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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향기

비우티풀,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감독, 하비에르 바르뎀,

by 아프로뒷태 2012. 4. 1.

 

 

 

 

 

<비우티풀>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시의 구조로 비유하면 수미쌍관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 영화에서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하얀 눈이 쌓인 설경(雪景)에서 유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은 한 남자를 만난다. 유스발은 남자가 건네는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며 짧은 대화를 나눈다. 두 사람은 바람소리, 파도소리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무언가를 보고 떠난다. 그들이 떠난 곳은 카메라 앵글에 잡히지 않는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천국일까? 지옥일까? 그것은 영화를 본 사람들마다 다르게 평가될 것이다.

 

 

<비우티풀>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보고 나면 박찬욱의 <올드보이>가 떠오른다. 기억하시려나? <올드보이>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그 영화 역시 설경(雪景)에서 시작된다. 오대수는 자신을 15년 동안 가둔 이우진에게 복수를 한다. 하지만 딸과의 하룻밤으로 근친상간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지독한 형벌이다. 살아도 지옥에서 사는 듯 괴로운 일일 것이다. 결국 오대수는 자신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최면술사를 찾아간다. 숲속의 하얀 눈밭에서 오대수는 최면술사를 만나 지난날을 되새기며 기억을 지운다.

 

 

 

<비우티풀>역시 죽은 유스발이 죽기전의 날로 돌아가, 죽기전에 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말해준다. 그렇다면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이 영화에서 유스발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을까? 전작<바벨>에서 그러했듯 그 주제는 단순하지 않다.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보여준다.

 

 

 

 

 

<바벨>은 옴니버스 형식을 갖추고 있다. 영화는 같은 시간에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고통을 보여준다. 불행과 고통은 각자 따로 발생해도 결국 같은 시간에, 같은 원인으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불행을 겪은 사람들이 서로 몰라도 한 찰라를 통해 사람들의 관계가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양자학 이론으로 접근시켜 생각해볼까 한다. 아니 어쩌면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양자학에 관심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영화를 만들어 놓고 보니, 양자학과 관련된 결과물이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세계나 우주는 결코 독립된 개체일 수 없고 서로 관계한다는 것이 양자학의 핵심이다.

 

 

 

 

그래서 <바벨>은 개인의 불행은 전적으로 개인의 것이 아니라, 세계나 우주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재미있지 않는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은 여러 경우의 수 중에서 선택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비우티풀> 역시 <바벨>과 유사한 구조를 이룬다. 단지, 공간이 달라졌을 뿐이다. <바벨>은 공간이 세계 여러 나라였다면, <비우티풀>은 공간이 한 곳에서 일어난다. <비우티풀>은 ‘바로셀로나’라는 공간에서 스페인(현지인이지만 아웃사이더), 중국인 불법체류자, 아프리카계 밀입국자들이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바로셀로나하면 스페인의 열정과 환상적 도시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고전적 도시와 같은 이미지. 하지만 그곳에도 신자유주의의 손길이 뻗어나가 있다. 신자유주의의 단점 중 하나가 극심한 양극화현상이다. 유스발이 살고 있는 동네는 빈부격차와 양극화 현상이 극심한 곳이다. 그곳은 다양한 국적의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변두리 지역이다. 특히 가난한 자, 실업자, 제3세계의 사람들, 밀입국자들이 몰려드는 지역이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감독은 그 점을 깊이 파고 든다.

 

 

 

 

 

브로커의 두 얼굴. 짝퉁의 세계

내 얼굴도 네 얼굴도 아닌, 중간자의 역할이다. 징검다리 인생이다.

