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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향기

김애란 소설<두근두근 내 인생>

by 아프로뒷태 2011. 7. 15.

 

젊은 여성들 '80대 노인'에게 두근두근? 그 이유는…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그 명랑함에 묻는다

기사입력 2011-07-15 오후 6:05:18

 

 

 

 

 

조로증에 걸려 80세 노인으로 보이는 17세 소년. 그리고 이 소년을 17세에 낳은 어린 부모의 이야기. 1980년생 젊은 작가 김애란의 첫 장편 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 펴냄)이 지난 6월 말 출간되고 나서 10일 만에 소설 부분 베스트셀러 1위, 종합 베스트셀러 2위에 오르는 등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20~30대 여성의 반응이 폭발적이다. 현재 이 책의
구매층은 70퍼센트 이상이 여성, 20~30대 독자다. 평단의 반응도 호평 일색. "운명적인 이야기꾼"(황석영), "비극에서 낙천의 보석을 골라내는 타고난 재능"(성석제), "박수를 아낄 생각이 없다"(신형철) 등…. 김애란이 한국 문단의 차세대 대표 작가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하는 것일까?

문학평론가 이명원이 <두근두근 내 인생>을 꼼꼼히 읽고서 감상을 보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이 이렇게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은 무엇일까? 그 중에서도 젊은 여성에게 인기를 끄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소설은 정말로 "박수를 아낄" 수 없을 정도로 잘 쓰인 것일까? 이명원의 얘기를 들어보자. <편집자>

1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 펴냄)은 조로증(早老症)에 걸린 한 소년의 생애 마지막 1년간의 삶이 주된 시간적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 특이한 질병을 짊어진 17세 소년의 어조는 담담해서, 그의 실제 나이가 아니라, 생체 나이로 진술되고 있는 80세의 노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담담한 삶의 마무리를 완성하고 있다.

급성
노화와 죽음이라는 명백한 운명이 두드러진 소설이기 때문에, 주인공의 임박한 비극에 감정 이입을 하는 독자 입장에서는 작품의 완성도를 문제 삼는 일이란 부수적인 일로 비칠 수 있다. 게다가 이 소년은 죽음 앞에서조차 의연하게 책읽기와 글쓰기를 치열하게 지속하는 인물로 서술되고 있어 장엄한 느낌까지 든다. 이 장편에서 병세의 악화와 임박한 죽음 앞에서 주인공의 의지가 작동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출구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글쓰기인데, 이를 통해 우리는 김애란이 소설쓰기에 부여하고 있는 뜨거운 열정 또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작중 인물 한아름의 소설 쓰기에 대한
고민은 김애란이 쓴다는 행위에 부여하는 예술가적 자의식의 투영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외적 줄거리와 무관하게 일종의 김애란 식 '메타 픽션'이 되는 셈인데, 이것은 지난 연대에 호평을 받은 바 있는 신경숙의 <외딴 방>의 서사 기법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가령 1부 6장에서 김애란은 한아름의 입을 빌어 소설 쓰기의 어려움을 이렇게 피력한다.

이야기를 짓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사람과 장소와 시간을 고루 살피며 문장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게 만만치 않아서였다. (…) 이야기는 자주 멈췄다. 그럴 때면 홀로 북극에 버려진 펭귄이 된 기분이 들었다. 참으로 막막하고 무시무시한 순간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부모님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두 사람의 젊었을 적 이야기를 묻고 또 묻고, 한 번 더 해 달라 졸라댔다. (89쪽)

두 사람의 이야기는 아귀가 잘 안 맞았다. 기억하는 것도 조금씩 어긋났고,
해석하는 것도 달랐다. 어머니는 한 대수가 자길 쫒아 다녔다고 하고, 아버지는 최미라가 먼저 꼬리를 쳤다고 했다. 어머니가 아버지 앞에서 처음 노래를 부른 순간도, 두 사람이 입을 맞춘 순간도 두 사람 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내 입장을 말할 것 같으면 사실 어머니의 편도 아버지의 편도 아니었다. 나는 이야기의 편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진짜 필요한 순간에 어머니의 편을 들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93쪽)

이 작품 속에는 이런 방식의 글쓰기에 대한 진술이 자주 등장하고, 주인공인 한아름이 죽음에 다가갈수록 더욱 치열한 양상을 띠게 된다. 나중에 사기로 밝혀지기는 하지만, 작품 속에서 한아름이 거의 유일하게 사춘기적 이성애를 자각하게 하는 '이서하'와의 관계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전자 편지를 주고받는 행위이다. 편지 쓰는 일에서도 한아름의 글쓰기에 대한 고민은 여과 없이 드러난다.

