발자국이 아닌 크고 투박한 발자국이 여러 군데 찍혀 있었다. 멧토끼 발자국은 아니었다. 멧돼지 발자국은 더더욱 아니었다. 누가 다녀간 것만 같았다. 누가 왔다 간 걸까. 눈썹이 꿈틀, 하던 기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개가 커다란 검은 새 한 마리가 높게 떠서 뱅뱅 정지비행 중이었다. 오랫동안 올려다보니까 축소된, 쪼그라든 패러글라이더처럼 보였다. 산 하나를 넘을 때마다 이대로 끝까지 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봐 무서워. 패러글라이딩을 하던 그는 그때부터 기정을 떠날 준비를 했는지도 몰랐다.

염색한 것이 아니라 진짜 여우 목도리를 두르고 약속장소에 나온 그의 어머니는 아홉 살이나 많은 여자와 절대로 결혼시킬 수 없다고 했다. 막 사회에 첫발을 디딘 그에게는 결혼이 이른 편이었으나 기정에게는 또래에 비해 늦은 편이었다. 우리 애를 잘 봐줘서 고마워요. 우리 애도 누나가 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어요. 초년생이라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잘 좀 가르쳐주세요. 기정은 유리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면서 생각했다. 내가 닥종이인형 작가처럼 독일에 가서 살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아홉 살이나 차이지는 사람과 사는 것은 힘들 거야. 유리컵에 불안하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것을 기정은 외면했다. 그를 피해 기정은 도시외곽에 살던 어머니 집으로 거처를 옮겨버렸다. 밤이 되면 섬세하고 따뜻한 그가 생각났다. 섹스 때도 그만큼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을 가진 남자를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친구들과 새로 생긴 해저터널을 보러가고 없었고, 기정은 감기몸살을 앓았다. 천장의 당초무늬를 눈으로 따라 그렸다. 그가 보고 싶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의 축축한 몸을 껴안아야 살 것 같았다. 견딜 수가 없어 집 밖으로 나온 기정은 대추나무 밑에서 자신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를 보았다. 밤에 안은 그의 몸은 바다사자 등보다 더 축축하게 미끈거렸다. 다시 결혼 승낙을 받으려고 갔지만 그의 어머니는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닫힌 문 앞에서 기정은 저 문을 열지 못할 거라는 걸 예감했다. 그는 그냥 함께 살자고 했다. 기정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술만 취하면, 비만 내리면 전화를 걸어 어디 숨지만 말아달라고 했다. 패러글라이딩을 하던 그가 땅으로 처박혀 왼쪽 어깨를 크게 다쳐 수술을 받게 되자 그의 어머니가 기정을 찾아왔다.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굴 구원하겠다는 거야? 기정은 구원이라는 단어를 그가 썼을까 생각해보았다. 왜 구원이라는 말을 썼을까. 정말 내가 반대하는 게 단순히 나이뿐이라고 생각하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돌쩌귀가 어긋나 닫히지 않던 문이 딱 닫히는 기분이었다. 닫힌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을 만큼 기정은 순수하지도, 어리지도 않았다.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눈이 흩어지는 소리에 기정은 퍼뜩 옆을 돌아보았다. 편백나무 가지를 타고 오르던 청설모가 동작을 딱 멈춘 채 기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안녕, 하고 기정은 손을 흔들었다. 까만 눈동자로 기정을 빤히 바라보던 청설모는 순식간에 우듬지로 올라가 눈을 후드득 떨어뜨렸다. 네 집은 어디니? 설마 집도 없이 먹이만 구하러 다니는 것은 아니지? 기정은 다시 손을 뻗어 검은 대리석 묘지를 쓰다듬었다. 차가운 감촉에 잠깐 선득 놀라 몸을 떨었다. 거칠게 찍혀 있는 발자국이 또다시 눈을 파고들었다. 기정은 일어섰다. 쌀가루를 백 자루도 넘게 들이부은 것처럼 두툼하게 쌓여 있는 눈을 모종삽처럼 두 손으로 퍼 발자국 위에 덮었다. 두 군데의 발자국을 덮고 나자 손이 몹시 시렸다. 그래도 눈을 퍼 계속 발자국을 덮었다. 그 위로도 눈이 내렸다.

사무실로 들어가자 커피를 마시던 팀장이 미간에 쇠갈고리 두 개를 짙게 만들며 물었다. “이기정 씨, 점심시간이 너무 긴 거 알아? 정말 어딜 갔다 오는 거야?”

의혹보다는 불안에 가까운 표정을 팀장은 감추지 못했다. 사무실에까지 시너냄새가 났다. 공기청정기가 돌아가고 있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숲에서 묻혀온 공기 때문에 시너냄새가 강하게 와 닿는 모양이었다.

“그냥 산책 좀 하고 왔어요.”

“숨겨놓은 애인 만나러 간 것은 아니고?”

마지막 한 방울의 커피를 쭉 들이켠 미스 오가 입을 다시며 말했다. 팀장의 눈을 외면하며 기정은 가운으로 갈아입고 제작실로 들어갔다. 갓 태어난 밀랍인형이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로 기정을 반겼다. 은은한 살빛으로 채색한 얼굴에 인조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심어주고, 인조안구를 박아 넣고, 인조손톱을 박아 넣고, 인조눈썹을 심어주고, 밀랍으로 뜬 치아까지 박아 넣었더니 거의 대기업 창업주인 박경준이었다. 회사 창립기념 때 기념관 안에 전시할 거라고 했다. 기정은 박경준 가까이 다가갔다. 주름과 땀구멍과 수염자국까지 있는 얼굴은 너무 실제 같아 섬뜩하고 오싹했다. 모형이나 인형한테서 원하는 게 사실은 이 섬뜩하고 오싹한 분위기였다. 미스 오가 들어와 몸뚱이뿐인 박경준에게 검은색 양복을 입혔다. 미스 오가 박경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꼭 살로메나 내 손에 잘려나간 세례 요한 머리통 같지 않니?”

이십 대에 연극무대에 섰다는 미스 오다운 말이었다.

“그래 넌 남자 목도 자를 수 있을 거야.”

미스 오가 몸을 흔들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기정은 박경준의 두 손을 가져 와 바닥에 고정시켰다. 손 역시 얼굴 표정만큼 정밀하고 정교하게 나타내 전시효과를 높여야했다. 얼굴보다 손이 더 어려울 수도 있었다. 얼굴보다는 손에서 밀랍인형이라는 것이 탄로 날 확률이 높았다. 밀랍인형이나 인물모형은 실제 사람과 닮을수록 호감도가 높아졌다. 실제에 가깝게, 가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거의 비슷하게는 만들어도 똑 같이는 만들 수 없었다. 이 한계 때문에 사람들의 호감도는 차츰차츰 떨어져 바닥까지 가기 마련이었다. 인형에 열광하다가도 금세 싫증을 내고 버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노랑, 빨강, 주황, 상아색, 갈색 물감을 섞어 농도를 맞추었다. 파렛트에 분홍빛이 은은하게 도는 살색을 떠냈다. 붓으로 오른손에 여러 겹의 색을 칠해 살빛을 냈다. 푸른 힘줄과 주름을 강조했다. 사람 손처럼 보이려는 트릭이었다. 왼손까지 채색하고 나자 기정은 주저 없이 붓을 통에 집어던졌다. 양손을 번갈아가며 뻣뻣한 목덜미와 어깨를 주물렀다. 이제 미스 오가 입혀놓은 양복에 얼굴과 손을 조립하면 박경준은 완성된다. 지오에게 살을 붙여줄까 망설였다. 밀랍인형에 매달리느라 심재만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점토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있는데 팀장이 퇴근을 하자고 했다. 남아서 계속 작업을 하고 싶었으나 팀장의 어디 가서 한 잔 하고 싶어 하는 얼굴을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다. 제작소 건물 앞에서 미스 오와 헤어지고 나니까 길에서 빵빵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팀장의 검은색 무쏘가 서 있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푸르죽죽한 강이나 홍게 다리를 연상시키는 아치형 교각이나 공룡처럼 버티고 있는 아파트 단지가 기정을 견딜 수 없게 했다. 지금까지도 간간이 떨어지는 눈도 지겨웠다. 갑자기 새둥지처럼 헝클어져 있는 팀장의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호버백 밑에다 감추었다. 어디선가 닭이 울었다. 요사이는 닭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닭이 거푸 울었다. 기정은 주위를 살폈다. 짚으로 만든 둥지 속에 똬리를 튼 검은 닭이 흰 닭과 노랑 병아리를 등에 업고 있는 장식품이 운전대 앞쪽에 놓여 있었다. 팀장이 멋쩍어하며 남원 광한루에서 오천 원 주고 산 것이라고 했다. 기정은 손을 뻗어 둥지 밑에 있는 까만 스위치를 올렸다. 닭이 목청껏 꼬끼오, 울었다.

술집 입구의 왼쪽 벽면에는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사진이 붙어 있었다. 워홀의 사진전 안내 포스터였다. 워홀은 주황색 틀에 갇힌 스무 명의 마릴린 먼로를 만들어냈다. 초록 카펫이 깔린 술집 안은 초록인공초가 무성한 수족관 같았다. 구석 쪽의 테이블에는 중년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Without You가 흘렀다. 칵테일로 입술을 축인 뒤 기정은 물었다.

“완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 “다시는 빨간색 가방을 들고 가지도 않고, 그것 때문에 친구랑 싸우지도 않겠다고 다짐을 받으려고 하루저녁 내내 닦달을 해도 안돼, 정말 막무가내야. 때릴 수도 없고.”

“이제 5학년인데 너무 집착이 강한 거 같아요.”

“그 녀석은 빨간색 가방만 들고 다니면 엄마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어. 아무리 말리고, 때려도 소용없어.”

“완이 엄마에게는 소식이 없나요.”

“완이는 모르고 있지만 스포츠용품점을 차려준 남자랑 함께 사나봐.”

“완이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그래요.”

“사실대로 말해도 믿지 않을 거야.”

완이 엄마는 집에 있기 갑갑하다며 보험회사에 다녔다. 비교적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 완이를 돌보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고 했으나 완이는 식탁 위에 올려놓은 돈으로 피자나 통닭이나 콜라만 시켜 먹어 어린이 비만에 걸렸다. 점점 입술이 새빨개지고, 점점 치마길이가 짧아져가던 완이 엄마는 영업수준을 높여야만 실적도 높일 수 있다며 밤늦게까지 골프를 배우러 다녔다. 이번 달에는 1등으로 실적으로 올렸다며 옷과 핸드백과 구두를 잔뜩 사들고 온 보름 후쯤 흰색 에쿠스를 탄 남자를 따라가 버렸다. 팀장이 술을 퍼마시고 새벽에 들어와 보니 완이는 빨간색 가방을 꼭 끌어안고서 벽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완이 엄마가 들고 다니던, 책보다 조금 큰 반달모양의 가죽 숄더백이었다. 완이는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빨간색 가방을 옆에 두었다. 학교에 갈 때도 빨간색 가방을 가지고 가서 아이들한테 놀림을 받았다. 빨간색 가방을 들려 보내지 말라는 선생님 전화를 받은 날 팀장은 완이를 가죽혁대로 때렸다. 짐승도 지 새끼는 안 버리는데. 네 엄마는 짐승보다 못해. 그러니 기다리지 마. 한 번만 더 가방을 들고 다니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그래도 완이는 빨간색 가방을 들고 학교에 다녔다. 가방을 놔두고 학교에 가면 엄마가 와서 가방만 가지고 갈지 모른다고 고집을 부렸다. 가방을 장롱에 넣고 문을 잠가버리자 완이는 컵을 깨거나 돌멩이로 유리 같은 걸 깼다. 가죽혁대로 종아리를 때리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라고만 외쳤다. 뭐가 아닌지 물어도 계속 아니야, 라고만 했다. 완이 마음이 팀장님 마음이죠? 라고 기정은 물었다. 팀장은 얼른 말했다. 난 그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해. 에쿠스가 유조차와 정면충돌해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이 즉사했다고 생각해. 자꾸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아. 어떨 땐 내가 죽인 게 아닌가 싶기도 해.

팀장은 낮에 어디를 갔었느냐고 물어도 되겠냐고 했다. 기정은 눈이 보고 싶었다고만 했다.

“눈 속에 뭐가 있는데? 눈을 보면 좀 달라져?”

“눈 속에서 세상과 단절했고, 눈 속에서 세상과 화해했어요. 제 말이 아니라 우리 위층 아주머니 말이에요.”

“아주머니가 그런 말을 해?”

“나이가 육십 중반쯤으로 보이는데 분위기는 소녀 같아요. 늙은 소녀예요.”

 

“늙은 소녀?”

팀장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선하고 부드러운 얼굴이 기정을 안심시켰다.

“완이가 학교에서 토끼를 한 마리 얻어 와 베란다에서 키우고 있어.”

“토끼를요?”

“아래층이나 위층에서 냄새난다고 할까봐 간이 조마조마한데, 완이가 마음을 쏟고 있으니까 내버려 둬.”

“토끼가 예쁘겠네요.”

“일요일에 별일 없으면 보러 와.”

“알았어요.”

팀장은 칵테일을 한 잔 더 시켰다. 그의 얼굴이 우울해보였다. 기정은 칵테일로 입술을 축이며 술집을 둘러보았다. 아직 초저녁이라 그런지 넓고 기학적인 느낌을 주는 술집은 휑했다. 중년남자는 얼굴을 왼쪽으로 처박은 채 보드카를 마시고 있었다. 술잔을 집어든 손이 밀랍으로 만든 박경준의 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기정은 모든 사람을 자신이 만든 모형인물과 비교했다. 중년남자는 어디서 본 얼굴인데 어디서 보았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중간 쪽의 테이블에는 여자 둘이 마주 앉아 있었다. 화려해 보이지만 허기진 얼굴로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내뿜는 거나 술잔을 기울이는 손짓이 꼭 자신의 작품인 메리와 모아 같았다. 검정실크드레스를 입고 반쯤 드러누워 있는 메리는 마음에 맞는 남자만 있으면 금방이라도 다리 한 짝을 치켜들고 가랑이를 벌릴 것처럼 자세가 불량했으나 얼굴은 몹시 허기져보였다. 마치 나뭇가지에 붙은 제왕나비처럼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고 공허했다. 모아 역시 가슴골이 드러나는 흰 셔츠에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짧고 끝이 찢어진 흰 반바지를 입고 있는데 무척 발랄하고 섹시해보이지만 한 구석을 바라보는 듯한 눈은 공허하고 슬퍼보였다. 중년남자가 중절모를 깊숙이 눌러쓰며 일어섰다. 키가 크고 몸이 마른 중년남자가 누군지 생각났다. 대학총장과 고위공직을 지낸 분인데 수입쇠고기 문제로 관직에서 물러나 지금은 집에서 칩거 중이었다.

“뭘 그렇게 골똘하게 봐, 아는 사람이야?”

“아니에요.”

팀장이 담뱃갑을 끌어당겨 담배를 빼어 물었다. 내뿜는 연기 사이로 기정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다 덮지 못한 욕망 한 줄기가 눈 끝에 남아 있었다. 선하고 부드러운 얼굴은 언제나 기정을 안심시키고 편안하게 했다. 추울 때는 기대고 싶을 만큼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기정은 나가자고 했다. 팀장은 나가기 싫어 떼쓰는 아이 같은 몸짓으로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끄며 일어섰다.

복도에 된장찌개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생선 구운 냄새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혼자 살아서 저녁밥을 짓지 않는 사람을 예민하게 건드리는 냄새였다. 기정은 빠르게 철제현관문을 열었다. 캄캄한 거실로 들어서자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아무도 몰래 불안해했던 감정이 사라졌다. 곧장 퇴근하지 않고 중간에 사람을 만나면 더 그랬다. 불도 켜지 않고 소파에 앉았다. 어두운 게 무서워도 막상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무섭지 않았다. 왜 무서워했는지 의아해질 정도였다. 위층에서 발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그 소리에 왠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기정은 일어나 샤워를 하고 안방 맞은편인 자신의 방으로 갔다. 안방은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어머니가 쓰던 그대로 두었다. 침대 위에 올라앉아 인체 간의 비례에 관한 책을 읽었다. 글을 읽다보면 완벽한 인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아름다운 인체는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창작이겠지만. 인체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것은 거의 상상의 산물일지도 몰랐다. 기정은 책에서 눈을 떼고 건너편의 아파트 베란다를 보았다. 불이 꺼진 데가 많았다. 10층인가 9층쯤에 베란다에 재두루미 한 마리가 서 있는 실루엣이 떠 있었다. 그 앞에서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재두루미가 아니라 나무로 된 목이 긴 편지함이나 화분대 같은 것인데 마치 남자와 재두루미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기정은 베란다로 나가 한쪽만 걷어놓은 블라인드를 내렸다. 베개 위에 몸을 눕혔다. 삶이 미지에 쌓여 있고,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설렘도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런 감정이 싹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쓸쓸하게 자각했다. 이제는 불리한 일에 덧칠하는 기교만 늘어났다는 것도. 기정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불 속은 캄캄했다. 잠속까지는 고통이나 불안이 따라 들어오지 못했다.

일요일인데도 거리는 소란스럽고 자동차도 많았다. 완이가 읽을 책을 사가지고 대형서점을 나왔다. 사람들에게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복잡한 거리를 겨우 빠져나왔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기정이 아는 사람은 없었다. 늘 많은 사람 중에 단 한 사람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당황스러웠다. 쓸쓸함이 지나가고 나면 그는 묘지에 누워 있잖아, 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기정은 공휴일과 명절날에는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아파트에서 혼자 지냈다.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섞이거나 사람들이 사는 것을 지켜보게 되면 더욱 더 외로웠다. 혼자일 때는 외로운 줄을 몰랐다. 시간도 공간도 사람도 없이 오직 자신만 존재하면 외로움조차 둔중해졌다. 대로변으로 나왔는데도 또다시 신호등에 걸렸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먹구름이 끼어 있던 하늘에서 눈발이 떨어졌다. 기정은 눈을 맞으며 걸었다. 아직 눈밭이 생기기도 전에 팀장의 아파트에 당도했다. 찻길에 면해 있는 한 동뿐인 아파트였다.

현관문을 열어주는 팀장의 얼굴에 기쁨이 퍼지는 것을 기정은 놓치지 않았다. 기정은 거실로 들어가면서 완이를 찾았다. 완이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느냐고 눈으로 묻자 팀장은 뾰족한 턱으로 베란다 쪽을 가리켰다. 베란다 문을 열자 비릿하면서도 텁텁한 냄새가 났다. 완이는 철망으로 만든 토끼장에 긴 풀대를 넣고는 토끼 코를 간질이고 있었다. 토끼는 아무렇게나 뭉쳐놓은 흰 털실 같았다.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듯 두 눈 주위는 까맸다. 한쪽 귀도 까맸다. 한쪽 귀는 흰색 그대로였다. 꼭 한쪽 도색을 까먹은 듯했다. 축축하게 젖은 까만 코가 움찔움찔 움직이자 완이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토끼의 코가 움찔움찔 하는 이유가 뭘까요?”

아, 그건 동화인데. 기정은 그 동화를 읽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 걸. 어디서 난 거니?”

“학원 끝나면 나는요, 학교에 가거든요. 우리 학교는 유치원하고 붙어 있는데요. 거기 야외실습장에, 염소도 있어요. 토끼는 두 마리였는데, 한 마리가 죽었어요. 내가 매일 가서 보니까 실습장 아저씨가 가져다 키우려면 키워보라고 했어요. 우리 선생님이 나주라고 했대요.”

“그런데 집 꼴이 너무 말이 아니다. 난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팀장은 집이 깨끗하게 정돈되지 않은 게 기정에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내 친구는 미국너구리도 집에서 키워요. 집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탈이지만요. 우리 끼염이도 미국너구리 저리가라 하는 야성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풀어놓지 않고 토끼장 안에 가둬놓고 키우는 거예요. 조금 더 길을 들이면 이 베란다에서만은 풀어놓고 키울 거예요. 근데 아줌마는 누구예요?”

그제야 완이는 까만 청설모 눈 같은 눈으로 기정을 올려다보았다. 늦게나마 관심을 가져주니까 기뻤다.

 

“아빠와 함께 일하는 사람.”

“아, 알았어요. 사람만 한 인형을 만드는 사람.”

“그래, 맞아.”

완이가 나오려고 발광을 하는 토끼를 꺼내놓았다. 토끼는 베란다를 헤젓고 다녔다. 몇 개 되지 않는 화분의 잎사귀를 뜯어먹었다. 거실로 와 코를 움찔거리며 소파를 뜯어먹었다. 가죽소파인 게 다행이었다. 기정은 실내를 둘러보았다. 25평의 실내에는 커피 잔향이나 음식냄새가 감돌고, 벽에는 그림 액자가 군데군데 걸려 있었다. 비디오, 텔레비전, 전축, 소파 등 필요한 가재도구들도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기정에게는 한데 같은 느낌뿐이었다. 기정은 소파 위에 올려두었던 책을 들고 완이에게로 갔다. 완이는 토끼를 잡아다 토끼장에 가두고 있었다.

“아줌마가 책 사왔는데, 읽어봐. 해리포터 시리즈야.”

“어, 난 책 읽는 거 안 좋아하는데요. 전에 아빠가 사다준 만화로 보는 한국사 열권도 하나도 안 보고 그대로 있는 걸요.”

직립한 토끼가 발톱으로 철망을 긁어대자 완이가 철망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토끼를 잡고 앉혔다.

“야, 허리 디스크 걸려.”

기정은 책을 들고 들어와 도로 나무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저 녀석은 책 읽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해. 그래도 내가 꼭 읽힐게.”

팀장은 주방에서 꽃게 다리를 자르고 있었다. 기정이 뭐 할 거냐고 묻자 꽃게탕을 할 거라고 했다. 기정은 냉장고문을 열었다. 냉장실에는 생수병만 가득 들어차 있었다. 냉동실에는 핫도그와 햇반과 피자와 진빵이 아무렇게나 쑤셔 박혀 있었다. 식탁 위에 노란 마트 봉지가 팽개쳐져 있었는데 그 속에 야채와 대파가 있었다. 팀장은 아무것도 없지, 라며 칼로 꽃게의 다리를 탁탁 내려쳤다. 별로 어색하지 않아 내버려두고 기정은 파를 다듬었다.

팀장은 꽃게의 살을 발라 기정의 밥 위와 완이의 밥 위에 올려주었다. 기정은 팀장에게도 먹으라고 했다. 팀장은 숟가락으로 국물만 후딱 떠먹고 다시 가위로 살을 발랐다. 말려도 될 것 같지 않아 내버려두었다. 꽃게탕은 간이 맞고, 국물이 시원했다. 밥을 후딱 먹어치운 완이는 또다시 베란다로 나가 풀대로 토끼의 까만 코를 간질였다. 둥그렇게 웅크린 자그마한 등으로 고집과 외로움이 흘렀다.

팀장과 기정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셨다.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던 팀장이 기정에게 발이 참 작고 예쁘다고 했다. 이대로 셋이 살아도 될 텐데, 라는 생각을 하던 기정은 속으로 움찔했다. 살빛 스타킹만 신은 기정의 발을 내려다보고 있는 팀장의 눈이 불온하게 반짝였다. 기정은 발을 움츠렸다. 섹스 때면 발부터 만지고 쓰다듬고 발가락을 빨던 그가 떠올랐다. 기정은 밝은 소리로 얼른 말했다.

“전족은 아니에요.”

중국풍의 옷을 입은 여자가 두 발을 앞으로 내밀고 앉아 있는, 가운데에서 댕강 잘린 발이 서로 반대로 붙어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전족의 아픔을 형상화한 것이지만 사실 전족은 시집가 남자에게 사랑을 받으며 살라고 어머니가 시킨 것이다. 전족시킨 발은 커나가지 못하고 갇혀 삼각형으로 꼬부라졌다. 기정의 발은 삼각형으로 꼬부라지지는 않았으나 꼭 갇혀 큰 것처럼 작고 약했다.

“언제 이 발을 만져볼 수 있을까.”

 

건물 밖으로 나와 십분 쯤 걷자 빗방울이 떨어졌다. 대기업 기념관 안에 박경준을 설치해주고 나오자 팀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방송국에서 드라마 찍는 일을 하는 후배인데 만나잔다고 했다. 기정에게는 직행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곧 비는 보도를 흥건하게 적셨다.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종종걸음 쳐 건물 밑이나 안으로 들어가고, 서둘러 택시나 버스를 타버려 거리는 순식간에 한산해졌다. 건널목을 건너려고 하는데 신호등 색깔이 바뀌지 않았다. 기정은 보도블록 위를 걸어갔다. 머리카락이 젖고, 옷이 젖고, 신발이 젖었지만 그냥 걸었다. 자동차들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흙탕물을 튀기며 지나갔다. 기정은 미술관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고, 건너편의 백화점 건물이나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나 사물의 윤곽이 흐릿했다. 나중에는 미술관 앞의 가로수 두 그루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제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가와 당분간 휴관한다고 했다. 그래도 미적거리는 기정에게 눈으로 빨리 나가라고 했다. 기정은 미술관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가기 싫었으나 가까운 버스정류소를 향해 걸어갔다.

젖은 옷을 세탁기에 집어넣고, 뜨거운 생강차를 한 잔 마셨다. 베란다에 쳐놓은 블라인드가 창에 부딪치며 여러 가닥으로 갈라졌다. 아직까지도 바람을 동반한 비가 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찻잔을 유리탁자 위에 내려놓던 기정은 오른쪽 모서리 쪽에 놓인 오르골을 보았다. 채를 들어 오르골을 딱 때렸다. 풍성한 치마를 입은 여자가 핑그르르 돌자 치마 속에 남자가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여성남성 이중창이 흘러나왔다. 아주머니에게서 한 번 더 인터폰이 왔었다. 올라오라고 했는데 일이 밀렸다며 다음번에 가겠다고 했다. 새벽이나 늦은 밤에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로 아주머니가 계속 그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저녁밥이라도 얻어먹을까. 귀찮아하지는 않을까. 망설이던 기정은 눈 딱 감고 인터폰을 눌렀다. 귀찮아할지도 모른다는 망설임보다 어머니가 보고 싶고, 따뜻한 것에 파묻히고 싶은 감정이 더 컸다. 없나보다, 돌아서려는데 아주머니가 네? 하고 말했다. 기정은 올라가도 되냐고 물었다. 아주머니가 승낙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주었다. 현관의 센서불빛을 받아 아주머니와 기정의 그림자가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 길게 뻗쳤다. 탁탁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베란다의 블라인드 그림자가 거실까지 여러 가닥으로 누워 있었다. 베란다 가까이 다가간 기정의 몸도 여러 가닥으로 쪼개졌다. 베란다의 유리문 한 짝이 활짝 열려 있었다. 방충망까지 열려 있었다. 밖은 바로 검고 빈 공간이었다. 아주머니가 거실의 전기스위치를 올렸다. 아주머니의 얼굴이 반쪽이었다. 눈은 인형처럼 움푹 들어가고, 입술에는 허연 껍질이 돋아 있었다. “어디 아프세요?”

“그냥 좀 좋지 않아. 퇴근하고 오는 길이야?”

“서울에 갔다가 비를 쫄딱 맞았지 뭐예요. 겨울비는 지독해요. 눈 맞는 거랑 비교가 안돼요.”

기정은 일부러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에게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한참 후에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와인이나 한 잔 하자.”

아주머니는 와인과 치즈와 아몬드를 내왔다. 와인을 마시던 아주머니가 베란다에 가서 강을 보며 마실까, 하고 물었다. 아주머니가 열려 있는 유리문을 닫았다.

어두운데다 비가 내리고 있는 강은 표면에 흰 도색을 한 것처럼 반질거렸다. 파랗고 노랗고 빨간 불기둥이 어른거리는 쪽은 강 속에 또 하나의 나라가 있는 것 같았다. 와인을 쭉 들이켜고 나서 아주머니가 말했다.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할 때 도와줘.”

“뭘 말이죠?”

“내가 베란다 창을 보고 있을 때 그냥 손을 뻗어 나를 밀어버려.”

“무슨,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부탁이야.”

기정은 퍼뜩 아주머니를 돌아보았다. 아주머니의 얼굴은 지나치게 달뜨고, 지나치게 진지했다.

“저 그만 가볼게요.”

기정은 몸을 돌렸다.

“이리와 봐.”

아주머니는 기정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갔다. 불빛에 드러난 안방은 휑했다. 흰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침대가 있을 뿐이었다.

“왜 장롱이 없어요?”

“내가 없애버렸어. 일을 간단하게 하고 싶어서.”

기정은 얼어버렸다. 아주머니는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여러 개의 종이상자 중 맨 위의 것을 내려 뚜껑을 열었다. 그곳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기정에게 건넸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생활은 바뀌지 않는다. 선혜림. 그것은 유서였다. 그런 종이를 몇 장 더 꺼냈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유서는 다섯 장이 넘었다. 아주머니는 약을 먹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늘 치사량이 넘지 않았지. 약을 먹고, 깨어나고 하는 것에 몸도 마음도 지쳐버렸어.”

기정은 아주머니가 무섭지는 않았다. 자신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그런 마음을 먹은 적이 많았다. 숲으로 가기 전까지는. 그를 묘지에 묻기 전까지는.

“도와 줘. 다른 모든 것은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해놓을게. 아가씨에게는 전혀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거야. 다 계획이 짜여 있어.”

기정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손을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것 같아 겁났다. 재산까지 한몫 떼어주겠다는 소리라도 할까봐 겁났다.

“저, 그만 가볼게요. 그리고 그런 말 아무한테나 하시는 게 아니에요.”

“아무한테나 하는 거 아니야.”

텅 빈 사람모형 속 같은 눈으로 아주머니는 기정을 바라보았다. 이분은 나를 꿰뚫어보고 있는 것일까. 기정은 비밀이 들킨 것만 같았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더 이상은 혼자 이렇게 살 수가 없어.”

아주머니는 절망적인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기정은 안방에서 뛰쳐나왔다. 아주머니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비상계단으로 내려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유리탁자 위에 놓인 오르골을 딱 때렸다. 풍성한 치마를 입은 여자가 빙그르르 춤을 추자 여성남성 이중창이 흘러나왔다. 이중창, 이중주? 아주머니는 처음부터 나를 지목한 것일까. 아주머니가 기정에게 말을 건 것은 정확하지는 않아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였을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빨간 불이 들어온 15 밑에 14를 누르자 아주머니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뻑뻑한 목소리로 14층에 사냐며 물었고, 두어 번 마주친 뒤부터는 다정하게 반말로 차를 함께 마시자거나 장바구니에 든 사과나 바나나를 혼자 먹기에는 많다며 반을 떼 주기도 했다. 아주머니는 알아보았던 것일까. 기정의 비밀과 기정의 외로움과 기정의 고독까지도. 기정은 베란다로 다가갔다. 블라인드를 걷고 강을 내다보지 않았다. 그냥 블라인드 앞에 서 있었다. 벌어진 블라인드 가닥이 몸을 사선으로 쪼갰다. 블라인드 그림자는 기정의 몸에서 갖가지 무늬를 만들며 놀았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 위에 누웠다. 손을 뻗어 협탁의 맨 위 서랍을 열었다. 콩주머니와 검은 안대를 꺼냈다. 안대를 쓰고, 콩주머니를 이마 위에 올려놓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한 말만이 머릿속을 뱅뱅 돌았다.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할 때 손을 뻗어 나를 그냥 밀어버려.

제작실로 들어서자마자 기정은 석분점토라돌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지오를 본격적으로 만들어 볼 셈이었다. 망치로 때려 점토를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 때릴수록 점토는 고분고분해졌다. 밀대로 밀어 납작해진 점토를 직사각형의 나무틀 안에다 넣었다. 나무틀을 기준으로 얇게 밀어준 다음 물 묻힌 솔로 대각선을 그었다. 점토로 몸통 심재를 꼼꼼하게 감싸 맞물렸다. 헤라로 편편하게 골랐다. 헤라만 잘 써도 사포질이 쉬웠다. 너덜너덜하게 남은 부분은 가위로 잘랐다. 마를 동안 밀대로 점토를 다시 밀었다. 머리, 팔, 다리를 점토로 감쌌다. 마른 몸통에 칼집을 냈다. 나중에 몸통을 틀어지지 않게 잘 빼내어야 했다. 머리는 목이 통과되는 구멍으로 심재를 파낼 것이어서 따로 칼집을 넣지 않았다. 팀장의 작품인 로봇형의 레진피겨에 계속 사포질을 하던 미스 오가 점심시간에 어디 가지 말고 함께 공원에 가자고 했다. 손과 발을 점토로 감싸고, 목과 어깨 등속에 들어갈 13개의 동글동글한 관절구를 만들고 나니까 점심시간이었다.

미스 오는 지갑을 챙겨들고 빨리 나가자고 했다. 제작소 옆 골목의 베트남 쌀국수집에서 쌀국수를 먹고, 커피전문점에서 커피 두 잔을 사서 가까운 꽁지공원으로 갔다. 추웠으나 모처럼 햇빛이 투명하고 따뜻하게 내리쬐었다.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공원 한쪽에서는 초육(초등학교 6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애 셋이서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김연아 열풍으로 요즈음 웬만한 여자애들은 다 스케이트를 탄다고 했는데 여자애 셋도 얼음 위를 얼음새처럼 날아다녔다. 농구대 앞에서는 한 청년이 계속 농구공을 집어던지고 있었다. 농구공은 말 안 듣는 아이처럼 농구주머니를 자꾸만 벗어났다. 커피를 두어 모금 연달아 빨던 미스 오가 말했다.

“어젯밤 그 놈하고 함께 있었어.”

“작업실에?”

미스 오의 애인은 조각가였다. 작품은 거의 다 젖통과 허벅지와 엉덩이가 큰 여자들이었다.

“새벽에 날 막 흔들어 깨우는 거야. 난 불이라도 난 줄 알았어. 그런데,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자기가 일을 해야 하니까. 빨리 나가달라는 거야.”

기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커피만 먹었다.

“넌 우리가 섹스도 하는 사이라고 생각하지?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지?”

“남녀가 한 작업실에서 있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그 놈은 여관도 아니고, 공원도 아니고, 제 작업실에서 상체만 애무해. 상체도 다 벗기지 않아. 꼭 반만 벗겨.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성도 자기가 필요한 만큼 사용할 수 있는 거야? 그 놈은 작업실에서 먹고 자며 온갖 짓을 다해도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자기 마누라한테 가. 아주 철저해.”

미스 오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보기 흉했다.

“그걸 알면서 왜 만나?”

피로와 함께 짜증이 이는데도 기정은 아무 말이나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나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내 몸이 그 유희 감각을 원해. 나는 수요일에 그곳에 가는데, 화요일쯤 되면 내 몸이 벌써 그 감각을 원한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어.”

“그럼 된 거 아냐?”

미스 오의 양 입가에 지렁이만 한 주름이 어색하게 꿈틀거렸다.

“미안해. 그래도 아무도 없는 거보다는 낫지 않아. 아무도 없는 것만큼 무서운 거는 없는 거 같아. 우리 위층 아주머니는 정말 주위에 아무도 없어. 너무 고독한 거야. 어제는 나보고 자신이 의식하지 못할 때 베란다에서 자기를 밀어버리래.”

“그래? 그 정도야?”

