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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포이동 사람들,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by 아프로뒷태 2011. 7. 4.

 

 

 

【서울=뉴시스】손대선 기자 = 초등학생의 불장난으로 인해 발생한 화재로 잿더미가 된 강남구 개포동 판자촌(옛 포이동) 자리에 다시 건물을 지을 수 없게됐다. 서울 강남구(구청장 신연희)는 3일 재건마을 (개포동 1266) 주민들의 소실된 무허가 건물에 대한 복구 요구에 대해 불가 입장을 나타냈다. 강남구는 "시유지인 동 지역에 무허가 건물을 복구하는 것은 엄연히 건축법을 위반하는 행위로 행정기관으로서 불법행위를 지원하는 것은 불가하며 만일 자체적으로 복구를 강행할 경우 관련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강제철거 등 적정 조치를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12일 발생한 화재로 인해 96세대 중 74세대가 불에 탔다. 또 13개 사업장 중 6개 사업장이 전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천막과 마을회관에 임시로 숙소를 마련한 주민들은 화재이전 수준으로 건물을 복구하길 원하고 있다. 강남구는 임대주택 지원을 '당근책'으로 내놓고 있지만 포이동 주거복구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이를 거부하고 있다. 강남구는 임대주택 보증금 알선과 입주 희망세대의 지원을 담당할 TF팀을 꾸려놓는 등 주민이주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강남구 관계자는 "이들에게 제공될 임대주택은 소득수준이나
가구원수 등을 고려해 저소득 임대료 기준으로 다양한 크기의 주택이 마련됐다"며 "마을 주민들의 근본적인 주거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지원책인 만큼 하루 빨리 임대주택으로 입주해 안정된 생활을 하길 바라며, 전체 주민이 이주할 때까지 관내 직능단체 등과 함께 생필품 지원 등에도 힘쓰겠다"고 말했다.

 

 

잿더미에서 나온 비극의 결혼사진, 사연은…

[포토스케치] 주거 복구운동 들어간 포이동 '재건마을'

기사입력 2011-06-23 오전 7:59:21

 

30년 전, 거주가 불확실한 도시 빈민을 이주시켜 만든 포이동 '재건마을'. 이 사연 많은 판자촌에 화재가 난 지도 열흘이 넘었다. 주민대책위는 22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방치됐던 화재현장을 걷어내고 주거 복구운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강남구청제안임대주택 입주 거부의사도 분명히 했다.

이들은 화재 후 강남구청의 이주 권유가 주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서라며, 주민들이 흩어지면 마을은 재개발이 시작돼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화재 이후에도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고 대책위 가건물에서 지낸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의 말대로 서울시와 강남구청은 이 마을에 재개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들은 또 강남구청이 주민들을 임대아파트에 이주시키겠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실제로는 거주지에서 너무 멀거나 낙후된 지하 방 등으로 이주시키려 했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불 타 쓰러진 집을 치우면서 사람들은 참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구석에 가서 울다 오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잿더미에서 불에 타다 만 앨범을 찾아낸 한 주민은 사진신랑, 신부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연을 털어놓으며 울었다. 토지변상금을 내지 못해 고물 수집에 쓰던 자동차압류당한 김천복씨는 생계 수단을 잃고 지병인 진폐증까지 앓는 자신을 돌보느라 고생하던 아내에게 미안함을 전하고 2005년 6월 목을 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남편이 떠난 것에 충격을 받은 부인 임경숙씨도 두 아들을 남겨두고 한 달 후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제 장마다. 포이동 주민들에게 유난히 길고 지루할 올해 장마의 첫날의 풍경카메라에 담았다.


▲ 22일 진행된 포이동(지금의 개포4동) 주민들의 주거복구운동 돌입 기자회견 ⓒ프레시안(최형락)
▲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올림픽 때 경찰은 우리더러 낮에는 밖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우린 없었어야 할 존재였다. 서울의 고아원을 지방으로 내쫓던 그 시절 포이동 사람들은 여기에 강제수용돼 살았다" ⓒ프레시안(최형락)
▲ 억울함을 성토하면서 주민들은 모자를 눌러쓰고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래된 낙인은 여전히 유효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집이 불탔다고 삶마저 불타버린 것은 아니다. 그 삶을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 ⓒ프레시안(최형락)
▲ "아이의 불장난? 이곳을 불태운 건 국가의 비인간적 정책이었다" ⓒ프레시안(최형락)
▲ 각목 뼈대에 함석으로 지붕을 올린 화재현장은 쓰나미의 폐허처럼 평평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몇 권의 앨범이 발견됐다. 화재는 가난 가운데서도 아름다웠던 추억마저 앗아갔다. ⓒ프레시안(최형락)
▲ 김천복씨와 임경숙씨의 결혼사진. 토지변상금을 내지 못해 생계수단이던 자동차를 압류당한 김천복씨는 진폐증으로 고생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같은 해 임경숙씨도 남편이 간 길을 선택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김천복씨의 앨범을 발견한 이웃주민은 울음을 참지 못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많은 사람들이 부자의 땅으로 아는 강남은 부자만의 땅이 아니다. 판자촌이 가장 많은 곳이 강남이다. ⓒ프레시안(최형락)


 

잿더미 된 '마지막 판자촌'…"이젠 눈물도 말랐다"

[현장] 하루 아침에 집을 잃은 주민들 "재난지역 선포하라"

기사입력 2011-06-14 오전 7:42:27

 

엿가락처럼 구부러진 철제 기둥만이 잿더미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꽃과 상추 등을 키웠던 텃밭은 깨진 화분만이 예전 그 장소임을 알게 했다. 마을 어귀에 주차승용차트럭 등은 전소돼 앙상한 뼈다귀만 남아 있었다. 화마가 지나간 '포이동 266번지'는 사람이 산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게 잿더미로 변해있었다.

"마을 회관에서 자다가 새벽 4시께 잠이 오지 않아 집에, 아니 집이 있던 곳에 가봤죠.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어요. 새까맣게 탄
냉장고보일러 기름통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어요. 모든 게 재로 변해 있었어요."

서미자(54) 씨는 "
이젠 하도 울어서 눈물도 나지 않는다"며 "20년 넘게 살아온 집이 한순간에 이렇게 되니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싶다"고 혀를 찼다.

화마가 지나간 '포이동 266번지'

지난 12일 오후 4시께 발생한
화재강남구 개포동 1266번지(구 '포이동 266번지') 주민의 집 대부분이 전소됐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이번 화재로 이 곳에 살던 총 96가구(거주인원 189명) 중 75가구(100여 명)가 집을 잃었다. 자동차는 6대가 불에 탔다.

초등학생의 불장난으로 발생한 이번 화재는 판자촌 서쪽 목공소 인근에서 시작돼 판자촌 대부분에 퍼진 뒤에야 겨우 진화됐다. 집집마다 가지고 있던 부탄가스통과 보일러 기름통에 불이 붙어 대형 화재로 번졌다. (☞관련 기사 : '38억짜리' 강남 판자촌 포이동 266번지, 그곳에선…')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당국은 소방헬기 2대, 소방차 75대, 소방인력 218명을 동원해 화재 진압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지만 당장 이 지역 주민들은 생필품은 고사하고 잠잘 곳조차 없는 형편이다.
▲ 화재가 난 마을을 주민 한 명이 둘러보고 있다. ⓒ프레시안(허환주)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서미자 씨는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화장실을 갔다 온 딸이 갑자기 '불이 났다''며 황급히 깨웠다"며 "놀라서 나와 보니 멀리 떨어진 판자집에서 검은 연기가 나고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서미자 씨는 "워낙 황급히 나와서 말 그대로 몸만 빠져나왔다"며 "
협심증이 있어 약을 정기적으로 먹어야 하는데 그것도 챙기지 못했다"고 했다. 슬리퍼를 신고 있는 서 씨는 간편한 반바지와 흰 티를 입고 있었다.

인근
문구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딸은 14일까지 휴가를 낸 상태다. 입을 옷조차 없는 상태에서 출근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서 씨는 "딸아이는 근처 친구집에 있다"며 "당장 잘 곳도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한 숨을 내쉬었다.

딸은
등록금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 등을 하다 상황이 어려워져 결국 대학자퇴했다. 이후 문구점에 취직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다. 딸이 받는 월급 115만 원으로 두 식구가 생활을 하고 있었다.

화재와 함께 사라진 아내의 반지

화재로 인해 몸만 빠져나온 건 서 씨 모녀만이 아니었다. 박재만(가명·56) 씨는 "급히 나오느라 아무 것도 집에서 가지고 나오지 못했다"며 "아내에게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선물해준 다이아몬드 반지도 챙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 씨는 "나중에 화재가 진화된 뒤 집이 있던 장소에 가보니
다이아 반지도 집과 함께 불타 없어지고 반지 케이스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며 "어렵게 모은 돈으로 사준 반지인데 이렇게 없어지게 돼 안타깝다"고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김민수(가명·48) 씨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 씨의 판자집은 김 씨의 어머니와 자녀들을 포함해 총 여섯 식구가 살았다. 몸만 빠져 나온 김 씨는 아이들을 각각 고모집과 작은
아버지집에 보냈다.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자신은 '포이동 266번지' 마을회관으로 사용하는 컨테이너에서 하루를 보냈다.

집 없이 생활을 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김 씨는 "씻을 곳도 없어 마을회관 앞에 커다란
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사람들이 '고양이' 세수를 하고 있다"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나마 매 끼니는 대한적십자사에서 제공
해주고 있다. 속옷, 칫솔 등 간단한 생필품도 지급됐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대한적십자사에서 제공하는 식사도 14일까지 만이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끼니를 때워야 할지 막막한 포이동 주민들이다.

