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 향기

어쩌면 모든 소설은 결국 실패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 천명관

by 아프로뒷태 2012. 3. 11.

 

 

 

 

 

 

나의 삼촌 부르스 리

천명관 지음

줄거리

천명관이 돌아왔다. 폭발하는 이야기의 힘으로 한국 문단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작품『고래』이후, 그만의 선 굵은 장편 서사를 기다려온 독자들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존 소설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어 ‘마술적 리얼리즘’의 환상적인 세계를 펼쳐 보였던 그가 이번에는 한국적 현실의 공간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온몸으로 새겨낸 한 남자의 초상을 그렸다.

이 작품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식 근대화의 압축 성장 가운데서 평범한 개인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굴곡진 삶을 살아내는 과정을 담아냈다. 화자인 나의 시선으로 바라본 삼촌의 일대기는 70년대 영웅의 상징 ‘이소룡’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할아버지가 바깥살림을 차려서 낳은 서자로 들어와 어릴 때부터 눈칫밥을 먹으며 성장한 삼촌에게 이소룡은 비루한 자신의 인생을 구원해 줄 그 무엇이다. 그러나 태생부터 원조나 본류가 될 수 없었던 삼촌의 운명은 험난하기만 하다. 이소룡을 추종했으나 끝내 저 높은 곳에 다다르지 못하고 모방과 아류, 표절과 이미테이션, 짝퉁인생에 머물게 되는 한 남자의 고단한 삶이 70년대 산업화, 80년대 군부독재과 민주화혁명, 90년대 본격 자본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유장하게 펼쳐진다.

 

 

“어쩌면 모든 소설은 결국 실패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것이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주진 못하더라도, 그리고 구원의 길을 보여주진 못하더라도 자신의 불행이 단지 부당하고 외롭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래서 자신의 불행에 대해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그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나는 언제나 나의 소설이 누군가에게 그런 의미가 되길 바랍니다.” - 『나의 삼촌 브루스 리』 작가의 말에서

 

 

 

 

 

인터뷰 기사

 

 

어쩜 이야기를 이토록 맛깔나게 할 수 있을까?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지고, 책장을 넘기는 손은 멈추기가 아쉽고, 성능 좋은 오토바이처럼 질주하는 문장을 따라가느라 눈동자의 움직임은 빨라진다.

[리뷰]
나의 삼촌 브루스리
[인터뷰]
소설가 천명관
[스페셜]
박민규에게 천명관은?

매혹이 넘치던 시대, 짝퉁 인생에 관한 이야기


어쩜 이야기를 이토록 맛깔나게 할 수 있을까?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지고, 책장을 넘기는 손은 멈추기가 아쉽고, 성능 좋은 오토바이처럼 질주하는 문장을 따라가느라 눈동자의 움직임은 빨라진다.
『유쾌한 하녀 마리사』 『고래』 『고령화 가족』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야기꾼의 면모를 확실히 각인시킨 작가 천명관이 신작 『나의 삼촌 브루스리』로 돌아왔다.

“70년대는 다들 뭔가에 매혹된 시대였다. 온 국민은 독재자와 슬레이트 지붕에 매혹되었고 독재자는 수출과 젊은 여자에 매혹되었으며 우리는 팝송과 이소룡에 매혹되었다.”(p.246) 그 시절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나이들의 꿈과 우정과 사랑과 인생 이야기. “말하자면, 이것은 표절과 모방, 추종과 이미테이션, 나중에 태어난 자 에피고넨에 대한 이야기이며 끝내 저 높은 곳에 이르지 못했던 한 짝퉁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p.11)


삼촌의 조카 상구의 시선으로 전해지는 삼촌 도운의 인생 이야기는 파란만장하다. 말더듬이 도운은 서자 출신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가 그저 이소룡을 흠모하고 닮고 싶었을 뿐인데 깡패들의 싸움에 말려들어 고향을 떠나게 된다. 그저 이소룡과 같은 길을 걷고 싶었을 뿐인데, 중국집에서 만난 가짜 사부에게 사기를 당해 빈털터리가 된다. 그뿐이랴. 그래도 이소룡과 비슷한 일이라도 하고 싶어, 충무로 으악새(‘으악’하고 죽어나가는 단역배우)가 되어 꿈을 이루는가 싶더니 추락사를 당해 그마저도 막혀버린다.

첫눈에 반해 연정을 키워가던 삼류 여배우 원정만큼은 남자답게 지켜내고 싶은데, 그 길도 칼질이 난무하고, 피가 튈 만큼 험난하다. 과연 삼촌은 그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꿈은 일찌감치 현실에서 멀어졌지만, 오직 한 길만 아는 삼촌에게 어느 순간 꿈과 현실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맞고 찢어지고, 당하고, 휩쓸려가도 단순 무식 충직한 삼촌 마음속의 이소룡은 한시도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기에, 그의 삶은 한없이 상처 나고 찢겼는데도 불구하고 그쪽으로 그쪽으로 (참으로 멀리 돌아가게 되더라도) 다가간다.



001.jpg

하지만 어느 순간 알아챌 수 있다. 도운이 영화 속 이소룡보다 더 이소룡 같은 모습으로, 삶 속에서 벌어지는 시비와 싸움에 맞서고 있다는 걸 말이다. 어떤 연출도, CG도 없어 폼나진 않지만, 그는 런닝 타임 속에서만 무도인이 아니었다. 삶의 갈림길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싸우고 피하지 않았던 도운의 삶은 과연 그가 꿈꾸었던 것과 멀어져 있는가 되새겨보게 한다.

