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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향기

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코뿔소의 계절>, <거북이도 난다> 영화를 떠올려주시라.

by 아프로뒷태 2013. 12. 16.

 

 

바흐만 고바디 감독을 아시나요?

그는 이란을 대표하는 감독이다. 하지만 이란에서 망명하였다. 왜? 이란의 현실을 전세계에 알려주기 위해서 끊임없이 저항하며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작을 혹 본 적이 있나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 <거북이도 난다>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란 시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

<코뿔소의 계절>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이 영화가 2013년 12월 이제야 개봉한다니... 왜 이제야 개봉하는 거니?

 

 

 

 

 

 

 

 

지금의 이란이 고대에는 어떠했는가? 인류의 역사로 돌아가보자.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기억하는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흐르는 땅에서 멀지 않는 나라였으며, 대제국 페르시아의 땅에서 정치, 문화를 꽃피웠던 민족의 후손이 이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어찌하여 낙후되었을까?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을 알게 되고 철학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역사란 참 재미있어진다.

 

바흐만 고바디. 그에 대해 궁금하다면 아래의 글을 참고해주시길~

 

 

 

<거북이도 난다>로 다시 쿠르드의 현재를 고발하는 감독 바흐만 고바디 - 냉정한 카메라, 뜨거운 눈물을 흘리다

 

국경을 넘나들며 돈을 버는 어린 쿠르드 소년 둘이 트럭 짐칸에 앉아 노래를 부른다. “인생이란 놈은 나를 산과 계곡으로 떠돌게 하면서 나를 나이먹게 하고 저승으로 이끄네.” 목청껏 소리지르는 소년 중 한명은 그 장면을 찍기 2주 전에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었다고 한다. 한쪽 다리만 가진, 그런 몸으로도 살아남아야만 하는 아이의 노래를,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첫 번째 장편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으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바흐만 고바디는 그처럼 전쟁이 일상이 되어버린 동족들의 사연을 눈물이 아닌 의지로 덮고선 이방인들에게 전해왔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고향의 노래> <거북이도 난다>. 바흐만 고바디가 만든 세편의 영화들 속에서, 쿠르드족은 <CNN> 카메라로 여과되지 않은, 무방비 상태의 삶을 드러낸다. 그들은 머지않아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도달하겠지만 그전까지는 길 위에서 살아가며 노래해야만 한다.


바흐만 고바디가 아니었다면 사담 후세인이 투하한 화학무기와 미군이 묻어둔 대인지뢰 사이에서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해온 쿠르드족은 목소리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예술로 남지 않아도 좋다. 쿠르드족은 뼈대로 세워둔 바흐만 고바디의 픽션에 힘입어 모두가 묻어두려고 했던 역사를, 그 모두에게, 죄의식으로 일깨웠다. “나는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로 가득 찬 땅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선 사건이 끊이지 않아 숨이 막힐 정도였다. 내 고향은 목소리를 갖지 못한 대지, 침묵 속에 고통을 견뎌온 어머니와도 같은 땅이다.” 거친 입자로 기록된 그의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가 의미를 잃을 수밖에 없는 드라마틱한 고향의 노래이다.


이슬람 속의 버림받은 민족, 쿠르드

 

<거북이도 난다>


 