무엇보다 답답한 건
전기가 마을에 아예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화재로 인해 마을로 들어오는 전기선들이 다 녹았다. 이로 인해 지난밤에는 김민수 씨 어머니가 소방호스에 발이 걸려 넘어져 팔이 부러지는 사고도 발생했다. 마을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아 발생한 인재였다.
ⓒ프레시안(허환주)
"집은 사라졌지만 터전까지 사라지게 할 수 없다"

하지만 강남구청에서는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이다. 구호 물품조차 지급하지 않고 있다. 대신 구청에서는 구룡
초등학교 강당을 구호소로 지정하고 마을 주민들에게 이동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포이동을 벗어날 수 않겠다는 입장이다. 조철순 포이동266번지 사수대책위원회 위원장은 "구청에서는 우리를 이 곳에서 쫓아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며 "이번 화재를 기회로 아예 우리를 몰아내려 하고 있다"고 지정 구호소로 가지 않는 배경을 설명했다. (☞관련 기사:
'자활근로대 강제이주'의 생존자 조철순 씨가 살아온 이야기)

이 곳은 개포동으로 통합되기 전에 '포이동 266번지 재건마을'로 불렸다. 서울 강남에 구룡마을과 함께 남은 마지막 판자촌이다. 주민 189명이 얼기설기 엮은 판잣집에서 살아왔다.

주민들은 1981년 12월 정부가 강제 이주시킨 자활근로대 대원들과 동 청사 부지 거주민, 상이용사, 공공주차장 부지 거주민들이다. 강제 이주된 사람들은 30년간 이곳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강남구청은 1990년부터 주민들에게 '시유지 무단점유'라는 이유로 가구당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1억 원이 넘는 토지변상금을 부과했다.

한 마디로 빚지기 싫으면 나가라는 이야기다. 조 위원장은 "우리는 이 곳 삶의 자리에서 한 걸음도 물러날 수 없다"며 "집은 잿더미가 됐지만 다시 보금자리를 마련할 터전까지 잃을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 위원장은 "강남구청은 포이동266번지에 재난지역에 준하는 조치를 즉각 실시해야 한다"며 "우리는 그간 지켜온 우리 삶의 터전을 지킬 것"이라고 밝혔다.

ⓒ프레시안(허환주)

 

▲ 마을 회관 앞에 놓여 있는 대야. 여기서 주민들은 세면을 하고 있다. ⓒ프레시안(허환주)

ⓒ프레시안(허환주)

 

'38억짜리' 강남 판자촌 포이동 266번지, 그곳에선…

[르포] "강제 이주시킬 땐 언제고"…운명은 권익위에

서울 지하철 3호선 도곡역 부근의 타워팰리스를 지나 양재천 길을 따라 200m쯤 내려가다 보면 멀리서도 한 번에 눈에 띄는 판자촌이 보인다. 나무로 벽과 지붕만들고 그 위에 보온을 위해 비닐과 천 등으로 단열재를 덧씌웠다.

곳곳에는 "죽음의
고리, 토지 변상금 철회하라, 멈춰버린 삶, 인간답게 살고 싶다"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포이동 266번지.' 구획정리로 이제는 개포동으로 편입돼 포이동이란 이름은 공식문서에서는 사라졌다.

포이동 266번지

사람 한 명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 얼키설키 아흔여섯 개의 판자집을
연결하고 있었다. 골목은 흙바닥이어서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될 듯했다. 판자집들이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어 판자촌 안에는 한낮임에도 햇빛이 잘 들지 않았다.

▲ 위에서 내려다본 포이동 전경. 저 멀리 타워팰리스가 보인다. ⓒ프레시안(최형락)

마을회관으로 쓰이는 포이동 대책위원회 사무실 옆에 위치한 유병관(가명) 씨 판자집 문을 여니 5평 규모의 어두침침한 실내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신발을 벗는 곳이 세면을 하는 곳이었다. 의외로 방안에는 고급 용품들이 즐비했다. LCD TV를 비롯해 고급 원목 식탁, 드럼 세탁기, 대형 냉장고, 침대 등.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강남 고급
아파트 등에서 나오는 고물을 수거해 판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간혹 이렇게 좋은 물건이 나오면 팔지 않고 직접 자신들이 쓰죠. 이곳에는 이렇게 좋은 물건들이 많이 나와요. 잘 사는 사람들은 참 이상해. 이렇게 멀쩡한 물건을 버리고… 쯧."

김용금(63) 씨는 주름진
얼굴로 연신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기자에게 말을 붙였다. 김 씨는 이 곳에서 산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김 씨는 "이곳에는 현재 96가구가 살고 있다"며 "
전기수도요금은 공동으로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재래식 화장실 1개당 5~6가구가 이용하니 불편하다"며 "또한 판자집이 지어진지 오래돼 벌레들도 많다. 비가 오면 새는 곳도 있다"고 불편한 점을 말했다.

김 씨는 "하지만 지금은 그나마 처음 이곳에 올 때보다 나아졌다"고 웃었다. 김 씨는 "예전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사방천지가 '뻘'이었다"며 "그래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을 우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하곤 했다"고 말했다.

사람 잡는 토지 변상금

김 씨가 처음 이 곳으로 온 건 1981년이다. 1979년 박정희 정권은 거리를 미화한다는 명분으로 길거리에서 넝마주이(돌아다니며 헌
종이, 빈병 따위 돈이 될 것들을 줍는 사람), 도시빈민, 부랑인 등을 모아 '자활근로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서초동 정보사 뒷산에 차려진 시설에 강제 수용됐다. 김 씨도 포함됐다.

그러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1년
지역주민의 민원으로 시설에 수용돼 있던 450명의 사람들이 10개 지역으로 분산·배치됐다. 김 씨는 당시 45명과 함께 이곳 포이동 266번지에 강제 이주됐다. (이후 1996년까지 다른 지역 철거민 36가구, 상이용사 18가구가 이사를 와 총 99가구가 뿌리를 내렸다.)

수도 등 제반 시설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촛불을 켜놓고 비닐하우스에서 생활을 했다. 당시 강남 지역은 거의 논과 밭이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혐오감을 준다고 낮에는 외출조차 하지 못했다. 이들을 지키는 감독관, 즉 담당 경찰들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처음 이 곳에 왔을 때는 판자집도 없었다. 공동으로 살던 비닐
하우스가 삭아서 쓰러질 지경이 되자 판자 등을 구해와 판자집을 지었다.

생계는 빈병 등을 주워 파는 걸로 근근이 유지했다. 다른 곳으로 가려해도 여의치 않았다. 김용금 씨는 "사글세 방 하나 얻을 돈도 없는 상황에서 어디를 갈 수 있었겠냐"고 반문했다.

그렇게 이 곳에서 생활을 한지 10년째 되던 1990년께에 김 씨는 한 통의
고지서를 받았다. 요지는 정부의 토지를 무단으로 사용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 토지 변상금 통지서였다. 하지만 이를 내기가 어려웠다. 변상금이 300만 원이나 했기 때문이었다. 낼 돈도, 의지도 없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1989년 자활근로대는 해산됐다. 이 때 서울시는 공공부지 재활용과 도시 재정비 정책에 따라 토지구획정리를 하면서 기존에 이들이 살던 포이동 200-1번지를 포이동 266번지로 변경했고, "시 소유인 포이동 266번지를 불법점유했다"며 이들에게 국유지 무단점유 변상금을 낼 것을 요구했다. 정부에 의해 강제 이주돼 관리까지 받아온 이들이지만 시에서는 강제 이주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자활근로대 해산 이후부터 토지 변상금을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김 씨의 경우, 지금까지 쌓인 변상금만 해도 7000만 원이 넘는다. 연 평균 20%의
연체이자는 뺀 금액이다. 김 씨는 "이 곳을 벗어나려 해도 변상금이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이 곳 세대주는 몇 년 전까지는 자기 명의로 통장도 만들지 못했다. 구청에서 변상금을 안 낸다는 이유로 세대주의 모든 재산압류를 걸어놨기 때문이다.

2010년 7월 기준으로 주민들에게 부과된 총 변상금은 23억6100만 원, 가산금은 14억4000만 원으로 총 38억100만 원이다.

조철순 포이동 대책위원회 위원장은 "구청에서는 변상금을 부과하면 우리가 나갈 줄 알았겠지만, 나가면 변상금으로 인한
가압류 때문에 사글세도 하나 구하지 못한다. 어디를 어떻게 가란 말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주해온 99가구 중 여태껏 단 3가구만이 이 곳을 빠져나간 이유다.

또한 주변으로부터의 개발
압력도 거세다. 이들이 뿌리 내린 지 30년 동안 강산은 변해 뻘이었던 이 곳은 금싸라기 땅이 됐다. 근처 개포4동은 개별공시지가만 3.3㎡에 1000만 원에 육박한다.

 

연이어 두 아들을 잃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

누군들 이런 곳에서 살고 싶어 할까. 주민들 모두들 벗어나고 싶어 했다. 살기 힘든 것은 둘째 치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자손들에게는 자신이 받았던
손가락질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올해 서른한 살인 딸아이가 작년 12월에
결혼을 했어요. 쉽지가 않았죠. 아이는 학창시절 단 한 번도 집에 친구를 데려온 적이 없었어요. 부끄러워했던 거죠. 결혼 적령기에서도 남자를 만날 생각도 안 했어요. 포이동 출신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이었죠."

조 위원장은 "이런 건 비단 우리 아이만이 아니다"라며 "이곳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이 곳 출신인 걸 숨기려고 한다"고 말했다.

실제 포이동 인근
중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불과 300m도 되지 않는 거리를 굳이 멀리 돌아서 등교한다. 자신이 포이동 출신이라는 걸 들키기 싫어서다. 만약 자신이 포이동 출신이라는 걸 아이들이 알 경우, 거지라고 '왕따'를 당하기 일쑤다. 색안경을 끼고 이들을 바라보는 선생님도 있다고 한다.