어떤 상대 배우도 해주지 못한 사랑을 여배우 원정에게 보여주지 않던가. 그래서 삼촌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뤄지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다. 자꾸만 그를 다른 곳으로 휩쓸어가고 굴복시키려는 현실과 유혹들 속에서도 그저 진심으로 우직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삼촌은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의미에서 삼촌은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영웅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800여 장에 걸쳐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삼촌이 변해가듯, 주변 사람들도 변해가고, 사회도 변한다. 이소룡이 날고 기던 70년대 유신 시대가 막을 내리고, 도무지 선의나 정의만으로는 온전한 삶이 불가능해 보이던 80년대 군부독재 시절을 지나고, 성룡, 주윤발 등 홍콩 스타가 새롭게 떠오르던 90년대 민주사회에 이르기까지.

이런 삶의 풍경들은 삼촌의 삶을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삼청교육대라는 게 생겨 삼촌이 고초를 당하거나, 시대가 바뀌어 더는 이소룡의 영화가 제작되지 않는 식으로 그의 삶에 깊게 개입하기도 한다. 단 한 번도 꿈꾸기를 멈춘 적이 없는 그였기에, 그의 삶은 단 한 순간도 출렁이지 않은 적이 없다. 게다가 문단 계에 내로라하는 이야기꾼 천명관의 소설 아닌가. 당신의 머릿속에 텀블링을 넣은 듯이 문장과 상상력의 출렁임은 거침이 없다.


한국의 마르케스, 천명관의 이야기

002.jpg

그는 자기 혼자선 절대 삼촌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는 동생들을 몇 명 끌어들였다. 그래도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각목과 쇠파이프 등 무기를 준비했다. 그래도 또 왠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 동생들과 아는 동생들을 몇 명 더 끌어들였다. 또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오토바이 체인과 손도끼 등 무기를 더 준비했다. 그래도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아는 동생들이 아는 동생들이 아는 동생들을 몇 명 더 끌어들여 읍내의 건달 20여 명이 동원되었다.

겨우 삼촌 한 명 손봐주는 데 너무 유난스럽다 싶었지만 토끼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는 동생들이 아는 동생들이 아는 동생들이 아는 동생들, 또 아는 동생들이 아는 동생들이 아는 동생들이 아는 동생들이 아는 동생들까지 몽땅 끌어들여 읍내에서 노는 건달들과 그 밑에서 노는 양아치, 양아치 밑에서 노는 고삐리와 고삐리 밑에서 노는 중삐리들까지 총동원되어 급기야 삼촌을 손봐줄 주먹들은 모두 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p.98
『나의 삼촌 브루스리』)



문단 계에 들이닥친 『고래』는 대단했다. 마치 고래에게 날름 삼켜져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고래 뱃속의 내장을 타고, 뼈를 통과하고, 뱃속을 탐험하듯이 날것의 이야기는 한 권의 책 속에서 팔딱거렸다. 수많은 독자를 단숨에 매료시킨 『고래』는 천명관 작가에게 ‘한국의 마르케스’라는 별명과 함께 한 명의 거대한 이야기꾼의 탄생을 알렸다.

이 이야기꾼은 몇 개의 단어를 조몰락거리면서, 우리 눈앞에 거대한 장관들을 펼쳐낸다. 그의 이야기는 위에서 아는 동생들이 늘어나듯 불어난다. 시간, 장소쯤은 거뜬히 뛰어넘는다. 옛날 문명 이전 시대부터 한국 현대사, 프랑스 혁명사를 걸쳐 미국 마피아의 세계까지 닿는 범상치 않은 스케일을 자랑한다. (
『유쾌한 하녀 마리사』) 평균나이 49세인 고령화 가족, 120킬로의 거구 등 눈에 보일 듯 선명하게 또 강렬하게 각인되는 캐릭터도 천명관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다.


그에게 소설이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이청준, 이문구, 황석영 등의 한국 작가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커트 보네거트 등의 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는 천명관 작가는 소설이란 뚜렷한 서사가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분명하다. 게다가 3D처럼 생생하게 펼쳐지는 영화적 상상력과 특유의 입담이 더해져, 그의 소설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이야기는 활자 위에서 활개를 친다.

호떡 100개를 먹은 ‘토끼’가 물대포를 쏘듯 토사물을 게워내는, 흡사 폼페이 화산폭발 같은 재앙이랄지, 백 명의 아는 동생들이 불 꺼진 다방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 콜라병으로 ‘다구빨’을 세우다 피범벅이 되어 쓰러지는 장면 등에서 그의 소설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과장된 묘사와 설정은 그야말로 ‘극적’이다.


모든 소설은 결국 실패담이지만



004.jpg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장엄한 규모의 장면들은 천명관 작가가 실제로 <총잡이> <북경반점>의 각본을 쓰고 오랫동안 충무로에 몸담았던 이력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소설 속 많은 장면이 영화적인 상상력에서 만들어졌고, 여러 편의 이야기에서 그가 가진 영화에 대한 연정을 확인할 수 있다.

“첫 소설
『고래』에선 주인공이 극장을 짓고 그 안에서 최후를 맞이합니다. 『고령화 가족』의 주인공은 영화감독이었죠. 이번에 쓰는 소설은 이소룡이 되고자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끝으로 나는 더 이상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던 작가의 말은, 이소룡에 대한 불 같은 열정을 마음 속에 활활 태우며 산전수전을 겪고 난 삼촌이 훗날 극장에서 자신이 (잠깐) 등장하는 영화를 바라볼 때의 비장한 표정을 떠올리게 한다.