“사랑한다면 그냥 옆에 붙들어놓아.”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지 않아도 그 정도라도 몸과 마음을 맡길 수 있다면 된 거 아니야, 기정은 팀장을 떠올렸다. 팀장을 향한 마음의 무게는 미스 오만큼은 아닌 것도 같고, 아니 미스 오보다 훨씬 무게가 더 나가는 것도 같았다. 기정은 헷갈리는 마음을, 불안하게 왔다 갔다 하는 저울의 눈금을 살펴보지 않기로 했다. 영혼이나 정신의 무게는 몇 g이나 나갈지 그걸 궁금해 하기로 했다.

제작실로 들어서자마자 기정은 꾸덕꾸덕 마른 머리를 들고 와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4B연필을 들고 머리의 앞면을 삼등분으로 갈랐다. 이마와 눈과 코와 입의 밑그림을 그렸다. 이제 지오의 이미지도 다 완성되었다. 지오는 코가 오뚝하고, 이마가 넓으며, 입술이 얇고, 하관이 빤 스물다섯 살의 미남형 청년이다. 머리모양은 짧은 스포츠형이고, 색깔은 짙은 검정색이다. 지오가 태어난 배경과 성장과정까지 기획한다면 더욱더 좋은 인형이 될 것이다. 지오의 이미지대로 점토로 살을 붙여나갔다. 코와 입술 부분에는 점토를 두툼하게 붙인 뒤 조각칼로 파내어 모양을 만들었다. 머리 위를 네모로 잘라 두 쪽으로 분리했다. 안쪽 눈 부분에 물을 칠하고 동글한 연마석으로 살살 파냈다. 그 구멍에 홍채를 띤 안구를 박아 넣었다. 지오에게도 생일이 있고, 직업이 있어야 했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을 하고, 여자 친구도 사귀고, 기억도 있고, 추억도 있고, 내적독백을 기록한 일기도 있어야 했다. 집도 있어야 했다. 지오에게도 역할을 주어야 했다.

계속해서 울려대는 인터폰 소리에 기정은 잠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오전 열 시였다. 잠을 못자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기정은 약간 짜증을 내며 인터폰을 받았다. 토요일에는 꼼짝도 하지 않고 집에 누워만 있었다. 오른팔과 어깨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목뼈가 틀어졌다는 진단을 내렸다. 현미경으로 피를 검사했더니 피가 혼자서 돌아다니지 않고 한 덩어리씩 뭉쳐서 돌아다녔다. 꾸준히 약을 먹어야하고, 어깨와 팔과 목을 많이 쓰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토요일에는 원래 출근을 하지 않지만 제작실에 나가 지오를 더 만들 계획이었으나 갑자기 꼼짝도 하기 싫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팔과 어깨는 밤이 되면 더 아팠다. 자다가도 몇 번씩 깨어났다. 인터폰을 한 사람은 위층 아주머니였다.

“바쁘지 않으면 잠깐 올라와.”

“이제 막 깨어났어요.”

저번의 그 일이 생각나 기정은 가지 않으려고 했다.

“와서 케이크에 불 좀 켜줘. 오늘이 내 생일이야.”

기정은 1503호로 갔다. 소파 앞의 탁자 위에 생크림 케이크만 놓여 있었다. 미역국도 끓이지 않고, 생선도 굽지 않고, 달랑 케이크뿐이었다. 케이크의 흰 프로스팅이 눈 같았다. 커피를 끓이던 아주머니가 기정에게 케이크에 불을 붙여달라고 했다. 아주머니가 커피 두 잔을 끓여내 오고, 접시와 포크를 내오자 기정은 큰 초 여섯 개와 작은 초 여섯 개를 꽂아 불을 붙였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꽃이라도 사 오는 건데요.”

아주머니는 웃으며 입술을 새부리처럼 오므려 불을 휙 껐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미국의 아들한테서는 연락이 없냐고 묻고 싶었으나 묻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케이크를 잘라 기정 앞의 접시에 담아주었다. 눈을 내리깐 옆얼굴은 새침하면서도 위엄이 있었고 접근 불가능한 바리게이트를 쳐놓은 것 같은 단절감이 흘렀다. 수줍음 많고 고집불통이고 자기 내면에 빠져버린 늙은 소녀. 커피까지 마시고 나자 아주머니는 또 베란다로 나갔다. 기정은 겁이 났다. 아주머니는 모처럼 날씨가 따뜻하고 물빛도 새파랗다며 와 보라고 했다. 기정은 주춤주춤 베란다로 나갔다. 눈도 비도 내리지 않고, 햇빛이 천지사방에 골고루 내리쬐었다.

“물빛이 너무 좋다. 난 매일 배를 타고 바다나 강을 항해중인 것 같아. 가도 가도 보이는 것은 흰 햇빛과 흰 물빛뿐인 것 같아. 내게 주어진 것은 자유뿐이야.”

기정은 수긍했다. 기정도 너무 큰, 너무 방만한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기정이 감당하기조차 어려운. 강에도, 공원에도 햇빛으로 넘쳐났다. 강에도, 공원에도 사람은 없었다. 보이는 것은 넓은 강과 넓은 공터뿐이었다. 아주머니와 함께 있었으나 따로 있는 것 같이 서로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넓은 강과 넓은 공터를 오랫동안 보고 있자 갑자기 무한대로 커지는 것 같았다. 햇빛이 강과 공터의 윤곽을 없애버렸는지 전혀 공간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기정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해봐, 해봐, 못할 것도 없지 않아. 너 역시 이대로 나가면 저 아주머니처럼 될 거야. 네게 누가 있어. 아무도 없잖아. 너의 이십년 후의 모습이 바로 아주머니야. 너도 누군가에게 부탁할래?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할 때 죽여 달라고. 혼자서는 죽지도 못한다고. 그냥 이십년 후의 너를 미리 없애버린다고 생각하고 밀어버려. 한순간이야, 한순간. 찰나만 지나면 아주머니는 곧 편안해질 거야. 그러면 고독에 떨 필요도 없는 거야. 고독에 떨고 있는 것만큼 추해보이는 것도 없잖아. 아주머니, 추하잖아. 그리고 말이야,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게 혼자인 거야. 혼자인 것에서 벗어나게 해줘. 밀어, 밀어버리라니까. 기정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아주머니가 말했다.

“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벽이 없는 내 운명에서 못 벗어나는 것 같아.”

그래, 벽이 없는 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어. 벽이 없으면 어디가 어딘지 가늠할 수가 없거든.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고. 알 수 있는 건 너무 넓다는 그것 하나뿐이야. 아주 무서운 일이지. 기정은 아주머니의 등에 두 손바닥을 가져다댔다. 손을 덜덜 떨면서 아주머니의 등을 와락 밀었다. 너, 너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니. 기정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원룸에 혼자 살 때 치와와를 키운 적이 있었다. 그때도 햇빛이 녹색의 침대보를 풀밭처럼 만들었는데 그 풀밭 위로 느릿느릿 걸어오는 치와와의 몸짓이 너무도 권태로워보였다. 기정은 자신도 모르게 너무도 아끼고 사랑하는 치와와의 목을 졸라 권태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다. 치와와 목으로 손을 뻗다가 진저리치며 손을 감추었다. 그 손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기정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몸이 반쯤 접혀진 아주머니는 베란다 난간 밖으로 꼬꾸라져 숨을 헉헉 내쉬었다. 기정은 놀라 일어섰다. 얼른 아주머니를 떼 내고, 유리문을 닫고, 고리를 잠갔다. 블라인드도 줄을 세게 당겨 내렸다. 넓은 강도, 넓은 공터도, 무한대로 커나가게 하던 햇빛도 모두 없어졌다. 얼이 빠져 있는 아주머니를 부축해와 소파에 앉히면서 기정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뇌와 몸뚱이와는 별개의 물건 같았다. 기정은 말했다.

“저 그만 내려갈게요. 이제 다, 다시는 절 찾지 마세요.”

“아니야, 나 혼자 못 있어.”

아주머니가 손을 뻗어 기정의 팔을 꽉 잡았다. 정지스위치라도 먹은 것처럼 기정은 아주머니에게 잡힌 팔만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지금 서로 자신의 괴물 같은 자유를 마주 보고 있는 걸까. 이게 얼마나 나쁜 일인지 서로 언제쯤 알게 될까. 기정은 아주머니의 손을 떼어놓았다.

“저한테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마시라고요.”

기정은 달음박질쳐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현관문을 잠갔다. 문 앞에 주저앉았다. 빨래처럼 휙 날아가 버릴 거 같던 아주머니.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아주머니는 분명히 자살하고 말테지. 왜 나쁜 일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거지. 두렵고 무섭기는 해도. 기정은 덜덜 떨며 소파로 와서 누웠다. 눈을 감았다. 아주머니의 등이 시커멓게 떠올랐다. 등을 밀던 자신이 만든 인형의 손 같던 두 손도 떠올랐다. 벌떡 일어나 현관문으로 가 걸쇠를 걸고, 보조 문고리도 잠갔다. 오전 내내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밖에서 무슨 소리만 나도 귀가 커졌다. 아주머니가 두 손으로 철제현관문을 마구 칠 것만 같았다. 죽여 달라가 아니라 살려달라고. 소파에 앉아 있던 기정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밀어버려, 가 아니라 붙들어줘, 라는 말을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동굴 속에서 앉은 그대로 미라가 된 여자가 떠올랐다. 미라가 나뭇가지를 이어붙인 것 같은 손으로 기정의 발목을 덥석 움켜쥐며 날 내버려두지 마, 라고 소리치는 순간 기정은 퍼뜩 얼굴을 쳐들었다. 오후가 되자 팀장한테 전화를 하고 말았다.

술을 마시기에도 밥을 먹기에도 어중간한 시각이라 그런지 레스토랑은 휑하고 약간 을씨년스러웠다. 팀장은 둥근 바에서 혼자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기정은 팀장에게 다가가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팀장이 순순히 기정의 뒤를 따랐다.

“완이랑 토끼는 잘 있어요?”

“토끼가 요즈음 먹이를 잘 먹지 않지만 잘 있는 편이야.”

팀장은 함박 스테이크와 와인을 시켰다. 함박 스테이크는 손도 대지 않고 와인만 마시는 기정에게 팀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기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팀장은 열심히 썬 스테이크 접시를 기정의 것과 바꾸며 먹어두라고 했다. 기정은 또다시 와인을 잔에 또르르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기정은 또다시 와인병을 집어 들었다. 팀장이 와인병을 빼앗았다.

“난 입도 안 댔는데 비싼 와인을 혼자 다 마실 거야.”

“제가 이 손으로 오늘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알아요?”

팀장이 미간에 쇠갈고리 주름을 잡고, 콧등에 아코디언 주름을 잡으며 기정의 얼굴을 살피고, 기정의 손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 위층 아주머니를 베란다에서 밀어버리려고 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늘 자살만 생각하고 있는 아주머니가 내게 부탁했거든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할 때 그냥 밀어달라고.”

“그런다고 그런 부탁을 들어줘? 그런 부탁을 하는 사람도 있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아주머니가 이십년 후의 내 모습 같았어요.”

“…”

“그 모습이 너무도 보기 싫었어요. 추했어요.”

팀장은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켜고 나서 낮게 말했다.

“그건 네가 너무 심각하고 생각이 많고, 또 고독해서야.”

팀장이 손을 뻗어 기정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팀장의 앞섶에 얼굴에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기정은 얼른 말했다.

“난 고독하지 않아요. 너무 자유로울 뿐이에요.”

 

기정은 채색을 끝내고 줄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머리, 몸통, 팔, 다리, 손, 발 앞으로 가 무광코팅제를 분사했다. 거리 조절을 잘 해야 했다. 마를 동안 텐션 줄을 챙겼다. 마르자 관절구를 붙여 S자 고리를 단 발목과 다리 부분을 텐션 줄로 연결해 나갔다. 마지막으로 뚫려 있는 구멍을 통해 머리와 목을 연결했다. 관절이 반씩 떨어져 있는 게 기정은 늘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텐션 줄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포즈를 취할 수도 있는 것을 최고로 치는 사람들도 많지만.

점심시간에는 미스 오와 함께 샌드위치를 사들고 꽁지공원으로 갔다. 공원 한쪽에서는 노란색 패러글라이더가 글라이딩 중이었다. 얼음이 녹고 있기 때문인지 얼음새들은 보이지 않았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 우적우적 씹으며 카푸치노가 담긴 컵에 꽂힌 빨대를 쭉쭉 빨고 난 뒤 미스 오가 말했다.

“나 이제 그 놈 안 만나.”

기정도 팀장처럼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아 보이며 눈으로 왜냐고 물었다.

“집에 갔는데 갑자기 작업실에 가고 싶은 거야. 전화 안 하고 가면 질색을 하는데, 그냥 갔어. 왜 그러고 싶을 때가 있잖아. 두어 번 노크를 했는데 반응이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갔어. 그런데, 큰 브론즈 뒤에서 그 새끼랑 어떤 년이 엉켜 있는 거야. 그 년이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밀랍인형이 엉켜 있는 줄 알았을 거야.”

“엉켜 있어? 수직으로? 수평으로?”

기정도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 우적우적 씹었다. 모르는 일도 아니었잖아,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성도 자기가 딱 필요한 만큼만 쓰는 놈이잖아.”

“정 떨어지는 놈이야.”

“그래, 정 떨어지는 놈이지. 내가 철제문을 발로 차 닫고 나오니까 그제야 그 새끼가 막 달려내려 오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어, 오늘 밤 나랑 섹스할 수 있냐고.”

흥분했는지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미스 오의 얼굴은 잘 익은 검붉은 포도송이 같았다. 손으로 따서 짓이겨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기정은 얼른 말했다.

“뭐래?”

미스 오는 입안에 있던 샌드위치를 바닥에 뱉어냈다.

“산더미만 한 덩치에 안 어울리게 않게 얼굴까지 붉히면서 그게, 뭐, 그게, 이러는데. 그때 년이 내려온 거야. 년이 뭐냐고 따지듯이 묻더라. 그러니까 순식간에 코끼리 낯바닥으로 변하면서 오필녀 씨, 저번의 그 작품 참 좋았어요, 다음에도 작품 가져와 보세요, 이러는 거 있지.”

미스 오는 턱을 치켜들고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잇몸과 이를 드러내고 백지처럼 웃었다. 정말 오필리아 같았다. 오필리아로 불러주지 않아서 더 화가 났는지도 몰랐다.

“끝났어.”

미스 오는 노랗게 염색한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애벌레처럼 쭈글쭈글 주름이 잡히면서 동그랗게 말려 허공으로 이동 중이던 패러글라이더가 확 퍼지면서 버터플라이로 변했다. 기정은 일어섰다.

“다른 상대를 찾으려면 귀찮은데. 그래도 하나는 있어야 돼. 그지?”

미스 오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으나 기정은 그냥 걸었다. 뒤따라오던 미스 오는 가까운 곳에서 랩 음악이 들려오자 엉덩이를 이쪽저쪽 씰룩이며 춤을 추었다. 레깅스 입은 다리로 이단 옆차기도 했다. 노란 국화덤불이 함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미스 오를 신기하다는 듯 지켜보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패러글라이더는 공원을 벗어나 있었다.

작업실에서 스컬퍼로 로봇의 원형을 만들어가고 있던 팀장이 어디 갔다 오냐고 물었다. 그의 이번 작품은 호랑거미와 타란튤라 이미지인 로봇이었다. 봄에 작품을 발표할 계획이었다. 기정은 미스 오와 꽁지공원에 다녀왔다고 답하고 지오 앞으로 갔다. 지오의 머리카락을 붙여나갔다. 미스 오는 한 칸씩을 남겨놓고 노란색 도료를 칠해놓은 레진피겨의 몸통에 검정색 도료로 채색을 했다. 호랑거미 로봇이었다. 지오의 얼굴을 분장했다. 볼은 매끈하고, 입술은 약간 분홍기가 돌았다. 마지막으로 전체적으로 황변차단제를 발랐다. 무광코팅제만 뿌려놓으면 변색하기 쉬웠다. 기정은 집으로 가 거실로 들어서면 천장부터 올려다보며 위층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면 불안했다. 올라가서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새벽과 저녁에 두어 차례 안방 쪽의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기는 했다. 세상에서 혼자인 것만큼 고통스러운 게 있을까. 혼자가 싫어 밖으로 나와 싸돌아다녔으나 집에 오면 또 혼자라는 걸, 밖에서도 역시 혼자였다는 걸 깨닫는 것만큼 숨을 틀어쥐는 것이 있을까. 아주머니는 혼자 있으면 안 되었다. 아주머니가 원하는 것은 혼자 있지 않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기정의 손길이 빨라졌다.

미스 오와 팀장은 퇴근했으나 기정은 남아서 지오에게 옷을 입혔다. 지오는 스트라이프 양복에, 스카이블루 셔츠에, 빨간 넥타이를 맸다. 오른쪽 팔꿈치에는 베이지색 바바리를 걸쳤다. 코가 오리주둥이처럼 생긴 더클링 슈즈도 신었다. 드디어 스물다섯 살의 미남형인 지오가 태어났다. 기정은 잘 생긴 젊은 남자를 마주했을 때처럼, 아니 그를 미술관에서 처음 보았을 때처럼 가슴이 뛰었다.

지오를 안고 사무실로 나오던 기정은 놀랐다. 불도 켜지 않은 채 팀장이 자신의 자리에서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 나를 기다렸던 것일까.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기정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안 가셨어요?”

“응, 다 완성한 거야? 집으로 옮기려고?”

“아니에요, 우리 위층 아주머니에게 드리려고요.”

“….”

“그래야, 저번의 일이 사죄될 것 같아요. 아주머니도 지오를 굉장히 좋아할 것 같아요. 진짜 아들처럼 받아들일 것 같아요.”

“그래, 내가 태워다 줄까?”

“아니, 택시 타면 돼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까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미스 오와 함께 삼십대 여자 밀랍인형을 직접 가져다 준 적이 있었다. 큰 느티나무가 있는 골목의 맨 끝인 지하작업실로 가져오라고 했다. 느티나무는 그러나 양 갈래로 갈라지는 중간지점인 큰길에 딱 서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양쪽 골목을 헤매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저게 뭐지, 저게 뭐지, 라며 하고, 어머, 인형인가 봐, 진짜 사람 같다, 라며 호들갑을 떨어 곤란하고 성가셨다.

“그럼, 집까지 태워주실래요?”

약간 실망에 젖어 있고, 약간 의기소침해보이던 팀장이 입 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그 얼굴을 만지면 손이 따뜻해질 것 같았다.

지오 때문에 뒷좌석에 앉은 기정은 닭이 왜 울지 않느냐고 물었다. 팀장이 손을 뻗어 스위치를 올리자 닭이 목청껏 꼬끼오, 울었다. 요즈음 닭은 시도 때도 없이 운다며 팀장과 기정은 웃었다. 팀장은 엘리베이터 안까지 지오를 들여다 주고 돌아섰다. 함께 올라가서 커피라도 한 잔 하자고 했으나 팀장은 완이 때문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다음에 정식으로 초대해.”

팀장은 손을 흔들었다. 팀장은 기정의 마음을 다 읽고 있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도망치고 말 거라는 걸. 그렇지만 10Cm쯤 거리를 두고서는 언제든 함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을. 팀장은 10Cm를 지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기정은 곧바로 15층에서 내려 초인종을 눌렀다. 지오를 본 아주머니는 놀라 이게 뭐냐고 거푸 물었다. 기정은 곧장 지오를 데리고 거실로 들어갔다. 아주머니는 이게 인형이야, 하고 물었다.

“네, 거의 자동인형이랄 수 있어요. 이름은 지오이고, 스물다섯 살이에요. 대학을 졸업했고, 출생지는 여기 K시예요. 제 작품이에요.”

기정은 아주머니에게 지오가 태어난 배경을 들려주었다. 인형을 제작해 가는 사람들 이야기도 했다. 아이를 입양하는 것보다 낫다면서 목욕, 성형까지 가능한 예쁜 여자 아이를 제작해가기도 하고. 앞으로는 소통이 잘 되지 않고 사사건건 트집이나 잡는 애인과는 헤어지고 밀랍인형이나 자동인형을 사귀는 사람들도 늘어날 거라고.

“이제 아들로 삼으세요.”

아주머니는 신기한 듯이 지오를 짯짯이 훑어보았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차줄까?”

“말차 먹고 싶어요.”

말차하고 화과자를 내오던 아주머니가 말했다.

“이런 인형 굉장히 비싸다고 하던데, 얼마야?”

“주문 제작 받은 거도 아니고, 팔려고 만든 것도 아니에요. 제 작품이에요. 그냥 받아주세요.”

아주머니는 미안해하는 기정을 알아보고 있었다. 입술에 묻은 녹색거품을 혀로 핥으며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오가 태어난 배경이라든가. 지오의 내면을 기록한 일기장 같은 것도 있으면 아주 좋을 거예요.”

“내면을 기록한 일기장? 그거, 나보고 쓰라는 거야?”

“네, 스물다섯 살이면 대학을 졸업했고, 회사에 들어갔을 수도 있고, 요즈음은 취직이 어려우니까 인턴이나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있고요.”

“딱 보니까, 얘도 외향적은 아니야, 자기 내면으로 깊이 가라앉은 앤데, 뭐.”

“그게 느껴져요? 난 참 발랄하고 쾌활하고 걱정거리 없는 청년으로 만들었는데. 여자 친구도 있고, 있을 건 다 있는 청년인데.”

“걱정거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누구나 자기 몫의 걱정으로 살아가는 거지.”

자기 몫의 걱정? 기정은 아주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혼자라는 건 똑바른 사고까지 삼켜버리고 맥을 못 추게 하는 걸까. 기정의 무구한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아주머니는 일어나 지오가 팔에 걸치고 있는 바바리를 만졌다.

“이 바바리는 왜?”

“사람처럼 보이려는 일종의 트릭이죠.”

아주머니와 기정은 마주 보고 웃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있어 오늘 밤 잠이 올까 몰라.”

“그래도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그럴까?”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잠이 안 오면, 지오의 내면기록을 써보세요.”

“내면기록? 그래, 알았어, 내가 한 번 써보지.”

기정은 아주머니와 지오에게 차례대로 작별 인사를 하고 내려왔다. 오늘 저녁은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박경준 밀랍인형 뒤로는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일감이 없으면 팀장보다 기정이 초조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작품을 만들 분위기도 아니라 재료정리에 들어갔다. 지오를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새 작품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미스 오는 사무실에서도 랩 음악을 틀어놓고 엉덩이를 씰룩이며 춤을 추었다. 노란 국화덤불이 움직이는 것 같아 어쨌든 분위기는 환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애인 작업실에 다시 간다고 했다. 그날 본 것은 싹 까먹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외로움이라는 물건이 1g이라도 더 얹힌 쪽이 관계에서 지는 거니까 미스 오의 시소가 땅 쪽으로 기울었는지도 몰랐다. 아주머니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기정은 집에 가면 인터폰이 울리기를 바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지오가 있으니까, 하고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집에 가면 자신의 자유가 더 방만해진 것을 느꼈다. 정말 벽이 느껴지지 않아 약간 불안하기도 했다. 그 동안 아주머니와 꽤 가까워졌고, 미지근하기는 해도 아주머니에게서 온기를 느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퇴근을 하고서 소파에 올라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아주머니였다. 저녁을 먹고 올라가겠다고 하니까 곧장 올라오라고 했다. 기정은 1503호로 갔다. 지오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스물다섯 살의 미남형 청년은 섬뜩하도록 낯선 표정과 만질만질한 눈으로 기정을 바라보았다. 탁자 위에는 체리가 얹힌 흰 케이크와 수첩보다는 크고 대학노트보다는 작은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기정은 손가락으로 케이크에 꽂힌 초를 셌다. 스물다섯 살에 해당하는 초가 꽂혀 있었다.

“오늘이 지오 생일이에요? 미리 말씀하셨으면 지오 옷이라도 지어오는 건데요.”

기정은 지나치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는 탁자 위에 와인과 오징어포와 아몬드를 놓고 나서 초에 불을 붙였다. 기정은 지오를 탁자 앞에 앉혔다. 지오와 아주머니가 함께 촛불을 껐다. 세 조각으로 자른 케이크를 접시에 떠 주었다. 기정이 케이크를 먹고 나자 아주머니가 노트를 내밀었다.

“지오의 내면기록이야. 읽어볼래?”

기정은 얼른 노트를 받았다. 황급히 펼쳐 읽었다.

이상훈: 25세. A대학 전자공학과 졸업. 전자회사 입사. 혈액형, A형. 성격, 무척 내성적. 아버지: 딱풀공장과 필름공장을 말아먹고 또다시 제본기공장을 차림. 자기 사업 외에는 이 세상에 직업이 없다고 생각함. 아내가 유방암수술을 했는데도 일본의 주부들은 밤에 파트타임으로 일할 정도로 독립적이고 부지런하다면서 계속 일하게 함. 엄마: 손님이 싫어할까봐 모자 대신 단발머리 가발을 쓰고 재래시장에서 ‘훈이네 건어물’ 가게를 운영. 입 대신 눈으로 말하는 편.

기정은 아주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아주머니가 배시시 웃었다.

“그냥 잠 안 올 때 끼적거려 본 거야.”

“완전 창작인데요.”

세 바닥을 후딱 다 읽고 난 기정은 물었다.

“아주머니 전공이 뭐예요?”

“영문학.”

기정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지금 지오의 직업은 뭐예요?”

“물론 하루 종일 자기 방에서 내면기록을 하고, 공부를 하지. 신발 밑창에 앵무조개 나선형 무늬를 넣어 곧 특허를 받을 거야.”

“아주머니는 일체 방해하지 않고요.”

“아니, 애인은 없어야 되고, 날 혼자 내버려두면 안돼.”

“여자 친구 정도는 있어야 하잖아요.”

“없어도 돼.”

“있어야 될 거요.”

기정이 조금 끼어들어 윤색하고, 아주머니와 둘이 타협하기도 해서 창작해 낸 내면기록을 정리하면 이랬다.

전자회사에 들어간 상훈은 두 달쯤 지나자 자신은 조직적이거나 얽매인 생활을 못 견뎌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퇴근하는 버스 속에서는 늘 해가 지고 있는 서쪽으로 가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면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가방에 늘 넣고 다니던 사표를 발작적으로 과장에게 내밀고 회사를 뛰쳐나온 것은 일 년 육 개월 뒤였다. 그동안 아버지와 자신과 싸워가면서 회사생활에 적응해보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상훈을 아버지는 일본에서 유행하는 히키코모리로 몰아붙이며 매일 야구방망이로 방문을 쾅쾅 내리쳤다. 상훈은 정말 잘 하는 것,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상훈은 내면을 기록해나갔다.

1, 방안에서, 마당에서 나선형 무늬를 찾는 놀이에 집중했다. 기하학적 무늬 속에서 나선형 무늬를 찾은 일은 쉬웠다. 찾자고 마음먹으면 나선형 무늬는 널려 있었다.

2, 소금호수에 만든 나선형 방파제를 보았다. 그걸 거꾸로 보니까 정말 달팽이 같았다. 피보나치수열(꽃과 나비만 봐도)을 생각하면 모든 게 질서 속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러나 지금의 내 생활을 질서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3. 마당에 라일락꽃이 피었다. 보라색이 많은 계절에 자살 율이 높다고 했다.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내면의 기록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는 앵무조개의 나선형 무늬로 된 운동화 밑창이나 등산용 파카를 만들고 싶었다. 졸업 전에 아쿠아리움에서 앵무조개를 본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옆으로 더 이상 확장이 안 되니까 밑으로 빙빙 파고 들어가 껍데기 끝면에 생긴 나선형무늬에 끌려들어갔다. 그가 스케치북에 나선형 무늬를 그리고 있을 때 엄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 밥은 왜 차려놓는데! 엄마의 가발을 벗겨 바닥에 집어던지며 아버지는 소리쳤다. 엄마를 괴롭히는 것으로 아버지는 상훈에게 분풀이를 했다. 맨머리를 두 손바닥으로 감싸 안으며 돌아보는 엄마의 눈시울이 젖은 것을 상훈은 보았다. 왜 엄마를 괴롭히세요, 차라리 절 때리세요. 아버지의 눈이 뒤집혔다. 뭐라고, 제 밥벌이도 못하는 개새끼가 뭐라는 거야. 상훈은 거푸 악을 썼다. 밥벌이를 못하는 게 아니라 제가 잘 할 수 있고,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돼요. 감정 조절이 제때 안 되는 아버지는 식칼을 빼들었다. 이게 어디서 소리를 질러? 이제 애비도 눈에 안 보이냐? 아버지는 식칼로 상훈을 찔렀다. 안돼, 상훈아, 피해. 엄마가 식칼을 손으로 그러쥔 것이 아버지가 찌른 것보다 빨랐다. 피를 뚝뚝 흘리던 엄마가 119 구급대에 실려 가고 나자 상훈은 책상다리에 머리를 짓찧었다. 자신의 삶에 치욕을 느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건지 묻던 아버지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끝내면 된다고! 그러자 모든 의식이 한 방향으로 몰려가는 물고기 떼처럼 죽음 쪽으로 몰려갔다.

바다 건너편은 야산이었고, 그 아래로는 삼각형 모양의 갯바위가 뻗어 있었다. 접근을 금지한다는 위험표지가 꽂혀 있었다. 파도가 철썩거렸다. 와, 와, 어서 오라니까! 농구화를 벗어 가지런히 놓았다. 한순간만 지나면 곧 편안해진다니까! 뛰어내리려는 순간이었다. 갯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은 남자를 보았다. 상훈은 어느새 갯바위 위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해풍이 심하게 불고, 파도가 심하게 쳤다. 일어서던 남자의 바바리 자락과 양복바지 자락이 마구 펄럭였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던 남자가 갯바위 아래로 쭈르르 미끄러졌다. 갯바위의 날카로운 끄트머리를 움켜쥐고 있는 남자의 손도 달려온 파도가 꿀꺽 삼켜버렸다. 상훈은 자신도 모르게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잠영과 개헤엄으로 고래처럼 무거워진 남자를 끌어냈다. 남자에게 인공호흡을 시키던 상훈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남자는 죽어 있었다. 죽으면 이렇게 초라한 물건이 되는 구나. 이런 물건은 찾아가지도, 주워가지도 않을 거야. 상훈은 죽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변하지 않은 채로는.

상훈은 구둣발로 남자를 밀어버렸다. 남자는 단 한 번의 저항도 없이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가까운 대리점으로 가 남자의 물 먹은 휴대전화를 살렸다. 통화기록부터 살폈다. 어머니와의 통화가 거의 전부였다. 버튼을 눌렀다. 지오니? 거기가 어디니? 잘못 된 건 없지? 꼭 미국까지 갈 필요가 있니? 제발 돌아와라. 응? 남자의 어머니는 울먹였다. 바닷가에 있는데 좀 데리러 오면 안 되겠냐고 상훈은 차분하게 말했다. 삼십분 쯤 지나자 여자가 머플러를 펄럭이며 모래밭을 걸어왔다. 상훈은 더듬거리며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했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엄마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갯바위 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상훈은 여자 뒤에 무르춤하게 서 있었다. 눈물을 훔친 여자는 상훈에게 어머니와 아버지가 장례는 잘 치러줄 수 있는 사람인지 물었다. 아마, 그럴 거예요, 라고 상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자신이 벗어놓은 농구화를 힐끗 보며 말했다. 농구화로 눌러놓은 유서도 그대로였다. 여자는 담배 한 갑을 다 피웠다. 저녁이 되자 여자는 지오야, 집으로 돌아가자, 라고 했다. 상훈은 놀라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자의 눈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여자가 다시 말했다. 지오야, 엄마가 잘못했다. 집에 가자. 여자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31평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지오의 방에서 하룻밤을 자고나자 여자가 북해도의 눈을 보러가자고 했다. 눈 덮인 계곡에 들어서자 여자가 말했다. 난 아들을 입양하기 전에 이곳으로 와서 흰 눈 속에서 내가 아들을 낳았어. 그리고 오늘 난 이 자리에서 아들을 입양한 사실을 지워버렸어. 난 오늘 또 이 흰 눈 속에서 아들을 낳았어. 여자가 지오를 돌아보았다. 지오도 눈뿐인 계곡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정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팀장이었다. 아주머니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지금 어디야? 완이 토끼가 죽어버렸어.”

“그래요? 완이는 어떻게 하고 있어요.”

“말도 안하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

“또 걱정이네요.”

“그 녀석을 어떻게 해야 될지 정말 모르겠어.”

“제가 지금은 갈 수가 없어요. 내일 갈게요.”

팀장은 기정과 함께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었는지 망설이다 전화를 끊었다.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기정은 덜컥 겁이 나 얼른 베란다 쪽을 보았다. 블라인드가 딱딱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어디 계세요?”

눈과 함께 시작되었던 겨울이 가고 삼월이 되었다. 삼월이라고 해도 날은 풀리지 않고 가끔 눈도 내렸다. 꽃샘추위도 심했다. 일감이 들어왔다. 팀장의 후배가 의뢰한 텔레비전의 범죄 스릴러물에 사용될 전신더미 한 구였다. 피부건조 병을 앓고 있어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웬만한 집무를 해결하는 남자가 있는데 언제부턴가 집안에 자신과 꼭 닮은 남자가 나타나 괴롭힌다. 남자는 매일 한 번씩 자신과 꼭 닮은 남자를 예리한 단도로 찌르고, 스무 군데쯤 찔리자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시체를 불에 태워 없앤다. 남자배우가 K시까지 올 수 없다하여 팀장과 기정이 드라마 촬영장소까지 갔다. 촬영이 끝난 남자배우의 얼굴을 팀장이 카메라로 수십 장 찍었고, 남자배우의 형체를 실리콘으로 그대로 본떴다. 석고로 외형 틀을 만들어 작업실로 가져왔다. 외형 틀을 반으로 분리하여 그 안에 실리콘을 부었다. 틀을 비틀어 떼어내 더미를 빼냈다. 팀장이 얼굴사진과 비교해가며 세밀화 작업에 들어갔다.

며칠째 내내 흐리기만 하던 하늘에서 기어이 눈발이 떨어졌다. 나와, 점심이나 함께 먹게. 기정은 눈 내리는 창밖을 보며 어디 갈 데가 있다고 했다. 또 눈 보러 가느냐고 팀장은 물었고, 잘 다녀오라며 전화를 끊었다. 팀장은 토요일인데도 작업 중이었다. 기정은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잔디밭 위를 말티즈가 뛰어다녔다. 눈밭에 찍힌 말티즈의 발자국이 앙증스러웠다. 눈이 오면 개들이 좋아서 팔짝팔짝 뛰어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개들이 발이 시려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라고 한다. 말티즈가 잔디밭 울타리 구실을 하는 피라칸사스의 빨간 열매에 코를 가져다댔다. 주인인 듯한 여자가 그거 못 먹는 거야, 라고 소리쳤다. 코를 뗀 말티즈가 갑자기 으르렁거렸다. 기정이 살펴보니 가시나무 가지로 도망쳐 올라간 고양이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덩치가 커도 고양이는 개를 이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파트 정문에서 택시를 타고 간 기정은 사거리에서 내렸다. 눈은 점점 굵어지고, 눈밭은 점점 두꺼워졌다. 노란제복을 입은 자동로봇이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석유를 실은 수송차량들이 석유저장소 앞을 느리게 지나다녔다. 성당 안의 잔디밭에도 눈이 두툼하게 쌓여 있었다. 본당의 지붕 위에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예수의 어깨도 눈 더미로 도톰했다. 공무원연수원의 빈 광장에도 눈이 소도록하게 쌓여 있었다. 그곳의 화단에도 피라칸사스의 빨간 열매가 선명했다. 샛길에 들어선 기정은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샛길을 차근차근 덮어와 등 뒤에서 자신을 지워버릴 것 같았다. 샛길 끝으로 보이는 숲 한 자락을 보자 뜬금없이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싫고 나쁜 예감이었다. 나쁜 예감일수록 적중률은 100%에 가까웠다.