그런 취급을 당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부모마음은 찢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집에서는 아이를 한 명 이상은 낳지 않았다고 한다. 김용금 씨도 올해 스물네 살 된 자식 하나다. 김 씨는 "마흔에 자식 하나 낳았다"며 "이런 생활을 하는 데 아이를 낳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가난을 물려주기도, 손가락질 당하는 걸 물려주기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 뒷편에 네모난 컨테이너 박스가 포이동 대책위 사무실이다. 꼭대기에는 여러 개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가난하다는 이유로 자식을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도 있었다. 조 위원장도 마찬가지였다. 조 위원장이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는 남편이 '자활근로대'인 걸 속였다. 사실을 안 건 결혼한 지 6개월이 지나서였다. 하지만 남편이 착하고 인간성이 좋아 그냥 살았다.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냐는 생각이었다. 포이동으로 결혼해 들어온 여자들은 대개 속아서 결혼을 했다고 한다.

조 위원장은 남편을 따라 포이동을 온 이듬해에 첫째 아이를 낳았다. 그때 생각한 건 아이를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돈을
모아 이 곳을 빠져나와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다.

"악착같이 일을 했어요. 조그마한 공간에서
고물 집을 하면서 갓난아기였던 첫째 아이를 큰 플라스틱 양동이에 놓은 뒤 모기장을 덮어 두고 일을 했어요. 하나 밖에 없는 조그마한 형광등에는 셀 수 없는 파리와 모기떼들이 득실거렸죠. 약을 한 번 뿌리면 빗자루로 수북이 쓸어 담아야 할 정도였죠."

그렇게 악착같이 일을 했지만 산다는 건 쉽지 않았다. 개구쟁이였던 둘째 아이가 4살이 되던 해, 고물을 싣고 들어오던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조 위원장은 "그 때 일만 생각하면
지금가슴이 미어진다"며 눈물을 닦았다.

이런 일이 조 위원장에게만 있던 건 아니다. 최근
간경화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는 한 명의 아들이 더 있었다. 병에 걸린 아들에게 변변한 치료 하나 받지 못하고 떠나보낸 것이 못내 마음이 아픈 어머니였다.

그런데 그런 것도 잠시, 하나 남은 아들 역시 간경화에 걸렸다. 치료만 받으면 살 수 있는 병인지라 어머니는 어떻게든 아들 치료비를 구하러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노쇠한 몸으로 무거운
리어카를 이끌고 폐품을 구하러 사방팔방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허사였다. 아들은 변변한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먼저 간 아들을 따라갔다. 두 아들을 연이어 잃은 어머니는 충격으로 치매에 걸려 아직도 아들 병원비를 구하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동네 곳곳을 누비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집의 경우, 아들이 스물여섯 살인데 덜컥 결핵에 걸렸다. 하지만 역시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병원에서 임종을 맞았다. 죽는 순간에도 아들은 혼자 남게 될 어머니가 걱정돼 병원에 어머니의 건강 진단을 부탁한 뒤 숨을 거뒀다.

병원에서는 죽은 아들의 소원이 안타까워 어머니의 건강 검진을 진행했다. 그 결과 어머니는 암
판정을 받았다.

건강세상네트워크가 2006년에 포이동 주민들을
조사한 결과 주민들 중 1년간 1일 이상 입원한 경험이 있는 경우가 27.3%(서울시민 평균 5.3%)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주민 중 의료급여 수급자는 10.5%(서울시민 평균 1.3%), 건강보험, 의료급여 등의 건강보장책이 없는 경우도 10.5%(서울시민 건강보장 미가입자 0.7%)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외에도 조사대상자 중 67.4%가
의료비 부담으로 의료이용을 못한 적이 있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의료비 부담으로 병을 키운 경험이 있느냐는 물음에도 40.9%가 '한두 번 정도', 31.8%가 '3회 이상'이라고 응답했다.

조 위원장은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사연 없는 사람들은 없다"며 "다들 가슴 속에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간다"고 전했다.

ⓒ프레시안(최형락)

권익위, 포이동 조사결과 5월 발표

아직도 이곳 주민 대부분은
타워팰리스 등에서 내놓은 폐품을 수거해 파는 돈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일부는 강남 대형 식당 등에서 서빙을 하거나 사무실 청소 등을 하기도 한다.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빠듯하다.

현재 '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은 토지변상금 철회와 점유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강제이주를 시켜놓고 변상금을 내라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또한 30년을 이 곳에서 살았으니 계속 이 곳에서 살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해달라는 것.

조 위원장은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서울시 소유"라며 "그래서
주택을 짓겠다느니, 주차장을 만들겠다는니, 그런 이야기가 늘 들려온다. 그럴 때면 언젠가는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주민들은 두려움에 떤다"고 말했다. 이들이 점유권을 주장하는 이유다.

과거에 비해 이들의 요구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는 눈치다. 지난 2월초 국민권익위원회가 서울시청,
강남구청 관계자와 이 곳을 방문해 주민들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국민권익위원회는 주민들이 총회를 통해 토지변상금 철회 및 점유권 보장 등의 요구사항을 정해 다시 만나자고 했고 주민들은 2월 16일, 다시 포이동을 방문한 국민권익위원회 관계자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조 위원장은 "권익위에서 우리
문제조사 중이다"며 "오는 5월께 조사 결과가 나올 예정"이라고 말했다. 조 위원장은 "우리 역시 우리가 강제 이주 당했다는 증거자료 등을 찾아서 권익위에 제출한 상태"라며 "구청이나 시에서도 권익위에서 전향적인 결과가 나올 경우, 따르겠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그간 서울시와 구청에서는 토지변상금과 점유권 인정을 두고 "선례가 없다", "(강제 이주 당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해왔었다. 조 위원장은 "우린 이 곳을 떠날 수도 없다"며 "권익위에서 부디 올바른 결정을 내려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포이동 판자촌 주민들, 강남구민 되나

인권위, 포이동 266번지 주민등록 전입 권고

기사입력 2008-08-19 오전 11:05:12

 

허가 받지 않은 건축물이라도 주민이 장기 거주했다면 주민등록 전입 조치를 해야 한다는 결정이 나왔다.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안경환)는 지난 18일
강남구청에 대해 "무허가 건축물이더라도 그 건물에 주민이 장기간 거주했다면 실제 거주지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주민등록 전입을 허용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강남구청은 그간 포이동 266번지 비닐 판자촌 주민들에 대한 주민등록전입을 무허가 건물 등의 이유로 거부해왔다. (☞관련 기사: "시청 앞에 유령이 나타났다", "계속 지금처럼 살도록 내버려 두면 좋겠어요")
  
  강남구청이 포이동 주민을 포기한 까닭은?
  
  포이동 266번지는 1981년 정부가 도시 빈민, 고아, 넝마주이들을
모아 조직한 자활근로대를 강제로 이주시켜 생겨난 마을이다. 1984년 이곳은 포이동 200-1번지라는 번지수를 배정받았고, 1988년에는 주소가 266번지로 변경됐다.
  
  이 과정에서 200-1번지로 등재된 기록도
말소된 주민들에 대해 강남구청은 주민등록 전입조치를 하지 않으면서 이 지역은 행정구역 상 사람이 살지 않는 '공터'로 분류됐다. 구청 측은 이곳이 1988년 이뤄진 구획정리사업에 따라 지번이 폐쇄되어 환지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점, 포이동 266번지도 서울시에서 토지구획 정리 사업에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마련한 땅(체비지)이라는 점 등을 들어 주민등록 등재를 거부하고 있다. 또 구청 측은 '불법 무허가 집단 지역'은 주민등록 법률상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강남구청이 주민등록 전입을 거부하는 실질적인 이유는 이곳이 도곡동
타워팰리스 옆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실제로 판자촌과 비닐하우스 촌을 이루고 있는 이곳은 주변 경관을 해친다며 민원이 많이 들어오는 곳이다.
  
  주민 등록이 되지 않은 주민들은 현재 자녀 취학 및
우편물 수령 등 각종 행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민등록이 안 된 탓에 그들은 졸지에 '불법 무단 점유자'가 돼 토지변상금을 부과받았다. 변상금을 낼 수 없는 주민을 물리적으로 몰아내려는 압박도 잇따랐고, 결국 지난 2004년 한 부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권위 "실제 거주지 전입신고 불허는 기본권 침해"
  
  이에 대해 인권위는 "주민등록법과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주민의 거주지가 적법한 건축물 및 시설물이거나 적법한 지역이어야 한다는 요건은 없다"고 밝혔다. 강남구청 측의 주장처럼 판자촌이나 비닐하우스 촌의 주거 형태가 주민등록 전입 거부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
  
  인권위는 "강남구가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 거주하는 곳에 전입신고를 불허한 것은
헌법 10조의 인간의 존엄성, 11조의 평등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이곳 거주민들의 실제 거주지에 주민등록 전입이 허용되도록 조치하라"고 권고했다.
  
  인권위는 "특히, 대통령 자문기구인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 지침에는 비닐하우스 등에 사는 주민들의 주민등록에 대한 적극적 조치가 명시돼 있다"며 "이런 지침에 대한 적극적인 실행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에 대해 강남구청 담당자는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인권위의 권고 조치는 법적 강제력을 갖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던 사안"이라며 "이 사안은 소송 문제는 아니지만, 유사한 소송 사례와 비교해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하나 기자

 

 

"시청 앞에 유령이 나타났다"

포이동 판자촌 주민들 "주민등록을 해 달라"

기사입력 2007-03-14 오후 7:20:03

"동사무소에 갔더니 저희 동네가 사람이 살지 않는 공터라더군요. 그럼 저희는 사람이 아닌 '유령'인가요?"

