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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by 아프로뒷태 2011. 8. 9.

[특별기고] 복지국가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 남재희

등록 : 20110807 19:04 | 수정 : 20110807 22:20

 

» 남재희 언론인·전 노동부 장관
노사 분규의 해결은 자율적인 협상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강자에 의한 약자의 억누름이란 지나친 불균형일 때 사회적인 도덕적 압력이 가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희망버스’는 그런 도덕적인 힘이다.

복지국가론이 크게 일어나고 있고, ‘포퓰리즘’ 운운하고 복지 말만 나오면 조건반사처럼 그것을 매도하던 세력들도 점차 뒷걸음질치고 있다. 격이 떨어지지만 농담 하나가 떠오른다. 아버지 거지가 아들에게 “우리는 집에 불날 걱정이 없으니 애비 덕인 줄 알라.” 유럽 몇몇 나라처럼 과잉복지로 허덕일 걱정이 없으니 그것도 모두 부자정권의 은총인가.(경제협력개발기구의 통계에 기초하여 하는 이야기다.)

복지국가론 쪽이 주장하는 정책들은 복지라는 간판만일 뿐 세제, 재정정책, 남북관계 등등 불가피하게 연결되는 총체적인 몸통은 아직 전개하지 않고 있다. 우선순위에도 문제가 있는 듯하다. 복지란 국가정책 전반의 일환이며 복지국가를 말하는 것은 그 국가정책 전반을 재조정하는 것을 뜻한다.

부자정당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한나라당에 변화가 생겼다. 얼마 전 새로 선출된 원내 지도부가 입을 떼더니 당 지도부가 활발하게 바른말을 하였다. 너무 반가워 그 이름을 기록해두고 싶다. 황우여·이주영의 원내와 홍준표·유승민·남경필 등의 당 지도부다. 언론에서는 그들이 ‘좌클릭’했다고 하는데 말을 바로 하려면 그것은 ‘정(正)클릭’이래야 할 줄 안다. 때늦은 반성이지만 그것이 집권 쪽의 변화이니 반갑다. 선거용인지도 모르고, 선거가 끝나면 역행이 있을지도… 하는 걱정이 있기는 하다.

물론 민주당 지도부도 손학규·정동영 등 말이 통할 사람들로 짜여 있어 다행스럽다. 집권 가능성이 있는 그들 세력에게 일차적인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것이니 총선과 대선을 준비하면서 국정운영의 틀을 전향적으로 재조정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복지에 관한 한 추진의 진짜 동력은 진보정당과 진보단체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온·오프라인’의 시민세력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추동하는 힘이 강하지 못한 것 같다. 민노당·진보신당·참여당의 통합 노력도 몸부림으론 여겨진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이상이 교수는 그러한 상황판단에서 해법으로 국민이 “수다를 떨어야 한다”고 하였다. 어지간히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 같은데 “수다를 떨다”는 미국의 티파티운동 같은 것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는 티파티 대신 막걸리파티를 하면서 “복지”와 “스웨덴” 하며 건배를 하여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말의 힘을 믿기로 하다 보면 결국 매스미디어의 벽에 부닥친다. 거대 언론들은 웬일인지 복지에 냉담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대표는 헌법 119조, 특히 그 2항을 자주 인용하고 있고, 민주당은 그 119조의 특별위를 만들기도 했다.
경제민주화를 강조하는 그 조항은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를 의미한다고 해석되고 있다.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제헌헌법에 우리는 이익 균점 조항까지를 두었었는데 그것은 독립운동 시기에 싹트고 합의한 우리의 사회정의를 향한 시대정신을 말한다. 광의의 사회민주주의란 해석이 헌법학자들 사이에 유력하다.

 

헌법 119조는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를 의미한다고 해석되고 있다.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제헌헌법에 우리는 이익 균점 조항까지를 두었었는데 그것은 독립운동 시기에 싹트고 합의한 우리의 사회정의를 향한 시대정신을 말한다.

