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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향기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by 아프로뒷태 2014. 8. 4.

 

 

 

 

1. 영웅을 10분 안에 위기에 빠뜨릴 것.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각본에서 자주 발견되는 특징이란 없을까? 이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책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건 없다. 그 영화들을 한번에 관통하는 불변의 진리도 없다. 그러니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10가지 지침을 임의로 작성해본다. 하지만 이 가설이 정석은 아닐지라도 참조는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초대한 각본가들의 영화를 통해 한번 들여다보자.


1. 새로운 영웅을 영접하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는 영웅이 빠지는 일이 거의 없다. 프로프의 서사학과 조셉 캠벨의 신화학을 적절히 섞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위한 실용적 안내서>라는 지침을 만든 뒤 할리우드 실세들에게 돌려 실제로 유행시킨 스토리 분석가 크리스토퍼 보글러는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라는 책에서 “모든 스토리는 신화, 민담, 꿈, 그리고 영화에서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몇 가지 구조상의 공통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그것을 영웅의 여행이라 통칭한다”고 말한다. 여행이건 아니건 한때 유행했던 근육질 덩치들(람보, 코만도)의 영웅 스토리는 오래전에 지나갔고 요즘 유행하는 스토리는 두 얼굴이며 양면적이고 어두운 영웅의 존재감에서 나온다. 그들은 돌연변이고 반(半)흡혈귀이고 스파이이며 얼굴을 바꾸거나 의복을 바꿔 겨우 세상을 지킨다. <배트맨> <스파이더 맨> <블레이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등이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2. 10분 안에 흥미를 끌어라!


“나는 모든 시나리오 지망생들이 이야기를 잘 쓰건 못 쓰건 언젠가 잘해낼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시간이 없었다. 잘못된 시나리오는 쓰레기통에 던져져 재활용 종이로 사용될 것이다.” 이 독설은 <아메리칸 아이돌>의 ‘사이먼’이 아니라 저명한 시나리오 작법 강사 ‘사이드’ 필드가 <시나리오란 무엇인가>에서 한 말이다. “10분이다. 첫 10분 안에 당신은 보고 있는 영화에 관한 생각을 결정하게 된다. 다음에 당신이 영화관에 가면 얼마 뒤에 결정하는지를 시계를 보면서 검토해보라”고 그는 장담한다. 꼭 10분은 아니더라도 여하간 블록버스터 지지자들은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다. 블록버스터는 초반에 관객의 눈과 심리를 ‘낚아야’ 한다. 희대의 블록버스터 007 시리즈의 그 오랜 장수 비결이 초반 힘주기에 있다고 하면 과장일까? 사실 <디파티드>는 전체적으로 볼 때 실망스러운 플롯 투성이다. 그런데 신들린 듯한 초반 몇분의 도입부만큼은 잊기 힘들다. <미션 임파서블>의 첫신은 또 어떠한가? 그건 큰 이야기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이야기이며 거부하기 힘들 만큼 신선한 애피타이저다.

3. 흥미로운 조연과 적을 가져라!

 

요즘 나온 블록버스터영화 중 이 분야의 선두주자라면 <슈렉>이 아닐까? 그에게 누가 있는가? 슈렉이 사랑한 변칙 공주 피오나 그리고 말 많은 친구 동키가 있다. 낮에는 미인이고 밤에는 흉물인 반인반괴의 공주. “나 노래 불러도 돼? 노래 불러도 돼?” 하며 쫓아다니는 이 나사 빠진 당나귀. 그러고보니 2편에서는 누가 나왔던가? 악당의 눈초리로 등장하였으나 동정의 눈빛으로 관객을 휘어잡은 장화 신은 고양이.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놓고 슈렉과 싸우던 반 토막 영주 파콰드. “대립의 원칙-주인공과 주인공의 이야기를 지적으로 흥미진진하고 감정적으로 흡인력 있도록 만드는 것은 오로지 적대 세력의 역할이다”라고 로버트 맥기(<어댑테이션>에서 쌍둥이 각본가 형제들이 숭상해 마지않았던 바로 그 유명한 스토리 분석가)는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에서 말했는데, 여기에 흥미로운 조연의 자리를 덧붙여도 될 것 같다.

4. 주인공을 위험에 빠뜨려라!

 

그러니까 우리는 학창 시절 배운 바 있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이 정석대로 흐를 때 주인공은 위험에 빠지고 서사는 진전한다. 물론 믿기지 않겠지만 사건이 없는 영화들도 있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는 없다. 적어도 이 계통에서 이 말은 신앙이다. 하지만 블록버스터라고 하여 다 흥미로운 사건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질라가 미국 한복판을 헤매고 다닐 때 우리는 단 한번도 흥분한 적이 없지 않은가. 대신 <미션 임파서블>의 주인공 이단 헌트가 모략으로 위험에 빠져 좌충우돌할 때 우리의 말초신경이 근질거린다.

5. 주제의식을 가져라!

비록 그 주제란 것이 대개 신통치 않은 내용들이기는 해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각본이 신중하게 주제를 모색하고 있다는 점 자체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무엇이건 주제가 있어야 등장인물과 사건과 플롯이 순조롭게 풀리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심층적인 주제의식을 들여와 마침내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린 예가 있다면 스티븐 스필버그다. 그의 영화 각본을 썼던 데이비드 코엡과 에릭 로스의 <우주전쟁>과 <뮌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주전쟁>이 미국의 근과거에 대한 주석이라면, <뮌헨>은 유럽의 먼 과거에 대한 애도다.

6. 현실을 벗어나라!

 

이 말은 황당무계해져라, 혹은 주인공이여 기적을 행하라, 혹은 영화여 논리적 결함을 두려워마라 쯤으로 바꿔 말해도 좋겠다. 여름 시즌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찾아오는 이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해변의 모래밭과 파도, 산의 솔바람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여름철 피서용으로 고다르의 영화를 보지는 않는다(못한다). 리얼리티 너머의 상상적 주인공과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블록버스터의 몫이다. 슈퍼맨이 지구를 돌아 거꾸로 시간을 돌린 그 황당함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요즘은 여름철이 아니더라도 크리스마스 시즌마다 빗자루를 들고 이곳을 찾는 아이들(이라기보다는 너무 커서 좀 징그러워진 청소년들)이 있다. 아이들을 위해 써낸 소설을 어른이 영화로 만드니 어른들이 더 재미있게 본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전해주는 바, 어른들이여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마술 빗자루를 탄 소년 소녀로 착각해도 괜찮다는 뜻이다.

7. 전통 장르의 규칙을 무시하지 마라!

 

“당신이 쓰고 있는 장르의 영화들을 봤다고 해서 그 장르를 잘 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베토벤의 교향곡을 9번까지 다 들었으니까 이제는 교향곡을 작곡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실수다”라고 맥기는 썼다. 물론 노련한 블록버스터 각본가들이라면 듣는 것으로만 교향곡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옛 장르의 규칙을 배우고 존중하고 변주하며 써먹는다. “실제로 장르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지름길이다. 지름길을 앎으로써 작가는 자유롭게 개별 작품과 관련된 장르의 다양한 측면들을 탐구할 수 있게 된다”라고 <얼터너티브 시나리오: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들은 요즘 어떻게 쓸까?>의 저자 켄 댄시거, 제프 러시는 말한다. 그런 점에서 아무래도 <슈렉>은 스크루볼코미디의 숨겨진 외전인 것 같다. “주인공은 고독한 남성이다, 그는 자신의 고독이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여성을 찾는다, 이 장르가 보여주는 공격성은 유머의 원천이다.” 켄 댄시거와 제프 러시가 말한 스크루볼코미디 장르의 특징이다. 왠지 심하게 비튼 외전 같지 않은가.

8. 명대사를 빠뜨리지 마라!

“I’m Your Father.” 다스 베이더가 코고는 듯한 음성으로 이 한마디를 던졌을 때 <스타워즈>는 영화사의 신화가 됐다. 혹은 무표정의 전사 <터미네이터>가 던진 “I’ll Be Back”은 시대를 풍미한 유행어가 됐다.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해 극장을 내 집처럼 찾은 추종자들이 있음을 어떻게 잊겠는가(여기에 관해서는 뒷장을 참조하시기를).

9. CG는 이야기에 복속시켜라!

 

가장 멍청한 블록버스터가 강대한 CG에 초라한 이야기를 가진 부류다. CG의 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술이 어떻게 이야기에 부합하는지가 관건이다. <포레스트 검프>는 완벽하게 그에 대한 모범 선례다. 사실 <포레스트 검프>의 장면들이 우디 앨런의 <젤리그>를 본뜬 게 아닐까 의심되긴 하지만 여하간 흥겹다. <우주전쟁>은 또 어떠한가. 당신이 한밤중 심야 영화관에서 나와 인적없는 골목길을 걷는다면 금방이라도 영화 속 외계 생물체가 엄습할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을지 모른다. 그건 훌륭한 CG 때문이 아니라 그걸 떠안고 있는 이야기의 힘 때문이다.

10. 가장 오래된 법칙을 깨지 마라!


할리우드의 가장 고전적 법칙은 영화가 환영이라는 것이고 그 환영이 오락을 위한 것일 때는 즐기라는 것이다. 특히 블록버스터에서 주인공은 영원히 죽지 않고 환영의 향수로 남는 엔딩 바깥의 무엇이 된다. 블록버스터에 유독 시리즈가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시나리오를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결말을 아는 것이다. 당신 시나리오의 결말을 결정하라. 그리고 나서 시작을 꾸며라”라고 사이드 필드는 말한다. 함부로 주인공을 죽이겠다고 결말을 결정하는 블록버스터 각본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디파티드>는 원작이 있고, 마틴 스코시즈의 영화임을 고려할 때 제외하기로 하고).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주인공 잭이 매번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시리즈를 이어갈 때 이 오래된 법칙은 당연히 떠오른다.

 

 

위기와 음모를 직조하는 재주꾼

<칼리토> <우주전쟁> <스파이더 맨>의 데이비드 코엡


HeSTORY


 


 

<쥬라기 공원> 때만 해도 이 영화의 성공신화가 원작자이면서 각본에 참여했던 마이클 크라이튼, 그리고 블록버스터형 예술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합작에서만 나온 것이라 생각했다. 각본에 이름이 올라 있는 또 한 사람 데이비드 코엡에게 우리는 신경쓰지 못했다. 코엡의 전환점은 확실히 그 다음 작품 <칼리토>에서 브라이언 드 팔마를 만났을 때다. 코엡이 “그는 (누군가의) 스승이 되는 법을 알고 있다”며 자신의 경력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브라이언 드 팔마를 꼽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미션 임파서블> <스네이크 아이>의 기회를 얻어 코엡은 이야기의 똬리를 풀어나가는 능력을 선보였고, <패닉 룸> <우주전쟁>은 이미 그가 저명한 각본가로 정평을 얻은 뒤의 작품이다. 그러니 지금 그의 각본 예정작에 <스파이더 맨4>와 <인디아나 존스4>가 있다는 사실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만약 내가 <인디아나 존스4>에 대해 입이라도 뻥긋 하면 드림웍스 비밀경찰(!)이 나를 잡아갈 것”이라고 허풍을 칠 때 그래서 정말 그 내용이 궁금해진다. 혹은 그가 각본을 썼던 <스파이더 맨> 1편을 넘어 4편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펼칠지 기대된다.

TALENT

 

먼저 질문. <미션 임파서블>과 <미션 임파서블2>, <스파이더 맨>과 <스파이더 맨2>. 1편에서 각본을 맡았던 데이비드 코엡이 손을 떼면서 영화의 성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생각해볼 것. 그게 코엡의 능력을 설명하는 데 근거가 되는가? 된다! <미션 임파서블>과 <스파이더 맨>에서 그가 물러났을 때 다음 편이 여지없이 ‘서사의 영화에서 액션의 영화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코엡은 언젠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좋아요, 이거야말로 아주 쉽군요. <악마의 씨>죠!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것이 그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이 대답을 듣고 나면 수긍이 간다. 왜 아니겠나? 데이비드 코엡의 이야기는 정교하며 그 속의 세계는 음험하고 위험하다. 그는 우선 복잡하고 어지러운 이야기를 엮어가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갖고 있다. 특히 위기에 빠진 주인공들의 이야기에서 쾌락을 뽑아내는 재주가 빛이 난다. 그게 비극적 운명의 굴레이건(<칼리토>) 모략과 수수께끼의 상태이건(<미션 임파서블> <스네이크 아이>), 혹은 공룡과 외계 생물체의 먹잇감이건(<쥬라기 공원> <우주전쟁>), 거미에 물려 돌연변이가 된 소심남이건(<스파이더 맨>) 말이다. 게다가 때때로 그는 매우 은유적인 정치 선동가다. 엄청난 예산의 <우주전쟁>을 쓸 때 그 밑바탕에는 언중유골의 정치적 태도도 있었다. 그래서 혹자는 코엡에게 <우주전쟁>은 ‘안티 <인디펜던스 데이> 영화’처럼 보인다고 말했는데, 코엡은 그걸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

MEMORABLE LINES
 

링 아나운서: (무대 뒤쪽으로 뒷걸음질치더니 베일 뒤에 있는 피터를 향해) 어이 꼬마! 이름이 뭐야?

피터: 휴먼 스파이더요.

링 아나운서: 뭐? 휴먼 스파이더? 고작 그거야!? 정말 꽝이구먼(무대쪽으로 걸어나오면서 도전자 피터를 소개한다) 3천달러를 받게 될 사납고, 포악하고, 잔인무도한 스파이더 매~앤.

피터: (당황한 모습으로) 휴먼 스파이더라고요! 이름이 틀렸어요!