14일
서울시청 주위에 흰 천을 둘러쓴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이 사는 곳은 서울시 도곡동 타워팰리스 근처. 그런데 온 몸을 휘감은 흰 천 사이로 드러난 손마디가 거칠다. 대표적인 부자마을의 이웃 주민답지 않아 보인다. 그들은 누구일까?


타워팰리스 이웃 주민들이 유령 복장하고 나타난 이유?

그들은
포이동 266번지 비닐 판자촌 주민이다. 1981년 군사정권이 넝마주이, 부랑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면서 생겨난 마을이다. 바로 앞을 흐르는 양재천 건너 편 타워팰리스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곳인 셈이다. 행정당국은 이런 대조적 풍경을 불편해 했다. 그래서 그들을 내보내려 했다. '불법 무단 점유자'라는 것이다.

▲ 포이동 판자촌ⓒ인권오름


정부가 터를 잡고 이주시킨 주민들이 왜 갑자기 '불법 무단 점유자'가 됐을까? 그곳 주민들은 원래 주민등록조차 돼 있지 않았다. 가난을 상징하는 '포이동 주민'이라는 꼬리표가 싫었던 것. 그들이 주민등록번호를 갖게 된 것은 1984년부터였다. 당시 포이동 주민들을 관리하던 감독관의 강요에 의해서였다. 그렇게 등재된 주소는 포이동 200-1번지.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주민들을 관리하던 감독관들이 포이동을 떠났다. 그와 함께 주소도 포이동 200-1에서 266번지로 바뀌었다. 이와 함께 200-1번지로 등재된 기록도
말소됐는데, 강남구청은 주민등록 전입조치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지역은 행정구역 상 사람이 살지 않는 '공터'로 분류됐다.

그때부터 포이동 주민들은 주민등록도 되지 않은 채로 살아가야 했다. 그런데
전기, 수도요금은 꼬박꼬박 포이동 266번지로 날라 오고, 주민세는 포이동 200-1번지로 나온다. 세금만 내는 '유령' 주민이 된 셈이다.

14일 서울시청 앞에서 그들이 유령처럼 흰 천을 뒤집어쓰고 나타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서울시는 우리를 '유령'이 아닌 '포이동 266번지 주민'으로 인정하라" 이날 그들이 외친
구호다.

정부가 이주시킨 주민들이 '불법 무단 점유자'된 역설

▲ 유령 복장을 하고 인권위를 찾아가는 이들. ⓒ프레시안


이날 행사에 참가한 포이동266번지 주민대책위원회 조철순 위원장은 '주민등록이 안 된 주민'이 겪는 설움에 대해 절절히 호소했다. 단지 행정적 불편함만이 아니다. 주민등록이 안 된 탓에 그들은 졸지에 '공터'를 무단으로 점유하고 사는 이들이 됐다. '불법 무단 점유자'라는 것. 행정당국은 지난 1990년 그들에게 토지변상금을 부과했다. 공터를 무단으로 사용한 대가를 내라는 것이다. 변상금을 낼 수 없는 주민들을 물리적으로 몰아내려는 시도도 여러 번이었다. 결국 지난 2004년 압박을 견디지 못 한 한 부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 내용을 전하던 한 참가자는 "주민을 유령 취급한 행정당국이 결국 진짜 유령을 만들었다"며 거센 분노를 드러냈다.

서울시의회 앞에서 시작한 이날 행사는 이들이 국가인권위원회 앞까지 행진해 인권위에
진정서제출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날 행사는 포이동266번지 주민대책위원회, 빈철연, 전국노동자회, 사람연대 인연맺기운동본부, 대학생사람연대, 한국사회당 서울시당 등으로 구성된 '포이동 266번지 강제이주 인정과 거주권보장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주최했다.

 

"'주택보급률 100%'보다 '실질적 주거권'이 중요"

[인권오름]인권에 기초한 주거지표 개발해야

기사입력 2007-01-21 오후 2:00:19

 

자고 나면 올라가는 집값 못지않게, 자고 나면 쏟아지는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서 옥석을 가리기는 쉽지 않다. 이들 정책이 실제로 '주거권' 실현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 수 없고, 어떤 기준으로 입안되어 어떤 의견수렴 절차를 거쳐 결정되는지 확인할 길도 막막하다.
  
  이럴 때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인권의 한 영역인 '주거권'에 기초해 평가할 수 있는 틀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수한 정책 가운데 정부가 표방하는 '서민의 주거안정'을 점검하면서 주거권 실현을 위한 정책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까?
  
  인권지표, 권리이행을 위한 필수 요소
  
  일반적으로 사회지표란 "가치 및 목표와 관련하여 현재 우리가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계측하고, 특정한 정책내용을 평가하고 결정할 수 있는 통계 및 여타의 증거물"로 정의내릴 수 있다. 유엔은 인권 실현의 척도로서 '인권지표 개발'에 관한 논의를 오랫동안 진행해왔다.

▲ 최저주거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주거 상황은 주거권 침해로 연결된다. 서울 포이동 풍경. ⓒ인권오름

  국제인권규약을 비준한 당사국은 규약에서 보장하는 권리를 이행할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구체화하는 방안 중에 '인권지표'는 권리의 실질적인 이행을 위해 필요한 요소이다. 가령, 국가가 주거권 실현을 위해 필요한 정책의 목표를 세우고 시간단위계획(time-bound plan) 속에서 "언제, 어떻게 주거권 실현에 도달할 것인가에 관한 계획"을 작성하는 과정이 인권지표 개발에 해당한다.
  
  유엔의 논의에 비해 국내에서 주거권에 기초한 지표개발은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다. 그 이유는 사회권이 아직 규범적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구체적인 권리를 도출하는 작업이 미약하고, 이에 따른 국가의 책임을 묻는 작업 역시 미진한 탓이다.
  
  그럼에도 인권지표 개발은 △담론에 머물러 있는 권리를 구체화하고 △양적이고 질적인 권리침해를 드러낼 수 있으며 △국가가 이행해야 할 구체적인 책임을 목록화 하는 등 사회권 실태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의 틀을 제공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지표는 인권 정책으로 유도할 수 있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고, 인권적으로 가장 시급한 정책을 정부에 요구할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주거권에 기초해 유엔 사회권위원회의 주거권 일반논평을 중심으로 마련된 주거지표를 소개하고, 국내 주거통계가 갖는 한계를 비판하고자 한다.
  
  주거권 지표의 내용
  
  주거권 지표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주거권에 관한 유엔 사회권위원회의 '일반논평4 : 적절한 주거'와 '일반논평7 : 강제철거'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유엔 주거권
프로그램(UN Housing Rights Programme)의 주거권 모니터링(Monitoring Housing Rights, 2003)에서는 '적절한 주거'와 관련하여 '일반논평4'의 구성요소를 중심으로 아래와 같은 지표들을 제시하고 있다.
  
▲ ⓒ인권오름

  첫째, '점유의 안정성'은 점유 형태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강제 퇴거, 괴롭힘, 기타 위협으로부터 법적인 보호를 보장받는 것을 의미한다. (※점유 : 사물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 주거공간의 점유 형태는 임대(정부/개인), 공동주택, 자가, 임시주택 및 토지 또는 재산 점유의 비공식적 정주 등이 있다.)
  
  즉 점유의 법적 형태와 상관없이 주거 자체의 중요성을 존중하여 현재의 주거상태를 우선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이에 관한 지표로는 △도시
재개발·토지강제수용 등으로 주민들이 대안적인 조치 없이 강제철거의 위협 속에 놓여있는 사람의 수 △공공임대주택에서 임대료·관리비 등의 연체에 따른 퇴거자 수 △전반적인 주택가격 상승으로 인해 현재보다 하향 이주하는 사람 수 등이 점유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사례에 포함될 수 있다.
  
  둘째, '문화적 특성의 보호'란
주택 건축 양식, 사용된 건축재료건축 관련 정책이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하고 주거의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주거 개발과 현대화를 향해 추진되는 활동은 주거의 문화적 측면을 희생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문화적 측면에는 공동의 주거형태에 대한 경험과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의 관계도 포함된다.
  
  '문화적 특성의 보호'를 지표로
측정하는 일은 질(質)적인 성격이 강해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개발정책 과정에서 지역사회 공동체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를 양(量)적으로 측정하는 방식으로 주민의 재정착율을 고려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셋째, '최저 주거기준의 확보'에서는 '적절한 주거에 관한 기준설정'이 중요하다. 적절한 주거는 거주자에게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고 추위, 습기, 더위, 비, 바람, 기타
건강에 위협이 되는 요인, 해충으로부터 거주자를 보호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이에 관한 지표로는 주거의 질적 측면에서, △1인당 주거면적 변화 △3인 이상 단칸방 거주비율 △전체 주택 중 수세식
화장실, 부엌, 목욕시설 보급비율 및 그밖에 주택건설 및 인·허가에 있어서의 변화 등을 고려할 수 있다.
  
  넷째, '적절한 주거기반시설 및
서비스의 보장'은 건강, 안전, 편안함, 영양 상태에 필수적인 특정 시설을 갖추는 것을 의미한다.
  
  적절한 주거의 권리의 모든 수혜자는
천연자원, 공동자원, 안전한 식수, 요리·난방·조명에 필요한 에너지, 위생, 세면시설, 음식저장수단, 폐기물 처리시설, 하수시설, 비상 서비스에 대한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주거권은 단순히 물리적 주택에 한정하지 않고 관련한 기반시설 및 서비스가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
환경, 건강 및 위생, 에너지 부분에서의 권리를 포괄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지표로는 저소득층이 단전·단수를 경험하는 '전기, 물, 가스등에 대한 체납가구의 비율'등이 중요하게 검토될 수 있다.
  