개개의 소설은 결국 천명관 작가에게는 애정의 서사가 아니었을까. 밥벌이와는 무관한 영화나 이소룡에 관한 애정은, 연인에 대한 애정보다 끈끈하고 질기고 우리의 삶에 찰싹 달라붙는다. 이것은 다른 이름으로 로망, 실패할 수밖에 없는 꿈의 이야기. 결국은 실패담.

“나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것이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주진 못하더라도, 그리고 구원의 길을 보여주진 못하더라도 자신의 불행이 단지 부당하고 외롭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래서 자신의 불행에 대해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나는 언제나 나의 소설이 누군가에게 그런 의미가 되길 원합니다.”

그를 한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독자들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소설가다. 그는 작가로서 일신의 업적(!)을 세우기보다는 한 명의 독자들을 더 즐겁게 해주고 싶어하는 작가니까. 유머러스하고도 애잔한 이야기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 못지않게, 재미있게 읽었다는 평에 설레는 작가니까. ‘너무 남자 소설(!)’만 쓴다는 오해 앞에, 그렇다면 괜찮은 연애 소설로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겠노라고 오늘도 책상 앉을 그런 작가니까 말이다.

평균보다 한참 낮은 지점에 있는, 천명관 소설 속 인물들의 소박한 행복을 보면, 나는 참 행복하구나, 위안이 되기도 하고, 그저 한없이 비루하고 거친 인생 속에서 이제까지 감지하지 못한 행복과 의미 같은 걸 발견하기도 한다. 때론 그저 웃다 짠해진다.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는 독자에게, 천명관 작가의 소설을 권해주고 싶은 이유다.

 

 

 

②[인터뷰]그 사람이 경험한 실패가 궁금했다. - 소설가 천명관 인터뷰

"사람 사이의 관계를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죠."

 

"이런 것 말고 좀더 소설적인 것, 소설 원형에 가까운 그런 건 뭘까? 내가 쓰고 있는 것에서 영화적인 걸 빼면 어떤 게 남을까? 살만 루시디 소설을 읽고 있는데, 그런 소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것이 소설에 가까운 거예요."

[리뷰]
나의 삼촌 브루스리
[인터뷰]
소설가 천명관
[스페셜]
박민규에게 천명관은?

『고래』(2004), 『유쾌한 하녀 마리사』(2007), 『고령화 가족』(2010), 『나의 삼촌 브루스 리』(2012).

소설가 천명관의 작품 목록이다.

2003년 문학동네신인상 소설 부문에 「프랭크와 나」가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로 십 년이 지났고, 그간 더해진 네 권의 작품을 보며 생각한다. 『고래』가 나온 2004년과 『유쾌한 하녀 마리사』가 나온 2007년 사이의 3년 동안 그에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그 이후 『고령화 가족』이 나온 2010년까지, 그러니까 2008년, 2009년에 그는 어디에 있었을까.

3년마다 한 권 꼴로 드문드문 주저 주저 새 작품을 내던 탓에 마치 군대에 간 애인을 기다리는 마음처럼 많은 독자들의 애간장을 태우게 했지만, 다시 천명관은 돌아왔고 이번에는 더 빨리 왔다. 『고령화 가족』이후 2년 만에 이니까.

고래

문학동네

왜 이렇게 그의 소설을 기다리냐고 묻는다면, 답은 간단하다. 그의 첫번째 장편소설 『고래』에는 대단히 ‘특별’한 무엇이 있었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폭발하는 이야기의 힘’이라는 표현을 누군가 쓰기도 했는데, 대부분의 독자들은 『고래』를 읽고 깜짝 놀랐다 한다. 뮤지션 장기하도 그렇다. .

“『고래』를 읽었을 때 판소리를 열심히 듣고 있던 때였다. 판소리에서 느꼈던 끝없이 유장하게 흐르는 느낌을 소설의 문체에서 느끼고 깜짝 놀랐다. 우리의 서사적 전통에 힘입은 개성적 문체다. 이야기도 물론 최고!” - 아름다운 서재 중 장기하의 추천

아직 『고래』를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이 소설의 매력에 대해 설명을 좀 더 하면, 첫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이 분주해질 만큼 이야기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 , 둘째 등장하는 인물들이 참 개성 있다는 것, 셋째 그 개성 있는 인물들을 통해 표현되는 삶의 희, , , 락이 생경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원시적이면서도 격정적이라는 것, 넷째는 어떨 땐 익살맞게, 어떨 땐 자세하게, 어떨 땐 비장하게, 또 어떨 땐 담담하게 들려주는 화자의 입담이 최고라는 것이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예담

오로지 ‘그’가 얘기한다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을 기대하게 만드는 소설가 천명관이 이번에 들려주는 이야기는 삼촌에 대한 그리고 삼촌을 둘러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화자인 ‘나’의 시선으로 바라본 삼촌의 이야기는 70년대 영웅의 상징 ‘이소룡’에 대한 추억으로 시작된다. 할아버지가 바깥살림을 차려서 낳은 서자로 들어와 어릴 때부터 눈칫밥을 먹으며 성장한 삼촌은 이소룡처럼 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태생부터 원조나 본류가 될 수 없었던 삼촌의 운명은 험난하기만 하다. 이소룡을 추종했으나 끝내 저 높은 곳에 다다르지 못하고 인생의 구비 구비 좌절하게 되는 한 남자의 기구한 삶이 70년대 산업화, 80년대 군부독재와 민주화 혁명, 90년대 본격 자본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 속 캐릭터들은 현실에 좀더 발을 딛고 있다. 우리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현실 속의 우리는 물고기를 다 잡았다 놓치고,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운명에 굴복해 버리는, 어쩔 수 없이 실패와 좌절을 맞닥뜨려야 한다.