<고향의 노래>



이란 영토 내의 쿠르드 지역에서 태어난 바흐만 고바디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조감독을 지원해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에 참여했으면서도 스승처럼 고요한 영화를 만들 수는 없었다. 그가 겪은 현실은 상상이나 성찰의 영역을 뛰어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쿠르드족 아이들이 태어나서 처음 맞대는 풍경은 어머니의 행복한 얼굴이 아니다. 불타는 집과 사지가 잘려나간 사람들이다. 그들은 엄마나 아빠 대신 폭탄과 전쟁, 달아나, 라는 단어를 먼저 배운다”고 말했다. 그것은 짐작한다고 알 수 있는 삶이 아닐 것이다. 발딛는 곳마다 죽음이 깔려 있는 쿠르드 거주 지역 베인에서 가족과 함께 탈출했던 바흐만 고바디는 동족 사이에서가 아니라면 옹알이부터 배운 쿠르드의 언어를 말할 수 없었고,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전설도 잊어야 했고, 다프(탬버린과 비슷한 쿠르드족의 전통 타악기)의 울림도 듣지 못했다. 뿌리를 잃어버린, 죽음과 상처 앞에서도 침묵해야만 하는 영혼. “앉아서 슬퍼하고 한탄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해서” 영화에 가까워진 바흐만 고바디는 8mm 캠코더로 숱한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2천만명에 달하는 동족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미국이 지원한 중화기도 소용없었던, 국경과 국경 사이에 걸쳐 있어 책임질 사람 없었던, 쿠르드족의 기억과 현재를 카메라로 퍼냈다.


이란과 이라크, 터키, 시리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쿠르드족은 국가를 갖지 못한 소수 민족이면서 화약을 떠안은 아랍의 국경지역 거주민이기도 하다. 바흐만 고바디가 언제나 이란과 이라크 사이 국경에 이끌리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 발짝도 넘어오지 말라고 지뢰를 뿌려놓았는데도, 그곳 말고 갈 데가 없다면, 어찌해야 하나. 바흐만 고바디의 영화 중에서도 가장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두 나라 모두로부터 떠밀려난 아이들이 눈물을 담고서도 지뢰밭을 헤치며 먹고사는 분투를 담고 있다. 세살 즈음에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성장을 멈추었고 조만간 죽게 될 마디, 단 몇달 만이라도 형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지뢰깔린 국경을 넘는 밀수꾼을 자청하는 아윱, 신부비 대신 마디를 수술해주기로 하고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로진, 작은 팔로 열다섯 먹은 오빠 마디를 안고 다니는 아마네. 걸음마하는 막내까지 떠맡은 네 아이들은 밀수꾼이었던 홀아비 아빠가 지뢰를 밟아 죽은 뒤에 닥쳐온 마디의 죽음을 막고자 온 힘을 다한다. 눈물을 쏟으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쿠르드의 현실을 모자이크하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많은 이란영화들처럼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한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가만히 눈동자만 클로즈업해도 험한 세월을 내비치는 아이들에게서 힘을 얻는 영화다. 바흐만 고바디는 먹고살기 위해 종종걸음치는 아이들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거나 아주 멀리서 응시하기만 한다. 현실과 픽션 사이의 어디쯤, 손질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믿기 힘든 절망의 풍경. 그러나 바흐만 고바디는 관객이 긴장을 풀지 않도록 다큐멘터리 대신 픽션을 찍기로 했다는 감독이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처럼 보이되 지워지지 않는 잔상을 남기기 위해 어찌 보면 교묘하다고 할 수 있는 픽션을 첨가했다. 이란과 이라크 국경지방에 영화처럼 눈이 쌓이는 기간은 몇 주일에 불과하고, 밀수꾼들도 단지 두달 동안만 밴이나 트럭을 타고 포장도로를 달리는 대신 노새를 끌고 지뢰밭을 넘는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쿠르드족한텐 지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한 계절을 선택해 그들 삶의 전부인 듯 확대한 것이다. 돋보기 중심에 겨울이 들어오고, 나머지 계절은 흐릿한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그러나 픽션을 현실처럼 강요한다고 해서 바흐만 고바디가 영악한 감독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1년을 눈이 오기를 기다렸던 바흐만 고바디는 혼자 걷기 시작한 이후 한번도 어린아이일 수 없었던 열살 남짓한 아이들이 그들 자신의 삶을 되풀이한 거라고, 아마도 진심으로, 믿는다. 다섯 고아가 부딪치는 상황 전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각각의 에피소드는 현실에서 채취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흐만 고바디는 이야기를 지어냈다기보다는 쿠르드족의 삶을 모아 패턴을 부여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본 적도 없는 쿠르드족에게 주연 자리를 건네준 바흐만 고바디는 그뒤 두편의 영화를 더 만들면서 스스로 터득한 제작방식을 고집해왔다. 그는 “예술과 리얼리티는 서로를 보완한다. 리얼리티가 없다면 예술은 헛되고, 예술이 없다면 리얼리티는 무의미하다”고 말하면서 픽션의 구조 아래에서 현실을 찍는다. <고향의 노래> 또한 실제 쿠르드족 음악가들을 데려와 카메라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 함께 이라크 난민캠프까지 여행을 떠나는 과정을 거친 영화다. 쿠르드족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면 이 영화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낙천적인 유머와 흥을 돋우는 노래, 그 끝에 벼락처럼 닥치는 비극마저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1991년 걸프전에서 패배한 사담 후세인은 독립을 바라고 미국을 지원했던 이라크 영토 내 쿠르드족의 거주지역에 폭격을 퍼부으면서 화학무기 사용을 병행했다. <고향의 노래>는 그 화학무기에 얼굴과 목소리를 다친 여가수를 찾아내려는 여행의 기록이다. 배우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반응에 따라 정해진 시놉시스를 바꾸곤 했던 바흐만 고바디는 빨갛게 얼어터진 아이들의 볼에서 집시처럼 음악을 싣고 다니는 한 노인과 두 남자에게 옮겨갔다.


