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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향기

제오르제 바코비아 , 루마니아 시인, 상징주의 시인

by 아프로뒷태 2012. 7. 6.

보헤미아


눈이 내려와 앉는다.

눈이 내린다.

나는 잠들어 있다.

들판이 펼쳐지는

거리의 끝에서

너를 만나고자 보낸

오랜, 세월이 있다.

너, 겨울아,

더 아름다워진 것

같구나.

단지 까마귀들만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친구와 함께

집에 머물라고.

나는 다시 도시로 들어갔다.

너의 창가에서

눈은 전기 불꽃을

일으킨다.

밤이 다가온다.

나는 책을 읽는다

한 겨울밤처럼.

 

 

 

겨울의 납


세속의 눈이 내린다, 고요함과 잘 어울린다

하얀 도시 사이로 때늦은 바람만이 스친다

눈이 내린다, 마치 모든 것이 죽고 모든 것이 되살아난 것처럼.

 

얼어붙은 창가에는 고서들이 잠들어 있다.

 

건물들 사이, 저 먼 탑들 너머로

밤새도록 무형의 눈이 내린다, 지폐와도 같은 눈이 흩날린다

오직 바람만이 홀로 다른 음조로 울고 있을 뿐이다.

 

해방구 속으로 나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단 한번도 내린 적이 없는 거대한 눈이 이 넓은 도시에 내린다

심각한 영화 속으로 사회적 갈등이 쏟아지는 것처럼, 눈이 내린다

얼어붙은 대로 위로 바람이 너털웃음을 자아내는 동안.

 

하지만 누가 이 슬픈 이야기를 설명해줄 수 있을까?

 

 


숯이 된 꽃들, 검은 심연

검게 그을린 금속 관,

숯이 된 수의,

깊은 어둠, 깊은 심연

 

꿈의 불꽃이 동요한다...... 검은 심연

숯이 된 사랑이 연기에 그을린다

그을린 깃털의 내음, 그리고 비가 내린다

검은, 오직 검은 심연

 

 

(제오르제 바코비아 시선집, <납>, 문학과지성사, 2007)

 

 

 

 

 

루마니아 현대문학사를 대표하는 시인 제오르제 바코비아
국내에 최초로 번역, 소개되는 그의 독창적 시 세계 ‘바코비아니즘’

 

루마니아 최고의 상징주의 시인 제오르제 바코비아의 시선집이 2007년 5월 22일 시인의 50주기를 맞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바코비아는, 초기엔 프랑스와 벨기에의 상징파와 데카당스 시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시를 논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독창성’일 만큼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 세계를 창조한 시인이다. 후대의 비평가들은 바코비아 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러한 시 세계를 ‘바코비아니즘’이라 부르고 있다.

마체돈스키A. Macedonski, 페티커Ş. Peticǎ 등이 주도했던 루마니아의 상징주의 시는 지방 소도시의 피곤에 지친 평일의 추악함, 추악한 상업 사회를 살아가는 프롤레타리아의 비참함을 주로 묘사했다. 바코비아 시의 무대도 지방의 작은 도시이다. 장례식장, 쓸쓸한 공원, 황혼의 도시, 군대의 팡파르, 도살장, 주저앉을 듯이 초라한 카페와 선술집, 부조리한 몸짓을 하며 의미 없이 방랑하는 사람들이 그의 시에 등장하는 소품들이다. 이러한 소품을 빌려 그는 고독과 외로움, 사회로부터 저주받은 시인의 좌절과 고통, 죽음과 절망에 대한 강박 관념, 프롤레타리아의 비참함을 노래한다.

납으로 된 관들이 깊이 잠들어 있다
납으로 된 꽃들과 수의도 역시
납골당 속에 홀로 서 있다 그리고 바람이 분다
납으로 된 왕관들이 삐거덕거린다.

납으로 된 나의 사랑이 돌아누워 자고 있다
납으로 된 꽃들 위에서…… 그리고 나는 소리치기 시작했다
시체 곁에 홀로 서 있다 그리고 춥다
납으로 된 날개들이 축 쳐져 있다.
― 「납」 전문

바코비아의 대표작인 「납」은 시인이 젊은 시절 납으로 된 관과 꽃으로 장식된 공동묘지의 납골당을 방문하면서 받았던 깊은 인상을 표현한 시다. 좌절된 사랑(“납으로 된 나의 사랑”)과 동경(“납으로 된 날개”)을 갖고 있는 시적 자아에게 납은 쇄도하는 죽음보다도 더 잔혹한 전체적 피폐함을 암시한다.

바코비아 시는 ‘허무적 우울’을 기저로 삼고 있다. 그의 시에서 방이나 무덤 등의 내부 공간은 죽음, 탄생과 연관된 기원의 형태를 나타내며, 외부 공간은 존재의 가장자리에 있는 인간 조건을 상징한다. 그의 공간은 항상 어둡고 황량하고 안개로 덮여 있다.