 

<스파이더 맨>에서 명대사 하나를 고르라면 대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라는 피터 삼촌의 말을 꼽는다. 그런데 지금은 좀 색다른 걸 기억해보면 어떨까. 그러니까 영웅 작명의 순간. ‘피터가 스파이더 맨으로 불리는 최초의 순간.’ 피터가 도화지를 걸친 듯한 어설픈 복장을 하고 레슬링장에 들어섰을 때 무대 건너편 링 아나운서(<스파이더 맨> 시리즈 세편 모두에 카메오로 등장하고 샘 레이미의 절친한 친구이자 <이블 데드> 시리즈 등 B급영화의 아이콘인 브루스 캠벨)가 다가오더니 그만 그렇게 말해버린 것이다. “휴먼 스파이더라고요! 이름이 틀렸어요!”라고 억울한 듯이 피터가 말해도 이미 소용없어진 것이다. 이 순간 변종 영웅의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어쩌다 존재가 바뀐 것처럼 그의 이름도 바뀌었고, 우리는 지금도 그를 휴먼 스파이더 대신 스파이더 맨이라고 부른다. 위기와 혼란에 빠진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노련하게 엮어나가는 데이비드 코엡은 종종 이렇게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만한 유머러스하나 중요한 대사들을 쓸 줄 안다. 혹시 이 숨겨진 영웅 탄생의 순간을 <스파이더 맨> 추종자인 당신은 기억하고 있는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가

<포레스트 검프> <인사이더> <굿 셰퍼드>의 에릭 로스

 

HeSTORY


 

<굿 셰퍼드> 촬영현장의 로버트 드 니로와 에릭 로스(오른쪽)


 

30년 이상 경력의 1945년생 시나리오작가 에릭 로스의 전성기는 13년 전 <포레스트 검프>에서 시작됐다.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 이후 기록적인 실패작 <포스트맨>과 로버트 레드퍼드와의 불화로 화제가 된 <호스 위스퍼러> 등을 거치면서 다소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마이클 만(<인사이더> <알리>), 스티븐 스필버그(<뮌헨>) 등과 굵직한 이야기를 통해 호흡을 맞추면서 재기한다. <뮌헨>과 <인사이더>는 미국 내 각종 영화상 각본상에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최근에는 그가 숱한 감독을 거치며 12년 동안 품고 다녔던 <굿 셰퍼드>가 개봉하면서 현대사의 첨예한 정치적 갈등을 주된 배경으로 하는, 혹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선 (제작비가 아니라 영화의 심리적 측면에 있어) 대작 전문 작가로서 굳건히 자리잡은 인상이다. 예순을 넘긴 유대인 작가 로스는 영화홍보 담당자 아버지와 라디오 쇼 작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영문학과 민속학을 전공했다. “전통을 간직한 채 가치있는 일에 열중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것은 나의 부모님이 물려주신 내 안의 유대 전통에서 비롯된 듯하다.” 현재 그는 톰 행크스, 데이비드 핀처, 커티스 핸슨, 미라 네어 감독의 각기 다른 차기작의 작가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TALENT

다량의 조사를 필요로 하는 묵직하고 밀도있는 프로젝트는 언제나 에릭 로스의 첫 번째 관심사다. 혹자는 일반인들이 즐겨보는 것보다는 다소 지적인 그의 영화가 오늘날 메이저 스튜디오가 잘 만들려 하지 않는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노작가는 이에 대해 굽히지 않고 대답한다. “관객에게 뭔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진짜 영화”라고. “정치적인 입장과 개인의 윤리 사이의 선택에 직면한 인물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그의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변명하지 않는 남자들이다. 지능과 피부색, 정치적 입장 등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들은 모두 자신의 신념대로 선택하고 행동한 뒤 남을 탓하지 않는다. 전작을 통해 자타가 공인하는 ‘진짜 남자영화’를 만들어왔던 마이클 만, 로버트 드 니로 등이 그를 선택한 이유는 자명하다. 사내들의 전부를 건 싸움을 좀더 리얼하게 만들기 위해, 로스는 첨예한 입장이 맞부딪히는 현실을 풍부한 질료로 사용한다. 그러나 인종차별에 맞서는 복싱 챔피언이든, 피의 복수를 다짐하는 유대인이든, 담배회사의 횡포에 혈혈단신으로 맞서는 개인이든, 거대조직 CIA에 모든 것을 바친 뒤 고독하게 남겨지는 조직원이든 로스의 영화가 지닌 생생한 현실감은, 가장 현실적인 의미에서 영웅이 되는 주인공을 부각시키는 데 복무한다. 일견 금기를 건드리며 사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처럼 여겨지는 그의 영화가 별다른 어려움없이 만들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로스 자신이 까다롭고 복잡한 정치적 입장에는 정작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MEMORABLE LINES
 

포레스트 검프: 우리의 삶에 운명이 있는지, 혹은 그저 바람 같은 우연으로 이루어진 건지는 모르겠어요. 음. 내, 내 생각에는 둘 다인 것 같아요.-<포레스트 검프>

제프리: 나는 이 일에 가족 모두를 걸었어. 한데 자네는 뭘 걸었나, 고작 말뿐이잖나.

로웰: 말뿐이라고? 자네가 잘난 회사 간부들과 골프치는 동안 나는 내 말을 가지고 세상에 맞섰네. -<인사이더>
 

아브너: 이제 우리는 더이상 공정해질 수 없을 거야.

로버트: 우리가 언제고 그렇게 공정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뮌헨>

조셉: 이탈리아인에겐 가족과 신앙이 있소. 아일랜드인에겐 고국, 유대인에겐 전통, 흑인에겐 음악이 있지. 당신들에겐 뭐가 있소?

에드워드: 미국에 대한 애국심이오. 이민자에겐 없는. -<굿 셰퍼드>



 

에릭 로스는 “내가 만들려는 영화가 고유한 가치에 비해 너무 잘난 척하는 게 아닌지 늘 자문한다”고 한다. 그 소재가 지닌 묵직함에 비해서 그의 영화 속 대사들이 언제나 명확하고 알기 쉽게 주제를 함축하는 것은 그 때문일까. 하긴, IQ 75짜리 주인공의 말과 행동으로 미국 현대사를 그려낸 내공이 어디 가겠나.

 

어둠의 영웅을 사랑한 남자

<블레이드> 시리즈, <배트맨 비긴즈>의 데이비드 S. 고이어



 HeSTORY


 


 

데이비드 S. 고이어가 처음 썼던 각본은 90년에 나온 장 클로드 반담 주연의 <지옥의 반담>이다. 저예산인 건 둘째치고 그의 상상력과 어울리지 않았다. 고이어는 몇편을 지나 <크로우2: 천사의 도시>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그 다음 작품 <다크 시티>의 각본을 위해 연출자 알렉스 프로야스가 그를 데려가면서 진정한 발판을 얻었다. 말하자면 고이어의 출세작이 탄생한 셈이다. 좀더 확실하게 그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유명 작가 대열로 올려놓은 것은 <블레이드>다. 고이어는 3편까지 만들어진 <블레이드> 시리즈를 통해 프로듀서와 감독으로도 입지를 넓혀간다(하지만 각본가로만 쓸 만하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고이어는 원작에 없던 블레이드의 스승 위슬러를 창조하여 영화에 넣었고, 그게 도리어 원작 시리즈에 반영되는 등의 영향력도 발휘했다. 그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를 함께하더니 지금 다시 한번 놀란과 함께 후속편 <더 다크 나이트>를 준비 중이다. <엑스맨>의 스핀오프라 할 만한 <매그니토>도 그의 신작 중 하나다. 코믹북 영웅을 주로 다뤄온 그의 평생의 프로젝트는 언젠가 앨런 무어의 “<와치맨>을 하는 것”이다.

 

TALENT

 

데이비드 S. 고이어가 사랑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코믹북이고, 또 하나는 ‘다크’(dark)라는 표현이다. 대학을 다니며 어렵게 자신을 키우던 어머니가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어야 하는 동안 어린 그를 맡겨 놓은 곳은 다름 아니라 코믹북 서점이었다. 그래서 그 인연으로 어린 시절부터 코믹북을 즐겨 보게 됐고 그 안의 영웅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좋아하게 됐다는 것이 그의 코믹북 사랑에 관한 설화다. “내 생각에 코믹북은 이미 새로운 장르가 됐어요. 웨스턴이나 뮤지컬 같은 거죠. 코믹북은 그리스 신화에 대한 나만의 버전 같은 거죠.” 이건 그가 지금까지 선택해온 <배트맨> <블레이드> 같은 소재들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것들에 대해 쓸 때 그의 재능이 빛을 발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그가 사랑한 ‘다크’란? “나는 어두운(dark) 이야기에 많이 끌려요”라고 고이어는 습관처럼 고백한다. 그는 어두운 고담(<배트맨> 시리즈의 배경도시)의 시민이라 불릴 만하다. 혹은 우울하고 어두운 도시와 세계에 매혹되어 있는 그의 각본 속 영웅들은 마치 하계에서 이제 막 올라온 인물들처럼 그려진다. 영웅이되 반영웅이고 인간이되 그림자 같은 그런 주인공들. 그 이야기를 SF 장르 안으로 밀어넣어 판타지를 만드는 게 그의 특기다. 그럴수록 그의 ‘나만의 그리스 신화 버전’은 어둡고 기괴해진다. 고이어의 각본에서 가장 중요한 낱말 하나만 뽑으라면 아마 ‘다크’가 될 것이다. 이제 그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각본계의 ‘다크맨’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MEMORABLE LINES

 

집사: 그런데 왜 하필 박쥐인가요?

브루스 웨인: 내 박쥐 공포증을 악당들도 맛봐야 하니까요. -<배트맨 비긴즈>

고통받는 캐릭터를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 초현실적 경험으로 빠져드는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고이어는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설명은 <배트맨 비긴즈>에도 어울린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두려움’이 아닐는지. 유년 시절 발을 헛디뎌 박쥐가 들끓는 우물에 빠진 뒤로 박쥐 공포증에 걸려 ‘고통받는’ 브루스 웨인. 그가 악당에게 부모를 여의고 정의를 배우기 위해 아시아의 어느 계곡을 헤맨 다음, 마침내 두려움을 이기고 그 두려움의 상징이 되어 악당을 제압하는 전사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배트맨 비긴즈>다. 절반은 그 고행의 수련과정이고, 절반은 고담시로 돌아와 악당들을 제압하는 그의 활약상이다. 겁 많고 ‘평범한’ 부잣집 도령 브루스 웨인이 검은 세계의 강철 같은 영웅 배트맨이 되는 태초의 과정이 영화에는 있다. 유머러스하고 앙징맞기까지 한 <배트맨>의 다른 시리즈와 확연하게 차이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가 배트맨으로 돌아왔을 때 여자친구 레이첼이 미처 그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누구세요?”라고 묻자 그는 심오하게 말한다. “당신처럼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이라고. 그러나 그런 대의명분보다 더 중요한 명대사는 바로 “내 박쥐 공포증을 악당들도 맛봐야 한다”는 브루스 웨인의 이 퉁명스런 한마디다. 왜냐하면 전사가 되기 위해 브루스 웨인은 그의 스승 핸리 듀카드에게 이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넌 두려움을 없애려 세상을 떠돌았지. 하지만 문제는 적이 아니야. 진짜 두려움은 네 안에 있어. 넌 자신을 두려워 해. 이제 자신과 맞서야 해. 때가 됐다. 공포를 삼켜버려. 맞서라고.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너 스스로 두려움이 돼야 해.”

 

 

 

<슈렉> <캐리비안의 해적>시리즈의 테드 엘리엇과 테리 로시오

HeSTORY


디즈니랜드 근처에 살던 두 고등학생이 훗날 그곳의 놀이기구를 ‘원작’으로 세계적 히트 영화를 만들 줄 누가 알았으랴. 지금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시나리오 콤비인 테드 엘리엇과 테리 로시오의 파트너십이 시작된 건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동네 뒷산에서 자칭 R등급(‘한심한’을 뜻하는 Ridiculous의 R) 영화를 찍으며 놀던 두 악동은 1978년 고교 졸업과 함께 프로 각본가의 꿈을 키운다. ‘어떤 일이든 10년만 버텨내면 그 분야의 최고가 된다’는 믿음 하나로 테니스 강사, 비디오 촬영기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각본을 쓴 두 사람은 판타지 코미디 <리틀몬스터>(1989)로 어렵사리 메이저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데뷔한다. 콤비의 재능이 꽃핀 것은 1992년 개봉한 <알라딘>부터다. 2001년 오스카 각본상 후보에 오른 <슈렉>과 2002년 안정적인 흥행 능력을 증명한 <보물성>에 이어, 2003년 포문을 연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로 콤비는 전세계에서 천문학적 박스오피스를 기록했다. 오렌지카운티의 악동들은 결국 처음 예상했던 10년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할리우드의 대표 각본가로 자리잡았고, 지금은 올 여름 극장가의 가장 파괴적인 흥행작으로 예상되는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을 막 전세계에 소개할 참이다.
TALENT


이들은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는) 해적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해적영화에 대한 영화다”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슈렉> 역시 전통적인 동화 코드를 뒤집은 ‘동화에 대한 동화’라 할 법하다. <캐리비안…>에서 두 작가는 법도 도덕도 없이 사는 우스꽝스런 기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배짱, 그리고 이 추하고 너절한 주인공을 지극히 매력적인 신세기의 아이돌로 그려낸 솜씨로 세계의 관객을 흥분시켰다. 동화 텍스트의 암묵적 약속을 거침없이 전복한 <슈렉>의 쾌감은 수년이 지난 지금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 엘리엇과 로시오가 증명한 것은 이제 블록버스터의 미덕은 화려한 볼거리뿐 아니라 캐릭터와 세계관을 직조하는 신선한 시각을 갖춰야 성립한다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화려해지는 ‘대사’도 이들의 주무기다. <알라딘>의 지니 대사로 로빈 윌리엄스와 디즈니 스탭을 포복절도시켰던 현란한 만담 실력은 <슈렉>의 동키를 거쳐 <캐리비안…>의 잭 스패로우에서 만개했다. <캐리비안…> 속편 제작이 결정될 때 디즈니와 제리 브룩하이머가 가장 우선시했던 것도 엘리엇-로시오 콤비의 재영입이었다니, 이 시리즈로 둘의 입지가 더욱 공고해진 건 틀림없다. 조니 뎁도 이들 각본가 콤비가 속편을 맡지 않으면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20억달러가 투입된 클라이맥스 액션신도 촬영 당일 점심시간에 급하게 고쳐 쓰는 대담한 이들에게 그만큼 전폭적인 신뢰가 쏟아진다는 건 사실 놀라운 일이다. “각본가로서 우리의 포부는…적어도 촬영 당일까진 시나리오 초안을 넘기는 거다.” 어쩌면 이 배짱이야말로 가장 쿨한 동화 속 괴물과 가장 쿨한 해적 선장을 창조한 원동력인지도.