"종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발견하고, 보는 즉시 '어우' 손사래 쳤던 글들을 내가 쓰고 있었다. 그것도 문체가 제 각각인 게 어느 것은 도도한 초등학생이 쓴 산문 같고, 또 어떤 것은 인문대 복학생이 쓴 잡문 같았다." (199쪽)

대학을 가 본적 없는 한아름이 자신의 문체를 위와 같이 분석하는 것은 어색하다. 잡문이라니.

사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이렇게 어색해 보일 수도 있는 '낱말 카드'를 풍부하게 제시하면서 출발한다. 한아름의 몸과 마음이 쇠락해갈수록 말을 통한 상상과 문장들의 유연한 활공은 더욱 강렬해지는데, 대단원의 결말을 이루는 것은 그 자신의 기원을 추적해가는 것을 골간으로 한 한아름의
자작소설 <두근두근 그 여름>에서이다. 각각의 낱말들을 통해 상상해낸 삶의 질감들이 자신과 나이가 똑같은 17세 당시의 부모들의 낭만적인 만남과 조우하면서, 이 소설은 자못 완결된 장편의 형식미를 획득한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

2

▲ <두근두근 내 인생>(김애란 지음, 창비 펴냄).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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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은 과연 성공한 장편 소설일까. 그렇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몇몇 측면에서 이 소설이 장편으로는 허약한 토대 위에 지어진 집처럼 느껴진다.

읽기의 차원에서는 술술 잘 읽히는 미덕이 있지만, 인물 형상에 있어서 미숙한 처리가 두드러지고, 소설의 초반부에는 자못
탄탄한 긴장감을 보여주지만 3부에 이르면 소설의 구조가 급격하게 이완되는 양상을 보인다. 장편 소설의 플롯이라는 게 요즘처럼 이완되는 것을 당연시하는 세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다차원적인 복잡성과 파편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가들 역시 단편과 장편의 질적 차이에 대한 치밀한 고민 없이 시간이 지나면 장편으로 자연스럽게 널뛰기 하는 관성에도 기인하는 현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한 문단만 생략해도 전체 구조가 완전히 흔들리는 식의 완결된
구성을 요구하는 것이 현대에 있어서는 무리라고 할지라도,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은 중반부를 지나면 애초에 견지했던 소설적 긴장을 찾아보기 어렵다가, 종결부에 이르러 가까스로 그것을 회복하고 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다 좋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전체적으로 플롯의 안정된 균질성이 지속되지 않는 상황에서 에피소드와 메일 형식을 통한 독백, 인물들의 어색한 유머가 반복되는 것은 약점이다.

김애란의 소설을 읽다보면, 인물
성격의 대비 효과가 주된 서사적 장치로 활용되는 예를 자주 발견한다. 아이들은 의뭉스러운 성숙함을 보여주는 반면, 어른들은 유아기적 퇴행에 가까운 발언과 행위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장 씨 할아버지로 대표되는 이 소설 속의 성인들은 동화나 명랑 만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철없는 상황의 미숙성을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몸과 마음이 늙었으나 이제 막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는 17세 소년과 기묘하게도 유년기의 동심과 명랑성을 유지하고 있는 어른들의 반어적 대조가 이 소설의 동화적 성격을 도드라지게 한다.

나는 소설이 아니라 동화라고 말했는데, 사실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의 빼어난 흡인력의 근거는 이 인물들의 통념적 성격의 의식적인 뒤집기에 있으며, 이것은 동화
양식에서 선용되는 인물 형상화 방식의 영향으로 보인다. 사실 이런 동화적 성격 형성의 구도가 가장 관습화된 서사적 양식으로 고착된 것은 한때 유행했던 일본과 한국의 명랑 만화에서였을 것이다.

