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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향기

정유정, <7년의 밤>

by 아프로뒷태 2013. 1. 7.

지난 해 이 소설을 읽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쉽지 않았다. 읽고 싶은 책은 많았고, 일은 해야 했고, 시간은 부족했고, 건강은 챙겨야 했으므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새해를 맞으면서 지난해 읽고 싶었지만 못읽었던 책을 주말동안 읽었다. 그 책은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이었다. 이 작가는 지난 여름 서점가에서 베스트 셀러에 올랐으며 세간에 주목이 되었다.

 

 

정유정 작가는 7년의 밤을 내놓기전에 장편문학공모전에 2편이나 작품 당선된 이력이 있었다. 운이 좋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분명히 실력이고, 열심히 내공을 쌓았다는 증거이다. 그런데 정유정 작가를 논하면서 언론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에서 다소 불편한 점이 있었다. 특히 그녀에 대해 문예창작학과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글을 잘 쓴다는 언론의 노출이 조금 거북스러웠다. 문예창작학과 출신이든 아니든 중요한가? 출신이 아니어도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많다.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노력의 문제이지, 문창과 출신이나 배경따위가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을 거들먹거리는 것 자체가 아직 이 나라엔 문인에 대한 자세가 그렇고 그렇다는 문제가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나는 문창과 출신이다.

 

 

자, 소설 이야기나 할까 한다. 이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영화화 되기로 결정되면서 인터넷에 떠도는 한 동영상 때문이었다. 누군가 이 소설을 읽고 만든 영화 예고편과 흡사한 동영상이었다. 추리와 스릴러의 요소를 가미한 흥미로운 동영상이었다. 책이 나오는 동시에 영화판권 계약이 되고 그리고 누군가 소설&영화 예고편을 만들어 유포하다니. 상업 마케팅 효과가 뛰어났다. 기존 독자에서 더 많은 독자를 끌어들이기에 꽤 흥미로운 진행방법이었다. 나또한 매료를 느꼈으니 말이다.

 

 

이 소설은 마치 시나리오나 연극의 지문, 해설과 대사로 이루어진 듯하다. 특히 묘사가 가장 많다. 그중에서도 사실적 묘사가 두드러진다. 예를 들자면 그런 거다. "왼쪽에 책상이 있다. 책생의 높이는 50센티미터이며 색은 흰색이다.  그 책상 위에 하나의 유리컵이 있다. 그 컵에는 파란 물결 무늬가 찍혀 있다. 무늬가 찍혀 있는 가장 자리에 립스틱이 뭍어 있다." (이건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서사법을 나만의 방식으로 기술한 예이다.)와 같이 사실적 묘사로 주 기법으로 하여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방식이 처음에는 글을 읽는데 아주 거슬렸다. 이유인 즉, 사색할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서술, A-B-C-D의 나열뒤에 인물의 감정이나 생각에 대해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독자의 소설적 상상력이 증가되며 소설이라는 텍스트를 독자는 재창조하며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의 단절이 이 작품에서 빈번하게 드러난다. 아니 거의 과반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꽤 불편했다. 하지만 불편해할 일만이 아닌 것 같아 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조금더 익숙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해보았다. 그리고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화를 위해 만들어진 소설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 방식이 크게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 도입부터 마지막까지 서사를 쫓아가기에 바쁘다. 그러다보니 인물의 행동에서 읽어낼 수 있는 감정이나 사색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소설이란 인물의 사건을 통해 감정과 주제를 드러나게 되는데, 잔잔한 소주제들이 모여 대주제를 이루고 그리하여 총체성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 점에 있어서 <7년의 밤>은 사색의 매력을 발산하지 못했다. 이 소설은 마치 수천장의 스냅 사진을 쉬지 않고 나열한 느낌이다. 독자로서 나는 인물의 상황에 쉽게 감정이입하지 못했다. 본디 그런 것이 아닌가? 독자는 소설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경험하고 성찰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고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재창조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사실적 묘사에 아주 충실하되, 중독성 강한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나열하여 독자를 사색에 머무르게 하지 않게 하고 활자만 소비하게 만들었다. 즉 독자가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 사색하기를 방해했다.

 

 

여기에 대해 정유정 작가는 말한다. "저는 소설의 종류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자의 사고에 어필하는 소설, 독자의 정서에 호소하는 소설. 이는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저는 후자에 소합니다. 정서에 호소하려면 독자를 이입시켜야 한다는 전제가 붙고, 이입시키는 데 중요한 조건은 독자를 가상세계에 가둘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죠. 어쨌거나 페이지를 넘기게 해야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 즉 주제나 의미를 전달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이겠고요. 이야기꾼으로 불리고 싶다는 것은 정서에 호소하는 소설을 쓰겠다는 의미입니다.