눈은 멎었다. 숲을 오르던 기정은 숨이 차올라 소나무에 기대 잠시 숨을 골랐다. 소나무의 투박한 껍질이 잠시 등에 닿았다. 버팀목이 든든하게 받쳐주는 느낌이었다. 내 버팀목은 묘지에 누운 그인가, 기정의 입술이 약간 뒤틀렸다. 몇 발짝 더 올라가자 풀밭에 베어놓은 소나무 토막들이 보였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토막들은 곧 나무꾼이 지고 내려갈 것처럼 보였다. 저 나무를 가져다 무엇인가 만들고 싶어졌다. 사람의 형상을 하나 빚고 싶었다. 자신을 지켜줄 손이 튼튼한 남자를 만들고 싶어졌다. 숨이 가지런히 골라지자 기정은 다시 걸어 올라갔다. 앞면 역할을 하던 커다란 바위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거칠고 딱딱한 느낌이었으나 그것만이 아닌 성스러운 감정이 어김없이 차올랐다. 숲 안으로 깊이 들어가자 눈 벽에 갇힌 것처럼 조용하고 편안했다. 마음을 놓아도 되었다. 그렇게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디선가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늑대가 나타나 자신을 피투성이로 만들어놓아도 좋을 것 같았다. 눈 덮인 숲속은 깊고, 넓었다. 아주머니는 지오와 잘 지내는지 요즈음은 기정을 찾지 않았다. 지오의 내면기록을 본 그날 아주머니는 욕실에 있다고 소리쳤다. 기정은 자신도 모르게 욕실 문을 열었다. 좋은 사람과 마음 놓고 통화하라고 욕실에서 샤워를 좀 했다고 하는 아주머니의 알몸을 보고 말았다. 상아빛에 가까운 피부와 군살하나 붙지 않은 매끈한 몸매도 그렇지만 남자를 겪지 않아 아직도 선홍빛인 작은 젖꼭지에 기정은 살짝 충격을 받았다. 66살에도 원형 그대로인 젖꼭지를 가지고 있다니. 그 젖꼭지에 팥죽색을 넓게 칠해 주고 싶었다. 오르막길을 막 빠져나오자 눈밭 속으로 발이 푹 빠졌다. 돌멩이를 밟았는데 그만 비틀거렸다. 얼른 소나무 줄기를 붙들었다. 상수리나무 줄기를 타고 오르던 청설모가 몸뚱이를 움츠리며 기정과 눈을 마주쳤다. 안녕, 하고 기정은 손을 흔들었다. 청설모는 쏜살같이 위로 올라가버렸다. 나뭇가지에 있던 눈이 풀썩풀썩 떨어졌다. 다시 올라갔다. 무엇인가가 허공으로 푸르르 날아올랐다. 기정은 놀라 그곳을 보았다. 꿩이 소나무 사이의 희고 푸른 공간 속을 날아가고 있었다. 저번의 그 놈일까. 꿩이 앉았던 낙엽더미 속을 살펴보았다. 어른 주먹만 한 돌멩이 두 개를 꿩이 품고 있은 듯했다. 손을 대면 따뜻할 것 같았다. 저 꿩은 왜 새끼가 부화하지 않을까하는 의심도 하지 못할까. 그러니까 동물인가. 위로 올라갈수록 줄기가 두 개인 쌍소나무가 많이 보였다. 갈라진 두 줄기는 신기하게도 굵기가 똑같고 모양도 똑같았다. 한 나무에 줄기가 두 개인 것이 쌍둥이처럼 보이지 않고 암소나무 수소나무가 얼크러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숲이 뒤흔들렸다. 풀 더미가 흔들리고, 눈이 확 흩어졌다. 놀라 기정은 사방을 휙휙 돌아보았다. 털이 잿빛인 멧토끼가 소나무 사이로 지그재그로 폴짝폴짝 뛰어가고 있었다. 기정은 저 멧토끼를 잡고 싶었다. 잡아다 완이에게 주고 싶었다. 귀가 엄청 밝은 멧토끼는 기정의 기척에 잠시 옆을 돌아보는 듯도 했으나 순식간에 더 잽싸게 달아나버렸다. 커다란 귀 안쪽에 잎맥처럼 져 있던 붉은 핏줄이 잠시 기정의 눈에 남았다.

일요일 날 완이와 팀장은 죽은 토끼를 아파트 뒤의 야산에 묻어주었다. 팀장은 이참에 빨간 가방도 묻어주자고 완이를 어르고 꼬드겼으나 완이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 야산에서 한 오십대쯤 된 여자가 제법 도도록한 흙더미 앞에서 소주를 홀짝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여자는 십오 년을 끌어안고 산 개가 죽자 야산에 묻어주고는 비가 오거나 마음이 울적하면 개 무덤을 찾는다고 했다. 완이에게도 자주 토끼 무덤에 오라고 했다. 그 여자 당부 때문인지 완이는 두 번쯤 토끼 무덤에 가더니 산에 가면 무섭고 외롭다면서 발길을 끊었다. 그러더니 다시 빨간 가방을 들고 다녔다. 팀장이 미국너구리를 사다줄까, 하고 물으면 이제 생명이 있는 것은 싫다고 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자기를 떠나버린다고 했다. 팀장은 빨간 가방에 더 집착하는 게 너무 보기 싫다고 했다. 완이가 잠을 잘 때 가방을 잘라버리려고 가위를 들었다가도 도로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며 한숨지었다.

숲을 반쯤 올라온 기정은 소나무 사이로 나무십자가를 찾았다. 흰 페인트칠을 한 나무십자가가 이정표처럼 기정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나무십자가 앞에 서자 헝클어져 있던 것들이 가지런하게 모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묘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손을 뻗어 검은 대리석을 쓰다듬었다. 눈과 대리석의 차가움이 그대로 손끝에 전해졌다. 잘 있었어, 춥지는 않지. 기정은 팔을 뻗어 묘지를 힘껏 끌어안았다. 묘지는 맞춤 맞게 품에 안겼다. 이제 눈은 안 와. 진달래꽃이 피면 다시 올게. 거칠고 둔탁한 발소리에 기정은 상체를 들고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았다. 언제가 샛길에서 본 외국남자와 청년이 무슨 말인가 열심히 나누며 묘지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석공처럼 보이는 중년사내도 뒤따라왔다. 위쪽이나 옆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나무십자가가 있는 묘지로 왔다. 기정은 묘지 옆에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외국남자는 기정에게 눈으로 누구냐고 묻고는 지휘봉으로 묘지 옆의 빈 땅에 직사각형을 그리며 뭐라고 했다. 다시 힐끗 기정을 본 외국남자가 청년에게 뭐라고 했다. 통역가인 청년이 기정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네? 여긴 제 애인 묘지예요.”

청년은 지도를 보며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외국남자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청년이 외국남자에게 뭐라고 하자 외국남자도 지도를 들여다보며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제 애인 묘지인데요.”

외국남자와 청년은 위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묘지를 잘못 아는 것 아닌가요?”

“아니에요.”

기정은 소리쳤다.

“이 묘지에는 선교사인 안토니오 공베르 신부가 잠들어 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오신 선교사님의 유해도 이쪽으로 옮기고 다시 단장할 것입니다.”

청년의 말이 끝나자 외국남자는 기정의 눈앞에 지도를 펼쳐 보이더니 동그라미를 쳐놓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보였다. 석공처럼 보이는 중년사내가 찌그러진 눈두덩을 씰룩대며 기정을 불쾌하게 바라보았다. 기정은 돌아섰다.

기정은 숲을 내려왔다. 눈 위에서 종종거리던 청설모가 동작을 멈추고 모형처럼 가만히 있었다. 때론 가짜라도 필요하잖아. 기정은 안녕, 이라고 손을 흔들지 않았다. 저 청설모는 나를 혹 하나의 나무로 여기는 걸까. 청설모는 잽싸게 기정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풀 더미가 갈라지더니 꿩이 후닥닥 날아올랐다. 꿩이 앉았던 자리에는 따뜻할 것 같은 돌멩이 두 개가 놓여 있을 것이다. 아무리 오랫동안 품어도 새끼는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하지. 기정은 돌멩이를 새끼라고 품고 있는 꿩이나 자신이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뭇가지를 하나 꺾었다. 눈이 확 쏟아졌다. 꿩을 향해 나뭇가지를 던졌다. 나뭇가지는 기정의 코앞에 떨어졌다. 일 년 전 그날도 눈이 내렸고, 온 천지는 눈으로 덮여있었다. 어머니를 보내고 혼자 남겨진 기정은 견딜 수 없어 숲으로 갔다. 눈 쌓인 숲속을 걸어 올라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기정은 아무 곳으로나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추락사한다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숨은 벽이 나타나 자신을 꿀꺽 삼켜버려도 좋을 것 같았다. 빙산을 오르는 사람은 눈 속으로 사라지고 싶은 욕구와도 싸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나무십자가가 이정표처럼, 표식처럼 시선을 잡아끌었다. 기정은 나무십자가를 향해 다가갔다. 나무십자가 아래에는 검은 대리석 묘지가 있었는데 묘비도 없고 그 옆은 맨땅이었다. 버려진 묘지라기보다 완성이 덜 된 묘지였다. 대리석 묘지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니까 돌과 황토뿐인 산이나 다 타버린 잿더미나 버려진 폐허를 볼 때처럼 두려움이 물러가고 긴장이 풀어지면서 마음이 없는 것처럼 편안해졌다. 즐거운 묘지라는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 뒤로 숲을 올랐고, 나무십자가를 찾았고, 묘지 옆에 앉았다. 너무 조용하고 편안한 것이 두려워 대리석 묘지를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은 것은 한 달 후쯤이었다. 잘 있었어, 춥지는 않지. 그 말에 기정은 놀랐다. 그러나 그를 묘지에 묻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은 견딜 수 없으니까.

소파 위에서 개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가끔 신음소리를 내지르던 기정은 눈을 떴다. 거실은 껌껌했으나 밖에는 햇빛이 내리쬐고 있는지 투명하고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밤새 잠들지 못하다가 새벽에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었었다. 유리탁자 위에는 빈 와인병과 오르골이 놓여 있었다. 유리탁자 앞으로 기어가 채를 들어 오르골을 탁 때렸다. 풍성한 치마를 입은 여자가 빙그르르 돌자 여자 속에 남자가 있는 것처럼 여성남성 이중창이 흘러나왔다. 일어나 커튼을 걷고 베란다로 나갔다. 블라인드를 걷자 햇살이 확 밀려들어왔다.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은 희게, 투명하게 빛났다. 흰 도색을 한 것처럼 반질거리는 곳도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 넓어보였다. 자신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아주머니가 앞에 있다면 또다시 두 손으로 밀어버릴지도 몰랐다. 기정은 겁이 났다. 목이 말랐다. 거실로 들어와 냉장고에서 생수 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갑자기 밖이 시끄러웠다. 기정은 베란다로 뛰어나갔다. 무슨 일일까. 이상한 전율이 몸을 예리하게 훑고 지나갔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덜덜 떨고 있는 손을 낯설게 내려다보았다. 베란다 밖으로 몸을 내밀고 밖을 보았다. 너무 희어서 눈이 부신 강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몸을 더 깊숙이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어떤 예감이 몸을 짝 쪼개듯 한 줄기로 지나갔다.

화단에 한 여인이 스토로브잣나무 줄기를 반으로 부러뜨린 채 엎어져 있었다. 여인의 몸뚱이는 눈 덮인 화단을 짓뭉개놓았다. 몸뚱이 밑은 거칠게 파헤쳐져 있었다. 여인의 맨발 끝에 있는 피라칸사스의 붉은 열매가 지나치게 붉었다. 반쪽만 드러난 얼굴을 들여다본 기정은 풀썩 무너졌다. 누가, 누가 밀었을까. 새파랗게 질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정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왜 아가씨 아는 사람이야?”

“혹 어머니이셔?”

“남편하고 싸웠나? 아님 몹쓸 병이라도 걸렸었나?”

“이 아파트에서 벌써 세 번째야.”

“15층에 혼자 사는 사모님이야. 생전 경로당에도 오지 않고 사람들하고도 친하지 않더니. 여기 사는 노인들과는 수준차이가 나서 못 논다고 하더니.”

“경애 엄마,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저 사모님은 아직 칠십도 안됐는데 경로당에는 왜 가?”

“경로당은 칠십 넘어야 가야 되는 법이라도 있어.”

경비는 무전기로 계속 무슨 말인가를 했다. 앰뷸런스 차가 달려왔다. 아주머니를 실은 앰뷸런스가 떠나고 나자 기정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으로 갔다. 닫혀 있을 거지만 손이 문을 힘껏 당겼다. 문은 닫혀 있지 않았다. 누군가 있을 것 같아 기정은 거실로 뛰어 들어갔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베란다로 나갔다. 지오가 뒷목에 칼이라도 맞은 것처럼 암키와와 수키와를 뭉개고 엎어져 있었다. 소파 앞의 탁자에는 새로 쓴 유서가 놓여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생활은 바뀌지 않는다. 선혜림. 기정은 거실바닥에 털버덕 주저앉았다. 아주머니는 지오랑 벌이는 인형놀이에 싫증을 느끼자 주저 없이 뛰어내렸다. 아주머니는 죽을 때도 이기적이었다. 기정은 베란다로 나가 지오의 텐션 줄을 잡아채 일으켜 세웠다. 지오를 안고 나와 비상계단을 내려왔다. 집으로 들어오자 지오를 입구에 내려놓고 싱크대를 뒤져 소주병을 찾아냈다. 단숨에 한 병을 마시고 쓰러졌다.

여기가 어딜까. 기정은 깜깜한 어둠 속에 내팽개쳐 있는 몸뚱어리를 낯설게 내려다보았다. 여기가 어딘지 모를 때만큼 막막하고 서럽고 두려운 것도 없었다. 둘레둘레 사방을 살폈다. 소파 위라는 것을 알기도 전에 딱따구리가 쪼는 것처럼 머리가 아파 두 손으로 머리통을 조였다. 엉금엉금 기어가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가 나오는 채널에 맞추어놓고 유리탁자로 다시 엉금엉금 기어왔다. 채를 들어 오르골을 딱 때렸다. 풍성한 치마를 입은 여자가 빙그르르 돌자 여자 속에 남자가 있는 것처럼 여성남성 이중창이 흘러나왔다. 듣기 싫었다. 그래도 채는 마구 오르골을 때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채가 오르골 여자 코 위에서 멈추었다.

오늘 오전 열한 시 경에 명문대 출신의 상류층 할머니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십오 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생활은 바뀌지 않는다, 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기정은 벌떡 일어섰다.

 

“난 아주머니와 말을 한 적도 없어.”

기정은 지오에게로 갔다. 지오의 텐션 줄을 끌었다.

“난 어떡해야 돼? 이제 묘지에 누워 있지 말고, 나랑 살래?”

 

나의 플라모델                       - 김 휘

 

 

 

 

1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언성을 높여 다시 말했다.

 

“아저씨 여기 이렇게 계시면 안됩네다. 나가시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웃는 것도 화난 것도 아닌, 플라 모델을 보던 멍한 시선을 내게 주었다. 나는 훈김을 쏘인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볼은 오목하게 패였고 눈은 퀭했다. 정신이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술에 취해 표정이 풀어진 탓일까. 그렇게 보기에도 어딘지 모르게 끈끈하게 잡아당기는 구석이 있었다. 남자가 쇼윈도 유리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선 조금 전부터 내 시선은 흔들렸다.

 

처음부터 보려고 한 건 아니었다. 유리에 달라붙은 나방을 보듯 남자의 몰골에 절로 시선이 갔을 뿐이었다. 초가을 날씨에 두툼한 방한복이라니. 방한복 군데군데 터진 틈으로 비죽 나온 누런 솜과 손에 그러쥔 연녹색 소주병은 더 가관이었다. 쇼윈도를 밝힌 조명을 좇아 파닥이는, 통유리 밖의 나방이 연상될 정도였다. 이를테면 누에고치 같은 가는 몸통에 연두색 날개가 달린 나방이나 누런 똥 색 날개가 있는 나방 말이다. 박자가 맞으려는지 쇼윈도 유리에 붙은 남자의 얼굴도 딱 누런 똥 색이었다.

 

쇼윈도에는 항공모함, 장갑차, 전투기 따위의 플라 모델들이 진열되어 있다. 남자는 그중에 어떤 것을 보았을까. 얼핏 전투기가 있는 곳에 시선이 가 있는 것 같긴 했다. 남자 뒤로는 긴소매 티셔츠나 얇은 재킷 따위를 입은 행인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윽고 남자가 천천히 몸을 움직이더니 유리문을 밀고 들어왔다.

 

“또 왔네.”

 

남자를 보자 계산대에 앉은 사모님이 인상을 찌푸렸다. 손님들도 눈을 힐끔거렸다. 그러자 손님 옆에 서서 제품설명 중이던 창용이 이를 엇물었다. 내게 턱짓을 했지만 나더러 어쩌라는 건지 나는 멍했다. 남자가 구석 쪽에 있는 할인가 품목진열대 앞에 가 멈춰 섰다. 그때까지도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부근에 서 있던 손님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나갔다. 사모님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며칠 전 진열장에 물건이 없어졌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사모님은 나와 창용에게 쓴 소리를 했다. 사람들에 가리면 감시카메라가 있어도 소용없다며 잘 지켜봐야 한다는 거였다. 그런 일이 있어선지 사모님은 화난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저런 놈이 자꾸 들락거리니 가게 물건이 한두 개씩 없어지지.”

 

창용은 슬쩍 사모님의 표정을 살피며 지겹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플라 모델의 제품의 진열상태를 확인하던 나는 창용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 사람 뭐이가?”

 

“아, 저 나발쟁이. 처음엔 유리문 앞에 코 처박고 몇 분 동안 서 있다 가더니 이젠 아예 가게로 들어와 한참을 저러다 간다. 냄새가 지랄 같아서 난 가까이 가기도 싫어. 야, 종안이 네가 어떻게 좀 해봐.”

 

창용이가 내 등을 확 떠밀었다. 두세 걸음 떠밀린 나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냄새가 고약해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들어온 지 보름밖에 안 된 초짜인 게 죄라면 죄였다.

 

코를 잡아 쥔 손님들의 눈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나가달라는 말 고저 안 들립네까?”

 

꿈쩍도 하지 않는 남자를 향해 나는 한 번 더 세게 말했다. 착각이었을까. 순간 내게 말을 걸 것 같은 표정이 남자의 얼굴에 일어섰다 사그라졌다. 남자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유리문을 밀고 나갔다. 나는 대단한 임무라도 수행한 듯해 어깨를 으쓱했다.

 

가게 안은 다시 평온해졌다.

 

내가 일하는 플라 드림은 삼 층짜리 건물 일 층에 있다. 가장 번화한 삼거리 대로변 정 중앙에 있는 건물이다. 이 층과 삼 층에는 핸드폰, 컴퓨터에서부터 최신식 가전제품을 파는 전자랜드가, 아래 일 층에는 나이키, 퓨마 같은 스포츠용품 브랜드가 모여 있는 대형매장이 있다. 그 같은 층에 플라 모델을 파는 플라 드림이 있다. 플라 모델 상자 안에는 실제 모습과 똑같은 축소 모형을 만들 수 있는 플라스틱 조각부품들이 들어 있다. 조립하면 캐릭터 인형이나 로봇이 되는 것도 있고 또 어떤 것들은 집과 마을로 탄생하기도 한다. 완성된 것들 앞에 서면 마치 내가 거인이라도 된 기분이 든다.

 

플라 드림에서 인기품목을 꼽는다면 단연 전쟁에 동원되었던 병기들이다. 꼭 내가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런 품목에 관심 있는 남자손님이 많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전투기, 장갑차 같은 것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보면 순간 강해지는 묘한 기분이 든다. 지나가던 남자들이 쇼윈도에 진열된 플라 모델들을 슥 보기만 해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데도 다 그런 까닭일터다.

 

통유리 밖에서 머뭇대다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 그들 중에는 플라 모델 초보자도 있고, 단지 구경할 요량인 치도 있지만 마니아를 자처하는 이가 다수이다. 플라 모델 마니아는 여느 마니아들이 그렇듯 가격 따위를 고민하지 않는다. 입고된 모델 정보를 이메일로 뿌리자마자 금세 동나는 건 그런 마니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건을 놓칠세라 경쟁이라도 하듯 서둘러 가게에 온다. 우리 반 필록이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새 모델이 들어오면 주저 없이 지갑을 열었다. 플라 드림에는 필록이 같이 주머니 두둑한 아이들 손님이 많다. 나는 일하면서 내 또래의 아이들이 가격에 개의치 않고 원하는 모델을 사들고 나가는 걸 매일 보고는 했다.

 

아이들은 등하교 때마다 쇼윈도를 기웃댔다. 우리 반만 해도 플라 모델에 미친놈들이 수두룩하다. 어느 한 놈이 새로 산 모델을 자랑하면 녀석들은 부러워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녀석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던 것도 내가 플라 드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나를 탈북자라고 놀려대기만 하던 녀석들이었는데 플라 드림에서 일하는 걸 알고부터 태도가 달라졌다. 녀석들이 입고나 모델 정보를 얻으려고 말을 걸어왔을 뿐이었는데도 나는 뭐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창용에게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북한 억양으로 떠듬대는 나와 달리 창용의 설명은 유연하다. 귀에 쏙쏙 박힐 정도여서 학교 아이들이건 매장 손님들이건 창용에게 들러붙는다. 오늘도 문 닫을 시간이 다 되도록 나는 낮에 비렁뱅이 내쫓은 일 말고는 손님을 제대로 응대해보지 못했다. 어눌한 말씨에 북한 억양까지 튀어나오면 사람들은 고개 돌려 나를 한 번 더 봤다. 그때마다 나는 내 입에서 악취가 나서 그런 것처럼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정말이지 북한 억양을 확 지워버릴 수는 없을까. 라디오나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따라해 보기도 했다. 뉴스를 보도하는 앵커의 입 모양을 흉내 내 보았고 흔히 유행어를 만든다는 연예인들이 오락프로에서 하는 말을 중얼거려도 보았다. 생각만큼 억양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플라 드림에서 일하고 있다. 고향 빵집 할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자리였다.

 

할아버지가 나를 플라 드림 사모님한테 소개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절친한 벗이었다는 인연으로 사모님은 고향 빵집 할아버지를 평소 ‘아버님’이라고 불렀다. 고향 빵집 할아버지가 부탁하는 거라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사장님은 아르바이트생으로 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탈북자에다 말까지 어눌해서 어디 써먹겠느냐고 내 앞에서 노골적으로 꼬투리를 잡았다. 하지만, 나를 쓰겠다고 밀어붙이는 사모님의 목소리가 더 컸다. 사장님은 더는 반대하지 못했다. 사장님의 못마땅해 하는 시선 때문에 첫 출근 때부터 주눅이 들긴 했다. 그래도 그런 건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해결될 것이기 때문에 문제 될 건 없었다. 북한 억양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노력하면 될 것이고, 손님들이 지갑을 열도록, 기왕이면 비싼 물건을 사도록 유도하는 요령을 배워나가면 될 것이다.

 

“종안이 녀석 일은 잘하나?”

 

어제 가게 앞에서 할아버지가 사모님에게 물었다. 사모님이 성실해요, 하고 대답했다.

 

“너 수영 형 말도 잘 듣고 있지?”

 

사모님 옆에 선 나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고 녀석, 하고 웃었다. 그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보자 내 안에 온기가 천천히 퍼졌다.

 

할아버지는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사실 그 도움은 수영 형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나를 단지 고향이 같다는 이유로 떠맡기엔 수영 형의 처지는 썩 좋지 않았다. 원하는 회사마다 미끄러졌다. 좋아 지내던 누나와 헤어진 뒤로는 얼굴에 표정이 아예 사라졌다. 그런 형에게 나는 뻣뻣하게 굴었다. 아무리 되는 일이 없기로 사사건건 퍼부어대는 형의 잔소리는 듣기 싫었다. 형은 툭하면“너 그런 식으로 굴면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어”라는 소리를 했다. 제멋대로 군다며 가르치려 들었다. 언젠가 형과 나는 쌓인 감정이 폭발해 씩씩대며 길에서 거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때 할아버지가 지나가다 지켜보았는지 다가와 “이 녀석 형한테 그러면 못써”하며 끼어들었다. 나는 형에게 눈을 흘기며 입을 다물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수영 형을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았었다.

 

“나 이거랑 이거.”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 엄마 손을 잡아끌며 들어온 꼬마가 진열대 중앙을 가리켰다.

 

“하나만 골라.”

 

손지갑을 든 아이 엄마는 새된 소리로 말했다. 꼬마가 가리키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는 두 개를 합해 만원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창용을 쳐다보았다. 녀석은 창고 안에서 핸드폰 문자 찍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사모님은 계산대에서 수화기를 든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 엄마에게 다가갔다.

 

“두 개 다 비싼 거이 아니니까 오마님 두 개 사주시오.”

 

아이 엄마는 나를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북한 억양에 저런 식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심심찮게 보아온 터여서 나는 무조건 미소로 대응했다. 플라 모델은 아이의 두뇌발달에 좋다고도 덧붙였다. 아이 엄마의 경직된 얼굴이 풀어졌다. 내 표정이 어쩌면 비굴하고 불쌍하게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성공이었다. 아이 엄마는 계산대로 가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두 가지 모두 싸달라고 말했다. 사모님이 영수증을 뽑으며 웃는 낯으로 나를 건너다보았다. 나는 유리문을 밀고 나가는 모자에게 허리 꺾어 인사했다. 손님을 혼자 상대해 물건을 판 건 처음이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바닥을 청소하거나 진열대를 정리하고 쇼윈도에 전시용 플라 모델의 진열 위치를 가끔씩 바꿔주는 게 고작이었다. 하루 마무리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사모님이 현금 서랍을 잠그며 계산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문 닫을 준비하자, 하고 한마디 하자 창용이가 창고 문을 닫으며 나를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야, 문 걸어 잠그고 어서 셔터부터 내려버려!.”

 

녀석은 늘 내게 명령조다. 일하는 시간은 같지만 자기가 상사쯤 된다고 생각하는지 나에게 함부로 대했다. 속이 뒤틀려 주먹이라도 한 방 날려주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할아버지를 생각해서 꾹 참았다. 할아버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할아버지가 뜻밖에 그 남자와 함께 서 있었다. 며칠 뒤 학교 수업을 파하고 골목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길이었다.

 

고향 빵집 앞에서 남자는 할아버지가 내미는 빵을 건네받고 있었다. 여전히 한 손엔 소주병을 들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남자는 늘 소주병을 들고 다니면서 병째 나발을 분다고 동네에선 나발 아저씨 혹은 나발쟁이로 통했다. 나발 아저씨는 언제부터 저런 모습으로 이 동네에 흘러들었을까. 걸러질 뿐 스며들지 못한다는 건 얼마나 추운 일인가. 나도 모르게 나는 나발 아저씨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에 붙들렸다.

 

나발 아저씨는 방향을 틀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길 건너 공원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그 뒷모습을 우두커니 시선으로 좇았다.

 

 

 

2

 

 

“나 블랙 나이트 에프십사 땡겼다.”

 

첫 교시가 끝난 뒤 화장실 창문 가에 선 필록이가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좋겠다. 조립 다했냐? 씨팔 나도 사고 싶었는데 가격이 너무 빡세.”

 

줄줄이 서서 담배를 돌려 피우던 녀석들 중 하나가 툴툴댔다. 플라 드림에 이틀에 한번 꼴로 오는 녀석이었다. 와선 플라 모델 상자를 만지작대며 군침만 삼키다 갔다. 사모님이 계산대에 버티고 있을 때는 겨우 삼천 원짜리 플라 모델을 집어들고 지갑을 열었다. 주머니 사정이 달랑한 그런 녀석에게 블랙 나이트 에프십사는 엄두도 못 낼 고가의 모델이었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던 창용이가 거울을 보며 목소리에 힘주어 말했다.

 

“가격은 세지만 벌써 딱 세 개밖에 안 남았다 쨔샤. 일본에서 소량 들여온 거라 입고안내 메일 뿌리니까 이틀 만에 거진 다 나갔거든. 필록이가 열여덟 번째로 사갔지. 빨리 안 오면 그거 구경도 못하니까 알아서들 해. 아 그리고 이번 리스트에서 타미야제 미쓰비시 에이식스엠투제로 말이야. 그건 앞으로는 입고계획이 없는 모델이라 이번 기회 놓치면 구하기 어려울 거다. 우리 대머리 사장이 그러더라. 야, 종안아 너도 들었지, 그지? ”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창용의 말에 맞장구 쳐주었다. 담배를 피우던 녀석들 중 다른 하나가 창용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와, 그 진주만 공격에서 이름 떨쳤던 그 전투기? 모델 사진 보니까 영화에서 본거랑 똑같더라. 짱 나게 멋있겠다.”

 

“물론이지. 이번에 안 사면 후회할걸. 너희한테만 알려주는 거다.”

 

창용은 대단한 정보를 살짝 알려준다는 듯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은 눈을 반짝였다. 어떤 녀석들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하긴 창용이가 흘려주는 플라 모델 입고정보는 주머니 두둑한 마니아가 아니면 생각도 못할 수준이었다. 그래도 창용이가 은밀한 목소리로 정보를 흘린 날은 효과는 직방이었다.

 

이틀 전만 해도 창용에게서 정보를 들은 아이들이 하교하자마자 가게에 나타났다. 상자를 집어든 녀석에게 창용은 영수증을 뽑으며 말했다.

 

“너 진짜 운 좋은 거야. 이거 하나 남은 거거든.”

 

녀석의 얼굴에 하마터면 못 살 뻔했다는 안도의 미소가 스쳤다. 창용은 녀석이 나가자 빈자리에 같은 모델을 채워 넣으며 나를 향해 씩 웃었다. 창용의 거짓말은 퍽 자연스럽다. 그건 내가 아직 갖추지 못한 수완이었다. 아이들의 구매 욕구에 불을 지르는 묘한 화술, 신모델을 안 사면 친구들과 대화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 유도. 나는 창용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담배 한 개비를 입술에 꽂으며 창용이가 말했다.

 

“야, 필록. 너 지난주에 사간 더글라스 에프삼오 스카이레이 조립 다 끝났냐? 조립 다했으면 그거 애들 좀 구경시켜 주라.”

 

“알았어. 그러지 뭐. 너희 놀랄 거다. 환상이야 환상. 안 그래도 내일 우리 플라 모델 동호회 모임이 있거든. 야, 너희도 얼마 전에 조립한 경주 카 갖고 나와.”

 

필록은 앞에 서 있는 녀석들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오, 그렇구나.”

 

창용은 아이들 앞에서 엄지손가락을 곧게 세워 보이며 필록을 두둔했다. 필록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여유롭게 웃었다. 값비싼 플라 모델만 사가는 필록은 길 건너 주유소 사장 아들이다. 창용의 말마따나 브이아이피 고객이었다. 고객관리가 별거냐 비싼 고객을 우쭐하게 해주는 게 고객관리지, 하고 언젠가 창용이가 내뱉던 말이 떠올랐다. 마냥 웃고 있는 필록을 보며 나는 속으로 ‘그렇지 고객관리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 부부는 창용을 신뢰했다. 오늘만 해도 학교 대청소 때문에 지각한 건 마찬가지인데 사장님은 나에게만 잔소리를 쏘아댔다. 나는 너무 불공평하다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런데 정작 투덜대야 할 나도 참고 있는데 사장 부부가 보지 않는 틈틈이 창용이가 툴툴거리고 있었다. 상자를 정리하다가도 창고 문틈 쪽을 향해 비웃는 시선을 겨누기까지 했다. 정리하던 상자에 붙은 박스 테이프를 손끝으로 얇게 찢으며 중얼거렸다.

 

“에이 씨팔, 이게 다 누구 때문에 장사가 잘되는 건데. 회사 같은 데선 능력별 건수별로 인센티븐가 뭔가 준다는데, 난 뭐냐고. 내가 고등학생이라고 그냥 막 넘어가고 있어.”

 

창용이가 투덜대는 소리를 처음 듣는 건 아니었다. 사실 플라 드림의 매출을 확 올릴 수 있었던 건 내가 봐도 창용이가 요리조리 수완을 발휘한 덕이었다. 교내 플라 모델 동호회를 주도해서 마니아층을 다졌고, 그 애들을 중심으로 고객층도 늘렸다. 구경할 요량으로 가게에 들어온 손님도 놓치지 않고 지갑을 열게 했다. 그런 창용의 수완에 나는 여러 번 입을 떡 벌리며 부러워했다.

 

나는 창용의 목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문을 잡아당겼다. 창고 문틈으로 가게 안을 힐끔거렸다. 사모님의 고압적인 말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누구를 찾으시죠? … 성함을 말씀하셔야죠 … 네? … 무슨 일로 전화하신 거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사모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창고에서 뛰어나갔다. 잔뜩 굳은 표정을 한 사모님이 소리쳤다.

 

“얼른 가서 아저씨한테 전화 받으시라고 해라.”

 

나는 유리문을 밀고 나갔다. 습관처럼 나는 부동산 소개소 출입문 앞에 다다랐다. 가게에 없다 싶으면 플라 드림 옆 건물 일 층에 있는 미래부동산에 가보면 되었다. 사장님은 동년배인 미래부동산 이 씨와 바둑을 두며 어울렸으므로 다른 데 있나 기웃거릴 필요가 없었다. 파란색 셀로판지가 가로로 띄엄띄엄 붙은 사이로 내부가 들여다보였다. 벽에는 동네를 축약해놓은 지도가, 그 밑으로 주택, 오피스텔, 아파트, 상가 별 매물가가 인쇄된 종이들이 줄지어 붙어있었다. 세 사람이 탁자를 가운데 두고 갈색 가죽소파에 깊숙이 상체를 파묻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뿌연 담배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금 열린 문틈으로 대화가 흘러나왔고, 재개발 어쩌고 하는 말이 여러 번 들렸다.

 

“공원 후문 쪽 야산 아래 그 일대 말인가?”

 

“그렇다니까. 지금 한창 추진 중인데 뭐 쉽지는 않은 모양이더라고. 보상금문제도 잡음이 많고 게다가 딱 절묘한 위치에 오래전부터 버려진 집이 하나 있는데 그게 골치야.”

 

“소유주가 없나? 없으면…어, 종안이 왜?”

 

나는 문을 반쯤 열어 고개만 들이밀었다. 대화 중간에 끼어든 것을 어색해하며 사장님에게 전화 왔다는 말을 전했다. 사장님은 하던 말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미안하다는 손짓을 하고는 유리문을 밀고 나왔다.