MEMORABLE LINES
티아 달마: 그러다 (데비 존스는) 모든 남성의 적을 만났지.

윌 터너: 모든 남성의 적이라니?

티아 달마: 글쎄, 뭘까.

깁스: 바다 말인가?

핀텔: 덧셈?!

라게티: 선악의 흑백논리…?

잭 스패로우: 여자.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 중에서

애벌레를 눌러짜서 치약으로 삼고 귀지를 파내서 식탁 위 양초로 삼던 초록 괴물을 기억하는가. 늘 취한 양 비틀거리는 이 해적 선장의 행동거지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엽기성을 자랑한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썩소를 날리고, 향수 대신 향신료를 겨드랑이에 뿌리고, 관 속에 숨어 바다로 탈출해선 시체의 다리뼈를 뜯어내 노 삼아 저어 간다. 멋있고 폼나는 모든 클리셰에서 멀리멀리 도망가는 잭 스패로우에게서 관객은 이 시대 ‘쿨’의 정수를 본다. 그런데 조니 뎁의 매력이 스크린을 장악하면 할수록 테드 엘리엇과 테리 로시오는 초조해진단다. 그들이 작품세계에 깔아놓은 복잡다단한 장치들을 관객과 평단이 다 쫓아와주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다들 조니 뎁의 근사함을 입을 모아 칭송하지만, 유머와 시각효과, 소품 장치, 조연들의 연기에 대해선 별로 얘기하지 않는다.” 2편부터 엘리엇과 로시오는 캐리비안의 세계를 좀더 복잡하게 꾸몄다. 네명의 새로운 캐릭터가 합류하면서 이야기는 확장되고, 인물 관계와 사건은 설명된 것 이상의 여운을 드러낸다. 엘리엇-로시오 콤비는 관객이 지나치기 쉬운 작은 유머와 배경 설정들도 챙기며 영화를 꼼꼼히 즐겨주길 바란다. 깁스, 핀텔, 라게티가 한마디씩 끼어드는 사소한 대화 장면에도 조연들의 극단적인 개성이 수줍게 드러나 있다. “영화의 진짜 매력은 풍부한 정보에 있다.” 대사, 미술, 슬랩스틱에 담긴 촘촘한 디테일의 잔재미들, 꼭꼭 씹어 음미해달라는 주문이다.

 

 

시대와 장소를 묘사하는 정확한 눈

<킹덤 오브 헤븐> <디파티드>의 윌리엄 모나한

 

HeSTORY


 


 

윌리엄 모나한이 각본가로 크레딧을 올린 영화는 단 두편. 그중 한편은 12세기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포스트 9·11 시대를 은유한 기이한 역사활극 <킹덤 오브 헤븐>으로 개봉 당시 평단과 관객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했고, 아카데미 각색상과 골든글로브 각본상 등 10여개의 트로피를 안겨준 <디파티드>는 홍콩 누아르의 화려한 부활을 선포한 <무간도>를 리메이크한 결과물이다. 그의 독창성을 보여줄 만한 필모그래피는 아니라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2007년 현재 모나한이 관여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된’ 프로젝트는 <쥬라기 공원4>를 포함하여 모두 다섯개. 19세기 초 버버리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트리폴리>를 비롯하여 한때 스탠리 큐브릭의 차기작이었던 영화, 마르코 폴로의 전기영화, 요르단에서 활동하는 CIA 요원에 대한 리들리 스콧의 차기작 등이 포함된 리스트는 모나한이 바로 지금, 할리우드 최고의 인기 작가임을 보여준다. 그런 그가 한때 “더이상 직업으로 존재하지 않는” 학자 지식인을 꿈꾸던 영문학도였음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뉴욕 포스트> <맥심> 등의 매체에 글을 쓰던 모나한은 자신의 소설 <라이트 하우스: 트라이플>을 고어 버빈스키를 위해 각색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TALENT

 

비중있는 조연이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사라지고, 주인공은 항전이 아닌 항복을 택하며(<킹덤 오브 헤븐>), 마지막까지 불완전한 주인공 모두는 급작스러운 최후를 맞이한다(<디파티드>). 매력적인 주인공의 영웅적인 여정과 성장을 묘사하는 할리우드 대작의 법칙으로 본다면 빵점짜리 시나리오. 널리 알려진 시나리오 작법에 대해서 냉소를 표하는 모나한의, 자타가 공인하는 장점은 “역사에 대한 강한 관심, 배경이 되는 시대와 장소에 접근할 때, 중요한 요소를 뽑아내는 능력”이다. 정치적으로 모범적이고 영화적으로 지루한 <킹덤 오브 헤븐>의 극장판 러닝타임은 137분. 그러나 많은 이들은 DVD에 수록된 182분짜리 감독판에서 모나한의 장기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킹덤 오브 헤븐>의 탄생 비화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트리폴리>를 위해 그를 만났던 리들리 스콧이 중세 기사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고, 이에 대해 모나한이 십자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를 제안했던 것. 스콧은 그 자리에서 설복되어 <킹덤 오브 헤븐>의 시나리오를 부탁했다. 그의 또 다른 장점은, 더이상 분업화할 수 없는 할리우드에서 마지막까지 버릴 수 없는 영화적 전통을 고집하는 뚝심이다. 좀처럼 공동작업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 그가 유일하게 공동작가 크레딧을 허용한 영화는 <쥬라기 공원4>. 마지막 순간까지 막강한 권력을 지닌 감독과 뛰어난 배우를 위해 시나리오를 고쳐 써야 한다고 믿는 그가 <킹덤 오브 헤븐>의 촬영현장에 합류하기 위해, 시나리오의 마무리를 존 세일즈에게 맡겨야 했던 것이다.

MEMORABLE LINES

 

빌리: 나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내 결론은 이거예요. 아무렴 어떠냐. 날 한번 모욕하면 참을 겁니다. 두번 모욕하면 때려칠 거고. 하지만 날 협박하면 당신 머리통에 총구멍을 내주겠소.

코스텔로: 혹시 나한테 물어볼 거 있나?

빌리: 당신은 일흔살이에요. 돈도 많은데 마약 거래하면서 위험을 자초하는 이유가 뭐지?

코스텔로: 난 초등학교 때부터 삥 뜯으면서 늘 풍족했어. 솔직히 이젠 섹스도 꼭 필요하지 않아. 하지만 즐기지. 내 말은, 첩자가 있다는 거야.

 

윌리엄 모나한은 제작자와의 첫 만남에서 <디파티드>의 배경이 보스턴이어야 함을 직감했다. 아일랜드계인 모나한의 고향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보수적인 청교도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보스턴. “이탈리아 갱은 수명이 다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보스턴의 아일랜드계 갱단을 다뤄야 했다. 언제나 화가 났고,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보스턴 글로브>를 비롯한 숱한 지역 언론들은 <디파티드> 개봉 당시, 보스턴에서 살아가는 아일랜드계 하층민들의 말과 행동, 가치관을 정확히 반영한 시나리오에 극찬했다. 조직에 잠입한 경찰 빌리와, 빌리를 떠보는 두목 코스텔로의 대화.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주어지는, 흥미로운 정보들이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죽음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빌리의 자포자기한 발악에서는 보스턴 토박이들의 운명론이 엿보이고, 코스텔로의 대사는 그가 실은 성적 능력을 상실한 노인임을 암시하면서 유래없는 악의 화신이 지닌 이면을 드러낸다.

 

 

성장통의 아픔을 아는 해리 포터의 성실한 친구

<해리 포터> 시리즈의 스티브 클로브스 

HeSTORY


 


 

<해리 포터> 전 시리즈를 각색(<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제외)해온 스티브 클로브스에 대한 진실 하나. 그는 각색 제안을 받을 때까지 이 책의 존재조차 몰랐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 예견된 흥행 파워에 어울리지 않게도, 그는 지독하게 ‘안 팔리는’ 작가였다. 24살의 데뷔작으로 숀 펜,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한 <젊음의 초상>(1984), 형제 피아니스트와 여가수의 기묘한 긴장감을 나른한 재즈 음악에 녹여낸 <사랑의 행로>(1989), 텍사스의 자판기 수리공과 아버지의 어긋난 관계를 그리스 비극의 형식에 담은 <악몽>(1993) 모두, 평단은 적당히 반응했고 대중은 철저히 외면했다. 이후 7년 동안 절필한 그는 처음 도전한 소설 <원더 보이즈> 각색으로 비로소 전환점을 맞는다. 젊은 나이에 성공을 맛본 뒤 매너리즘에 빠진 소설가(마이클 더글러스)와 열정에 찬 젊은 이상주의자(토비 맥과이어)의 심리, 그리고 이들의 모호한 관계를 절묘하게 스크린에 옮겨 오스카와 골든글로브 후보에 오른 것. 곧 그는 워너브러더스로부터 몇편의 각색을 제안받았고, 그중 한편인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선택함으로써 전세계 가장 폭넓은 연령층에 사랑받는 블록버스터 시리즈의 터줏대감 작가가 됐다.
 

TALENT

 

<나 홀로 집에>의 크리스 콜럼버스, <이투마마>의 알폰소 쿠아론, <모나리자 스마일>의 마이크 뉴웰 등, 동질감이라곤 거의 없는 감독들이 J. K. 롤링의 영국산 마법세계를 스쳐간 동안 각본만은 변함없이 스티브 클로브스가 맡아왔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제작자 데이비드 헤이먼과 클로브스는 롤링 원작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충성을 이유로 꼽는다. “내가 가장 기쁘게 하고 싶었던 사람은 콜럼버스도 쿠아론도 뉴웰도 아닌, 원작자 J. K. 롤링이었다.” 전작에서 인물들의 어둡고 우울한 내면을 포착했던 그는 롤링의 원작에 깔린 어두운 정서에 빠져들었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아이들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대등한 진지함으로 그들의 세계를 대하는 흔치 않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원작에 충실하다 해도 각색자는 방대한 원작의 세계에서 취사선택의 묘를 발휘할 수밖에 없다. 클로브스의 각색은 해리, 해그리드, 루핀 교수 등 캐릭터들에 내재한 아웃사이더적 감성에 방점을 찍는다. 헤이먼이 클로브스에게서 높이 사는 점도 해리가 느끼는 가족의 공백과 성장의 그늘을 작품 전체에 팽팽히 유지하는 기술이다. “그는 멜랑콜리를 다룰 줄 아는 작가다. 작은 영화를 주로 했지만 그 안에 펼쳐지는 감정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다. 그는 센티멘털리즘에 빠지지 않고 편안하게 감정을 다룰 줄 안다.” 자녀들을 생각하며 각색에 임하는 클로브스는 어린이 팬들이 판타지 이미지보다 더 좋아하는 건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아이들의 현실적 고민이라고 확신한다. “아이들은 벅빅이나 무서운 디멘토보다, 헤르미온느가 ‘내 뒤통수가 이렇게 생겼단 말야?’ 하고 기막혀하는 장면을 더 재밌어한다.”

MEMORABLE LINES

 

해리: 선생님, 해고되신 거예요?

루핀 교수: 아니야. 내가 그만둔 거란다.

해리: 그만두셨다고요? 왜요?

루핀 교수: 누군가가 내 비밀을 흘린 것 같더구나. 내일쯤이면 학부모들이 보낸 항의 편지가 도착할 거다. 부모들은 나 같은 사람이 자기 아이들을 가르치는 걸 원치 않을 테니까….

해리: 하지만 덤블도어 교장선생님이 도와주실….

루핀 교수: 그분은 이미 날 위해 무리를 많이 하셨단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들은 말이야… 이젠 이런 일엔 익숙해져 있다, 고 해두자.

 

감정의 흐름을 다루는 클로브스의 장기는 <해리 포터> 시리즈 중에서도 <해리 포터: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휘된다. 클로브스는 보름이면 늑대인간으로 변신하는 루핀 교수를 <…아즈카반의 죄수>의 핵심 어른 캐릭터로 꼽는다. 슬픈 사연을 감추고 있는 루핀 교수는 점점 심적 궁지에 몰려가는 해리의 편에서 진심어린 위로를 건넨다. 두 사람은 호그와트의 아웃사이더로서 유대감을 나누지만 이들의 잔잔한 감정적 교감은 곧 닥쳐올 이별로 더 쓰라린 추억을 남긴다. 특히 루핀 교수가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는 장면은 <해리 포터> 시리즈가 판타지의 외피를 쓴 현실적인 성장담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자신이 늑대인간이라는 비밀이 누설되자 그는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나기 전에 스스로 사퇴서를 낸다. 힘없이 물러나는 그의 쓸쓸한 뒷모습은 사회적 소수자들을 더욱 용납치 못하는 학교 공간의 폐쇄성을 일깨운다. 그를 보내는 해리는 망연한 표정밖에 지을 수 없다. 어른들의 규칙과 자신의 무력감을 새삼 깨닫는 이 장면에서 클로브스는 관객의 씁쓸한 성장의 추억을 조용히 흔들어 깨운다.

 

 

 

 

 

 

 

 

 

 

 

시나리오 작가 심산이 소개하는 단계별 시나리오 작법 책

당신에게 맞는 시나리오 책은 무엇?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개중엔 시나리오책 수집광이 있다. 신간이 나오면 무조건 사서 보는 그런 친구들은 실질적인 시나리오 쓰기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점점 내 현실이 저쪽의 이론과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왕초보라면 입문서 정도는 읽어야 하겠지만, 시나리오 작법에 관한 책은 한두권이면 족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그 책을 한번 더 보고, 다른 이들의 시나리오를 봐라. 차라리 좋아하는 영화를 한번 더 봐라.