 

 

정유정 작가의 의도가 그랬다면 <7년의 밤>은 작의와 달리, 아쉬움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차라리 영화화를 염두하고 소설을 썼다고 당당히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을 대하는 보수적인 시선때문에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면 조금 용기가 없었다. 당당하게 소설과 영화의 유사성을 참고하여 작품을 썼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작품이 소설적 가치가 떨어져보일까봐 그랬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본격문학에 소속되지 못하고 소설가 사명이나 존재감에 대해 박탈감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것보다 소설과 영화의 공동작업이 난무하는 시대에. 좀더 세련된 작법으로 영화화를 염두한 소설을 내놓았다고 당당히 밝히는 것은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여하튼 정유정 작가의 의도와 달리 독자인 나는 소설적 상상력을 할 여유가 없이 서사를 쫓는데 바빴다. 그래서 이것을 영화화 한다면, 무엇보다 기획자와 감독은 그런 고민을 했을 것이다. 각각 인물의 정서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이 책은 어떤 사건을 드러낼 것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심지어 배우의 디렉션까지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사건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배우의 감정은 어떨 것인가에 대해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영화로 보게 된다면, 영화 기획자와 감독의 공은 인물의 정서 창조하기나 공감능력 형성하기 일 것이다.

 

 

 

* 이 글은 2012년 산지니에서 발행하는 계간지「오늘의 문예비평」2012년 봄호에 실린 E-mail 대담입니다. 장편소설『7년의 밤』으로 화제를 모았던 정유정 소설가와, 「오늘의 문예비평」편집주간이신 문학평론가 김경연 선생님의 대담집을 싣습니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시선

 

소설을 쓰는 이야기꾼과 만나다

 

정유정·김경연

 


김경연 신작 집필 중이라 바쁘시다 들었는데 흔쾌히 이메일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단편적이고 소략한 질문으로 선생님의 소설에 얼마만큼 다가갈 수 있을까 염려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대담이 정유정 선생님의 소설로 들어가는 작은 길 하나 정도는 내는 일이 되길 부디 기대해봅니다.

2007년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로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신 이후로 장편 『내 심장을 쏴라』(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 2009), 『7년의 밤』(2011)을 연이어 내셨는데, 사실 제가 정유정 선생님의 소설을 읽은 것은 가장 최근에 발표하신 『7년의 밤』이 처음이었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이들로부터 여러 차례 재미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고 그래서 그들의 찬사가 과장은 아닌지, 그 재미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해보고 싶은, 외람되지만 꼼수 어린 호기심이 적잖이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7년의 밤』을 읽었는데, 과연 주변의 추천사가 허언이 아니더군요. 아마도 제가 최근에 읽었던 소설 중에서 가장 멈춤 없이, 빨리 독파한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7년의 밤』이 뿜어내는 이 ‘재미’의 정체가 무엇인지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도 명쾌하게 가늠되지 않더군요.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이 소설의 재미를 온전히 긍정하고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데 여전히 주저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내쳐 『내 심장을 쏴라』를 읽었는데 저는 오히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정유정 소설의 ‘재미’가 낡고 익숙했던 무엇이 아니라 ‘낯선’ 사건일 수 있는 가능성 혹은 그 징후를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가능성이란 어쩌면 의미를 축내지 않는 재미, 재미를 멸하지 않는 의미를 내장한 소설의 생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잡지(『무비위크』)와 인터뷰 하신 내용 중에 “우리나라 다른 현대소설”과는 “차별화”된 작품을 쓰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던데, 시작부터 너무 큰 질문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정유정 선생님께서 생성하고자 하는 그 차별화된 소설의 정체란 어떤 것인가요?


 

정유정 습작시절, 한 작가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단기간에 문단에서 주는 상을 죄다 휩쓸어버린 이른바 무서운 신예였죠. 이런 작가라면 분명 배울 게 있겠다 싶어 인터뷰 한 줄 한 줄 분석해가며 읽다가 그만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중요한 건 묘사다. 이야기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는 대학시절 지도교수의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등단 후,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지적, 혹은 요구는 ‘이야기성 혹은 극적요소를 줄여라’였습니다. 그 자리에 문학적 요소를 담아야 한다고. 제게 요구하는 문학성이 대체 무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달라고 했습니다. 세 가지를 꼽더군요. 문체의 내면화, 시적 문장, 철학적 주제. 서사가 강하면 대중소설의 혐의를 받게 된다는 것이었죠. 제 예상에서 단 1센티도 벗어나지 않는 답이었습니다. 더하여 ‘이야기는 저절로 만들어진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뼛속 깊이 이해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소설을 ‘이야기의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전환점과 결말의 상황(극화)을 통해 이야기를 안으로부터 뒤집어 보여주고 싶고, 그것을 통해 ‘나는 인간을, 삶을, 세계를 이렇게 바라본다’라고 제시하는 것이 미학적 요소를 구현하는 제 나름의 방식이고요. 저절로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가 하나쯤 있다 해서 한국문단이 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차별화된 소설이란 그런 의미입니다.