이것은 동화도 만화도 아닌 소설이지만, 에필로그 이후에 등장하는 한아름의 <두근두근 내 여름>이 본격 소설에 해당하는 통일된
인상을 보여준다. 반면,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에 이르는 이 소설의 거의 대부분의 분량에서, 장편 소설에 맞춤한 성격의 입체성을 보여주는 인물은 '이서하'라는 이름으로 한아름에게 접근했던 30대 중반의 시나리오 작가와 여고 시절의 엄마에게 <홀로서기>와 빈소년합창단 테이프선물했던 채승찬 피디(PD), 그리고 방송 작가 정도다. 이들에게는 성숙한 어른들의, 세속적 삶의 인정하기 힘든 불편한 명암이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현실적으로 발현되고 있어 이 소설의 흠결을 아슬아슬하게 보충하고 있다.

3

김애란의 소설을 읽는 오늘날의 젊은 독자들은 대체로 고달픈 삶의 정황에 포섭된, 그래서 따뜻한 위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작가 역시 위로와 유머를 중시하는 견해를 자주 노출하고 있다. 사실 이 소설의 주동 인물인 한아름이 우리의 아들, 딸이라고 생각한다면, 살려는 의지와 무관하게 처해진 한아름의 가혹한 운명 앞에서 괴로워하지 않을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 고통스럽기 짝이 없을 쇠락과 죽음의 증상들 앞에서, 공포와 불안도 없이, 자기만의 낱말 카드에 몰입하는 주인공의 의연함 앞에서는 어떤 경건함의 심정까지도 느끼게 된다.

모든 유기체들의 한계 상황임에 분명한 죽음의 진전 과정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눈에 뻔히 보이는 다큐멘터리 제작의 상업성과 허위성에 대해서도 분개하지 않으며, 생애 최초로 타인에게 내면을 개방했던 메일 대화 역시 '사기'로 드러난 마당에서도 결코 쉽게 절망하지 않는 한아름의 태도는 가히 초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주인공 주변에 배치된 여러 인물들은 엄마, 아빠 모두를 포함하여 그 성격이 일종의 '캐리커처'처럼 축소되어 있다.

이런 명랑성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소설의 인물들은 왜 명랑할 필요가 없는 부분에서까지 명랑하며, 유머가 필요 없는 상황에서까지 슬랩스틱에 가까운 만담의 주인공이 되는가 하는 의문은 제기해 볼 수 있다. 한아름의 17세가 조로였다면, 아버지의 17세는 유아적이다. 여름날의 사랑으로 덜컥
임신한 아내의 집에 찾아가 장차 장인이 될 사람이 "그래 너는 뭘 잘하냐?" 묻자, 이에 대답하는 말이 "아버님 저는 태권도를 잘합니다"(14쪽)이다. 이를 듣고 "그리고 또 뭘 잘하냐?"고 장인이 다시 묻자, 아빠가 속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나는 스트리트 파이터를 잘하는데…'라는 것은 골계적인 서술이다.

엄마의 소녀 시절 별명은 '시발공주'였다. 이웃집 장 씨 할아버지는 한아름을
조명한 다큐멘터리가 끝나자 그의 집으로 찾아와 "아름아, 방송 봤니"라고 물은 후 "머리를 감싸 안은 채 절망적인 표정으로 중얼거"리길, "내가 (방송에) 안 나와…" 하고 외친다. 아버지의 17세 시절의 나른한 수음을 묘사하면서 작가는 "한 날은 그게 하루에 몇 번이나 가능한지 알아보려는 실험을 하다 자기 성기를 꼭 쥐고 기절한 채 발견되기도 했다"고 서술한다. 이 서술문의 끝에서 작가는 아버지를 한 번 더 동화적으로 만드는데, "아! 인간이 하루 다섯 번 하면 죽을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진술은 글쎄, 엄살의 뉘앙스가 강하기는 하지만 역시 유머러스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진술이나 소설 전체의 톤을 고려하면 이것은 작가가 유머를 창작상의 중요한 장치로 활용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방송 작가가 한아름에게 "그래서 뭐가 되고 싶어요, 아름인?"이라고 묻자 "세상에서 제일 웃기는 자식이 되고 싶어요"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대책 없는 효자라고 해야 할지, 천성이 낙천적이라고 해야 할지 나도 '대략 난감'하다. 이것이 어떤 희비극적 상황을 오히려 효과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전략으로 볼 수도 있겠다.