 

초급자용





시나리오란 무엇인가/ 시드 필드 지음/ 유지나 옮김/ 민음사 펴냄



시나리오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딱 한권의 책을 읽는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할리우드 시나리오의 가장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구조인 ‘3장구조’에 관해 가장 명쾌하게 써놓은 책이다. ‘시작 또는 이야기의 설정’, ‘중간 또는 대립’, ‘결말 또는 해결’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구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3장구조는 수학으로 치면 덧셈과 뺄셈에 해당한다. 덧셈과 뺄셈을 알아야 곱셈, 나눗셈을 하고 미적분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시나리오 워크북/ 시드 필드 지음/ 박지홍 옮김/ 경당 펴냄



시드 필드가 <시나리오란 무엇인가>의 연장선상에서 3장구조를 좀더 구체화한 책이다. <시나리오란 무엇인가>를 안 읽었더라도 충분히 가능한 초보자용 시나리오 작법서다. 이 책에서는 자신의 3장구조에 기존 구성점 외에 중간점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2장의 중간에 해당하는 중간점은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동안 당신을 안내하고 방향을 제시해주는 정류장이고 목적지이고 등대이다”.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 심산 지음/ 해냄 펴냄



내가 쓴 책이라서 민망하고, 또 출판사가 붙인 제목이 다소 민망하지만, 쉽고 재밌게 시나리오에 대해 풀려고 한 책이다. 한국영화를 예시로 드니 좀 가깝게 느껴질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는 일종의 한국적 관심이라고 할 만한 게 들어 있는데, 캐릭터 중심으로 쓸 것이냐, 플롯 중심으로 갈 것이냐는 구분이 그것이다.



시나리오 선집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내는 연도별 시나리오 선집을 보는 건 정말 중요하다. 현재 2003년도분까지만 나와 아쉬운데, 여기에는 영화 버전과는 다른 시나리오가 실려 있다. 이를 실제 영화와 비교해보면 글자의 세계에서 영상의 세계로 전환된다는 것에 대한 이해가 빨라질 것이다. 그냥 편하게 소설 읽듯이 봐도 분명히 남는 게 있을 거다.


 

중급자용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들의 101가지 습관/ 칼 이글레시아스 지음/ 이정복 옮김/ 경당 펴냄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아주 재미있으면서도 도움이 되는 게 있는 책이다. 사실, 시나리오를 여러 편 써본 사람이 읽는다면 초보자보다는 좀더 많이 웃을 것이고 좀더 많은 공감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동종업계 선배들의 삶을 엿보는 맛은 쏠쏠하다.



시나리오 가이드/ 데이비드 하워드, 에드워드 마블리 지음/ 심산 옮김/ 한겨레신문사 펴냄



내가 오랫동안 시나리오 강의 교재로 썼던 책이다. 시나리오의 요소를 풍부한 예시와 함께 설명한다는 게 큰 장점이다. 이론에 관한 부분은 짧고 예시가 많다. 책의 절반을 개별 시나리오 분석에 할애해, ‘수학의 정석’처럼 책의 앞뒤를 오가며 기본기를 다질 수 있게 한다. 올 겨울에 나올 <시나리오 가이드 마스터 클래스>는 이 책의 논지를 좀더 발전시킨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가지 플롯/ 로널드 B. 토비아스 지음/ 김석만 옮김/ 풀빛 펴냄



이 책의 제1부인 ‘좋은 플롯이란 어떤 것인가’는 내가 아는 한 플롯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플롯의 여덟 가지 원칙은 숙지할 필요가 있다. 2부에서는 모험, 추적, 구출, 복수 등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20개의 플롯 안에서 설명하는데 나 자신도 아직까지 볼 정도로 좋은 참고거리가 된다.



상급자용





캐릭터 중심의 시나리오 쓰기/ 앤드루 호튼 지음/ 주영상 옮김/ 한나래 펴냄



일단, 초급자에겐 이 책을 읽지 않기를 권한다. 수준이 너무 높기 때문에 기초 안 갖춰진 사람이 보면 오히려 헷갈리기 쉽다. 결국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고전 할리우드의 내러티브 구조를, 3장구조를 깨고 캐릭터를 중심에 내세워 역동적으로 시나리오를 쓰라는 것이다. 시나리오를 오래 쓴 사람이라면 사고전환용으로 아주 좋을 것이다. 이 책 저자가 쓴 <코미디 중심의 시나리오 쓰기>(한나래 펴냄) 또한 같은 맥락에서 코미디에 관해 서술하는 책이다.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로버트 맥기 지음/ 고영범, 이승민 옮김/ 황금가지 펴냄



이 책도 초급자가 건드리지 않기를. 실용서라기보다 에세이라 할 만큼 그의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이 이 두꺼운 책 안에 빽빽하게 들어가 있다. 인문학은 맥기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시나리오 작가가 가져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그는 시나리오를 종과 횡으로 가로지르며 아리스토텔레스와 셰익스피어, 로버트 프로스트와 엘리엇을 끌어들인다. 방대한 도표까지 곳곳에 들어 있어 시나리오 교재로는 가히 대학원생급이라 할 만하다. 
 

 

 

 

 

충무로의 신예작가들이 밝히는 시나리오 연습 노하우

이야기의 뼈대 만들기를 먼저 습득하라



<쉬리2> 쓰고 있는 정재호





이 사람은 여느 신예작가와 다르다. SJ(스토리 앤드 조이 프로덕션)를 이끄는 대표이사 직함은 신예와 어울리지 않는다. 여섯 작가를 거느리고 CJ와 LJ와 협력관계를 맺어 굵직한 8개의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으며, 강제규 감독과 <쉬리 2>를 함께 쓰고 있고, 무엇보다 10월이면 촬영에 들어갈 <조용한 세상>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습작기를 거치고 이제 세상에 처음 시나리오를 냈다는 점에서 신예작가임은 분명하다. 앞에 ‘주목할 만한’이라는 수사를 보태야 하겠지만.

 

좀더 정확한 수사는 PD형 작가가 될 것이다. 현장에서 경험을 많이 쌓았고, 산업으로서의 영화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경영학, 미국에서 2년 동안 방송, 다시 국내에 돌아와 대학원에서 예술경영을 공부했다는 것도 여느 작가와는 다른 이력이다. 삼희기획이라는 광고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현진영화사와 맥이 닿아 기획실장으로 들어갔다. 하다보니 영화를 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감독을 하고 싶다는 꿈이 먼저 있었다. 영화사에서 기획과 시나리오 회의와 프리 프로덕션에 참여하면서 “하다보니 모든 것을 주도하게 되고, 나아가 답답해서 직접 써보는” 현장 체험적 글쓰기가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영화에 입문하기 전부터 자신을 위해 시나리오를 꾸준히 썼다. 나중에 다시 손볼 시나리오도 다섯 작품이나 된다. 직업상 읽어야 하기도 했지만, 방대한 기존 시나리오들을 읽으며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영화를 보면서 매장면을 정지시킨 뒤 시나리오로 옮겨보는 작업이 그만의 노하우다. “물건이 뭔지 알려면 해체해보는 게 가장 빠르다.” 그리고 거기에서 뼈대를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100% 새롭게 만드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체력이 안 되면 글을 쓸 수 없다고 믿는 아침형 작가이며, 꿈은 <매트릭스>처럼 상업적이면서도 철학을 지닌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쓰기 시작하면 무조건 끝까지 간다
<양아치 어조>의 박수진





마태복음의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구절이 아무 맥락도 없이 떠오른다. 박수진씨는 이십대 중반에 대학에 들어갔지만 이십대 후반에 삼성문학상 희곡부문에 당선된 뒤 일찌감치 전업작가의 길을 걸었다. 절친한 조범구 감독이 옆에 있어 첫 시나리오부터 영화사와 계약을 맺었으니 습작 시나리오라 할 것도 없다. 영화과 지망생이었으나 줄줄이 낙방하고 우연히 오태석의 이름 석자를 듣고 극작과로 지망을 바꿔 대학에 갔다.


 

어려서부터 전업작가였으니 그냥 써보게 되더라는 게 첫 시나리오 <보이스 삐>를 쓴 소감이다. 첫 작품에 이어 쓴 것은 <양아치 어조> <뚝방전설>이다. 아무래도 시나리오는 희곡과 다르니 자기만의 수업시대를 가졌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 물고기> 시나리오를 구해 헤질 정도로 보고, 그 다음 영화를 보고 비교했다.


 

그러나 첫 시나리오를 들고 가서는 PD에게 장점보다 단점을 많이 들었고,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얼마든지 고칠 수 있고, 그럴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쓸 때마다 가장 고민이 되는 것은 ‘내가 쓴 이야기가 영화가 될 수 있을까’이다. 양념과 ‘뻥’을 할 수 있으며, 서브텍스트로 치장할 수 있는 ‘꺼리’인가를 늘 고민한다. 엽기적이고 코믹하게 쓰면 영화화가 더 쉬울 수 있지만 그렇게 타협해야 하는지도 번번이 고민한다. 그는 자료를 수집한 한 뒤 꼼꼼하게 쓰는 유형이 아니라,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끝까지 내달려 쓰는 유형이다. “심하면 끝까지 써버리기도 하는데 그럼 나중에 고칠 때 힘들어진다”고 한다. 계약을 맺고 목돈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신용카드로 생활비를 메워야 하며, 다섯살 난 딸이 안 놀아준다고 신경질을 부리는 것도 고민이다. 시나리오 지망생을 위한 조언을 부탁하자 그는 무조건 써서 완성해보라고 당부했다. 단편이라도 일단 써봐야 자기 스타일을 알 수 있으며, 하나를 완성할 정도의 노력파라면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건 식은 죽 먹기가 아닐까 하는 게 그의 격려다. 물론 ‘소림사 주방장의 비법’ 따위는 따로 없지만 말이다.


 

로버트 맥기의 가르침 그대로

<말아톤>의 윤진호





윤진호 작가는 <말아톤>을 쓰기 전에 시나리오 수업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다. 제대하고 한겨레 문화센터 강좌를 듣기는 했지만 “직장인이 대부분이어서 반쯤은 졸고 있었고 무언가 써보라고 하지도 않기에” 두달 만에 그만두었다. 영화를 전공하지 않은 그가 스승 대신 택한 교재는 다른 시나리오, 그리고 몇년이 지난 뒤에는 로버트 맥기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를 읽었다. 다세대 주택 몇백채가 들어선 시화에서, 스스로 감금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말아톤>을 쓴 그는, “맥기의 성실한 문하생”이 되었다. “어찌 보면 맥기의 책도 오랜 세월 강의하며 쌓아온 구라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나 같은 초보자가 상업적인 틀이 필요한 시나리오를 쓸 때는 매우 유용했다.” 장편 시나리오는 습작 하나를 썼을 뿐인 그는 맥기가 가르치는 대로 시나리오를 그래프에 맞춰보기까지 했다.


초보라고는 해도 그가 책만 보고 5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시나리오를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윤진호 작가가 습작으로 쓴 시나리오는 자신의 기억을 투영한 80년대 배경의 성장영화. 시나리오는 다른 장르보다 형식이 중요한데, 소재마저 낯설다면, 제대로 쓰기 힘들다는 것이다. 아는 것을 써라. 이 지론은 <말아톤>과 그가 지금 쓰고 있는 시나리오와도 연결된다.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정윤철 감독과 뜻이 맞아 <말아톤>을 같이 쓰면서 두 사람은 실화의 주인공 형진군과 그 가족, 특수학교 학생, 그들의 가족을 두루 만났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관찰이 최선이었던 것이다. 작품과 거리를 두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성급하게 2, 3고를 내놓는 대신 차분하게 결과를 되돌아보면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대종상 각본상을 공동수상한 윤진호 작가는 지금 <일요스페셜>에서 방영됐던 어느 입양아 이야기를 쓰고 있다. 실화를 고집한 건 아니지만, 여러 아이템 중에서 안전한 소재가 선택된 것 같다고. 공동작가에서 단독작가를 거쳐, 그의 마지막 꿈은 감독이다.



우선 무엇이든 써보라

<봄날은 간다> 각색한 이숙연





조성우 음악감독이 <봄날은 간다>의 각색을 해보라고 부추겼을 때, 이숙연(36) 작가는 “시나리오 습작 한번 해본 적 없다”며 발을 뺐다. 방송사를 잘 아는 작가를 구했으면 한다는 허진호 감독의 말에 자신이 출연하는 음악 프로그램의 작가를 추천했던 조성우 음악감독은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숙연 작가는 우연히 찾아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허진호 감독이 ‘소리와 봄에 관한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전해들었고, 지문 쓰는 법도 모르던 초짜 시나리오 작가는 보름 만에 뚝딱 자신의 첫 번째 습작을 토해냈다. 다행히 허진호 감독은 몇달 후 다시 연락을 해왔고, 조성우 음악감독을 통해 조심스레 건넨 그의 습작은 “대사나 감성이 좋다. 처음 쓴 거 맞냐?”는 후한 평가를 얻었다. 얼마 후 그는 류장하, 신준호 등 당시 허진호 감독의 연출부에 합류했고, “너무나 위대한 영화”는 그의 곁에 “저절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봄날은 간다> 이후 이숙연 작가에게는 ‘멜로 전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박흥식 감독의 <햇빛 쏟아지던 날들>과 허진호 감독의 <외출>을 다듬은 그는 얼마전 “사랑이 시작될 무렵 영화가 끝난다는 설정이 맘에 들었던” 좋은 영화의 <오늘> 시나리오 작업을 끝내고 현재는 블루스톰에서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의 러브스토리’를 매만지고 있는 중이다. 본인은 “첫 작품의 후광을 입었다”고 하지만 밀려드는 러브콜이 우연의 연속만은 아니다. 불문학을 전공한 그는 유년시절부터 “매일 글 한줄을 써야 마음이 풀렸다”.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를 둔 엄마라서 합숙은 꿈도 못 꾸지만” 여전히 그는 방송사 작업실에서 다른 작가들 몰래 틈틈이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매일 규칙적으로 글을 쓰는 게 도움이 된다”는 그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위해 “덜컥 학원 등록부터 하진 말라”고 충고한다. “뭐가 부족한지 알아야 배워도 자기 것이 된다”는 것이다.