  다섯째, '접근 가능성 및 취약계층의 우선보호'는 주거가 모든 사람에게 접근 가능해야 하고, 특히 권리가 쉽게 침해될 수 있는
집단에게 적절한 주거권의 보장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인, 아동, 장애인, 불치병환자, HIV·AIDS 감염인, 만성질환자, 자연재해의 피해자, 재해 다발 지역 거주자에게 주거영역에 대한 일정 정도의 우선순위가 보장되어야 한다. 또한 적절한 주거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임시적인 주거(판잣집, 비닐집, 움막, 동굴, 건설공사장 임시막사, 업소의 잠만 자는 방, 쪽방, 시설, 고시원)에 거처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지표에 포함될 수 있다.
  
  이에 관한 지표로는 △홈리스(주거가 불안정하고 적절한 주거권을 향유하지 못하는 사람)의 수와 홈리스에 대한 제도적 주거 보장 장치의 유무 △저소득층에 대한 공공 주택의 확보 및 접근 가능성의 여부 △주택 등
건물에 대하여 장애인 등 이동약자를 위한 편의시설의 법적 규정 여부가 중요하게 고려될 수 있다.
  
  여섯째, '경제적 적절성'은 개인 또는 가구가 주거에 쓰는 재정적
비용이 다른 기본적 생필품을 확보하고 충족시키는 것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수준을 의미한다. 당사국은 일반적으로 주거 관련 비용의 비율이 소득 수준에 적합하도록 보장하는 조치를 취하고, 주거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한 주택 보조금 및 주택 수요를 적절하게 반영하는 주택 금융의 형식과 그 수준을 확립해야 한다.
  
  이에 관한 지표로는 △연소득대비주택가격(PIR) △월소득대비임대료(RIR) △전체 공공부문임대주택의 비율 변화 및 가격변화 △거주가능 계층의 경제적 적절성 △주택 및 토지관련 지니계수의 추이 등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일곱째, '적당한 위치'는 적절한 주거공간이
직장, 의료서비스 기관, 학교, 탁아시설 및 기타 사회적 시설에 근접한 장소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출퇴근의 시간적, 재정적 비용이 빈곤가정의 지출에 있어서 과도한 부담을 줄 수 있는 대도시나 외곽지역에 모두 적용된다. 이와 관련된 지표로는 △영구임대주택의 위치 △통근거리 등의 변화 등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정부 주거관련 통계, 추상적 수준
  
  국내에서 정부 관련기관이 생산하는 주거관련지표는 대표적으로 <인구주택총
조사보고서> <사회통계조사보고서>, <주택업무편람>, <주택도시통계편람> 등 4가지 정도로 볼 수 있다.
  
  통계청이 5년마다 전수조사를 통해서 생산하는 <인구주
택총조사보고서>는 주거부문에서 사용 방수, 점유형태, 아파트·단독주택 등 주거시설형태, 면적, 부엌·화장실·목욕시설을 일컫는 편의시설 등을 담고 있다.
  
  <사회통계조사보고서>는 역시 통계청이 그 조사주체이기는 하지만, 표본조사를 통해 매년 생산하고 있는 지표이다. 주거부문에서 주택소유비율, 주택마련시기,
결혼 후 내 집 마련까지의 이사 회수, 원하는 주택형태, 원하는 입주형태, 현 주택 거주년 수, 현 주택의 상태, 주택에 대한 만족도 및 불만이유, 거주지역에 대한 만족도 및 불만이유 등을 조사해서 수록하고 있다.
  
  건설교통부가 매년 조사하여 발표하는 <주택업무편람>의 통계부문에는 주택보급률, 가구현황,
재고주택현황, 주택건설현황, 임대주택재고현황, 국민주택기금 등이 있다. 특히 '주거수준의 국제비교'에는 주택보급률, 자가점유율, 면적 등 협소한 기준만 비교평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대한
주택공사가 매년 생산하는 지표인 <주택도시통계편람>은 주택보급률, 주택현황, 아파트현황, 주택건설, 주택투자, 주택금융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 곧 철거될 예정이라고 알려진 서울의 미아 6지구 풍경ⓒ인권오름

  위의 항목들에서 보듯이 현재 국내에서 생산하고 있는 주거관련지표를 통해서는 국민이 실질적으로 어떠한 주거수준을 누리고 있는지 지극히 한정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에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주거취약집단의 주거 향상은 물론, 전체적인 주거수준 향상을 위한 우선적인 정책 방향의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하다. 주거에 관한 인구학적 분포와 주거의 양적 확대에 따른 변화의 추이는 살펴볼 수 있으나 주거권을 구성하는 요소에 기반한 질적 평가는 현행 지표 수준으로는 어림없다.
  
  가령, 정부가 생산한 통계 어디에도 강제퇴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점유의 안정성을 평가하는 지표는 없다.
  
  이 문제는 2001년 유엔 사회권위원회가 사회권규약 2차 보고서 심의 후 발표한 결론적 의견에서 "강제 철거되는 사람의 숫자와 강제 철거 발생 시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는 한국 정부가 생산하는 주거관련 지표가 얼마나 인권에 기초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최저주거기준을 통해 주거의 물리적 형태(침실, 등 방의 개수와 총주거면적/화장실, 목욕시설을 포함한 필수적인 설비)에 관한 측정을 시도하고는 있지만, 주거권 일반논평에 기초해 보았을 때 "적절한 주거('적절한 주거기반시설 및 서비스의 보장'과 '적절한 위치')"를 측정할 수 있는 지표항목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인권에 기초한 지표개발은 주거권의 양적·질적인 인권침해를 측정할 수 있는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자 당사국 의무이행의 잣대가 될 것이다.
  
  양적 주거 지표가 갖는 한계…공급에만 집착하게 해
  
  오랫동안 주거정책의 지표로 활용되었던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어서고 있지만, '주택보급률 100%'가 현실에서 주거권 실현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여실히 드러
나고 있다.
  
  양적 주택보급에 대한 통계만으로는 주택의 평등한 분배나 질적 조건 등과 같은 실제 주거권 실현에는 다가서지 못한다.
  
  오히려 현실에서의 앙상한 주거권 침해 현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정치적 효과만을 낳고 있을 뿐이다. 다른 문제에 대한 대책 없이 공급에만 집착하는 주거 정책을 넘어 실제 주거권 실현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인권적 주거권 지표가 필요하다.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발행하는 <
인권오름> 최근호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

 

 

 

"계속 지금처럼 살도록 내버려 두면 좋겠어요"

[인권오름] '강제이주의 생존자' 조철순 씨가 살아온 이야기

기사입력 2006-05-17 오후 5:11:07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진실이 기억에만 머물다 사라졌다. 1979년 박정희 정권이 만든 '자활근로대'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던 넝마주이, 도시빈민, 부랑인 등을 모아 '자활근로대'를
조직했다. 서울 서초동 정보사령부 뒷산에 강제수용 시설을 짓고, 자활근로대에 속한 이들을 그곳으로 강제이주시켰다. 그 뒤 들어선 전두환 정권은 이들을 다시 서울 포이동을 비롯한 10곳에 분산 수용했다.

이 때부터 포이동 266번지는 넝마주이 공동체의 생활 터전이 됐다. 이곳에 살면서
고물을 주워 생계를 유지하던 이들은 정부로부터 심한 통제를 받았다. 정부는 지도감독관을 파견해 이들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심지어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개최될 당시에는 이들을 낮에 외출조차 못 하게 했다. 외국 관광객이 보기에 안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서울 올림픽이 끝난 후 정부는 공식적으로 자활근로대를 해체시켰다. 하지만 고물을 주워 생계를 꾸려가던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은 살던 곳을 떠나서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

1990년 정부는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에게 토지변상금을 요구했다. 정부의 토지를 무료로 사용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이었다. 하루 하루의 생계도 근근히 이어가는 이들에게 그것은 살던 곳을 떠나라는 요구에 다름없었다. 주민들은 자신들을 강제로 이주시켜놓고, 이제와서 쫒아내는 법이 어디 있느냐며 강하게 반발했다. 주민들과 오랜 실랑이를 벌이던 강남구청은 올해 초 이들을 강제로 몰아냈다. 결국 이곳 주민들은 노숙자가 됐다.

그런데 과거 오갈 데 없는 빈민들이 살던 이 지역이 지금은 한국 최고의 부촌이 됐다. 포이동 266번지 바로 옆에 타워팰리스가 들어섰다. 강남구청이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에게 강경한 태도를 취한 것도 집값 하락을 우려한 인근 지역 주민들의 요구 때문이었다.

쫒겨났던 포이동 266번지 주민 중 일부가 계속 이 곳에 살게 해달라고 요구하며, 얼마 뒤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포이동 266번지 사수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인권운동사랑방의 두 활동가가 포이동 266번지를 찾아가 그곳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겼다.

〈프레시안〉은 두 활동가의 기록이 지금껏 당사자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주변인들의 삶을 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그대로 옮겨 소개한다. <편집자>

▲ 타워팰리스와 맞붙어 있는 포이동 판자촌.

타워팰리스 옆의 판자촌. 포이동 266번지는 으레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타워팰리스와 대비되어 이야기되곤 한다. 포이동 266번지를 찾아가기 위해 양재천의 아기자기한 돌다리 사이를 지나며, 늦봄 햇살의 즐거움을 만끽하다보면 잠시 고민의 무게가 덜어진다. 하지만 이런 즐거움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역사적 모순의 한복판에 도착했다. 포이동 266번지 사수대책위원회 건물에는 검붉은 저항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곳에서 사수대책위원장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앞서의 풍경이 계속 잔상으로 떠올랐다.