 

유스발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죽은 이의 영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 영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점쟁이나 무당 신분이다. 유스발은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여 그 영혼이 저 세상으로 평안이 떠날 수 있게 도와준다. 또한 유가족과 망자를 연결해주는 브로커 역할을 한다. 죽은 자의 영혼을 보는 일은 유스발에게 공포가 아니다. ‘공짜로 얻은 재능’이다. 그래서 유스발은 돈벌이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일의 문제는 남의 영혼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의 영혼을 보다가 자신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의 죽은 영혼을 만나게 되는 일. 그리고 자신의 영혼까지 만나게 되는 일은 비극적이다. 이것이야 말로 공포이다.

 

 

 

유스발은 제3세계에서 바로셀로나로 온 불법체류자들의 일자리를 알선해주는 브로커 일을 하며 돈을 번다. 짝퉁 가방 공장을 운영하는 중국인 사장에게 물건을 받아 아프리카의 밀입국자들에게 명품 짝퉁 가방을 팔 수 있도록 일을 알선해주고, 그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인 사장이 현지경찰에게 뇌물을 상납하도록 중간다리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현지경찰은 돈만 챙길 뿐 불법체류자들을 돌봐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불법체류자들의 장사가 잘 되는 것도 아니다. 불법체류자들은 짝퉁가방 판매수익금이 솔솔하지 않자, 마약까지 거래하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경찰들은 불법체류자들을 소탕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낸다. 그들중에 유스발의 친구들이 섞여 있게 되고, 유스발은 친구들을 잃게 된다.

 

유스발이 가진 직업은 꽤 흥미롭다. 샤머니스트와 인력 브로커. 두 직업의 공통점은 사람과 사람의 중간자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국적과 성별이 다른 사람과 사람을 관계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유스발의 일은 의미 있다.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 편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사람들끼리 인연을 맺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연결이 의도와 달리 나쁜 결과를 불러일으킬 때도 있다.

 

 

 

 

 

 

제3세계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유스발은 자신의 나라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이방인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하루 중에서 유스발이 만나고 관계하는 사람들은 자국민이기보다는 불법체류자들이 더 많다. 그래서 유스발은 일자리를 찾아 고국을 떠난 제3세계의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터전을 잡을 수 있도록 브로커 역할을 해준다. 그렇다고 무조건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중간에서 자신의 몫을 톡톡히 챙긴다. 아프리카계 밀입국자들이 짝퉁가방을 팔도록 도와주고, 짝퉁 가방은 중국인 사장, 하이를 통해 공급받아 전달한다. 문제는 짝퉁가방을 만드는 사람들이 중국에서 밀입국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중국인 불법체류자들을 건설현장 노동자로 소개해주는 브로커를 한다. 신자유주의가 만든 현대판 노예들의 진풍경이다. 돈의 노예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게 만든 국가와 세상이라니.

 

 

 

 

 

 

죽은 자와 이야기하는 유스발, 샤머니스트

 

유스발은 전립선 말기 암을 판정을 받는다. 그에겐 토끼같은 딸과 아들이 있다. 아내는 조울증이 심각해 헤어져 산지 오래이다. 아이들의 보호자는 유일하게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스발은 자식을 위해 노력한다. 자신이 죽어 아이들이 고아가 되지 않도록 돈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집세가 없어 쫓겨나지 않도록 말이다. 악착같이 돈을 모으다보니, 유스발은 화근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숙소에서 추위에 떨며 사는 중국인 불법체류자들을 위해 히터를 사는데 돈을 아끼려고 너무 싼 것을 사고 그것이 큰 화근이 된다. 아버지로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줄 돈을 모으기 위해, 26명의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가스사고로 중국인 불법체류자 모두 질식하여 죽게 된다. 그 중에는 아이 3명, 여성도 있다. 유스발은 사건이 일어난 곳을 찾아가 죽은 이들의 영혼을 만나게 된다. 영혼들은 지하실의 천장에 매달려 유스발을 내려다보고 있다. 

