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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심보선의 생각

by 아프로뒷태 2012. 4. 15.

<피로 사회>(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가 베스트셀러이긴 한가 보다. 최근 이런 저런 자리에서 책에 대한 토론을 접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은 서점에서 가장 쉽게 확인이 됐다. 바보 같이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을 잃어버려 서점에 가서 다시 책을 사야 했다. 그런데 서점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선명한 보라색 표지의 책이 수북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서평을 쓴 책-기껏해야 대여섯 권-중에 가장 베스트셀러인 것 같다. 내가 <피로 사회>의 서평을 쓸 예정이라 하니까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보다 얇고 쉬워서 사람들이 좋아한다더군." 책을 보니 정말 얇았다. 또 읽고 보니 비교적 쉬웠다. 그러나 얇고 쉬운 책이라고 해서 많은 이들이 읽는 건 아니다.

그러니 <피로 사회>가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먼저 '피로 사회'라는 용어에는 어떤 호소력이 있다. 그 호소력은 '피로'라는 말을 '과로'라는 말과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 <피로 사회>(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과로라는 말은 노동의 양과 관계된다. 정상보다 넘치는 노동을 과로라 칭하는데, 이 용어의 뉘앙스는 매우 물리적이어서 자아가 느끼는 심리적, 신체적인 감각 요소는 결여하고 있다. 반면에 피로는 감각적인 용어이다. 피로라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아, 나도 정말 피곤한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감각적 용어에 '사회'라는 단어가 붙어 있다. '피로 사회'라는 신조어는 피로라는 감각이 개인을 넘어서 집합적이고 체계적인 수준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하지만 이 명증성은 곧바로 또 다른 모호함으로 이어진다. 만약에 '과로 사회'라는 용어가 있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노동의 총량이 물리적으로 과도한 사회를 뜻할 것이다. 그 사회는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잘못된 사회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높은 노동 강도와 장시간의 노동 시간을 강요하고 허용하는 기업과 정부에 있다.

 

반면 '피로 사회'에서는 노동량의 기준이나 문제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할 수 없다. 나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피로하다. 그런데 피로한 것이 과연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인가? 만약 문제라면 그것은 도대체 누구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인가?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피로 사회라는 용어에는 명증성(!)과 모호성(?)의 이중 플레이가 야기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1989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데루오카 이츠코의 <부자 나라 가난한 시민>(홍성태 옮김, 궁리 펴냄)이라는 책에서는 '과로사'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데루오카는 과로사를 '불행한 일본 사회'의 지표로 보면서 사회적 또는 산업적 재해로 취급하고 있다. <피로 사회>의 저자라면 과로는 '~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나 또는 '~해야 한다'는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규율사회'의 지표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피로는 성과사회, 즉 모두가 '할 수 있다!'라고 외치며 질주하는 긍정 과잉 사회에서 발생한다. 성과사회는 불행한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스스로에게 동기 부여를 하고 능력을 계발하는 사람들의 자기 착취가 피로를 가져온다. 과로가 뭔가 잘못돼서 일어난 문제라면 피로는 반대로 만사가 너무나 잘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다.

 

저자에 따르면 과잉 긍정이 가져오는 자기 착취의 이면에서는 보다 심오한 사회적 비극이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연대의 불가능성'이다. 자기 착취가 '개별화'와 '고립' 속에서 이루어지면서 낙오된 개인들에게 치명적인 병, 즉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 같은 신경성 질환이 생긴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행복해지길 원했고, 그래서 질주했고, 그 과정에서 지쳤고, 그리하여 낙오했다. 누구의 책임인가? 바로 나의 책임이다. 실패한 자기 긍정은 필연적으로 자기혐오와 자기 부정으로 귀결한다. 더구나 애초부터 개별자였던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도 않다.

 

예전에 '할 수 있다'고 외쳤던 나였기에 이제 와서 '이제 더는 못하겠으니 도와줘'라고 말하는 것은 자존감에 더한 상처를 준다. 과거 규율사회에서는 욕망을 금지하고 노동을 강요하는 외부의 주권에 대해, 나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또 다른 '나'들과 함께 '우리'라는 이름으로 연대하고 저항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를 노예로 만든 주권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면 도대체 연대와 저항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사실 <피로 사회>가 수행하는 현대 사회 진단은 매우 예리하고 냉철해서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이 다소 무력하게 들릴 정도다. 예를 들어, 저자가 니체를 빌려와 성과사회에 대한 처방으로 제시하는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라는 말은 오히려 과거의 규율사회에서 엘리트 집단이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교화하기 위해 사용했던 교육학적 수사처럼 들린다.

 

"배워야 한다"는 명령이 규율사회의 교양 교육 뉘앙스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즉 진단은 첨단이지만 처방은 여전히 과거에서 가져온다는 점에서 <피로 사회>의 강점은 확실히 대안 제시보다는 분석에 있다.

 

<피로 사회>는 몇 가지 이론적이고 역사적인 오류도 지니고 있다. 나는 과거는 규율사회이고 현대는 성과사회라는 저자의 이분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장자크 루소는 이미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인은 항상 활동적이며 땀을 흘리고 돌아다니고, 보다 힘든 일을 찾아 계속 신경을 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일하고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죽음을 서두르는 일도 있으며, 불후의 명성을 얻기 위해선 현세를 버린다."

 

루소는 근대 사회 자체를 이미 성과사회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루소가 보기에는 자기 착취를 하는 사람들은 사회 구성원 전체가 아니라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자기가 미워하고 있는 권력자나 경멸하고 있는 부자들에게 아첨하면서 그들에게 봉사하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천함과 그들의 보호를 으스대고 자랑한다. 그리고 자기의 노예 상태를 자랑하고, 거기에 관계되는 명예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일을 모멸하여 말하는 것이다."