타워팰리스와 포이동. 이들의 공존이 보여주는 모순은 무엇인가? 무엇이 포이동 266번지에 살고 있는 이들을 고통으로 몰았는가? 고민의 깊이만큼 이야기는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포이동에서만 26년째

포이동 266번지 사수대책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는 조철순(47) 씨는 포이동에서만 26년째 살고 있다고 했다. 남편, 아들, 딸과 함께 가난을 벗어나고자 열심히 살아 온 엄마라고, 남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물건을 모아 다시 파는 '고물장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조 씨는 지금 입고 있는 겉옷도 주은 것이라며, 매우 쓸 만하다고 '으쓱' 어깨를 올려 보인다.
▲ 포이동에서 26년째 살아 온 조철순 씨.

어떻게 포이동으로 와서 살게 되었냐는 질문에 조철순 씨는 오래 전 기억을 떠올렸다.

"22살 때였지. 1980년 남편과
결혼하고 이듬해 첫 아이를 낳았는데, 물도 없고 전기도 없던 시절에 도저히 아이를 키울 수 없어서 친정이 있는 사당동에서 1년 정도 살았어요. 그러다 1982년부터 포이동에서 살았어요. 남편이 자활근로대였는데…. 속아서 결혼한 거죠. 소개해준 외사촌 동생도 (남편이 자활근로대인지) 몰랐어요. 6개월 지나서야 알고 나선 너무 속상했죠. 직업에 귀천은 없지만…. 아저씨가 사람은 착하고 인간성이 좋아요. 우리가 돈 때문에 만난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냥 살았어요. 여기로 결혼해 들어온 여자들은 대개 속아서 결혼한 거죠.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고 정도 들어서…. 그때는 무조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국가폭력을 기억하다

1968년경 조철순 씨의 남편은 많은 가난한 시골 사람들이 종종 그랬듯 스무 살 무렵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고 한다.

"시골에서 배는 고프고 형제는 많고 살 길은 없고…. 일가친척 하나 없는 서울에서 살다보니, 다리 밑에서 잠을 자다가 그때부터 넝마주의가 됐어요. 사람들이 고물 주워다가 파는 거 보고 자기도 시작한 거죠. 그러다 1979년 정부에서 자활의지를 키워주고
직업훈련도 시킨다며 강제로 수용을 했어요. 서초동 정보사 뒷산에 막사를 지어서 거기에다 수용한 거죠."

1979년 박정희 정권은 고아, 넝마주의, 도시빈민, 부랑인 등을 모아 '자활근로대'라는 조직을 만든다. 서울에서는 서초동 정보사 뒷산에 강제수용 시설을 설치했다. 유신 막바지 박정희 정권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소요를 일으키지 않도록 관리하고자 했다.

그러다 1981년 당시 서초동에 강제수용돼 있던 사람들은 지역주민의 민원 제기로 10개로 분산돼, 강남인근 지역으로 강제이주당한다. 그 후에도 정부는 지도감독관을 파견해 이들을 철저히 감시했다. 고물을 주워 감독관에게 주면 꼭 살 수 있을 만큼의 돈만 지급받아 근근이 살아가야 했다.
▲ 자활근로대 신상카드와 자활근로대원증.

자활근로대는 1990년경에야 공식적으로 사라진다. "전두환 정권 때는 자활근로대가 군대 내무반식으로 운영되어 막사가 설치되고 감독관들로부터 갖은 폭력을 당했어요. 그때는 잘못하다가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갔기 때문에 저항을 할 수도 없었어요. 물건 가져오면 분리작업은 우리가 하고, 좀 많이 가져오면 꼬치꼬치 묻고 좋은 거 주워오면 훔친 거 아니냐며 묻기도 했어요. 감독관이 있어서 도둑질도 안하고 나쁜 짓도 덜 했다는 거죠. 또 경찰의 '후리가리'(집중단속 기간 경찰이 범죄인의 수를 채우기 위해 자활근로대에 있는 사람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에 걸려 범죄자가 된 사람도 많아요. 경찰을 보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려요. 경찰이 오면 우리끼리 부르는 신호가 있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 소름이 끼쳐…. 직업훈련소 가서 기술도 배워봤는데 수료증 따도 취직이 안 됐어요. 전과자라는 낙인이 있으니까…."

1981년
항공사진으로 촬영한 포이동 일대를 보면, 포이동 거주민들이 정착한 비닐하우스를 제외하고는 길도 없는 논과 밭뿐이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물도 없고 기반시설도 없어서 자비로 개간을 했어요. 촛불을 켜놓고 살았지. 양재천 물 먹고 씻고 빨래하고…." 심지어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개최될 당시 이들은 낮에 외출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시안 게임 때에는 보기 안 좋다해 나가는 것도 자유롭지 못했죠. 그 때는 (낮에 일을 할 수 없어서) 양재시장에서 먹을 거나 생필품을 주어 와서 생계를 해결했다니까."

주소를 가지다, 다시 주소를 빼앗기다

강남구 포이동 266. 실제로 주민이 살고 있는 곳이지만, 현재 이곳은 동사무소 기록상
도서관 부지로 사용될 '공터'로 남아 있다.

1981년 이곳으로 강제이주를 당한 후 주민들은 넝마주이로 생존을 이어갔다. 그리고 1984년이 되자 주민들은 주민등록 등재를 하지 않으면 나중에 불이익이 올 수 있다는 한 감독관의 얘기에 동사무소에 주민등록을 등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등재된 주소가 포이동 200-1.

"(다른 사람들은) 1984년부터 주민등재를 시작했는데, 자식들이 가난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게 두려워 등재를 하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이곳을 떠날 거라는 생각에…. 그러다 1987년 큰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동사무소에 등재를 했어요."

1988년이 되자, 포이동 거주민을 관리하던 감독관들이 이곳을 떠나면서 자활근로대의 사표를 종용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주소도 포이동 200-1에서 266번지로 바뀌게 되었다. 주소가 바뀌면서 200-1번지로 등재된 기록도
말소되어 버렸다. 그때부터 포이동 거주민은 주민등록도 되지 않은 채로 살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전기, 수도요금은 꼬박꼬박 포이동 266번지로 날라 오고, 주민세는 포이동 200-1번지로 나온다. 사라진 주소가 세금을 받아낼 때에만 부활하는 꼴이다. 세금은 내면서도 향유할 수 있는 인권은 없는 것이 바로 이곳 철순 씨와 이웃들의 삶이다.
▲ 포이동 골목길. 살림에 필요한 빨래걸이며 항아리들이 이곳이 사람이 사는 곳임을 말해준다.

"자식들을 학교에서 받아주지도 않았어요. 부부가 죽게 된 경우도 있었어요. 남편이 진폐증을 앓고 있었는데 부인이 빌딩청소해서 버는 돈으로는 감당이 안됐어요. 아이들이 있었는데 가난하니까 모두 군대 가고…. 주민등록이 안 돼 있으니까 생활보호대상자 적용도 안됐어요. 그러다 남편이 운동화 끈으로 목을 매 죽었어요. 살기 어려우니까 그 부인이 아이들을 제대시켜달라고 부탁했지만 군대에선 들어주지도 않았어요. 그 후 그 부인도 자살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죠. 또 어떤 집은 아들이 간경화를 앓았는데, 어머니가 리어카로 종이 주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는데 결국 아들이 죽었어요. 이런저런 질병과 사고로 여기서 죽어나간 사람만 45명이에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지금도 포이동에 살고 있어요."

죽어간 이들을 기억하는 철순 씨의 떨리는 음성이 적막을 가로지른다. 철순 씨의 아픔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 부끄러움이 사각대는
연필의 메모를 타고 종이에 담긴다.

강제이주된 이들에게 물린 토지변상금

그런데 1990년경 정부는 이곳 거주민들에게 토지변상금이라는 한 장의 고지서를 보냈다. 현재 살고 있는 토지에 대한 변상금을 내라는 것이다. 정부가 이곳으로 강제로 이주시켜 놓고, 이제는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토지변상금은 눈덩이처럼 부풀어갔다.

"토지변상금 30여만 원을 내라고 그래요. 그때는 변상금이 두 달 치고 사용료와 벌금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냈어요. 그런데 그 다음해 10배가 넘는 3백만 원을 또 내래요. 알아보니 1년 치 변상금이라는 거야. 이런 행정이 어디 있느냐며 말하긴 했지만 크게 따지고
용기를 내며 싸우지는 못했어요. 변상금이 쌓여 지금은 거의 7천만 원 가까이 돼요. 저도 연체이자까지 포함하면 8천만 원이 있어요. 이 토지변상금이라는 게 사람 잡는 거예요. 먹고 살려고 중고차 사면 그게 압류되고, 여기를 뜨려고 전세금을 마련해도 그마저도 압류 당했어요. 3년 전에는 철거공고까지 났어요. 어떻게요? 살아야지. 그때부터 빈민해방철거민연합과 함께하기 시작했어요."

토지변상금도 변상금이지만, 포이동 거주민들을 가장 분노케 하는 것은 국가의 밀실행정과 무책임이다. 심지어 잘못을 덮기 위해 관련 자료를 없애고 전임자의 행위라며 나 몰라라 할 때에는 국가에 대한 불신이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국가가 우리를 못 배우고 못 산다고 무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거예요. 토지 변상금이나 주민등재 말소 같은 일들을 미리 우리에게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증거가 없다면서 전임자의 책임으로만 돌리고. 자기네들도 잘못한 거라고 인정하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공무원들을 믿지 않고 국가를 불신하고 있어요."

고단하지만 소중한 안식처

포이동 거주민들은 비닐
하우스밖에 없던 이곳을 개간해 살아갈 땅을 다지고 나무로 집을 짓고 길을 냈다. 강남의 부유하기 짝이 없는 고급 주택가 가운데 놓여 있는 '포이동'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들에게는 소중한 안식처이다.