 

 

 

 

 

 

 

배신과 배반

 

유스발은 불법체류자들의 일자리를 소개해주고 받은 돈으로 먹고 살지만 악덕한 사람은 아니다. 불법체류자들을 도와주면서 자신의 궁핍한 생활을 해결해간다. 그놈의 돈 때문에, 싼 연료기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푼이라도 더 아끼려는 마음에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며 자책한다. 불법체류자들을 도우려는 유스발을 보고 형은 말한다. 그러다 그들에게 한 방 먹는다고. 정작 유스발을 한방 먹인 사람은 바로 유스발의 아내와 불륜을 일으킨 자신이면서 말이다. 형의 말대로 유스발은 죽기전 세네갈에서 온 이기에게 한 방 먹게 된다. 그동안 모은 돈을 이기에게 건네며 아이들의 양육을 부탁하지만 이기는 돈을 갖고 세네갈로 튀었다. 하지만 그날밤 이기는 유스발을 다시 찾아왔다. 유스발은 돌아왔구나. 이기, 하고 반기지만 이기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성기를 잃어버린 남자

 

 

유스발은 전립선 암 진단을 받게 된다. 암이 뼈 속까지 전이된 상태이다.  이는 성기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유스발은 아내에게 남자의 구실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남성의 기능을 상실한 면도 있지만 심리적으로 남편의 기능을 상실하였음을 의미한다. 유스발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알아주면서 살아있는 아내의 영혼을 알아주지 못하는 남자이다.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아내와의 문제가 생기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아내 마람브라의 조울증과 바람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유스발의 아내 마람브라는 극심한 조울증으로 이혼하고 마사지사로 일한다. 마람브라는 유스발 몰래,유스발의 형 티토와 불륜을 저지른다. 마람브라는 애정결핍증세를 갖고 있다. 유스발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지만 그러하지 못했다. 유스발과 자꾸 틀어지고 헤어질수록 마람브라는 애정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남자들과의 섹스로 공허함을 채운듯 하다. 하지만 유스발은 마람브라가 창녀 기질이 다분한 여자라고 치부하며 그녀와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사이라고 결론짓는다. 정작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고 말이다.

 

 

 

 

 

 

 

분열된 가족

 

<비우티풀>은 중국 불법체류자, 아프리카계(세네갈)밀입국자, 남색男色을 밝히고 조울증에 걸린 아내, 동생의 아내와 불륜관계를 벌이는 형과 같이 주목받지 못하고 외면된 사람들, 대가족의 가장이자 아내가 있지만 남자를 사랑하는 중국인 사장 하이, 동성애자 리웨이. 신자유주의시대에서 소외된 계층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특히 바로셀로나라는 공간에서 동서양의 인종이 모여 신자유주의의 병폐인 빈부격차와 양극화를 보여준다. 그들의 삶은 우울하고 피폐하다. 의지할 곳 없으며 분열되어 있다. 감독은 신자유주의로 분열된 사람들이 위로받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가족이라고 제시한다. 불법체류자들은 가족과 헤어지거나 죽음을 맞게 되지만 유스발은 다르다. 유스발은 인력 브로커를 하여 번 돈으로 아빠노릇을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딸과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더욱이 헤어진 아내와 다시 결합하여 행복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결합은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분열된다. 엄마와 아빠의 무관심으로 병들어가는 아이들, 불법체류자들의 돈을 떼어먹는 아빠, 남편을 잃고 남편의 형과 불륜을 일으키는 엄마의 모습은 세계 곳곳에서 국가의 역할을 잃은 불법체류자나 이민자들의 모습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혼돈의 세계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럼에도 부성애를

 

 

유스발은 딸과 아들을 위해 백방으로 뛴다. 아이들이 살아갈 집의 집세를 마련하기 위해. 이는 혼동의 세상에서 가족을 부양하려는 아버지의 부성애를 보여준다. 밖에서 나쁜 짓을 해도 내 자식만은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심리이다. 부조리한 면같이 보여도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신자유주의로 흔들리는 사람들을 구제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것이다. 이 땅의 아버지가 아니라, 국가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국가는 방조하고 아버지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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