김경연 보내주신 「작가산문」에서 스스로 작가보다는 소설가로 불리는 것이, 그보다 더욱 듣고 싶은 말은 ‘이야기꾼’이라 쓰신 것을 읽었습니다. 아마 정유정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작가의 이 욕망이 제대로 관철되고 있다는 데 별 이견이 없을 듯합니다. “독자가 이야기에 몰입한 나머지 기진맥진해버릴 만큼 강렬한 정서와 인생의 의미를 경험하게 만”(「작가산문」)들겠다는 “이야기꾼의 욕망”은 『7년의 밤』에 와서 더욱 역력히 읽힙니다. 추리와 스릴러를 가미한 장르소설의 구조를 취하면서 『7년의 밤』은 촘촘하고 긴박감 넘치는 서사로 독자들을 쉴 새 없이 몰아가죠. 이것이 정유정 소설의 가장 큰 특장(特長)이고 달리 말해 재미이겠으나, 어찌 생각하면 이 매혹적이고 현란한 서사가 오히려 소설에 동반된 의미를 의도하지 않게 압도해버리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독자가 소설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경험하고 성찰할 수 있는 여유를 느긋하게 갖기도 전에 독자들은 중독성 강한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 완전히 기진맥진해버리는 것이죠. 물론 제 개인적인 견해일 수도 있겠으나 『7년의 밤』에 와서 이러한 경향은 보다 두드러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문에 이전 작품들보다 이야기꾼의 욕망이나 자의식은 더없이 선명하게 읽히지만, 그것이 소설가의 욕망과는 어쩌면 다른 차원이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정유정 선생님께서 소설가보다 이야기꾼으로 스스로를 지시하고자 하실 때, 선생님께서는 이미 소설가의 욕망과 이야기꾼의 욕망을 다른 층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어떠신지요?

 


정유정 어린 시절, 약장수 서커스단에 홀려 정신없이 쫓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약을 파는 게 주목적인 만큼 레퍼토리가 빈약한 영세서커스단이었죠. 그러다 보니 만담꾼 한 사람이 꾸려가는 천막극장이 프로그램 사이의 빈 시간을 메우고는 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고전들을 이 천막극장에서 배웠습니다. 그만큼 만담꾼의 입담과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이 실감났습니다. ‘흥부는 찢어지게 가난했다’라고 설명하는 대신, 흥부의 자식들이 걸친 패션이나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이었죠. 흥부는 열 명이 넘는 자식들의 옷을 한방에 해결해버립니다. 멍석 하나에 머리를 집어넣을 구멍 열 개를 뚫는 것으로요. 멍석 하나에 열 녀석이 달려있다 보니, 한 녀석이 자다 일어나 화장실에 가게 되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길을 걷다 한 녀석이 넘어지면 나머지도 우르르. 산기슭에 수수깡을 쳐서 대충 지은 집은 어찌나 작은지 발을 뻗으면 차꼬를 찬 꼴이 되고, 기지개를 켜다 머리라도 들게 되면 단체로 목에 칼을 찬 꼴이 되고…. 동네 아이들은 이 웃기고도 슬프고 재미난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천막극장에서 돌아오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둘러앉아 자기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자기 동생을 내쫓다니 놀부는 나쁜 놈이야. 흥부는 착한 게 아니라 바보야. 게으르니까 가난하지, 애초에 큰 집을 지었으면 좋았잖아. 수수깡이 뭐야, 산기슭이면 나무도 많았을 텐데, 등등. 아이들은 재미에 몰입했을 뿐 아니라 각자의 경험을 토대로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나름대로 이야기의 미(美)까지 획득했던 것이죠.

저는 소설의 종류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자의 사고에 어필하는 소설, 독자의 정서에 호소하는 소설. 이는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저는 후자에 속합니다. 정서에 호소하려면 독자를 이입시켜야 한다는 전제가 붙고, 이입시키는 데 중요한 조건은 독자를 가상세계에 가둘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죠. 어쨌거나 페이지를 넘기게 해야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 즉 주제나 의미를 전달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이겠고요. 이야기꾼으로 불리고 싶다는 것은, 정서에 호소하는 소설을 쓰겠다는 의미입니다.