"여기 생활은 서로 돕기 때문에 좋아요. 전기나 수도요금은 공동으로 내고. 98가구에 360~370여 명이 살고 있어요. 재래식
화장실 1개당 5~6가구가 이용하니까 불편하죠. 집들이 붙어 있으니까 불이라도 날까 불안하고. 집들이 오래 돼서 벌레들도 많아요. 비가 새는 데도 있고. 집도 좁아요. 평균 5-7평 될까. (불안해서) 밤에는 고단해도 불침번을 서야 해요."
▲ 골목 귀퉁이에서 키우는 화초처럼 고단한 삶에서도 희망은 피어난다.

얼마 전 빈곤사회연대 등이 주최한 주거실태 조사에서 포이동 266번지는 최저주거기준에도 부합하지 못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그럼에도 이곳은 거주민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삶의 보금자리이다. 갈 곳도 없고, 없는 사람들끼리 같이 살면서 서로를 돕고 보살피는 '연대'의 정신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조철순 씨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그렇게 비참하지도 않고, 가난이 곧 불행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부자 동네 옆에서 그들이 버리는 옷가지며 폐휴지 등을 거두며 살아가는 그들의 삶은 버려진 쓸 만한 물건을 다시 사용하는
친환경 노동으로 영위되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요구는 무척 소박하다.

"가난하지만 우리끼리는 아픔, 슬픔 위로해가며 살아요. 정도 들고 우리 고향 같고 동기간 같아요. 없지만 사람들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요. 없다고 남을 괴롭히지도 않아요.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해 주세요. 그냥 이대로 내버려 뒀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강남구청은 이들의 요구에 대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주민등록 등재와 토지변상금 철회라는 소박한 요구를 계속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강제로 정착시킬 때는 언제고, 국가의 잘못을 배상해도 모자랄 판에 이제 와서 변상금까지 지불하라니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다.

그녀를 만나고…

사회의 주변에서 살아 온 이들의 이야기는 공식적인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인가 포이동 사람들의 이야기는 기록이 아닌 기억에 의존해 기술하는 역사였다. 그들의 증언은 고아, 넝마, 집 없는 사람들이 70-80 년대 군부독재, 5.18, 86아시안게임/88올림픽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 속에서 경험했던 국가폭력의 실체를 보여준다.

포이동 거주민들이 살아 온 세월은 '국가폭력'의 역사이며 핍박의 세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남은 역사이기도 하다. 과거의 폭력이 많은 이들에게 잊혀졌다 해서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포이동 주민들을 억압하고 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토지변상금과 법적인 '존재없음' 상태는 현재를 살아가는 포이동 거주민들의 삶을 또 다른 질곡으로 몰아가는 폭력이다. 이같은 폭력을 제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고이고 썩은 웅덩이에 맑고 고운 빛깔의 물이 흐르게 하는 일과 마찬가지다. 이제는 국가가 우리 사회의 주변인들에게 휘둘러 온 폭력의 역사를 끝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다.

(이 글은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 제4호(2006년 5월 17일자)에도 실렸습니다.) /이재용,최은아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강남구엔 꼭 부자만 살아야 합니까 〈전태일통신 21〉노숙자를 양산하는 정부

기사입력 2006-02-08 오후 4:27:01

 

 

강남구 포이동 266번지. 약 1000여 평 남짓한 이 땅은 서울시 체비지입니다. 타워팰리스를 비롯해서 수십억 원이 넘는 고급아파트가 즐비한 강남의 한 구석입니다. 그리고 1998년부터 우리들 넝마공동체 식구들이 8년째 살고 있는 보금자리이기도 합니다. 아니 보금자리였습니다.
  
  아이엠에프 직후부터 이 세상 천지에 오갈 데 없는 노숙자, 아이엠에프 실직자, 고아, 병자 등이 모여 넝마공동체를 이루고 여기서 살았습니다. 삶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이 자포자기와 고통의 나날들 속에서도 비로소 실낱같은 삶의 희망을 찾아보자고 나선 공동체의 터전이었습니다.
  
  그 흔한 수돗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화장실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서 우리들 삶의 존엄성과 인간답게 살 권리를 넓혀가는, 너무나 소중한 우리들 스스로의 일터를 가꾸어 왔습니다. 결코 남에게 의존하거나 폐를 끼치지 않고 주변 아파트단지의 쓰레기들을 주워 자립 생활을 해 왔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결코 정부에 돈 한 푼, 빵 한 조각 요구하지 않았고, 외부의 후원금 하나 받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일해서 먹고 산다는 것, 그것이 우리들 넝마공동체의 자립 원칙이었습니다. 여기를 거쳐 자립에 성공해 나간 사람도 수천 명에 이릅니다.
  
“그래도 살긴 살아야 하는데….” 2005년 11월 29일 포이동 266번지의 보금자리가 철거된 뒤 2006년 1월 15일 그 인근의 강남구청 청소부들이 작업하는 공터로 들어갔다. 바로 이 공터 앞에서 넝마공동체 회원 몇 사람이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프레시안

  넝마공동체는 1976년도부터 거지들과 함께 살아 온 윤팔병 선생님이 1986년도에 넝마주이들과 함께 만든 생활자립 공동체입니다. 윤팔병 선생님은 동생인 윤구병(전 충북대 교수) 선생과 달리 일찍부터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다리 밑에서 스스로 자립하며 넝마주이로 줄기차게 살아 오신 분입니다. 그러면서 노숙자와 거지들을 스스로 자립생활을 해나가게끔 변화시키는 나눔과 섬김의 정신을 실천해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주위사람들의 강권으로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가게 공동대표도 맡고 있습니다.
  
  가진 게 없어도, 배운 게 없어도 사람이 사람
대접받는 사회, 내가 일한 만큼 정당한 댓가를 받는 사회, 그리하여 노동이 즐거움이 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그런 노동의 공동체, 삶의 공동체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공동체가 바로 넝마공동체입니다.
  
  얼마 전 정부는 겨울에는 단전 단수 등 비인도적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발표가 있자마자 강남구청은 영하 10도로 강추위가 몰아친 한겨울 새벽 6시에 우리들의 소중한 보금자리인
컨테이너들을 강제로 기습철거해 버렸습니다. 용역업체 직원 수백 명과 중장비, 구급차, 소방차 등을 동원해 마치 적을 섬멸하는 군사작전을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동안 생활해 온 컨테이너를 빼앗기고 노숙한 지 사흘째이던 2006년 1월 18일 공터의 한쪽에 잠자리와 식당을 마련했다(좌), 노숙 8일째이던 2006년 1월 23일 30~40명의 구청직원들이 나와 2차 강제철거를 강행했다. 그 뒤 다시 살아가기 위해 2월 6일 텐트 5개 동을 설치했다(중), 넝마공동체 회원들은 추위를 벗 삼아 텐트 속에서 하룻밤을 새우곤 한다. 강남 호화아파트의 불빛은 찬란한 가운데 이들은 여저히 살을 파고드는 겨울바람과 싸우고 있다(우). ⓒ프레시안

  우리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항하면 자칫 누군가 다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저 멀거니 눈 앞에서 우리들의 살림살이와 컨테이너가 해체되고 실려나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쳐다보아야만 했습니다. 아무리 행정대집행이라고 하지만 엄연히 피땀 흘려 한푼두푼 모은 우리 재산은 그렇게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허탈했습니다. 허탈한 정도를 넘어서, 암담한 정도를 넘어서, 우리들
심장이 비수로 찔린 것만 같았습니다. 모두 합하면 1억 원이 넘습니다만 그것들은 단순히 돈으로만 환산할 수 없는 우리들 자신의 분신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들 일터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유일한 희망의 근거였습니다.
  
  강남구청은 주변 아파트에서 보기 흉하다는 민원이 들어온다고 이유를 내겁니다만, 우리는 그것이 궁색한 억지 주장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파트 쓰레기를 치우고
재활용하는 우리들이 없다면 그 처리비용은 고스란히 세금으로 충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보기 흉한 것이 아니라, 부자들만 산다는 강남에서 그래도 더불어 사는 따뜻함을 보이며 나름의 떳떳하고도 아름다운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냉혹하고 힘들어도 넝마공동체 식구들끼리 격려하며 미래를 꿈꾼다. 2차 철거 전 공터에서 모닥불을 피우며 오후 한때를 지낸다. 가운데 잠바 차림이 윤팔병 대표. ⓒ프레시안  

  처음에 우리는 언론에 알리지도 않고 순순히 떠났습니다. 우리들은 한 평에 수천만 원이 넘는 그 땅에 욕심이 있는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더구나 수십억 원대의 아파트에 살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고물을 수집하여 먹고 살 수 있게끔 최소한의 생활터전을 약속한 것을 이행해 달라는 것입니다. 강남구청은 우리들에게 다른 생활 공간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우리들은 이 추운 겨울 오갈 데 없이 다시 노숙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노숙자를 해결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노숙자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며칠전 서울시는 서울시 산하
공사 현장 149곳에 노숙자들을 600여 명이나 대거 배치해 자활을 돕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귀를 의심하고 어리둥절했습니다. 강남구청은 서울시가 아닌 것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터전을 되찾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물론 철저하게 평화적인 방식으로 말입니다. 우리들의 철거일지에는 벌써 네 번째 철거를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벌레가 아닙니다. 제발 함께 살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십시요. 우리에게 자립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주십시요. 우리는 강남구청장도 주리라고 약속했던
대토를 원할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항변입니다. 부탁합니다.
  