 

다음은 “일단 쓰기로 맘먹었으면 끙끙대지 말고 자기 안에 있는 것만 뱉어서 훌훌훌 쓰라”는 것. “초고는 한달을 넘기면 곤란하다. 어차피 초고에서 반은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라”고 경험을 전한다. 그처럼 자신만의 워밍업 방식을 개발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이숙연 작가의 경우, <봄날은 간다>은 <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중 애잔하면서도 낙천적인 <20년전>을, <오늘>은 길버트 오 설리번의 <얼론 어게인>을, 그리고 지금 쓰고 있는 러브스토리는 최신 대중가요를 틀어두고 자유롭게 연상을 이어갔다고. “기회가 되면 멜로는 많이 써보고 싶다”는 그는 지금까지는 감성에 호소해서 글을 불러냈다면, “아귀가 딱 들어맞는 탄탄하고 치밀한 구성의 똑똑한 영화”도 언젠가 해보고 싶다. 
 

4계명_플롯 짜기를 네 집 주춧돌 깔 듯이 하라


 

“방송사에서 무대감독을 하던 시절, 영화의 구조를 익히기 위해 일 끝내고 돌아와서 매일 B급영화 비디오를 3편씩 봤다. 영화의 기본, 공식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영화를 봐야 한다. 그것도 감정을 배제하고 뼈대를 추려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중에도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를 B급영화들을 끊임없이 봤던 것은 무엇보다 이런 영화들이 만만하여 명성이나 다른 요소에 압도당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_장항준



 



 

소재와 주제가 확고해졌으니 하룻밤 안에라도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게 웬 시추에이션. 겨우겨우 20페이지 정도를 썼는데 더이상 쓸 이야기가 없으니 말이다. 드디어 구조 또는 플롯에 관한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 된 것이다. 구조란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해 어떤 과정들을 거쳐 어떻게 끝나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만희 작가에 따르면 “플롯(구조)은 말 안 듣는 개(관객)를 고기 10점을 곳곳에 적절히 배치해서 원하는 목적지까지 데려가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 구조는 골격이다. “일단 구조만 확고하다면 장편시나리오도 보름 안에 다 쓸 수 있다”고 김희재 작가는 말한다. 안정적이고 촘촘한 골격이 있다면 살 붙이기는 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구조는 초보자가 가장 어려워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구조는 수학이자 공학”이란 말이 시나리오계의 정설이겠나. 초보라면 본격적 구조화에 들어가기 전 훈련을 거쳐야 한다. 그 방법은 ‘베껴쓰기’다. 심산 작가는 “일단 남의 영화를 보고 나름대로 시나리오를 써보라”고 말한다. 그 또한 첫 작품을 준비할 때, <대부>를 수없이 보고 옮겨 적었다. “DVD를 볼 때 한 챕터만 보고 끈 다음에 이를 시나리오로 써보고, 숙련되면 한두 챕터만 보고 다음 챕터를 이어서 써보”는 이원재 작가의 방법이나 “시나리오를 보고 영화를 본 뒤 다시 시나리오를 보거나 그 역으로 영화-시나리오-영화 순서로 보”는 김희재 작가의 지침이나 모두 같은 맥락이다. 전범이 될 만한 영화를 베끼다 보면 이야기가 시작돼서 어디서 상승했다가 어디서 내려오는지 흐름이 잡힌다는 것. 이 단계까지 충실히 극복했다면, 구조화 방법론을 할리우드 스타일의 ‘3장구조’를 택하든 자신만의 ‘공법’을 만들든, 이제 장편에 걸맞은 호흡법을 갖추게 된 건 확실하다.


 

5계명_네 캐릭터를 숨쉬게 할지니라

 

“동료와 함께 공동창작을 하던 시절, 우리는 맘대로 정우성과 전지현의 이미지를 빌려왔다. 두 배우의 사진으로 작업실 벽을 도배했고, 그들이 출연한 전작은 물론 토크쇼까지 챙겨봤다. 그들의 말투와 행동과 표정을 모아 영양부족 상태의 우리 캐릭터에게 주었다. <영어완전정복>에서는 이나영을 내정해놓고 참조했다. <네 멋대로 해라>가 방영됐던 때인데 9급 공무원 나영주와 이나영이 어울려 보였다. 나중에는 정말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나영의 엉뚱함과 눈이 너무 커서 개구리 같다는 그녀의 농담까지 대사에 녹였다.” _노혜영



 



 

캐릭터란 주제를 이끌고 골고다 언덕을 힘겹게 오르는 가상의 예수다. 그러나 캐릭터를 빚는 일이 말처럼 쉽진 않다. 캐릭터는 무엇보다 우리처럼 살아 숨쉬는 존재여야 한다. “캐릭터가 걷고, 화내고, 먹는 모습을 단번에 떠올릴 수 없다면 시나리오가 밍숭맹숭해진다”는 노혜영 작가는 캐릭터와 친해지기 위해서 그 혹은 그녀와 비슷한 이미지의 배우를 모델로 삼았다. 육상효 감독은 “얄팍한 인간이나 구조의 목적에만 맞는 인물을 만들어선 곤란하다”고 말한다. 초보자들의 경우, 캐릭터를 “특정 기능을 위한 로봇”으로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뻣뻣한 캐릭터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방법은 또 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땅에 발붙이고 사는 이들을 본떠 만드는 것이다.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다. “나 자신을, 엄마를, 친구를, 옆집 아저씨를 잠시 빌려와서 그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만들면 된다.”(고윤희 작가) 인물의 전사(前史)와 이름은 물론이고, 혈액형이나 별자리까지 신중하게 붙인다는 김희재 작가는 “신봉승 작가는 인물의 생시를 정해서 유명한 작명소에 찾아가기도 했다”는 에피소드까지 전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심산 작가는 캐릭터를 빚을 때 “그냥 착하기만 하다고 감정이입이 잘되는 게 아니고 나쁜 놈이라고 해서 끝까지 나쁘기만 해선 안 된다”고 또 다른 숙제를 내놓는다. 박정우 감독도 “주요 캐릭터가 방방 뛰는 경우 보조 캐릭터까지 같이 뛰면 곤란하다. 보조 캐릭터는 잠깐 나왔다 사라지되 함축적인 연상을 가능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작가에게 캐릭터는 자식이다.

 

6계명_취재를 게을리하지 말되, 지나침이 없도록 할지니라

 

“캐릭터는 앉아서 부화되는 게 아니다. 적극적인 취재를 통해서만 캐릭터의 모양새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전작 <아이언 팜>은 미국에 거주할 때 내게 위안받기 위해 끊임없이 마음을 털어놓는 한 남자를 원치 않게 취재하면서, <달마야 서울가자> 또한 희한한 스님들이 실제로 있다는 일화를 듣게 되면서 시작했고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 외국인 노동자와 관련된 코미디를 쓰려고 하는데 단속반이며 노동자, 자원봉사자까지 다 만나볼 생각이다. 어떤 경우 말투, 이름, 성격까지 그대로 모방할 생각도 갖고 있다. 지금 내게는 세줄짜리 이야기뿐이지만 취재를 통해 곧 단단한 눈덩이로 불어날 것이다.” _육상효 감독


 

취재는 기자만 하는 게 아니다. 얼마 전 김기덕 감독은 경찰서에서 취재하다 노숙자로 오해받았다. 잘 알려졌듯이, <범죄의 재구성>의 별난 선수들은 최동훈 감독이 실존 인물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해서 살을 붙인 인물들이다(참고로 <범죄의 재구성> 시나리오 제작기를 써서 보낸 뒤, 최 감독은 리얼 스토리가 공개될 경우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 있다며 <씨네21>에 특정 에피소드를 빼달라고까지 했다). “발로 뛰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다”라는 속설은 시나리오에도 해당된다. 특히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인물, 공간, 사건 등을 다뤄야 한다면 취재만큼 작가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없다. 박정우 작가는 “여행을 해보지 않은 이가 로드무비를 쓴다면 결국 휴게소를 들락거리며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을 도는 이야기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한 법이다. 이해영 작가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고 지적한다. 실존 인물을 시나리오로 써보겠다던 한 후배가 술자리에 몇번 나가더니 “유년 시절도 다뤄야 할 것 같고 아무래도 2시간짜리 영화로 다루기엔 버거울 것 같다”며 포기하더라는 것이다. 이 작가는 “시나리오는 자료집이 아니다. 취합해서 옥석을 가리고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애초 하려고 했던 이야기의 중심이 흐려지고 캐릭터마저 뭉개진다”고 말한다. 고윤희 작가도 취재의 덫에 대해 경고한다. “길가의 현수막 문구에서도 정보를 얻는 편이지만, 취재한 지식이 많아질수록 작가는 설명적이 된다. 일수쟁이를 취재했다 치면 그걸 어떻게든 넣고 싶어하는데 그러다보면 불필요한 장면이 엄청 늘어난다”고 덧붙인다.



 

7계명_대사 쓰기를 너 말하듯 하라

 

“<파이란>에는 경수(공형진)가 강재(최민식)에게 죽은 파이란의 사진을 보여주며 ‘형 얘 예쁘지’라고 묻는 장면이 있다. 원래 시나리오에서 강재의 답은 ‘참 안됐다’ 뭐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강재가 교양있는 인간이 아니라고 봤다. 그래서 이렇게 고쳤다. ‘이년이 그때 그년이냐! 중국냄비가 예뻐봤자지.’ 내가 각색을 맡기 전 이 시나리오는 문학적으로는 아름다웠을지언정, 강재라는 진짜 인간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대사를 집중적으로 손보니 해결이 됐다.” _김해곤



 

<파이란>



 

캐릭터를 결정하고 취재까지 마쳤다면 대사와 지문을 통해 인물의 모습을 구체화하게 된다. 대사를 쓸 때 초보자가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오류는 대사를 통해 모든 상황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육상효 감독은 “초심자는 시나리오를 쓰는 게 대사를 쓰는 것이라 착각한다. ‘나 실연당했어’라는 대사보다 구겨진 장미, 퀭한 얼굴을 보여주는 게 정보를 전달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한신을 만들 때 아예 대사 없이 만들어보고 정 안 되는 대목에 대사를 넣는 훈련을 해보라”고 권한다.

 

<공공의 적>의 강철중이 “아이, 왜 그러시어요”라거나 <겨울연가>의 배용준이 “아따, 왜 이럽니까요”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듯, 대사는 캐릭터나 캐릭터의 관계를 드러낸다. 대사를 쓸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일상에서 대화를 나누듯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점이다. “입에 붙지 않는 한국영화의 문어체 대사를 보면서 내가 쓰면 저렇게는 절대 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했다는 박정우 감독은 “혼자 줄줄 구시렁거리면서 쓴다”고 말한다. 덕분에 그는 데뷔 때부터 ‘대사빨’ 하나는 대단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자신이 있다고 대사가 너무 길어지면 곤란하다. 고윤희 작가는 “그건 캐릭터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캐릭터를 이해하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좋아’, ‘싫어’, ‘먹어’처럼 짧은 대사만으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고 전한다. 대사의 맛 또한 중요하다. 장항준 감독은 초보 시절 속담집이나 격언집을 챙겨보며 영감을 얻곤 했다. “속담집은 풍부하고 질퍽한 표현을 알게 해주며, 격언집은 말이란 게 짧고 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얼음이 깨지기 전에 누가 진정한 친구인지 알 수 없다’는 에스키모 속담은 정말 훌륭하지 않나.”




 

응모만 해봐도 약이 된다

국내 시나리오 공모전 어떤 것이 있나



곳곳에서 열리는 시나리오 공모전은 생짜 초보 작가에겐 등용문의 의미보다는 쓰기 시작한 습작을 완성해야 할 동기를 부여한다는 의미가 더욱 중요하다. 초보자가 시나리오를 중도에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목표를 갖는 게 중요하고, 그러기에 공모전이 적합하다고 기성 시나리오 작가들은 입을 모은다. 공모전에 원고를 제출할 때는 “최소한 2개월 전에 원고를 마무리짓고 꼼꼼하게 손을 보는 것”(심산)이 중요하고 “시나리오의 기본 포맷을 지키고, 시놉시스를 첨부하라고 할 때는 최소화해야 한다는 점”(육상효) 또한 중요하다. 그렇다고 왕초보 작가들이여, 지레 포기하진 말지어다. 처음 낸 시나리오가 덜컥 당선이 돼 상금과 명예, 그리고 영화화의 기회를 얻을지 모르지 않나.



올해 말까지 치러지는 행사 중 현재까지 발표된 시나리오 공모전으로는 제9회 서울이야기 시나리오.수필 공모가 있다. 청계천과 관련 주제를 대상으로 하며 당선자에게 1천만원, 우수상에 500만원의 상금이 돌아가며 저작권은 서울시에 귀속된다. 마감은 9월15일까지(문의: 02-3707-8451, http://www.seoul.go.kr). 대학생이라면 제4회 대산대학문학상도 노려볼 만하다. 아직 공식 발표가 되지는 않았지만 원고는 9월 초부터 접수를 시작해 11월 초쯤 마감할 것으로 보인다. 당선되면 500만원의 상금과 15일간의 해외여행이 주어진다(문의: http://daesan.org). 2005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전은 과학기술이나 과학기술인을 소재로 삼은 시나리오의 시놉시스(200자 원고지 50매 분량)를 접수받는다. 마감은 9월30일까지(http://stl.dongascience.com).



