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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향기

소설 쓰는 도중 이 책을 읽고 있는 요즘.

by 아프로뒷태 2011. 7. 25.

 

 

 

 

우석훈 이라는 학자?(그에겐 학자라는 말이 어울린다. 시골의 박학다식한 선비 정도) 참 재밌는 사람이다. 그는 사회적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 현재까지 그의 모습은 그러하게 보인다.혹시 모른다. 언론에 보여진 면이 아닌 또다른 이면에서는 사회적 포즈를 취하는 지도... 인간이 권력과 욕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니깐.

 

그의 사고방식이 현재로선 이끌린다. 그의 글또한 쉽고 이해가 간편하다. 또한 그의 논리도 설득력이 대단하다. 그의 설득력이 실제로 사회에서 실천되길 바란다.

 

한참 소설을 쓰다가 요즘 탐독하고 있는 책이다. 두 번 읽어도 재밌다. 우석훈이라는 사람, 재밌는 사람이다. 몇 가지 재밌는 부분들이 있어 메모를 해본다.

 

 

사회과학이란

 

인간사회현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모든 경험과학을 말한다. 사회학, 정치학, 법학, 행정학, 심리학 등이 사회과학에 포함된다. (나를 알고 사회를 알아서 미래를 예지하고 더 발전된 관계를 만들어간다)

 

김수영 시인 <공자의 생활난>, 1950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 한국의 모더니즘이 출발한 해, 우리나라에서 법적으로 공교육이 시작된 해, 경제개발계획이 논의된 해

 

<공자의 생활난>

꽃이 열매의 상부上部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나는 발산發散한 형상 形象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이태리어 語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 叛亂性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 事物과 사물의 생리 生理와

사물의 수량 數量과 한도 限度와

사물의 우매 愚昧와 사물의 명석 明晳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김수영 식 코기토cogito 선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 코기토 명제.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朝聞道 夕死可矣’

동양적 의미에서 도를 닦는 것은 서양의 데카르트의 코기토 선언과 같다. 이 시는 동, 서양의 깨달음의 철학을 한국의 모더니즘 식으로 김수영이 표현한 시라서 주목 받는다.

 

 

 

5. 경제적 인간과 사회적 인간

 

 

개인을 볼 것인가, 전체를 볼 것인가. 학문은 ‘방법론적 개인주의 methodollogical individualism'과 ‘방법론적 전체주의methodological holism' 사이의 갈등이다. 개체와 구조의 문제라고도 한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경제학으로 보느냐? 사회학으로 보느냐? 이다.

 

경제학에서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효용함수가 있다. 즉 인간은 주어진 조건에서 최대의 만족을 이끌어내는 행위를 하는 ‘경제적 인간’을 설정한다. 그런데 개인들이 모두 자기 맘대로 하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경제학자 레옹 왈라스는 ‘일반 균형general equilibrium’에 도달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이것이 미시경제학의 세계이다. 왈라스와 반대로 접근한 사람은 케인스이다. 개별적인 주체는 고려하지 않는다. 이것이 거시경제학이다. 미인선발대회에서 심사위원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미인을 뽑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미인을 뽑는다고 하며 그 예를 든다. 주식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 둘의 이론을 묶은 사람이 폴 새뮤얼슨이다. 1915~2009, 미국의 신고전학파의 미시적 시장균형이론과 케인즈의 거시경제이론은 접목시켜 신고전파 종합이론이라는 학문체계를 만든다. 그런데 왈라스와 케인즈는 이론적으로 병립이 불가능하다. 하이에크의 제자인 밀턴 프리드먼(미국의 경제학자, 정부의 개입을 지양하고 민간 경제의 자율성을 주장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자)가 왈라스의 개인에 관한 이론에서 자연스럽게 거시경제학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이들을 시카고학파라고 한다. 신자유주의라 부르는 이들이다. 케인스의 이야기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말한 사람은 뒤르켐이다, 개인의 합이 전체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것을 방법론적 전체주의라 한다. 집단은 개인의 속성으로 설명불가능하고 사회전체를 연구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개인에서 전체로 접근하는 방식과 전체에서 개인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공존하는데 이는 문제는 개인과 사회의 구조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왈라스와 뒤르켐, 하이에크가 보여준 사회가 다르다. 개인에 대한 이해도 다르다.

 

구조주의자 중, 언어학에서 페르디낭 드 소쉬르와 인류학에서 레비-스트로스가 그 예이다. 소쉬르는 빠롤형식 랑그의미가 있는데 실제로 사회마다 빈번하게 변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한 사람이 촘스키 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은 뇌 기능을 비롯한 속성은 같지만 어느 사회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다른 속성을 갖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경제적 개인주의와 구조주의 양 극단에서 중간으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바로 문화적 접근이다. 미국은 다민족 국가이므로 민족개념으로 묶을 수 없다. 그래서 자신들의 문화로 민족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문화적 접근을 너무 강조하면 모든 문화는 제각기 나름의 문화 기능주의나 문화 상대주의에 봉착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문화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이론으로 나오기에 미국의 문화만이 특수한 것은 아닌 것이다.

 

구조와 개인을 함께 설명하기 위해 진화, 시간이라는 개념을 집어 넣는다. 같은 게임을 반복하면 어떻게 될까. 진화게임이론이 등장한다. (여기서 내가 든 생각은 사회와 개인을 함께 설명하는 것은 진화이다. 용산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을 하려면 상징될 장소가 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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