  그래도 한때 정들었던 포이동 266번지. 현재 이곳은 하루아침에
아스팔트가 까맣게 깔리고 연두색 철제 울타리가 둘러쳐진 공용주차장으로 변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2006년 새해, 넝마공동체 식구들이 이렇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춥고 힘겨운 이곳에도 명절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한 회원이 초라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니의 차례상을 준비하고 있다(좌), 2차 철거 전 임시 식당에서 공동체의 여성회원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우). ⓒ프레시안

/이준형 넝마공동체 사무국장

 

강남구 “무허가건물 복구 불가” [한겨레] 임지선 기자

자체복구땐 강제철거 방침 주민들 “희망이 없다” 분노

 

 

 

» 포이동 재건마을, 장맛비에 천막생활 서러운데…지난달 12일 화재로 수십가구의 집이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한 서울 강남구 ‘포이동 266번지 재건마을’ 주민들이 3일 오후 임시 거처에서 밥을 지어 함께 먹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서울 강남구가 지난달 12일 발생한 화재로 마을의 96가구 중 74가구가 불에 탄 ‘포이동 266번지(현 개포동 1266번지) 재건마을’을 복구하지 않기로 했다. 강남구는 3일 보도자료를 내어 “주민들이 (불에 탄) 무허가 건물의 복구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를 들어주는 것은 건축법을 위반하는 행위”라며 “만일 주민들이 자체 복구를 강행할 경우 강제철거 등 조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강남구는 “임대주택 입주 희망 여부 조사조차 ‘포이동 주거복구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의 방해로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며 “외부인이 아닌 주민들과 논의할 수 있기를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화재 발생 이후 천막과 마을회관에 임시로 기거하며 임대주택 입주를 거부하고 있는 주민들은 강남구의 발표에 반발했다. 주민들은 “구청이 서울 각지에 있는 매입 임대주택의 리스트 하나를 달랑 가져와 ‘임대주택을 제공할 테니 동의하라’고 했다”며 “임대주택 비용조차 마련할 수 없는 주민들에게 구청이 내놓은 대책은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김윤영 공대위 간사는 “자다가 천막이 무너지는 등 열악한 상황에서도 주민들은 마을을 재건하겠다는 일념으로 노력하고 있다”며 “서울시와 강남구가 지난 9년 동안 포이동 재건마을을 주거지로 인정해달라는 주민들의 투쟁을 도와 온 대학생과 시민사회단체를 외부세력으로 규정하고 마치 화재 이후 주민들이 엉뚱한 요구를 하는 듯 몰아가 황당하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3일 저녁 마을에서 주점과 희망문화제를 연 데 이어 4일 오후 1시 서울시청 앞에서 마을 재건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계획이다. 포이동 주민 돕기 모금에는 이날까지 4000여만원이 모였고, 주민들은 화재 현장에서 수집한 고물을 팔아 2600여만원의 복구비용도 마련한 상태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포이동 판자촌 ‘눈물에 젖은 삽’

[한겨레] 박현정 기자

 

주민들 스스로 화재복구
시민단체 오늘 후원행사

» 포이동 주민들 빗속 복구 지난 12일 화재로 전체 96가구 중 75가구가 불에 탄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포이동 266번지 재건마을’ 주민들이 24일 오후 잿더미 속에서 옷가지 등 쓸 만한 물건을 찾는 등 복구작업을 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서울 강남구 ‘포이동 266번지(현 개포동 1266번지) 재건마을’ 주민인 서미자(54)씨는 비가 내리던 24일,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잿더미가 된 자신의 집터에서 고철 등을 줍고 있었다. 스물한살 때 자활근로대 남편과 결혼한 서씨는 1981년 추운 어느날 새벽, 트럭에 태워져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던 이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정부는 자활근로대를 서초동 정보사 뒷산에 집단수용했다 다시 포이동으로 이주시켰다. 주민들은 자재를 하나하나 손으로 주워 모아 판잣집을 지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켰고, 수도시설이 없어 물을 길어와야 했다. 서씨는 이날 폐허에서 반쯤 타버린 앨범을 찾아냈다. 2004년 잇따라 목숨을 끊은 50대 부부 사진이 있었다. 서씨와 함께 포이동에 들어온 이 부부는 고물수집 등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다 토지변상금을 부과받으면서 빚더미에 올랐다. 사진을 물끄러미 보던 서씨는 “지금이 20년 전보다 더 비참하다”며 “옛날엔 젊었고, 희망이 있었다”고 한숨 쉬었다.

» 지난 12일 화재로 전체 96가구 중 75가구가 불에 탄 서울 강남구 ‘포이동 266번지(현 개포동 1266번지) 재건마을’에서 24일 오후 한 주민이 잿더미 속에서 고철을 찾아 한곳으로 모으는 등 복구작업을 하고 있다. 사회당 서울시당, 행동하는 의사회 등이 모인 ‘사람연대’는 25일 ‘포이동 주거 복구를 위한 연대의 날’ 행사를 열어 주민들의 복구작업을 도울 예정이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지난 12일 화재로 삶의 터전을 잃은 판자촌 주민들이 빗속에서도 마을 복구를 위해 직접 삽을 들었다. 강남구청에선 이재민들에게 최장 10년을 살 수 있는 임대주택 제공을 제안했지만, 주민들은 이를 거부했다. 임대료·보증금조차 마련할 형편이 안 되는 홀몸노인이 많은데다, 구청이 ‘시유지 무단점유’를 이유로 1990년부터 토지변상금을 부과하고 있어 임대주택에 들어가도 이를 압류당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현재 주민들은 컨테이너 박스를 쌓아 만든 마을회관에서 잠을 자고, 직접 밥을 지어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고된 작업 뒤 밥을 먹는 곳은 비바람만 겨우 막는 비닐천막이다.

모자란 일손을 보태고 주민들의 시름을 덜어주는 발걸음도 이어지고 있다. 사회당 서울시당, 행동하는 의사회 등이 모인 ‘사람연대’는 25일 ‘포이동 주거 복구를 위한 연대의 날’ 행사를 한다. 회원 50여명이 타다 남은 물건들을 치우고 식사도 준비할 예정이다. 일요일인 26일에는 서울 을지로 향린교회 목사와 신도들이 이곳을 찾아 현장예배를 연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화마에 잿더미로 변한 ‘포이동 판자촌’ 30년 터전 잃은 주민들 ‘쫓겨나나’ 불안감

마을밖 화재로 75가구 삼켜 이재민들 천막 등에서 밤새 “철거 두려워 조바심냈는데”

» 폐기물 야적장에서 일어난 불로 삶의 터전을 잃은 노인들이 13일 오전 서울 강남구 포이동 1226번지 재건마을 화재 현장에서 강남구와 서울시에 재난지역 지정에 준하는 조처와 주거권 등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지난 12일 화재로 판자촌 대부분이 잿더미가 된 ‘포이동 266번지(현 개포동 1266번지) 재건마을’ 이재민들은 13일에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강남구청이 지정한 구호소인 구룡초등학교 강당도 마다하고 컨테이너로 만든 마을회관과 천막에서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샜다고 했다. 그동안 퇴거압력에도 꿋꿋이 버텨왔지만, 한순간 화마에 폐허가 된 삶의 터전에서 이제 영영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수서경찰서는 이날 마을 어귀 목공소 인근에서 나무젓가락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 스티로폼에 올려놓아 불을 낸 혐의(현주건조물방화)로 초등학생 김아무개(9)군을 붙잡아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불은 마을 전체 96가구 중 75가구를 집어삼켰다. 나머지 집들도 화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붕이 내려앉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판자촌 주민들에게 불은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늘 불이 날까봐 염려하며 살았다. 집집마다 소화기를 들여놓고, 대피훈련도 했다. 큰불에도 다친 사람이 없는 건 그나마 그 덕분이었다.

주민들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폐허가 된 마을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밝혔다. 마을을 비운 사이 판자촌이 철거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두려움에는 이 마을의 지난한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1981년 도시빈민·부랑인 등으로 구성된 6자활근로대 일부를 이 지역에 강제이주시켰다. 자활근로대는 박정희 정권이 거리 미화를 명분으로 만든 것이다. 그 뒤 개포4동 동사무소와 인근 공공주차장 신축 부지에 살던 이들도 이곳으로 강제이주됐다. 그러나 강남구청은 1990년부터 주민들에게 ‘시유지 무단점유’라는 이유로 가구당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이 넘는 토지변상금을 부과했다. 구역정리를 하면서 포이동 200-1번지를 266번지로 변경한 뒤 주민등록 주소를 옮겨주지 않았던 탓이다. 올해 들어 이를 철회할 듯한 움직임이 있었지만, 확답을 미룬 상황이었다. 포이동대책위원회 조철순 위원장은 “어렵게 일군 삶의 터전이기에 서울시와 강남구청에 주거환경 개선을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묵살당했다”고 말했다.

이재민 200여명은 옷 한벌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밖으로 뛰어나온 처지다. 이들은 의류나 위생용품이 부족하다고 호소했다. 마을 공부방 일을 돕고 있는 신지혜(24)씨는 “공부방 아이들 13명 중 8~9명이 집도 잃고 교복·신발도 없어 오늘 학교도 못 갔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방 두칸에서 다섯 식구가 함께 살고 있다는 김미선(42)씨는 11살 난 막내 돌반지를 챙겨 오지 못한 게 너무 서글프다고 했다. “아기한테 다른 것은 몰라도 돌반지만큼은 챙겨주려고, 형편이 어려워도 손대지 않고 장롱 깊숙이 넣어둔 건데….”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포이동 재건마을 화재…인명피해 없어 [한겨레]

포이동 재건마을 화재인명피해 없어 경찰 헬기가 12일 오후 서울 강남구 포이동 1226번지 재건마을 화재 현장에 출동해 물을 뿌리고 있다. 이날 오후 4시56분께 폐기물 야적장에서 일어난 불은 인근 판잣집 등에 옮겨붙어 1억여원의 재산 피해(소방서 추산)를 낸 뒤 3시간 남짓 만에 잡혔다. 놀란 주민 100여명이 한때 대피하기도 했지만, 인명 피해는 나지 않았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사진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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