“한국 경제는 1962년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이후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압축성장을 이룩하였다. 압축성장은 자유시장경제에 의하여 이루어진 산물이 아니다. 이것은 정부가 경제성장에 효율만을 강조하여 일부 대기업 집단에 자원을 인위적으로 집중 배분함으로써 가능하였다. 이 과정에서 재벌그룹이라는 거대 경제세력이 탄생하게 되었다. 경제발전 초기에는 경제세력이 정치세력에 압도적으로 열세이다. 하지만 경제세력은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경제뿐만 아니라 경제세력을 바탕으로 정치·사회에 실질적인 영향을 행사하게 되고 이로써 정치세력을 압도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세력이 사회조화를 위하여 경제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게 되면 경제세력은 자본주의의 자유시장경제라는 명분을 내세워 저항한다. 이 경우 한국과 같은 현실에서 경제세력은 언론, 법률가 등을 총동원하여 헌법소원이라는 양식으로 정치세력의 의도를 무산시키려 최대의 노력을 할 것이다. 결과는 정치세력은 좌절할 수밖에 없고 사회조화는 이룩될 수 없다.

이에 대한 역사적인 사례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뉴딜정책을 법제화하였을 때 미국의 각종 이익집단이 위헌을 제기하고 이를 대심원(대법원)이 수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헌법 119조 2항은 이러한 사례가 발생할 것에 대한 안전판을 마련한 것이다.”

119조 2항의 입안자인 김종인 전 의원의 설명이었다. 한국의 현실과 견주어 깊이 음미해볼 일이다.

복지가 직접적으로 세금으로 연결된다고 할 때 우선 중요한 것은 재계의 이해와 협조이다. 흔히 미국의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의 사회기여를 말한다. 복지국가 스웨덴의 재벌들도 폭넓은 이해심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되곤 하였다. 그런데 우리 재계는? 얼마 전 재계 총수는 포퓰리즘 운운하고 한나라당 지도층에 역정을 내기까지 하다가 뒤에 얼마간 수그러드는 몸짓을 보이기도 했다. 김진숙씨가 장기간 고공 크레인 농성을 하고 있는 부산 조선소의 경영자는 계속 정리해고의 강심장이다.

일반적으로 권익 향상은 투쟁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계급간의 타협이 더욱 바람직한 것이다. 사내복지를 잘하는 대기업들은 그런 안목을 한번 전체 국민을 위해 확대하여 통 크게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인가. 재계의 각성이 정부의 분발과 결합해야만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우리의 공동체가 무너지고 대격변을 겪게 되는 뜨끔한 일을 당하지 않고도 그 전에 그런 자발적인 사회통합의 정신은 발휘될 수 없을까 하는 바람이다. 백일몽인가.

복지운동의 불길을 살리는 일은 참 고민스럽다. 우리는 두 개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심지어 언론까지도 두 개의 다른 언론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엄청나게 팔리고 <분노하라>는 책도 나오고 있는데 구체적인 힘의 발휘는 아직 막막하다. 지금의 사회양극화를 말하는 여러 통계나 대다수 국민이 고통받고 답답해하는 것을 볼 때 조건은 충분하다. 엠비정권은 부자감세 등 부자혜택을 고집하며 태평하게 부자정권의 위세를 과시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결국 상식이, 정의가 이긴다. 두 차례의 선거에 앞서 복지국가를 향한 대격변이 있을 것이다.

역사란 힘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촉발하는 상징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노사 분규의 해결은 자율적인 협상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강자에 의한 약자의 억누름이란 지나친 불균형일 때 사회적인 도덕적 압력이 가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영어권에서 길항력(Countervailing Force)이란 말을 쓰는데 그것은 대항하고 상쇄하며 균형을 잡고 하는 복합적인 힘의 작용이라 할 것이다. 민주사회에서 그러한 힘이 작동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래도 해결 안 될 때 마지막은 정부의 몫이다.

‘희망버스’는 그런 도덕적 힘이다. 다만 김진숙씨가 희생되는 비극은 막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계속 강박하고 있다. 무슨 명분이라도 제공하여 크레인에서 내려오도록 하여야 한다. 결국 명망 있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수환·강원용·법정이란 뛰어난 종교지도자들이 떠오른다.

이럴 때 강자가 좀 양보하는 것이다. 사태가 이미 그런 양보를 말하게끔 커졌다. 그리고 얼마간의 명분만 주어진다면 농성도 ‘희망버스’도 중단하는 것이다. 촛불사태의 경우 뒤늦게 아쉽게 이야기하는 것은 얼마간의 명분이 주어졌을 때 중단하는 결단을 못 내려서 그 운동의 뒤끝이 어지러워졌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현상에는 완전한 승자도 완전한 패자도 없는 것이 조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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