“어쩌면 모든 소설은 결국 실패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것이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주진 못하더라도, 그리고 구원의 길을 보여주진 못하더라도 자신의 불행이 단지 부당하고 외롭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래서 자신의 불행에 대해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그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나는 언제나 나의 소설이 누군가에게 그런 의미가 되길 바랍니다.” - 『나의 삼촌 브루스 리』 작가의 말에서


 

꿈이 있었지만, 현실 속의 우여곡절 속에 우스꽝스러워지고 좌절하고 실패하는 과정을 예의 그 입담으로 유장하게 펼쳐내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필자는 소설가 천명관이 경험한 실패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혹시 고래』유쾌한 하녀 마리사』 사이의 3. 그리고 유쾌한 하녀 마리사』 와 『고령화 가족』 사이의 3년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라는 생각과 함께. 800 페이지가 넘는 서사에 묻어나는 진하디 진해 모든 것을 녹여내버릴 것 같은 그 정서의 근원이 알고 싶었던 거다. 이 인터뷰는 그 질문 하나로 시작되었다.

01.jpg

『나의 삼촌 브루스 리』를 들고 온 소설가 천명관

"스무 살 전후로 작가 님이 어떤 모습이셨을까 궁금합니다. 고등학교 다니실 때는 어떤 학생이셨나요?"

"놀기도 제대로 못 놀면서 공부는 바닥인, 그런 인생이었죠. 제가 단편 「二十歲」를 통해서 스무 살 때를 얘기했어요. 대학 진학을 안하고 군대 가기 전에 어정쩡한 다방 죽돌이 생활 이야기죠. 고등학교가 미션스쿨이었거든요. 인문계였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 많았어요. 명문 고등학교인데다가 공부 조금만 안 해도 바로 꼴지를 하거든요. 졸업 한 후 10년쯤 뒤에 최종 학교 성적 증명서를 떼러 갔는데 그때 알았잖아요. 제가 반에서 58명 중에 58등을 했더라고요. 쉽지 않은 일인데. 그랬었어요. "

"공부에 뜻이 없으셨나 봅니다."

공부도 안 했고. 고등학교 2학년부터는 학업에 뜻이 없고, 학교 분위기에 적응을 잘 못했던 것 같아요. 벌써 30년도 더 되었는데 그때도 그랬어요. 대학 입시 공부로 밤 12시까지 야간 자율학습하고…. 진짜 적응을 못해서 괴로웠어요. 학교 가기 너무 싫고, 자주 나가지도 않았고, 가출을 할 용기도 없고, 소위 노는 애들하고 어울리기에는 몸도 약하고….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얼치기 생활을 했었죠."

"그때 주로 뭐하셨어요?"

"책을 좀 읽었죠. 이문열, 이청춘, 한국 단편 전집을 읽었어요. 책은 좀 읽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문학 소년까지는 아니고요. 그때는 그런 게 나의 엔터테인먼트였죠."

"군대에서 훗날 ‘장산곶매’라는 영화 창작 집단에서 <파업전야>와 같은 영화를 연출한 장동훈 감독과 친구가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대 후 우연히 장동훈 감독과 만나 영화 일을 하게 되셨다고 하는데요, 제대 후 장동훈 감독 님과 만나기까지 어떤 일을 하셨나요?"

"그때 사회 생활을 시작한 거죠. 제대하고 나서 그야말로 소위 노가다 좀 하고, 골프 샵에 취직해서 3년 있었어요. 그러다가 답답해서 보험 판매원을 2년 했어요. 그때 차 끌고 다니면서 밖으로 돌아다니고 했죠."

"그런 사회 생활이 나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었어요. 그때는 의욕도 많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목표가 뚜렷했으니까, 돈도 많이 벌었고. 그땐 뭘 해도 재미있었을 나이가 아니었나 싶어요. 벌써 20년도 더 됐으니까 오래된 일이네요."

02.jpg

"예스블로그에 연재하셨을 때도 그렇고, 이번 책에도 영화에 대한 소설은 이제 마지막이 될 거라는 말씀을 의미심장하게 하셨어요. 영화 일을 하셨던 시기에 작가 님은 어땠을까, 또 영화에 대한 애정의 깊이는 어느 정도였을까 궁금합니다. "

"제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이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때는 정말 순수하게 좋아서 했죠. 꿈도 있었구요. 일을 한다는 마음이 아니었어요. 너무 재미있고, 몰입이 굉장히 강했죠. 그런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때 소설을 시작했다면 좋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 열기를 가지고 문학을 했다면 더 많은 작품을 쓸 수 있을 텐데…. 안타깝죠."

“제니 필즈는 마흔한 살이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으며 그녀가 원하는 바는 바로 그런 내용을 글로 쓰는 것이었다.” ? 존 어빙 『가아프가 본 세상』 중에서

"왜 그렇게 영화에 몰입을 했을까요?"

"재미있었어요. 영화라는 매카니즘에 매혹이 됐던 것 같아요. 플롯을 짜고 그것을 화면에 담아내는 한 시간 반짜리의 이야기에 굉장히 매혹 되었던 것 같아요.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갔어요. 영화에 대한 소설을 더 이상 쓰지 않겠다는 것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쓰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었구요. 제가 소설을 영화적 감수성으로 쓰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어디서 끊고 시작하는지, 인물들의 대화, 소설 속 서술 문장들을 영화를 만드는 감수성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

이런 것 말고 좀더 소설적인 것, 소설 원형에 가까운 그런 건 뭘까? 내가 쓰고 있는 것에서 영화적인 걸 빼면 어떤 게 남을까? 살만 루시디 소설을 읽고 있는데, 그런 소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것이 소설에 가까운 거예요. 본질이라는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소설에 조금 더 가까운 소설다운 소설. 그런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좀 더 소설적인 게 뭐인 것 같나요?"