 

김경연 서사성이 강하고 상황이 극적인데다 시각적인 치밀함으로 장면을 묘사하다 보니 정유정의 소설은 ‘영화적’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그 평가가 무색하지 않게 『내 심장을 쏴라』와 『7년의 밤』은 머지않아 영화화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소설을 쓸 때 단 한 번도 영화화될 것을 고려한 적이 없으며, 자신의 소설이 영화나 여타 장르와의 호환을 염두에 두었거나, 혹은 변환 용이한 콘텐츠로 평가되는 것에 적지 않은 불만을 갖고 계신 듯합니다. 『7년의 밤』에서 구사한 다층적 인물 시점의 사용은 인물이 처한 상황적 진실을 천착하려는 선택이겠으나, 한편으로는 영화나 타 장르와는 다른 소설의 장르적 가능성을 충분히 발휘하려는 전략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앞서 드렸던 질문들과 연결되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정유정의 글쓰기를 추동하고 있는 이야기꾼의 욕망이 이야기성을 공유하는 영화나 그 밖의 서사 장르가 아니라 반드시 ‘소설’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유정 『7년의 밤』은, 명확하게 구분하자면 서스펜스물입니다. 물론 미스터리와 스릴러, 판타지, 호러 기법을 고루 차용하기는 했지만 이야기의 핵심인 ‘세령호’를 지배하는 것은 서스펜스죠. 서스펜스의 주요 동력은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소설 속 인물들은 모르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고요 삼인칭 다중시점이면서 근거리시점을 택해 1인칭에 가까운 서술을 시도한 것은 정황을 다각도에서 보여주고 캐릭터의 입체성을 도모함으로써 서스펜스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입니다. 동시에 소설이 구사할 수 있는 장점이 무언지, 보여주고 싶었고요. 독자에게 인물들의 심리와 상황을 속속들이 보여주면서 그날 밤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게 만들고, 현재와 과거가 유기적으로 엮이고 현실과 환상과 허구를 넘나들면서도 한눈에 보이는 정연한 흐름을 만드는 데 가장 적합한 방식이라고 판단한 거죠.

시나리오는 이런 방식으로 쓰면 백 퍼센트 망합니다. 영화는 시간의 예술입니다. 관객은 영화를 멈춰놓고 음미하거나, 의미를 깊게 사유할 틈을 갖지 못합니다. 시나리오 작가는 이야기의 목적에 복무하는 장면으로 정해진 분량을 구성해야 한다는 경제성의 엄격한 적용을 받고요. 시점의 다변화를 꾀할 경우, 이야기를 산만하게 만들고 관객은 누구에게 감정을 이입해야 하는지 어리벙벙해지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감독은 명확한 화자(주인공)를 정해야 하고, 관객은 그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이야기의 의미를 파악하도록 인도받습니다.

소설은 그렇지 않습니다. 화자가 많아도, 이 사람에게 들어가 이 사람을 파악하고, 저 사람에게 이입돼 저 사람의 정서를 이해하며, 와중에 이야기의 흐름과 숨겨진 의미까지도 속속들이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진창에서 뒹굴며 다양한 사유를 할 수 있는 것이죠. 한계 없는 은유가 가능하다는 점도 소설이 가진 장점입니다. 인간의 무의식에서부터, 우주의 가장 먼 곳까지, 홍적세에서 수억 년 후의 일까지 그려낼 수 있습니다. 소설은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큰 공간이에요.

그러나 반드시 소설이어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제가 소설가이기 때문입니다.

 


김경연 작품 바깥의 큰 질문을 드렸는데 이제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합니다. 등단작인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부터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에 이르기까지 정유정 소설이 일관되게 주목하고 있는 것은 ‘폭력’의 문제입니다. 선생님의 소설이 현시하거나 겨냥하는 폭력은 공적·사회적인 형태에서부터 가족 간에 자행되는 사적인 폭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또한 양자가 서로 복잡하게 얽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소설을 읽으면서 저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가혹한 형태의 폭력, 다시 말해 우리의 생을 후려치고 속수무책 주저앉히는 심혹한 폭력이란 어쩌면 ‘운명’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가령 『내 심장을 쏴라』에서 이수명이나 류승민을 감금한 정신병원보다 더욱 끔찍한 폭력을 행사한 것은 예측 가능한 길을 가던 이들의 삶을 한순간에 난해한 미로 속으로 몰아넣은 어머니의 자살이나 엄습해오는 실명(失明)과 같은 운명적 사건은 아닌지, 마찬가지로 『7년의 밤』에서 현수의 생을 끝장내고 그와 연루된 이들의 삶을 가격한 것은 아비의 폭행을 피해 밤길을 헤매던 열두 살 소녀와 현수의 우연한/비극적인 맞닥뜨림이 아니었는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소설들은 가령 『내 심장을 쏴라』에 붙인 「작가의 말」을 인용해 말하자면, “운명이 내 삶을 침몰시킬 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관한 물음이자 해답을 추적하는 과정인 셈이며, 이는 『7년의 밤』에서도 동일하게 이어지는 문제의식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불가항력적인 운명이 우리의 생을 뒤흔드는 가장 강력한 형태의 폭력임을 부각하게 될 때, 정유정의 소설이 애써 제기했던 다기한 폭력의 문제들은 오히려 제대로 조명되지 못할 우려 또한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정유정 작가로서 저의 테마는 자유의지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어느 날 운명이 인생을 퍽, 들이받았을 때 이 교통사고 같은 상황 속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지, 자신의 가치를 끝내 지킬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거고요. 운명의 폭력성이 부각된다고 해서 각개에서 제기한 폭력의 문제들이 묻힌다는 생각은 여태 못해봤습니다. 시간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해보겠습니다.