<거북이도 난다>, 참을 수 없는 삶의 무거움

 

<거북이도 난다>



명성 높은 쿠르드 음악가 미르자는 23년 전 자기 친구와 달아난 전처 하나레가 이라크 난민지역에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미르자는 가기 싫다고 떼쓰는, 역시 음악을 하는 두 아들을 데리고, 소문을 따라 하나레를 찾아다닌다. 악기를 가지고 떠난 세 부자는 총소리가 난무하는 결혼식과 전쟁고아들이 모인 캠프와 이라크 난민촌에서 언제나 노래를 한다. “쿠르드족은 난민캠프에서도 소스팬을 가지고 앉아 그걸 두드리면서 연주를 하고 춤을 춘다. 이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들에게 닥친 운명을 이기고자 한다면, 다른 길이 없다. 유머와 비극의 혼합은 쿠르드족의 삶의 정수이다.” 음악과 유머로 비극을 이긴다. 이 명제는 곧 <고향의 노래>가 따르는 방식이기도 하다. 여인의 노래가 금지된 이란을 떠났던 여가수 하나레는 화학무기에 녹아내린 피부를 천으로 감싸고 갈라진 목소리를 안으로 삼키면서 전남편이 자신의 어린 딸을 데리고 안전한 이란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웃으면서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남편과 아들들이 학살당한 땅에서, 무덤처럼 웅크린 여인들에게 이르는 길은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처참했을 것이다.