처방전이라고는 있을 수 없는 극단적인 한계 상황을 유머를 통해 상대화하고 완화시킴으로써 삶과 죽음의 납득할 수 없는 한계 상황을 오히려 더 부각시키는 효과를 의도했다고도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판단에 이는 유머의 과잉이다.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웃으라고 권유하는 작가의 서사 장치는 어떤 의도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왜 한아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성인들, 심지어는 고통을 참고 있는 그의 부모들마저 이 소설 속에서는 그저 실없이 웃고 떠들면서, 상황의 비극성을 회피하고 있는 건인지 나로서는 알쏭달쏭하다.

4

유머나 농담이 갖는 순기능은
심리적 압박감과 긴장을 완화하고 고통스런 상황을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쾌적하게 휘발시키는 데 있을 것이다.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으면, 그렇게 극중 인물의 고통을 지켜보는 독자의 안타까움 역시 마술적으로 완화되고 쾌적하게 망각된다. 그래서 노화와 쇠락의 명백한 징후가 두드러지는 한아름 대신, "아! 만권의 책을 읽어도, 천수의 삶을 누려도, 인간이 끝끝내 멈출 수 없는 것이 추파겠구나"라고 흐뭇해하는 조숙한 한아름의 잔상이 더욱 오래 남게 된다.

소설 속에서 빈번한 유머와 연약한 골계가 지배적이 되다 보니 신체 연령이 80세로 급격하게 노화되었다는 한아름의 증상도 현실감을 잃게 된다.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는 주인공의 고통도 독자 입장에서는 관조적으로 응시하게 된다.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묘사되고 있는
혼수상태의 환청은 매우 아름답고 몽환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죽음으로 건너가는 한아름의 장엄한 삶의 완성은 다만 고즈넉하게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김애란이 청년기의 명랑과 유머의 세계에서 비극 쪽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셈인가. 현재까지의 소설적 상황을 보면, 물론 그것은 어려워 보인다. 사실 내 주장은 비극적 정서나 세계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격 묘사의 리얼리티가 더 살아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장편처럼 주인공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물의 성격이 단순화되고 엇비슷해져 개체로서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현상을 김애란은 극복할 수 있을까.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하겠지만, 현재의 장편만을 보자면 당장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의 장터가 김애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듯하다.

이것이 꼭 김애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젊은 작가들에게 마치 장편 소설을 쓰지 않으면 작가로서는 뭔가 미달된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오늘날 문단 일각의 경향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장편과 단편은 사실상
영화연극처럼 완전히 이질적인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작가들은 그 양식의 특이성에 대한 고려 없이 단편적 정황을 장편으로 확대하는 유혹에 자주 노출된다. 김애란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으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만,
액자 구조 속의 또 다른 소설로 제시되고 있는 <두근두근 내 여름>에서의 소설적 밀도와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에까지 이르는 내면 독백과 대화체로 교차 전개되는 서사 사이에는 매우 큰 질적 편차가 존재한다. 이 편차가 극복되지 않은 채 장편의 말미에 돌올하게 제시되고 있는 작중 인물 한아름의 소설은, 마치 앞선 서사의 불완전성을 은폐하기 위한 작가의 지적 배려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나의 유추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는 근거에서 말하자면, 실제로 이러한 서사적 배치는 자못 성공적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두근두근 내 인생>이 탁월한 성취를 이뤘다고 고평할 만한 수준의 장편 소설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통해서 김애란의 단편 세계가 충분히 심화되고 확장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양적인 괄목상대를 버텨낸 것은 사실이다. 또한 단편에서 장편으로 넘어가면서 이만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작가가 또래 세대의 작가 가운데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김애란의 소설을 돋보이게 만드는 요소이다. 그러나 김애란의 소설은 여전히 엄마 아빠의 생활 반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가족 소설의 범주에 머무르고 있다. 이 희비극적 가족 콘서트의 세계를 극복하는 일이 김애란에게는 장편다운 장편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필요조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끝으로 사소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이 책의 한 가지 편집상의 의문에 대해 지적하고 글을 끝맺도록 하자. 이 소설의 '작가의 말' 다음에는 "본문에 인용되거나 언급된 책은 다음과 같습니다"라는 진술 후에 몇 권의 책과
음악의 출처가 명기되어 있다. 그런데 기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소설 속에서 소녀 적의 어머니와 방송국 피디가 된 승찬 아저씨의 관계에서 선물로 오간 서정윤의 <홀로서기>에 대한 출처 명기가 생략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 속에서 <홀로서기>라는 시집은 엄마와 승찬 아저씨 뿐 아니라, 한아름과 승찬 아저씨의 만남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다른 출처는 소상히 밝혔으면서도 왜 <홀로서기>는 누락된 것일까. 1980년대의
대중적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을 누구나 다 알고 있어서 생략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학교 교수