매년 열리고 있는 정기 행사로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시나리오 공모가 있다. 극영화 시나리오,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대상으로 하며 상금은 당선작 2천만원, 우수작 1천만원이다. 가장 권위있는 공모라 할 수 있으며 매년 5∼6월 사이에 접수를 받는다(http://www.kofic.or.kr/). 배우 한석규와 <씨네21>, 인터넷 한겨레가 공동주최하는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도 노려봄직하다. 대상 1천만원, 금상 500만원이며, 당선작이 영화화될 경우 4천만원을 추가로 지급한다. 매년 3월경 접수를 마감한다(www.cine21.com). 이외에도 여러 일간지에서 신춘문예로 시나리오를 응모받고 있으나 확인이 필요하며, 배급사나 투자사, 제작사 등도 수시로 공모전을 개최한다. 영화사에 직접 연락하거나 홈페이지를 통해 수시로 응모할 수도 있다. 즉각적인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시나리오 쓰기 10계명 [1] - 작가들이 뽑은 베스트 시나리오

 

충무로 시나리오 작가 11인이 말하는 시나리오 초보자를 위한 10계명


당신이 온 세상을 즐겁게 해줄 이야기 보따리를 갖고 있다 해도, 모든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해도, 커피보다 진하고 설탕보다 순수한 삶의 진실을 간직하고 있다 해도, 결국 시나리오의 형태로 제작자나 감독의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면 그 이야기와 재능과 철학은 영화로서의 생명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한 작가는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조물주가 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창작의 본질이 다 그러할 터지만, 현대에서 가장 영향력 강한 매체인 영화라는 소우주에서 창조와 파괴를 주재한다는 건 분명 특권에 속하는 일이리라. 이 특권을 꿈꾸며 자신의 첫 번째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왕초보 시나리오 작가들을 위해 충무로에서 활동중인 11명의 시나리오 작가가 복음을 전한다. 십수년 경력의 고참에서 이제 막 충무로에 입성한 작가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이들은 후배들이 시행착오를 덜 범할 수 있도록 자신의 경험담을 적나라하게 들려줬다. 이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왕초보 시나리오 작가가 하시라도 머릿속에 넣어둬야 할 10계명을 제시한다. 이 10계명이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에게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안겨주기를, 우리는 진심으로 희망한다.


 

1계명_네가 쓸 수 있는 이야기를 깨달으라

 

“<11월의 비>를 각색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실수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긴가, 잘할 수 있는 이야긴가 따져보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였다. 돌이켜보면, 한석규의 컴백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후광을 기대하고 참여했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3주 각색하는 동안은 정말이지 지옥 생활이었다. 몸무게가 5kg이나 빠졌다. 하지만 돌아온 건 힐난뿐이었다. 뜻대로 쓸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지만, 결국 영화사로부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는 말만 들었다. 그날 이후로는 못하겠으면 못하겠다고 정중히 거절한다” _이해영 작가



 



 

만능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애당초 버리는 것이 좋다. 이해준 작가와 함께 작업해온 이해영 작가는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는 대개 궁합이 맞지 않는 아이템이었다고 털어놓는다. 하물며 처음 시나리오에 도전하는 이들이야 말해서 뭣하랴. 선배작가가 예비작가에게 던지는 충고의 대부분은 “모든 걸 다 잘할 순 없으니 먼저 자신의 취향에 대해 진단해보라”는 것이다. 이해영 작가는 “<네 멋대로 해라> 이후 쿨한 시나리오들이 쏟아져나온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쿨한 척하는 것일 뿐이다. 쿨하지 않으면 쿨한 글을 쓸 수 없다. 누구나 인정옥(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작가)이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건지, 영화판에서 놀고 싶은 건지, 그냥 글을 쓰고 싶은 건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심산 작가의 독설과 “휴일도 없고, 월급도 없고, 퇴직금도 없다. 그럼에도 올인할 수 있는가”라는 김희재 작가의 엄포를 넘어섰다면, “당신이 시나리오로 쓰고 싶은, 쓸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당신에게 답변은 무리일 것이다. 이쯤에서 선배작가의 경험 하나를 들어보자. 로맨틱코미디를 잘 쓰는 것으로 알려진 노혜영 작가는 <싱글즈>를 끝낸 뒤, 사극을 써볼까 스릴러를 써볼까 하다가, “함부로 도전하지 마라. 잘하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을 주위에서 들었다. 하지만 SF멜로에 도전했고, 1년 동안 슬럼프에 빠졌다가 결국 포기했다. “한계를 인정하니까 오히려 맘이 편하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다시 자문하게 됐다”는 게 노 작가의 말. 박정우 감독은 “습작을 하다 보면 자신이 맞는 장르뿐 아니라 대사를 잘 쓰는지, 캐릭터를 잘 만드는지, 구성이 좋은지 저절로 알게 된다”고 말한다. 이쯤에서 슈퍼맨이 되겠다는 꿈을 접었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좋다. 다만, 잊지 말지어다. 자신의 감성 촉수 중 가장 발달한 것을 찾아내야 한다는 임무를.



 

2계명_ 좋은 소재 발굴에 게으름을 피우지 말지어다

 

“유명 연기자의 소개로 왕년의 조직폭력배를 만났다. 자기 얘기를 영화로 만들어보지 않겠느냐는 청을 전해들어서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싸움 이야기만 하는데 너무 지루했다. 얘기를 빨리 끝내려고 혹시 ‘사랑 같은 건 안 해봤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한 재즈 피아니스트를 사랑했다고 하더라. 그는 조직의 명령으로 누군가를 살해했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하지만 몇년 뒤 출옥했을 때 몇년이고 기다리겠다던 여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를 찾아 미국이고 멕시코고 안 가본 데가 없으며 아직도 총각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눈물을 비쳤다. 순간, 난 속으로 외쳤다. ‘소재다!’ 보스의 위대한 사랑 이야기 <약속>은 그렇게 시작됐다” _이만희 작가



 

<약속>



 

맛난 음식은 좋은 재료에서부터, 좋은 재료는 지극정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건 상식이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좋은 소재에 대한 갈망은 모든 작가들의 욕망이다. 조폭으로부터 흥행영화 <약속>의 불씨를 얻어낸 이만희 작가는 “(소재를 찾으려는) 간절함이 없었다면 그저 눈물만 흘리고 뒤돌아 나왔을 것”이라고 말한다. 간절함은 의식 넘어 무의식의 세계에도 가닿는다. 작가들은 꿈속에서도 쉬지 못하고 소재를 찾아 헤맨다. 육상효 감독은 “고은 선생은 꿈에서도 시가 주르륵 보인다고 하는데 영화 소재도 마찬가지다. 새벽에 어떤 영상이 떠오르면 어서 빨리 일어나서 적어야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깨고 나면 기억이 안 난다”고 아쉬워한다. 고윤희 작가도 자는 동안 계시를 받을 일이 있을지 몰라서 잠자리에서 항상 노트를 준비해두곤 한다.



 

하지만 이건 만의 하나에 대비하는 자세다. 예비작가의 경우 잠을 설칠 필요까진 없다. 눈뜨고 있는 동안 일단 떠오르는 아이템은 무조건 적어두고 아이템을 발전시키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만큼 차고 넘치지 않는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라. 김희재 작가는 “시나리오 구조에 대한 이해가 없어 마구잡이로 쓴다고 할지라도 창작의 열정을 막아선 안 된다”면서 “일단 컴퓨터에 폴더를 100개쯤 만들어라. 제목만 떠올라도 인물 한명만 떠올라도 각각의 폴더를 열고 집어넣어라. 그렇게 쌓이다 보면 나뉘어져 있던 폴더 안의 조각들이 희한하게 서로 연결될 때가 있다”고 제안한다. 비현실적인 소재라고 미리 내팽개칠 필요는 없다. 이원재 작가가 5년 전 썼던 흡혈귀를 소재로 한 습작 <세일즈 맨>은 당시 “터무니없다. 서양 귀신이라 별로 매력이 없다”는 평가를 들었지만, 최근 충무로에는 흡혈귀 영화가 여러 편 준비되고 있다. 한 작가의 경우, 흥행작을 내놓은 다음 전에 써뒀던 습작까지 모조리 뜨고 있다 하니 소재야말로 든든한 밑천이다. 쉬지 말고 캐다 보면 언젠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3계명_처음 주제를 잊지 말지니라

 

“<실미도>의 그들은 마음만 먹었다면 탈출한 뒤 외국으로 가거나 어딘가로 숨을 수도 있었다. 왜 굳이 청와대로 향했을까. 그게 의문이었다. 내겐 정체성의 문제로 보였다. 주민등록이 말소된, 뿌리와 정체성을 잃은 사람들이 무언가 헌신할 목적을 잃은 채 생물학적 목숨만 부지하고 있다는 게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로 주민등록번호를 쓰는 장면도 신파 효과를 내려는 게 아니라 이 주제를 내세우는 클라이맥스로 생각했다.” _김희재



 

<실미도>


 

<라이터를 켜라>



 

기가 막힌 소재를 찾았으니 이제 끝난 거나 다름없다고? 속단은 금물이다. 소재만큼이나 중요한 게 주제다. 육상효 감독은 “상업영화에는 주제가 없다고들 생각하는데 그러면 오히려 흥행도 안 된다”고 말한다. 시나리오의 주제는 영화가 본질적으로 이야기하려는 바다.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과 이를 쫓는 형사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끝까지 들어가보면 집념에 관한 이야기이고, <아마데우스>가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의 삶을 보여주지만 질투에 관한 이야기인 것처럼, 주제는 그 영화가 캐릭터와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작가의 속뜻이다. “훌륭한 영화를 보면 모든 장면에 주제가 관통된다”고 육 감독은 설명한다.



 

김희재 작가야 주제를 이해해준 강우석 감독을 만난 덕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모든 경우가 그런 건 아니다. 장항준 감독은 <라이터를 켜라>를 만들던 당시에 결말을 놓고 속을 앓았다. 제작사는 봉구(김승우)가 영웅이 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나기를 원했다. 봉구가 신문에도 나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사열도 받아야 한다는 제작사의 주장에 그는 당시 작가였던 박정우 감독과 함께 담배 한대를 맛있게 피우는 모습의 결말을 고집했고, 결국 이를 지켜냈다. 그에게 이 영화의 주제는 ‘뛰는 사람 따로, 대접받는 사람 따로인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노혜영 작가도 “주제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욕심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관객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면 안 된다”는 이만희 작가의 이야기 또한 유념해야 한다. “헤밍웨이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오히려 다 들어낸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거창한 주제의식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는 것이다.” 주제란 마치 공기처럼, 눈에 보이진 않지만 시나리오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임을 명심하라.

 

 
충무로 시나리오 작가 11인이 말하는 시나리오 초보자를 위한 10계명

당신이 온 세상을 즐겁게 해줄 이야기 보따리를 갖고 있다 해도, 모든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해도, 커피보다 진하고 설탕보다 순수한 삶의 진실을 간직하고 있다 해도, 결국 시나리오의 형태로 제작자나 감독의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면 그 이야기와 재능과 철학은 영화로서의 생명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한 작가는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조물주가 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창작의 본질이 다 그러할 터지만, 현대에서 가장 영향력 강한 매체인 영화라는 소우주에서 창조와 파괴를 주재한다는 건 분명 특권에 속하는 일이리라. 이 특권을 꿈꾸며 자신의 첫 번째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왕초보 시나리오 작가들을 위해 충무로에서 활동중인 11명의 시나리오 작가가 복음을 전한다. 십수년 경력의 고참에서 이제 막 충무로에 입성한 작가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이들은 후배들이 시행착오를 덜 범할 수 있도록 자신의 경험담을 적나라하게 들려줬다. 이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왕초보 시나리오 작가가 하시라도 머릿속에 넣어둬야 할 10계명을 제시한다. 이 10계명이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에게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안겨주기를, 우리는 진심으로 희망한다.

1계명_네가 쓸 수 있는 이야기를 깨달으라

“<11월의 비>를 각색해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실수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긴가, 잘할 수 있는 이야긴가 따져보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였다. 돌이켜보면, 한석규의 컴백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후광을 기대하고 참여했던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3주 각색하는 동안은 정말이지 지옥 생활이었다. 몸무게가 5kg이나 빠졌다. 하지만 돌아온 건 힐난뿐이었다. 뜻대로 쓸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지만, 결국 영화사로부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는 말만 들었다. 그날 이후로는 못하겠으면 못하겠다고 정중히 거절한다” _이해영 작가





만능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애당초 버리는 것이 좋다. 이해준 작가와 함께 작업해온 이해영 작가는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는 대개 궁합이 맞지 않는 아이템이었다고 털어놓는다. 하물며 처음 시나리오에 도전하는 이들이야 말해서 뭣하랴. 선배작가가 예비작가에게 던지는 충고의 대부분은 “모든 걸 다 잘할 순 없으니 먼저 자신의 취향에 대해 진단해보라”는 것이다. 이해영 작가는 “<네 멋대로 해라> 이후 쿨한 시나리오들이 쏟아져나온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쿨한 척하는 것일 뿐이다. 쿨하지 않으면 쿨한 글을 쓸 수 없다. 누구나 인정옥(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작가)이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건지, 영화판에서 놀고 싶은 건지, 그냥 글을 쓰고 싶은 건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심산 작가의 독설과 “휴일도 없고, 월급도 없고, 퇴직금도 없다. 그럼에도 올인할 수 있는가”라는 김희재 작가의 엄포를 넘어섰다면, “당신이 시나리오로 쓰고 싶은, 쓸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당신에게 답변은 무리일 것이다. 이쯤에서 선배작가의 경험 하나를 들어보자. 로맨틱코미디를 잘 쓰는 것으로 알려진 노혜영 작가는 <싱글즈>를 끝낸 뒤, 사극을 써볼까 스릴러를 써볼까 하다가, “함부로 도전하지 마라. 잘하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을 주위에서 들었다. 하지만 SF멜로에 도전했고, 1년 동안 슬럼프에 빠졌다가 결국 포기했다. “한계를 인정하니까 오히려 맘이 편하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다시 자문하게 됐다”는 게 노 작가의 말. 박정우 감독은 “습작을 하다 보면 자신이 맞는 장르뿐 아니라 대사를 잘 쓰는지, 캐릭터를 잘 만드는지, 구성이 좋은지 저절로 알게 된다”고 말한다. 이쯤에서 슈퍼맨이 되겠다는 꿈을 접었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좋다. 다만, 잊지 말지어다. 자신의 감성 촉수 중 가장 발달한 것을 찾아내야 한다는 임무를.