 


김경연 정유정 소설의 인물들은 대개가 깊은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습니다. 근원적 상처를 품고 있기에 그들 대부분은 선인/악인의 이분법으로 명쾌하게 가름될 수가 없죠. 작가는 인물들에게 저마다의 서사를 부여하고 정신이상자나 속물이나 혹은 괴물이 된 현재의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을 마련합니다. 그래서 정유정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이 괴물스러운 인간들을 쉽게 내칠 수가 없고 결국엔 인물들의 고통에 공감하게 되지요. 또한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들의 모습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 민얼굴의 진실을 과감히 마주하도록 종용하면서 독자들을 뼈아픈 성찰로 이끄는 것, 그것이 정유정 소설의 전략이자 무엇보다 큰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소설마다 꼭 예외적인 인물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내 심장을 쏴라』의 렉터 박사나 류재민, 『7년의 밤』의 오영제 같은 인물들 말입니다. 렉터 박사나 류재민의 경우는 소설에서 큰 비중이 없었지만, 『7년의 밤』의 오영제는 소설을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인물이라 그 무게감이 크죠. 헌데 오영제는 도대체 그 무자비한 폭력이 어디에서 발원하는지 그 맥락을 좀체 읽어낼 수 없는 불가해한 인물, 달리 말하면 마치 절대적인 악을 체현한 인물처럼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런 악인의 형상화로 인해 선생님의 소설이 기왕에 견지해오던, 즉 인간이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이나 피해갈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으로 인해 얼마나 괴물스러워질 수 있는가를 집요하게 추적해가던 묵직한 긴장감이 오히려 약화되거나 훼손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었습니다. 물론 오영제의 전사(前史)가 단편적으로 삽입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박제화된 악한이 아니라 다면성을 한 몸에 품은 인간으로 독해하기에는 역부족인 측면이 있습니다. 악을 찾아내고 고발하는 단죄의 서사가 아니라 인간이 처한 상황적 진실을 탐색해가는 정유정의 서사에서 오영제를 비롯해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들의 형상화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정유정 진짜 사악한 자는,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믿습니다. 가족, 혹은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고 믿고, 자신의 행동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들이 그렇습니다. 저는 이런 기질은 대체로 타고난다고 보는 편입니다. 의학적으로도 상당 부분 근거가 입증됐고요. 그들에겐 심장이 없어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믿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건 자기 자신뿐이죠. 게다가 이 사람들은 머리도 좋고 언변도 좋고, 매력적인 경우가 많아요. 끔찍하다고 말하면서도, 한쪽에선 신창원의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리고 인육을 먹었던 유영철의 팬 카페까지 생겨나는 걸 보면 확실히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렉터 박사는 교양 있고, 머리 좋고 섹시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힘(악은 대개 헤게모니와 상징적으로 연결되니까)에 대한 인간의 광합성본능인지, 아니면 순수 악인이 가지는 불가해한 자력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오영제는 이런 부류에 속하는 자입니다. 그것도 복잡하고 예민한 사고체계를 가진 엘리트 악인이죠. 그가 보여주는 악은 스스로 옳다고, 즉 선이라고 확신하는 자기세계에서 발원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의 세계를 안으로부터 뒤집어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의 욕망, 절대적인 삶의 가치, 사고가 뻗어나가는 방향, 표면에 드러나지 않던 악이 어떤 일을 계기로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가, 어떤 경우에 외로워하고 왜 분노하는가, 언제 다정하고 언제 비정한가, 치명적인 약점은 어디에 있으며 무엇에 무너지는가. 그의 전사를 단편적으로 드러낸 것도 어린 시절에 이미 나타난 악인의 싹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어요. 젊은 부부가 어린 아들에게 휘둘려 인생을 망쳐버린 일례인 거죠. 결과적으로 오영제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이 어디 있느냐고 화를 내기도 하고, ‘전형성’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사람도 있고. 이건 피해자의 입장에만 감정을 이입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 같은데, 오영제의 입장에 서보면 세계에 대한 시각이 또 달라집니다. 일회성이라도 그런 스탠스를 취해본다는 것 자체가 정서적으로 께름칙하고 불편해서 그렇지. 어쨌거나 저로서는 깊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순수 악인의 형상화가 정말로 가치 없는 일인지.