 

 

 

애란 언니가 돌아왔다!

단편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로 단숨에 한국 문단에 기대주로 도약한 젊은 작가 김애란이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평론가부터 팬들까지 워낙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장편소설을 기대해왔던 만큼, ‘동계올림픽에 나간 김연아 만큼’ 떨리지 않았을까? 하는 팬들의 우려와 달리 그녀는 이번에도 덤덤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스물 다섯, 삐죽삐죽 짧은 머리로 문단에 등장했을 때도 그녀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저 웃고 있었다.
『달려라 아비』라는 책 제목 때문일까. 그녀의 등장은 마치 화려한 오토바이가 빠라바라바라밤 요란한 클랙션 소리를 내며 달려온 듯 했고, 사람들은 달려들며 상찬을 얹었다. 소설이 아닌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에서 그녀는 시종 덤덤했던 느낌으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오는 일들을 겪고 있었다.

긴장도, 체념도 아닌 그 표정을 엿볼 때마다 말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선문답 같은 유머가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가 이번에는 등단 십 년 만에 독자들을 향해 건넨 긴 편지를 건넸다.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 두근두근 김애란이다.


“혼자 상상해보곤 했어요. 장편 쓸 생각을 하면 두려움과 설렘이 동시에 느껴졌어요. 아주 신명 나게 읽히는 장르소설이 쓰고 싶었다가 아니야, 근사한 연애소설을 써보겠어. 생각했다가도 아냐, 첫 장편은 무릇 성장소설이지! 싶었다가 사실 모든 장편은 추리소설 아닌가?(웃음) 마음이 왔다 갔다 했어요. 그런 충동만 있었지 구체적인 전략은 없었어요. 내가 과연 장편의 체급이 될까? 그만한 근육과 폐활량이 생겼을까 확신이 생기지 않아서요.”

<창작과 비평>에서 장편을 연재해보자는 제안을 계기로, 장편에 착수했다. 연재라는 형식이 ‘충분히 고치고 발표할 수 없다는’ 곤란함이 있지만, 마감의 힘을 빌어 완성해보기로 했다. “첫 번째 떠오른 키워드는 연애편지였어요. 쥐방울만한 녀석이 쓰는 연애소설이었으면 좋겠다. 또 그것이 엄마, 아빠에게 주는 청춘의 선물이었으면 좋겠다. 이 정도의 생각이 있었어요. 청춘을 선물하는 아이의 상황은 어떤 것이면 좋을까? 청춘을 말하는 아이의 몸이 시들어 있는 상태라면 말을 건넬 때의 울림이 더 크지 않을까 싶었고요” 그렇게 김애란 작가는 주인공 아름이를 완성해나갔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열 일곱이지만, 여든 살 몸을 가진 조로증 소년의 이야기다. 아픈 아이가 겪는 성장, 사랑, 설렘, 아픔. 희로애락의 이야기가 읽는 이에게까지 두근두근 심장박동으로 전해진다. “재미있게 써야지. 슬프게 쓰겠어. 이런 각오보다 기본으로 삼았던 생각은 ‘진지하게 써야지’하는 거였어요. 진지함을 우선으로 꽉 잡고 있어야 재미있을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녀가 말하는 진지함이란 이런 것이다. “아름이가 아픈 아이니까. 대상으로 그리지 말고, 진짜 그 사람으로 대하는 거죠. 나도 섣불리 이 아이에게 아껴야 할 감정을 정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진짜 사람과 그러하듯 서서히 친해질 수 있게 그리자는 마음이 있었어요.”