"모르겠어요. 어떤 소설을 보면,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이론을 보면, 자기는 다른 영화나 드라마나 만들 수 없는 소설. 그런 게 정말 좋은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게 있어요. 정말 그런 건가. 잘 모르겠고, 근데 사실은 제가 쓰는 소설들이 다.. 제가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얘기들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상상의 출발은 언제나 영화였던 거예요. 그렇지 않은 걸 써보고 싶은 거예요. 소설로서 처음 생각했던 것. 그런 걸 생각하는 거죠."

"작가로서의 재능을 최초로 영화계 사람들에게 인정 받았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

"없는 것 같은데요.(웃음) 보험회사 영업사원이 영화 하러 왔는데, 저한테 뭐 기대하는 게 있었겠어요. 영화사에서 처음에는 총무 일을 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시나리오를 처음 썼어요. 그때 영화사의 프로듀서 형들이 보고 너 회사 그만두고 시나리오를 쓰라고 얘기했어요. 그래서 실제로 그만두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어요. 아마 그걸 보고 ‘얘가 시나리오로 재능이 있구나’ 생각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게 최초의 기억이 아니었나."

"시나리오 한 편을 완성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요."

"그 시나리오가 영화화되진 않았어요. 우디 알렌 영화처럼 수다스러운, 영화판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에로 영화를 찍는 감독의 이야기였거든요. 한 형이 뭔가 이야기가 된다고 생각했는지 영화 한다고 시나리오를 들고 다니기도 했었어요. 제가 시나리오 쓰기가 학습이 되어 있던 것도 아니고, 영화를 보며 이런 식이 아닐까 하고 쓴 건데, 비슷하게 쓴 거죠. 그걸 재능이라고 하면 재능일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이후로 계속 글을 쓰게 된 것 같아요. 이후에도 시나리오는 많이 썼으니까. "

"90년대 영화판 풍경이 어땠나요?"

"그때가 기획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대기업이 영화에 투자를 하던 시기라 다들 의욕이 넘쳤죠. 그리고 실제로 크게 성공을 거둔 사람들도 있구요. 물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들도 나오고, 해외에서 공부하고 온 유학파들, B급 무비를 영화적 자산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그 때가 한국영화의 중흥기였던 것 같아요. 저도 그 시기를 같이 보낸 거예요. 근데 저는 열차에 못 올라 탄 거죠. "

"열차에 못 올라 탔다고 표현하셨는데,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수도 없이 생각했죠. 내가 왜 실패했을까? 계속 곱씹어 보죠. ‘내가 만약 그 때 그 선택을 했더라면, 내가 그때 그걸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뭔가 제가 부족했던 거겠죠. 영화 감독을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정치력이 필요한 일이잖아요. 그 사람이 영화적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사람만 보고 어떻게 알겠어요? 그때는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 많지 않아서, 제가 믿을 수 있는 건 제 시나리오밖에 없었잖아요. 경력도 없고 인맥도 없고 정말 시나리오 밖에 없는데, 제가 쓴 시나리오가 대박이 났으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여러 가지로 무리수 였던 거죠.

차분하게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기회를 엿보거나 아니면 다른 기회를 엿봤어야 하는데, 무작정 시나리오 써서 영화사 들고 가고, 계속 기다리고 그랬던 거죠. 영화적인 열정과 시나리오 쓰는 능력 말고는 누가 객관적으로 인정해 줄만한 게 없었던 거죠. 거기에 대해서 아픔은 있지만, 부당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제작자나 투자자가 20, 30억을 맡겨야 하는데, 그런 신뢰를 주지 못했나봐요."

"이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게 놀랍습니다."

"다 지난 얘기고, 그땐 정말 그게 다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마흔쯤 됐을 때 영화 데뷔 실패하고 나니까, 내가 인생에 실패했구나, 라는 강렬한 확신이 있었어요. 내 인생은 이렇게 실패하고 말았구나. 그러니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다 감사하죠. 지금도 그래요."

"이번 소설 속에 도치라는 덩치 큰 인물이 호떡을 100개 먹고 게워 내는 장면 있잖아요. 장관인 거예요.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기억할 것 같은데, 작가 님께서 이번 소설 쓰시면서 무척 공들인 장면이 있으신지요."

"종태네 소 있잖아요. 송아지를 사고, 소중하게 키우다가 그 소가 죽게 되는 과정. 그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좋아요. 농촌의 가난한 집에서 닭, 돼지, 염소 키워서 그걸로 소를 사서, 그 소가 큰 재산이 되어줄거라 기대했는데, 그 소가 죽잖아요. 그래서 아버지도 농약 먹고 자살을 하시구요. 제가 어렸을 때 농촌마을에서 느꼈던 소박한 꿈, 그리고 그 꿈이 좌절되는 모습을 그려져서 마음이 아픕니다. 사실 전체 플롯하고는 다른 이야기인데, 오히려 저는 그 이야기에 애정이 갑니다."

03.jpg

"작가님 작품 특징이 마치 변사처럼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 소설에서는 삼촌의 조카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요."