 

진공상태에서 어른이 되는 인간은 없습니다. 한 인간이 관계 안에서 성장하는 한, 정신적 손상, 혹은 훼손을 피할 수 없죠. 그가 악인이든, 선한 사람이든, 평범한 사람이든 간에. 이 손상은 인생에 항체를 만들기도 하고 치유하기 힘든 지옥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항체 대신 지옥이 만들어지면 무의식 안에 버튼이 하나 생겨납니다. 지옥문을 여는 버튼. 물론 이 버튼은 여간해선 열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열린다는 건, 그 인물이 엄청난 압박 아래에 놓인다는 의미입니다. 평범한 일상, 사랑이 넘치는 관계, 평탄하게 자란 사람들, 안전한 삶은 제 소재가 아닙니다. 자기 안에 지옥을 가진 사람, 욕망하는 인간이 제 인물이에요. 그들을 압박 아래에 배치해서 버튼을 눌러버리면 그들 자신조차도 예견하지 못했던 행동을 하게되고, 그로 인한 충돌로 삶에 균열이 생기고 이야기는 동력을 받아 앞으로 나아갑니다. 독자들을 인물의 내면과 사건의 한 중심을 탐색하면서 일상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정서의 극점으로 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거죠. 정서의 극지대에서 이야기가 품고 있는 진실과 제가 전하고자 했던 의미를 한꺼번에 발견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고요.

 


김경연 정유정 선생님의 소설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인물은 아마도 이야기를 쓰는/전달하는 자들, 달리 말해 사실을 수집하고 기록하거나 재구성함으로써 진실에 접근하는 자들인 것 같습니다. 『내 심장을 쏴라』에서는 이수명이, 『7년의 밤』에서는 안승환이 이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들을 통해서 소설가 혹은 진정한 이야기꾼의 의미를 정의하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7년의 밤』에서 안승환이 대필작가인 동시에 잠수부로 설정된 것은 소설가가 인간의 내면을 천착하고 그 상처를 읽어낼 수 있는 자, 또한 소설이 사실이 도달할 수 없는 밑바닥의 진실을 포착할 수 있는 장르라는 작가의 인식이나 또는 기대가 투영되어 있는 듯합니다. 아주 인상적인 구절이 있었는데 『내 심장을 쏴라』의 마지막 부분에 실린 이수명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온전히 나 자신이었다. 인생의 표면을 떠돌던 유령에게 ‘나’라는 형상이 부여된 것이었다. 그것이 내 안에서 나갈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이수명의 이 말은 마치 정유정 작가 자신의 고백인 것처럼 들리더군요. 작품마다 소설가 혹은 이야기꾼의 위치를 점하는 인물들을 배치하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정유정 이게 참, 없어 보이는 대답인데요, 어딘가에서 했던 얘기기도 하고요. 저는 소설의 무대를 설정한 뒤에 세상을 축소해 배치하는 방식을 좋아합니다. 공간장악이 끝나고, 이야기의 얼개가 만들어지고, 이야기를 떠받칠 인물이 정해지면, 그가 맡을 임무와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직업을 부여해요. 그러다보니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우연찮게 ‘작가군’에 속해 있더라고요. 저도 그걸 의식하고 있었던 지라 『7년의 밤』을 쓸 땐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안승환은 작가여야 했어요. 우선 그는 구조적인 면에서 필요한 인물이었어요. 그가 없으면 최현수의 일방적인 케이오 패니까. 이야기가 폭삭 무너지는 거죠. 그를 보조엔진으로 들어앉히고 나니까, 인물의 핍진성 문제가 있었어요. 그는 왜 사건을 방조하고 비극으로 굴러가게 만드는가, 여기에 대한 답이 마련돼야 했거든요. 대부분 안승환을 선한 인물로 보는 데 그것은 아니에요. 작가적 자아, 이야기를 향한 비열한 욕망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데, 참 아쉬운 부분입니다. 제가 인간 안승환의 인격과 작가적 자아의 충돌을 좀 더 선명하게 보여줬더라면, 선한 사마리아인으로만 남지는 않았을 텐데. 다음 소설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인 셈이죠. 두 자아가 충돌하는 인물을 어떻게 구현해낼 것인지.