 

송수화기를 받아든 사장님은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사모님이 전화기 앞에 팔짱을 끼고 선 채 사장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장님은 귀밑까지 붉어져서는 수화기에 입술을 대고 겨우 네 네, 하며 힘겨운 통화를 했다. 사장 부부 사이에 서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하던 일이 있는 척하며 얼른 창고로 들어갔다. 상자를 정리하던 창용이 나를 보고는 사장 새끼 딱 걸린 모양이군, 하며 키득거렸다. 재미있다는 듯 플라 모델 상자 두 개를 양손에 들고 비행기가 충돌하는 장면을 만들어 보였다. 입에서는 폭발음을 흉내 낸 위잉--- 꽝, 하는 소리가 웃음소리와 섞여 나왔다.

 

 

“위잉---.”

 

공원 위로 모형비행기가 허공을 갈랐다. 아이들이 공중에 시선을 던지며 와와, 소리를 질렀다. 산책 나온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고 아이들 무리에 섞여들었다. 크기만 작을 뿐 실제의 모습과 똑같은 비행기가 머리 위를 오락가락하는 게 퍽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아지 목줄을 쥔 운동복 차림의 어떤 아줌마는 정말 시원하게 나네, 했고, 지팡이를 쥔 어떤 노인은 중절모를 벗어들고 조그만 게 제법 나네, 하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하나같이 눈요깃감을 만났다는 표정이었다.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갖고 싶어 미치겠다는 얼굴들이었다. 공터의 다른 한쪽에도 질주하는 무선 경주 카를 보려는 사람들이 둥그렇게 띠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은 시선과 환호는 하늘을 향했다.

 

필록은 두 손안에 리모컨을 쥐고 허공에 비행체를 움직였다. 비행체는 넓게 곡선을 그리며 높이 올랐다가 내려오는 식으로 수직선회를 했다. 선회성능은 곡예를 선보이듯 매끄러웠다. 연속해서 삼 회 선회를 하며 원을 그릴 때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필록의 표정은 더글라스 에프삼오 스카이레이만큼이나 붕붕 떠 있었다. 나는 비행기의 움직임을 따라 쳐든 고개를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시선을 뗄 줄 몰랐다. 잠깐이지만 플라 모델 동호회에 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동호회 아이들처럼 고가의 플라 모델을 사 모으며 나도 마니아라고 과시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나는 공중을 가르는 무선모형비행기에 멍하니 시선을 걸쳐나 볼 뿐이었다.

 

비행기를 따라가던 내 시선이 순간 멈추었다. 눈에 나발 아저씨가 들어왔다. 멀찍이 벤치에 앉아 소주병을 입에 꽂은 채 비행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고 먼 무언가를 향한 듯 망연한 눈빛이었다.

 

그때였다. 공중을 가르던 모형비행기가 휘청 날개를 뒤집었다. 돌발 상황이었다. 아이들의 입에선 어, 어, 하는 단절음이 터져 나왔다. 모형 비행기는 가파른 선을 그리며 급강하하더니 나발 아저씨의 발밑으로 내려앉았다. 불시착이었다. 나발아저씨는 상체를 숙여 무선모형비행기를 집어들었다.

 

“이리 주세요.”

 

필록은 나발 아저씨에게 뛰어가 손을 내밀었다. 필록을 따라 간 아이들 어깨너머 나는 목을 빼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나발 아저씨는 못 들은 척 계속 비행기를 살펴보고 있었다.

 

“에이씨, 이게 얼마짜린 줄 알고 그렇게 함부로 만져요. 빨리 주세요.”

 

나발 아저씨의 손에서 낚아채듯 비행기를 뺏고서 필록은 비행기를 이리저리 보며 중얼댔다.

 

“에이 씨팔, 바퀴부분이 부러졌잖아.”

 

“어디 봐. 야 이거 바퀴는 좀 심하네. 접착제로 붙여도 보기 흉하겠다.”

 

창용이는 필록이가 든 비행기 바퀴를 만졌다. 필록이는 나발 아저씨를 건너다보며 투덜댔다.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 나발 아저씨는 뒤돌아 그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아이들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나발 아저씨의 뒤를 밟았다. 들키지 않을 만큼 떨어져서 따라갔다. 나발 아저씨는 공원 후문 쪽으로 가고 있었다. 후문을 지나자 야산 아래 나무가 우거진 길이 나왔다. 대로변이나 주택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조금 더 들어가자 오십 미터쯤 전방에 집 한 채가 보였다. 기와지붕의 한옥이었다. 지붕은 기왓장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갔고, 담장은 심하게 파손된 상태였다. 담의 안과 밖으로 어린아이 키만 한 잡초들이 웃자라 있었다. 버려져 방치된 지 오래된 흔적이었다.

 

부동산 소개소에서 버려진 집 운운하던 말들이 눈앞에 먼지 날리듯 떠올랐다. 주위를 살피던 나발 아저씨의 뒷모습이 무너진 담장 안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학교를 파하고 가게로 향하는데 할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할아버지는 예의 빵 하나를 내게 주었다.

 

“감사합네다.”

 

빵 한입을 베어 물었다. 보드라운 빵의 속살이 입 안에서 녹는 순간 할아버지에게서 빵을 건네받던 나발 아저씨가 생각났다. 나는 주저하다 슬쩍 말을 꺼냈다.

 

“혹시 가끔 이 앞을 지나던 거렁뱅이 아저씨 아십네까? 일전에 빵도 주시던데….”

 

“뭐 잘 알아서 그런 건 아니란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양반도 너와 같은 처지다.”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기분이 탁 꺾이고 말았다. 초라한 모습으로 거릴 배회하는 나발 아저씨가 나와 같은 탈북자라니. 처음 남한에 와 밤거리를 배회하던 중 지하도에서 본 광경이 기억났다. 지하도 입구나 통로 벽에 부착된 액자형 광고판 밑에 신문지나 종이 박스를 덮고 드러누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고급아파트나 첨단통신 단말기 따위의 광고판들이 환한 빛을 발하며 미래를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사라진 지 오래된 미래였다. 비질 한 번에 치워질 나방 시체 같은 그들의 몸뚱어리들은 푸석푸석해 보였다. 환한 불빛을 향해 날개를 파닥이다 추락한 사람들. 나는 광고판 아래 드러누운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벼랑 끝에 몰려 밑바닥까지 떨어진 사람들이 노숙자로 변태하는 것이 이곳 생리라고. “옛다. 마침 잘 됐다.”

 

“네?”

 

“그거 다 먹고 공원 후문에 그 집 알지? 폐가 말이다. 거기 좀 다녀와. 네 녀석 달음박질이면 십 분이면 갔다 올 수 있을 게다.”

 

할아버지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검은색 비닐봉지를 내게 건넸다.

 

“거긴 왜요? 지금 저더러 거길 가라 이 말씀입네까?”

 

“그 양반 어제오늘 안보이던데 굶고 있을 게야. 전에 나한테 거기 기거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

 

나는 옥수수 빵이 담긴 비닐봉지를 집어들었다. 할아버지의 부탁이라 거절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발 아저씨에 대한 알 수 없는 호기심이 날 달리게 했다.

 

버려진 집은 낮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두리번거리며 담 안으로 들어섰다. 안마당은 넓었고 잡초가 무성했다. 여기저기 깨진 항아리 조각과 기왓장이 널려 있었다. 안마당 한가운데 서서 집의 정면을 바라보자 오싹해졌다. 마루로 올라서는데 나무 문짝이 부서진 채 먼지 쌓인 바닥 여기저기에 보였다. 천장 곳곳엔 거미줄뿐이었다. 나는 시선을 거두고 할아버지가 알려준 대로 이층으로 올라갔다. 개량한옥인지 복층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이 층 세 번째 방은 다락방과 이어진다고 했다. 다락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좁고 높았다. 계단을 기다시피 올랐다가 내려가야 다락방에 닿게 되는 구조였다. 계단에는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나는 마지막 층계참에서 희미한 불빛을 확인하고 평평한 나무 바닥에 뛰어내렸다. 대낮인데도 창문이 없어 어둑했다. 책상과 선반 위에만 촛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바닥에 깔린 매트리스 위에 둘둘 말린 담요가 움직였다. 뒤이어 기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제대로 찾아왔다는 데 안도했다. 그것도 잠시 나발 아저씨가 몸을 일으키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는데 손이 절로 코로 갔다. 먼지 내와 곰팡내에 사람의 체취까지 섞인 악취가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내 나는 손을 코에서 떼고 나발 아저씨에게 다가가 빵 봉지를 건넸다.

 

나발 아저씨는 허겁지겁 빵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기 때문에 아저씨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다락방 안을 둘러보았다. 탁자 위에 세워진 작은 직사각 탁상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흑백사진 한 장이 유리덮개 안에 끼워져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컵에 꽂힌 촛불을 들어 사진 가까이 대었다. 오래된 흑백사진인 때문이기도 했지만 유리표면에 닿은 불그레한 촛불 빛에 사진이 군데군데 하얗게 보였다. 하지만 날렵하게 보이는 비행기와 그 앞에 군복 입은 한 남자가 군모를 가슴에 벗어든 채 서 있는 걸 알아볼 수는 있었다. 자세히 보니 청년이었는데 치아가 보이도록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저씨, 이 사진 속에 있는 사람 아저씹네까?”

 

나발 아저씨는 대답하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입 안에 빵을 우겨넣기만 할 뿐이었다.

 

“아저씨 뒤에 있는 건 미그전투기 아닙네까?”

 

 

“…….” 꾸역꾸역 삼키는 빵과 함께 내 말까지 삼켜버렸는지 나발 아저씨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입 안 가득 우물거리기만 했다. 나는 나발 아저씨의 얼굴을 응시하다 무안해졌다. 무슨 말을 건네도 너는 지껄여라 나는 관심 없다는 식으로 아저씨는 묵묵부답이었다. 말 걸기를 포기한 나는 의기소침해져서 밖으로 나와 버렸다. 툴툴거리며 안마당을 지나다가 하릴없이 발길질을 했다. 발끝이 딱딱한 것에 걸리자 몸 중심이 휘청하면서 넘어질 뻔했다. 무성한 잡초 때문에 땅바닥에 비죽 나온 사금파리를 보지 못한 것이다. 놀란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오랫동안 숨 쉬지 않고 잠수를 하고 난 뒤만큼이나 바깥공기는 달았다. 시원하고 단 공기 때문이었을까. 머릿속까지 확 환기가 되는 기분이었다.

 

순간 확인하고 싶은 것이 반짝 떠올랐다. 나는 몸이 달아올랐다. 달리기 시작했다. 하얗게 내리꽂는 햇살에 눈이 부셔서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이마에 댄 채 달려야 했다.

 

가게로 들어서자마자 쇼윈도를 살폈다. 전시용 모형들 중에 미그전투기가 장갑차 뒤로 비스듬히 동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빨간 세일 딱지가 붙은 그것은 조금 전 다락방에서 본 그 전투기가 틀림없었다. 바닥에 부착된 스티커에는 정확히 ‘미그19전투기’라는 모델명이 찍혀 있었다. 낯선 곳을 지나다 조금 열린 집 대문을 발견하고서 문틈을 기웃대듯 나는 모형 미그19전투기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문이 활짝 열려 환한 빛 속에서 집 안의 구석구석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쇼윈도에 얼굴을 들이대던 나발 아저씨의 모습이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모형일 뿐 날지 못하는 그것을 보며 나발 아저씨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3

 

 

수업이 끝나자 교문 밖으로 아이들이 무리지어 쏟아졌다. 필록이와 앞서 걷던 창용이가 턱짓을 하며 말했다.

 

“나발쟁이 또 보네.”

 

골목 모퉁이에 나발 아저씨가 서 있었다.

 

“공원에서 본 그 비렁뱅이잖아.”

 

“그래. 오래전에 탈북한 사람이라더라. 잊을 만하면 가게에 나타나거든, 우리 사장 여사가 아주 질색한다니깐.”

 

필록은 아이들 사이에 서 있던 나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야, 종안이 넌 저 나발쟁이랑 대화가 좀 통하겠구나? 하하.”

 

창용은 필록의 말에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그렇다니까 사모님이 하도 질색해서 전에는 내가 나가달라고 아무리 말해도 꿈쩍도 안 하는데, 종안이 녀석이 뭐라고 하니까 말을 듣더라고. 역시 같은 북한 사람이라 통하는 게 있나봐.”

 

같이 걷던 아이들이 웃었다. 그들의 웃음소리를 등에 느끼며 나는 혼자 가게로 갔다.

 

나는 창고에서 플라 모델 상자를 정리했다. 창고 문에서 왼쪽으로는 재고품목들이 쌓여 있다. 쌓인 상자들 중 유독 미그19기 상자에 시선이 갔다. 정리할 때마다 보는 상자였다. 그런데 왠지 그것을 보자 평소와는 달리 숨쉬기가 빨라졌다. 나는 창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미그19기 상자를 바라보았다. 까짓 꺼 하나쯤 …. 손님이 뜸한 시각이었다. 열린 창고 문틈으로 가게 안을 살폈다. 사모님은 전화통화 중이었고, 창용이는 가게로 아직 오지 않았다. 조도가 낮은 전구 아래 상자 더미의 그림자가 바닥에 넓게 누워 있었다. 나는 그 그림자를 밟으며 소리 내지 않고 재빨리 움직였다.

 

 

버려진 집 앞에 이르자 내 그림자도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둠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낮에 한번 와 본 뒤로 밤에 오기는 처음이었다. 잡초를 밟으며 안마당을 지나 마루 한복판 쯤 왔을 때였다. 어디선가 고양이의 냐옹,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움칫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침을 힘겹게 목구멍으로 넘겼다. 버려진 집에 들락거리는, 배고픈 고양이일 뿐이라고 가슴을 자꾸만 쓸었다. 먼지 날리고 곰팡내 나는 곳이지만 문갑, 책장, 탁자 따위의 물건들이 있었다. 고양이는 그런 텅 빈 가구 어디쯤 웅크리고 있다가 인기척에 경계의 신호를 보낸 것뿐이다.

 

긴장을 털어내며 나발 아저씨가 있는 다락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왼쪽으로 열 걸음쯤 되는 곳에 계단이 있었다. 걸을 때마다 나무계단에서 삐익, 소리가 났다. 부서져 내릴 것 같은 불안한 소리였다. 계단을 한발 한발 오를수록 낮에 왔을 때 본 적이 있는 이 층 방에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문득 한기를 느꼈다. 벽에 뚫린 커다란 구멍 같은 방 안에는 벽마다 무언가를 걸어놓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또한, 뭉쳐진 먼지 덩어리와 부서진 살림 집기 따위들이 굴러다녔다. 누군가 살았던 흔적은 음산한 기운과 뿌연 먼지뿐이었다. 낮에도 그랬는데 귀속을 파고드는 삐익, 소리에 정말 유령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깨가 절로 움츠러졌다.

 

“유령이 나온다고?”

 

얼마 전 필록이가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에 놀라던 일이 생각났다.

 

“그래, 유령 나온다는 소문 파다한 걸.”

 

옆에 있던 한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별일이네. 우리 아버지 얘기로는 공원 뒤쪽 그 집이 있는 일대가 재개발될지 모른다는데, 웬 난데없이 유령 소문이 나도냐. 야, 창용이 너 들어가 봤니?”

 

창용이는 화장실 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려 담배연기를 후, 하고 뱉다가 관심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필록이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그 집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는지 들어가 본 사람이 있는지 다시 손 들어보라고 했다. 나는 뜨끔했다. 필록이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 집에 접근하지 않길 바랐다.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을 내가 퍼뜨린 건 그런 바람 때문이었다. 유령 소문은 효과가 있었는지 그 근철 얼씬거리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사실 폐가에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은 어떻게 보면 아주 거짓말도 아니었다. 유령 같은 사람이 살긴 사니까.

 

마지막 층계참에 이르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우적우적 씹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락방의 평평한 나무 바닥에 뛰어내렸다. 나발 아저씨가 나무의자에 앉아 시든 사과를 베어 먹고 있었다. 내가 촛불 가까이 다가가자 나를 반기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경계하는 기색은 없었다. 나발 아저씨는 사과를 씹던 입을 손등으로 훔치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내 손에 들린 플라 모델을 힐끔거렸다. 나는 얼른 손에 든 걸 나발 아저씨 눈앞에 내밀며 말했다. “미그 19기라요.”

 

나발 아저씨는 말없이 미그 19기를 두 손에 받아들었다. 나는 아저씨의 표정을 살피면서 탁자 위에 탁상사진액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저씨 사진 속에 이거 미그19기 맞디요?”

 

“…….”

 

“사진 속에 이 사람 아저씨 맞디요? 지금 모습이랑 너무 달라 처음엔 못 알아봤습네다.”

 

“…….”

 

나발 아저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그19기를 이리저리 뒤집었다 기울였다하면서 살펴보기만 했다.

 

“아저씨 미그 19기 조종사 맞디요?”

 

“…….”

 

“고렇게 암말 안 한다고 내가 못 알아볼 줄 아십네까? 이야, 실제로 이 전투기를 몰았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콩닥콩닥 뜁네다.”

 

나는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나발 아저씨는 나를 슬그머니 건너다보았다. 가게에서 나가달라고 말했을 때 내게 주었던 멍한 눈빛이 문득 생각났다. 지금 나를 보는 나발 아저씨의 눈빛은 그때와 달랐다. 이내 시선을 거둔 아저씨는 한 손에 미그19기를 잡고 날아가는 모습을 만들어 보였다. 잠시 뒤 아저씨는 입술을 떼었다.

 

“미그19기는 초음속 전투기야, 나는 소리부터가 틀리고든. 이게 을마나 대단한가하믄 별명까지 있다 아이네. 베트남전에서 미제전투기를 하도 마이 격추시켜스리 미군 조종사들 사이에서 무덤대령이라는 불렸던거고든.”

 

기복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다락방의 적막 속에서 들어서일까. 그 목소리에 나는 미그19기가 오래전 전투에서 활약했던 장면을 마치 본 것처럼 눈앞에 그릴 수 있었다. 나발 아저씨의 말 하나 호흡 하나가 정교한 조립부품처럼 내 머릿속에서 신속하게 조립되었다. 나는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나발 아저씨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발 아저씨의 입에서는 십 년 전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넘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내가 그때 비행기를 몰고 왔을 때만 해도 대단했오. 남한 신문기자들이 내 사진을 찍어대고 질문을 퍼부어댔오. 마치 영웅이 된 것처럼 대접을 받았었고든. 같은 핏줄의 자유의 나라에 안긴 소감이 어떠냐고 기자가 물었을 때 나는 무조건 꿈만 같다고,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고든.”

 

나발 아저씨의 눈빛은 촛불의 빛보다 더 가늘게 일렁였다. 나는 여전히 꿈만 같은지, 행복한지를 물었다. 곧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발 아저씨는 대답 없이 입에 소주병을 꽂고 꿀꺽꿀꺽 소주를 삼켰다. 대화는 끊어졌다. 한숨소리와 목구멍으로 소주가 넘어가는 소리가 기묘한 정적을 다락방 안에 퍼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나발 아저씨는 미그19기의 몸통을 거머쥔 손을 바닥에 늘어뜨렸다.

 

“지금 뭐하시는 겁네까?”

 

나발 아저씨는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는 늘어뜨린 손을 바닥 위로 그으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미그19기는 일정한 각도를 유지한 채 나발 아저씨 손에 천장 높이로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이륙? 그랬다. 이륙이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팔뚝만 한 미그19기 모형은 조금 전 다락방 나무 바닥을 박차고 이륙했다. 나발 아저씨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피이융, 하는 엔진 소리는 힘찼다. 신문지가 덕지덕지 발린 벽과 비스듬히 기울어진 천장은 하늘이 되었다. 칠이 벗겨진 밤색 탁자와 나무 바닥과 누덕누덕한 매트리스는 강과 산이 되었다. 미그19기는 궤도를 공전하듯 방 안을 날았다. 나발 아저씨의 다리는 전투기의 추진력이 되었다. 다리가 지나갈 때마다 바닥에선 먼지가 풀썩풀썩 피어올랐다. 다락방 가운데 쭈그리고 앉은 나는 먼지를 마셔 연방 잔기침을 해댔다. 그러면서도 빙빙 도는 미그19기를 보고 한참 웃으며 손뼉을 쳤다. 나도 빙빙 돌고 있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그때 천장 가까이 날던 미그19기는 점점 탁자 위까지 내려왔다. 저공비행 중이었다. 플라스틱 전투기 날개 밑으로 미사일이 한없이 투하되고 있었다. 내가 가져온 코카콜라 캔 위에도 떨어졌고, 때로 얼룩진 매트리스 위에도 떨어졌다. 반복된 공전은 어쩐지 날리는 먼지 속에서 간절한 기원이 되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발 아저씨도 현기증이 나는지 숨을 헐떡이며 매트리스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는 오랜만에 미그19기를 타고 멀리 날아본 것 같다, 하고 토막 난 말을 가뿐 날숨에 실어 내뱉었다. 먼지가 날려서 환기하고 싶었지만 다락방에는 창문도 없었다.

 

 

 

4

 

 

플라 드림 창고 안은 초가을 저녁인데도 더웠다. 긴장한 탓이었다. 처음도 아닌데 문구용 칼을 든 손이 떨렸다. 쌓인 상자들 중간쯤 한 상자의 봉인스티커를 막 벗겨냈다.

 

“야, 종안이 너 제법이다. 북한에서 놀던 가닥이냐?”

 

뒤통수에 꽂히는 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화장실을 한번 가면 십 분이 걸리는 창용이가 일 분도 되지 않아 창고 문 앞에 서서 웃고 있었다.

 

“…….”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너 제법 간도 크다.”

 

“…….”

 

“어떻게 할까. 모든 걸 사장님한테 말해버릴까. 사모님이 알면 아주 실망할 텐데 말야. 안 그래?”

 

창용의 말에 나는 움찔했다.

 

“…….”

 

“너 내 말만 잘 들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냥 넘어갈 수 있지. 네가 지금까지 훔친 것보다 더 근사하고 비싼 모델도 갖게 해줄 수 있어.”

 

창용은 눈을 번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미그19기 외에도 플라 모델 여러 개를 빼냈다. 어렵지 않았다. 처음 미그19기를 빼낸 일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자 나는 대범해졌고 요령도 생겼다. 삼일 뒤 두 번째로 헬리콥터를 빼냈다. 그런 뒤로는 삼사일 간격으로 틈을 엿보았다가 장갑차나 항공모함 따위를 빼냈다. 그저께엔 잠수함도 손에 넣었다. 나를 믿어준 사모님을 생각하면 이러면 안되, 하며 손을 거두려다 가도 플라 모델을 갖고 싶은 걸 어쩔 수 없었다. 고가로 소량 매입해 들여온 플라 모델은 빤하기 때문에 건드릴 수 없지만 저가품목들은 비교적 빼내기 쉬웠다. 방법은 간단했다. 잘 팔리지 않는 것 위주로, 상자는 그대로 둔 채 속 내용물만 표나지 않게 빼내는 것이다. 빼낸 플라 모델은 속 비닐 포장째 쓰레기봉투에 담아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장소에 둔다. 그런 다음 퇴근할 때 집에 가져가 조립을 했다. 이 창고에 재고품으로 쌓여 있는 것 중에는 속에 다른 것들로 채워진 플라 모델 상자들이 섞여 있다. 그런 방식으로 슬쩍한 모델만 해도 스무 개가 넘는다.

 

“무슨 말이네? 더 근사하고 비싼 거이?”

 

“이런 거지 좁밥 쥐새끼 같은 놈. 쥐새끼처럼 남들 찾지도 않는 싸구려 모델들만 창고 구석에서 살살 속 파먹고 말야. 꿈을 좀 크고 높게 가져 봐라. 쨔샤.”

 

“그러니끼니 내래 이제 어드러케 하면 된다는 기야. 네가 원하는 거이 뭐이가?”

 

“차차 알게 될 거다.”

 

 

불안한 마음을 다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와 달리 불이 켜져 있다. 수영 형이 들어와 있었다. 주방 벽에 붙은 작은 식탁에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형은 불콰해진 얼굴로 내게 밥은 먹고 다니냐, 하며 명랑한 표정을 지었다. 밤늦게 어딜 쏘다니다 왔느냐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억지스런 미소는 금방이라도 금이 가 부서질 듯 위태했다. 수영 형의 그 모습에 나는 명치 부근이 꽉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식탁 맞은 편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한밤중의 주방에는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벽시계의 초침소리만 있는 듯했다.

 

며칠 전이었다. 수영 형은 출근하려고 운동화를 신다말고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배가 아픈지 식탁 위에 야채트럭 시동키와 지갑을 던져놓고 화장실에 급히 들어갔다. 나는 형의 반지갑을 열었다. 몇 장의 지폐가 끼워져 있는 칸 위로 알록달록 스티커커플사진이 꽂혀있었다. 혜원누나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었다. 용돈이 떨어져 만 원짜리 몇 장 빼내려던 생각이 싹 달아났다. 형은 헤어진 지 석 달이 넘었는데도 그 사진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갑을 원래대로 두고 개수대 앞에 서서 밥그릇을 씻는 척했다. 지갑 속의 사진을 보기 전엔 새벽까지 몸을 혹사하며 일하는 형을 지독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지금의 형은 지독하기는커녕 움켜쥐면 금방이라도 몸뚱어리 전체가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내가 수영 형과 동거를 하게 된 건 양말 두 켤레 훔친 일이 계기가 되었다. 그깟 걸로 경찰 아저씨의 손에 뒷덜미를 잡힌 건 정말 창피한 일이었다. 지갑이나 좀 더 쓸 만한 물건을 슬쩍하던 거에 비하면 시시한 거였다. 물론 처음부터 남의 물건에 손을 댔던 건 아니었다.

 

나는 하나원을 수료하고 쉼터에서 생활했다.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쉼터를 운영하는 아저씨한테 가진 돈을 뜯겼고 툭 하면 휘둘러대는 주먹질에 시달렸다. 내가 그런 폭행을 당하고 있을 때 말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왜 그러냐고 누가 물으면 쉼터 아저씨는 내가 되먹지 못하고 불량해서 버릇을 고쳐주는 거라고 말했다. 물었던 사람은 그뿐 쉼터 아저씨의 폭행을 묵인해버렸다. 견디다 못해 뛰쳐나왔지만 낯선 이곳 어디에도 갈 곳은 없었다. 피씨 방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다. 처음 아르바이트를 했던 피씨 방에서 손님의 시계가 없어진 일이 있었다. 어두컴컴한 피씨 방에서 열 시간 넘게 게임에 열중하던 손님은 빨간 눈을 들이대며 언성을 높였다. 다짜고짜 시계가 없어졌다며 나를 물고 늘어졌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손님들도 주인아저씨도 나를 도둑으로 몰았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일한 대가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쫓겨났다. 가는 곳마다 나는 이방인이었다. 얻어먹거나 훔치는 일은 아침에 눈떠 배가 고프면 반복되는 일상이 되었다.

 

시시한 양말 두 켤레에 내 뒷덜미를 움켜잡은 경사 아저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수영 형에게 나를 보냈다.

 

“이 녀석 자네가 데리고 있어보지 않겠나.”

 

수영 형은 경사 아저씨 옆에 어깨를 움츠리고 서 있던 나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거지새끼를 눈앞에 보듯 코를 막으며 웃기도 했다. 기름기로 눌어붙은 더벅머리에 시커먼 얼굴이었고 옷도 거지꼴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네 고향은 어디네?”

 

고향을 묻는 말로 수영 형은 나를 데리고 있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자신도 나처럼 나 홀로 탈북해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어른스런 말투로 말했다. 경사 아저씨는 수영 형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내게 말했다.

 

“지난해 서울에 있는 대학까지 졸업한 형이니까 너도 형의 반만이라도 닮도록 노력하면 여기서 잘 살 수 있어.”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트럭 운전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힘든 시기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일 것이고, 건실하다는 사람도 허우적대는 현실에서 그런 형을 백 퍼센트 닮아봤자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오락가락하던 중인데 형이 다가와 내 어깨를 툭 쳤다.

 

“잘 지내보자.”

 

한집에 같이 살게 되면서 형은 나의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에 간섭을 했다.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머릿속에서부터 밥 먹는 습관까지 철저히 이곳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거였다. 결혼하기로 했다던 혜원 누나와 헤어진 뒤로 간섭은 더 했다. 짜증이 났다. 그래도 오갈 데 없는 나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충고까지 해준 사람은 수영 형이 처음이었다. 나는 형의 빈 잔에 소주를 가득 부어주었다. 초점 잃은 형의 두 눈이 반짝였다.

 

 

아무 일 없이 일주일이 지났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도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장 부부에게 창용이가 무슨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쫓기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내 나이 아직 열여섯이라는 생각과 이미 열여섯이라는 느낌이 뒤섞여서 막연할 뿐이었다. 수영 형한테 얹혀살면서 손 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용돈을 벌어 쓸 수 있는데다, 플라 모델을 항상 볼 수 있는 플라 드림만큼 최상의 일자리는 없었다. 창용은 사장 부부가 부를 때마다 깜짝 놀라는 내 얼굴을 곁눈질하며 웃고 있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교문을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골목 모퉁이에서 창용이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다며 공원으로 가자고 했다. ‘녀석은 이제야 내게 원하는 걸 말하려는 심산인가.’

 

온갖 생각이 다 떠올랐다. 창용은 공원의 공중화장실 옆 벤치로 나를 끌고 갔다.

 

“거기 앉아.”

 

나는 머뭇거리며 벤치에 앉았다. 공중화장실 뒤쪽에서 필록이를 비롯해 다섯 명의 녀석들이 건들거리며 걸어 나왔다. 플라 드림에 자주 오는 마니아들이었다.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필록이가 말했다.

 

“어서 와라, 종안이.”

 

나는 다섯 명의 녀석들을 차례로 쳐다보다가 필록이를 응시했다.

 

“내가 너한테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널 데려오라고 부탁했지.”

 

“나한테 무슨 말?”

 

“너 슬쩍하는 솜씨가 좋다며?”

 

“……?”

 

나는 창용을 쳐다보았다. 창용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래서?”

 

“쥐새끼처럼 여러 번 슬쩍했을텐데 조립한 거 구경 좀 하자. 새꺄. 우리 모임에 한번 갖고 나와 봐. 우리 모임은 사실 뭐 그런 너절한 모델은 별로 취급하진 않지만 이제 너도 모임에 끼워줄까 생각해.”

 

“그래, 그거이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네?”

 

“또 있어. 아주 중요한. 너의 협조가 필요한 멋진 계획에 대해서.”

 

“뭐이가?”

 

“에이 짜식, 종안이 인마 얼굴 풀어. 이제부터 넌 우리 모임 멤버가 된 거야. 창용이가 네 얘기 많이 하더라.”

 

나는 창용을 쳐다보았다. 창용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말인데 플라 모델 동호회 일주년 모임을 크게 할 생각이다. 새로 회원가입도 받고, 기존회원은 각자 최근에 조립한 근사한 모델을 선보이고 정보도 교환하고 친목도 하고 그럴 생각이거든. 그래서 창용이랑 이야기했는데. 창용이가 아주 멋진 정보를 주었어. 내일모레 플라 드림에 새로 입고되는 것들이 아주 빵빵한 거라고 말야.”

 

창용은 벤치 등받이에 걸터앉았다.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흔들었다.

 

“내가 목록을 대충 봤는데 이야, 정말 대단한 것들이야. 여기 봐봐. 우리 마니아 기존회원들이 들으면 눈이 확 돌아갈 것들이더라고.”

 

필록이가 내 옆에 붙어 앉으며 말했다.

 

“그런데 씨, 나 엄마한테 신용카드 압수당해서 살 수가 없잖아. 게다가 상당히 고가라 마니아회원들이 모두 다 살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이번 일은 스릴 있고 또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이번 일이라니?”

 

“이 자식 알면서 능청떨기는. 털자는 얘기야 인마. 너도 당연히 우리 계획에 동참해야 하고.”

 

“뭐이! 내래 아이 하겠오.”

 

“무슨 소리. 네가 빠지면 안 되지. 너처럼 솜씨 좋은 녀석이 동참해줘야지 우리 계획이 성사되는 거라고. 만약 계속 거부하면 네가 지금까지 창고에서 훔친 사실 다 불어버린다. 어떻게 할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디데이는 내일모레야. 입고날짜가 사모님이 아니라 사장새끼가 있는 날에 맞춰진 건 우리에겐 굉장한 기회라고.”

 

창용은 눈을 번득이며 더 없는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사장 부부는 번갈아 저녁 이후 가게에 남아 뒷마무리를 했다. 사모님이 남는 날은 하도 꼼꼼하게 문단속이며 물건정리를 하게 해서 한눈팔 사이가 없지만 사장님이 남는 날은 매사가 헐거웠다.

 

“입고목록 빼내다가 사장새끼 수첩을 슬쩍 들쳤는데 말야, 수첩 모퉁이에 갈겨쓴 메모가 있더라. 사모님 없을 때 간드러진 목소리로 전화받으면서 뭔가 메모하더니만 그게 그날 저녁 요거 만나는 시간이랑 장소더라고.”

 

창용은 실눈을 떠가며 새끼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필록이가 킥킥거리며 내게 말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럴 필요 없다니까. 넌 그냥 우리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아무 일도 없어. 너도 이 목록에서 네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는데 뭘 망설이냐.”

 

“내가 원하는 거 아무거나?”

 

필록이가 내 눈 앞에 종이를 들이댔다. 창용은 눈짓으로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내가 사장새끼 몰래 복사 뜨느라고 십년감수 했잖냐. 이번 것들 짱으로 좋아. 자 봐.”

 

사장님이 갖고 있던 걸 난 보지도 못했는데 창용은 언제 빼내서 복사까지 떴는지 모를 일이었다. 필록이가 내 눈앞에 들이댄 종이를 손에 쥐어들고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탐나는 것들이었다. 그중 내 눈에 들어온 이름이 있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그19기가 끼어 있다니. 게다가 무선조종으로 하늘을 나는 모델이었다. 쇼윈도 진열대에 이십 프로 세일딱지가 붙은 날지 못하는 싸구려 미그19기와 달랐다. 필록은 내 손에서 종이를 홱 낚아챘다.

 

“인마. 이번에 제대로 뽀다구 나는 걸로 가질 수 있다니까.”

 

필록의 말이 끝나자 창용이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종안이 네가 정말 우리 친구가 될 수 있는지는 이번 일을 함께하느냐 마냐에 달렸어.”

 

나는 아이들과 헤어져 돌아오면서 필록이의 말을 떠올렸다.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는데 뭘 망설이냐’

 

마뜩치 않은 구석이 있었지만 기대되는 건 사실이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걸으면서 거리 여기저기에 시선을 대어보았다. 아저씨는 어디서 배회하고 있을까. 만나면 날 수 있는 미그19기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리모컨을 아저씨 손에 쥐어 줄 테니 실컷 날려보라고 말해줄 생각이다.

 

 

이틀 뒤 손님이 뜸한 시간을 틈타 고향 빵집 할아버지에게 갔다.

 

“어서 오너라, 얘야. 빵 하나 주련?”

 

할아버지가 주는 빵은 옥수수 빵이었다. 할아버지가 개발한 것으로 다른 빵집에서는 낼 수 없는 담백하고 고소한 맛이 있었다. 이 동네에서 고향 빵집의 옥수수 빵은 인기품목이었다. 아무래도 할아버지는 어딘가에 숨겨둔 고향의 냄새를 옥수수 빵에 솔솔 뿌려 놓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는 길 건너 파리바게트나 크라운베이커리 같은 고급스런 빵집보다 손님이 많을 리가 없었다.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맛은 다 똑같은 모양이었다.