2계명_ 좋은 소재 발굴에 게으름을 피우지 말지어다

“유명 연기자의 소개로 왕년의 조직폭력배를 만났다. 자기 얘기를 영화로 만들어보지 않겠느냐는 청을 전해들어서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싸움 이야기만 하는데 너무 지루했다. 얘기를 빨리 끝내려고 혹시 ‘사랑 같은 건 안 해봤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한 재즈 피아니스트를 사랑했다고 하더라. 그는 조직의 명령으로 누군가를 살해했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하지만 몇년 뒤 출옥했을 때 몇년이고 기다리겠다던 여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를 찾아 미국이고 멕시코고 안 가본 데가 없으며 아직도 총각이라고 말하면서 그는 눈물을 비쳤다. 순간, 난 속으로 외쳤다. ‘소재다!’ 보스의 위대한 사랑 이야기 <약속>은 그렇게 시작됐다” _이만희 작가



<약속>


맛난 음식은 좋은 재료에서부터, 좋은 재료는 지극정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건 상식이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좋은 소재에 대한 갈망은 모든 작가들의 욕망이다. 조폭으로부터 흥행영화 <약속>의 불씨를 얻어낸 이만희 작가는 “(소재를 찾으려는) 간절함이 없었다면 그저 눈물만 흘리고 뒤돌아 나왔을 것”이라고 말한다. 간절함은 의식 넘어 무의식의 세계에도 가닿는다. 작가들은 꿈속에서도 쉬지 못하고 소재를 찾아 헤맨다. 육상효 감독은 “고은 선생은 꿈에서도 시가 주르륵 보인다고 하는데 영화 소재도 마찬가지다. 새벽에 어떤 영상이 떠오르면 어서 빨리 일어나서 적어야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깨고 나면 기억이 안 난다”고 아쉬워한다. 고윤희 작가도 자는 동안 계시를 받을 일이 있을지 몰라서 잠자리에서 항상 노트를 준비해두곤 한다.



하지만 이건 만의 하나에 대비하는 자세다. 예비작가의 경우 잠을 설칠 필요까진 없다. 눈뜨고 있는 동안 일단 떠오르는 아이템은 무조건 적어두고 아이템을 발전시키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만큼 차고 넘치지 않는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라. 김희재 작가는 “시나리오 구조에 대한 이해가 없어 마구잡이로 쓴다고 할지라도 창작의 열정을 막아선 안 된다”면서 “일단 컴퓨터에 폴더를 100개쯤 만들어라. 제목만 떠올라도 인물 한명만 떠올라도 각각의 폴더를 열고 집어넣어라. 그렇게 쌓이다 보면 나뉘어져 있던 폴더 안의 조각들이 희한하게 서로 연결될 때가 있다”고 제안한다. 비현실적인 소재라고 미리 내팽개칠 필요는 없다. 이원재 작가가 5년 전 썼던 흡혈귀를 소재로 한 습작 <세일즈 맨>은 당시 “터무니없다. 서양 귀신이라 별로 매력이 없다”는 평가를 들었지만, 최근 충무로에는 흡혈귀 영화가 여러 편 준비되고 있다. 한 작가의 경우, 흥행작을 내놓은 다음 전에 써뒀던 습작까지 모조리 뜨고 있다 하니 소재야말로 든든한 밑천이다. 쉬지 말고 캐다 보면 언젠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3계명_처음 주제를 잊지 말지니라



“<실미도>의 그들은 마음만 먹었다면 탈출한 뒤 외국으로 가거나 어딘가로 숨을 수도 있었다. 왜 굳이 청와대로 향했을까. 그게 의문이었다. 내겐 정체성의 문제로 보였다. 주민등록이 말소된, 뿌리와 정체성을 잃은 사람들이 무언가 헌신할 목적을 잃은 채 생물학적 목숨만 부지하고 있다는 게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로 주민등록번호를 쓰는 장면도 신파 효과를 내려는 게 아니라 이 주제를 내세우는 클라이맥스로 생각했다.” _김희재



<실미도>

<라이터를 켜라>


기가 막힌 소재를 찾았으니 이제 끝난 거나 다름없다고? 속단은 금물이다. 소재만큼이나 중요한 게 주제다. 육상효 감독은 “상업영화에는 주제가 없다고들 생각하는데 그러면 오히려 흥행도 안 된다”고 말한다. 시나리오의 주제는 영화가 본질적으로 이야기하려는 바다.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과 이를 쫓는 형사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끝까지 들어가보면 집념에 관한 이야기이고, <아마데우스>가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의 삶을 보여주지만 질투에 관한 이야기인 것처럼, 주제는 그 영화가 캐릭터와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작가의 속뜻이다. “훌륭한 영화를 보면 모든 장면에 주제가 관통된다”고 육 감독은 설명한다.



김희재 작가야 주제를 이해해준 강우석 감독을 만난 덕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모든 경우가 그런 건 아니다. 장항준 감독은 <라이터를 켜라>를 만들던 당시에 결말을 놓고 속을 앓았다. 제작사는 봉구(김승우)가 영웅이 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나기를 원했다. 봉구가 신문에도 나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사열도 받아야 한다는 제작사의 주장에 그는 당시 작가였던 박정우 감독과 함께 담배 한대를 맛있게 피우는 모습의 결말을 고집했고, 결국 이를 지켜냈다. 그에게 이 영화의 주제는 ‘뛰는 사람 따로, 대접받는 사람 따로인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노혜영 작가도 “주제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욕심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관객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면 안 된다”는 이만희 작가의 이야기 또한 유념해야 한다. “헤밍웨이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오히려 다 들어낸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거창한 주제의식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는 것이다.” 주제란 마치 공기처럼, 눈에 보이진 않지만 시나리오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임을 명심하라.

 

 

 

시나리오 쓰기 10계명 [3] - 제작자의 당부

 

계명_풍경 사진 찍듯 글쓰라, 무릇 영화는 눈으로 보는 것이니

“<비트>는 정우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팔을 펼치는 이미지에서 시작됐다 할 수 있다. <태양은 없다>는 정우성의 얼굴이 못 알아보게 얻어터져서 화면에 꽝 떨어지는 이미지가 시작이었다. 기타노 다케시는 어느 인터뷰에서 ‘어떤 남자가 머리에 총을 대고 있는 장면을 먼저 생각하고, 얼마 있다가 해변에서 어른들이 스모하는 장면을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6∼7개의 그림이 모이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_심산



 



 

작가는, 시나리오는 문자로 이뤄져 있지만 그 본질은 영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어떤 캐릭터와 스토리를 생각할 때 영상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만희 작가는 이를 ‘감성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예를 들어 남자가 여자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치자. ‘나는 너에 비해 보잘것없는 존재야’라고 말하는 것보다 ‘네가 이조백자라면 나는 거기 붙어 있는 김칫국물 같은 거다’라고 말하는 게 시각적으로 바로 다가온다. 결국 다양한 영상적 재료를 일상에서 보고 비축해두는 게 작가의 출발점이다.”



 

이런 훈련이 잘되면 “문자로 시나리오를 쓰는 게 아니라 내 머리 속의 영상을 글로 옮긴다”(김희재)는 개념이 성립된다. “<공공의 적2>에서 아끼던 수사관이 죽은 뒤 강철중이 어딘가로 걸어오는 장면이 있다. 그 부분을 썼는데, 후배가 묻더라. ‘사운드는 왜 넣으셨어요?’ 그러고보니까 ‘멀리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 들려온다’는 대목이 있더라. 머리 속 장면을 글로 적다보니 그런 대목까지 무의식적으로 적힌 모양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영상적으로 사고한다는 말은 듣기엔 쉬워도 실제 행하기란 녹록지 않다. 고윤희 작가처럼 ‘입봉’한 경우에도 이른바 ‘비주얼 스토리텔링’은 난제다. “대개 난 어떤 장면을 써야겠다고 하면 대사부터 떠오른다. 그래서 쓰고 싶은 말을 쓰면 노트 한권이 되기도 한다. 개인적인 훈련방식은 그냥 영화를 많이 보는 거다. <화양연화>에서 장만옥의 의상은 그 자체로 대사가 아닌가.” 무언가를 시각적으로 묘사하려면 막연한 상상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장감이야말로 시각화의 기초다. 박정우 감독은 “작가가 직접 배경이 되는 공간에 가보는 게 중요하다. 그게 안 된다면 인터넷에 들어가 비슷한 공간의 사진이라도 띄워놓아야 잘 써진다”고 말한다.



 

9계명_중도에 포기하지 말지니라



 

“작가로 데뷔하기 전 시나리오 한편을 썼다. 지금으로 치면 <몽정기>와 비슷한 내용인데, 결국 영화화하지 못했지만, 한 출판사에서 책으로 내자고 제의했다. 울릉도에 가 3개월 동안 권당 350쪽이 되는 두권짜리 소설을 썼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나리오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그렇게 하고 나니 요령이 생기더라. 글이란 게 그런 것 같다. 일단 하나를 끝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고, 많이 써야 실력이 느는 것 같다.” _박정우



 



 

8계명까지를 순조롭게 돌파했다 해도 피할 수 없는 수렁이 있다. 어떤 대목에서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이 그것이다.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캐릭터 사이의 갈등을 뽑아내야 한다거나, 근사한 상황을 만들어야 하거나, 적절한 대사가 안 써지거나, 아니면 그 모든 것의 복합이던가. “프로 작가가 됐지만 초고를 쓸 때 5∼6대목이 막히는 것은 예전과 마찬가지”란 이해영 작가의 말처럼 이는 글쓰는 이의 숙명 같은 것이다. 육상효 감독은 “일단 어딘가에서 막히더라도 웬만하면 포기하지 마라. 특히 시나리오를 처음 쓰는 사람이라면 결국 쓰레기가 된다 하더라도 일단 완성될 때까지 밀어붙여봐라. 한편의 시나리오를 끝내는 경험 자체가 그 이전 단계에선 느낄 수 없는 많은 것을 준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쓰는 이의 의지다. 이만희 작가는 “풀어내려는 고민으로 꽉 차 있는 한 언젠가는 풀린다는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돌파구를 찾으려는 고민이 꽉 차 있기만 하다면, 언젠가는 답이 나온다는 얘기다. 엉뚱하게도 꿈이 해결해줄 수도 있다. “<약속>을 쓸 때 공상두(박신양)가 희주(전도연)에게 뭔가 예시적인 얘기를 해줘야 하는데 안 나오더라. 어느 날 잠을 자는데 내가 강화도행 버스의 맨 앞자리에 앉아서 초행길인데도 ‘다음엔 저수지’, ‘다음엔 사당’, 이렇게 알아맞히고 있더라. 깨어나자마자 이걸 상두의 시점으로 시나리오에 옮겨썼고, ‘너와 사랑의 결말이 이렇게 될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는 대사로 마무리지었다.” 이만희 작가의 말을 뒤집어보면 해답이 안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고민이 덜 찼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숨을 건다는 자세로 치열하게 고민을 거듭해서”(김해곤) 첫 시나리오를 완성해낸다면 이제 당신은 시나리오 작가로서 걸음마를 시작한 셈이다.



 

10계명_귀에 쓴 말 듣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연애의 목적> 이후 <어깨 너머 연인>의 각색을 맡았는데 초고를 만들기까지 무려 6개월이 걸렸다. 혼자 예술한 거지. 완벽하게 해서 바로 영화화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각색이라서 그런지 내 것을 좀더 넣고 싶다는 욕심이 컸던 것 같다. 결과물을 본 감독님이 창작에 가까울 정도로 원작과 동떨어져 있다고 해서 결국 새로 써야 했다. 그때 아직도 미련한 초짜구나 싶었다. 알면서도 행하지 못했으니까.” _고윤희 작가



 



 

초고를 손에 든 순간에야 본격적인 계주가 시작된다. 트랙을 몇 바퀴 돌아야 스크린에 당도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장애물은 곳곳에 있다. 고윤희 작가는 <연애의 목적>을 처음 시나리오 학원에 내놓았을 때 “변태 아냐? 인물도 제정신이 아니고, 쓴 사람도 미쳤다”는 악의적인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걸 참아내지 못하면 시나리오는 무덤으로 직행이다. 박정우 작가는 “데뷔할 때 감독하고 매번 싸웠다. 심지어 못하겠다면서 영화 그만두겠다고 나간 적도 있다”고 말한다. 이원재 작가 또한 “초고는 마음으로 쓰고 수정은 머리로 하라”는 금언을 알면서도, “많게는 15번, 16번을 고쳐써야 한다면 초고는 불과 시나리오 작업 중 10분의 1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첫 작품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노혜영 작가 또한 <싱글즈>의 초고를 영화사에 들이밀었을 때 “이걸로 영화할 수 있겠어. 엎어야 하는 것 아냐”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상처란 영예를 얻기 위한 당연한 과정이라고 긍정한다. 박정우 작가는 “시나리오는 집에 쌓아두기 위해 쓰는 게 아니다. 초고를 빨리 쓰는 건 더 많은 모니터와 수정을 위해서다”라면서 비판을 달게 받으라고 말한다. 친한 이들에게만 모니터를 요구한다면 하나마나한 일이라는 게 그의 덧말. 육상효 작가도 “썼으면 감추지 마라. 남들의 판단에 맡겨라. 상처를 견디지 못하면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어쩌면 모니터는 또 다른 애정의 표현일지 모른다. “습작 때부터 모니터를 해줄 수 있는 이들과 함께 팀을 꾸려 작업을 하다 보니 어떤 비난도 당해낼 자신이 생기더라”고 노혜영 작가는 말한다. 당신의 시나리오에 대한 세상의 수많은 화살, 피할 수 없다면 당신의 스크린 입성을 축하하는 축포라고 여겨라. 아니, 진실로 박수세례일 것이다.