 


김경연 선생님의 소설을 읽으면서 제가 아주 흥미롭게 주목했던 인물들이 여성입니다. 『내 심장을 쏴라』에서 이수명의 어머니, 『7년의 밤』에서 세령이나 강은주 같은 여성인물들은 사실 은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침묵하거나 폭력에 희생당하는 약자들로 그려집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여성인물들의 서사가 정유정의 소설에서 매번 누락되거나 삭제되어 공백으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이수명의 어머니는 정신이상으로 병원에 들어가고 자살로 삶을 마감하지만 무엇이 그녀의 생을 그와 같은 비극으로 몰아갔는지 소설에는 전혀 발설되지 않습니다. 열두 살 세령이 역시 같은 나이의 서원이 시종일관 발화의 주체가 되는 것에 반해 그 목소리는 실종되고 없지요. 은주는 예외적으로 자신의 서사를 부여받고 제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지만 그녀의 말은 대부분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거나 진정성이 결여된 불완전한 말, 효력을 상실한 발화로 부인됩니다. 특히 모든 인물들의 결말이 명쾌하게 그려지는 『7년의 밤』에서 유독 은주의 행적만은 오리무중이죠. 때문에 안승환은 은주의 최후를 써야 하는 소설의 마지막 장을 결국 공백으로 남깁니다. 물론 이후에 은주가 영제에게 살해당했다는 여운을 주지만 그러나 여전히 명쾌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긍정하고 세상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선생님의 소설에서 이 결락의, 불투명한 여성서사는 어쩌면 말끔히 봉합될 수 없는 폭력의 흔적을 현시하면서 작가가 세상에 대해 여전히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문제적 대목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여성을 침묵하고 희생당하는 약자로, 여성의 서사를 부재와 결락의 서사로 남기는 것이 여성에 대한 작가의 인식 부족에서 연유한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해석에 관해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울러 정유정 선생님께서 여성인물들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정유정 이 문제점은 저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녀’를 내세우면 곧장 제 자신이 튀어나오고, 그걸 두려워하다 보니까 서사가 아예 결락되거나, 단선적인 캐릭터로 그려지거나, 어지간하면 회피해버리는 모양새가 되는 듯해요. 『내 심장을 쏴라』가 나온 직후, 한 평론가분이 “여성 캐릭터의 겹이 얇다. 겹을 더 만들고 깊이를 부여하라”고 조언하신 적이 있습니다. 뼈아픈 지적이었죠. 다음 소설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첫 번째 과제가 됐고요. 그러니까 『7년의 밤』에서의 강은주는 저 나름대로 약점을 극복하려 안간힘을 쓴 끝에 나온 여성인 셈입니다.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지만 최소한 다음 소설에서 좀 더 나아질만한 발판은 마련했다고 애써 자족하고 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소설에선 이 문제에서 스스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여성을 이야기의 한 중심에 세웠어요. 여성이 주인공이니만큼, 제 여성관도 자연스레 드러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김경연 다시 작품 밖으로 나와 최근의 문단 경향과 관련한 질문을 드려보고자 합니다. 정유정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최근에 와서 장편소설 활성화 논의가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아울러 문단의 관심이 단편에 쏠렸던 과거의 경우와는 달리 작가들의 장편소설 창작이 꾸준히 확대되는 추세입니다. 장편에 대한 요구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한 문학내적인 필요나 출판 시스템의 강제라는 비판적 지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의미의 장편(novel)을 넘어 지금, 이곳의 시대감각에 맞는 새로운 장편을 창안해야 한다는 요청에 동의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정유정 선생님께서는 등단 이후부터 줄곧 서사성이 강한 장편을 써오셨고, 또 대개가 장르소설적 성격이 두드러진 작품들이 많았는데, 최근 문단에서 일고 있는 장편소설 활성화 논의나 장편 창작 붐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신지요? 또 장르소설에 대한 한국 문단이나 평단의 편견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정유정 저는 장편 창작이 지금보다 훨씬 더 활성화돼야 하고, 다양한 장르의 장편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르기법의 차용이 많아지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고 있고요. 그 흐름에서 지금껏 ‘주류’로 형성돼온 서사의 관습을 뒤엎을 수 있는 힘이 형성되기를 기대하는 중입니다.

장 콕토는 창조의 정신이란 보이는 것을 뚫고 들어가 감춰진 현실성을 드러내는 대결의 정신이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것을 뚫고 들어가기 위한 무기로 저는 장르적 서사를 택했습니다. 홀로 긴 세월을 갈아온 칼이고 제가 가진 밑천이에요. 대결의 정신이 미약하다는 비판은 성장의 묘약으로 감사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만, 무기 자체를 평가의 근거로 삼는 건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각각의 방식 안에서 방식에 적합한 측량을 시도할 때, 숲을 균형 있게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경연 선생님의 소설을 읽다 보니 애드가 앨런 포나 레이먼드 챈들러, 래이 브래드베리 같은 작가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었습니다. 범죄추리물이나 SF 같은 장르소설의 거장들로 알고 있는데 아마도 정유정 선생님의 소설에 영향을 준 작가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들과 더불어 선생님께 영감을 준 작가나 작품들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정유정 저는 영미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극적 서사(찰스 디킨스)와 디테일한 리얼리티(존 스타인벡) 하드보일드한 문체(헤밍웨이), 느와르적 분위기(레이먼드 챈들러), 비정하면서도 묵직한 목소리(코맥 맥카시), 블랙유머(커트 보네커트),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강렬한 서스펜스와 정서적 심연구조(스티븐 킹)를 가진 작품들이었죠. 그중에서도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제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에요.