 

할아버지는 전쟁 때 아내와 아들 둘을 북에 두고 왔다고 했다. TV에서 이산가족 상봉에 관한 뉴스가 나오면 할아버지는 우울해했다. 언젠가 빵집 안에 비치된 TV 앞에 앉아 눈가를 손등으로 훔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할아버지 우시는 기야요, 하고 물으면 늙으면 저절로 눈물이 나는 법이라며 웃곤 했다. 이산가족 상봉을 하려고 시도를 했지만 아직 연락도 없고 생사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함께 옥수수 빵을 만드는 할머니가 귀띔해 준 말이었다. 내가 빵집에 들를 때마다 반겨주는 이유는 내가 북에서 왔기 때문일까. 아무튼 나는 할아버지 앞에서만큼은 북한 억양이 튀어나올까 봐 조바심치지 않는다.

 

“아닙네다, 빵 먹으로 온 거이 아니고요. 혹시 나발 아저씨 오늘 보셨습네까?”

 

“에휴, 그 양반 술 좀 작작 마셔야 할 것인데. 오늘 오전에 보긴 봤다. 말도 마라. 술이 잔뜩 취해설랑 구걸한답시고 동네 애 엄마한테 다가가서 놀라게 했지 뭐냐. 대낮에 길거리에서 큰 소리가 나서 사람들이 다 한마디 하더라.”

 

나는 한숨이 나왔다. 탈북해서 부랑자로 전락한 나발 아저씨를 좋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 전 TV뉴스에서 탈북자가 강간을 했네, 살인을 했네,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동네 사람들은 나발 아저씨를 슬금슬금 피해 다녔다. 내 경우도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언젠가는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를 위험인물인 것만 같았다. 따가운 시선은 가시가 되어 몸 어딘가에 지금도 박혀있는지 뭉근히 아려왔다. 나발 아저씨를 두고 안 좋은 소리가 나돈다는 얘길 들으니 몸 여기저기가 더 쑤시는 것 같았다. 그럴 땐 북도 남도 아닌 나만의 요새 속에 숨어들어 테러리스트를 꿈꾸는 게 최고다. 전투기를 출격시키고, 정찰기를 띄워 요새를 지키는 상상 말이다.

 

아랍테러단체들이 비행기를 납치하고 인질극을 벌인다고 들은 적이 있다. 문득 그들처럼 복면을 한 내가 인질들을 나의 요새에 끌고 와 무언가를 요구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남한을 상대로 한 인질극에서 나는 탈북자들을 차별대우하지 말라고 요구할 생각이다.

 

수영형 일만 하더라도 생각만 하면 가슴이 탁탁 막혀온다. 탈북자라고 여기저기서 외면당하니까 형은 괜히 나한테 화풀이하느라 잔소리를 해댔다. 석 달 전만 해도 혜원누나와 찍은 스티커커플사진을 내게 보여주며 행복해했었던 형이었다. 수영형이 탈북자라는 사실을 안 혜원누나 부모가 헤어질 것을 강요하기 전까지 말이다.

 

학교에서 돌아와 집 대문을 열려는데 안에서 톤이 높은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만큼 얘기했으면 알아들었겠죠? 안 되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되는 겁니다.”

 

안에 들어가지 못한 채 문밖에서 나는 형의 목소리가 힘겹게 꺼져가는 것을 듣고 말았다. 형은 중년여자로부터 다짐받는 말을 되뇌고 있었다. 근래 형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무튼 범죄자나 이방인 대하는 듯한 시선만 아니라면 좋을 것 같다. 북한에도 요구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어이없는 건 거긴 민간인 인질극이 통하지 않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이미 둑 무너지듯 탈북자들이 쏟아져 나오는 마당에 인질 협상이 긴장을 줄 만큼 강력한 것은 아닌 거다. 북도 싫고, 그렇다고 남쪽에도 정붙이지 못한다면 선택은 어디일까. 하긴 나처럼 요새라도 없으면 숨 쉴 수 있는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요새는 없는 것이 없는 다락방이다. 항공모함, 탱크, 잠수함에서 전투기 그리고 왕년 미그19기 조종사도 있다. 다락방에서 나발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묘한 느낌이 들곤 했다. 탱크와 전투기가 촛불의 일렁이는 빛에 흔들려 실제의 크기로 커지는 느낌 말이다. 웅장한 기계음을 발하며 움직여 줄 것 같은 플라 모델들. 눈을 감으면 나발 아저씨가 올라탈 수 있을 만큼 그것들은 커졌다. 어쩌면 허공을 가르며 날 수 있는 미그 19기가 곧 있으면 요새에 추가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발 아저씨는 어디서 배회하고 있는 걸까.

 

가게로 돌아왔다. 창고 문 가까이 새로 입고된 플라 모델 상자들이 포개어져 있었다. 사장님은 볼펜을 낀 손가락으로 상자를 톡톡 건드리며 수를 세는 중이었다. 나는 순간 눈 부위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야, 종안아 이리로 와서 이거 모델별로 수량체크 좀 해봐. 가게 안보고 어딜 돌아다니다 오냐. 바빠 죽겠는데.”

 

나는 쭈뼛거리며 사장님에게로 갔다. 사장님 앞에 쌓여 있는 상자 더미는 노끈도 풀지 않은 채였다. 물건은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사장님은 급한 듯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펜과 입고된 모델 목록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적힌 모델명과 가격대를 훑어보았다. 며칠 전 공원에서 보았던 목록 원본임을 금세 알아보았다. 종이를 쥔 손이 조금 떨렸다. 사장님은 수량을 다 체크한 뒤 창고 안에 넣고 마니아 회원들에게 입고정보를 이메일로 날리라고 지시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은 계속 모델 목록이 찍힌 종이에 가 있었다.

 

문득 시선을 돌렸다. 계산대에서 손님 물건을 계산하던 창용과 눈이 마주쳤다. 그때 사장님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말야, 오늘 급한 약속이 있어서 먼저 나가봐야 하니까 너희 뒷마무리 잘하고 퇴근해야 한다.”

 

사장님은 급하게 옷걸이에서 재킷을 빼 걸쳤다. 못 보던 고급스런 재킷이었는데 안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온 손에서 칙칙, 소리가 들렸다. 수고해라, 하며 나가는 사장님한테서 강한 향수냄새가 풍겼다.

 

 

 

5

 

 

“야, 감시카메라 전원 꺼.”

 

창용은 목소리를 낮추어 내게 명령했다. 나는 창용의 지시대로 감시카메라 전원을 껐다. 손이 떨렸다. 불을 끄고 셔터를 내렸다. 뒷문으로 필록이와 다섯 명의 아이들이 들어왔다. 목장갑을 낀 손은 각각 자루를 들고 있었다. 필록이와 창용이는 창고로 들어가 새로 입고된 모델들을 자루에 담았다. 나는 주춤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행동할지 창용이는 별다른 말을 해주지 않았다. 필록이를 따라온 아이들은 매장 진열대에 있는 상자들을 끄집어내어 바닥에 팽개치고 있었다. 싸구려 모델들을 마구잡이로 자루에 담았고, 벽과 쇼윈도에 전시용으로 있던 플라 모델들까지 부서뜨렸다.

 

“야, 너희 이럴 필요는 없지 않네.”

 

나는 아이들의 행패를 저지했다.

 

“짜식, 비켜봐. 이래야 무슨 강도라도 든 것 같잖아.”

 

아이들이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었다. 내 팔을 뒤로 묶어 바닥에 주저앉혔다. 창고에서 불룩한 자루를 들고 나온 창용이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게 오늘 너의 임무야. 어렵지 않아. 오늘 이렇게 강도한테 당한 거로 연기하면 그만이거든.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누군가 풀어주겠지. 넌 그냥 밤에 정리하고 문 잠그고 나오다가 강도한테 당했다고 그러면 되는 거야.”

 

나는 입까지 틀어 막혀 있어서 소리도 내지 못했다. 필록이가 정색하고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해야 일 처리가 깔끔하지. 종안아, 낼 아침까지 수고해. 네 몫은 남겨 둘 테니까 걱정 말고. 다시 말해두지만, 넌 복면을 쓴 사람이 침입해 널 결박하고 돈이랑 플라 모델을 가져갔다고 말해야 해. 여러 명이라고 말하면 괜히 우리 모임이 의심받을 수도 있다고.”

 

가게는 어둠 속에 묻혔다.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일어나지도 못한 채였다. 어디선가 밤 공기의 서늘한 기운이 어두운 공간을 휘돌았다. 녀석들은 뒷문을 일부러 살짝 열어놓고 빠져 나간 모양이었다. 바닥에서 올라온 냉기가 결박된 몸을 서서히 마비시키고 있었다.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졌다는 생각에 내 머릿속까지 멍해졌다. 내가 이렇게 어둠 속에 처박혀 버리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사물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진열대의 모서리, 바닥에 널브러진 플라 모델 상자들, 쇼윈도에 어질러진 플라 모델 조각들 따위. 가게가 도둑맞은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이 온통 털려버린 듯했다.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는 무뇌아가 된 기분이 바로 이런 걸까. 열린 뒷문 틈새로 아스팔트를 치고 달아나는 타이어의 미끄러지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가 사라졌다. 그런 소리 말고는 밤은 한없이 적막했다.

 

순간 다락방에서 이륙했던 미그19기가 저공비행을 하며 미사일을 투하하는 장면이 어둠 속에 그려졌다. 가게 안을 뒹구는 부서진 것들이 미그19기가 한바탕 일을 벌여놓고 간 흔적처럼 보였다. 그런 상상을 하자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하긴 내 모양새도 가게 안을 뒹구는 플라 모델 조각들과 다를 게 없었다. 던져지고 부서지고…. 하지만 어둡고 불편한 밤을 눈 꼭 감고 견디기로 한다. 내가 원하는 걸 가지려면 그 정도 어렵지 않다. 창용이가 말한 대로 강도당했다는 진술을 그럴듯하게 꾸며대기만 하면 아무 일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내 처지가 그렇게 억울하거나 황당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아니 너무 쉬운 방법이라고. 필록이가 약속한 내 몫을 생각했다.

 

 

“도둑이야!”

 

사모님의 호들갑스런 비명 때문에 잠에서 깼다. 벌써 아침인가. 추위에 떨다 새벽녘에 잠이 들었었다. 밝은 빛이 들이친 가게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진열대는 흐트러져 있었고, 바닥 여기저기 플라 모델 상자들이 뒹굴고 있었다. 벽과 쇼윈도에 장식해놓은 전시용 플라 모델들은 제자리를 이탈하거나 일부가 파손되어 있었다.

 

“이를 어째, 이게 무슨 일이람.”

 

사모님의 흥분된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나는 묶인 채 계산대 아래 바닥에 모로 누워 있었다. 때문에 사모님의 눈에 띄지 못했다. 사모님은 흐트러진 진열대와 열린 창고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러다 현금 서랍이 열려있는 것을 보고서야 계산대 쪽으로 다가왔다. 서랍에 손을 대려 하다가 바닥에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사모님은 내 입에 물려있는 재갈을 풀어주었다. 등 뒤로 묶인 손목과 발목도 풀어주었다. 신고한 지 십 분도 지나지 않아 경찰들이 유리문을 밀고 들어왔다. 가게 안의 광경은 그들 눈에도 명백히 간 큰 절도범의 소행으로 보였을 터였다. 가게가 털렸다는 소문을 들은 주변 사람들이 유리문 밖에서 기웃대며 소란스런 소리를 보태고 있었다. 다급히 달려온 사장님은 잔뜩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사장 부부는 서로 떨떠름한 시선을 주고받을 뿐, 각자 우왕좌왕하며 경찰들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사모님과 말을 주고받던 경찰이 다시 내게로 왔다. 범인의 인상착의와 당시 상황을 집요하게 캐물었다. 경찰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주눅이 들어선지 찬 바닥에 결박된 몸으로 밤을 난 터여선지 담요까지 등에 둘렀는데도 나는 몸을 마구 떨었다. 하지만 나는 용케 의심받지 않았고 실수 없이 필록이가 시킨 대로 말했다.

 

“돈이랑 창고에 있던 고가의 물건이 상당수 없어진 거 보면 단순히 돈만 노린 게 아니라 플라 모델을 아주 좋아하는 놈인 것 같은데….”

 

경찰이 수첩에 메모를 하며 말했다. 그러자 다가온 사장님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바로 어제 꽤 고가인 희귀물건이 소량으로 입고되었는데 그게 몽땅 없어진 거 보면 어제 물건 들어온 걸 아는 놈일 겁니다. 참 종안아 어제 입고목록 회원들에게 이메일로 보냈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장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그렇다면 우리 가게에 자주 오는 놈 중에 범인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그 회원들이 몇 명이나 되죠?”

 

내가 대답했다.

 

“이백 팔십 세 명이야요.”

 

“휴우, 골치 아프군. 일단 그 명단 넘겨주세요.”

 

“종안아, 명단 뽑아드려라.”

 

“그래도 자주 오는 고객들 중에 수상쩍다 싶은 사람은 없나요?”

 

경찰이 사장님에게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사장님은 글쎄요, 하며 눈만 깜박였다.

 

창용은 오전 수업 중에 불려왔다. 경찰의 질문에 또박또박 답하며 아주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장 부부에게 다가가 당일 책임지고 늦게까지 남아있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 크다며 어른스럽게 죄송하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면서 경찰이나 사장 부부에게 내가 어떻게 진술했는지를 은근슬쩍 확인하는 걸 잊지 않았다. 창용은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슬며시 내게로 와서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쳤다.

 

 

주위를 살피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밤하늘은 달도 별도 없었다. 우물 밑바닥에서 올려다본 시커먼 뚜껑 같았다. 저녁 무렵부터 바람이 불더니 밤이 되기도 전에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목 뒷덜미를 사정없이 치고 달아났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공원 후문과 주택가 쪽에서 반짝이는 불빛에 바짝 몸을 낮추었다. 예기치 못한 누군가의 눈이 희미한 빛 속에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심장박동이 절로 빨라졌다.

 

무너진 담 안으로 발을 디뎠다. 잡초를 밟을 때마다 스삭,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깨진 기왓장을 밟았는지 발밑에서 뚝, 소리가 났다. 내가 내는 소리도 이런 어둠 속에선 이물스럽다. 작은 손전등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일부러 가져오지 않았다. 불빛이 새면 끝장이다. 최대한 어둠이 되어야 한다는 건 국경을 넘을 때 이미 터득했다. 발끝으로 가늠해 마루 위로 올라섰다. 걸음을 뗄 때마다 음산한 느낌이 와락 달려들었다.

 

여기 오는 길을 다른 날보다 유독 더 조심하고 긴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놈 때문이다. 무선 모형 미그19기. 놈을 쥔 손이 땀으로 미끈거렸다. 어제 하교 직후 필록이는 집 앞 골목에서 주위를 살피고서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너 입 뻥끗하면 어떻게 된다는 거 네가 더 잘 알거야. 우린 한 배를 탄 거라는 걸 명심해. 알아서 처신할 줄 믿겠어.”

 

“응, 알갔오.”

 

내 목소리는 들릴 듯 말듯 기어들어가 내가 생각해도 비굴하게 느껴졌다.

 

“이건 네 몫이다. 자.”

 

얼른 그것을 건네받아 품에 안았다. 누가 보기 전에 집으로 뛰어갔다. 집에 그것을 숨겨둔 채 가게로 출근했다.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내내 들떠 있었다. 밤에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다. 무선모형미그19기 상자의 봉인스티커를 살짝 벗겼을 땐 꿈만 같았다. 비닐포장 안에서 꺼낸 설계도를 브이자로 벌린 다리 사이에 펼쳐 놓았다. 방바닥에 칼, 펜치, 니퍼, 에어브러시 등과 같은 조립공구들과 조립부품들도 잔뜩 펼쳐놓았다. 수영 형이 오기 전에 얼른 조립을 끝낼 생각으로 손을 바삐 움직였다. 방바닥에 펼쳐 놓고 조립하고 있는데, 만약 형이 느닷없이 들어온다면 곤란했다. 돈이 어디서 생겼냐, 돈 함부로 쓴다, 하며 잔소리할 게 뻔했다. 아니 잔소리보다는 수영 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수영 형이 좌절에 빠져 휘청거린 지 여러 달째였다. 설계도를 들여다보면서도 나는 형이 야채트럭을 몰며 밤거리 어느 도로를 달리고 있을까, 생각했다. 실은 야채트럭보다 몇 톤은 더 무거운 마음을 모느라 안간힘을 쓸 형의 얼굴을 상상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시내의 복잡한 도로처럼 설계도가 잠시 눈을 헷갈리게 했다. 무선모형 미그19기를 나발 아저씨 얼굴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저씨, 이건 정말 납네다.”

 

“어드러케?”

 

“이 리모컨으로 조종하는 거라요.”

 

“정말 기리쿠나 야. 이거이 내가 몰던 백두번개야.”

 

“백두번개?”

 

“내가 붙인 별명이디.”

 

나발 아저씨는 사과 조각을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너무 고요했으므로 사과 한 조각 씹는 소리, 소주 한 모금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술 냄새가 지독하게 났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여러 번 들은, 미그19기를 몰고 귀순했다는 이야기가 아저씨 입에서 또 흘러나왔지만 나는 지겨워하지 않고 들어줄 수 있었다. 그건 나발 아저씨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화려한 모험이었기 때문이었다.

 

시커먼 얼굴이 불빛에 일렁거렸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촛불은 벽에 어둡고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었다. 무선모형미그19기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뒤집어보는 나발 아저씨의 벽 그림자는 수영 형이 내 생일날 보여주었던 영화 ‘킹콩’을 닮았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올라서서 전투기를 손에 들고 엉거주춤 등을 옹그린 딱 그 모습이었다. 손에 비행기를 든 나발 아저씨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커다란 벽 그림자는 어떤 미소도 없이 시커멀 뿐이었다. 영화를 볼 때만 해도 우렁찬 괴성을 지르던 킹콩이 무서웠었다. 지금 떠올려보니 킹콩의 커다란 몸은 이 세상 어느 인간보다 쓸쓸해 보였던 것 같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현대식 빌딩 숲과 손가락만 한 인간들의 시선. 킹콩에겐 낯설 뿐 어떤 위안도 되어주지 못했다.

 

“이거이, 지난번 공원에서 허공을 윙윙거리며 날던 것처럼 난다 이 말이네?”

 

나발 아저씨는 날개 표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물었다.

 

“기린데 이거이 무척 비싼 거일 텐데, 웬 거인가?”

 

“…….”

 

어디서 난 건지 말할 수 없었다. 다락방에 즐비한 플라 모델들도 아저씨는 내가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사오는 줄 안다. 그것들은 대부분 내가 버는 적은 돈으로 하나나 두 개 정도 구입해도 부담되지 않는 싸구려들이었다. 리모컨으로 조종해서 하늘을 날 수 있는 무선 모형은 내가 살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남한에 와 십 년을 살았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정도 가늠하는 건 당연했다. 끝내 나는 말하지 않았다. 아저씨도 더는 묻지 않았다.

 

“요거이 한번 날려봐야겠구나 야. 제대로 나나 봐야 할 거 아이네.”

 

나발 아저씨는 무선 미그19기만 손에 든 채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 나는 깜짝 놀라 나발 아저씨의 등 뒤에 따라붙으며 말렸다. 야밤에 비행기를 날리다니 느닷없었다. 게다가 바람도 불고 비가 올지 몰랐다. 나발 아저씨는 막무가내였다. 이미 야산으로 오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내 짧은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구름 때문에 달은 보이지도 않았다. 어두웠지만 주위의 사물들을 가늠할 수는 있었다. 나무 사이를 지나 잡초들을 밟으며 한참 올라갔다. 나발 아저씨는 여러 번 와 본 사람처럼 넓은 평지가 있는 곳을 금방 찾아냈다.

 

“여기가 좋겠오.”

 

공원전경과 삼거리 전체가 내려다보였다. 모두가 잠든 밤이었기 때문에 공원 안도 주택가도 거리에도 불빛은 겨우 셀 수 있을 정도로만 반짝였다. 어두웠지만 나는 나발 아저씨의 얼굴이 한껏 기대로 상기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발 아저씨도 내 얼굴에서 그런 기색을 보는 걸까.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우리는 은밀한 탈출을 시도하는 탈옥범들처럼 비장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머리카락을 흩뜨리고 볼을 때리며 달아나는 바람 따위 두렵지 않았다.

 

나는 아저씨의 손에 리모컨을 쥐여주었다. 설명서에 나와 있던 것을 기억해내며 요 버튼은, 이 스틱은 해가며 작동법을 알려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발 아저씨의 입술은 치아를 드러내며 조금씩 반달이 되었다. 나발 아저씨가 달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나발 아저씨의 손가락이 리모컨 버튼과 스틱 사이에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그19기는 나발 아저씨의 조종으로 밤하늘을 힘차게 날았다. 전투기모형이지만 비행은 여느 무선모형비행기와 같았다. 어스름 달무리 한가운데를 힘차게 갈랐고 나무들 위로 긴 선을 긋기도 했다. 턱을 쳐들고 미그19기를 바라보는 나발 아저씨의 입에 반달이 가득하다. 환상을 믿는 아이의 천진한 표정을 보는 느낌이었다. 정말 미그19기라면 나발 아저씨는 그것을 잡아타고 어디로 가고 싶을까. 일정한 각도로 수평으로 날던 미그19기는 조금씩 변화를 보였다.

 

미그19기는 넓게 곡선을 그리며 높이 올랐다가 내려오고 있었다. 지난번 공원에서 필록이가 선회성능을 자유자재로 선보였던 비행을 시도하려는 걸까. 나는 숨죽이고 미그19기의 비행을 주시했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미그19기는 두 번째 선회를 했다. 밤하늘 한복판을 동그랗게 오려내는 비행이었다. 완벽하게 세 번째 원을 그리면 밤하늘에 동그란 구멍이 뻥 뚫릴 것만 같았다.

 

‘구멍이 뚫리면 그 속으로 미그19기는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발 아저씨도 나처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발 아저씨의 표정이 미그19기 만큼 떠 있었다.

 

그때였다. 세 번째 선회를 하려던 미그19기가 키 큰 나무에 부딪혔다. 갑자기 불어댄 바람 때문에 조종된 각도를 이탈한 거였다. 떨어지면서 나뭇가지를 몇 번 퉁퉁 스치다가 잡초 위로 널브러졌다. 나발 아저씨의 얼굴에서 환한 달이 사라졌다. 백두번개라도 되는 듯 나발 아저씨는 한참 동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백두번개가 풍요와 기회의 땅이라 일컫는 남쪽 이곳에 떨어진 건 불시착이었을까. 우주의 어느 낯설고 추운 혹성에 불시착한 우주 비행선처럼 말이다.

 

날개가 부러진 미그19기를 다락방에 두고 밖으로 나왔을 때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에 온몸을 맡긴 채 달렸다. 집에 당도했을 때 밤 열두 시 반이 막 넘고 있었다. 불 꺼진 방문에서 수영 형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일상의 틈새를 힘겹게 통과하는 마찰음 같은 소리. 위잉, 소리를 내며 밤하늘을 날던 백두번개가 떨어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형의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선 채 한참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흠뻑 젖은 옷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6

 

 

“가게 여기저기 파손된 데도 복구해야 하는데, 좀 일찍 올 수 없니?”

 

이튿날 하교하자마자 가게로 갔지만, 사모님의 목소리엔 짜증이 잔뜩 묻어 있었다.

 

경찰은 내가 넘겨준 회원명단을 중심으로 조사를 벌였다. 회원명단에는 이 지역 사람 외에 타지역 사람도 섞여 있었다. 때문에 조사는 사건 후 하루 이틀 내에 끝날 수 없었다. 그 사이 제품문의 메일이 여러 통 날아왔다. 사건 소식을 미처 접하지 못한 회원들이 보낸 것이다. 그 회원들을 조사대상자에서 지워나간다 해도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녀석들이 지문 같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발생 일주일째에 접어들었는데도 범인 추적은 난항이었다. 오히려 녀석들은 버젓이 제품문의 메일을 사건 다음날 보내오는 능청을 부리기까지 했다.

 

사모님은 팔짱을 낀 채 쇼윈도 앞에 서 있었다. 플라스틱 인형만큼이나 딱딱하고 차가운 표정이었다. 사장님은 계산대 의자에 앉아 장부만 하릴없이 뒤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사건 이후 가게 안에서는 숨소리 내는 것도 조심했다. 도둑맞은 물건과 현금까지 피해액수는 적지 않았다. 플라 모델 상자가 찌그러지거나 흠집이 생겨서 제값에 팔 수 없는 것이 많았다. 쇼윈도와 벽에 비치해놓은 전시용 플라 모델도 상당수 부서졌다. 게다가 사장님의 외도문제까지 터졌다.

 

도난사건이 있은 다음날 가게 안이 한참 어수선한 때였다. 가게에 들어서는데 유리문을 열기 전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가게 안에는 맞은편 스포츠용품점 주인아저씨와 미래부동산소개소 이 씨가 싸움을 말리고 있었다. 사모님이 사장님의 멱살을 쥐고 소리를 질렀다.

 

“또 계집질이야. 내가 지겨워, 지겨워서 못살겠다고 이놈아.”

 

사모님의 힘은 셌다. 자그마한 사모님에게 멱살이 잡힌 사장님이 맥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사모님은 별렀다는 듯 끝장을 보겠다는 태세였다.

 

“내 저럴 줄 알았지. 사장새끼 쌤통이다. 여자한테 처바를 돈 있으면 나나 주면 좀 좋아.”

 

창고로 들어섰을 때 나는 상자들을 정리하던 창용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플라 드림을 찾는 손님은 줄었다. 사장 부부 사이에선 찬바람과 한숨만 오락가락했다. 경찰은 용의자에 대한 단서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독이 오른 사모님은 담당형사에게 짜증스럽게 쪼아댔다.

 

“도대체, 도둑을 맞았는데 도둑이 없을 리 있겠어요? 수사를 하긴 하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이 근방에 절도전과가 있는 놈들도 다 조사해 보고, 회원명단을 중심으로도 백방으로 조사를 해본 결과 깨끗해요. 이쪽은 아닌 거 같고.” 서에서 전화가 온 건 담당형사가 돌아간 지 세 시간 후였다. 수화기를 귀에 바짝 댄 사모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구요?”

 

창용의 눈빛이 흔들렸고, 나의 시선과 부딪쳤다. 서로 긴장한 기색을 확인한 창용과 나는 사모님을 쳐다보았다.

 

“어머, 기막혀. 말이 다 안 나오는군요. 네, 네, 곧 가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사모님의 얼굴은 며칠 전 사장님의 외도사실을 확인했을 때만큼 흥분해있었다. 현장사진을 들이밀며 사장님의 멱살을 잡아 흔들던 사모님의 표정을 다시 보는 듯했다.

 

사모님이 헉헉대며 통화내용을 말했다. 동네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치려 했다는 신고로 나발쟁이를 연행했다. 추궁을 하던 중 나발쟁이가 플라 드림 도난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낌새를 포착했고 여기에 미래부동산 이 씨의 제보로 나발쟁이의 거처까지 확보했다. 그곳이 야산 아래이면서 공원이 끝나는 지점에 버려진 폐가라는 사실에 모두 의아해했다. 형사들은 폐가를 덮쳤고 그 결과 폐가 이 층 다락방에서 다수의 플라 모델들을 발견했다. 전화내용의 요는 플라 드림 주인이 현장으로 직접 와서 없어진 물건들이 맞는지 확인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사모님은 창용이와 함께 유리문을 밀고 황급히 나갔다. 나는 심장이 마구 뛰었다. 가보지 않아도 그곳 선반과 탁자 위에 늘어놓은 플라 모델들 수십 점을 하나하나 다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들을 보는 순간 경악할 사모님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무조건 도둑맞은 플라 모델들이라고 형사에게 말할 게 뻔했다. 그 옆에 선 창용은 없어진 물건들이 맞다고 확인해줄 것이고.

 

사모님과 함께 유리문을 밀고 들어온 창용은 웃음으로 번들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알 수 없는 미스터리 현장을 보고 왔다는 표정이었다.

 

“야,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냐?”

 

“……?”

 

“그 나발쟁이가 플라 모델 마니아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날 없어진 물건 중에 가장 고가였던 무선모형 미그19기까지 발견됐어. 어떻게 된 거야? 왜 그 물건이 거기 있지?”

 

창용이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내 귀에다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잘된 일이야. 이번 일 우리한텐 아무 걱정거리가 없어진 거라니깐. 나발쟁이가 아주 우릴 도와준다. 안 그래?”

 

“…….”

 

아무 말 없이 나는 바닥에 대걸레를 밀었다.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틀 뒤 나는 쇼윈도 진열장 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새로운 전시용 플라 모델을 진열해야 했는데 그전에 바닥과 유리창에 낀 먼지를 닦아내는 중이었다. 플라 모델들을 한쪽에 밀어 둔 채 물걸레로 통유리를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문질렀다. 그런데 통유리에 나방이 붙어 있었다. 팔을 뻗어도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누런 나방이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힘을 주어 좀 더 위로 팔을 뻗어 보았다. 닿지 않았다. 통유리에 손을 대고 발끝을 세우다가 하마터면 중심을 잃어 옆에 놓인 플라 모델을 발뒤꿈치로 칠 뻔했다. 당황한 나는 자세를 바로 하여 다시 발끝을 세우고 팔을 뻗어보았다. 나방은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손에 든 물걸레를 정확하게 조준해서 나방을 향해 힘 있게 던졌다. 물걸레를 던지고 나서야 나는 나방이 통유리 안이 아니라 밖에 붙어 있었다는 걸 알았다. 물걸레가 유리면에 턱, 하고 닿자 나방은 진동을 느꼈는지 누런 날개를 파르르 떨며 유리면 위를 빙빙 돌더니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문득 정체를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솟구쳤다. 눈앞에서 사라진 나방이 나발 아저씨를 감옥에 가게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방이 앉았던 통유리 위쪽을 향해 물걸레를 팽개치듯 던졌다.

 

통유리 위에서 물걸레가 떨어지자마자 내 시선은 밖으로 향했다. 유리문 우측에서 좌측으로 분홍색 차 보자기를 손에 든 다방여자가 껌을 질겅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만 했다. 유리문 앞으로 다방여자가 지나가는 걸 어제도 보았다. 유리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옆 건물 일 층 미래부동산으로 들어갔다. 막 전화벨이 울렸다. 송수화기를 든 사모님이 아저씨를 불러오라고 말했다. 나는 유리문을 밀고 나갔다. 반쯤 열린 미래부동산 유리문 너머로 남자들이 가죽소파에 엉덩이를 파묻고 앉아 있었다. 플라 드림 사장님 옆으로 미래부동산 이 씨, 그 앞에는 길 건너 주유소를 하는 필록이 아버지 그리고 자주 소개소를 들락거리는 구청직원으로 보이는 남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보조의자에 앉은 다방여자가 보온병을 기울이자 커피 잔 위로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뛰어들어가 사장 아저씨를 부를까 하다가 문밖 고리 틈으로 귀를 세웠다. 누구의 것인지 한 목소리가 흥분하고 있었다.

 

“그런 배라먹을 도둑놈이 우리 가까이 있었다는 게 끔찍한 일이지요. 그런 놈들이 괜히 우리 주위에 밭 붙이지 못하게 해야 돼요. 비 피하고 바람 막아줄 곳이 없어야 했는데.”

 

“난 말이오. 그놈이 어디서 살 길래 훤한 대낮이면 멀쩡하게 출근하듯 거릴 어슬렁대나 궁금했어. 어디서 기어 나오나 했더니 그게 그 폐가였구만.”

 

“나도 몰랐어. 그 놈이 거기서 살고 있었다니.”

 

“혹시 그 놈 버려진 집에 보상금 노리고 점유권 행세 할라고 들어가 살았던 거 아닐까?”

 

“그야 모르지 아무튼 이번에 잡혀 들어간 거 잘 된 거라니까.”

 

“처음엔 쭈뼛쭈뼛 나는 모르는 일이오하고 멀뚱거렸대요. 벙어리처럼 말이죠. 그러다가 결국 순순히 자백하더랍니다.”

 

“그래, 그 폐가가 있으니까 그런 놈들이 기어들어가서 버티고 살았던 거야. 암. 이번 기회에 무슨 수를 써야 해요. 안 그래도 그 일대 재개발계획이 옥신각신 지연되었는데 이제야 일이 수월하게 되겠어요.”

 

“그 폐가가 문제였거든. 소유주를 찾을 수 있어야지 원. 게다가 그 놈이 거기서 들어가 산 게 아마 일 년도 안 되는 모양이니 점유권 같은 건 턱도 없지. 잘 됐어. 아주 잘 됐어요.”

 

“맞아요. 아주 잘 됐어요. 자 마셔요. 커피는 프림 팍팍 넣고 뜨거울 때 확 들어야 해.”

 

잘 된 일이라니. 나는 그냥 가게로 돌아갔다. 사모님에겐 사장님이 화장실 갔는지 미래부동산 사무실에 보이지 않더라고 말했다.

 

창고에 들어가 불도 켜지 않은 채 문을 닫았다.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틈새로 들어오는 빛을 응시하다 눈을 감았다. 미그 19기를 몰고 귀순한 이야기를 하던 나발 아저씨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내가 버려진 집에 플라 모델들을 두지 않았더라면 나발 아저씨는 감옥에 가지 않았을까. 야산에 올라 미그 19기를 날리며 환하게 웃던 나발 아저씨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상했다. 알 수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정체불명의 두려움이 밀려왔다. 목구멍 속에서 꿈틀대는 수많은 말들을 누구한테 모두 털어놓고 싶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도 없었다. 수영형? 어림도 없는 일이다. 형에게 실망만 줄 뿐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자 텅 빈 세상에 나 혼자 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플라 모델로 가득 들어찬 어두운 창고 안이 갑자기 무섭게 느껴졌다. 몰래 훔치며 짜릿함을 맛보았던 전과 달랐다.

 

나는 창고에서 나와 고향 빵집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울었니?”

 

“그냥 눈물이 나네요.”

 

“너도 이제 나이를 먹으려는 모양이구나. 나이를 먹으면 눈물이 많아지는 법이란다.”

 

“할아버지도 나발아저씨가 했다고 믿습네까?”

 

“글쎄다. 난 모르겠다. 그 사람은 충분히 이곳에 적응해서 잘 살만한 사람이었어. 전에 누구더라, 나이를 먹으니 기억력도 엉망이네 그랴. 누구한테 들었는지 기억은 도통 안 나지만 그 양반 처음에 정부에서 받은 정착금을 사길 당했다나, 돈을 몇 배로 불려준다는 꼬임에 넘어가 빈털터리가 된 거라던데. 그래서 같이 살던 마누라도 도망가고, 막노동으로 전전하면서 겨우 살았다는데 참 안된 일이야. 순박한 사람이었는데. 술이 죄다. 그놈의 술 말이다.”

 

술 때문이라니. 할아버지는 가끔 엉뚱하게 말이 휘어버린다. 정곡을 찌르지 않고 넓게 정곡 언저리를 덮는 말을 하곤 해서 내가 다 헷갈렸다. 그래도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처지여서인지 모르겠다. 안타까운 건 내가 먹는 나이는 계속 소화를 해내는데, 할아버지가 먹는 나이는 소화가 되질 않고 곧잘 토해진다는 것이다. 그건 하얀 머리카락이 되기도 하고 늘어져 접히는 주름이 되거나 눈물이 된다. 많이 토해서 할아버지가 탈진하게 되면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을 보지 못하게 될지 모르겠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내 고민을 말해도 될까.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 더 뒤돌아보고는 발길을 돌렸다.

