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포스팅

[진중권의 아이콘] 서사를 조심하라, 음모론과 ‘뮈토로고스’/ 데카르트를 위한 변명

by 아프로뒷태 2011. 12. 2.

 

[진중권의 아이콘] 서사를 조심하라

음모론과 ‘뮈토로고스’


 

좋아하는 노래 중에 나나 무스쿠리의 <에나스 뮈토스>(Enas Mythos)가 있다. 우리에게는 이 노래가 “어느 봄날 그대와 나…”로 시작하는 패티김의 번안곡으로 알려져 있다. 제목의 ‘뮈토스’라는 말에서 신들의 이야기(신화)를 연상할지 모르나, 그리스어에서 그 말은 그저 ‘이야기’라는 가벼운 의미로 사용된다. 제목의 ‘에나스’는 부정관사. 따라서 ‘에나스 뮈토스’는 그저 ‘어느 이야기’, 혹은 ‘하나의 이야기’를 뜻한다.

아직 과학이 없었다고 주위에 설명해야 할 현상마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세계의 창조, 인간의 탄생, 동식물의 기원, 종족의 역사 등. 그뿐인가? 계절의 교체, 기상의 변화, 죽음의 원인 등, 인간이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은 너무나 많았다. 그때 과학을 대신하여 그 일을 해준 것이 바로 ‘이야기’다. 그때 인간들은 세계에 관한 모든 설명을 ‘이야기’ 속에 담아, 그것을 입에서 입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했다.

허구에서 과학으로

신화와 성서, 전설과 민담이 이야기의 대표적 형태들이다. 한때 ‘이야기’는 인간들이 세계를 표상하는 상징형식의 역할을 했다. 이는 당시 인간들이 세계와 ‘허구적’ 관계를 맺었음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과학만이 아니라 기술도 없었다. 이때 기술을 대신한 것이 ‘주술’이다. 세계를 객관적으로 통제할 수 없자, 인간은 주술을 통해 세계를 주관적으로 정복하려 했던 것이다. 주술 역시 세계를 ‘허구적’으로 지배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세계와 현실적 관계를 맺으려 할 때, ‘철학’이라는 새로운 상징형식이 발생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플라톤은 시인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은 시가 세계에 관해 진리가 아니라 허구를 말하기 때문이었다. 철학의 탄생과 함께 인간의 상징형식은 뮈토스(이야기)에서 로고스(합리성)로 이행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 이행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게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골치 아픈 과학보다 재미있는 서사를 좋아하니까.

겨울 뒤에 왜 다시 봄이 오는가? 오늘날 우리는 이 현상을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가령 공전궤도의 한쪽에서는 지구의 북반부가 태양쪽으로 기울고, 공전궤도의 다른 쪽에서는 북반부가 태양의 바깥으로 기울어진다. 이 기울기에 따라 지구 위에서 태양의 위치가 달라지고, 그것이 단위면적당 지구 위로 쏟아지는 일조량의 차이를 일으킨다. 이것이 계절의 변화를 설명하는 로고스의 방식이다.

뮈토스는 그 현상을 다르게 설명한다. 저승의 신 하데스가 제우스와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제우스의 조언에 따라 그녀를 저승으로 납치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데메테르는 남편에게 항의하여 결국 딸을 되찾는다. 하지만 일단 저승에 갔던 이는 영원히 그곳에 살아야 하는 게 규칙이었기에, 1년에 4개월 동안 페르세포네는 저승에서 살아야 한다. 그 기간이 겨울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뮈토스는 결국 로고스에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효율성의 측면에서 허구가 과학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구술문화가 상상력(뮈토스)의 시대였다면, 문자문화는 합리성(로고스)의 시대였다. 로고스가 지배하는 문자문화 속에서 뮈토스는 설 자리를 잃고, 이성을 갖춘 성인들이 아니라 아직 이성을 갖추지 못한 아이들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한마디로 이성의 시대에 뮈토스란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 즉 동화로 전락한다.

최근 문자문화가 종언을 고하고 영상문화와 구술문화가 부활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텍스트는 비가시의 영역으로 후퇴하고, 그 자리에 이미지와 사운드가 들어선다. 새로 등장한 이 영상과 구술의 문화는 문자문화 이전의 그것들과는 애초에 차원이 다른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2차 영상r술문화 속에서 선행한 두개의 상징형식, 즉 뮈토스와 로고스가 하나로 융합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를 뭐라 불러야 할까? 뮈토로고스(mythologos)? 이 표현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적이 있다. 그는 이 용어를 사용하여 헤로도토스의 신화적 사유를 비판했다. 즉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기술하는 데에 뮈토로고스, 즉 뮈토스에 의존하는 서술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게 고대의 어법이라면, 근대 이후 ‘뮈토로고스’는 그와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오늘날 그것은 신화에 대한 학적 연구, 즉 신화학(mythology)이 되었다.