당신을 집어삼킬 듯이, 무겁고 축축한 밤이다.
안개 속에서―빛 하나 없이 붉고 지친 채
연기에 그을린 채, 타고 있는 슬픈 가로등
마치 더럽고 눅눅한 선술집에서처럼.

도시의 변두리에서 밤은 더 어두운 것 같다
집으로 슬픔이 범람한다.
들어보렴, 갈라진 낡은 벽 틈으로 새어 나오는
쉬고 마른 기침소리를.
― 「소네트」 부분

바코비아는 색채의 암시를 빌려 감정의 상태를 전달하기도 한다. 바코비아가 구사하는 색채는 시인의 의도한 다양한 내면의 상태를 훌륭하게 대변해주는데, 때때로 감정의 강도를 배가시켜 환상적이고 환각적인 세계를 표출해내기도 한다. 색채는 바코비아의 독창적인 시 예술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공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자주색, 검은색, 흰색, 붉은색 등은 병적 강박 관념의 수단으로서 사물을 공격하며, 모든 풍경을 부식시키고 얼룩지게 한다. 흰색은 검은색에 대한 적대적 색채라기보다는 오히려 검은색이 가지는 절대적 부정, 소멸의 심연과도 같은 이미지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 보색 잔상(補色殘像)의 경우를 보여주는 이 두 색은 서로 합쳐 물질 세계의 절대적 소멸을 보여주는 ‘납’의 색인 회색으로 탄생하기도 한다. 흰색, 회색, 검은색은 무채색의 스펙트럼이며, 허무와 침묵 그리고 종말의 색을 대신하기도 한다.

하얀 나무들, 검은 나무들
고독한 공원 안에 헐벗은 채 서 있다
비탄과 장례의 장식
하얀 나무들, 검은 나무들

공원에는 애통함이 천천히 울려 퍼진다
― 「장식」 부분

불길한 전조의 울음이 창가 위로 내려앉는다
그리고 이 세상 위로 겨울의 납을 떨구어놓았다
“까마귀 소리를 들으렴!”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납의 무거운 빛줄기 사이로
회색 눈이 내린다.
― 「회색」 부분

붉은색은 피를 환기시키는 죽음의 격정이자 생명을 자연으로부터 일탈시키는 매개체가 되며, 자주색은 소와와 방황의 상태, 환각 등을 암시하는 색, 그리고 노란색은 떨어지는 낙엽이나 병색이 완연한 소녀의 창백함 같은 ‘절망의 색깔’이다.

도살장의 뜰 안에 폭설이 내린다
뜨거운 피가 실개천을 이루며 흐른다
동물의 피로 가득한 눈
슬픈 스케이터의 머리 위로 눈은 계속해서 내린다
― 「겨울 풍경」 부분

자줏빛 가을의 황혼……
저 멀리, 두 그루의 포플러 나무가 희미한 윤곽 속에 나타난다
자줏빛 차림새의 십이 사도
도시는 온통 자줏빛.
― 「자줏빛 황혼」 부분

잎들이 노랗게 물드는 이 가을에,
폐병 환자들에게 그 어떤 새로운 놀라움이 다가오는지조차 모르는 이 가을에,
술에 취한 채 비를 맞으며, 언젠가부터 한번도 가보지 않은
그대의 창가를, 늦은 시간 천천히 동전으로 두드린다
― 「가을의 히스테리」 부분

제오르제 바실리우George Vasiliu라는 본명을 가진 바코비아는 필명의 기원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시인의 고향인 바커우가 옛날에는 로마식으로 바코비아라 불렸을 것이라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신(酒神) 바커스Bacchus의 바코Baco에 길의 의미하는 라틴어 비아via를 붙여 ‘바커스 신의 길’을 수없이 지나왔다는 의미라고 한다.

바코비아는 1916년 출간한 첫 시집 『납』을 비롯하여 모두 다섯 권의 시집을 출판하였고,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후기 시와 유고 시를 포함하여 340여 수의 시를 발표하였다. 이번에 출간한 이 시선집은 옮긴이가 고른 시인의 주요 작품 236편을 수록하고 있다.

 

 

납(1916)

납 | 파스텔 | 장식 | 황혼 | 호상에서 | 회색 | 소네트 | 가을의 황혼 | 겨울 풍경 | 정원에서 | 창백한 은둔자 | 가을을 향해 | 자줏빛 황혼 | 흑 | 12월 | 노이로제 | 해빙기 | 멜랑콜리 | 가을의 히스테리 | 드물게 | 슬픈 저녁 | 가을의 노트 | 비탄 | 오, 황혼 | 겨울의 황혼 | 고풍스러운 황혼 | 풀비스 | 오븐 | 가을 | 홀로 | 피곤한 채 | 황혼 | 다르게 | 최후 | 파노라마 | 겨울의 납 | 밤의 파편 | 가을의 납 | 라르고 | 비가 내린다 | 봄의 히스테리 | 공원에서 | 이른 아침에 | 거울 속에 비친 시 | 백 | 가을의 히스테리 | 겨울의 납 | 밤의 파편