 

 

나는 그 길로 경찰서로 갔다.

 

발걸음마다 땅바닥에 쩍쩍 들러붙는 기분이 들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경찰서 정문에 ‘믿음직한 경찰 안전한 나라’라는 문구와 함께 경찰복장을 입은 마스코트가 보였다.

 

건물 입구에서 경찰 아저씨가 무슨 일로 왔느냐며 나를 가로막았다.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발 아저씨를 만나러 왔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아저씨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무슨 일로 왔는지 말해라. 누굴 만나러 온 거냐?”

 

나는 누굴 만나러 왔는지 제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많은 대화를 했었던 나발 아저씬데 이름을 모른 채였다는 게 어이없었다. 그때 나를 수영 형에게 보내주었던 경사 아저씨가 지나가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너 여기 무슨 일로 온 거냐. 또 말썽 피운 건 아니지?”

 

나는 경사 아저씨에게 매달렸다. 이름을 대진 못해도 조금 안면이 있다고 경사 아저씨에겐 누굴 만나고 싶다는 걸 말할 수 있었다. 할 말이 있어요. 십 분이면 돼요. 아니 오 분만이라도. 경사 아저씨는 동료에게 눈짓을 하더니 나를 나발 아저씨가 갇힌 철창 앞에 데리고 갔다.

 

“아저씨 납네다.”

 

나는 경사 아저씨가 저만치 비켜주는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철창 안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나발 아저씨가 고개를 들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아저씨.”

 

“넌 여기 와서는 아이 돼. 올 필요도 없오. 의심받기 전에 날래 가라.”

 

“아저씨 다 알고 있었습네까? 왜 자백하셨습네까?”

 

“무슨 소리네? 내가 다 한 짓을 내가 했다고 한 것뿐인데.”

 

“…….”

 

“차라리 잘된 일이야. 안 그래도 감옥에 들어올 방법을 찾고 있었오. 게다가 가을 닥치고 곧 겨울인데, 당분간은 먹고 자는 건 해결한 셈 아니네. 감옥에 있는 게 내래 편한기야. 감옥 밖이 오히려 더 감옥 같아 못살겠오.”

 

“…….”

 

“네가 아무 말 안 하고 모른 척하는 거이 고거이 나를 위한 배려가 될 기야. 찾아와 줘서 고맙다. 난 아무렇지 않아.”

 

눈물이 고였다. 나발 아저씨는 바보처럼 네가 왜 울긴 우냐, 하며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내가 우는 이유는 아저씨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단지 아저씨가 안쓰러워서가 아니다. 알 수 없는 통증이 전류처럼 나의 몸 중심부를 관통했기 때문에 참을 수 없어 눈물이 났다고 말한다면 아저씨는 이해할까.

 

부끄럽다고 느끼자마자 온몸을 질러오는 통증이었다고 한다면 말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배려라는 걸 한다는 게 고작 모르는 척, 입을 다무는 일이라니.

 

아무래도 나는 앞으로 ‘배려’라는 말을 생각할 때 부끄러움까지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경험한 첫 배려는 부끄러움이었으니까. 복잡한 설계도의 플라 모델을 수도 없이 만든 내가, 죽을 똥을 싸면서 탈북해 중국에서 힘든 시간을 견뎌냈던 내가 겨우 말이다. 나는 아저씨에게 ‘미안합네다’ 한마디만 건네고 경찰서를 나왔다.

 

경찰서 입구를 막 나서려는데 경사 아저씨가 어깨를 툭 쳤다.

 

“종안이 이 녀석, 아까 무슨 일로 그렇게 울었어?”

 

깜짝 놀란 나는 얼굴에 온 신경을 쏟아 정색을 하며 말했다.

 

“기냥요. 기래도 같은 고향 아저씨잖습네까. 안타깝고 기래서….”

 

“그래. 안타까운 일이다. 참 이거 가져가거라. 현장에서 나온 물건들 돌려주는 과정에서 빠졌더구나.”

 

경사 아저씨가 내민 것은 날개에 초록색 테이프를 감은 무선모형미그19기였다.

 

“어떠냐. 요즘 착실하게 잘 지내고 있는 거지?”

 

“네. 그럼요.”

 

나는 눈물자국으로 어룽어룽해진 얼굴에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곤 무선모형미그19기를 들고 얼른 거리로 내달렸다.

 

 

포크레인이 버려진 집을 무참히 밟고 지나간 건 사건이 종결된 보름 뒤였다. 흉물스러웠던 그 집은 부서져 잔해가 되었다.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도 우스갯소리로 증발해버렸다.

 

초가을의 햇살이 쏟아지는 한낮에 나는 그 집 앞에 섰다. 누군가 몰래 갖다 버린 쓰레기 더미와 보기 흉한 건물 잔해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발걸음을 옮기려다 문득 고개를 돌렸다. 잔해 속에 부서진 플라스틱 조각들이 보였다. 경찰들이 수거할 때 빠뜨린 플라 모델인 모양이었다. 다락방의 일렁이는 촛불 아래서는 퍽 커 보였던 것들이었다. 무선모형 미그19기와 나란히 선반 위에 놓였던 것 중에 어떤 것일 터다. 장갑차였을까, 잠수함이었을까. 부서진 건물 잔해와 먼지 속에 그것들은 쓸모없는 플라스틱 쪼가리에 불과했다.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깨진 기왓장 아래 햇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유리조각이었다. 유리덮개가 깨진 채 탁상사진액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허리를 굽혀 손끝으로 깨진 유리조각을 걷어냈다. 액자 틀에 끼워진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을 빼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고양이의 가냘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대낮이었는데도 오싹한 전율이 등줄기를 긋고 내려갔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곤 부서진 집 뒤로 난 경사로로 내달렸다. 야산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었다. 무작정 오르고 올랐다. 엄마 아빠의 손을 놓친 채 국경에서 도망치던 숨 가빴던 기억을 더듬으며 기어올랐다.

 

중턱쯤 오르자 나발 아저씨와 올랐던 지점에 이르렀다. 아래로 공원 전경이 보였다. 플라 드림이 있는 건물 앞 삼거리도 훤히 내려다보였다. 초가을 하늘은 말끔히 닦아놓은 통유리처럼 맑았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얇은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누렇게 바랜 사진을 꺼냈다. 사진 속에 군복을 입은 청년이 미그 19기 앞에 서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감옥 밖이 오히려 더 감옥 같아 못살겠오.’

 

웃고 있는 입가에서 생생한 목소리가 울려나오고 있었다. 바람소리였을까. 나발 아저씨는 웃음을 머금은 채 빛바랜 사진 속에 갇혀 있다. 감옥 같은 삶을 벗어나기 위해 미그19기를 몰고 모험을 감행했지만 착륙한 곳은 또 다른 감옥이었나. 감옥 아닌 곳이 세상엔 없는 걸까. 문득 사진 속 나발 아저씨의 모습 위로 수영 형이 겹쳐졌다. 아니 그건 내 모습이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미그 19기를 보았다. 한쪽 날개에 초록색 테이프가 두세 겹 감겨 있다. 손톱으로 테이프의 끝에서 손가락 마디만큼씩 두 조각을 잘라냈다. 잘라낸 테이프 조각으로 미그19기의 동체 위에 사진을 붙였다. 나방의 날개처럼 부스러지거나 파닥거리지 말기를 기대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잘 날 수 있을까.’

 

리모컨을 손에 쥐고 미그19기를 힘껏 날렸다. 그것은 시퍼런 멍뿐인 하늘을 정면으로 찔러버릴 듯 한순간 위로 솟았다. 넓게 원을 그리며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식으로 수직선회를 했다. 하늘을 동그랗게 오려내는 비행이었다. 두 번째 선회를 하고 세 번째 선회를 하는 동안 이 광경을 나발 아저씨가 봤으면,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늘에 동그란 구멍이 뚫렸다. 그 속으로 미그19기가 빨려 들어가듯 뻗어나갔다. 넓게 포물선을 그린다 싶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것이 사라진, 아니 무사히 내려앉았을 저 아래 어딘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플라 모델 동호회 일주년 기념행사를 공원에서 거창하게 하려던 계획은 진행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자중했다.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은 여전히 창용이가 떠들어대는 새로운 플라 모델 입고정보에 침을 삼키고 눈을 반짝거렸다.

 

〈끝〉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 김언수

 

 

 

시월 이일 아침.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했다.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그는 책상 서랍을 열어 이제는 시일이 지나 업무상 아무런 가치가 없는 서류 파일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업무상 다소 가치가 있어 보이는 서류 파일들도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주 많은 것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책상 서랍 속에는 여전히 파일철, 모나미 볼펜, 호치키스, 클립 같은 잡다한 사무 용품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모두 꺼내서 자신의 책상 위에 펼쳐 놓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그에게는 이제 소용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옆자리에 있는 미스 김에게 혹시 이 중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가져도 좋다고 말했다. 미스 김은 그의 책상 위를 힐끔 보고 약간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맙지만 자신에게도 그 정도의 사무 용품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잡다한 사무 용품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느닷없는 그의 대청소를 보고 사무실 동료들이 다가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을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동료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동료들이 던진 질문은 그의 난데없는 행동에 대한 형식적인 관심에 불과했으므로 그가 말한 프라이데이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 더 옳다. 동료들은 프라이데이는 또 뭐야? 하고 중얼거리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동료들이 돌아가자 그는 다시 오른쪽 상단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그 서랍 속에는 업무용 일기장과 명함첩 그리고 가족 사진이 끼워진 액자가 들어 있었다. 그는 우선 명함첩을 꺼내서 그 중 몇 장을 뒤적거렸다. 대부분의 명함들은 이름을 읽어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 참 웃기는 일이군,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 명함첩은 사진 앨범처럼 얇은 비닐로 덮여 있어 칸마다 명함을 끼워 넣을 수 있게 만든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텔레비전에서 무려 7만장이나 되는 명함을 모은 일본의 전설적인 자동차 영업 사원을 다룬 휴먼 다큐멘터리를 보고 감동 받아 산 것이었다. 그 전설적인 자동차 영업사원은 수백 권의 명함첩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자신은 명함 속의 사람들(7만 여명의 사람들)과 지난 40년 간 지속적인 신뢰와 우정을 쌓아왔으며 그 두터운 신뢰와 우정은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자 성공의 발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의 전설적인 자동차 영업 사원의 말에 지나치게 감동을 받았다. 7만 여명의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우정과 신뢰를 나눌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근사한 것인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 후로 그는 일본의 전설적인 자동차 영업 사원이 들고 있던 것과 비슷한 명합첩을 사서 정성 들여 명함을 모으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그도 7만 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몇 천명 정도와는 지속적인 우정과 신뢰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고작 몇 백 명도 안 되는 명함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도 지속적인 우정과 신뢰는커녕 얼굴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프라이데이와 결별했으므로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명합첩에서 일일이 명함을 꺼내 쓰레기통에 버리기 시작했다. <한진 유통 영업부 과장 김말두>, <찌라시, 홍보물, 스티커 전문. 완당 마스터. 대표 구준엽>, <신속 배달. 현진 택배. 한기동> 같은 명함들을 그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는 문득 명함첩에서 일일이 명함을 꺼내는 것이 무척 귀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명함이 필요 없다면 명함첩은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그는 명함첩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업무용 일기장 속에는 아직 깨끗한 속지가 많이 남아 있었으므로 그는 그것을 가방 속에 넣었다. 그리고 액자 속에 들어 있는 가족 사진도 가방 속에 넣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가족 사진을 꺼냈다. 가족 사진이 왜 서랍 속에 들어 있었는지 그는 의아했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가족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에는 나이가 들면서 지방과 외국으로 흩어지거나 급환과 교통사고로 죽은 그의 가족들이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듯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손을 꼭 붙잡고 있었을까?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때 그의 입사 동기지만 직급은 한 끗발 높은 K가 다가와서 열시 반에 상무님이 참석하는 <공격적 마케팅에 관한 전략 회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알았다고 말했다. K가 난데없이 책상 정리는 왜 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프라이데이와 결별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K는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프라이데이? 프라이데이가 누구지? 하고 물었다. 그는 K에게 프라이데이가 누군지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머리 속에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할까. 그는 이리저리 머리 속을 굴려보다가 문득 프라이데이는 내 친구라고 말했다. 잠시 후 그는, 하지만 어쩌면 프라이데이는 내 친구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다시 말했다. K가 뭐야 지금 장난하는 거야? 하고 물었다. 그는 장난하는 것은 아닌데 프라이데이에 대해 잘 설명을 못하겠노라고 말했다. 사실 그는 프라이데이가 누군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을 더구나 불충분한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아주 곤혹스러운 일이었으므로 그는 딴청 피우듯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약간 머쓱해진 K는 덩달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에는 한 사내가 앞 건물의 유리창을 닦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사무실은 17층에 있었으므로 사내도 17층이나 16층쯤에서 유리창을 닦고 있었을 것이다. 사내는 손으로 조절하는 밧줄에 매달려 있었는데 그가 보기에 사내의 장비는 다소 위험하고 원시적으로 보였다. 더구나 밖에는 바람이 심하게 부는지 사내는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손으로 꼭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앞 건물에 매달려 있는 유리창 청소부는 그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내는 이 근처의 빌딩 유리창 청소를 전문적으로 하는 용역업체 직원으로 예전에 그의 회사에 유리창을 닦으러 왔을 때 그와 몇 마디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높은 빌딩에 매달려 유리창 청소를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늙은 사내였다. 그 늙은 사내는 빌딩 창문에 매달린 채로 유리창에 노크를 해서, 죄송하지만 물 한 컵만 얻어 마실 수 있겠느냐고 그에게 매우 공손하게 물었었다. 그는 흔쾌하게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환풍창을 통해 건네 주었다. 그때는 여름이었다. 늙은 사내는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그가 가져다 준 컵은 아주 작은 것이었으므로 늙은 사내는 물을 마시고는 조금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가 컵을 받으면서 물을 더 드릴까요? 하고 묻자 늙은 사내는 그렇지만 너무 염치가 없는 것 같아서, 하고 머뭇거렸다. 그는 정수기에는 물이 많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하면서 두 번이나 더 물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늙은 사내에게 컵을 건네면서 자신은 높은 곳을 무서워해서 빌딩 유리창 닦는 일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연이어 그는 나이도 많으신 분이 이렇게 높은 곳에 매달려 일을 하시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늙은 사내가 손사래를 치면서 익숙해지면 무섭지도 않고 그리 힘들지도 않으니 대단할 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일을 오래 했냐고 물었다. 늙은 사내는 한 30년 정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늙은 사내는 그에게 컵을 건네주고 몇 번씩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에 줄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었다.

 

그가 늙은 사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빗방울 몇 개가 예리한 각도로 유리창에 부딪혔다. 비가 오는군. 그가 말했다. 그럴 리가, 오늘은 날씨가 화창할 거라고 일기예보에서 말했는데? K가 옆에서 말했다. 그렇지만 지금 빗방울 몇 개가 떨어졌는걸. 그가 다시 말했다. 그가 말을 마치자 빗방울은 좀더 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기예보 신봉자인 K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잠자코 창문을 바라보았다. 앞 건물에 매달려 있는 늙은 사내는 비가 내리자 옥상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옥상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17층에 매달려 있던 늙은 사내는 자신이 앉아 있던 발판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늙은 사내의 허리춤에 있던 안전 벨트가 밧줄과 엉켜서 늙은 사내의 허리를 붙잡았다. 늙은 사내는 엉거주춤하게 앉은 자세로 안전 벨트를 풀어보려 하지만 잘되지 않는 것 같았다. 늙은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호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안전 벨트를 잘랐다. 늙은 사내가 다시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발판이 기우뚱했다. 순간, 늙은 사내의 몸이 허공에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늙은 사내가 급히 밧줄을 잡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늙은 사내가 잡은 밧줄은 이미 자신이 잘랐던 안전 벨트의 밧줄이었다. 늙은 사내는 안전 벨트와 함께 17층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그는 놀라서 "앗!"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곧 그는 자신도 모르게 1초, 2초, 3초 하고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늙은 사내가 17층에서 떨어져 지면에 다다를 때까지의 시간을 재었다. 사내가 떨어지는 시간은 딱 3초였다. 늙은 사내는 그의 삶에 남아 있는 마지막 시간을 공중에서 허둥대다 보냈다. 늙은 사내의 몸은 아스팔트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진 찰흙처럼 퍽! 하고 일그러졌다. 그 광경을 보고 그는 참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고무공처럼 몇 번 튕겨 오를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한 인간의 죽음을, 그것도 자신과 조금이나마 안면이 있었던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고작 떨어지는 시간이나 재고 있었다는 것에 큰 죄책감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자신에 대한 일종의 배반감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는 늙은 사내가 죽는 광경을 보고 애도하는 마음을 가지기는커녕 왜 고무공처럼 튕겨 오르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없는 상상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아주 나쁜 심성을 가지고 있는 악마 같은 부류의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옆에 있던 K가 갑자기 아주 큰 소리로 "이봐! 이봐! 저기 사람 떨어졌어!" 하고 말했다. 그러자 사무실 직원들은 보물찾기를 하는 아이들처럼 진짜? 어디? 어디? 하고 소리지르면서 창가로 모여들었다. K가 유리창 청소부가 떨어져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직원들이 창가에 모여서 웅성거리거나 탄성을 지르면서 죽음을 구경하는 저마다의 놀라움을 표현했다. 눈이 나쁜 여직원 한 명이 저기 까만 쓰레기 재활용 봉투처럼 보이는 것이 그 시체냐고 K에게 물었다. 그러자 K가 "내가 처음부터 지켜봤는데 말이야 떨어지는 데 딱 3초 걸리더만, 죽는다는 게 그렇게 싱거운 일이야." 하고 신이 난 듯 말했다. 그는 K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K도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계속 K를 쳐다보자 K는 뭐 어떠냐는 듯이 어깨를 살짝 들어올렸다. 그는 K에게 "저 사람,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야" 하고 말했다. K는 저 사람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늙은 사내가 회사 유리창을 청소하러 왔을 때 자신이 물을 가져다 주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K는 피식 웃으면서 "여기 4천만의 친구가 나타나셨군." 하고 말했다. 그는 갑자기 K가 몹시 미워졌으므로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고 현장으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들고 있었다. 사람들 때문에 찰흙처럼 일그러진 사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직원들은 "정말 신기하다.", "나는 사람 죽은 거 처음 봤어." 같은 말들을 떠들어대면서 모두들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사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직원들은 금세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그는 책상 서랍을 다시 열어보았다. 이제 책상 서랍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을 했으므로 더 이상 사무실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사무실을 나서기 위해 가방을 들었다. 가족 사진 액자 때문에 가방의 지퍼가 닫히지 않았으므로 그는 가방에서 가족 사진을 꺼냈다. 그리고 가족 사진을 다시 한참동안 들여다보다가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파란색 플라스틱 쓰레기통은 그가 버린 업무상 가치가 있거나 혹은 가치가 없는 서류 파일들과, 그가 이름을 보아도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 명함들로 이미 가득했으므로 그는 가족 사진을 버리기 위해 쓰레기통 안을 발로 꾹꾹 밟아야 했다. 그가 쓰레기통 안을 발로 꾹꾹 밟고 있을 때 다시 K가 다가와서 부장님도 참석하고 더구나 상무님까지 참석하니 열시 반에 있을 <공격적 마케팅에 관한 전략 회의>에 늦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알았다고 했다.

 

그는 사무실을 나와서 잠시 휴게실에 들렀다. 그리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잔 뽑고 담배를 피웠다. 몇 번이나 찢어질 듯한 싸이렌 소리가 빌딩 유리창을 타고 올라왔다. 그는 고개를 내밀어 늙은 사내가 떨어진 지점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기 때문에 늙은 사내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문득 아까 K가 말한 일기 예보를 떠올렸다. K가 들은 일기 예보에 따르면 오늘 날씨는 화창해야 했다. 그렇다면 유리창 청소부의 죽음에 기상청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비가 오는 줄 알았다면 늙은 사내는 유리창을 닦기 위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늙은 사내의 죽음과 상관없이 오늘 저녁 뉴스에도 여전히 예쁘장한 리포터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일의 비 올 확률이 20% 라든가 혹은 비 안 올 확률이 20% 라고 말 할 것이다. 그러자 그는 조금 화가 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했다.

 

열시 반에 그는 회사문을 나섰다. 물론 프라이데이와 결별했으므로 <공격적 마케팅에 관한 전략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사실 회의에 참석한다고 해도 공격, 전략, 마케팅에 대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공격이니 전략이니 하는 말들은 언제나 그를 두렵게 만들곤 했었다. 그러나 그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장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장이 생각하기에 상무님이 참석하는데 나머지 부하 직원들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화가 난 부장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합리적인 이유를 그에게 추궁할 것이다. 어쩌면 프라이데이가 도대체 누구냐고 물어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퍽 곤혹스러운 질문이다. 그는 프라이데이가 누구인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만큼 똑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회사 빌딩의 회전문을 밀치고 나왔을 때 회사 앞에는 119 구조대와 경찰들이 몰고 온 구급차와 경찰차 그리고 소방차로 혼잡했다. 거기다가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기 위해 노란 테이프로 선을 쳐 두었기 때문에 거리는 마치 폭탄 테러를 당한 도시처럼 삼엄하고 부산스러웠다. 그는 사내가 살아 있을 때는 알량한 밧줄 하나만을 내려주던 이 사회가 죽은 시체를 위해서 저렇게 막강한 장비와 인원을 보낸다는 것이 다소 의아했다.

 

그는 늙은 사내의 마지막 모습이 어떻게 되었는지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지만 사고 현장은 너무나 복잡했고 또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다는 안내판을 붙이고 경찰들이 접근을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이내 포기하고 돌아섰다. 그는 늙은 사내가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빌딩 유리창에 30년 동안이나 매달려 살았고, 죽어서는 저렇게 관계자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노란 테이프 속에 갇혀 있으니 늙은 사내의 인생은 무척 외로웠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방울은 이제 내리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한방 쏟아질 듯한 두껍고 무거운 구름들이 낮게 깔려 있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일기예보가 사람을 죽이다니, 그렇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우선 회사 근처에서 한시라도 빨리 멀어지고 싶었으므로 종로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업무 시간이어서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다. 빌딩의 옥상 위에는 왕관을 쓴 것처럼 저마다 거대한 광고판이 올려져 있었고 그 광고 속에 들어 있는 예쁜 여자들은 맥주나 샴푸 같은 것을 손에 하나씩 들고 이런 상품을 가지게 되어서 너무나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행나무 가로수들은 그가 걷는 보도 위에 엽서 같은 낙엽들을 노랗게 떨구었다. 그것을 보니 그는 가을이 왔다는 것을, 그가 좋아하는 시월이 왔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회사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그는 조금씩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종로 쪽으로 걸어가기 위해서는 건널목을 건너야 했으므로 그는 회사에서 출발한 이후 처음으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빨간 신호가 파란 신호로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문득 '그래, 이제 뭘 하지?' 하고 자신에게 조용히 물었다.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그럼 너는 무엇을 하고 싶지?' 하고 다시 자신에게 물었다. 여전히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토록 회사를 떠나고 싶었는데 막상 회사를 박차고 나오자 이제와서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퍽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이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회사를 박차고 나온 지는 아직 10분도 채 되지 않았으므로 이제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조금 걷다보면 '무엇을 할 것인지', '혹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가 곧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보도 블록 위를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조금씩 더 가벼워졌다. 사실은 그의 발걸음은 너무나 가벼워져 그는 뜀박질이라도 해서 한참 동안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걷고 있는 거리의 보도 블록들과 가로수들이 "좋아! 잘했다구!" 하면서 그에게 박수를 쳐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땅히 달려가야 할 곳이 아직 떠오르지 않았으므로 그는 여전히 천천히 걸었다.

 

무교동의 L 화재 건물 앞에서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껌이나 신문 같은 것을 판매하는 가판대에서 바나나 우유를 하나 샀다. 그 우유는 그가 어릴 때 목욕탕에 가면 아버지가 사주던, 레미콘 탱크를 바로 세워 놓은 듯한 모양 그대로였다. 아직도 레미콘 탱크 모양의 바나나 우유가 나오는군. 그는 신기해하며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아 천천히 마셨다. 그리고 가판대 앞에 있는 신문 판매대에서 연예인 B양이 국회 의원 J와 섹스는 두 번밖에 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항문 섹스를 해줬다는 기사는 터무니없는 낭설이라고 부인하는 스포츠 신문의 일면 기사를 읽었다. 스포츠 신문 일면에는 큰 글씨체로 <연예인 B양 항문 섹스 적극 부인!> 이라는 머릿글을 달고, 그 아래 수많은 방송국 마이크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연예인 B양 사진을 싣고 있었다. 그는 저렇게 예쁜 여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항문 섹스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면 그 말은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예인 B양이 국회의원 J와 항문 섹스를 했건 안 했건 그런 것이 어떻게 신문 일면 기사로 나올 수 있는지 조금 의아했다. 신문은 반으로 접혀져 판매대에 꽂혀 있었으므로 <국회의원 J의 요청에 못 이겨 호텔에서 두 번 만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항문>까지만 읽을 수 있고 나머지 기사는 다른 편에 접혀져 있었다. 그는 나머지 기사가 궁금했으므로 스포츠 신문을 판매대에서 살짝 꺼냈다. 그러자 가판대 안에 있던 뚱뚱한 여자가 "신문 사실 거예요?" 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이 기사만 조금 더 보면 되므로 살 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뚱뚱한 여자는 "사지도 않을 거면서 신문은 왜 뽑아요?" 하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뚱뚱한 여자가 너무나 우악스럽게 말했기 때문에 그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는 재빠르게 신문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 두었다. 연예인 B양에게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기왕에 보던 것이었으므로 반으로 접혀져 있어 보이지 않는 기사가 궁금했다. 그는 뚱뚱한 여자에게 일면 기사를 조금만 더 보면 되는데 잠시만 신문을 꺼내서 보면 안되겠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자 뚱뚱한 여자는 그를 잠시 쳐다보더니 "우리는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알아요? 보고 싶으면 돈주고 봐요."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신문 판매대 위에는 <일반 신문 400원. 스포츠 신문 500원> 이라고 가격이 적혀 있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 속에는 바나나 우유를 사고 받은 잔돈 500원이 있었다. 하지만 곧 연예인 B양이 국회의원 J와 항문 섹스를 정말로 했는지 안 했는지를 알기 위해 돈을 500원이나 주고 신문을 산다는 것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사가 바나나 우유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바나나 우유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리고 스포츠 신문 일면 기사에 나온, 수많은 마이크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연예인 B양 사진도 슬쩍 바라봤다. 연예인 B양은 큰 심리적 고충을 겪고 있는지 화장기 없이 초췌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할 만큼 예뻤다. 연예인 B양의 사진을 보자 그는 국회의원 J가 왜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끝장낼 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섹스를 해야했는지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는 가판대 안에 있는 신경질적이고 뚱뚱한 여자에게 500원을 줬다. 뚱뚱한 여자가 "신문 사시게요?" 하고 훨씬 상냥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손을 저으며 "신문말고 바나나 우유 하나 더 주세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 빨대도 같이 달라고 덧붙여 말했다.

 

20분쯤 후에 그는 종로 3가에 도착했다. 막상 종로에 도착하자 그는 자신이 왜 종로에 왔는지 의아했다. 왜냐하면 그가 종로에 와야만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가 종로에 와야하는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과 같이 종로에 오지 말아야 할 이유도 또한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종로 3가의 금강 제화 앞에서 종로 1가 방향과 종로 5가 방향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는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종로 1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5분쯤 걷다가 국세청 신축 건물 앞에 도착했다. 국세청 건물은 아주 웅장하면서도 특이했다. 국세청 건물은 신축 건물이라 그런지 깨끗하기도 했거니와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통유리로 되어 있어 마치 저런 곳에서 세금을 거둔다면 정말 공정하고 투명하게 세금을 걷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국세청 건물 앞의 광장에 서서 그 웅장한 건물을 천천히 바라봤다. '내가 낸 세금이 모두 저곳으로 흘러 들어갔구나'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자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국세청 건물로 걸어가서 유리로 된 벽면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국세청 신축 건물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그의 얼굴은 까칠까칠했다. 그는 입을 벌려 이빨 사이에 고춧가루 낀 것이 없는 지 찾아보았다. 고춧가루는 없었다.

 

그는 국세청 앞의 광장에서 이제 뭘 해야할지 혹은 어디로 가야할 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는 별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도 가고 싶은 곳도 없다니 참 이상하군,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종로 5가 쪽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 라고 쓰여진 옷을 입은 한 사내가 그에게 다가와서 "심판이 가까워왔습니다. 제발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 라고 말하며 그에게 천국 가는 전단지를 건네 주었다. 그는 얼떨결에 그 전단지를 받았다. 전단지에는 하늘로 재림하는 예수의 그림이 담겨져 있었고 아래쪽에는 사탕 두 개가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그는 천국 가는 전단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사탕 두 개를 입 속에 넣고 천천히 빨아먹었다.

 

그는 10분 뒤에 종로 5가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제 뭘 할 것인가. 혹은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다시 종로 1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그는 종로 1가에서 종로 5가를 다섯 차례나 왕복했다. 어쩌면 더 많이 걸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국세청 앞에 도착할 때마다 거대한 통유리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고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혹은 뭘 할 것인가, 이것도 저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너는 도대체 뭘 하고 싶은가를 자신에게 물어봤다. 하지만 종로 1가에서 종로 5가까지 다섯 차례나 걸어다니면서 생각을 해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갈 곳이 없었다. 또한 특별히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없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너무나 바빠서 갈 곳이 없었고, 너무나 바빠서 하고 싶은 일을 못 했으며, 또 너무나 바빠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시간을 내지 못 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그동안 너무나 바빴다. 그런데 이제 그에게 비로소 시간이라는 게 주어졌는데 왜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할 일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 것일까. 그는 답답한 심정이 되었다.

 

그는 다시 종로 5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는 <예수 믿고 천국 갑시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을 지나고 금강제화를 지나고 탑골 공원을 앞을 지나가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탑골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탑골 공원에는 땅바닥을 쪼고 있는 비둘기와 몇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있었고 그 외에는 모두 노인들이었다. 노인들 중 몇은 등나무 아래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노인들은 그냥 있었다. 노인들은 늙은 코끼리처럼 천천히 눈을 껌벅거리면서 정말로 그냥 서 있거나 그냥 앉아 있었다.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고 특별히 무엇을 하지도 않은 채 단지 지팡이를 짚고 그냥 앉아 있거나 지팡이를 짚고 그냥 서 있었다. 그는 모두가 "죄송해요. 요즘은 너무도 바빠서 말이죠." 라고 말하는 이 속도감 넘치는 시대에 이렇게 느릿느릿 움직이는 곳이 있다는 것이 조금 신기했다. 노인들은 담배도 아주 천천히 피웠는데 담배를 한 모금 들이마시고 내뿜는데 거의 10초도 넘게 걸리는 것 같았다.

 

담배를 피우는 노인들을 보자 그도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생각해보니 평소에 그는 하루에 한 갑 정도의 담배를 피우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회사 휴게실에서 담배를 태우고 난 다음 여지껏 단 한 대의 담배도 피우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기 위해 호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주머니 속에서 라이터가 잡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양복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여전히 라이터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회사 휴게실에 라이터를 두고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 수 없이 그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라이터를 하나 사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담배 한 대를 피우기 위해 라이터를 새로 사는 것은 어쩐지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집에는 족히 백 개도 넘는 라이터가 있었다. 부장은 업무가 일찍 끝나는 날마다 회사 직원들을 데리고 레벤 호프와 비비안 룸 단란주점에 갔다. 그때마다 레벤 호프 사장은 그가 분명히 라이터가 많이 있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대리. 우리 가겐 이 대리 없으면 쓰러져. 그런데 이깟 라이터가 문제야. 그리고 단체 손님이나 접대 예약할 때 필요하잖아. 전화해주면 서로 좋지." 하고 말하면서 그의 양복 주머니에다가 라이터를 넣어 주었다. 비비안 룸 단란주점의 마담은 "이 대리님은 재미없게 부장님하고만 같이 오더라. 그러지 말고 젊은 분들끼리도 모여서 오고 그러세요. 서로 나이가 맞아야 애들이 스페셜로 서비스를 들어가지." 하고 말했다. 그리고 뇌쇄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그의 안주머니 깊숙이 개인전화번호가 들어있는 은밀한 라이터를 넣어주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접대 예약용 라이터와 은밀한 라이터가 무려 백 개나 있었다. 잘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어쩌면 백 개가 넘을 지도 모른다. 그밖에도 갈비집, 대리운전, 일식집 등등에서 받은 수많은 라이터가 있었으므로 사실 그는 평생 쓰고도 남을, 어쩌면 웬만한 사무실 하나정도는 폭파시킬 수도 있을 만큼 많은 라이터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라이터가 그렇게 많은데 고작 담배 한 대를 피우기 위해 다시 라이터를 사는 것은 건전한 소비 행위가 아니며 또한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물품이 공급되어야 하는 효율적인 유통 경제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는 이제 실업자 신세가 되었으므로 작은 것이라도 절약해야 했다. 그는 라이터를 하나 사는 것보다 담뱃불을 잠시 빌리는 것이 더 옳은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탑골 공원에는 그가 담뱃불을 빌릴만한 사람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공원에는 노인들과 비둘기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같이 젊은 사람이 노인들에게 담뱃불을 빌린다는 것은 어쩐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노인들 외에는 비둘기밖에 없었는데 불행히도 비둘기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라이터를 지니고 다니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야할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결국 그는 젊은 사람이 나이 드신 분에게 담뱃불을 빌리는 행위가 분명 예의 바른 행위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노인들에게 제대로 예의를 갖추고 사정을 이야기한다면 그렇게까지 무례한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식수대 옆 벤치에 한 노인이 흡사 독립 운동 시절의 김구 선생이 입었을 법한 검정색 두루마기를 입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노인의 모습은 너무나 근엄해 보여 정말 아직도 어디선가 독립 운동을 하고 있는 노인처럼 보였다. 그가 노인 쪽으로 다가가자 갑자기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그는 약간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그는 비둘기들이 점령하고 있는 식수대로 가서 손을 살짝 저어 새들을 쫓아내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비둘기들은 잠시 날아올랐다가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노인에게 다가가 꾸벅 인사를 했다. 노인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안녕하세요 어르신 저는 이석만이라고 합니다." 하고 말했다. 노인은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연이어 그는 "죄송하지만 제가 어르신께 무례한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난데없이 "일 없어. 나는 물건 안 사." 하고 말했다. 그는 노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 했으므로 "예? 무슨 말씀이신지?" 하고 물었다. 노인은 "지금 나에게 물건 팔려고 그러는 게지?" 하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노인은 다시 "자네 건강 식품이니, 물리 치료 기구니 그런 거 팔려고 하는 거 아니야?" 하고 다시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인이 "그럼 뭐야?" 하고 물었다. 그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제가 할아버님께 담뱃불을 좀 빌리자고 하면 크게 실례가 되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저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다시 그의 말을 잘라서 "나는 라이터 있어! 좋은 라이터야. 우리 아들놈이 선물해준 거" 하고 말했다. 그는 다시 "예?" 하고 물었다. 노인은 "나는 라이터 있다고. 지금 나한테 라이터 팔려고 하는 게지?" 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다시 한번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노인은 그럼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을 끝까지 들어주시면 어르신이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노인은 "정말 물건 팔려는 게 아니야?" 하고 재차 물었다. 그는 자신은 정말 물건을 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노인은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물건을 팔려는 게 아니면 끝까지 들어 줄테니 말해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어르신에게 담뱃불을 빌리려고 했는데 그것은 큰 실례가 되는 일이라고 먼저 말했다. 왜냐하면 어르신처럼 연세가 지긋하신 분에게 제가 담뱃불을 빌린다는 것은 젊은 사람이 해야 할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독립군 스타일의 노인은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프라이데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절대로 연세가 많으신 분에게, 특히 어르신처럼 인품이 고매해 보이는 분께는 절대 담뱃불을 빌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라는 말에 악센트를 주어서 자신이 할아버지의 인품을 고매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다. 노인은 여전히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얼마나 라이터가 많은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그 많은 라이터들은 자기가 원한 바가 아니며 그가 분명히 싫다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레벤 호프 사장과 비비안 룸 단란주점의 마담이 막무가내로 자신의 양복 상의에 넣어주었기 때문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모인 라이터가 무려 백 개가 넘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렇게 라이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에게는 담배는 있지만 라이터가 없으며, 그래서 고작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이기 위해 라이터를 하나 더 산다는 것은 건전한 소비 생활과 효율적인 유통 경제의 측면에서 옳은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노인은 다소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물론 자신처럼 젊은 사람이 어르신에게 담뱃불을 빌린다는 것은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그것은 순전히 지금 탑골 공원에 노인들과 비둘기밖에 없는데다, 비둘기가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생긴 일이지 자신이 어르신에 대한 공경심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라고 말했다. 노인은 그를 멀뚱멀뚱 바라보더니 "그러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자네가 노인에 대한 공경심이 투철하다 뭐 이거야?" 하고 물었다. 그는 좀 답답하고 한편으로 짜증스러웠다. 그는 간단하게 말하면 어르신에게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 담뱃불을 좀 빌리고자 함이었다고 말했다. 노인은 그를 한 3초 정도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그냥 라이터만 빌려주면 되는 거야?" 하고 말했다. 그는 좀 어리둥절했지만 자신이 했던 긴 이야기는 라이터를 빌리기 위함이었으므로 "예"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노인이 그에게 라이터를 빌려주면서 "이 사람아 그러면 와서 불 좀 빌려주십시오 하고 간단히 말하면 되지 뭐가 그렇게 복잡하나?" 하고 말했다.