바흐만 고바디는 아윱과 미르자가 철조망을 넘는 순간에 영화를 멈추어 세운다. 그들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마찬가지로 험한 여정을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죽지 않았으므로, 희망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바흐만 고바디는 언제 짐을 싸서 피난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빠르게 걷고 빠르게 먹고 빠르게 말하는 쿠르드족의 슬픈 리듬을 <고향의 노래> 안에 정신없는 코미디의 동력으로 사용하는 낙천성을 과시하기도 했다. <거북이도 난다>는 다르다. 이라크 전쟁 이후 만들어진 <거북이도 난다>는 아이들을 가루가 되도록 부수어놓는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죽어버린 아이들, 넝마로 남은 대지, 존재했었는지도 모를 생의 의지. 바흐만 고바디를 자살의 위기로까지 몰아넣은 이라크 전쟁은 <거북이도 난다>를 죽음만이 아이들을 구원해주리라고 음산하게 속삭이는 영화로 만들었다. 쾌활한 전작 <고향의 노래>를 보고 나면, 두 영화 사이의 간극은, 화가 날 정도로 슬퍼진다. 현실과 예술을 하나로 싸안았던 감독이 현실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고향의 노래> 상영을 위해 후세인 실각 며칠 뒤에 이라크에 갔던 바흐만 고바디는 자신이 목격한 이미지들에 충격을 받았다.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 시절부터 있었다던 지뢰밭과 그곳에서 팔다리를 잃은 아이들에게 단련되어온 바흐만 고바디도 이라크 전쟁을 무심히 넘길 수 없었고, 처음으로 도시에서 영화를 만들려던 계획은 방향을 틀어, 다시 국경지역으로 향하게 되었다. 할랍자가 시작이었을까. 1980년대 사담 후세인으로부터 화학무기 공격을 받은 할랍자는 미군의 침공 즈음에 또 한번 피난민들을 뱉어냈다. 아그린은 그곳에서 온 소녀다. 이라크 군인들에게 강간당해 아이를 낳은 아그린은 부모가 살해당한 고향을 떠나 두팔이 없는 오빠 헹고와 함께 이라크·터키 국경지역으로 흘러든다. 마을 아이들의 지도자격인 소년 위성은 아그린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냉정하기만 하다. 아그린은 틈만 나면 절벽 위에 올라 죽음을 꿈꾼다. 이것이 아이들의 이야기다. 아이들이, 지뢰를 파내 시장에 나가 팔고, 임금을 흥정하고, 밤이면 강간과 살인의 악몽을 꾼다. <거북이도 난다>가 유독 강하게 픽션과 판타지의 요소를 담고 있는 건 그 아이들을 곧이곧대로 바라보기 힘들어서였을 것이다.



죽음을 꿈꾸며 시작을 노래하는 감독

 



바흐만 고바디는 생존을 포기해본 적이 없던 과거와 다르게 “이라크인들이 죽음 말고 어떤 해결책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나는 이런 삶을 원하지 않았다. 이런 곤경, 이런 고통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죽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보단 나은 곳일 거다.” 구차한 희망이라도 건지고 싶다면 영화 너머로 가야만 한다. 눈먼 아기는 수술을 받아 <거북이도 난다>를 극장에서 보았고 위성은 바흐만 고바디가 제작하는 영화에 조감독으로 고용됐다. 아이에게 보여줄 미래가 없어서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 바흐만 고바디는 그렇게나마 작은 인생 하나하나를 검은 연못에서 건져올리고 있다. 5년 전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으로 데뷔한 젊은 감독은 “무엇도 아윱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걸 막을 수 없다. 그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쟁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절감하며 가슴 밑바닥까지 말라버린 지금의 바흐만 고바디는, 차라리 죽을까, 라고 중얼거리는 듯하다. 그럼에도 바흐만 고바디는 새로운 코미디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무릎까지 차오른 눈을 밟으며 앞으로만 걸어갔던 아윱처럼, 고바디도 불모를 건너 새로운 노래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내 영화는 총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감독 바흐만 고바디가 말하는 나의 영화, 나의 민족

-당신이 태어난 쿠르드 거주지역에는 영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당신은 어떻게 영화감독이 되었는가.

=나는 영화와 관련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다만 8mm 카메라로 30편 넘는 단편영화를 찍었을 뿐이다. 테헤란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배운 건 거의 없지만 단편을 만들면서 조금씩 영화 만드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돈이 많지 않았다. 내가 살던 집의 주인들은 언제나 집세를 내라고 독촉하곤 했는데, 그들을 막기 위해서, 내 영화에 캐스팅하곤 했다. 내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도 내 영화에 조수로 참여해왔다. 쿠르드족 거주지역은 전쟁과 쓰디쓴 생존이 만연한 곳이다. 그곳에서 목격한 모든 일들이 나를 감독으로 만들었다.