제가 열다섯 살이었던 해에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났어요. 저는 남동생과 함께 광주로 소위 유학을 온 촌뜨기였죠. 시민군이 도청을 점령하고, 진압군이 광주외곽을 에워싸고 있던 어느 날 진압군이 도청진압작전을 편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날 저녁, 하숙집 주인부부와 하숙생들이 삼겹살에 소주를 한 잔씩 나눠 마시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도청으로 나갔죠. 시민군과 도청을 지키고자 평범한 시민이 목숨을 걸었던 겁니다. 하숙집엔 아직 어린 저와 동생만 남았죠. 어두워지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가로등이 모조리 깨져나간 탓에 동네는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어요. 어둠 속에서는 총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고요. 잠이 오질 않았어요. 무섭고, 떨리고, 가슴 답답하고. 군인들이 총을 들고 우리 집에 들어오는 건 아닐까, 도청으로 나간 언니오빠들이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쩌나. 잠을 잘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하숙집 식구들이 돌아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죠. 궁리 끝에 대학생 오빠 방으로 들어갔어요. 어려운 책을 읽으면 잠이 올까, 싶었던 거예요. 가장 재미없어 보이는 책을 골랐는데, 그게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였어요. 세로줄 판으로 된 낡은 책이었는데 딱 보기에 여섯 장만 읽으면 잠이 올 것 같더라고요. 방으로 가져와 책을 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이 들어 보니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었어요. 책을 덮고 나니까 책을 읽기 전보다 가슴이 더 답답했어요. 책의 마지막 장면만 생각하면 멀미가 나는 것 같고, 불붙은 숯덩이처럼 뜨거운 것이 위장에 들어앉은 것 같고, 숨을 쉬면 꺽꺽 목울음소리가 나고요. 바람을 쐬면 이 이상한 충격이 가라앉을까 하고 창문으로 기어갔죠. 그날 제 방 창문엔 커튼 대신 두꺼운 이불이 달려 있었어요. 행여 총알이 날아오거나 불빛이 새어나가서 군인들의 이목을 끌까봐, 주인아저씨가 달아주고 나간 것이었죠. 이불을 들추고 창문을 열었더니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어요. 하늘은 파랗고, 창밖 실내야구장 그물도 파랗고…. 그러다 문득, 총소리가 멎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세상이 너무도 고요하다고 느끼던 그 순간, 갑자기 울음이 터지더라고요. 눈물이 아니라 울음이요. 엉엉 소리를 내어 우는 오열하는 울음.

어린 시절 제게 누군가 “너는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물으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작가가 될 거에요” 대답하고는 했었어요. 그런데 “왜 작가가 되고 싶어?”라고 물으면 대답을 못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왜 되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거든요. 그날 그 창가에서 터트린 울음이 바로 “왜?”에 대한 답이었어요. 나도 이런 뜨거운 감동과 가슴을 뒤흔드는 충격을 안겨주는 소설을 쓰겠다고. 이제 눈치 채셨겠지만, 『내 심장을 쏴라』는 켄 키지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언제든 한 번은 써야 할 소설이었던 거죠.

 


김경연 저의 오독과 불민함으로 핵심을 빗나가는 질문들만 두서없이 드린 것 같은데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충실한 답을 주시니 부끄럽고도 감사합니다. 대담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아주 의미 있는 대화의 자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정유정 선생님의 소설을 읽으면서 모처럼 소설을 읽는 일이 참 즐거운 것이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몰아치는 서사에 압도당하면서도 그 몰입이 내내 흥미진진하고 유쾌했죠. 거기엔 한국소설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엿본 흥분도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아마 지금보다 앞으로 더욱 정유정 선생님의 소설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게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미흡한 질문 때문에 미처 다하지 못하신 말씀들 자유롭게 얘기해주십시오.

 


정유정 저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작가입니다. 죽는 날까지 성장하는 작가이고 싶고요. 사실 저는 장르문학이니, 본격문학이니, 경계 무너뜨리기니, 하는 것에는 별 관심 없습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들을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그 이야기를 얼마나 그럴싸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소설이 ‘이야기의 예술’이라는 제 고집은 아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담 준비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신 『오늘의문예비평』에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문예비평」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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