노란 불꽃(1926)

노란 불꽃 | 홀로 | 황혼 | 자정 | 바람 | 세레나데의 메아리 | 밤 | 장례 행진곡 | 유령 | 발레 | 노동자의 세레나데 | 파스텔 | 노란 불꽃 | 잠으로 빠져들면서 | 밤의 파편 | 봄의 히스테리 | 봄의 노트 | 여름날의 황혼 | 팡파르 | 텅 빔 | 밤의 파편 | 겨울에 | 그림자 | 겨울에 | 어느 처녀에게 | 가을의 노트 | 가을의 왈츠 | 밤의 파편 | 눈이 내린다 | 위생학 | 그리고 눈이 내린다 | 가을의 히스테리 | 가을 | 밤의 파편 | 이야기 | 집들 사이로 | 추위 | 아침 | 로맨스

너희와 함께(1930)

너희와 함께 | 고등학교 | 산문 | 위기 | 산문 | 자아 | 풍요 | 구두 | 황혼 | 폭풍 | 찬미가 1 | 찬미가 2 | 겨울의 대화 | 밤의 파편 | 헛소리 | 찬송가 | 대조 | 발라드 | 황혼 | 피아노 | 신비 | 오, 홀로 | 제단 | 마지막 시 | 버려진 무덤 | 비문 | 충분 | 언덕에서

마음으로부터의 코미디(1936)

후회 | 내일처럼 | 혼자일 때 | 계절로부터 | 봄을 향하여 | 겨울에 | 환희 | 세레나데 | 침묵 | 계절로부터 | 분노의 날 | 로맨스의 메아리 | 강가에서 | 용기 | 때늦은 메아리 | 지나가는 구름 | 파스텔 | 포기 | 석양 | 로맨스의 메아리 | 잠 속에 | 황혼 | 사랑합시다 | 기억 | 갑자기 | 지나가는 날들 | 애가 | 시 | 가을의 끝 | 허무 | 진실 | 오래전에 | 전설 | 노래 | 그리고 모두 | 여름밤 | 파스텔 | 행복으로부터 | 발라드 | 남쪽 여름 | 휴식

부르주아의 시(1946)

그렇게 저 너머 | 훈련 | 관념 1 | 관념 2 | 관념 3 | 노동절 | 공부 | 도시의 가을 | 날이 없는 | 포도주를 위한 시 | 도시의 미학 | 자오선 | 새로운 무 1 | 새로운 무 2 | 방문 | 나른한 오후 | 보다 높이 | 마지막 시간에 | 지속적 유동성 | 밤의 동면 1 | 밤의 동면 2 | 현대 1 | 현대 2 | 주석 | 예술에 관하여 | 보헤미아

후기 시와 유고 시

민요 | 그리고 만약 | 에포드 | 의고체 | 저녁 | 내가 예술가였다면 | 민요 | 고대 이집트 | 코지토 | 로맨스 | 피, 납, 가을 | 소음 | 겨울에 | 반영 | 아무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 오래된 시 | 도시의 밤 1 | 도시의 밤 2 | 현실 시 | 민요 | 바코비아에서의 시 | 중간 시 | 단순한 스타일 | 그렇게 | 마을에서 | 단순한 스타일 | 기차에서 | 바니타스 | 파스텔 | 연 | 공성 | 암흑 도시 | 세계의 시 | 우울 | 겨울에 | 일기 | 공부 | 평화 |무도회의 사건 | 파스텔 | 황혼 | 순간 | 때늦은 시 | 망년회 | 경계에서 | 망년회 | 봉토 | 이상적인 시 | 세레나데 | 환상 시 | 한 어릿광대에게 | 죽어가는 가을 | 고독, 나는 네게 원하지 않았다 | 본제에서 벗어난 시

 

 

 

제오르제 바코비아 George Bacovia

시인

(1881~1957)
1881년 9월 4일 몰도바 지방의 작은 도시 바커우에서 태어나 이아쉬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사서, 고등학교 보조 미술 교사, 사무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시 창작을 했다. 1899년 문예지 『문학인』에 「그리고 모두」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1916년 첫 시집 『납』을 출간하였으며, 이후 1926년 『노란 불꽃』, 1930년 『너희와 함께』, 1936년 『마음으로부터의 코미디』, 1946년 『부르주아의 시』 등의 시집을 차례로 출판하였다. 바코비아는 시의 독창성에 대한 새로운 기준과 내용을 보여준 루마니아 최고의 상징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방 소도시에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 허무적 우울, 죽음과 절망에 대한 강박 관념을 새로운 형식의 시로 성공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바코비아만의 이러한 독창적인 시 세계는 후대의 비평가들에 의해 ‘바코비아니즘’이라고 명명되었다. 1923년 『납』으로 루마니아 문화부가 수여하는 ‘그해의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25년에는 루마니아 작가 협회상을, 1934년에는 국가 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57년 5월 22일 아침 부인에게 “어-두-움이 밀려온다”라는 짧은 속삭임을 남기며 일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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