-당신은 언제나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해왔다. 그들로부터 극적인 감정을 이끌어내는 일은 쉽지 않았을 텐데.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을 나는 시나리오 대신 종이 몇장만을 들고 시작했다. 내가 찾아낸 비전문 배우들은 처음엔 카메라를 두려워했지만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담고자 했기 때문에 차츰 카메라를 편안하게 느끼게 됐다. 그들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자신의 삶을 연기했다. 나 또한 쿠르드족이다. 나는 내가 찍는 이야기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거북이도 난다>의 위성은 어린 시절 내 자신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나도 위성처럼 아이들의 리더였고 영리했고 살아남고자 싸웠다. 다른 영화도 마찬가지다. 내 영화들은 내 과거의 일부를 반영하고 있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의 국경을 넘는 노새나 <고향의 노래>의 변방지역 도적은 내 부모와 내가 어린 시절 고향 베인을 떠나면서 겪었던 일들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당신의 두 번째 영화 <고향의 노래>는 어른들의 이야기지만, <거북이도 난다>는 첫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처럼 아이들이 중심이다. 왜 당신은 아이들의 이야기로 돌아갔는가.

=처음부터 그렇게 마음먹지는 않았다. 나는 내 과거를 돌아보는 도시의 영화를 만들고자 했지만, 미군의 이라크 침공 2주 뒤에 찾아갔던 바그다드에서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전쟁은 유독 아이들에게 가혹하다. 불구가 된 아이들을 보고 전쟁에 반대하는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고향의 노래> <거북이도 난다>는 참혹한 현실을 담고 있지만 때로는 유머러스하기도 하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유머를 발견할 수 있는가.

=이란 속담에 “솜털로도 목을 벨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내 영화에서 유머는 바로 그 솜털이다. 나는 슬픔을 좀더 부드럽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 영화들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유머는 또한 쿠르드족이 매일매일 버틸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가족이나 친구를 잃어본 적이 없는 쿠르드족을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웃고 노래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는가. 그들은 더이상 흘릴 눈물조차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살아남아야만 하므로, 닥치는 순간들을 즐기고자 애쓴다.

-쿠르드 출신 감독으로서, 당신은 쿠르드족의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2천만명이 넘는 쿠르드족은 이란과 이라크, 시리아, 터키에 흩어져서 살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독립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는 독립적인 쿠르드 국가가 태어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쿠르드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자신들끼리 싸워왔고 총과 탄약만으로 서로를 대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선 보통 사람들, 내가 보기에는 가장 선한 사람들이, 사방에서 공격해오는 폭력에 다치고 희생될 수밖에 없다. 나는 총을 가진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침묵하는 이들, 그저 보통 사람들이다. 나는 내 영화로 무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내 영화들은 쿠르드족의 현실을 대중에게 일깨웠고, 사람들은 쿠르드족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당신이 만든 세편의 장편영화는 대단히 정치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이 애초에 의도했던 것인가.

=나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스스로에게 “바흐만, 너는 무기 대신 카메라를 들고 있어”라고 말해왔다. 나는 쿠르드족의 문화가 베어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정치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쿠르드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담 후세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곤 했다. 나는 그냥 쿠르드족이 아니라 정치적인 쿠르드족이 되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영화들은 정치적이다. 내가 정치적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이 쿠르드족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 인터뷰는 토론토와 런던국제영화제, <인디와이어> 등이 진행한 인터뷰를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아이들의 고난, 그 자체가 시나리오


<거북이도 난다> 제작기

 바흐만 고바디는 미국이 이라크를 점령하고 2주일 뒤에 그곳에 갔다. 그는 이미 사담 후세인을 영화에 인용한 적이 있었지만(<고향의 노래>에서 쿠르드족 노파는 “사담이 우리에게 한 일에 대가를 치렀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이번엔 주연이 한명 더 있었다. 미국 대통령 부시였다. <고향의 노래>의 상영관으로 향하면서, 두 군데 권좌로부터 쏟아진 파워에 너덜너덜해진 쿠르드 땅을 목격한 바흐만 고바디는, 어린 시절을 잃어버린 아이들을 위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재앙이었고 악몽이었다. 나는 탱크와 지뢰, 부상당한 아이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써야겠다고 결정했다.” 그것이 영원히 날개를 가질 수 없는 아이들의 영화 <거북이도 난다>이다.