 

노예 상태임에도 주권자인양 영광과 명예를 추구하던 사람들은 이미 루소 시대에도 존재했다. 그들은 누구인가? 아마도 루소 자신이 속해 있던 신흥 부르주아, 즉 성공과 승리를 위해 질주하는 새로운 계급이었을 것이다. 과도한 긍정성으로 자기를 착취하는 계급은 어느 시대나 존재해 왔다.

 

그래서 나는 성과사회가 규율사회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성과사회가 언제나 규율사회의 일부였다고 본다. 차이가 있다면 그 구성원들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구성원들이 과거의 규율사회에서는 신흥 부르주아였다면 현대의 규율사회에서는 바로 중간-고위 관리자 또는 중·상 계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피로 사회>의 저자는 성과사회의 주체가 "외적인 지배 기구에서 자유로우며 그것에 의해 노동을 강요당하지도, 착취의 희생자가 되지도 않는다"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종류의 이데올로기는 교육 수준이 높은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 생존보다는 소위 자아실현을 위해 매력적인 직업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심리적 자원이다.

 

나는 <피로 사회>의 두 번째 호소력이 바로 이들 특정 계층 및 계급이 자기 진단을 할 수 있는 프레임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서 자발적으로 신청한 '프로젝트'를 따면 행복하고, 그걸 수행하다 몸과 마음이 소진되는 기업 팀장, 대학 교수, 예술가 등이 "옳거니!" 무릎을 치며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일 것이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성과사회의 긍정성 이데올로기는 특정 계급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행복에의 욕망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등장과 함께 일종의 강박처럼 전체 사회로 확산되는데, 그럼에도 그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자원은 계급별로 상이하게 배분되어 있다. 따라서 자원이 부족한 피지배 계급에게 긍정성은 오히려 "행복해야 한다"는 명령, "불행하면 안 된다"라는 금지의 형태로 작용한다. 피지배 계급에게 긍정성은 규율사회의 새로운 외부적 강제로, 언제나 소외된 형태로 부과되는 것이다. 규율사회의 피지배 계급은 성과사회의 구성원들처럼 "행복할 수 있다"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대신에 그들은 이렇게 토로한다. "행복할 수 없지만 행복해야 한다. 저들처럼. 제기랄."

 

<피로 사회>의 저자는 현대 사회 전체를 성과사회로 규정하고, 특정 계급의 자기 인식을 사회 구성원 전체의 자기 인식으로 환원해 버린 나머지, 규율사회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정치적 분쟁의 장소들을 간과한다. 저자는 말한다.

 

"사회적·정치적 사건은 더 이상 이념들 사이의 분쟁이나 계급 간 분쟁으로 규정될 수 없다. 그런 것은 이제 거의 흘러간 옛 노래처럼 들릴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이 분쟁들은 흘러간 옛 노래가 명백히 아니다. 시선을 조금만 다른 방향으로 돌리면 성과사회와 다른 다이내믹이 작동하는 규율사회적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 거기서는 여전히 배제하고 금지하는 폭력과 그에 맞서는 연대와 정치적 분쟁이 이어진다. 이 끝나지 않는 분쟁의 과정에서 몫 없는 이들, 목소리를 빼앗긴 이들이 연대의 끈을 놓치고 고립되었을 때 심각한 자기 상실과 소외를 겪는다.

 

따라서 규율사회와 성과사회를 과거와 현재로 나누는 이분법은 단순히 이론적인 착오에 그치지 않는다. 그 이분법은 '지금 여기'의 현대 사회(한국과 유럽 모두)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들을 외면하고, 그 싸움의 주체들-비정규직, 정리 해고자, 철거민-이 겪는 우울증, 그들을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통제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좌초됨으로써 얻게 되는 병"에 대해서 괄호를 쳐버린다. 그리하여 저자는 성과사회라는 프레임을 일반화하지 않았더라면 도처에서 발견했을 배제와 금지로 인한 우울증을 과거의 것으로 치부하면서 "긍정성의 과잉이 지배하는 성과사회에서 더 이상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고 단정 짓고 만다.

 

마지막으로 에피소드 하나를 전하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서점에서 <피로 사회> 책값을 내려고 줄을 서있는데, 바로 앞의 한 젊은 여성이 계산대에 올려놓는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견디면 이긴다 : 직장인 고난 극복 가이드>(지윤정 지음, 현태준 그림, 퍼플카우컨텐츠그룹 펴냄)라는 책이었다.

 

<피로 사회>의 시선으로 보자면 낡은 규율사회의 프레임으로 직장 생활을 오진하는 책이다. 그런데 오진이라고 할지라도 그 책을 사는 젊은 여성은 어쨌든 '아픈' 사람이 아닌가? 그 여성이 긍정성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면 왜 그런 제목의 책을 샀겠는가? 호기심이 생겨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책 소개에 이런 말이 나왔다.

 

"신입사원부터 이제 막 리더가 된 중간 관리자까지도 딜레마에 빠질 때마다 견디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비 취업생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 지음, 쌤앤파커스 펴냄)를 읽고, 신입사원에서 중간 관리자까지는 <견디면 이긴다>를 읽고, 그 위의 간부는 <피로 사회>를 읽고, 더 위의 CEO는 피터 드러커와 워런 버핏과 안철수를 읽겠지? 아니다. 예비 취업생들은 그 책들을 모두 읽을 것이다.

아프니까 다 읽는다. 긍정적이어서가 아니라 불안해서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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