‘조로증’이라는 희귀병을 앓는 아름이와의 만남이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고민했어요. 이게 희귀한 병이고, 자료가 적다는 문제보다 이 아이의 정서를 더듬는 문제가 더 어렵게 다가왔어요. 이런 설정을 해놓고 며칠 밤 뒤척였던 이유는, 저도 한아름이라는 인물이 처음엔 무섭더라고요. 내가 무서워한다는 사실이 당연하지만 약간 실망도 됐어요. 한편으로는 ‘얘를 내가 좋아해야지’ 다짐하고 시작하는 것보다 이런 갈등이나 주저함을 가지고 들어가는 게 맞을 지도 모르겠다 싶었고요.”

삶에 대한 찬가. 독자들도 아름이처럼 기뻐하길


『침이 고인다』 작가의 말에 ‘당신에게 위로 받았다’라는 말을 썼는데, 독자들이 리뷰를 쓸 때 이 말을 많이 인용하시더라고요. 그때 ‘아차’ 싶은 게 있었어요. 그 말의 방점은, ‘저도 독자 여러분에게 위로를 받았어요’라는 거였는데, 그 말이 독자 분들에게 책을 읽고 느껴야 할 감정을 푯말처럼 알려드린 건 아닌가 싶어서요. 여러 개 있을 수 있는 감상을 가둬 버린 게 아닌가 해서, 두 번째 책 내고 작품보다 작가의 말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어요.(웃음)”

병에 걸린 아이. 그리고 아이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 어쩌면 많은 이야기 속에서 마주쳤던 설정인지도 모른다. 으레 이런 사연 속 아이들은 참으로 성숙하기 마련. 김애란 작가는 성숙을 넘어 아예 노인의 몸을 가진 어린 아이로 설정했다. 작가가 이 아픈 아이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아픈 아이의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이 점에서 이야기의 분별력이 생긴다.

그녀의 ‘진지한 태도’는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작위적이지 않은 소년의 행복과 슬픔. 다른 삶을 겪고 있지만, 결국 ‘아이’인 아름이의 감수성이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두근두근 전해진다. 그녀는 아름이를 향해 쉽게 좌절하지도, 섣불리 위로하지도 않는다. 예전에 한 강연에서 그녀가 건넸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게으른 낙관’은 나쁘지만, ‘수치스럽지 않게 위로하기’는 좋다던 말.

“두 팔 벌린 위로가 부담스러울 때가 있어요. 조석 씨 만화 중에 이런 에피소드가 기억나요. 부담스러운 선생님 캐릭터가 아이들을 북돋고 격려하는 장면에 이런 멘트가 있어요. ‘긍정으로 애들을 죽이고 있어!’(웃음) 저도 공감을 했어요. 환자이고, 늙음이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삶에 대한 찬가로 쓰고 싶었어요.

읽으면서 먹먹할 수도 있겠지만, 독자가 기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름이가 쌀독 소리나 텔레비전 소리 듣고 기뻐하는 것 마냥. 아름이가 좋아하고 살았던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어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나 봐요.”


세상은 소년의 몸이 약하다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다. 아름이 역시 가혹한 현실을 시든 몸으로 부딪쳐나간다. 아주 나쁜 사람들이 소년을 괴롭히는 건 아니다. 언제나 우리를 아프게 하는 건 가까운 이웃의 사소한 무례, 작은 방심, 무책임한 한마디 따위다. 김애란 작가는 그걸 잘 안다. 그녀의 소설 속에는 착하다고도 그렇다고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현실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보통사람을 그리되 악인을 그리기 주저하는 이유는 세상이 밝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에요. 오히려 악인을 그렸을 때, 이야기 속 세상이 편편하고 납작해질 때가 있어요. 서사를 위해 희생되는 기능으로만 존재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아주 매력적인 악인을 그리는 건 어려운 것 같아요. 이 소설 속에서 아름이가 세상 속에서 겪는 에피소드는 드라마틱한 효과나 재미를 위한 게 아니라, 현실의 세계와 균형을 맞춰주고 싶어서 그려낸 거예요. 우리는 대부분 다치고 넘어지고 크고 사랑하고 그러잖아요. 아름이도 그런 것뿐이에요.”