어느 경우든 ‘뮈토로고스’는 신화와 과학이 융합되는 현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상상과 이성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사고방식을 차라리 ‘로고뮈토스’(logomythos)라 부르자. 첨단의 IT기술로 청동기의 영웅서사를 구현한 컴퓨터 게임은 로고뮈토스의 시각적 상징이리라.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로고뮈토스’란 그런 게임을 즐기는 디지털 대중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어떤 정신적 상태의 이름이라 할 수 있다.

황금의 전설

‘음모론’이라는 것이 있다. 신세대 논객 한윤형의 말에 따르면, 음모론의 특징은 구멍이 없다는 데에 있단다. 하긴, 인간이 신처럼 전지적 시점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이른바 ‘사실’이라는 것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기 마련. 반면, 음모론의 경우는 설명에 구멍이 없다. 미지(未知)나 무지(無知)의 부분을 빠짐없이 상상력으로 채워넣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음모론은 팩트와 픽션이 융합을 이루는 로고뮈토스의 대표적 예가 된다.

인간은 설명되지 않은 빈 곳을 못 참는 모양이다. 가령 중세에 ‘황금의 전설’(Legenda Aurea)이라는 문학의 장르가 있었다. 성서에는 예수의 행적이 너무나 간략히 묘사되어 있다. 가령 성 가족이 헤롯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도망갔다는데, 그 여정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중세인들은 이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왕성한 상상력으로 예수에 관한 온갖 새로운 전설들을 창작해냈다.

그중의 하나. 이집트로 도망가는 성 가족이 지나는 길에 농부가 파종을 하고 있었다. 이때 천사가 나타나 농부에게 “헤롯의 군대가 오거든 본 대로 대답하라”고 말한다. 그 순간, 방금 뿌린 씨가 금방 자라 이삭이 열렸다. 잠시 뒤 나타난 헤롯의 군대에 농부는 “그들이 지나갈 때 나는 씨를 뿌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군대가 추적을 포기하고 돌아섰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중세인들에게 성경 못지않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현대의 음모론은 물론 이런 ‘이야기’와는 다르다. 그것은 사태를 인과관계에 따라 철저히 합리적으로 구성하여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설명이 사태에 대한 객관적 서술, 혹은 과학적 기술인 것도 아니다. 음모론을 이루는 서사의 절반은 픽션, 즉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사태에 대한 유사-과학적 설명이랄까? 따라서 음모론은 과학 ‘이전’의 이야기와는 다르다. 그것은 과학 ‘이후’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은 골치 아픈 과학보다 재미있는 서사를 좋아한다. 현대의 이야기, 음모론은 가상과 현실을 중첩시키는 파타피직스의 한 형태일 수 있다. 파타피직스의 본질은 ‘허구인 줄 알지만 마치 사실인 척해주는 데’에 있다. 하지만 음모론이 이 의제적(as if) 성격을 넘어 사실의 행세를 할 때, 디지털의 파타피직스는 중세의 ‘황금의 전설’로 전락하게 된다.

 

 

 

 

 

 

 

 

 

믿음과 의심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근대철학의 초석을 놓은 이 유명한 명제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 데카르트는 이른바 ‘방법적 회의’를 통해 결코 의심할 수 없는 이 명제에 도달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하자. 심지어 내가 보고 듣고 아는 모든 것이 실은 악마가 내 두뇌에 일으킨 간교한 속임수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그럴 때조차도 내가 생각하는 한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코기토의 철학

건물을 지을 때 초석부터 놓는 것과 같다고 할까? 데카르트는 이 자명한 명제 위에 확실한 지식의 체계를 세우려 한다. 토대가 튼튼하면 건물이 흔들리지 않는다. 지식의 체계 역시 흔들리지 않으려면 토대가 확실해야 한다. 근대의 모든 사상은 다소간 데카르트에서 유래하는 이 정초주의(foundationism)의 경향을 갖고 있다. 오늘날에도 학술서적의 제목에 종종 ‘기초’(foundation)라는 건축의 은유가 사용되지 않던가.

이 자명한 명제로부터 데카르트는 다른 확실한 지식들을 도출하기 시작한다. 어느 시대에나 주도적 학문이 있게 마련. 17세기에 다른 모든 학문의 이상으로 여겨진 것은 바로 기하학이었다. 기하학에서는 ‘공리’에서 ‘정리’를, 거기서 다시 개별 ‘명제’를 도출해낸다. 이 연역법(induction)을 차용하여 데카르트는 이제 확실한 지식의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내 불완전한 기억을 용서하시라) 대충 이런 식이다.

내 머릿속에는 ‘신’의 개념이 들어 있다. 하지만 완전한 것이 불완전한 것에서 나올 수는 없기에 ‘신’은 내가 만든 개념일 리 없다. 고로 신은 존재한다. 그런데 신의 개념에는 선함이 포함되어 있다. 선하신 그분이 세계의 존재에 대해 나를 기만하겠는가? 고로 세계는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자신이 방법적으로 의심한 모든 것을 다시 긍정한다. 물론 회의를 한번 거친 이 지식들은 이제 기하학적 명제만큼 ‘확실한’ 진리의 자격을 획득한다.