 

도움 주신 분들 (가나다 순)



 

고윤희 작가. <연애의 목적> 씀. 김해곤 작가, 배우. <파이란> <이것이 법이다> <청풍명월> <블루> 씀. 김희재 <H> <국화꽃 향기> <누구나 비밀은 있다> <공공의 적2> <홀리데이> <한반도> 씀. 노혜영 작가. <싱글즈> <영어완전정복> 씀. 박정우 작가, 감독. <마지막 방위> <키스할까요?> <주유소 습격사건> <산책> <신라의 달밤> <선물>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 특사> <바람의 전설> 씀. 심산 작가. <맨발에서 벤츠까지> <비트> <태양은 없다> 씀. 육상효 작가, 감독. <장미빛 인생> <축제> <아이언 팜> <달마야 놀자2> 씀. 이만희 작가. <약속> <와일드 카드> <보리울의 여름> <아홉살 인생> <6월의 일기> 씀. 이원재 작가. <여선생 vs 여제자> <혈의누> 씀. 이해영 작가. <품행제로> <안녕! 유에프오> <아라한 장풍대작전> 씀. 장항준 작가, 감독. <박봉곤 가출사건> <북경반점> <불어라 봄바람> <귀신이 산다> 씀.




 


이런 시나리오를 보고 싶다



김미희/ 싸이더스FNH 공동대표





요즘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불만이 좀 있는 편이다. 젊은 작가들에게 이런 부탁을 드리고 싶다. 첫째로는 내가 감독들에게도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시나리오 작가들도 자기만의 독특한 화법이라며 시나리오를 써오곤 하는데 나로선 이해가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감독들이 자기만의 화법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시나리오가 독특한 화법을 갖는 건 매우 권장할 일이다. 하지만 어차피 대중영화를 만든다고 한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감성만큼은 대중적이어야 하는데 그런 점이 부족한 시나리오가 참 많다. 그래놓고 자신만의 독창성을 몰라줘 답답하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얘기를 듣는 나 역시 답답할 뿐이다. 주변 사람을 통해 모니터를 하든, 영화계 사람에게 보여주든, 대중적인 감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게 부족한 상태에서 테크닉이나 독창성만을 내세우는 것은 곤란하지 않을까. 박정우의 코미디 문법을 봐라. 일단 철저하게 대중적인 정서를 가진 가운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지 않나.



이와 반대로 정서는 대중적이지만 남들이 하지 않은 시도를 아예 감행하지도 않는 시나리오도 있다. 이런 경우 아주 매끈하긴 하지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을 준다. 또 시나리오가 재밌게 잘나가다가 더 는 발전하지 못한 채 그냥 끝나버리는 경우도 있다. 작가들이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상상력도 많이 키웠으면 좋겠다. 너무 안전하고 전형적으로 가려고 한다. 물론 전형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대목도 있지만, 그런 경우조차 비틀어서 새롭게 하려는 노력이 없어 보인다. 드라마 구성의 기교랄까, 이런 게 모자라다는 생각이다. 너무 정직하다는 말이다. 스릴러나 미스터리 장르에 관심이 많은데 우리는 아직 발달되지 않은 것 같다. 한국적 정서를 깊이 담은 스릴러를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제발 영화화되었을 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무책임하게 쓰지 말아달라. 갑자기 헬리콥터가 뜨는 장면을 넣고 하는데, 그거 한번 띄우는데 얼만데. 그래야 영화가 커보인다고 말하지만, 헬기 한대로 블록버스터가 되나. 돈도 돈이지만 문제는 그 신이 그 정도의 규모가 있어 보일 정도로 임팩트가 있도록 짜여졌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기 권리를 주장할 거면 프로 정신을 갖고 써줬으면 좋겠다. 2~3고까지만 쓰겠다는 식으로 계약을 요구하는데, 자기 이름을 걸고 영화를 만든다면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책임진다는 프로 근성을 가진 작가를 만나고 싶다.

 

 

 

 

 

시나리오작가집단 스토리즘, 출판사와 콘텐츠 개발 계약 준비

영화 <강철중: 공공의 적1-1> 각본에 참여했던 한 작가는 요즘 글쓰기에 골몰하고 있다. 새로운 시나리오냐고? 아니다. 그가 집필 중인 것은 소설이다. 언젠가는 시나리오를 쓰려고 염두에 두고 있었던 아이템을 소설로 써서 책을 내려는 것이다. 소설가로 전업한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소설이 완성되고, 그것이 무사히 출간돼 시장에서 주목을 끌게 되면 그는 다시 자신의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시나리오를 쓸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지금 훗날 영화화될 ‘원작 소설’의 작가이자 각색자가 될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영화화될) 책의 아이템을 검토하고 개발비를 지원하겠다는 외부 제안을 몇번 받았다고 말한다. 책 출판과 영화화를 동시에 염두에 두는 사람들이 제작과 출판업쪽에도 있다는 얘기다.



 

이렇듯 시나리오작가가 훗날 영화화 작업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 외 장르에서 오리지널 콘텐츠를 기획·창작하는 경우는 또 있다. 시나리오작가집단 ‘스토리즘’은 국내 출판업체인 위즈덤하우스의 자회사 위즈덤미디어와 함께 원소스 멀티유즈를 위한 콘텐츠 개발을 놓고 일종의 공동작업을 위한 계약을 추진 중에 있다. 계약 내용과 관련한 상당 부분이 아직 미지수이나 양쪽 모두 이번 계약을 놓고 긍정적으로 검토 중인 것은 사실이다.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제작사가 아닌 출판사로 가고 있는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스토리즘 소속의 유영재 작가는 출판사와 접촉을 시도하게 된 계기에 대해 “첫 번째 요인은 요즘 한국영화계가 어렵다는 것이고, 두 번째 요인은 그런 시기적 상황 이전에 시나리오작가가 원래부터 업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가 열악했단 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작가들에겐 책 출판이 목적이 아니라 그걸 베이스로 자신의 오리지널 스토리가 영화화되는 것이 더 큰 목표다. 한국에서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갖는 힘은 정말 작고, 작가에 대한 대우도 박하다. 똑같은 오리지널 스토리라 해도 책으로 포장돼 있으면 제작사들이 한번이라도 더 볼 거란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특히 인지도 없는 작가라면 그냥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써서 제작사에 돌렸을 때 그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개런티는 적다. 반면 책이 있으면 일단 나는 원작자로서 원작자에게 주는 인센티브나 원작료를 받으며 작업할 수 있고 시나리오작가로서는 별도로 계약할 수 있다. 결국 작가들이 살아남고자 스스로 우물을 파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기획은 출판사쪽 이해와도 당연히 맞아떨어진다. 새로운 스토리와 새로운 작가 발굴이 가능하다는 점, 특히 여전히 순수문학쪽에 많이 치우쳐 있는 국내 출판문학계에서 시나리오작가들은 상대적으로 장르적인, 즉 대중적인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또 원작 소설이 정말 영화화된다면 그 뉴스만으로도 책의 매출 상승을 기대할 수 있고, 영화가 흥행하면 차후 드라마나 뮤지컬 등 다른 매체로 제작되었을 때 출판사가 그 판권료나 흥행수익을 작가와 배분해 가져갈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한 영화계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최근 <타짜>나 <식객>처럼 원작에서 시작해 영화,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계속 흥행되는 좋은 사례가 있다보니 역으로 작가와 출판사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그런 사례를 개발하려는” 움직임으로도 볼 수 있다. 또 다른 출판사의 경우 자사에서 번역, 출간한 외국 소설의 판권을 자체적으로 구매한 뒤 시나리오작가를 붙여서 다른 형태의 글로 바꾸는 작업을 물밑 진행 중이기도 하다.



 

출판시장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면 위험 부담 커



 

물론 출판사에서 시나리오작가를 포섭하는 목적과 시나리오작가가 출판사와 접촉하는 목적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스토리즘과 함께 콘텐츠 공동개발 작업을 위한 계약을 추진 중인 위즈덤미디어의 노진선미 대표는 이런 방식의 사업이 반드시 소설 장르와 도서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란 설명도 덧붙이고 있다. “여러 방식으로 풀어갈 생각이다. 책이 가장 주요한 수단이 될 것이고 영화화나 드라마화도 염두에 둘 수 있지만 시나리오 안에서 컨셉과 캐릭터, 스토리만을 추출해 온라인이나 모바일 서비스에 활용될 수 있는 포맷으로 발전시키거나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도서를 기획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새로운 기획에는 반드시 위험부담도 따른다. 최근 위즈덤하우스가 출간한 사극 소설 <은야>는 바로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영화쪽 스탭이 참여해 기획된 ‘영상음악소설’. 그런데 이 책은 시장에서 크게 화제가 되지 못했다.



 

또 좋은 시나리오가 반드시 좋은 소설이 될 것이란 보장도 없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출판시장에도 이쪽만의 방식과 메커니즘이 있다. 영화쪽에서 통할 소재라 해서 출판쪽에서도 통하는 법은 없다. 무엇보다도 책은 스토리만큼이나 글맛이 중요하다. 이건 번역책에서도 통하는 얘기다. 요즘 베스트셀러인 <로드>가 좋은 예다. 줄거리도 앙상하고 주제도 난해한 그 책이 잘 팔린 데에는 좋은 번역을 통해서 나온 매력적인 원작의 문체가 큰 몫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이런 지적은 작가쪽도 공감한다. 유영재 작가는 “시나리오만 들고 가면 그것이 바로 책이 될 것처럼 생각하면 일이 굉장히 어려워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작가들 스스로 저작권을 보장받고 활용하려는 움직임으로 귀추가 주목돼



 

어쨌든 시나리오작가들의 이 같은 새로운 활로 모색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영화계쪽에 검증된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는 방식이란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것은 작가들이 자신의 창작 콘텐츠에 대한 권리를 적극적으로 주장, 활용하려는 움직임이란 점에서 의미를 띤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런 움직임의 배경에는 지금껏 오리지널 시나리오의 저작권 보호 문제를 충무로가 거의 무시해왔었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유영재 작가의 말은 이렇다. “스토리즘의 작가들이 13명인데, 크레딧을 가진 작가는 절반 정도에 불과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이 영화 작업을 안 한 게 아니다. 서너편씩 했는데 결국 노력과 시간만 소모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콘텐츠가 영화화될 수 있는 다른 루트를 찾다 여기까지 왔다. 지금까지 시나리오작가라고 하면 영화사가 돈이 적게 드는 기획개발 단계에서 기용하고 버리는 일이 잦았고, 그러다보니 작가들도 방어적이 되어서 자신이 가진 베스트를 내놓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태도를 풀고 자기가 가진 좋은 아이템을 작품화하자는 것이 궁극적인 취지다.” 그것이 어떤 긍정적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 귀추를 주목해본다.



 

시나리오작가와 결합하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노진선미 위즈덤미디어 대표 인터뷰



-위즈덤하우스는 경영·경제 관련분야 도서를 비롯해 자기계발서나 실용서적 위주의 출판회사로 알려져 있다. 위즈덤미디어는 어떤 성격의 자회사인가.

=출판뿐만 아니라 매체를 통해 하나의 콘텐츠가 창출할 수 있는 다양한 수익 모델을 고민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출판영상통합기획사다.



-스토리즘 작가들과는 어떤 방식의 협업을 구상 중인가.

=콘텐츠 개발을 함께하고 그 비즈니스는 우리가 맡는다는 선까지는 합의가 됐다. 다만 관계를 느슨하게 가져갈지, 작가 매니지먼트 방식의 긴밀한 관계로 갈지는 계속 협의 중이다.



-소설 이외의 책을 기획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시나리오작가들과 함께 만들 수 있는 다른 종류의 책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시나리오 자체가 책으로 나갈 수도 있지만 그 안에서 컨셉과 스토리, 캐릭터만 추출해서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케팅서나 자기계발서 같은 메시지북에 필요한 스토리텔링 작업을 함께할 수도 있다. 어떤 메시지를 이론만으로 전달하면 책이 딱딱해지지만 그것을 멘토와 제자가 만나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겪으면서 깨우쳐가는 과정으로 엮으면 상업성이 더 높아진다. 국내 출판계에는 이런 스토리텔링 작가로서 전문성을 띤 인재들이 많지 않다. 층 자체도 얇고, 기존에 활동하던 작가들은 이제 아이디어나 캐릭터에 고갈을 많이 느낀다. 그런 부분을 시나리오작가와 결합시키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스토리즘 외에도 다른 작가들이 있는지.

=몇몇 작가가 있는데, 스토리즘과 같은 작가 모임 형식은 아직은 없었다. 그중 하나가 12월에 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어떤 책인가.

=로드무비 장르의 영화 시나리오를 자기계발서로 바꿨다. 로드무비 형식대로 주인공이 길을 떠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건데, 영화는 감동이라면 책은 교훈이다. 결론적으로는 인생의 참의미를 던져주는 것이다. 그게 사랑일 수도 있고 배려일 수도 있는데 어떤 메시지가 될지는 올해 사람들의 심리나 트렌드를 기초로 만들어갈 것이다.



-올해 8월, CJ엔터테인먼트와 SBS 공동으로 ‘원소스 멀티유즈를 위한 콘텐츠문학상’ 제정 사업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한 관계자에 따르면, 이르면 오는 10월 중에도 공고가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던데.

=세부적인 협의들이 남았지만 큰 그림은 합의가 끝난 상태다. 그 공모전을 통해서는 아무래도 영상화 가능성이 큰 작품을 선택하게 될 것 같다. 각자 채널에 적합한 작품들도 대상이 되겠지만 어쨌든 대중성을 염두에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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