 

그는 얼떨결에 라이터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곧장 담배에 불을 붙인 것은 아니었다. 지금껏 노인에 대한 공경심을 이야기한 그가 노인 옆에서 태연히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이율배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노인에게 저 쪽에 가서 불을 붙이고 오겠노라고 말했다. 노인은 그냥 여기서 피면 되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말했다. 그는 그래도 그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노인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는 식수대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서도 노인이 보였으므로 그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다시 한 개를 더 꺼내 불을 붙여 피웠다. 연속해서 두 대의 담배를 피우자 그는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속에서 구토가 올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갑자기 어지러워졌으므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담뱃불을 발로 비벼 꼈다. 그는 한참동안 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탑골 공원 위를 뒤뚱거리며 걸어다니는 문화적인 비둘기들을 구경했다. 그는 비둘기는 저리도 자유로운데 왜 이 도시를 떠나지 않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비둘기들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는 이제 구토도 현기증도 사라진 것 같았다.

 

그가 라이터를 돌려주기 위해 노인을 만났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어쩐 일인지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노인이 잠시 화장실이라도 갔나 싶어 한참동안 기다렸지만 노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야할까 하고 잠시 고민했다. 노인이 준 라이터는 흔히 쓰는 일회용 라이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노인은 아들에게 선물 받은 좋은 라이터라고 했지만 그가 보기에 노인이 준 라이터는 선물용 고급 라이터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지만 일회용 라이터를 아버지에게 선물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좋은 라이터라고 여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노인의 자유이므로 그것까지 그가 간섭할 일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쨌든 이것은 그의 라이터가 아니라 노인의 라이터이므로 그는 노인을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는 담배를 세 대나 피우면서 한 시간이나 노인을 기다렸지만 노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더구나 아주 가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자 탑골 공원에 있던 많은 노인들은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곧장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는 옷을 벗고 침대 위에 누웠다. 탑골 공원에서 비를 맞은 탓인지 몸이 몹시 떨렸다. 그리고 머리도 아팠다. 그는 머리를 만져보았다. 열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목도 아프고 편도선도 부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감기에 걸렸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상관없이 한 달에 한 번 꼴로 감기에 걸렸다.

 

그것은 통유리로 막혀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어떤 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과 하루 종일 같이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사무실 사람들은 모두 상냥하게 웃고 있지만 입 속에는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환기가 잘되지 않는 사무실의 공간 속으로 에볼라 바이러스 같은 흉측한 균이 마구 떠다니는 상상을 했다. 누군가 입 속에 숨겨온 그 균은 미스 김의 재채기를 통해 사무실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과장의 폐를 한 바퀴 돌았다가, 결재 서류를 놓고 부장이 잔소리를 할 때마다 침과 함께 날아다닌다. 아무리 비누로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그 균은 악수를 할 때마다 손에서 손으로 전염되고 술잔을 돌릴 때마다 입에서 입으로 전염된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감기보다 더 심각한 병에 걸렸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때때로 이유도 없이 머리에 열이 나고 구토와 설사가 나곤 했었다. 출근길에 지하철 안에서나 회사 계단을 오를 때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자리에 풀썩 주저앉기도 했었다.

 

그는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이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점령군처럼 돌아다니며 건강한 세포들을 감금하고 마구 고문하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몸 속의 기관들이 점점 부패되고 돌연변이를 일으켜 자신이 결국에는 끔찍한 괴물로 변하게 되는 상상을 했다. 그런 상상을 하자 그는 갑자기 두려움에 몸서리가 쳐졌다. 끔찍한 일이군. 그러자 그가 지금 머리에 열이 있는 것은 미스 김의 재채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다. 보신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김과장이 구더기나 뱀 같은 것을 먹을 때 기생충의 털에서 발생한 바이러스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가 한 달에 한 번 꼴로 걸려왔던 그냥 일상적인 감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감기에 걸렸으면 양치질을 하고 자야 하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양치를 하지 않고 잠이 들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잤다. 다시 일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 동안 잠들어 있었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방은 반지하였지만 실제로는 반지하보다 더 내려간 3/4 지하였고 그나마 있는 작은 창문은 옆집의 LPG 가스통 덮개에 가려 있어 낮에도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이 몇 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자명종 시계를 바라봤다. 그의 자명종 시계는 며칠 전부터 건전지가 다 되어 정지해 있었다. 굳이 시간을 알고자 한다면 116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면 되겠지만 그는 이제 프라이데이와 결별했으므로 꼭 시간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으므로 그는 배가 몹시 고팠다. 그는 무엇이든 배달을 시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관문을 열고 손잡이 옆에 어지럽게 붙어 있는 광고 스티커들을 읽어 내려갔다. <황제 보쌈. 334-9420>, <한 판 시키면 한 판 더! 와우 피자 335-6789>, <스피드 중화반점 334-8282> 그는 전화번호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삼삼사에 팔이팔이, 삼삼사에 팔이팔이" 하고 계속 중얼거리면서 전화를 걸었다. 40대 중반의 사내가 "예, 친절과 고객 감동의 스피드 중화반점입니다" 하고 말했다. 중국집 주인의 목소리는, 가판대에서 만난 뚱뚱한 여자의 퉁명스럽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와는 다르게, 정말 너무나 친절하고 맑게 들려와서 그는 순간 당황했다. 그는 자장면 한 그릇도 배달이 되느냐고 물었다. 전화기 속의 사내가 "그럼요. 걱정 붙들어 두세요. 저의 스피드 중화반점은 자장면 한 그릇이라도 언제나 친절과 고객 감동으로 배달해드립니다." 하고 말했다. 그는 스피드 중화반점 주인의 말에 감동을 받아 자장면 대신에 좀 더 비싼 짬뽕을 시켰다. 짬뽕은 정말 금방 배달되었다. 하지만 별로 고객을 감동하게 할 만한 맛은 아니었다. 그는 짬뽕을 허겁지겁 먹고 짬뽕 그릇을 문 밖에 내놓았다. 짬뽕 그릇은 먹다 남은 국물 때문에 아주 지저분해 보였다. 그는 저렇게 지저분하게 그릇을 돌려주는 것은 짬봉 한 그릇이라도 정성 들여 배달해주는 스피드 중화반점의 친절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짬뽕 그릇을 들고 들어와 찌꺼기를 싱크대에 버리고 물로 대충 씻어서 다시 문 밖에 내놓았다. 훨씬 보기가 좋았다. 배달원이 깨끗한 그릇을 가지고 돌아갈 걸 생각하니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담배를 한 대 물고 그의 집에 백 개도 넘게 있는 라이터 중에서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를 피우자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여전히 머리에는 열이 있는 것 같았다. 편도선도 부어 있고 구토가 날 것 같기도 했다. 그는 현기증이 나고 머리에 열이 있는 것은 나쁜 병균에 감염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미스 김에게 옮아온 바이러스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뱀이나 너구리같은 것을 좋아하는 김과장의 몸 속에서 생긴 기생충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하청을 따기 위해 그에게 접대를 했던 중소 기업의 사장들이 괘씸한 마음에 음식이나 술에 나쁜 병균을 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곧 이것은 그냥 그가 한 달에 한 번씩 걸렸던 일상적인 감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감기에 걸렸으면 양치질을 하고 자야 하는데,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양치질을 하지 않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는 오랫동안 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때 그는 몇 시인지 모두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했으므로 이제 시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배가 몹시 고팠다. 그는 방문을 열고 문에 붙어 있는 스피드 중화반점 스티커를 보고 "삼삼사 팔이팔이 삼삼사 팔이팔이" 하고 중얼거리며 스피드 중화반점에 전화를 걸었다. 주인은 친절과 고객 감동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짬뽕을 시켰다. 짬뽕은 정말 빨리 배달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고객을 감동시킬 만한 맛은 아니었다. 그는 짬뽕을 국물까지 다 비우고 싱크대에서 그릇을 씻은 뒤 문밖에 내 놓았다. 그리고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머리에 다시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편도선은 더 부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또 한 대를 더 피웠다.

 

그는 머리에 열이 나는 것은 감기 때문이고 감기에 걸리면 양치질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감기에 걸리면 입 속에 병균이 우글거리고 그 병균은 양치질을 해야만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입 속의 병균은 몸 속으로 들어가 그의 몸을 마구 공격할 것이다. 그리고 입 속의 병균들을 깨끗이 씻어내지 않으면 조그만 사무실에서 숨을 쉴 때마다 자신의 병균들이 공기 중에 날아올라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이 상하는 거야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까지 감염시키는 것은 정말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가 지금 머리가 아픈 것은 사무실에서 누군가가 감기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양치를 하지 않아서,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매일매일 단정하게 면도를 하고, 깨끗하게 다려진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사무실의 남자 직원들과 공을 들여 화장을 하고, 보기에도 멋있고 청결한 옷을 입고 다니는 여직원들 중에 누가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을 입 속에 숨겨두고 있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그에게 너무나 친절하게 대했으므로 누가 입 속에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을 숨기고 있었는지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입 속에 숨어사는 창을 든 나쁜 병균과 감기와 현기증과 구토와 잔뜩 부어오른 편도선과 친절에 대해 계속 중얼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으므로 처음에 눈을 떴을 때는 한동안 목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회사를 며칠이나 무단 결근하게 되었는지, 또 오늘은 몇 일이고 몇 시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곧 그는 그런 것은 이제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배가 몹시 고팠다. 그는 문을 열고 중국집 전화번호를 읽은 다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늘 들려오는 친절과 고객 감동의 스피드 중화반점이라는 멘트는 그 날 따라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거기가 중국집이냐고 물었다. 주인은 여기는 중국집이 맞다고 말했다. 그는 거기가 중국집이 맞다면 짬뽕을 하나 배달해달라고 말했다. 주인은 화가 나지만 최대한 억제하는 목소리로 지금은 새벽 세시고 우리 집은 스물네 시간 하는 집이 아니라서 지금은 배달을 할 수 없노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은 지금 배가 몹시 고픈데 언제나 친절과 고객 감동의 스피드 중화반점이라면 짬뽕 한 그릇쯤은 배달해줄 수 있지 않느냐고 다시 물었다. 중국집 주인은 "이 새끼야 감동이고 지랄이고 지금이 몇 시인 줄이나 알아? 새벽 세시야. 새벽 세시. 새벽 세시에 자장면 배달시키는 미친놈이 어디 있나. 할 일없으면 잠이나 쳐자." 하고 말하고 전화를 딸깍 끊었다. 그는 중국집 주인의 성난 목소리에 잠시 당황스러웠다. 그는 중국집 주인의 말대로 그냥 잠이나 쳐잘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도 배가 고팠고 또 며칠인지 모르는 아주 긴 시간 동안 내내 잠만 잤기 때문에 다시 잠을 자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는 오늘이 몇 일인지 모르지만 중국집 주인의 말에 따르면 지금은 새벽 세시고, 새벽 세 시에는 지극한 친절과 고객 감동도 쉬어야 하는 때이기 때문에 배달이라는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선 약간 실망감이 들었다. 그는 지금이 새벽 세시라면 회사에 무단 결근을 한지 이틀째 되는 새벽 세시일까 아니면 사흘째 되는 새벽 세시일까를 생각했다. 그러나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의 무단 결근에 대해, 특히 상무님이 참석하는 <공격적 마케팅에 관한 전략 회의>에 빠진 것에 대해 회사 사람들은 상당히 당황해하고 있을 것이다. 부장은 이 사실에 대해 대단히 분노할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부장과 같은 합리주의자가 어느 날 아침 난데없이 프라이데이와 헤어지고 싶었다는 그의 상황을 이해할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부장은 프라이데이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그가 이런 해괴한 일을 벌이는지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부장은 곧 그의 이런 행동들이 업무상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또한 이해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단정지을 것이다. 더군다나 상무님께 보고해야 할 통계 서류들을 회사를 빠져나오면서 쓰레기통에 꾹꾹 발로 밟아 버렸기 때문에 부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합리적인 형식으로 상무님께 아무것도 변명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회사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별로 두려울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부장이 아무리 화가 났다 하더라도 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핸드폰을 회사에 두고 나왔다. 또 육 개월 전에 이사를 오면서 인사과에 주소 변경 사항을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반지하 방의 위치를 회사 사람들은 모른다. 또 회사 사람들은 그의 핸드폰 번호만 알 뿐 집 전화번호는 알지 못한다. 부장이 이런 사실을 두고 상사로서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 그를 약간 기분 좋게 했다. 상무님께 뭐라고 보고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부장의 모습을 상상하자 약간 고소한 기분도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프라이데이와 부장은 어쩐지 닮은 곳이 한두 군데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여간 지금 그는 새벽 세시에 일어났고 배가 몹시 고팠다. 그러나 새벽 세시는 친절과 고객 감동도 잠을 자야만 하는 시간이다. 그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너무도 배가 고팠으므로 24시간 편의점에서 라면이라도 사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거리로 나왔다.

 

새벽 세시의 거리는 한산했지만 반대편 인도에서는 양복을 입은 취객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어 다소 시끄러웠다. 그들은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동료들처럼 보였는데 두 명은 멱살을 잡고 싸우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벼룩 시장'이나 '가로수' 같은 정보지를 놓아두는 보급대를 발로 차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두 명이 멱살을 잡고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급대를 발로 차는 사내와 다른 사내를 한 사내가 중간에서 말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주먹질이라도 벌어지면 재미있는 구경이 될 것 같아 한참동안 그들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금방이라도 서로에게 주먹질을 할 것처럼 서로에게 심한 욕설을 해댔지만 정작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욕설만 할뿐이었다. 그는 에이 시시하군, 하고 중얼거리며 계속 길을 걸어갔다. 이따금 오토바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리를 지나갔다. 상점은 대부분 푸른 셔터를 내린 채 문을 닫고 있었다. 그는 백 미터 정도를 걸어갔지만 24시간 편의점은 보이지 않았다. 퇴근하는 길에 어디선가 24시간 편의점을 본 것도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는 네거리의 중앙에 섰다. 그리고 동쪽으로 이백 미터를 걸어갔다. 24시간 편의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네거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다시 서쪽으로 사백 미터를 걸어갔다. 24시간 편의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네거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북쪽과 남쪽으로 각각 이백 미터를 걸어갔지만 24시간 편의점이 보이지 않아서 다시 네거리로 돌아왔다. 그는 약간 허탈해진 마음에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선 동서남북으로 갈라진 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유통과 물품의 천국에서 24시간 편의점이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길 건너편에서는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여전히 주먹질은 하지 않은 채 서로에게 심한 욕설을 해대고 있었고 이따금 요란한 소리를 내는 오토바이 폭주족들이 비틀비틀거리며 아스팔트를 지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는 이렇게 동서남북으로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24시간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땅히 물어볼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길 건너편에서 싸움을, 아니 욕설을 하고 있는 사내들에게 24시간 편의점의 위치를 묻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었다. 오토바이 폭주족들이라면 여기저기를 뽈뽈거리며 잘도 돌아다니니까 24시간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잘 알겠지만 그들을 세워서 길을 묻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다시 담배 한 대를 더 물었다. 그때 투피스를 입은 여자 한 명이 길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고 사무원처럼 단정해 보였다. 여자는 거리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 양복 입은 사내들 때문에 겁을 먹은 듯 몹시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그는 사무원 복장을 한 여자라면 편의점의 위치를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건너편의 사내가 "그래 때릴 테면 어디 한번 때려봐! 이 개새끼야." 하고 악을 썼다. 여자는 그 소리에 깜짝 놀랐는지 사내들과 여자 사이의 거리가 꽤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호가 채 바뀌기도 전에 건널목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여자의 걸음은 대단히 빨랐으므로 그는 여자에게 편의점의 위치를 묻기 위해 재빠르게 다가가야 했다. 그가 너무 빠른 속도로 다가가자 여자는 깜짝 놀라서 "어머!"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여자를 놀라게 할 맘은 없었다는 뜻으로 손을 살짝 들었다. 그리고 여자에게 "저 뭘 좀 물어 보려고 하는데요." 하고 말을 건넸다. 여자는 그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여전히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여자가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고 판단했으므로 여자에게 다시 "저 말씀 좀 여쭙겠는데요." 하고 말했다. 여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걸음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는 여자와 나란히 걸으면서 혹시 이 근처에 사시냐고 물었다. 여자는 아까보다 더욱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거의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 여자를 따라 걸으면서 자신은 24시간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찾고 있는데 혹시 이 근처에 살고 있다면 24시간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알지 않겠나 싶어서 물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여자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으므로 그는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아주 살짝 여자의 옷을 잡으며 "저 아가씨" 하고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여자가 괴성을 지르면서 핸드백으로 그의 안면을 강타했다. 여자의 핸드백 속엔 무슨 묵직한 것이 들어 있었는지 그는 아주 큰 충격을 받고 건물 옆에 있는 화단으로 쓰러졌다. 여자는 그를 때린 후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가 어느 정도 충격에서 깨어나 다시 일어서 보니 여자는 20미터 정도 앞에 있는 가로수 옆에 쓰러져 있었다. 아마도 앞도 안 보고 정신없이 뛰어가다가 가로수 받침대에 걸려 넘어진 모양이었다. 그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했지만 곧 여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여자는 가로수 받침대에 심하게 부딪힌 모양으로 이를 꼭 다물고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가 다가가자 여자는 몸을 바짝 움츠렸다. 그는 이 상황이 아주 당황스러웠으므로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우선 여자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여자는 그의 안면을 강타했던 핸드백을 가슴에 꼭 안았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여자에게 자신을 왜 때렸냐고 물었다. 여전히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곧 여자를 향해서 팔을 내밀며 다친 것 같은데 일어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리고 팔을 내밀어 여자의 팔목을 잡고 천천히 일어서 보라고 말했다. 그때 그의 코에서 코피가 쏟아져서 여자의 스커트 위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여자가 "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손등으로 코피를 훔치고 손가락으로 코를 막았다. 코피가 멈추지 않고 그의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코를 강하게 눌렀다. 입 속으로 피가 한 움큼 고여서 그는 꿀꺽 하고 피를 마셨다. 그때 여자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다시 그를 세차게 밀쳤다. 그리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여자의 옷을 재빨리 잡았다. 여자의 옷자락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다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가 말했다. 여자가 눈물을 터트렸다. "잘못 했어요. 집에 가게 해주세요." 여자가 말했다. 그가 "헛!"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몸을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그는 몹시 난처해져서 자신은 아가씨를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근처에 24시간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던 것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자는 몸을 해바라기 씨처럼 더욱 오므리고 이제는 덜덜 떨기까지 하면서 "원하시면 돈을 드릴께요." 하고 말했다. 그는 여자의 이런 모습에 당황스러움과 함께 화가 나기까지 하였다. 그는 여자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시 그런 심정이 들었다는 것일 뿐 정말로 그가 여자를 때릴 생각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코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으므로 그는 소매로 피를 닦고 고개를 젖혔다. 그는 고개를 젖힌 채로 여자에게 자신은 어디까지나 편의점의 위치를 물으려 했던 것뿐이라고 말했다. 연이어 그는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다시 물었다. 여자가 서쪽으로 난 길을 가리키며 백 미터쯤 가다가 좌측으로 꺾으면 된다고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여자가 가리킨 방향은 그의 뒤쪽에 있었으므로 그는 몸을 돌려 그 방향을 바라봤다. 그가 신라 제과점에서 꺾으면 되느냐고 물으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여자는 다시 "엄마야" 소리를 지르며 허겁지겁 도망을 갔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맹렬히 도망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쓰러져 있던 가로수 옆에는 구두 한 짝이 벗겨져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그 구두 한 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뭐야. 자기가 신데렐라야?" 하고 중얼거리면서 피식 웃었다.

 

여자의 말대로 24시간 편의점은 서쪽으로 백 미터쯤 가다가 왼쪽으로 꺾어서 이백 미터쯤 가니 나왔다. 그는 24시간 편의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어서 오세요." 하는 인사를 했다. 그는 여기는 새벽 세시에도 친절과 고객 감동이 잠을 자지 않는군 하고 생각했다. 그는 편의점을 한 바퀴 돌아봤다. 편의점의 즉석 식품 코너에는 라면뿐만 아니라 잣죽이며 단팥죽, 자장면, 쇠고기국밥, 스파게티같이 뜨거운 물만 넣거나 전자 레인지에 데우기만 하면 삼 분 안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다양한 음식들이 그것도 편리하게 삼 분 만에 요리가 된다면 얼마 가지 않아서 식당들은 모두 문을 닫게 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이런 음식들은 스피드 중화 반점처럼 지극한 정성과 고객 감동으로 배달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식당들은 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쇠고기국밥, 우거지국밥, 신라면, 왕뚜껑같이 즐비하게 있는 즉석 음식들 속에서 어떤 것을 먹으면 좋을까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음식이 있었으므로 선뜻 어떤 것을 먹어야할 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그는 계산대 앞으로 걸어갔다. 계산대에는 파란색 조끼를 입고 왼쪽 가슴에 <아르바이트. 최무이>라는 명찰을 단 20대 초반의 사내가 있었다. 그는 "최무이씨?" 하고 아르바이트생의 이름을 불렀다. 아르바이트생은 그가 한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생은 "죄송합니다. 손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고 친절하게 다시 물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아르바이트생의 명찰을 가리키며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했다. 아르바이트생은 자신의 조끼 왼쪽에 붙어 있는 명찰을 보고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들 끄덕거린 후 그러나 최무이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면 왜 명찰을 달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르바이트생은 최무이는 그만둔 아르바이트생의 이름인데 자신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명찰이 없고 그러나 명찰을 꼭 달고 있어야 하는 것이 본사의 규정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달고 있는 것이라고 다소 멋쩍어하면서 말했다. 그는 아르바이트생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므로 자신은 지금 라면을 살 생각인데 어떤 라면이 가장 맛있냐고 물었다. 최무이라는 가짜 명찰을 단 아르바이트생은 그것은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이 쉽게 권해줄 수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 최무이씨는 어떤 라면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아르바이트생은 자신은 안성탕면을 즐겨 먹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최무이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니 그렇게 부르지 말아달라고 웃으면서 상냥하게 말했다. 그는 우선 최무이씨라고 불러서 죄송하다고 말한 다음 안성탕면은 어디 있으냐고 물었다. 아르바이트생은 편의점의 한쪽 끝을 가리키며 왼쪽 두 번째 칸에 있다고 말했다. 왼쪽 두 번째 칸에는 과연 안성탕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컵라면처럼 용기에 들어 있어 즉석으로 먹을 수 있는 라면이 아니라 냄비 같은 것에서 끓여 먹어야 하는 봉지에 든 라면이었다. 그는 다시 계산대로 돌아와서 컵라면으로 되어 있는 안성탕면은 없느냐고 물었다. 안성탕면은 원래 컵라면 용기로는 나오지 않는다고 가짜 명찰을 단 아르바이트생이 말했다. 그는 그 말에 다소 충격을 받아서 소고기국밥도, 우거지국밥도, 심지어 단팥죽이며 잣죽 하다 못해 떡볶기 같은 것도 즉석 용기로 나오는데 안성탕면이 컵라면 용기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아직 자신의 명찰이 나오지 않았지만 본사의 지시 때문에 부득이하게 최무이라는 가짜 이름의 명찰을 달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대신 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피가 난다고 말했다. 그는 오다가 코피가 난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가짜 명찰을 단 아르바이트생이 솜을 좀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이제 코피는 멎은 것 같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르바이트생은 물에 젖은 티슈를 그에게 건네면서 그래도 피는 닦으셔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냉장고에 비친 얼굴을 보면서 피를 닦았다. 안성탕면은 용기에 든 것이 없었므로 할 수 없이 그는 그냥 봉지로 되어 있는 안성탕면을 열 개 사서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편의점 앞에는 경찰 두 명과 파란색 츄리닝을 입은 덩치가 좋은 사내가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파란색 츄리닝을 입은 덩치 좋은 사내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그의 멱살을 잡았다.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는 멱살을 잡고 그의 목을 흔들면서 "너를 찝쩍댔다는 놈이 바로 이 놈이야?" 하고 물었다. 사내가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아까 네거리에서 만난 여자가 경찰 뒤에 숨어 있었다. 여자는 경찰 뒤에 숨어서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잔뜩 흥분한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가 그를 향해 "이 새끼 눈깔을 파버린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이 다가와서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를 다독거리며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선생님은 진정하시라고 말했다. 그러나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는 더욱 힘을 줘서 그의 멱살을 잡고는 길거리에서 연약한 여자를 괴롭히는 이런 놈은 감옥에 집어넣어서 사회와 격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에게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우선 놓아주라고 말했다. 하지만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는 여전히 멱살을 놓지 않았다. 안경을 낀 경찰이 계속 이러시면 선생님도 폭행죄로 잡혀 갈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제서야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는 그의 멱살을 놓았다. 그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경을 낀 경찰이 그에게 다가와서 잠시 파출소에 같이 가주셔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선생님은 폭행과 강제 추행범으로 지금 체포됐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가 "헛" 하고 헛웃음을 쳤다.

 

그는 무슨 사소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저 여자에게 물어보면 오해가 금방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이 사소한 오해는 일단 파출소에 가서 풀어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가 "뭐 사소한 오해? 저 개새끼 뻔뻔하게 말하는 거 좀 봐! 확 죽여버릴까보다" 하고 그에게 다시 달려들려고 했다. 의경처럼 보이는 젊은 경찰이 파란색 츄리닝을 입은 사내를 말렸다. 안경을 낀 경찰이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파출소에 가서 이야기하자고 그를 떠밀었다. 그는 떠밀리다시피 경찰차의 뒷자석에 올라탔다.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가 다가와서 저런 놈과는 같은 차에 타고 싶지 않으니 자기는 여동생이랑 택시를 타고 파출소에 가겠다고 말했다. 여동생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파란색 츄리닝의 사내는 여자의 오빠쯤 되는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의 오빠가 도대체 자신에게 왜 그러는 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새벽 네 시의 파출소 안은 난장판이었다. 몇은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고 50대 중반의 아저씨는 파출소 소장을 잡고 계속 큰 소리로 무슨 이야기를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두 명의 경찰이 음주 운전 측정기를 40대 아줌마에게 들이대면서 계속 측정을 거부하시면 아줌마만 더욱 불리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40대 아줌마는 더욱 불리해질 텐데도 불구하고 계속 음주 측정을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파출소 소장은 아주 유순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사람으로 그가 경찰의 손에 끌려 들어왔을 때 "그 분은 왜?" 하고 '그 분' 이라는 경어를 사용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거리에서 젊은 여자를 강제 추행하다가 잡혀 왔다고 말했다. 파출소 소장은 그 정도 일은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파출소 소장이 "피해자는?" 하고 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이 "약간 놀란 것 외에 별다른 상처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파출소 소장은 조금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아니 피해자는 어디 있냐고?"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지금 택시 타고 오고 있다고 말했다. 파출소 소장이 "빨리 조서 꾸며."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자기 자리로 그를 안내하더니 앉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노트북에 파워를 넣었다. 그때 50대 중반의 아저씨가 파출소의 중앙으로 걸어나오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살아 있었을 때는 우리도 꿈과 희망이 있었어. 국민의 정부? 지랄 났네. 지랄 났어. 너희들이 뭐야? 경찰이야? 경찰이 경찰다워야지 말이야. 도대체 민주 경찰도 경찰이야? 한국 놈들한테 민주라는 게 말이 돼?" 하고 떠들었다. 파출소 안에 50대 아저씨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안경을 낀 경찰이 "김 의경 담배 하나만" 하고 말했다. 김 의경이 다가와서 담배 한 대를 건네며 박 경장님은 담배 끊는다는 핑계로 계속 그렇게 얻어 피우실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이 웃으면서 "너는 새끼야 나라에서 담배가 나오잖아. 그리고 정말 이것만 피우고 끊는다니까. 맛도 없는 군용 담배 가지고 생색내기는" 하고 말했다. 연이어 안경을 낀 경찰이 50대 중반의 아저씨를 가리키며 "저 아저씨는 한동안 뜸하더니 또 나타나셨네."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그에게 혹시 신분증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왜 여기에 와야하는 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은 신분증이 없으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대라고 말했다.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왜 여기에 끌려왔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이 짜증난다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이보세요 선생님. 그러니까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대면 우리가 선생님이 왜 여기에 오시게 되었는지 납득시켜드릴 테니 어서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나 대세요." 하고 말했다. 그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댔다. 안경을 낀 경찰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노트북에 치고 다시 작은 메모지에 주민등록번호를 적더니 김 의경에게 "이거 조회해봐!" 하고 말했다. 곧이어 안경을 낀 경찰은 "아까 그 여자분 오빠 되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선생님이 그 여자분에게 접근해서 강간을, 아니 강간은 아니구나, 강제로 추행을 하려 했다는데 맞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때 여자와 여자의 오빠가 파출소 안으로 들어섰다. 여자의 오빠는 아까 그의 멱살을 잡던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겸손하게 파출소 안에 들어오더니 점잖게 "수고하십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앞에 있던 파출소 소장이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여자의 오빠는 파출소 안을 한번 돌아보더니 그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파출소 소장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빠는 여자를 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말하고 그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가 파출소 안을 반쯤 지났을 때 술이 취한 50대 아저씨가 큰 소리로 울면서 "아이고. 박정희 대통령님. 박정희 대통령님. 우리들의 박정희 대통령님. 정말 그리웁습니다. 그때가 그리웁습니다." 하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는 50대 아저씨를 보고 피식 웃었다.