문득 궁금해졌다. 김애란 작가의 두근두근. 상복도 많았고, 여기저기서 많은 격려를 받으며 걸어온 젊은 작가에게 두근거렸을 법한 일들은 짐작해봐도 여럿이다. “관념적으로 말해 사람이 몸이 있다는 걸 크게 느낄 땐 두 가지 상황인 것 같아요. 사랑할 때와 아플 때. 탈고하고 났을 때도 그랬어요. 저 혼자 한 작업을 마치고 나니, 누군가와 만나고 싶고, 얘기하고 싶고 궁금하잖아요. 제가 세상을 향해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두근두근 거리죠.”

그간 있었던 작가로서 겪은 기쁜 일 중에서는 처음 데뷔했던 대산 대학문학상을 수상했을 때라고. “그때 집에 뭔가 사고가 생겨서 집 분위기며 상황이 좋지 않았을 때였거든요. 데뷔 소식이 기뻤던 것은 단순히 좋은 소식이어서가 아니라 집안의 온갖 폭풍우처럼 온 나쁜 소식과 더 나쁜 소식과 훨씬 나쁜 소식 뒤에 온 좋은 소식이라 기뻤어요.

실제로 전화 받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이런 거구나, 느꼈어요. 그때 명예,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부모님이 바닥에 무릎을 찧으며 ‘우리 아직 괜찮아!’하고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달까요. 두분 체면의식에 제가 보탬이 됐던 그때가 벅차 올랐던 것 같아요.(웃음)”

“유머는 세상을 향해 보내는 추파이자 구애”


연애, 취업, 가족, 돈, 소비, 인간관계 등 청춘 시절에 완전할 수 없는 문제이자 주요한 관심사가 늘 그녀 소설 속에 등장했다. 구차했지만 구질구질하지 않게, 따뜻하지만 현실을 벗어나지 않게 80년생 그녀는 여기, 우리들의 이야기를 해왔다. 그녀의 소설들은 한창 도서관에서 취직이나 시험을 준비할 때, 막막한 미래 앞에 맨몸으로 섣을 때, 문득 내가 평범한 사람이란 걸 깨닫고 의기소침해있을 때 단단한 위로를 건네던 소설이었다.

“(청춘의 현실을 그렸다는 둥의) 사회적 해석이 먼저였다면 투박한 소설이 나왔을 것 같아요. 그런 건 작품의 뼈대가 아니라 냄새처럼 스미길 바랬어요. 사소한 제 바람이나 욕심에서 나온 목소리가 바깥에 우리가 처한 환경과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비록 반 지하에 몸담고 있지만, 그 속에서도 도도한 생활을 꿈꾸고, 부모님의 희망과 꿈을 양 어깨에 짊어졌지만, 같은 자리만 맴도는 현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선의를 베풀었다가 애매해진 관계에 뒤로 물러서는 인물들과 아빠 엄마도 한때 청춘 남녀였다는 걸 상상하게 해주는 아련한 이야기들은 소설을 넘어 작가에게까지 묘한 친화성을 일으킨다. 이런 이야기를 쓰는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상상하게 만든다. 그녀는 마치 어떤 상황에 있건 따뜻한 기운을 본능적으로 감지해낼 것만 같았다.


『두근두근 내 인생』에도 나오는 검정치마의 「Antifreeze」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야/ 바다 속에 모래까지 녹을 거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얼어붙은 아스팔트 도시 위로…’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춥고 바람이 불면, 춤을 추면서라도 내 몸을 따뜻하게 하자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게 제 소설의 농담일 수도 있고 온기일 거예요. 세상이 따뜻하거나 내 세계관이 밝아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주위가 너무 추우니까요. 몸에 열이 나게 하려고 춤을 추자는 거죠. 말하고 나니, 이거 참 괜찮은 말 같네요.(웃음)”

그녀가 독자들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서는 것에는 그녀 특유의 유머를 빼놓을 수 없다. “개그는 제가 세상에 가장 잘 보낼 수 있는 추파의 방식 중 하나이자 일종의 구애에요. 저 스스로도 즐겁고 독자 분들을 웃겨드릴 때 기분이 좋아요.” 소설 속 유머를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하고, 유머의 비결에 대해 질문도 많이 받는단다. “글쎄요. 전 왜 재미있는 걸까요?(웃음) 유머에 한해서는 엄마의 영향을 받은 것도 같아요.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시지’ 싶을 때가 많아서.(웃음)”

김애란 작가는 그녀의 여러 단편을 통해 수 없는 아비, 어미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자식인 우리와 같이 부족하고, 큰 계획보다는 충동에 휘둘리고, 실수투성이다. 그래서 아빠, 엄마가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녀에게 아빠, 엄마 - 그보다는 아비, 어미란 어떤 존재일까?