"삼촌과 조금 더 가까운 인물, 주인공에 대해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인물이 지켜봐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독자들도 주인공의 눈으로 삼촌을 봐주길 바란 거죠. 누군가는 자기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연을 헤아리고, 그런 장치죠. 이번에 나라는 화자는."

"작가님 작품들 보면, 문명 이전의 원시에 대한 동경이 있지 않나, 그런 느낌을 받아요."

"사람 사는 게 그렇게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본질은. 주거 형태들이 계속 달라졌지만, 뭔가 복잡해진 것 같은데, 사람은 계속 집에서 사는 거죠. 사람 사이의 관계를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죠. 그런 눈으로 보려고 노력을 많이 하죠. 원형적인 것들을 보려고 하죠."


"세월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소설 속에도 나오지만, 꿈에 대한 거라든가, 노동에 대한 것, 남녀의 차이, 그런 거죠. 가난. 벗어나려고 하는 것. 욕망들….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다 비슷한 거잖아요. 변화된 것에 대해서 저는 관심도 없어요. 특히 90년대 문학을 보면 소설 속에 세련된 서구 음악 같은 장르를 담으려 하고…., 그런 시대와 문화가 있었잖아요. 저는 그런 부분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래되고 변하지 않는, 그런 걸 담아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소설 속에서 인터넷이나 휴대폰 같은 것이 나온다던가 하면 이상하더라고요.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요."


"어떻게 이야기를 끝낼까 고민하셨던 걸로 압니다. 예스블로그에서 연재하셨던 것과 실제로 결말이 달라지기도 했구요. "

"연재할 때는 좀더 비극적이었는데, 뭔가 조금 더 여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다 죽고 딱 끝나는 것보다는 여지가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주변 사람들한테 그런 얘기도 들었구요. 여운이랄지, 희망이랄지 그래도 뭔가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끝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수정했어요. 수정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죠."

"삼촌을 만들고 바라보는 마음이 어떠세요? 연민의 마음이 있으신가요. "

"구체적인 사연은 다르지만, 저 자신의 모습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뭔가 꿈이 좌절되고 상처받고, 그런 모습들. 저 뿐이 아니라 살아가는 데 다 그런 요소가 있잖아요. 삼촌에게 그게 유난스러웠을 뿐이지 누구에게나 그런 과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독자들이 공감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③[스페셜] 그 남자가 솔로인 이유 - 박민규 작가 이메일 인터뷰

박민규 작가에게 천명관을 묻는다

 

 

예스24 때문입니다. 예스24 때문이라구요(그 이유를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거야 원... 뭐 어쨌거나 저로선 그런 상상을 해봅니다. 즉 언젠가... 사인회를 마친 천명관 형으로부터 이런 편지가 불쑥 제게 배달되어 오는 것입니다.

[리뷰]
나의 삼촌 브루스리
[인터뷰]
소설가 천명관
[스페셜]
박민규에게 천명관은?
질문
천명관 작가님과의 첫 대면이 기억나시는지요. 그 때 어떤 느낌이셨나요.

답변

천명관 형과 저는... 2003년도에 나란히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했습니다. 하여, 그해 시상식 때 수상자들을 위해 마련해준 대기실에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 걸로 기억합니다. 신인으로서의 설레임이나 긴장감... 각오가 가득한 분위기였음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마는, 그러기엔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여서 둘 다 시큰둥 앉아있었습니다. 자꾸 나가서 인사를 하라고(이런저런 선생님들께) 누군가 조언도 해주고 했는데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하는 기분으로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자리였습니다.


긴장도 안되고 나가서 인사할 일도 없고 하니... 지루할 정도로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양자물리학과 다원우주론에 대해 얘기를 할... 까 하다 뭐, 아내 자랑을 실컷 늘어놓았습니다. 천명관 형은 막스 베버에 대해, 또 M.호르크하이머가 등장한 후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 활동에 대해 말 할... 것 같은 얼굴로 별 말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란히 우리는 담배를 피워 물었습니다. 왠지 모르지만 낄낄댄 기억도 납니다. 그것이 우리의 첫대면이었습니다.


첫 인상에 관해서라면... 저는 17살 이후로 사람에 대해 첫인상이란 걸 가지지 않습니다. 첫인상을 믿지도 않고... 뭐랄까, 인간이란 건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거니까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에 대해서도 첫인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아, 남자사람이구나. 이름이 천명관이구나... 했습니다. 그러나, 천명관 형이 그날 저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훗날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게... 그러니까 몇 년후 제가 이효석 문학상을 탔을 때였습니다. 문학상 수상집에 절친 작가가 말하는 박민규 - 이런 코너가 있었는데 절친이 없었던 저는 그래도 뭐랄까, 그때 얘기도 좀 나누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천명관 형에게 그 원고를 부탁했습니다. 그는 흔쾌히 수락을 해주었고, 또 원고를 보내주었습니다. 요약컨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처음 봤는데 막 자기 아내 자랑을 늘어놓더라, 그래서 뭐 이런 놈이 다있지? 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후로는... 절대 아내 자랑을 하지 않을 줄 알았지? 하는 얼굴로 지금도 계속 해대고 있습니다. 여전히 그는 별 말 하지 않습니다만, 또 요즘엔 정말이지 막스 베버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 활동... 과 비슷한 얘기들을 마구 해대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래서 첫인상이란 걸 가져선 안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런 기분이 들긴 했습니다. 아, 나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도 절대... 결코... 어떤 일이 있어도 ‘하하하’ 라고는 웃지 않겠구나, 그렇게 웃지도 못하고... 웃은 적도 없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세계를 차갑게, 슬프게 바라보는 인간이구나... 했던 것입니다. 알고보니 우리는 둘 다 영업사원 출신이었고, 또 여러모로... 실은 실패한 인생들이었습니다. 도대체가 문학상이라니! 따지자면 둘 다, 인생에서 겪을까 말까한 일을 그날 겪고 있는 셈이었는데, 하여 그날만큼은 하하하 웃어도 좋았을텐데... 그렇게 웃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쓰고나니 왠지 서로에게... 또 스스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군요.