 

안경을 낀 경찰이 그에게 "여자 몸에 함부로 손을 대면 강제 추행으로 연행되는 거 알아요?" 하고 물었다. 그는 여자 몸에 손을 대면 강제 추행이 되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함부로 손을 대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여자에게 물어보면 알 거라고 또 말했다. 그는 여자 쪽을 바라봤다. 여자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그때 여자의 오빠가 안경을 낀 경찰에게 다가와서 다시 "수고하십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여자의 오빠에게 "그런 일 없다고 딱 잡아떼는데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여자의 오빠가 저 개새끼 죽여 버린다고 말하면서 그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오빠는 그를 향해 말하지 않고 경찰을 향해 고함을 치면서 "애가 옷이 찢어지고, 신발도 없고, 피를 질질 흘리면서 집으로 왔는데 뭣이 어쩌고 어째?" 하고 말했다. 이제 스물을 갓 넘은 듯한 젊은 의경 두 명이 와서 여자의 오빠를 말렸다. 그는 자신은 여자에게 24시 편의점이 어디 있는지 물었던 것뿐이고 여자가 핸드백으로 얼굴을 때려서 피를 흘린 것은 오히려 자기라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는 다시 경찰들을 향해 "저게 말이 돼요? 저 말이 도대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냐구요?" 하고 고함을 질렀다. 옆에서 여전히 음주운전 측정을 거부하고 있던 여자가 놀란 눈으로 여자의 오빠를 바라보았다. 안경을 낀 경찰이 일어나서 선생님은 잠시 저쪽으로 가서 앉아 계시라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가 여자 쪽으로 가고 나자 안경을 낀 경찰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선생님은 단지 편의점 위치를 물으려 했을 뿐인데 여자분이 난데없이 핸드백으로 선생님 얼굴을 때렸다 이거지요? 하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말했다. 그럼 여자분 옷은 왜 찢었냐고 안경을 낀 경찰이 다시 물었다. 그는 그것은 자신이 찢은 것이 아니라 찢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피식 웃으면서 찢었건 찢어졌건 그것이 왜 찢어지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는 여자가 자신을 때리고 도망가다가 가로수 받침대에 걸려 넘어졌는데 그가 다가가서 여자를 일으켜 세우려하자 또다시 자신을 힘껏 밀치고 도망가려해서 자신이 여자의 옷을 잡았는데 아마 그때 찢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그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머리를 움켜쥐면서 자신이 왜 여기까지 끌려와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때 김 의경이 다가와서 "이분 깨끗한데요. 전과는 없어요"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그에게 담배가 있냐고 물었다. 그는 경찰의 말을 잘 못 알아들었으므로 뭐라고 했냐고 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은 손가락으로 담배를 피우는 시늉을 하면서 담배가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는 하지만 아까 담배를 피우면서 이제 담배를 끊겠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은 웃으면서 한 대만 더 피우고 끊겠다고 말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안경을 낀 경찰에게 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이 담배를 받아 불을 붙이고는 군용 담배는 영 맛이 없어서 하고 말했다. 그리고 선생님도 한 대 피우시라고 말했다. 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안경을 낀 경찰과 같이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반쯤 피우자 안경을 낀 경찰이 선생님은 자신이 왜 이런 수모를 당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같은 경찰은 정말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과 밤마다 씨름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소리지르고 있는 저 아저씨는 멀쩡한 회사에 중역인데 술만 취하면 우리 파출소로 쳐들어와서 저렇게 박정희 찬양을 한다고 말했다. 저런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고 물었다. 연이어 안경을 낀 경찰은 세상은 원래 이해가 안 되는 것이어서 우리는 애당초 이해 같은 것은 포기하고 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해가 되건 안 되건 이런 사건은 밤마다 쉴새없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과중한 업무에 지쳐 있는 우리 경찰들을 위해서 선생님이 조금만 도와주시면 서로 편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애원하듯이 말했다. 그가 보기에도 파출소 안이 밤마다 이런 분위기라면 경찰들은 정말 업무에 지칠 것 같기도 했다. 그러자 그는 딱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그럼 자신이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은 자신이 묻는 말에 성의껏 대답만 잘 해주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알았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담배를 끄고 직장인이냐고 물었다. 그는 현재로선 직장을 다니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 언제까지 직장을 다녔냐고 물었다. 그는 며칠 동안 몸이 아파서 계속 잠을 잤기 때문에 언제부터 직장에 나가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일주일전까지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그의 말하는 방식이 답답하고 짜증스러웠는지 인상을 찌푸리고는 직장을 다녔다면 어떤 직장에 다녔냐고 물었다. 그는 S 전자 본사 영업부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안경을 낀 경찰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S 전자라고 하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그 대기업 S 전자냐고 물었다. 그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럼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S 전자지 우리가 보통 잘 모르고 있는 S 전자는 어떤 회사냐고 물었다. 안경을 낀 경찰은 S 전자라면 우리 나라에서 최고의 기업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꼭 반드시 최고의 기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은 S 전자에 다니시는 분이 왜 이런 일을 했냐고 물었다. 그는 "헛" 하고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자신은 24시간 편의점을 여자에게 물었을 뿐인데 여자가 난데없이 핸드백으로 얼굴을 쳤으며 이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지겹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하지만 선생님 말씀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여자를 불러다가 물어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안경을 낀 경찰이 여자와 여자의 오빠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저 남자 말로는 자신을 때린 것은 오히려 여자분 쪽이고 자신은 단지 편의점의 위치를 물으려고 했다는데 그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여자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자신은 정말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고 말했다. 경찰은 다시 남자가 여자분의 몸을 가격하거나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할 만한 어떤 행위를 하였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정확히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자신은 너무나 무서웠고 그래서 그랬노라고 모기 소리처럼 작게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뭘 그래서 그랬다는 말이냐고 물었다. 여자가 갑자기 눈물을 터트리면서 자신은 정말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의 오빠가 안경을 낀 경찰에게 피해자는 우린데 지금 누굴 다그치는 것이냐고 강력하게 따졌다. 안경을 낀 경찰은 오빠의 말에 조금 당황하는 표정을 짓더니 누굴 다그치는 게 아니라 저분은 S 전자 본사에 근무하시는 분인데 저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 분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것 같아 사건의 정황을 정확히 알고 싶어 그런다고 했다. 안경을 낀 경찰의 입에서 S 전자라는 말이 나오자 여자의 오빠가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자 여자의 오빠는 네가 먼저 핸드백으로 저 남자를 때렸느냐고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옷은 왜 찢어졌냐고 다시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안경을 낀 경찰이 중간에 나서서 저 분은 단지 길을 물었을 뿐인데 여성분은 저 신사분을 치한으로 오해해서 생겨난 일 같다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그를 지칭할 때 저 분, 저 남자, 선생님, 신사분 같은 말을 마구 혼용해서 썼으므로 그는 안경을 낀 경찰이 사건 정황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호칭이 정말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지 가끔씩 헷갈렸다. 안경을 낀 경찰은 연이어 우리가 조회를 해보니 저 분은 전과도 전혀 없이 깨끗하고, 또 직장이나 신분을 보니 이런 일을 할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는 그를 다시 한번 힐끔 보더니 경찰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조금 끄덕거렸다. 안경을 낀 경찰이 여자에게 다가가더니 저 분이 아가씨를 위해하려 하거나 성적 추행을 한 일은 없지 않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렇긴 하지만 자신은 정말로 무서웠다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가 민망하다는 듯이 파출소의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계속 불리해 질 것이 분명한데도 음주 측정을 거부하고 있던 40대 여자가 내가 들어보니 여자가 나빴네, 하고 말했다. 그러자 파출소 소장이 웃으면서 다가와서는 40대 여자에게 아주머니는 음주 측정이나 빨리 하시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와 여자의 오빠에게 이 사건은 사소한 오해에서 발생한 일인 것 같으니 이쯤에서 서로 좋게 마무리하자고 말했다. 그는 여자의 오빠를 바라보면서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자의 오빠는 그의 눈을 피해 딴청 피우듯 창 밖을 바라봤다. 파출소 소장이 그의 어깨를 다정스럽게 툭툭 치면서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것이니 선생님이 너그럽게 이해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파출소 소장은 이제 울음을 그친 여자에게 "그러기에 젊은 여자 분이 밤늦은 시간에 다니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무서운 일 당하시기 전에 미리미리 조심하셔야지요. 다음부터는 일찍일찍 다니세요" 하고 말했다.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예" 하고 공손히 대답을 했다. 파출소 소장은 이제 오해가 풀렸으니 그만 가보셔도 좋다고 말했다. 여자와 여자의 오빠는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도망치듯 황급히 파출소를 빠져나갔다. 여자와 여자의 오빠가 그렇게 황급히 사라지자 그는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파출소 소장이 그에게 다가와서 다 오해에서 생긴 일이니 선생님이 이해하세요, 하고 한번 더 말했다. 그때 한 쪽 구석에서 잠들어 있던 50대의 술 취한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더니 "박정희 대통령님. 우리들의 박정희 대통령님. 참으로 그리웁습니다. 나라꼴이 엉망입니다. 어서어서 돌아오세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파출소 소장은 "이보세요. 안 상무님.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안 상무님처럼 이렇게 파출소에 와서 술 먹고 행패 부렸으면 벌써 삼청 교육대 같은 곳에 끌려갔어요."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이 그의 어깨를 툭툭치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가도 좋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가 안경을 낀 경찰을 노려보면서 "이제 가도 좋다니요?" 하고 말했다. 안경을 낀 경찰은 그의 도발적인 눈빛을 의아하게 쳐다보더니 "이제 가셔도 된다구요." 하고 다시 말했다. 그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그만 두었다. 그리고 일어서서 파출소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가 파출소 밖으로 막 나왔을 때 그의 주민등록번호로 전과를 조회했던 김 의경이 달려나와 "선생님 이거 두고 가셨는데요." 하면서 안성탕면이 든 비닐 봉지를 건넸다. 그는 비닐 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날이 밝아 있었다. 오랫동안 밥도 먹지 않고 잠이 들어 있었고, 거리로 나갔다가 여자에게, 여자의 오빠에게, 그리고 경찰들에게 이유도 없이 시달렸으므로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그는 파김치가 되었다. 비닐 봉지 속의 안성탕면은 여자의 오빠와 실랑이를 벌이는 가운데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몇 개가 바스러져 있었고 비닐 봉지는 찢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고 한숨을 한번 쉬었다. 그래! 괜찮아. 괜찮아. 이제 집에 왔으니 라면이나 끓여 먹자, 하고 자신을 달래듯 중얼거렸다. 그는 라면을 끓이기 위해 냄비를 가스 레인지 위에 올리고 불을 켰다. 그리고 한참동안이나 냄비 속을 들여다보았다. 오분쯤 있으니 냄비 속에서 물이 끓기 시작하면서 기포가 솟아올랐다. 그는 자신이 지금 라면을 정말 먹고 싶은가? 하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 배가 몹시 고팠지만 라면을 먹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곧 사람이 기분에 따라서 밥을 먹거나 안 먹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맹렬히 끓고 있는 냄비 속의 물을 바라보다가 가스 밸브를 잠그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이 어쩌다가 편의점 위치도 하나 똑똑하게 물어보지 못 하는 사람이 되었는가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잠들었다. 그는 회사를 나온 이후로 점점 더 깊게, 점점 더 오래 잠이 드는 것 같았다. 한번 잠이 들면 화장실에 가지도 않고 밥도 먹지 않고 계속 잠이 들어 어쩔 때는 이틀 동안 내내 잠만 자기도 했다. 마치 깊은 해저 속에 잠수해 있는 것처럼, 잠이 들어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날카로운 소리들이 어느새 두루뭉실해져 부드럽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떤 어렵고 힘든 일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는 종종 몸을 뒤척이며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질거야. 하고 잠꼬대를 했다. 그는 영원히 이 안락한 해저 속에 머물고 싶었다. 폭풍 치는 수면 위로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죽지 않는 한 사람이 계속 잘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는 다시 깨어났다. 그가 일어났을 때 그는 오늘이 며칠인지 그리고 지금이 몇 시쯤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점점 더 세상의 시간에 무감각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도 배가 고팠으므로 가스 레인지에 불을 올리고 안성탕면을 하나 끓여 허겁지겁 먹었다. 너무도 오래 굶었기 때문에 라면 한 그릇으로는 양에 차지 않았다. 그는 다시 가스 레인지에 불을 올리고 안성탕면을 하나 더 끓였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두 번째 라면을 먹으면서 그는 안성탕면이 그다지 맛있는 라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최무이라는 가짜 이름표를 단 아르바이트생이 그에게 혹시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자신에게 피를 닦으라며 물에 젖은 티슈까지 준 친절한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부도덕함을 조금 자책했다. 그는 라면이 맛이 없는 것은 지금이 두 그릇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는 늘 김치와 함께 라면을 먹어왔는데 지금은 김치가 없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최무이라는 가짜 이름을 단 아르바이트생에게는 너무 맛있는 라면이지만 첫사랑의 경험이나 실연의 상처, 섹스의 횟수, 고향과, 출신 학교같이 살아온 삶의 방식과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생긴 취향의 차이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 끝에 그는 경험과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종의 취향의 차이가 가장 설득력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와 아르바이트생이 사사로운 음식 맛에 대해서도 취향이 다르다는 사실은 다소 슬픈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라면을 다 먹고 나자 그는 이제 무엇을 할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는 그것이 이상했다. 왜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을까? 그는 잠도 푹 잤고 배도 부르며 몸도 나은 것 같으니 이제는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뭘 해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데, 그래야 인간인데" 하고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먹고 잠만 자는 것은 동물들이나 할 짓이지 그와 같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의 반지하 방으로 이사를 온 후 육 개월 동안 이 방에서 자신이 뭘 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잠시 후 그는 육 개월 동안 이 방에서 한 일이라곤 잠자기, 세수하기, 양치하기, 양복 입고 출근하기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회사의 구조 조정으로 업무 인원이 반으로 줄어들면서 그는 지난 육 개월 동안 매일 여덟시까지 출근을 해서 밤 열한시에 퇴근을 했다. 어쩌다 업무가 일찍 마치는 날에는 부장과 함께 회사 지하에 있는 레벤 호프에서 골뱅이와 맥주를 먹었다. 사실 그것은 사무실에서 하는 업무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부장은 늘 이제 마케팅은 공격적이어야 한다고 소리치곤 했다. 그러면 옆에 있던 과장이 전투적이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면 부장은 지금은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 사적인 술자리이므로 오늘 이 자리에서는 공격적 마케팅에 관해 서로의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라고 말했다. 그러면 천재적인 셀러리맨이자 완벽한 사무원이면서 그와 입사 동기지만 직급은 한 끗발 높은 K가 정말로 허심탄회한 의견을 내놓았다. 과장과 부장은 참 허심탄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매일 밤 열한시에 퇴근을 해서 지하철 막차를 타고 꾸벅꾸벅 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면 양치질도 하지 않고 바로 잠이 들었다. 자명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 그는 자명종을 끄고 10 분 더 잠이 들었다가 놀란 듯이 일어나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전날 입은 양복을 입고 출근을 했다. 그는 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다. 어쩌다 일찍 퇴근을 하는 날이면 부장과 과장과 함께 레벤 호프에서 술을 마셨다. 여직원들이 돌아가면 남은 남자 직원들끼리 회사 옆 골목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고 그 다음에는 부장이 좋아하는 비비안 룸 단란주점에서 노래를 부르고 아가씨들의 엉덩이를 때리다가 시간이 되면 택시를 타고 꾸벅꾸벅 졸면서 집으로 돌어왔다. 집으로 돌아오면 양치질도 안 하고 곧장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자명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 자명종을 끄고 10분 더 자다가 놀란 듯이 일어나 세수와 양치를 하고 양복 입고 출근을 했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해본 일이 고작 잠자기, 후닥닥 양치하고 세수하기 그리고 양복 입고 출근하기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무척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편의점 위치를 묻다가 여자에게 따귀를 맞는다거나 똑같은 소리를 계속 반복해도 경찰들이 못 알아듣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오래도록 똑같은 동작만 반복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뭘 할까? 뭐라도 해야하는데. 그래야 인간인데 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별달리 해야할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문득 방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텔레비전을 발견했다. 그는 이사를 온 이후 단 한번도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다. 알다시피 그는 잠을 자기에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리모컨의 전원을 눌렀다. 텔레비전에서는 지직거리는 화면이 나왔다. 그는 이리저리 다른 채널로 바꾸어 보았지만 어떤 화면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텔레비전 앞으로 가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는 불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텔레비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텔레비전이 고장 났다 하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텔레비전 앞에 있는 몇 가지 버튼을 눌러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텔레비전의 색상이나 떨림을 조절하는 것이었지 텔레비전 화면이 나오게 만드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그는 언젠가 K가 여자와 한국 가전 제품은 주기적으로 때려야 말을 듣는다고 한 우스개 소리가 기억났으므로 텔레비전 상단부를 두 번 쾅쾅 때렸다. 화면은 잡히지 않았다. 그는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켰다. 여전히 화면은 잡히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서랍에서 십자 드라이버를 꺼내 텔레비전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을 케이스를 뜯어내자 그 안에는 매우 복잡해 보이는 부품들과 수없이 많은 전선들 그리고 갖가지 회로가 들어 있는 기판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는 불문학을 전공했으므로 그 부품 이름도 모르거니와 그것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는 수건을 들고 와서 텔레비전 부품에 잔뜩 끼여있는 먼지를 털어 냈다. 그리고 한참동안 텔레비전의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먼지를 털어 내자 기판 위에 있는 부품들은 더더욱 복잡해 보였다. 그는 곧 이 기기의 구조는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그가 열심히 본다고 해서 기계의 작동 원리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자신이 고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는 무력감이 들었다. 그는 텔레비전을 다시 조립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가 한 일은 나사 여섯 개를 드라이버로 풀어서 케이스를 뜯어낸 것뿐이었으므로 조립이라고 말할 만큼 거창하고 복잡한 일을 그가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시 텔레비전을 켜보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여전히 지직거리는 화면이 나올 뿐이었다. 실망한 그가 담배를 한 대 피우기 위해 방바닥에 떨어진 라이터를 찾고 있을 때 장롱 아래에 전선이 하나 삐져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장롱에 있는 전선을 끌어냈다. 그것은 유선 방송 케이블이었다. 그는 혹시 안테나 선을 꽂지 않아서 텔레비전이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텔레비전 뒤로 가서 보니 안테나 선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유선 방송 케이블을 텔레비전에 연결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텔레비전에서 깨끗한 화상이 나왔다.

 

그는 신기한 듯 리모콘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텔레비전을 보았다. 4번 채널에서는 한국말로 더빙된 외국 영화를 하고 있었고, 5번 채널에서는 낚시 방송이, 12번 채널에서는 연속극이, 15번 채널에서는 내셔널 지오그래피사가 보여주는 동물 다큐멘터리가, 16번 17번에서는 일본 방송이, 25번 채널에서는 뮤직 비디오만 전문적으로 보여주는 MTV가 나왔다. 그밖에도 서른 개도 넘는 채널에서 요리와 축구와 메이저 리그 야구와 미국 NBA 농구 같은 것들이 나왔다. 이건 정말 굉장하군. 없는 것이 없어, 하고 그는 탄성을 질렀다.

 

그는 우선 4번 채널에서 주말의 명화나 명화 극장에서 나온 적 있는 더빙된 외국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를 둔 가족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날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족들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둘 수 없다. 영화 속의 직장 상사는 매우 무지막지하다. 아버지는 스트레스를 받는 날마다 술을 마신다. 그러다 아버지는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가족들은 아버지를 사랑하므로 아버지를 알코올 중독자 요양원에 보낸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술을 끊겠다며 요양원에 들어간다. 아버지가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에 가족과 아버지는 헤어짐을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는 술을 끊기 위해 요양원에 들어왔지만 가족이 그립다. 아버지는 아내와 딸들과 아들이 보고 싶지만 술을 끊어야 하므로 가족을 만날 수 없다. 아버지는 가족이 너무나 그립고, 그 그리움 때문에 너무나 외롭다. 아버지는 외로움 때문에 다시 술을 마신다. 술을 끊지 못하고 요양원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가족들은 집에서 내쫓는다. 그는 영화를 다 보고 영화 속의 아버지가 조금 가엾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다시 채널을 돌려 내셔널 지오그래피에서 원숭이와 고양이가 교미를 하다가 임신에 실패하는 것을 보고 남의 나라 야구를 보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각종 신기한 뉴스를 보았다. 미세한 먼지 하나가 날아오르는 것조차 큰 사건이 되는 그의 골방과는 달리 세상밖에는 무궁무진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게 그는 몹시 신기했다. 그는 가스 레인지에 불을 켜고 안성탕면을 하나 끓여 먹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그가 다시 일어났을 때는 몇 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방은 반지하보다 더 내려간 3/4 지하인 데다가 옆집의 빌어먹을 LPG 가스통 덮개가 그의 작은 창문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배가 너무 고팠으므로 가스 레인지에 불을 올리고 안성탕면을 하나 끓여먹었다. 라면을 다 먹고 나자 그는 할 일이 없었다. 그는 뭘 할까 생각하다가 리모콘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그는 리모콘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텔레비전을 보았다. 하룻밤이 지나자 텔레비전 속에는 또다시 무수한 사건들이 일어나 있었다. 팔레스타인 동네에서 이스라엘 동네에 폭탄 테러를 했다. 이스라엘은 곧 팔레스타인에 미사일로 보복 사격을 했다. 그러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서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하는 미국에게 우리 전사들의 목숨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복수를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그 증표로 미국의 유수한 컴퓨터 회사와 항공사에 폭탄 테러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오후에는 뉴욕의 다우 지수가 소폭 떨어졌고 뉴욕보다 몇 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동경 증권이 소폭 떨어졌고 동경 증권보다 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한국 증시가 대폭 떨어졌다. 그리고 증시와 중동의 유가 불안 때문에 어쩌면 생필품의 물가 상승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뉴스는 전했다. 그는 여기서 수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사막 동네에서 폭탄이 하나 떨어졌다고 당장 동네 슈퍼에서 라면 가격이 오른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채널을 돌려 지난번에 임신에 실패했던 원숭이와 고양이가 교미를 시도하는 것을 보고 이미 그가 어릴 때 주말의 명화나 명화 극장에서 봤던 외국 영화를 보고 안성탕면을 먹고 양치도 하지 않고 잠이 들었다.

그는 일 주일인지 이 주일인지 혹은 한 달인지 모르는 시간 동안 도무지 시간을 알 수 없을 때 일어나서 배가 고프면 안성탕면을 하나 끓여 먹었다. 안성탕면을 다 먹고 나면 "무엇이든 해야하는데 그래야 인간인데." 하고 중얼거리며 텔레비전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리모콘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면서 계속되는 임신 실패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교미를 하고 있는 원숭이와 고양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 폭탄 테러를 했다는 뉴스를 보고 다음날에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미사일로 보복 사격을 했다는 것을 보았다. 뉴스가 지루해지면 주말의 명화나 명화 극장에 이미 했던, 한국말로 더빙된 외국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안성탕면이 떨어지면 예전에 사무원처럼 단정한 여자를 만났던 네거리까지 걸어갔다. 거기서 서쪽으로 백 미터 걸은 후 왼쪽으로 꺾어서 다시 이백 미터를 걸어갔다. 그리고 여전히 본사의 지시 때문에 자신의 이름이 아닌 남의 이름으로 된 가짜 명찰을 달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돈을 주고 안성탕면을 사 왔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는 다시 남의 나라 야구나 농구를 보다가 안성탕면을 먹고 잠이 들었다. 가끔 그는 자신의 삶이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무엇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머리 속에서 청동으로 된 거대한 종이 계속해서 울려대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그는 전화벨 소리 때문에 잠을 깼다. 이사를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울려본 적이 없는 전화였으므로 그는 약간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지 않고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전화벨은 스물 세 번을 울리고 그쳤다. 잠시 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일곱 번까지 전화벨을 세다가 전화를 받았다. 자신을 L 카드사 직원이라고 소개한 여자 목소리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여자는 귀하의 카드 대금이 계속 연체되고 있다고 말했다. 11월 23일까지 연체 대금이 납부되지 않을 시에는 석 달 연체로 인해 신용 불량자로 등록된다고 말했다. 이석만씨는 신용 등급도 상당히 높으신 분이신데 무슨 일로 연체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정말 의아하다는 듯이 자신의 신용등급이 어떻게 상당히 높을 수 있냐고 물었다. 여자는 저희 회사는 고객의 정보를 수집한 뒤 회사가 설정한 합리적 기준에 의해 신용등급을 설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신용불량이 되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신용 불량자가 되면 신용이 생명인 이 사회에서 어떠한 신용 거래도 할 수 없게된다고 말했다. 연이어 11월 23일까지 연체금을 납부하실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지금은 안성탕면을 사기에도 빠듯한 형편이라고 말했다. 여자는 S전자에 다니시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했기 때문에 요즘에는 직장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자는 하여간 11월 23일까지 연체금이 납부되지 않으면 신용 불량자 명단에 오르니 잘 생각하셔서 판단해주시면 좋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프라이데이와도 결별한 마당에 그까짓 신용이 무슨 대수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그는 몇 년 간 계속 일을 했지만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회사의 구조 조정 때문에 일은 많아지고 월급은 줄었기 때문이다. 또한 업무가 일찍 마치는 날마다 일본처럼 모든 음식값을 각자 나누어서 내는 것이 부담도 적고 합리적이라고 주장하는 부장과 함께 레벤 호프에서 골뱅이와 맥주를 먹고 술값을 인원수만큼 나누어서 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여자 직원들이 돌아가면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고 술값을, 아주 가끔 부장이 냈지만, 대부분은 나누어서 내야 했기 때문이다.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고 나면 K와 과장과 몇몇 직원들은 내일 아침 상무님께 보고해야 할 긴급 보고서 때문이라든지, 혹은 회장에게 보여줄 그룹의 21세기 새 비젼에 관한 준비같이 문득 들어보면 아주 거창하고 긴급하며 중요한 이유를 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21세기 그룹의 청사진 같은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 없었으므로 부장이 좋아하는 비비안 룸 단란주점으로 가서 탬버린을 흔들고 폭탄주를 마시고 아가씨 엉덩이를 만진 다음 술값을 각자 나누어서 냈다. 부장이 술에 너무 취하면 부장을 빼고 나머지 직원들이 술값을 나누어서 냈다. 왜냐하면 부장의 말대로라면 나누어서 내는 것이 훨씬 한 개인에게 부담이 적고 또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몇 년 간 계속 일했지만 레벤 호프와 포장마차와 비비안 룸 단란주점에 술값을 나누어 내느라고 돈을 모으지 못했다. 돈을 모으기는커녕 그는 카드 빚만 잔뜩 지게 되었다. 그가 모은 것은 라이터뿐이었다.

 

배가 고파지자 그는 안성탕면을 하나 끓여 먹었다. 그리고 내셔널 지오그래피에서 캥거루와 치타가 달리기 시합하는 것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그는 문 밖에서 "총각 나 좀 봐" 하는 소리 때문에 잠을 깼다. 그는 그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던 그의 고요한 방에 왜 요즘 들어 갑자기 사람들이 찾아올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성과 고객 감동의 스피드 중화반점>과 <한 판 시키면 한 판 더! 와우 피자집> 같은 각종 스티커가 붙어 있는 현관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주인집 할머니가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안녕하세요. 할머니.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하고 쾌활하게 물었다. 주인집 할머니는 "안녕이구 나발이구, 방세 안 낼껴?"하고 말했다. 그는 죄송하지만 지금은 안성탕면을 사기에도 빠듯한 형편이므로 방세를 낼 수 없노라고 말했다. 주인집 할머니는 "안성탕면은 무슨 자빠질 소리여. 그니까 머시여? 지금 방세를 못 내겠으니 배 째라 이것이여?"하고 말했다. 그는 나누어서 술값을 내느라고 지금은 돈이 없으니 보증금에서 좀 빼면 안되겠냐고 말했다. 주인집 할머니는 "그깟 보증금 삼백 만원 다 까먹고 백 만원 남짓 남았는데 그것까지 다 까먹고 내 집에서 안 나가고 퍼지면 나처럼 힘없는 늙은이가 어찌할 껴. 나도 믿는 구석이 있어야지" 하고 말했다. 그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보증금을 반이나 까먹었다니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주인집 할머니는 "말이 안되기는 머시 말이 안돼. 여기 계산이 다 나와 있는디. 그라고 몸도 성한 젊은 놈이 무엇이 부족해 일도 않고 집에서 빈둥빈둥거리는 겨, 하늘 보기 부끄럽지도 않어? 아! 그래 이제 일도 않고 밤낮으로 텔레비전만 보면서 방바닥이나 긁을 생각이여? 나 참 한심스러워서" 하고 말했다.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을 했기 때문에 이제 회사에는 안 나갈 거라고 말했다. 또 회사에 나가게 되면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이 그를 공격하기 때문에 더욱이 회사에는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창을 든 나쁜 병균은 또 머시여?" 하고 주인집 할머니는 물었다. 그는 사람들은 항상 웃고 있지만 입 속에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을 숨기고 있는데 그것은 매우 무서운 균이므로 할머니도 조심하셔야 된다고 오히려 할머니를 걱정했다. 할머니는 그의 말을 뜬금뜬금 듣고 있다가 "말도 안 되는 잡소린 집어치우고 어떻게든 방세나 빨리 내, 만약에 계속 이렇게 배 째라 식으로 나오면 나한테도 다 생각이 있구먼" 하며 말하고 돌아갔다. 주인집 할머니가 돌아가자 그는 안성탕면을 하나 끓여 먹고 텔레비전에서 건기가 되어 물을 찾아 떠나가는 사바나의 들소 떼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주인집 할머니가 돌아간 다음날,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몇 시인지 알 수 없는 시간에 일어났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텔레비전에서는 아무런 화면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리모콘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바꿔봤지만 지직거리는 화면만 나올 뿐이었다. 그는 텔레비전 뒤로 가서 유선 방송 케이블이 제대로 연결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유선 방송 케이블은 제대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약간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는 케이블이 제대로 연결되어 있는데도 텔레비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퍽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배가 조금 고팠으므로 우선 안성탕면을 하나 끓여 먹은 다음 왜 텔레비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냄비에 물을 받기 위해 수도꼭지를 돌리자 웬일인지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돌려보았다. 역시 물이 나오지 않았다. 순간 그는 어제 주인 할머니가 '이렇게 배 째라 식으로 나오면 나한테도 다 생각이 있구먼.' 이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그는 반지하 방을 나와서 주인집에 노크를 했다. 주인집 할머니가 문 옆으로 난 작은 창문으로 "누구여?" 하고 물었다. 그는 아래 지하에 사는 총각인데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주인집 할머니는 "방세 가지고 왔어?" 하고 물었다. 그는 방세는 아직 못 가지고 왔지만 유선 방송도 나오지 않고 물도 나오지 않아서 그로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주인집 할머니는 "방세도 안 가지고 와선 무슨 잡소리여" 하고 말했다. 그는 유선 방송은 그렇다 치더라도 물이 나오지 않으면 안성탕면을 끓여 먹을 수 없으니 이것은 너무하지 않으냐고 말했다. 주인집 할머니는 "너무하기는 머시 너무해? 그니까 방세 가져와" 라는 말만 계속 말했다. 그는 지금은 돈도 없고 신용도 불량해졌기 때문에 조금만 사정을 봐달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그니까 멀쩡하게 잘 다니던 직장은 왜 때려치워서 이렇게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한다냐?" 하고 물었다. 그는 어제도 말씀 드렸다시피 직장에 나가면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이 자신을 공격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런 것이지. 뭐 같이 일하는 사람들 입에서 병균이 좀 나온다고 일을 안 하면 세상은 어찌 돌아갈 껴.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 좀 봐. 그 사람들 폐는 석탄 찌꺼기로 꽉 차 있는 겨. 그런 무서운 것을 들이마시면서도 자식 새끼들 먹여 살리겠다고 그렇게 발버둥치는데, 뭐 창을 든 병균인지 뭔지 때문에 젊은 놈이 일을 안 한다니. 아무려면 창을 든 병균인지 머신지가 시커먼 석탄 가루보다 더 무서울까. 젊은 놈이 약해빠져서 방바닥을 뒹굴뒹굴 돌면서 놀고 먹겠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겨?" 하고 말했다. 그는 창을 든 나쁜 병균은 석탄 찌꺼기 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말도 안 되는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방세 안 가져오면 국물도 없을 줄 알라고 말했다. 그는 야속한 마음이 들었지만 방세를 내지 않은 것은 그의 잘못이므로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리모컨으로 전원을 눌렀다. 텔레비전에는 아무런 화면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싱크대의 수도꼭지를 돌리고 다시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돌렸다. 역시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집 앞의 골목으로 나가 재활용 쓰레기 더미 속에서 1.5 리터 피티 병 두 개를 주웠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시민 공원 식수대에서 물을 받아 왔다. 그는 시민 공원에서 받아 온 물로 안성탕면을 끓여 먹었다.

 

안성탕면을 먹고 나자 그는 할 일이 없었다. 할머니가 유선 방송 케이블을 끊었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중심가의 빵집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에 대해 이스라엘 당국이 팔레스타인에 보복 공격을 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며칠 전 동물 다큐멘터리에 나왔던 아마존에 사는 개구리가 아직까지 살아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또 치타와 캥거루의 달리기 시합에서 누가 이겼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사실은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아마존에 사는 동물들과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문득 그는 보스턴에 가 있는 형이라면 그를 도와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와 형에게 반반씩 남겨준 유산을 형이 모두 가져갔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그의 형은 미국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고 비자 발급과 정착을 위해서 돈이 많이 필요했었다. 그의 형은 미국으로 떠나면서 지금은 자금 사정이 급해서 그의 몫이었던 유산을 가져가지만 일단 미국에 정착을 하고 기반이 잡히면 언제든지 이자까지 계산해서 돌려준다고 했던 것이다. 형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지 이미 5년이 넘었으므로 지금쯤은 자리를 잡았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수첩에서 형의 전화번호를 찾아낸 다음 미국의 형 집에 전화를 걸었다.

 

형이 그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이것은 국제 전화라서 많은 말을 할 순 없고 본론만 말하자면 저번에 형이 미국에 정착하면 주기로 한 아버지 유산을 지금 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형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세한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으니 본론만 이야기하면 자기 몫의 아버지 유산을 돌려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형은 그거야 당연히 이자까지 쳐서 돌려줘야 하지만 우선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는지 형에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자신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하고 있다고 말했다. 형은 아직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며, 그래서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연히 이자까지 쳐서 돌려줘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고도 말했다. 그는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그러니 이자까지는 필요 없고 조금만이라도 보내준다면 고맙겠다고 말했다. 형은 형수와 상의를 한 뒤에 다시 전화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형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전화를 끊고 한참동안 형의 전화를 기다렸다. 형에게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한국 통신이라고 소개한 여자에게 전화가 걸려와서 "귀하의 9월, 10월, 11월 전화 요금이 납입되지 않았으니 가까운 은행이나 우체국의 지로를 통해 납입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1월 15일까지 연체 대금이 납부되지 않을 시에는 전화 사용이 중단될 수도 있습니다"하고 말을 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전화 속의 여자는 그냥 9월, 10월, 11월 전화 요금이 납입되지 않았고 11월 15일까지 대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전화 사용이 중단된다는 이야기를 세 번 되풀이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음날 그는 안성탕면을 끓이기 위해 시민 공원으로 가서 1.5리터 피티 병에 물을 담아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스 레인지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주인집 할머니를 찾아가 가스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방세를 가지고 오라고 말했다. 그는 확실하진 않지만 미국의 보스턴에 있는 형이 돈을 보내 준다면 방세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갑자기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미국에 가 있는 형이 돈이 많으냐고 물었다. 그는 형은 그렇게 부자가 아니며 그래서 어쩌면 돈을 보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인집 할머니는 팔까지 내저으면서 "아녀 아녀, 미국이 어떤 나란데 미국에서 살면 다 부자지 암 그렇고말고" 하고 말했다. 그는 물은 시민 공원에서 가져오면 되지만 가스가 나오지 않으면 안성탕면을 끓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으니 그에게는 참으로 곤란한 일이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도시 가스면 모르지만 우리 집에서 쓰는 LPG 가스는 각자 내는 것이니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할머니의 말에 수긍을 하고 할머니가 가스를 끊으신 게 아니라면 정말 죄송하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물이 필요하면 부엌에서 몇 바가지 퍼가라고 말했다. 그는 고맙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가스가 없어서 라면을 끓일 수 없었으므로 그는 안성탕면을 부숴서 과자처럼 먹었다. 맛이 너무 싱거웠다. 그는 분말 스프를 약간씩 쳐서 먹었다. 분말 스프를 쳐서 먹으니까 훨씬 맛이 있었다. 가스가 끊겨서 기분이 우울했지만 분말 스프 때문에 그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안성탕면은 끓여 먹어야 제 맛이지만 분말 스프만 있다면 그냥 먹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형의 전화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주인집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안성탕면의 분말 스프를 들고 있었다. 그는 제발 분말 스프만은 뺏어가지 말아 달라고 할머니에게 사정했다. 할머니는 그러면 방세를 내라고 했다.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했기 때문에 지금은 돈이 없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프라이데이란 놈이 그렇게 무섭냐고 물었다. 그는 프라이데이는 친절하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프라이데이라는 놈이 그렇게 친절하다면 왜 회사는 안 나가고 지랄이냐고 물었다. 그는 프라이데이는 정말 친절하지만 입 속에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을 잔뜩 숨기고 있어 프라이데이와 계속 이야기를 하다보면 우리의 정신과 육체가 황폐해진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잡소리냐며 분말 스프를 들고 사라졌다. 그는 네거리에 서 있었다. 할머니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동쪽으로 갔는지, 서쪽으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가스도 안 나오고 물도 없는데 분말 스프까지 가져가시다니 정말 너무하세요, 하고 말하며 네거리에 앉아 엉엉 울었다. 그때 한 신사가 다가와서 그에게 손수건을 주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주인집 할머니가 분말 스프를 가져갔기 때문에 이렇게 울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신사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런 일이라면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신사는 그에게 상자를 하나 건네주면서 이것을 품 속에 간직하고만 있으면 아무 걱정 없이 살 거라고 그에게 말해주었다. 그는 신사의 친절에 너무나 감동을 받아서 저는 아무 것도 해드린 게 없는데 이렇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친절한 신사는 이것이 자신의 일이니 크게 부담스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친절한 신사는 곧 사라졌다. 그는 신사가 동쪽으로 사라졌는지 서쪽으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치약 광고에 나오는 창을 든 나쁜 병균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프라이데이는 다니엘 데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 나오는 로빈슨의 친구였던, 혹은 종이었던 원주민의 이름, 금요일에 만났다고 해서 로빈슨 크루소가 프라이데이라고 지어준 이름에서 따온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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