30여명의 보디가드에게 둘러싸여 불안한 전후 국경지역에 도착한 바흐만 고바디는 그를 돕겠다고 나선 300여명의 ‘프리프로덕션 군단’을 동원해 쿠르드족이 살고 있는 모든 마을을 촘촘하게 훑어내렸다. 연기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폭로할 수 있는 아이를 원했고, 그렇게 들어온 아이가 히레쉬 페이살 라흐만(헹고)이었다. 두팔이 없는 그 소년은 일곱살 때 불발탄과 오래된 유탄이 흩어져 있는 옛 전쟁터에서 놀다가 고압선에 걸린 새를 구해주려고 했다. 폭발지역 부근에 늘어져 있던 고압선은 피복이 벗겨져 있었고, 아이의 두팔은 불타버렸다. “팔이나 다리를 잃은 아이들은 정신적으로도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카메라 앞에서 그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아이는 카메라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영화에 출연하기로 동의했다.”


그처럼 처참하지는 않아도 <거북이도 난다>의 아이들은 쿠르드족이라면 누구나 감내해야 하는 고난에 익숙했다. 아브돌 라흐만 카림(아그린의 아기 리가)은 실제로도 앞을 거의 보지 못했고, 아바즈 라티프(아그린)는 태어나서 한번도 전기를 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영화 그 자체가 그들의 현실이었다. 영화 속에서 아이들은 지뢰를 파내 내다판다. 누가 그 지뢰를 사는 건가. 바흐만 고바디는 “정부가 지뢰를 사들인다. 그들은 미래의 분쟁지역을 예상해서 그곳에 미리 지뢰를 묻어두기 때문이다. 이것은 끝이 없는 이야기다. 아이들은 지뢰를 파고, 정부는 지뢰를 묻고. 헹고는 예지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특별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20, 30년 뒤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리라고 예언할 수 있다”고 답했다.

 

출처는 씨네21

2012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코뿔소의 계절>을 내놓으며-

 

 

사람들은 바흐만 고바디를 쿠르드족 영화의 대변인으로 인식한다. 적절한 이해다. <취한 말들의 시간>, <고향의 노래>, <거북이도 난다>, <반달> 등 그는 매번 이란 내에 살고 있는 쿠르드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영화를 만들어왔다. 쿠르드인의 삶과 예술 혹은 그 삶과 예술에 끼어든 억압과 피폐함에 관하여 다룬다. 그 영화들이 대개 뛰어나다. 그런데 그의 신작 <코뿔소의 계절>은 고바디가 이란을 벗어나 터키에서 만든 영화다. 이란에서는 더 이상 영화를 만들기 어려워진 상태다. 이란의 이슬람혁명 당시 정치범으로 투옥되어 30여년의 옥살이를 한 뒤 감옥에서 풀려난 쿠르드족 출신의 시인 사데 그 카망가르의 실화를 소재로 했다. 시인이었다가 죄수가 된 사람, 사연 많은 이야기를 바흐만 고바디는 뛰어난 이미지로 그려낸다.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부터 물어보고 싶다. 당신이 이란 내에서 영화를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해진 상태인가.

=물론 마음만 먹으면 돌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입국 절차를 밟는 동안 여권을 빼앗길 위험도 있고 또 다시 정부의 압박을 받을 수도 있어서 조심스럽다. 실은 돌아가지 않는 당장의 이유로는 네덜란드와 미국 등지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이 있어서다. 네 개 정도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 중이다. 미국에서는 두 편을 진행 중인데 그 중에 하나는 애니메이션이다!



 

-이란 혁명 당시에 정치범으로 투옥된 쿠르드족 시인 사데그 카망가르의 실화를 소재로 했다고 들었다. 그의 삶의 무엇이 당신의 흥미를 끌었나.