“옛날에는 사람들이 번식하기 위해서 결혼한다고 생각했어요. 요새는 단짝을 만들기 위해서 결혼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가족을 꾸리거나 짝꿍을 만드는 것은 회사 뒷담화든 내 일상적인 감각이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인 것 같고요. 예전에는 엄마 아빠를 추상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은데. ‘내가 엄마아빠의 몸을 갖고 있다면, 노인의 몸을 갖고 있다면?’ 이렇게 육체로 환원해서 생각해보니 훨씬 잘 와 닿더라고요. 예전에는 노인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가 지혜, 권력, 여러 개 추상명사였는데, 몸으로 치환해보니 그들에 대한 감각이 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엄마 아빠가 저를 낳은 나이를 지나버렸어요. 난 아직도 애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모님이 노동하는 걸 가까이 봐서 그런지 학생 때, 자취하던 시절 현금 지급기에서 돈을 뺄 때면, 현금 지급기가 철제탯줄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나 아직도 엄마한테 뭔가 빨아먹고 있구나. 그렇게 느끼면서도 그 시기가 한참 이어졌었고, 늘 빚지고 있다는 느낌도 있었고요.”

소통의 불가능보다 낙차에 주목한다


스물 다섯. 무서운 아이(앙팡테리블)로 불리던 이 젊은 작가도 이제 서른에 접어들었다. 그녀는 ‘나’에게 고여있던 관심사가 ‘관계’로 흘러가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그녀가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짐작해봄 직한 이야기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20대에는 저에게 많이 집중했던 것 같아요. 오죽하면 ‘나는’으로 시작해서 ‘나는’으로 끝나는 단편을 쓴 적도 있어요. 사람들하고 얘기하고 나누고 오해하고 실망하고 상처받는 과정도 나를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세상은 왜 이런 곳이야? 화도 내고요. 그게 정말 답답하기도 하고 엄살을 부리고 불평하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인간끼리 소통이 안 돼서 진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거든요.(웃음)

내가 말하는 대로 투명하게 전달되는 것만큼 끔찍한 것도 없겠다.(웃음) 이야기를 써서 그럴까요? 포기라기 보다는 인정하게 된 것 같아요. 생각하는 것도 모양새도 다 다르고, 각각 서있는 자리도 다르고. 그것에 대해 편안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20대 글 쓸 때는 ‘왜 우린 소통이 안되는거야!’ 답답해하면서 썼다면, 30대로 넘어가면서, 그 낙차에 오히려 집중하게 됐어요. 안 되는 게 다행이고, 그래도 소통하려고 노력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가장 좋아하는 본인의 소설에 대해 물었다. “단편 중에서는
『달려라 아비』에는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스카이 콩콩」을 좋아하고요. 트램펄린(스카이 콩콩)으로 치면 온 힘을 줘서 한번 높이 뛰었던 작품들이 좋아요. 또 가장 최근에 『물속 골리앗』이라는 단편을 썼는데, 그건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쓴 작품이라 애정이 많이 가고요. 장편은, 물론 『두근두근 내 인생』이 제일 좋아요. 아직 이것밖에 없으니까요.(웃음)”

문득, 김애란 작가가 트램펄린 위에서 발끝을 세워가며 높이 뛰어오르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들이 집약된 이번 장편소설의 느낌이 그렇다. 그녀는 다음 소설을 위해 트램펄린 속 용수철을 더 깊숙이 밟고 설 테다. “언제든 시작할 수 있는 연주자처럼, 도망가지 않고 꾸준히 소설을 쓰는 선배들처럼 소설가의 몸을 만들고 싶다” 그녀. 이제 첫 장편이다. 앞으로 더 뛰어오를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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