우리 눈에 데카르트의 논증은 기괴하다 못해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기하학(이나 수학)과 다른 학문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보지 못한 점이리라. 수학과 기하학의 명제들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그것들은 (가령 ‘총각은 미혼의 남자’라는 명제처럼)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반면, 다른 학문의 명제들(가령 ‘지구는 둥글다’는 명제처럼)은 동어반복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참일 수 없고 오류의 가능성을 허용한다.

방법적 회의는 난센스

비트겐슈타인은 데카르트가 기하학의 이상을 추구하는 가운데 ‘확실하다’는 말의 문법을 오용했다고 지적한다. 가령 이렇게 말해보자. “총각이 결혼하지 않는 남자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상하지 않은가? 총각이 결혼하지 않는 남자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확실한 것이 아니다. ‘확실하다’는 말이 적절하게 사용되는 것은 차라리 이런 경우이리라. “다음 달에 경제위기가 올 것이 확실하다.” 이때 그 위기는 물론 안 올 수도 있다.

가령 ‘원은 둥글다’는 명제는 지식이 아니라 문법에 속한다. 즉 우리가 그 말을 유의미하게 사용할 경우란 아직 말을 못하는 아이에게 언어를 가르칠 때뿐이다. ‘원은 둥근 것이 확실하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한마디로 세계에 대해 수학이나 기하학의 명제만큼 확실한(?) 지식을 추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그것은 논리적으로 난센스다. 이런 식으로 비트겐슈타인은 데카르트의 기획을 해체해버린다.

비트겐슈타인은 나아가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공격한다. 과연 데카르트처럼 세계의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것을 의심할 수 있으려면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더러 거짓말쟁이가 있어도,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인 세상은 상상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즉 대부분의 사람이 참말을 해야 비로소 ‘거짓말쟁이’도 존재할 수 있다.

아니, 거짓말쟁이 자신도 평소에는 대부분 참말을 하기 때문에 필요할 때에 효과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믿음’과 ‘의심’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가 뭔가를 의심하려면 다른 대부분의 것을 믿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뭔가를 ‘의심’하는 언어놀이를 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일단 의심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데카르트는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일을 시도한 셈이다.

우리의 언어놀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이 믿음의 세트를 비트겐슈타인은 ‘기본적 확신’(basic convictions)이라 부른다. ‘의심할 수 있으려면 일단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한다.’ 언뜻 듣기에 이는 매우 보수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기본적 확신’이란 (가령 비가 올 때는 비가 온다고 믿는 것처럼) 정말로 기초적인(basic) 것을 가리킨다. 주위에서 믿으라고 강요하는 얘기들은 무조건 믿으라는 뜻이 아니다.

데카르트를 위한 변명

오늘날 데카르트 철학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왜 자신의 사유를 이렇게 극단으로까지 몰고 갔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데카르트의 동시대인들은 여전히 중세적이었다. 그들은 ‘타율적’ 존재여서 진리를 자신의 사유가 아니라 외부의 권위에서 찾으려 했다. 그들에게 진리란 한마디로 국왕이 말하는 것이요, 교회가 말하는 것이요, 부모가 말하는 것이요, 주변에서 말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 기획은 이 타율적 존재들을 스스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자율적’ 주체로 바꾸어놓는 데에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유아론적 고독 속에서 언어의 문법을 거스를 정도로 급진적인 회의를 수행했던 것이다. 물론 그 급진적 회의를 통해 그는 고작 자신의 동시대인들과 같은 결론으로 되돌아갔지만(가령 ‘신은 존재한다’), 적어도 그의 결론은 그의 동시대인들의 것과 달리 ‘자율적’ 사유와 판단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었다.

아직도 어떤 사회에서는 ‘자율적’ 주체가 된다는 것이 거의 모험에 가까운 일. 거기서 사유나 행위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다. 집단은 개인에게 믿음을 강조하고, 그의 의심을 처벌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기본적 확신(basic convictions), 즉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 의심없이 믿어야 할 사실들이 대부분 ‘기초적’(basic) 수준을 훨씬 넘어서곤 한다. 거기에 의심을 표했다가는 물론 소통의 장에서 당장 퇴장당한다.

때로 사회가 강요하는 믿음의 세트가 심지어 언어를 지탱해주는 그 기본적 확신에 배치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사회적 소통은 종교성을 띠게 된다. 가령 기독교인과 대화하려면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을 의심없이 믿어줘야 하나, 우리는 ‘처녀’와 ‘잉태’가 서로 모순되는 개념임을 잘 안다. 하지만 무염수태의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 교회에서 파문당하듯이, 그것이 아무리 허황된 것이라 하더라도, 주변에서 강요하는 믿음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자, 사회적 소통에서 배제당한다.

그런 사회의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가 주변과 다른 것을 너무나 괴로워한다. 그 고통, 그 고독에서 벗어나려고 그들은 제 머리를 비우고 그 빈자리에 남의 생각들, 즉 주위에 떠도는 통념을 채워넣는다. 21세기라 하나, 이 사회에 데카르트의 이 위대한 고독을 견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가 저지른 모든 논리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데카르트를 위대하게 만들어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