=처음부터 그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삶의 궤적이 내가 생각했던 어떤 아이디어와 연결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거다. 그보다 이 영화의 시작에 있어서 훨씬 중요한 건 내가 오랫동안 존경해 온 배우,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베흐루즈 보수기였다. 그는 한때 이란의 말론 브란도로 불렸던 배우였지만 35년 동안이나 망명생활을 하면서 출연한 영화가 한, 두 편에 불과하다. 망명자로 산다는 것은 오히려 감옥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5~6년 전에 그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더니 무언가 그런 상태를 대변할 만한 실화를 찾아보자고 제안하더라. 그러던 중에 시인 카망가르에 대해 알게 되면서 기존에 구상했던 시나리오를 대폭 수정했다.



 

-그렇다면 주연 배우 베흐르주 보수기가 그 시작이었던 셈인데 그의 어떤 점들이 그렇게 매혹적이었나.

=나는 유년 시절에 극장을 밥 먹듯이 갔다. 어머니는 늘 당부 말씀을 하셨다. 나쁜 영화는 절대 보지 말라고. 그 말을 늘 따르려 했다. 그런데 그때 보았던 거의 모든 좋은 영화에 바로 그가 출연하고 있었다.



 

-작업은 실제로 어땠나. 당신 스스로에게 어떤 성취감을 주었나.

=<코뿔소의 계절>은 내가 처음으로 전문 배우들과 함께 만든 영화다. 비전문 배우들과 일할 때와는 달라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다. 시나리오는 있었지만 어떻게 연출할지는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이렇게 마음먹었다. 써놓은 시나리오를 버리자, 스토리만 기억하고 현장에 가자, 현장에서 내가 시인이 되자, 그리고 카메라를 펜 삼아 시를 쓰자. 시네마-포이트리(cinema-poetry)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던 순간은 여러모로 내게 개인적으로 중요하다. 많은 나라를 가보았지만 결국은 400만의 쿠르드족이 있는 터키에서 영화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이 영화를 죽지 않기 위해 만들었다. 나의 삶의 원동력, 살아갈 이유를 찾기 위한 치료약이 <코뿔소의 계절>이다. 이 영화 덕분에 살게 된 거다.



 

-서구의 유명 배우인 모니카 벨루치와는 어떻게 일하게 된 것인가.

=처음에는 같은 역할에 이란 여배우를 기용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도 하려 하지 않았다. 나와 일하면 다시는 이란에 돌아가지 못할까봐 다들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외국 배우 중에 이란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의 생김새를 지닌 외국 여배우를 찾다가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 <말레나>도 좋게 보았고. 고맙게도 만난 지 몇분 만에 수락해주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되 영화 내내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계속 흘러나온다. 어떤 정서적 효과를 위한 것이었나.

=그건 이란의 저명한 여류 시인의 시다. 처음부터 영화가 무겁고 조용하고 차분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라도 얼마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전체를 다소 부드럽게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다고 할까.



 

-서로 독방에 갇혀 있던 부부가 수년이 지나 감옥 안에서 잠깐 만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얼굴에 두건을 쓰고 있어서 서로를 만질 수는 있지만 보지는 못한다. 전적으로 당신의 상상력이 만든 장면인가.

=이란 대통령 선거 몇 년 전에 나도 투옥된 적이 있다. 그래서 내겐 감옥 친구들도 많다. (웃음) 실은 그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다. 그런 비슷한 식으로 정치범들을 만나게 해준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얼핏 들었다. 시간은 딱 20분이 주어지지만 서로 만지거나 키스도 못하고 검은 비닐봉지를 뒤집어 써 상대방을 볼 수 없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비닐봉지의 물성과 소리가 생생하게 떠올라 만든 장면이다.



 

-영화 만들기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떻게 변해왔나.

=음… 사실은… 처음부터 영화를 사랑한 적이 없고 행복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웃음) 항상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와 억압 아래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과거로 돌아가면 영화감독이 아니라 차라리 작곡가나 아니면 나사(미국항공우주국)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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