질문

박민규 작가님께 천명관 작가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답변

'더 비트' 제임스 플로렌스 알겐하임 쥬니어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러면 또 제임스 플로렌스 알겐하임 쥬니어에 대해 검색도 하고 하시겠지만... 하지마세요, 제가 막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쓴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평소 이 사람이 어떤 존재구나, 라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만납니다. 그리고 뭐... 이런저런... 예컨대 인간이나... 세상에 대한 얘기 같은 걸로 시간을 보내고 하는 겁니다. 세상은 넓고 인간은 많지만... 그래도 막상 그런 얘길 나누려 들면 나눌만한 인간이 드물다는 건 다들 알고 계시겠죠? 다만 질문의 뜻을 그는 어떤 사람인가... 로 해석한다면 두 갈래로 나누어 답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은 인간 천명관에 대해... 그리고 그와는 전혀 별개인 작가 천명관에 대해서입니다. 일단 그는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매우 논리적이고, 또 예민한 성격입니다. 상처를 잘 받구요... 또... 어릴 때 불주사를 맞아서 그런지 외로움을 많이 탑니다. 그리고 매우 보편적인 사람입니다. 보편적으로 소화기관이 약하고 본인 말로는 차분히 뭘 다루지 못해 기계 같은 건 손만 대면 고장이라고 하더군요. 또... 행정이나 서류작성, 이런 거에도 취약합니다. 술을 전혀 못마시구요, 그러면서도 술값 계산을 얼마나 재빨리, 또 탁월하게 해치우는지 이거야 원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매우 정갈합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하기엔 아아, 또 이거야 원 소리가 나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뭐든 눈이 높구요, 입도 까탈스럽습니다. 한번은 제가 맛없는 커피를 사준 적이 있는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이러는 겁니다. “이 커피엔 영혼이 없다” 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맛이 없어도 그렇지... 라며 저는 스푼으로 커피를 휘젓고 또 휘저었습니다. 혹시나 숨어있는... 다만 물벼룩만한 커피의 영혼이라도 건질 수 있을까 해서 말이죠. 그후로 가끔 그가 손수 드립해서 주는 커피를 마실 때마다 제겐 그런 습관이 생겼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샅샅이 커피를 휘저어보는... 네, 아무튼 그렇습니다.


작가로서의 천명관을 말하자면... 그는 매우 커다란 엔진을 가진 작가입니다. 그의 문장이 내는 배기음도, 또 리듬도 여느 작가들과는 그래서 확연히 구분될 수밖에 없는... 그런 작가입니다. 이야기의 적재량도, 그 이야기를 구동하는 힘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삼촌 브루스리>를 쓰기 전에 들었던 말이 생각나는군요. 어느날 그가 그랬습니다. 이번엔 개인사를 다룬, 아주 소소한 얘기를 하나 쓸까 해. 그리고 소소하게... 3000매 분량의 소설을 쓰더군요. 이거야 원, 아무튼 여러모로 그는 절대 보편적인 작가가 아닌 것입니다. 자동차로 치자면 커다란, 컨테이너 두어개쯤은 끌고있는 트럭과 같은 느낌이랄까요? 아무튼 그래서 시내주행이 힘듭니다. 뭔 놈의 신호가 이리 많고, 이를테면 학교앞 횡단보도라든지... 전봇대는 왜 이리 많고, 적재량 검사는 또 자꾸만 해대는지... 하여간에 아아 피곤해, 외곽으로 뻗은 산업도로 같은 델 달려야 맘이 편안한 그런 작가인 셈입니다. 해서 다시 박민규 작가님께 천명관 작가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밤은 길고, 이 도로는 끝이 없고... 먼지는 날리고, 내가 모는 트럭은 덜컥이고... 보이는 건 달 뿐인데... 어디선가, 또 누군가가 달리는 소리... 보이진 않아도 엔진소리가 들린다면... 좋겠죠? 혹은 기름이 떨어져 사막 한 복판에 있는 허름한 주유소, 같은 곳에 차를 세우고 휘발유를 넣고 있는데... 아, 그 차구나 싶은 트럭이 들어오고... 그래서 나란히 주유를 하며 앞바퀴 바람이 좀 빠진 것 같다는 둥, 행선지가 어디냐는 둥, 또 밥은 먹었냐는 둥... 뻘츰하니 담배라도 피워 물었다 이봐 댁들, 정신이 있는 게야 없는 게야? 배나온 주유소 사장이 버럭 소리라도 지르면... 거 참 되게 그러네? 라며 개똥같은 주유소 이거 다 타봐야 얼마라고 그래? 깐죽거리는 것도 다... 기나긴 운행(運行)의 한 풍경이 아니겠느냐, 밤이 깊어 보이지 않을 뿐 실은 함께, 구름도 저 하늘을 흐르고 있겠지(雲行)... 생각도 해보며, 또 까짓 거 얼마야? 카드를 던져줬는데 어랏 이 배불뚝이 새끼가 피식 쪼개며 이 카드... 이거 지급 정지네? 소릴 듣고 그럴 리가 없는데, 급히 돈이라도 빌리거나... 혹은 짝짜쿵 장단이 맞아 사장을 폭행, 기절시키고 현금지급기를 털어 도망치는... 그러다 부르릉, 시동을 걸며 이봐 이름이라도 알자구? 물어보면 나? 내 고향에선 다들 '더 비트' 제임스 플로렌스 알겐하임 쥬니어라 부르지 조낸 긴 이름을 둘러대고, 다시 말해 그렇다면... 하고, 말입니다. 어랏, 그런데 뭘 물어 보신 거죠?

