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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흔들리는 땅위에서 죽음을 향해 웃어보다.

by 아프로뒷태 2012. 7. 19.

 


 

 

 

 

오래전 이 사진을 캡쳐해두었다. 이제야 사진을 꽃으로 불러본다. 이 사진은 현재 전세계적으로 활동중인 지진 발생률을 나타낸 것이었다. 이 사진을 보고 불현듯, 몇 년 전 일본의 쓰나미가 떠올랐다.  쓰나미 소식을 들었던 날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래,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당시 하루하루가 악몽이었다. 인간이 가진 축복이자, 재앙인 기억의 일부를 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던 중이었다. 악몽을 잊기 위해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냈다. 정말이지 혼이 쏙 빠져 나갈 만큼 분주하게 지냈다. 그래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유로움과 느림, 은미, 따위는 정신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그 날은 금요일이었다. 그날 나는 냉수 한 잔 여유롭게 마실 겨를도 없이 오후를 분주하게 보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왔다. 저녁을 먹기 위해 식사 준비를 했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밥솥에서 빛이 바랜 밥을 한 주걱 떴다. 식탁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속에서 거대한 파도가 밀려왔다. 쓰나미였다. 쓰나미가 몰려왔다. 일본 열도를 삼키는 쓰나미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날 쓰나미는 낮에 발생했다. 그리고 속보로 한국에 알려졌다. 하지만 나는 저녁 8시가 되어도 그 사실을 몰랐다. 쓰나미가 온 줄도 모르고 일에 열중했다.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위해서 일에 열중하기만 했다. 일본은 한국과 시차가 거의 나지 않는다. 아니 시차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쿄와 한국 시간은 같다. 그렇다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누구는 쓰나미에 휩쓸려가거나 쓰나미를 피해 괴성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을 때, 나는 건물속에서 사람들과 일에 빠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아, 그럴 수 있구나. 그래, 그럴 수 있겠다. 이게 양자학으로 설명이 되려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 설명이 되려나? 무엇으로 설명이 되려나? 어떻게라도 설명이 되려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날 밥상에 숟가락을 놓고 멍하니 뉴스를 보았다. 뉴스에 시선을 향한 채, 몇 분 동안 멍하니 있기는 처음이었다. 고단했던 하루를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와 밥상에서 밥을 먹는 나는, 반대편에서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에 휩쓸려 죽음으로 내몰린 이들과 무엇이 다른가를 생각했다. 인생이란 살아있어도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이 아니던가. 단지 죽음을 직면하지 못할 뿐, 죽음은 언제나 우리의 삶과 함께 진행되어 왔다. 노령화 자체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니... 나는 불현듯 자신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만, 더 즐겁게 살아주지 못한 것 같아서. 열심히 노력한다고 했지만, 더 짜릿하게 인생을 즐겨주지 못한 것 같아서.

 

중년과 노년의 안락과 평화를 위해 달리고 달리는 이십대와 삼십대의 삶, 과연 안정된 경제력을 마련하는 것이 인생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원한 답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살아온 것은 아닌지.

 

궁색한 변명은 필요없고 지금부터라도 자신이 웃는 모습을 더 많이 만들어가야겠다. 

 

웃는 나, 

흔들리는 지구위에서도 행복한 나,

죽음이 몰려와도 행복한 나,

침몰해도 행복한 나,

 

어제 저녁까지 웃지 못한 나에게 내리는 벌칙이다.

이제부터 웃고, 행복한 활동을 진행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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