질문

박민규 작가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천명관 작가의 문학은 어떤 문학입니까?

답변

뭐, 문학에 대해선 제가 모르구요. 다만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작가에겐 고래와 같은 재능이 있고, 그것은 언젠가 수면을 박차고 뛰어올라 잠시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마치 BBC의 해양다큐에서 보듯... 말이죠(특히 혹등고래의 점프는 압권이죠). 그리고 고래는 물속으로 침잠합니다. 이따금 수면을 가르는 등지느러미... 또 솟구쳤다 물속으로 사라지는 꼬리를 보여주며 말이죠(그렇습니다, 고래의 삶도 운행이 아닐 수 없는 겁니다). 지금 떠오른 것이 다만 지느러미라고 해서 고래가 축소된 것이 아니며, 또 솟구친 것이 꼬리라는 이유로 변모한 것이 아니란 얘기를 꼭 드리고 싶습니다. 클래스란 것은 영원하며, 다만 자신의 길을 갈 뿐이며... 해서 그 길이 천명관이라는 한 사람의 작가를 증명할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를 지켜봐 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또 많은 박수가 그에게 쏟아지기를, 역시나 바라는 마음입니다.

질문

천명관 작가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시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왜 그 작품을 좋아하시나요?

답변

아마 대부분이 <고래>를 좋아하실텐데... 저는 못지않게 <프랭크와 나>란 단편을 좋아합니다. 이유는 그것이 제가 읽은 천명관 형의 첫번째 글이기 때문이고, 뭐랄까... 아주 작은 씨앗 같은... 천명관 설(說)의 유전자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령화 가족>도 좋아합니다. 그 소설은 한동안 운행을 중단했던 그를, 다시금 원고지 앞에 앉게 한 고마운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늘, 실은 제가 가장 좋아할 그의 작품은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질문

천명관 작가님은 현재 솔로이십니다. 천명관 작가님이 솔로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답변

예스24 때문입니다. 예스24 때문이라구요(그 이유를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거야 원... 뭐 어쨌거나 저로선 그런 상상을 해봅니다. 즉 언젠가... 사인회를 마친 천명관 형으로부터 이런 편지가 불쑥 제게 배달되어 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메일의 제목은 <자랑질>. 보낸 시각은 새벽 2시. 그리고 편지 속엔 한 여성독자와 찍은 사진이 들어있고... 그 아래엔

그녀가 사인을 받으러 왔을 때, 나는 왠지 모르게 그냥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리고 소설을 좀 더 잘쓸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래서 얼굴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이제껏 만난 여자 중에 최고의 미인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을.
사진의 제목은 '그녀를 만났다'가 어떨까 싶다.

이런 내용이 붙어있다면 어떨까... 상상해보는 것입니다. 뭐, 그랬으면 좋겠다는 얘깁니다.

질문

천명관 작가님이 언젠가 꼭 쓰셨으면 하고, 바라시는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입니까?

답변

간결히 말해 오직, 천명관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

질문

천명관 작가님과 언젠가 꼭 하고 싶은 것이 있으십니까?(백두산 등반 같은..) 그것은 무엇이고, 왜 하고 싶으신지요.

답변

백두산 등반만 빼면 뭐든 해도 좋지 않겠나, 생각이 드는군요. 실은 둘 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비행기 타는 것도 싫어하고... 뭐, 가끔 그런 얘기를 나누긴 합니다. 이를테면 비비킹이나 에릭 크렙톤이 죽기 전에 크로스로드 기타 페스티벌을 보고 와야 하는 게 아닌가(둘 다 블루스를 좋아합니다), 또 머리가 희끗해지면 그간 책을 읽어주신 독자들... 함께 늙어가는 친구들을 초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더불어 참 조촐하고 소박한... 블루스 공연이라도 함께 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천명관형의 기타는 깁슨 커스텀샵 ES335 체리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은 풍경은 다음과 같은 것이겠죠. 즉 둘 다... 이제 더는 쓸 얘기가 없어, 그러고나니 할 일이 없네? 무료한 노인이 되어 뭐 하루 따뜻한 봄볕이라도 드는 날에... 뚜벅뚜벅 지팡이를 짚고나와 커피라도 한 잔 마시는... 말하자면 요샌 영혼이 담긴 커피를 도통 맛볼 수가 없다니깐... 말도 안되는 잔소릴 늘어놓으며... 창밖을 오가는 시내버스나 택시, 라도 쳐다보면서... 그래도 어쨌거나 더는 쓸 얘기가 없어 편안한 얼굴로... 앉아 잡담이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야기를 모두, 남김 없이 쓸 수있는 작가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날이 온다면, 또 혹시나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저희를 알아보고 기억해주는 독자가 계신다면... 초라하고 무료한 노인들의 주머니를 털어 커피를 주문해 드리겠습니다. 써놓고보니 그저 이렇게 쓰는 것만으로도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군요. 그 커피에 영혼이 담겼을지 어떨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잘 늙어가겠습니다. 예스24의 독자분들 역시, 파이팅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